예술은 아픔을 치유하고 감각을 일깨우며 생각을 새롭게 한다.


[본문발췌]

예술의 일곱 가지 기능 : 기억, 희망, 슬픔, 균형회복, 자기이해, 성장, 감상
 
 
좋은 작품은  중요한 핵심을 못으로 박아 강조하는 반면, 나쁜 작품은 우리에게 어떤 생각을  명백히 일깨운다 해도 본질이 어디론가 새어나가는 것을 막지 못한다.
 

미술은 경험을 보존하는 방식이며, 우리 주변에는 일시적이고 아름다운 경험이 많은데, 그런 경험을 마음에 담으려면 도움이 필요하다.
 

유쾌함은 멋진 성과이고, 희망은 축하할 일이다. 낙천주의가 중요하다면, 이는 우리가 낙천적이기 때문이다. 이 노력은 성공의  중요한 요인이다. 이 진실은 재능을 좋은 인생의 기본 조건으로  보는 엘리트적 관점과 정면으로 충돌하지만, 많은 경우에 성공과 실패는 다름아닌, 무엇이 가능한가에 대한 우리의 감각 그리고 자신의 정당한 몫을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해 쏟아부을 수 있는 에너지로 가름된다. 우리의 운명은 재능의 부족이 아니라 희망의 부재가 결정할 수 있다.
 

인생의 고난을 깨닫게 될 때, 아름다움은 더 깊이 이해된다.
 
 
예술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의외로 중요한 기능들 중 하나는, 고통을 보다 잘 견디는 법을 가르쳐준다는 데 있다.
예술에서 승화는 천하고 보잘것없는 경험이 고상하고 세련된 경험으로 변환되는 심리적 변형 과정을 가리킨다. 슬픔이 예술을 만날 때 일어날 수 있는 바로 그것이다. 승화란 고통이 아름다움으로 변형되는 과정이다. 많은 경우, 슬픈 일들이 더 슬퍼지는 건 우리가 혼자 슬픔을 견디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예술은 인간의 조건인 고난을 웅대하고 진지하게 볼 수 있는  유리한 관점을 제공한다.
 

일상적인 삶에서 숭고에 대한 자각은 대게 찰나에 이루어지고 무작위로 찾아온다. 예술은 그러한 무작위와 우연을 줄여준다. 예술은 믿을 만한 기초 위에서 유용한 경험을 이끌어내는 도구이며, 그래서 우리가 슬픔에 잠겨 있다가도 고개를 들 수만 있다면 언제나 숭고의 경험에 계속해서 다가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예술은 우리가 잃어버린 성향을 농축된 형태로 내놓아, 우리의 기울어진 자아의 적당한 균형을 회복시켜준다. 예술은 인성의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우리를 보다 도덕적으로 만들어준다.


예술에는 우리 자신을 이해하고, 그런 뒤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 타인과 소통하게 해주는 이 능력이 있기 때문에, 대체로 우리는  주변에 어떤 예술작품을 둘 것인가에 신경을 많이 쓴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모든 장소, 모든 시대에 우리 앞에 진열되어 있진 않다. 이질적인 것과의 연결점을 발견할 때 비로소 우리는 성장할 수 있다.


예술은 우리가 놓치기 쉬운 모든 것을 전면에 내놓음으로써 바로 그 선입견에 당당히 맞선다. 예술은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인생을 이끌어야 할 때  인생의 진정한 가치를 일깨워줄 수 있다.


예술의 핵심은 무엇인가? 예술과 관계를 맺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예술이 우리를 도와 더 나은 삶, 더 나은 자아로 이끌어준다는 확신이다. 예술은 기념하고, 희망을 주고, 고통에 존엄하게 공감하도록 하고, 균형 회복과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자기 이해와 소통을 돕고, 감상을 고취하고 그 지평을 넓히고자 할 것이다. 

 

우리가 그 작품을 좋게 보는 이유는 그 작품이 우리의 영혼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예술에서 무언가를 얻었다면 이는 그 예술을 이해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을 깊이 있게 탐구했음을 의미할  것이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에 대응해 언제라도 우리 자신을 들여다볼 줄 알아야 한다. 예술은 그 자체로 좋거나 나쁘게 여겨지지 않는다. 망각, 희망의 소실, 존엄 추구, 자기 이해의 어려움, 사랑에 대한 갈망 같은 우리의 약점을 얼마나 보완해주느냐에 따라 우리에게 좋거나 나쁘게 여겨질 것이다. 따라서 예술작품에 다가가기에 앞서 자신의 성격을 알고, 자신이 무엇을 위안하고 되찾으려 하는지 안다면 유용할 것이다. 


사랑은 당연히 인생의 큰 즐거움이어야 하지만,  나와 가장 쉽게 상처를 주고받는 사람은 다름 아닌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다. 


위대한 예술에는 우리의 감각을 일깨우는 힘이 있다. 


사랑할 줄 아는 건 감탄하는 것과 다른다. 감탄에는 왕성한 상상력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능력이 필요치 않다. 문제는 두 사람이 삶을 공유하려 할 때 고개를 든다. 집, 자녀, 사업 및 가계 운영을, 처음에 멀리서 봤을 땐 감탄스러웠던 사람과 공유해야 한다. 이럴 때 우리에게는 저절로 툭 튀어나오는 법이 거의 없고, 연습을 안하면 좀처럼 도움이 안 되는 자질이 필요하다. 상대방의 말에 예의바르게 귀기울이는 능력, 인내심, 호기심, 회복력, 관능, 이성과 같은 것 말이다. 예술은 그런 자질들로 인도하는 유능한 길잡이다. 성공한 예술작품의 요소들이 관계를 아름답게 발전시키는 데 필요한 요소들과 유사하기 때문에, 예술작품을 찬찬히 보다보면 더 나은 연인으로 거듭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는 다 그럴 만한 근거가 있다. 


우리는 판 데르 휘스가 붓꽃의 그림자에 세심하게 마음을 썻듯, 우리 성격의 미세한 면, 신체의 움직임, 엉뚱한 지리학적 이해에도 그렇게 마음을 써줄 사람을 찾게되길 갈망한다. 


리처드 롱의 물줄기들은 사랑의 현실적인 유지와 성장에 기본이 되는 특질, 즉 좋은 연인 관계는 인내에 달려 있음을 가르쳐 준다. 우리는 즉각적인 만족(말다툼에서 이기기, 상대방에게 죄책감 안기기, 내 고집대로 하기)을 버려야 한다. 그런 포기들이 물방울처럼 모이고 쌓일 때 연인들은 그들의 순례를 마칠 수 있다. 


호기심은 무지를 진지하게 여기고, 모르는 상태를 인정할 만큼 자신만만하다. 호기심은 모름을 인식하고,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 팔을 걷어붙인다. 모든 연인 관계에는 상대방이 나를 올바르게 탐사하기보다는 오해하고 마음대로 상상해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숨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가 겪는 어려움과 문제점을 아는 척하면서 엉뚱한 곳을 짚을 때 우리는 심란해진다. 상대방은 진실을 알려 하지 않고, 내가 겪는 상황의 본질을 세심히, 애정을 기울여 알려하지 않는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경험에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우리 앞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바라보고, 세계의 다양성과 개체성을 존중하는 태도가 얼마나 가치 있는지 가르쳐준다. 


관능은 촉감과 움직임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즐기는 것이다. 


이성(또는 좀더 부드럽게 표현하면 합리성)은 좋은 연인이 되는 것과 무관하고 심지어 그에 반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는 우리가 사랑을 지적 성취라기보다 하나의 감정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합리적이거나 이성적인 사람은 단지 논리에 집중하는 사람이 아니다. 차갑고 기계적인 방식으로, 배려와 갈망을 계산과 분석으로 대체하는 사람도 아니다. 합리적이라는 건 정확한 설명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따라서 합리적인 사람은 쉽게 화를 내지 않고, 속단하지 않는다. 인간관계에서 단단하고 건설적인 주체가 되려면 이성이 필요하다는 것, 정확한 사고, 신중한 주장, 명확한 설명, 여러 요소가 어떻게 조직되어 있는지 이해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친한 사이에서는 고충과 좌절을 이야기하는 방식이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된다. 감정적인 상황에서는 고통의 책임을 가장 뚜렷한 대상에게 전가해버리고 싶은 마음이 쉽게 생겨난다. 배우자 또는 부모가 그런 대상이다. 


연인 관계에서 나타나는 대단히 우울한 양상은, 처음 알았을 땐 더없이 감사하다고 느꼈던 사람에게 너무사 빨리 익숙해진다는 사실이다. 손목이나 어깨만으로도 우리를 흥분시켰던 사람이 눈앞에 벌거벗고 누워 있어도 무덤덤하기만 하다. 우리는 겹겹이 쌓인 습관과 타성 밑에서 선하고 아름다운 면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여행은 장대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에 따르는 위험을 알아야 하고, 위험에 대처하는 능력에 경의를 표해야 한다. 예술의 도움으로 우리는 어려움에 대한 인식과 소중한 것을 거머쥐는 성공 사이에 연결점이 있음을 파악한다. 우리의 문화는 빙하의 바다를 항해할 때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대단히 솔직하면서도, 사랑에 관해서라면 더없이 감상적으로 변한다는 점에서 너무 편향적이다. 예술은 사랑의 교훈을 담은 이미지를  창조하고 우리의 마음 앞에 붙들어놓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랑에서 생각, 습관, 태도, 통찰은 항해에서 닻, 육분의, 기타 장비에 해당한다. 미래의 이상적인 문화에서는 먼저 올바른 장비를 손에 넣고 그 사용법을 익히지 않으면 누구도 사랑의 들판에 나서도록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자연은 생명의 동인이자 죽음으로 이끄는 힘이다. 자연의 순리대로 살 필요가 있다고 말할 때, 이는 우리를 젊음의 열정과 햇빛의 아름다움에 내맡기는 것은 물론이고, 가을과 내리막을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 함을 의미한다. 


삶의 문제들은 오늘, 우리 앞에 펼쳐진 며칠, 그리고 강렬하거나 혹은 멍한 몇 시간 동안은 아주 크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결국에는 모두가 사소해져 기억조차 희미한 하찮은 과거의 일이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시간에 구속된 동물이라는 사실을 그리 잘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죽음을 진지하고 현실적으로 느끼게 해 현재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침착히 판단하게 하려는 큰 뜻이 있다. 그런 관점에서 봐도 현재는 무가치해지지 않고, 오히려 그 가치가 증가한다. 진정으로 가치 있는 노력에 우리의 삶을 바칠 필요가 좀더 분명해지고, 현재 이 순간 더욱 확실하고 강력해진다. 


우리는 인간 공통의 운명을 피하지 못한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특별하게 느낄 수 있지만, 삶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운명적인 죽음에 좀더 주의를 기울이면 다가울 일에 마음이 보다 정밀하게 조율되고, 그에 따라 우리는 가진 것에 감사하고 그 가치를 더 깊이 느끼게 된다. 


우리의 문화는 고통과  소멸을 부인하지만, 예술은 고통과 소멸을 예견하는 문화로 우리를 인도한다. 


미술가는 반드시 자연이나, 그 밖의 어떤 것을 재현해 보여주는 사람이 아니다. 미술가는 우리가 자연 또는 그 밖의 어떤 것을 보다 즉각적이거나 유의미한 방식으로 직접 볼 기회를 창조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이 새로운 국면에서 미술가는 과거에 자신이 했던 경험을 기록하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가 할 수도 있는 경험을 안무하는 사람이 된다.

예술은 자연의 기념물을 창조하거나 재현하는 행위에서 자연을 더 가깝게 또는 더 의미 있게 지각하는 기회를 창조하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 그림을 보는 대신 이제는 실물을 본다. 하지만 미술가의 역할은 여전히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그 경험은 창조적인 마음의 통찰력과 상상력이 빚어나고 조직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을 미술가로 간주하는 기준은 그가 예술의 참된 역사적 사명, 즉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을 감각적으로 더 잘 이해시키는 사명에 관심이 있느냐다. 미래의 미술가는 예술이 항상 전념해왔던 가치들을 증진하는 사건의 기회를 창조할 것이고, 그 범주에는 탑, 분화구, 만찬, 유치원이 포함될 수 있다. 예술은 여전히 우리가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을 변화시키고지 하는 기본적인 사명에 매진할 테니...


돈을 버는 기술 못지않게 잘 쓰는 안목도 중요하다. 메디치가는 경제적 자원을 이용해 세계에서 가장 감동적이고 고상한 수준의 건물들을 창조했다. 중요한 문제는 돈을 모으는 게 아니라 돈을 현명하게 쓰는 것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예술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알고, 믿을 만한 경험에 기초해 평가하는 척하지만, 사실은 생각하고 느끼기 위해 수고해본 적이 없고, 다소 공황 상태에서 단지 현재 이럴 것이라고 상상하는 유행을 모방하는 정도에 불과하다.


비평은 눈에 보이는 장면 뒤로 들어가 진정한 이유를 찾는 과정이다.


사람들은 연봉이 높고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의미 있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어떤 불완전한 내면의 욕구를 더욱 정확히 알려주는 일을 찾아 떠나곤 한다. 직업에 의미가 있어지기 위해선 두 가지 요건이 필요한 듯하다. 첫째, 사람들은 크든 작든 사람들의 고통을 줄이거나, 아니면 사람들에게 기쁨, 이해, 위안을 안겨주어 이 세계를 더 좋은 곳으로 만드는 데 보탬이 된다고 느낄 수 있는 직업을 원한다. 두번째이자 좀더 도전적인 면에서, 의미 있는 직업은 본인의 가장 깊은 재능 및 관심과 일치한다고 느껴져야 한다. 그런 직업은 우리의 내면에 잠재해 있는 소중한 능력을 극대화할 기회를 주고, 그래서 우리가 한 일을 되돌아볼 때 그것이 다른 사람들과 나 자신에게 나의 가장 성실하고, 진정하고, 가치 있는 특질을 말해준다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수년을, 특히 사회에 첫발을 들였을 때 자신의 삶으로써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예술의 임무는 또한 우리가 자랑스러워할 만한 것(자부심)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데 있다.


우리의 바람직한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대개 오만이 아니라 자신감의 부족이다.


"우리는 미를 추구하고 사치를 피한다. 우리는 배움을 찬미하고 현학에 무감하다. 우리에게 부는 사용 가치를 위한 목표일 뿐, 공허한 자랑거리가 아니다. 또한 가난의 굴욕은 가난을 인정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태만함에서 온다." - 아테네, 페리클레스


'정치'의 두가지 의미. 한편으로  정치는 입법, 통치, 정책 연설문, 선거, 정당이며... 이는 우리가 뉴스에서 보는 모습이다. 다른 한편으로 정치는 폴리스, 즉 도시에서 날마다 펼쳐지는 집단생활이다.


인간 조건의 해묵은 문제 중 하나는 인간이 자신을 정확하고 참을성 있게 보는 눈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아도취와 자기혐오는 우리의 성가신 친구다. 이 심리적 약점을 개선하려는 노력은 우리의 가장 중요한 사업 중 하나이며, 여기에는 동시대 사람들과 문화의 도움이 필요하다.


예술에 대한 진정한 열망은 그 필요성을 줄이는 데 있어야 한다. 어느 날 갑자기 예술이 다루는 가치, 즉 아름다움, 의미의 깊이, 좋은 관계, 자연의 감상, 덧없는 인생에 대한 인식, 공감, 자비 등에 냉담해져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예술이 나타내는 이상들을 흡수한 뒤, 아무리 우아하고 의도적이어도 단지 상징적으로밖에 드러내지 못하는 가치들을 현실에서 구현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의 궁극적 목표는 예술작품이 조금 덜 필요해지는 세계를 건설하는 것이다.


예술의 의제는 어떤 초자연적인 목적이 아니라, 엄격히 인간적인 목표에 집중될 것이다. 우리는 예술가들이 당당하고 교육적인 사명, 즉 인류가 자기 이해, 공감, 위안, 희망, 자아수용, 충족을 찾는 데 일조하라고 권유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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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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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아무리 혹독하고 열악한 환경에서도 적응하며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누군가는 아름다운 예술을 창조 한다. 


[본문발췌]


사실 '평범한 행복을 유지하는 삶'이야말로 쉬운 일이 아니다. 행복이란 진정한 용기와 마음의 자유를 지닐 때 비로소 쟁취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중섭의 고생 스토리가 아무리 끝이 없다 할지라도, 이중섭 세대야말로 그나마 운이 좋았다고 생각될 때가 있다. 그 이전 세대 서양화가들은 더욱 열악한 환경에서 화가로 살아갔기 때문이다. 어떤 예술가가 오늘날 조금의 성공이라도 하고 있다면, "그것은 단순한 개인적 행운이 아니라 과거에 불우하게 끝마친 모든 선인(先人)들에 대한 보답"이라고 한 철학자는 말했는데, 그것은 어느 세대에나 적용되는 원리 같다.


유영국이 존경했던 화가 몬드리안에 의하면, 제1차 세계대전과 같은 비극이 일어난 것은 인간이 낭만적인 서사에 빠져 분별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예술가는 그런 우매함에서 빠져나와, 수학적 직관을 통해 자연이 지닌 완전한 균형과 질서를 표현해야 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이를 회화뿐 아니라 인간 삶의 모든 시각 영역에 적용시켜야 한다.


"탐험하는 자가 없으면 그 길을 영원히 못 갈 것이오. 우리가 욕심을 내지 아니하면 우리 자손들을 무엇을 주어 살리잔 말이오? 우리가 비난을 받지 아니하면 우리의 역사를 무엇으로 꾸미잔 말이오?" - 나혜석


그러나 결국 오지호의 말년 작품은 다시 환해졌다. "어떠한 추악함이나 증오 속에서도 미(美)를 향해 나가는 흐름이 있을 때 비로소 회화 세계는 존재한다"는 것이 오지호의 굳은 신념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어떠한 고난이 와도 삶은 총체적으로는 "환희(歡喜)"이다. 그리고 예술은 그 환희를 표현하는 일이다. 그러니까 인간 삶의 영역에서도 예술에서도, "그늘에도 빛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한 사람의 인생을 평가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삶을 평가하는 일도 쉽지 않다. 2022년 작고한 이어령은 본인의 삶을 '실패'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 이유는 진정 자신을 잘 아는 가족과 친구, 삶의 동행자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스스로 늘 애정 결핍 속에서 살았다는 고백이다. 진정으로 풍요로운 '내면의 풍경'을 지닌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겉으로는 누가 봐도 부러운 삶이 자기 자신에게는 완전히 공허할 수도 있다.

88세에 생을 마칠 때까지 수많은 경구를 남긴 이어령은 그의 '마지막 수업'에서 이렇게 말했다. "남의 신념대로 살지 마라. 방황하라. 길 잃은 양이 돼라." 어찌 보면 이대원의 삶이야말로, 바로 이 경구를 실천하여 성취해 낸 결과물이다. 행복이란, 남의 신념대로 살지 않으려는 의지를 가지고, 방황하고 길을 잃는 어쩔 수 없는 과정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바로 내 옆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무엇'인가 보다.


장욱진은 자신의 <자화상>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이 그림은 대자연의 완전 고독 속에 있는 자신을 발견한 그때의 내 모습이다. 하늘에 오색구름이 찬양하고 좌우로는 자연 속에 나 홀로 걸어오고 있지만, 공중에선 새들이 나를 따르고 길에는 강아지가 나를 따른다. 완전 고독은 외롭지 않다." '그냥 고독'은 외롭지만, '완전 고독'은 외롭지가 않다. 고독은 어찌보면 타인과의 비교에 따른 상대적 개념인데, 그러한 세속적 비교에서 벗어나면 오히려 완전한 고독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완전 고독'은 어쩌면 '자유'의 다른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경지에 올랐을 때, 인간과는 소통에 불편을 느꼈던 자아가, 자연과는 풍요로운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다. 들녘은 때맞춰 노랗게 흔들리고, 개와 새는 자신을 따르지 않는가.


이렇게 허무한 게 인생이다. 바로 그 허무함 때문에, 우리는 쓸데없는 욕심을 내려놓은 채 우리 곁에 있는 작고 여린 것의 소중함을 깨달아야 한다. 파릇파릇 있는 힘을 다해 자라는 나무, 사이좋게 떼지어 하늘을 나는 새들, 아무런 편견 없이 사람을 따르는 삐쩍 마른 동네 개, 작고 가난한 집에 옹기조기 모여 사는 나의 가족. 바로 그런 것들 말이다. 장욱진은 흙탕물 같은 세상 속에서 그렇게 작고 소소하고 사랑스러운 것들만을 말갛게 건져 올려 세상을 내놓고 사라졌다.


‘이 세상에 절대적 진리란 없다’는 것이 유일한 절대적 진리라고 믿었고, 이 모순된 문장을 사랑했던 사람이다. 김병기는 온갖 모순과 불확실성을 받아들일 수 있는 진정한 용기와 관용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용기가 예술가의 멈추지 않는 도전을 가능케 한 힘이다. 김병기는 잭슨 폴록의 말을 인용하기를 좋아했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기 전에 나는 내가 무슨 그림을 그릴지 알지 못한다.” 
우리도 우리의 인생이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지 않나. 다만 그런 불확실성을 안고서도, 하루하루 용기를 내어 도전할 뿐! 그것이 인생이니까.


"예술은 언제나 공허하고 죽을 만큼 지루하게 영원한 반복 속에 갇혀 무엇인가 기다릴 것도 없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이라고 변시지는 썼다. 그는 자유로운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지독한 고독의 정체, 그러면서도 포기하지 못하는 이상향을 향한 그리움을 작품에 담고자 했다.


"신들에게 다가가 그 빛을 인류에게 퍼뜨리는 것보다 아름다운 일은 없다." 베토벤의 말이다. 1903년 로맹 롤랑이 쓴<베토벤의 생애>에 수록된 문구이다. 베토벤에 따르면, 예술가란 신들의 영역과도 같은 높은 차원의 경지를 인간에게 언뜻 느끼게 하는 메신저이다. 이들은 지상에 발 디디고 있으면서도, 영원을 좇아 불멸을 꿈꾸는 이들이다.


권진규-허명회-허준이. 한 인터뷰에서 허준이는 수학을 공부하는 원동력이 “아름다움의 추구”에 있다고 말했다. 수학 이론은 현실에서 경험적으로는 알 수 없는 세계를 암시하기 때문에 마치 비현실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결과는 매우 순수한 아름다움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수학자의 내적 동기는 예술가의 그것과 같다.”고 그는 말했다. 음악가, 조각가, 수학자는 불멸의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렇게 같은 곳을 응시하고 있다. 그러나, 아, 너무나도 먼 응시!


문신의 ‘시머트리(대칭)’는 땅에 단단하게 발 딛고 선 어떤 존재가 어떻게든 중력을 거슬러 자라는 동안 생겨나는 형상이다. 이 형상은 위로 자라면서도 옆으로도 좌우 균형을 유지하려고 실은 안간힘을 쓰고 있다. 견고한 안정감과 극도의 긴장감이 절묘한 조화를 이룸으로써 태어나는 존재라고나 할까. 생은 바로 그런 극단적인 힘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균형감각이다. 그러하기에 우주에 던져진 어떤 존재에게나, 생은 그만큼 어렵고, 신비롭고, 기적 같고, 엄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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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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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가진 것 보다 다양한 경험과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많기를,
빠르고 효율적인 것보다 느리더라도 주변을 살피며 함께 살아갈 수 있기를,
단순 소박한 느린 삶의 미학.
 

[본문발췌]
 
인생이 갈림길과 선택, 그리고 거래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적이 있는가? 우리는 일분일초를 어떻게 사용할지 선택해야 하고,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면 틀림없이 다른 사람이 우리 대신 선택하게 된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무엇을 사야 하고 어떤 질문을 해서는 안 되는지 알려준다. 그 속에서 길을 잃으면 결국 자기 삶에 만족하지 못한다. 세상은 진짜 우리 모습을 발견하고 받아들이기보다 허구의 모습을 만들어내라고 종용한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더 안전하게 느껴질 것이다. 자기 모습 그대로 충분하다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분위기 때문이다.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고 '충분한'. 자신의 직감에 생각과 마음을 열면, 삶의 모든 사소한 부분까지 변화시킬 힘이 생긴다. 낯선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낯선 것을 통해 자신이 변화하고 자신만의 속도로 성장할 수 있다. 아울러 자신이 누구인지 진정으로 받아들이면 낯선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그렇게 해서 계속 호기심을 갖고 마음을 열고 성찰하며 변화의 여정을 이어갈 수 있다.
우리는 변화를 두려워하기도 하고 변화에 설레기도 한다. 모든 변화가 그렇듯이 저항에 맞닥뜨리겠지만 자신이 무엇을 더 원하는지에 달려 있다. 익숙한 삶을 원하는지 아니면 지금까지와 다르고 낯설지만 놀라움과 가능성을 지닌 삶을 원하는지. 무엇보다 자신에게 진실해야 한다.
마음가짐, 삶을 대하는 태도, 심지어 사소한 습관이라도 바꾸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준비되기 전에 꽃을 피우라고 자신을 몰아붙이지 않고 자신만의 속도에 맞춰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늦게 꽃을 피우는 나무가 가장 좋은 열매를 맺는다. 사람은 저마다 속도가 다르다. 몇 분 만에 생기는 변화도 있고 몇 년에 걸쳐 천천히 변화될 수도 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지가 중요하다.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면 어디로 가는지도 알 수 없다. 변화의 시작이자 핵심은 자신을 아는 것에서 시작된다. 
 
 
미니멀리즘은 삶에 가치를 더하지 않는 모든 것을 없애는 데 도움을 주었고, 슬로 라이프는 삶의 속도를 줄여 안정되고 명료하고 여유로운 삶을 사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인생을 천천히, 좀 더 의도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이 옳다고 여겼다. 
 
 
버릴수록 자유로워진다. 미니멀리즘은 단순한 삶을 위한 라이프스타일 운동이다. 미니멀한 삶은 우리를 짓누르고 방해하는 과잉을 없애는 것이다. 내 삶에서 지나친 부분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버리는 방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따라서 미니멀한 삶에는 가치 있는 것들만 가득 찬다.
 
 
빠르게 돌아가는 라이프스타일에 지친 사람들이 느긋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다. 미니멀리즘을 통해 삶의 속도를 줄일 수 있기에 둘 중 하나만 선택할 수 없다. 천천히 산다는 것은 일상을 즐기고 소소한 순간들에 감사하는 것이다. 슬로 라이프는 아이들과 함께 걸어서 등교하거나, 한 번에 한 가지 일을 하거나, 수입이 적더라도 일을 줄여서 자유 시간을 늘리는 것을 말한다.
 
 
옛날에는 물건이 거의 없었다 삶은 단순했고 사람들은 꼭 필요한 것만 있으면 되었다. 인간이 진화하면서 한평생 짊어지고 사는 물건의 양이 늘어났다. 늘어난 물건들은 우리를 지치게 하고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정리는 우리의 집과 생각과 삶을 채우고 있는 잡동사니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고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 쓸모 있는 것들만 남긴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하는 말과 기준은 곧 나를 향한 것이다. 모든 판단과 지적, 공개적으로 나누는 모든 의견은 결국 나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굉장히 자기 비판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도 비판적이지만 자신에게 공감하고 친절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도 호의를 베푼다.
 
 
심리학자 바브 마크웨이(Barb Markway)는 가치를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역경을 통해 인내하게 하는 원칙"이라고 정의했다. 예를 들어 창의성, 공동체, 재정적 안정, 모험, 성공, 가족, 사랑, 연결, 가정, 사려 깊음, 진실, 단순성 등이다. 가치는 절대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우리가 늘 변화하고 성장하듯이 가치도 시간에 따라 변화한다고 생각한다. 사회가 강요하는 가치와 개인이 정한 가치의 순위가 늘 일치하지 않는데, 더 중요한 것은 개인의 가치다. 다른 사람의 가치에 따라 사는 것은 다른 사람이 만든 틀에 자신을 맞추는 것과 같다. 늘 불편하게 끼워 맞추는 느낌이다. 반대로 나의 가치에 따라 살면 마음 깊이 옳다는 느낌이 들고 내 집처럼 편안하다. 문제는 자신의 가치와 주위 사람들의 가치가 충돌할 때이다. 불안정한 상황에 처해 있거나 자존감이 부족한 사람은 자신을 희생하고 무너지기 쉽다. 
 
 
모든 사람들의 기질과 경험, 성격은 전혀 다르다. 따라서 보편적인 가치에 맞춰 살기란 매우 어렵다. 각자의 개성을 받아들이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가치 목록을 작성하면서 어려운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되었고, 단순하게 살아가기가 훨씬 수월해졌다. 단순하게 살기란 절대 쉽지 않다. 단순해지려면 포함해야 하는 것뿐만 아니라 빼야 할 것을 의식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단순한 삶을 위한 결정이 나중에는 큰 가치가 있다고 해도 매우 감정적이고 고통스러울 수 있다. 우리는 핵심 가치에 따라 결정을 내릴 수 있다. 미래를 위해 저축할지 여행을 떠날지 결정하기 어려운가? 약속이 너무 많아서 몇 개는 포기해야 하는가? 이러한 것을 정리할 때 가치가 중심을 잡아 줄 것이다. 우리는 모든 일을 할 수도 있고, 모든 일이 우리에게 중요하지도 않다.
 
 
나의 가치에 맞춰 살면 진정한 내가 되는 느낌이 든다. 나의 결정이 정당화되고 나에게 중요한 것들만 남게 된다. '이 선택이 나의 가치에 맞는가?'라고 질문하면 훨씬 쉽게 결정하고, 즉시 해야 할 일을 알게 된다.
 
 
나의 핵심 가치를 알면 더 단순하고 의미 있는 삶을 향한 로드맵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나의 기쁨 목록은 시작 단계에서 유용하지만, 내가 어떻게 기억되기를 원하는지 생각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이것이 우리의 삶과 정체성에 관한 것이므로 훨씬 큰 동기부여가 된다.
 
 
사용하지 않거나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않는 물건을 남겨둔다고 해서 돈을 다시 찾을 수는 없다. 실수로 산 물건들에 둘러싸여 있다는 정신적 부담까지 안게 된다. 이사하면서 옮기는 데 필요한 노력, 보관하는 데 필요한 공간과 비용을 생각해보자. 물건을 버리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나에게 불필요한 물건은 가지고 있는 것보다 팔거나 기부하는 것이 더 가치 있다.
 
 
그 어느 시대보다 물질이 풍부한 시대를 살면서 끊임없이 잡동사니가 쏟아진다. 우리가 소유한 물건의 양을 줄이고 유용하고 의미 있는 것들만 남길 필요가 있다. 우리의 삶이나 집을 정리하는 것을 넘어서야 한다. 잡동사니 때문에 지구가 버거워하고 있다. 우리가 잡동사니를 없애거나 재활용하고 있지만 애초에 불필요하고 잘못 생산된 물건들이 너무 많다. 잡동사니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물건을 사는 것을 줄이고, 무엇을 살지 신중하게 생각하고,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물건은 책임감 있게 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진정으로 변화를 이끌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자신과 다른 사람 사이에 균형을 이루면서도 현실적인 방법이 있다. 로 웨이스트 라이프(low waste life)를 계속 실천하는 것이다. 
 
 
단순하게 산다는 것은 삶의 모든 부분을 통제한다는 의미다. 물질이 우리에게 공간을 채우고 욕망을 좇으라고 말하듯이 사회는 우리에게 친구나 가족 등과 관계를 맺으면서 인생의 목표를 달성하라고 권한다. 그렇지 않으면 실패했거나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우리를 조종한다. 
 
 
진정성 있는 사람은 자신에 대해 아주 잘 아는 반면, 자신이 모르는 점도 많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계속해서 변하고, 불확실한 삶의 본질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인생이라는 폭풍을 지날 때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다.
 
 
올바른 선택이란 항상 그 당시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일을 선택하는 것이다.
 
 
인생은 성취하는 것보다 정리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정리하는 법을 제대로 배우면 지나치게 부담을 느끼거나 압도되거나 감당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이지 않는다. 정리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잘못이 아니다. 인생에서 뭔가를 성취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메시지가 사방에서 쏟아지기 때문이다. 출세를 위한 사다리에 오르고 집 평수를 늘리고 꿈에 그리던 드레스룸을 갖는 것은 잘 알려진 성공 사례이다. 그러나 우리가 성취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고,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게 되며, 이 세상의 자원은 한정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가 가진 중요한 자원을 어디에 쓰는지 평가해야 한다. 물질적인 것은 비물질적인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정신적인 잡동사니는 정리하는 데 훨씬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큰 피해를 준다.
 
 
스크린을 보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불안감과 우울감은 높아지고 자존감은 낮아진다. 평범하고 자연스러운 우리의 일상을 인스타그램의 화려하게 꾸며진 삶과 비교하며 현실을 왜곡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시간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 자신을 중심에 두고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시간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자 시간, 공간, 돈이 풍족해졌다.
 
 
소유물에 따라 내 자존감이 결정되지는 않으며,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적게 소유해도 행복할 수 있고, 잡동사니는 해야 할 일 목록과 같았다. 하지만 물건의 양이 많든 적든, 그것이 행복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나는 현재 내가 가진 것으로 행복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영영 행복을 찾을 수 없다는 통찰력을 얻었다. 현재를 받아들이고 일상에서 아름다움을 찾고 버리는 연습을 해야 했다. 반드시 물질을 버리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나는 물건을 버리는 데 선수가 되었고, 거기서부터 시작이었다. 훨씬 더 버리기 어려운 감정적인 잡동사니를 정리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삶의 외적인 부분이 바뀌었다고 해서 내적인 부분까지 바뀐 것은 아니었다. 변화는 계속 진행 중이다. 
 
 
우리는 행복을 찾으려고 너무 몰두한 나머지 진정한 행복을 모르게 된다. 행복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주는 것은 없다. 우리는 뭔가를 가지거나 달성하면 행복해질 거라고 믿지만, 진실을 보지 못하는 끝없는 길을 가고 있는 것뿐이다. 지금 이 순간 행복하지 못하면 우리는 영원히 행복할 수 없다. 행복은 내면과 넘치는 자기애에서 나온다. 다른 사람이나 물질로 나를 증명할 필요 없다. 이것이 진정한 행복이며, 우리를 평생 지탱해주는 행복이다.
 
 
나에 대해 더 많이 알수록 나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고 행동을 바꾸기 쉽다. 인생이 도로이고 생각, 느낌, 행동이 도로 위에 있는 자동차라고 하자. 객관적인 시각을 가진다는 것은 도로 위에서 길을 잃는 것이 아니라 길가에 앉아 차량을 보는 것이다. 나의 생각, 느낌, 행동을 명확히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부처는 진리로 가는 길에 단 2가지 실수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끝까지 가지 않는 실수와 시작조차 하지 않는 실수.
 
 
대부분의 사람들은 끊임없이 긍정적인 것만 찾고 부정적인 것은 모두 버리려고 한다. 하지만 삶을 대하는 가장 좋은 방식은 좋은 것과 나쁜 것 모두 받아들이는 것이다. 둘 다 우리에게 가르침을 준다.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 모두에서 만족감을 찾을 수 있다. 행복을 찾는 것보다 만족감을 찾는 것이 더욱 현실적인 목표이다.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일 때도 있고 절망감을 느낄 때도 있다. 오늘 하루가 안 좋은 날이든, 평범한 날이든, 비극적인 날이든 여전히 당신에게 소중한 날이며, 여느 다른 날 만큼이나 감사해야 한다. 내일을 향해 급하게 나아가지 말고 과거의 아픔에 머물지 말자. 우리가 가진 것은 현재와 미래뿐이다. 가능한 모든 순간을 만끽하자.
 
 
인생에서 변하지 않는 진리가 하나 있다면 내가 영향을 주고 바꿀 수 있는 것은 나 자신뿐이라는 사실이다. 다른 사람을 탓한들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잘 살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변해야 한다. 무의식적으로 하는 일을 의식적으로 만들고 치유할 때까지 우리가 붙잡고 있는 고통스럽고 부정적이고 감정적인 신념은 계속 반복된다.
 
 
자기 확신과 자기애, 안정감이 부족하면 삶의 모든 부분을 통제하려고 든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사랑받으면서 내 안의 공허함을 채우고 싶어 한다. 그래야 삶에 만족할 수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우리가 삶에서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자신뿐이다. 우리는 생각보다 자신을 훨씬 더 잘 통제할 수 있다. 삶은 무작위로 벌어지는 사건의 연속이 아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무엇을 믿는지, 시간이 됐든 돈이 됐든 에너지가 됐든 무엇을 기꺼이 희생하려 하는지에 따라 삶의 모습이 만들어진다.
 
 
내 삶에 만족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단 하나, 나 혼자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자신이 충분하다고 받아들이고, 자신만의 충분함을 정의하고, 이 사고방식을 중심으로 라이프스타일을 구성하려면 삶의 균형이 필요하다. 저마다 충부함의 기준이 다르고, 시간이 지나면서 변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 충분함이 다른 사람에게 버겁게 느껴질 수 있다. 지금 느끼는 충분함이 내년에는 부족하게 느껴질지 모른다. 만능 공식은 없다. 우리는 자신만의 공식을 찾아야 한다.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모든 것을 정리하는 것은 나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다. 내가 꿈꾸는 성공, 행복, 만족감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것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적다. 스스로 채울 수 있는 공허함을 끊임없이 외부에서 채우려고 노력할 필요 없다. 적게 원하고 단순함을 즐기고 자신을 받아들이면 자유로워진다.
 
 
우선 나 자신이 충분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이 점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면 더욱 의도적이고 의미 있는 삶을 만들어갈 수 있다. 나 자신이 충분하다고 생각하면 더 이상 무언가를 증명할 필요 없고, 돈이 얼마나 있어야 진정으로 행복할지, 삶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할지, 얼마만큼의 물건을 가져야 할지 알 수 있다. 나의 가치를 확실히 세우고 글로 적어서 매일 마음속에 간직한다. 나의 가치가 무엇인지 알면 그에 따라 살아가는 방식이 적절한지 알 수 있다. 물리적으로, 감정적으로 자신에게 도움되지 않는 것은 정리한다. 정리하는 과정은 간단하다. 부엌에 있는 나무 주걱과 같은 물건부터 친구를 포함한 사람이나 당신이 짊어지고 있는 걱정 등 삶의 일부를 분리해서 당신에게 어떤 가치가 있는지 판단한 후에 계속 가지고 있을지 버릴지 결정한다. 다른 모든 일과 마찬가지로 어떤 것은 다른 것보다 정리하기 쉽다. 하지만 모든 과정이 가치 있고 풍성하고 의미 있다.
 
 
삶에서 성취하는 것, 사는 집 평수, 입고 있는 옷 브랜드가 아니라 나라는 존재 자체로 특별하다. 유일하고 가치 있는 존재가 되기 이해 뭔가를 할 필요가 없다. 그저 존재하고, 숨 쉬고, 또 하루를 살아가는 것으로 충분하다. 행복하든 아파하든, 사랑이 넘치든 상처받든, 승리하든 패배하든 나라는 것은 변함없다. 나의 가치는 내 안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나는 가치 있는 존재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바라보는 것보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치 있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움츠러들게 한다 해도 나는 이미 충분한 존재다. 부족하거나 완벽하지 않다고 해서 자책할 필요 없다. 부족함과 불완전함도 나의 일부이다. 나의 연약한 부분도 다른 부분만큼 공감과 인정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듯 나 자신을 사랑하면 내가 얼마나 용기 있고 강하고 가치 있는 존재인지 알 수 있다. 마땅히 누려야 하는 것을 누리기 위해 인내심을 가지고 자신을 조심스럽고 상냥하게 대해야 한다.
 
 
속도를 늦추면 우리가 만끽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얻을 수 있다. 어디에든 느리게 사는 삶의 방식을 적용할 수 있다. 계획, 일, 또는 라이프스타일까지 천천히 몰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속도를 늦추면 감각이 살아나고, 작은 것에 감사할 수 있으며, 시간이 늘어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느림은 나에게 주는 선물이다.
 
 
나이 드는 것을 받아들인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변화는 찾아오고, 변화의 흐름에 따라 예전의 모습을 벗고 새로운 모습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을 경험해본다. 나만의 충분함을 찾아라. 마음을 충분히 쉬게 하라. 기대치를 낮추자. 낮은 기대치야말로 만족감을 얻는 비결이다. 특히 자신에 대한 기대치는 더욱 균형 잡혀 있어야 한다. 자신에게 약간의 여유를 주는 것과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에는 극명한 차이가 있다. 
 
 
지금 이대로 충분하다. 자신이 충분하다고 생각하면 다른 사람에게 아무것도 증명할 필요가 없다. 물질적으로 아무리 풍족하다고 해도 나 자신을 더 가치 있고 사랑스럽게 만들지 못한다. 우리는 이미 있는 모습 그대로 충분하다. 삶은 선택의 갈림길과 버리는 것의 연속이지만, 우리가 충분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길을 찾아가면 훨씬 더 만족스러운 여행을 하게 된다. 하루하루를 우아하게,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으로 조심스럽게 나아가는 더욱 단순하고 의미 있는 여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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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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