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가치는 빈 서판에 무엇이라도 써야 남겨진다.

[본문발췌]

일하는 게 힘들긴 하지만, 일도 하지 않으면서 일하는 사람을 구경만 하는 것은 더 힘들어서 그래요. 더구나 노인이 일하는 것을 보는 것은 말이에요.



작문이 진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것들, 우리가 본 것들, 우리가 들은 것들, 우리가 한 일들만을 적어야 한다. 예를 들면, '할머니는 마녀와 비슷하다'라고 써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람들이 할머니를 마녀라고 부른다'라고 써야 한다. '이 소도시는 아름답다'라는 표현도 금지되어 있다. 왜냐하면, 이 소도시는 우리에게는 아름다울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추하게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한 '호두를 많이 먹는다'라고 쓰지, '호두를 좋아한다'라고 쓰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좋아한다'는 단어는 뜻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정확성과 객관성이 부족하다. '호두를 좋아한다'와 '엄마를 좋아한다'는 같은 의미일 수가 없다. 첫 번째 문장은 입 안에서의 쾌감을 말하지만, 두 번째 문장은 감정을 나타낸다. 감정을 나타내는 말들은 매우 모호하다. 그러므로 그런 단어의 사용은 될 수 있는 대로 피하고, 사물, 인간, 자기 자신에 대한 묘사, 즉 사실에 충실한 묘사로 만족해야 한다.



나는 이제 깨달았네, 루카스, 모든 인간은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걸,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걸. 독창적인 책이건, 보잘것없는 책이건, 그야 무슨 상관이 있겠어. 하지만 아무것도 쓰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잊혀질 걸세. 그런 사람은 이 세상을 흔적도 없이 스쳐지나갈 뿐이네. 



소년은 조서에 서명을 했다. 거기에는 세 가지 거짓말이 적혀 있었다.
국경을 같이 넘은 남자는 그의 아버지가 아니었다.
이 소년은 열여덟 살이 아니고, 열다섯 살이다.
이름은 클라우스(Claus)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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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않고, 때를 기다리며 서두르지 않는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삶, 자연에서 배우는 지혜!


[본문발췌]

농사짓는 일이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자연의 지혜를 배우고 따르는 일이다.
우리가 농업을 기본으로 삼아 농사를 짓고 살고자 하는 이유는 이제 더 이상 자연을 거스르는 삶과 문명으로서는 심신의 건강도, 행복한 삶도, 지속적인 생존도 보장될 수 없음을 확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농업이란 자연과 조화하면서 지속적인 삶을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해롭고 성가신 것으로만 여기고 있는 돼지풀, 명아주, 쇠비름, 쐐기풀 같은 잡초들이 토양 깊숙한 곳으로부터 미네랄을 끌어다 황폐해진 표토 쪽으로 옮겨다 주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것들이 얼마나 많은지는 그 토양의 상태를 측정할 수 있는 척도가 되는 것이다. 즉 그 잡초들은 인정 많은 이웃처럼 멀리 떨어져 있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영양소들을 농작물 뿌리 쪽으로 끌어다 준다는 것이다. 그는 자연의 이러한 움직임을 '만물의 공존 법칙'이라 부르고 있다. 식물들 간의 공존과 유대관계를 통해서 서로를 살리며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다. 어디 이러한 법칙이 식물들 사이에만 적용되는 것이겠는가. 공생의 원리, 상생의 법칙이 우주 대자연의 법도가 아니겠는가. - 조셉 코캐너, <잡초는 토양의 수호자다>


자연농법은 자연에 맡기고 인간은 거기에 최소한의 도움만을 주는 농법이다. 자연은 개조, 개량해야만 하는 불완전한 존재가 아니라 인간이 따르고 배워 마침내는 그것과 하나가 되어야 하는 완전무결한 존재라는 것을 깨우친 사람들이, 이제까지의 인위적인 방법들을 버리며 그리고 돌아가고자 하는 하나의 새로운 삶의 양식이다. 땅 갈이를 하지 않고, 비료와 농약을 사용하지 않고, 제초를 하지 않는 것.


건강하고 완전한 벼의 생명을 먹어야 사람의 생명은 건강할 수 있다. 그러나 입으로 들어오는 것이 농약이나 비료로 얻어진 벼라면 그것을 먹는 인간의 생명은 약해져 병에 걸리기 쉽다. 그에 따라 건강한 정신도 점차 사라져간다. 벼처럼 생명이 결핍되어 가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약을 먹어야 하는데 또 그 약이 사람의 생명을 약하게 만든다. 결국 악순화의 반복인 것이다.

우리 인간은 그런 건강한 생명의 순환 속에서 태어났다. 그것은 다른 생명체도 마찬가지다. 서로 먹고 먹히는 조화가 그대로 자연의 대 조화이자 커다란 활동이다. 이 대조화가 잘못되면 큰일이다. 어느 한 부분이 오염되거나 훼손되거나 병이 들거나 파괴가 되어 죽더라도 모두 마찬가지다. 그것은 마침내 다른 부분으로 영향을 미쳐 결국 전체로 퍼져나간다. 인간으로부터 생긴 독은 다시 인간에게로 돌아온다. 자기가 만든 독이 다른 존재에 이르기 전에 자기에게로 되돌아 오는 것이다. 그렇게 돌아온 독성은 더욱 심해진다.


인간만이 여분의 것을 탐내고 있다.
우리는 다른 생명을 먹고 지금 여기에 있을 수 있는 생명이지만, 스스로 자신의 적량을 알고 대자연 속에서 최소한 것을 먹어야 한다. 인간을 빼고는 다른 생물들은 모두 알고 있다. 지나치면 언젠가는 결핍되고 파괴를 불러 마침내는 전체로 파급되어 간다는 사실을.
인공 속에서 나날을 계속해온 결과 생명이 약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본능적인 힘이 약해져서 움직이지 않게 되어버린 탓이다. 자연 그대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깨달을 수 있는 직관력에 구름이 끼어 있고, 주어진 그대로 자기를 완수하는 능력이 훼손되어 있기 때문이다.


원인을 제거해 주면 저절로 건강하게 된다.


작물 중에서 마른 땅을 싫어하는 것으로는 가지, 피망, 고추, 율무, 토란 등이 있고 특히 젖은 땅을 싫어하는 것으로는 토마토, 옥수수, 조, 수수, 감자 등이 있다. 또한 수박, 멜론, 참외, 배추, 무, 시금치 등도 습지를 싫어하는 성질을 갖고 있다.


자연을 과학의 대상으로 삼는다고 하는 것은 자연의 생명을 보지 않는 것과 같다. 과학의 눈은 결코 생명을 볼 수 없는 눈이다. 과학이라는 눈으로, 곧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물질뿐이지 생명이 아니다.
과학적으로..., 과학성에 의해..., 과학적인 증거가..., 과학적인 증명이 없으면 믿을 수 없는 마음은 물질밖에 믿지 못하는 마음이다. 그 마음은 물질밖에 없다고 믿고 있는 어리석고 어둡고 쓸쓸한 마음인 것이다.
과학을 절대시하고 의존하는 자기 자신의 연약함, 어리석음, 불분명함, 소심함을 깨닫고, 곧 그것이 참이 아님을 깨닫고 거기로부터 떠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해서 과학의 진짜 의미와 그 작용을 정확히 깨달아야만 한다. 과학에 의해서 생기는 일체의 일들의 의미를 바르게 알지 않으면 안 된다. 

학교 교육도 과학을 절대시하는 것에서 시작되어 생명 영위는 전혀 보려하지 않는 방향으로 행해지고 있다. 학생 개개인의 생명을 보지 않고, 개개인의 마음을 보지 않고 있다. 학습 내용 또한 생명을 문제로 삼지 않고 지엽적인 것을 과학으로 분석하여 지식화 하고 있다.
현행의 교육 제도는 지식의 양에 의해 우열을 결정하고 있을 뿐이다. 결코 어린이 개개인의 인간성 확립과 함께 참다운 통찰력을 깨닫게 하고 개개인의 직관력에 따라 학문을 행하는 장소가 되지 못하고 있다.


현대인의 대부분은 지나쳐서 모자람을 불러들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심신 양면으로 무엇이든 너무 많이 집어넣어 문제가 되고 있다. 지나침으로써 신체와 마음과 정신과 영혼을 곤란하게 만들고 있다. 피로하게 만들고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다. 혼란하게 만들고 연약하게 만들고 있다. 고장을 자초하며 병을 초래하는 불행에 빠져들고 있다. 지나친 것은 모자란 것보다 못하고, 지나치면 반드시 조우한 생명이 파괴되어 간다. 
겨울은 모으는 활동이지만, 결코 지나쳐서는 안 된다. 자연의 영위로부터 결코 벗어나지 않는 야산의 작은 새들, 벌레들, 짐승들, 풀과 나무들은 지나치는 법이 없이 자연의 영위 그대로 살아간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의 영위로부터 벗어나 자기 멋대로 굴고 있다는 점을 명심해서 지나치지 않도록 할 뿐만 아니라, 이미 지나치고 있는 것은 바르게 자연의 영위에 따라서 소화하고 방출되도록 하지 않으면 안된다. 더 이상 지나치면 큰일이다. 그러면 생명이 점점 결핍되어 간다. 원기가 사라지며 기력이 없어진다. 의욕이 솟아나지 않고 정기와 신기가 사라진다. 지력은 고갈되고 능력은 움직이지 않는다. 마침내는 참다운 앎이 움직이지 않게 된다.



젊은 생명은 하나밖에 몰라 지나치게 서두르는 경향이 있다. 성장기의 생명에게 개화결실을 재촉하는 청년의 성급함, 장년기의 성숙함이 무르익지 않았음에도 노년기의 성숙을 찾는 장년기의 초조함, 망설임, 자기 과시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의 생명도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쳐 준다.

그러나 우리는 동일한 문제를 또다시 반복해서는 안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미숙함과 결점을 비극적인 생명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그런 사람을 초월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이러한 불행한 생명도 길잡이로 삼고 진인들을 거울로 삼아가며 결코 참이 아닌 곳으로 길을 잃거나 영혼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미숙은 그 자체로 좋은 것이다. 장년기도 아직은 미숙기인 것이다. 청년기는 잎이 돋아나는 계절로 아직 꽃도 없고 열매도 없는 계절이다. 잎이 나야 하는 계절에 꽃이 피면 그 또한 이상한 일이다. 청년기는 청년기를 완수하고 장년기는 장년기를 완수하는 것이 본래의 생명이다. 결코 서둘러서는 안 된다.

주저하고 망설이는 자기 마음의 발밑을 보면서, 자신의 영혼 속을 꿰뚫어 보면서 장년기의 현재를 완수해 가야 한다. 자만 속에 빠져서는 안 된다. 자만은 자신만이 아니라 자기 안에 깃들여 있는 신까지 속이는 일이다.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떨어뜨리는 것은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다.

성장할 때에도 결코 몇 계단씩 뛰어넘을 수 없는 일이다.
예술이나 사람이 성장하고 살아가는 인생에서나 모두 마찬가지다. 모든 것은 생명의 성장과 신체의 성장과 더불어서 이루어지는 정신의 성장이자 마음의 성장이며 예도의 완성인 것이다.
또한 그 어떤 길에 있어서나 참다운 예술에 이르는 길은 청년의 혼돈기를 반드시 거치기 때문에 영혼의 참다운 출발점은 장년기부터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장년기는 마음도 정신도 아직 미숙한 것이 본래의 모습이다. 영혼은 젖먹이와 같아도 좋은 것이다. 서두를 일도 없으며 서둘러서도 안 된다. 교만해서도 안 되면 스스로 자신을 속여서도 안 된다.


땅을 갈면 한 생명에서 다른 생명으로의 순환을 단절하는 결과가 된다. 앞의 생명이 다음 생명을 기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시들어버린 여름풀 아래는 수많은 작은 동물들이 활동이 있다. 그중에는 풀과 벌레가 죽어 흙으로 돌아가는 활동도 있다. 나고 주고 먹고 싸는 활동이 다음 생명과 주위의 생명을 기른다. 따라서 비료는 전혀 필요가 없다.


일체 만물은 서로 차이가 없고 나누어지지 않은 하나의 존재인 동시에 일체 사물이 또한 서로 다른 존재이다. 불일불이, 곧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며 하나이자 둘이다. 따라서 어느 쪽이 더 옳으냐, 더 소중하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둘 다 아니라고 하여 중간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양방이 동시에 하나인 것이다. 한편이 빠진 곳에는 참이 없다. 가짜가 된다. 그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일체의 존재가 한 생명인 동시에 거기에는 개개의 차이, 곧 남녀의 차이, 주객의 차이, 주종의 차이, 선생님과 학생의 차이, 하늘과 사람의 차이, 신과 인간의 차이, 의사와 환자의 차이, 농부와 벼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일체임과 동시에 별개인 그것은 스스로 일어서고 스스로 활동하며 스스로 창조하고 스스로 받아들이는 존재이다. 이와 같이 일체가 하나임과 동시에 개개의 차이가 있음을 온전히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지 않아 스스로 불행에 빠지고 만다. 그리고 영혼은 항상 엉뚱한 것을 좇아 쓸데없이 먼 곳까지 찾아가 방황하고 있다. 신비스럽고 완전한 자신의 생명을 헛되이 연소시키고 있으며, 그래서 자신의 인생을 제대로 완수하고자 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사는 것에 소홀히하며 본연 그대로 지극히 자연스럽게 살기를 피하려고만 하는 안타까운 습성이 아닐 수 없다.
상대 세계에 살며 대립에 떨어지고 소아에 집착하여 하나를 둘로 나누고는 그 중 한쪽에만 사로잡혀 그것만을 옳다고 해서는 안 된다. 그곳은 한편이 밝으면 반드시 다른 한편은 어두운 어둠의 세계이다.
 


논밭에 풀과 벌레가 번창하면 논밭의 생명도 번창한다. 잡초는 논밭의 양분을 빼앗지 않고 벌레와 함께 오히려 논밭을 기름지게 만든다. 논밭의 생명활동이나 채소의 영위에는 일체 손을 대지 않는다. 생명활동에 사람은 손을 댈 수 없기 때문이다. 본연의 영위에 일체를 맡기면 된다. 본리를 영위하는 채소나 논밭의 완전한 작용에 맡기면 된다. 필요가 있어서 논밭의 영위를 훼손 또는 파괴할 경우는 되도록 파손을 줄이도록 한다.

목적하는 채소의 생명이 다른 풀의 생명에 지지 않도록 해주는 일이 가장 중요한 작업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 채소와 풀이 모두 아직 어린 때는 풀을 뿌리 채 뽑아서 그 자리에 놓아준다. 어린 풀뿌리는 매우 가늘기 때문에 흙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뽑더라도 채소의 성장을 방해하는 곳에 있는 풀만을 그렇게 하면 그렇지 않은 풀은 자라는 대로 내버려 둔다.
풀이 이미 자랐을 경우는 낫으로 베어 그 자리에 놓아준다. 자를 때는 뿌리와 줄기의 접점을 자른다. 그러면 뿌리는 흙속에 그대로 있지만 잘라진 곳에서 싹이나 줄기가 다시 나오는 일은 거의 없다. 덩굴성으로 인해 키가 큰 채소나 줄기가 딱딱하고 강한 잡곡류가 이미 자랐을 경우는 풀줄기를 낫으로 베어서 그 자리에 놓아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여름의 왕성한 생명 잔치를 마치고 성장 후반기의 가을로 접어들어 있는 풀은 그대로 두어도 좋은 경우가 많다. 이를 알 수 있는 힘은 수년 동안 계속하여 농사를 짓는 사이에 절로 생기게 된다. 작물의 성장을 방해하지 않는 경우는 될 수 있는 한 풀의 생명도 그 장소에 일생을 완수하고 자연 속에서 열매를 맺고 씨앗을 남기고 흙으로 돌아가게 맡겨둔다. 종류가 다양한 여러 가지 풀들의 생명이 논밭에서 순환하는 쪽이 흙의 생명을 건강하게 만들며, 거기 있는 채소 또한 건강하게 자라는 것이다.

 

적량을 알고 지나치지 않으면 지구는 언제나 낙원. 낙원의 모든 보물을 섬기고 아끼는 방법을 모르면 낙원은 더 이상 인간에게 낙원일 수가 없다. 지구상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인간뿐이다.
인류가 생명을 완수하고 즐겁게 생활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필요한 만큼 올바른 방법으로 받아들이면 인류에게 필요한 것은 결코 줄거나 없어지는 일이 없다. 항상 일정량을 계속해서 유지해 가며 지구 생명과 함께 순환해 갈 수 있다. 지구와 우주는 필요한 것을 필요한 만큼 항상 가득 채워주는 낙원이다. 동시에 일체의 생명들과 함께 사람들의 생명도 천수를 누리며 사람들의 생활은 안정에 이르러 마음 편히 살 수 있는 것이다.
 
탐욕에 빠진다거나 제멋대로 군다거나 자기를 잃어버리고 미망 속을 방황한다거나 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그러한 무지한 행위를 넘어서 진실을 깨우치고 다른 생명을 받아들이는데 적량을 알고, 일체의 생명을 존엄하게 여기며 그들과 조화하는 생활을 통하여 주어진 낙원을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숲이나 산으로부터 나무를 베어내되 지나치는 일이 없으면 자연의 영위 안에서 절로 새로운 나무가 나서 자라므로 산과 숲은 언제나 풍요롭다. 지나치지 않는 것이 관건이다. 산이 풍요로우면 그곳에 새와 짐승들이 모여 번영한다. 뿐만 아니라 풍요로운 산은 들과 논밭과 사람 사는 마을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은혜를 준다. 그러면 지구는 낙원이다.
그러나 바다에서는 물고기를, 산에서는 나무와 새와 짐승을, 산야초를, 초목의 열매를 마구잡이로 따고 캐고 베어내고 잡아서 먹고 저장하고 돈으로 바꾸며 탐욕을 부리고 있는 것이 오늘날 인류의 모습이다. 모든 것을 함께 죽여 가는, 모든 것을 한꺼번에 망가뜨려 가는 공멸의 길을 걷고 있는 안타까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적량을 알고 지나치지 않으면 바다에는 항상 물고기가 가득 차서 번창하고, 야산에는 나무와 풀들이 풍요롭게 우거지고, 논밭에는 벼와 채소가 풍성하게 자라고, 인간의 생명은 평온하게 번영하며 천수를 다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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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김장을 마치고 밭에 농사용 비닐을 다 걷지 못했는데, 마른 잡초와 엉켜 엉망이네요.
남은 비닐 걷고, 마른 잡초를 모아 태우고, 내려간 김에 동네 분께 부탁해 밭갈이도 마치고 다시 한 달만에 내려가니 여기저기 푸릇푸릇, 울긋불긋 봄 소식을 전합니다.
 
겨우내 언땅을 견디고 올라온 부추, 쪽파, 민들레를 캐서 바로 무쳐 낸 상큼한 봄 나물!
 
창고 한 구석에 넣어뒀던 감자는 싹이나서, 생각지 않게 고랑을 파 감자를 심기.
 
이렇게 고창에서의 봄은 계속 된다.
 

밭갈아주신 동네분이 겨우내 버틴 쪽파들을 기술좋게 남겨 주셨는데 한달만에 무성하게 자라다
마당 화단에 수선화
2월말 비닐과 잡초를 걷어내고 밭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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