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 사로잡힌 삶, 미래에 대한 지나친 걱정은 행복한 인생의 장애물이 되기도 하지만 경제적 판단과 결과물을 만드는데 있어 역사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 미래에 닥칠 시나리오 검토는 중요하다.



[본문발췌]


그 어떤 정부, 경제 체제, 통화, 제국도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그것들이 무너질 때 경악하면서 같이 무너진다.


사람들이 인생에 찾아온 중요한 기회를 놓치는 이유는 아주 작은 조각밖에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다 더 큰 구도에서 패턴과 사이클, 기회를 만들어내는 상호 연결된 요소들, 사이클 내 현재 우리의 위치, 향후 발생할 사건 등은 보지 못하고 개미처럼 짧은 인생에서 눈앞의 빵 부스러기를 옮기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다.


인공지능은 과거의 패턴을 연구해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출해내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상식은 거의 없고 관계 뒤에 숨겨진 로직 같은 것은 이해하지 못하며 어떠한 감정도 없다. 그들은 똑똑하면서도 바보 같고, 도움을 주면서도 동시에 위험한 존재다.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있지만 적절한 통제가 필요하며 맹목적으로 따라서는 안 된다.


지식의 습득과 생산성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시간을 두고 천천히 진화하기 때문에 부와 권력의 지형에 갑작스러운 변화를 유발하지는 않는다. 큰 변화는 오히려 사이클에 의해 움직이는 경기 호황과 불황, 혁명, 전쟁 등에서 발생하고 이 사이클은 논리적으로 타당한 인과 관계에 의해 움직인다. 예를 들어 19세기 말 생산성 증가, 기업가의 혁신, 자본주의 같은 요인들로 인해 빈부 격차는 커지고 과다한 부채가 발생하여 20세기 전반의 불황으로 이어졌다. 이로 인해 반자본주의운동과 공산주의가 생겨났으며 부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내전 및 국가 간의 전쟁이 발생했다. 즉 빅 사이클 중심으로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느 시대나 성공의 공식은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서로를 존중하며 사업을 영위하다가 어느 날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떠올라 자본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해서 생산 도구를 구입한 후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구체화한 생산 제품을 만들어내면서 이익을 창출하는 구조였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자본주의는 부와 기회의 격차와 부채 과잉을 초래했고, 이는 불황, 혁명, 전쟁을 일으켜 국내 질서와 세계 질서의 변화를 초래한다.


"역사는 운율을 밟는다History rhymes"라는 격언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한다.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지만 주요한 사건들이 반복되는 것을 운율을 밟는다고 표현했다. 사건이 발생한 인과 관계는 시간을 거스르는 보편적인 것이지만, 세상의 모든 사물은 진화하고 각자 다른 방식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 때문에 시간과 장소가 다르지만 유사한 많은 사건을 연구하면 숨겨진 인과 관계가 더욱 명확해질 것이다. 계속 진화하는 역사상의 사건들은 영구 기관처럼 작동하며, 오랜 기관 동안 진화하고 반복되는 인과 관계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느 시대나 사람들이 서로를 대하는 방식을 정의하는 체제 또는 질서가 있었다. 나는 한 국가 내의 체제는 '국내 질서'라고 부르고, 국가 간의 질서는 '국제 질서'라고 하며, 전 세계에 적용되는 질서는 '세계 질서'라고 이름 붙였다. 이들 질서는 서로 영향을 미치며 항상 변화한다. 질서는 누가 권력을 갖는지를 결정하고 부와 정치적 통제권의 분배, 의사결정 방법을 결정한다. 인간의 본성, 인류의 문화, 그리고 지구 환경에는 질서의 성격을 규정하고 운영하는 기능이 있다.


전 세계를 향한 개방성: 이것은 국력을 나타내는 효과적인 지표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단절된 국가는 전 세계의 모범 사례를 배울 수 없고 따라서 경쟁에서 뒤쳐지기 때문이다. 반면에 세계 최고 수준을 보고 배운 국가는 최고가 될 수 있다.


계급 투쟁: 역사가 시작된 이후로 모든 사회는 지배 계급 또는 엘리트 계급이라고 불리는 소수의 인원이 거의 모든 부와 권력을 통제했다.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부를 가진 사람들은 부를 생산하는 수단을 가진다. 부자들은 이를 유지하기 위해 규칙을 정하고 이를 강제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과 결탁한다.
물려받은 특권이 아닌 능력을 기준으로 다양한 계층의 인재를 뽑아 중책을 맡기는 사회가 가장 오랫동안 성공을 유지할 수 있다. 이는 1) 이런 체제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를 뽑을 수 있고, 2) 다양한 시각을 가진 인재를 영입할 수 있고, 3) 가장 공정해서 사회의 불만을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좌/우 성향: 모든 사회는 부와 권력이 어떻게 분배되느냐에 따라 정치적으로 좌우가 갈라진다. 정치 성향의 변화는 때로는 평화롭게, 때로는 폭력을 동반하여 발생하지만 변화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대개는 자본시장, 부, 가치관, 계급 구분의 사이클에 변화가 생기면 정치적 성향에도 변화가 발생한다. 자본시장과 경제가 활성화되면 대개 빈부 격차가 더 커진다. 어떤 사회는 좌파와 우파 사이에서 건전하면서도 꾸준한 균형 상태를 잘 유지하기도 하지만 보통은 양쪽을 왔다 갔다 한다.

우파인 자본주의자는 전형적으로 독립심, 근면 성실, 높은 생산성 추구, 정부 간섭 최소화, 사유재산 제도를 옹호하며 각 개인의 선택이 사회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옳다고 생각한다. 또한 민간 부문이 공공 부문보다 더 효율적이며, 자본주의가 가장 우수한 체제이고, 자수성가한 부자들이 사회에 커다란 공헌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들에게 돈을 번다는 것은 이익을 내서 그에 합당한 대가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사람들의 공평한 기회나 번영에는 큰 관심이 없다. 대중의 이익이 자신들의 이익과 부합하지 않더라도 크게 문제 삼지 않는다. 예를 들어 높은 수준의 공교육을 제공하는 것은 사회 전반적으로 생산을 늘려 부를 창출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인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크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반면에 전통적인 좌파 사회주의자는 상호의존, 정부의 지원, 부와 기회의 분배가 도덕적으로 옳으며 사회에도 유익하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민간 부문을 운영하는 탐욕스런 자본가들보다는 교사, 소방관, 육체 노동자 같은 일반 근로자들이 사회에 더 큰 공헌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파이를 공평하게 나누는 데는 관심이 있지만 파이를 키우는 데는 별 소질이 없다. 돈을 벌기 위해 근로자들을 착취하는 자본가보다는 공무원들이 더 공정하다고 생각해서 정부가 보다 적극적으로 시장에 개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돈을 벌어 저축하고 이를 자본시장에 투입하는 것(즉 자본주의)이야말로 사람들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는 강력한 동기이며, 자원을 배분하는 수단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불공정한 빈부의 격차와 기회의 박탈을 유발하여 여러 가지 역효과를 낳고, 불경기와 호경기가 반복되어 안정되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다. 오늘날 각국의 정책입안자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는 평등과 안정을 해치지 않고 자본주의에 기반한 경제 체제를 구현해서 생산성과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돈과 신용은 부와 관련이 있지만 부와는 다르다. 돈과 신용으로 부(즉 재화와 서비스)를 살 수 있기 때문에 보유한 돈과 신용의 양이 부의 양과 같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단지 돈과 신용을 더 많이 창출한다고 해서 더 많은 부를 쌓는 것은 아니다. 보다 많은 부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생산성이 높아야 한다. 돈과 신용의 창출과 부의 창출간의 관계가 혼동될 때가 있지만 이는 경제의 사이클을 움직이는 가장 큰 원동력이 된다.


많은 사람이 화폐는 영원하며 '현금'은 가장 안전한 자산이라고 믿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모든 화폐는 가치가 하락하다 결국 소멸한다. 이런 사태가 발생하면 현금과 채권(나중에 현금을 받는다는 약속 증서)은 가치가 하락하고 결국 시장에서 사라진다. 많은 돈을 찍어내 부채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이 부채로 인한 부담을 줄이는 가장 간편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미상환 부채가 별로 없는 장기 부채 사이클 초기에는 수익을 창출하는 채권자산을 보유하는 것이 유리하다. 그러나 미상환 부채가 많아지고 통화 가치가 하락하는 사이클의 후반부에는 수익률이 높다고 해도 채권자산을 보유하는 것이 위험하다.


진실이 사라진 언론. 사람들이 점점 양극화되고 감정적으로 되면서 언론의 왜곡과 선전 선동이 점점 증가한다. 5단계가 되면 목적을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은 대중의 감정을 조작하고 대중의 지지를 얻어 상대방을 없애기 위해 종종 언론계 종사자와 협력한다. 즉 좌파적 경향의 언론인은 좌파의 활동가들과 힘을 합치고, 우파적 경향의 언론인은 우파의 활동가들과 같이 행동한다. 전통적인 언론 매체나 소셜미디어를 막론하고 언론에 대한 신뢰는 우리 세대에서 가장 낮다. 심지어 매우 유능하고 막강한 사람들조차 중요한 문제에 대해 언론에서 대놓고 목소리를 높이기를 두려워하고 공직선거에 나서기를 꺼린다.
뉴스 언론 매체는 그 권한에 대한 품질 관리 내지 견제가 없는 유일한 권력이다.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언론을 통제하는 것에는 반대하지만 동시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조치가 내려져야 한다는 데는 동의한다.
우리는 언론의 정확성과 정직함이 사라지고 언론계에 근무하는 사람들의 최우선 목적이 선정주의와 상업주의 그리고 정치적인 목적의 여론 조작이 되어버린 시대에 살고 있으며, 이는 우리의 건강을 위협하는 암과 같은 존재라는 점을 지적해야 하겠다.


모든 시장은 기본적으로 4개의 결정 요인에 의해 작동한다. 즉 성장률, 물가 상승률, 리스크 프리미엄, 그리고 할인율이다. 투자란 미래에 돌려받을 돈을 기대하고 현재에 지불하는 행위다. 미래에 받을 금액은 성장률과 물가 상승률에 의해 결정되며, 투자자가 현금을 보유하지 않고 투자함으로써 감수하는 위험은 리스크 프리미엄이다. 그리고 미래에 받을 돈의 '현재 가치'는 할인율에 의해 결정된다.


투자자들은 공포에 질려 대체로 상황이 안 좋아 주가가 바닥일 때 주식을 팔고, 주가가 고점일 때 자금이 넘쳐 기대감에 가득 차 주식을 산다. 이는 투자자들의 실질 수익률이 시장의 수익률에 못 미친다는 의미다.


투자자들이 스스로 자주 점검해야 할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이자 지급액이 평가절하 리스크를 상쇄하느냐이다. 물가 상승률보다 적은 이자를 받느니 차라리 아무것이라도 사서 인플레이션에 대비하는 것이 어떨까?


나는 자산 가치가 통화와 신용 가치의 역수이고(즉 통화와 신용이 저렴할수록 자산 가격은 더 비싸진다), 통화 가치는 기존 통화량의 역수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중앙은행이 통화와 신용을 많이 창출하고 통화를 더 저렴하게 만들 땐 더 공격적으로 자산을 소유하는 것이 현명한 대처 방법이다.


상황이 잘 돌아가면 도덕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유지하기 쉽다. 그러나 험난한 싸움을 하게 되면 이전에 부도덕하다고 여겼던 일을 쉽게 정당화하기 시작한다(이제 비도덕적인 일을 도덕적인 일이라고 일컫는다)


미래에 대처하려면 1) 현재 일어나는 일을 예상할 수 없을지라도 제대로 인식하고 적응하며, 2) 일어날 수 있는 일을 확률에 따라 제시하고, 3) 그것을 완벽히 알진 못하더라도 용납할 수 없는 사태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을 정도로 이해를 넓힐 필요가 있다.


시장과 인생에서 성공을 거두려면 a)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지는 진화가 빚어내는 상승세에 배팅하되, b) 그 과정에서 맞닥뜨릴 사이클과 충돌에 무너질 정도로 지나치게 공격적으로 배팅해선 안 된다는 점이다.


장기적으로 가장 큰 위험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간과하기 쉬운 '돈의 통화 가치' 위험이다.


나는 온갖 분석 작업을 수행하지만,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것이 알려진 것보다 훨씬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역사는 꽤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지만, 미래는 정반대다. 내가 알기로는 미래에 대해 자세히 그리고 정확하게 예언한 경우는 단 한 건도 없었다. 투자자가 역사를 정확하게 이해한다고 해서 미래를 좀 더 정확하게 맞출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투자가 아닌 인생을 건 결정을 내릴 때도 마찬가지다. 요점은 이렇다. 많이 틀릴 가능성이 있다는 가정에 근거해서 배팅하는 방법을 익히는 데 집중해보자.


나는 아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에 대처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미래에 배팅하는 것은 확률에 배팅하는 것이며, 확률을 포함해서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 그것이 바로 대처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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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든 가능성을 파악하고,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해 생각한 다음 극복할 수 없는 시나리오를 제거할 방법을 찾아라. 극복할 수 없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식별하고 제거하는 것이 우선이다. 인생에서나 시장에서나 게임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게임에서 참패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최악의 시나리오를 감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안전과 자유를 누리는 동시에 좋은 결과를 내는 능력을 갖출 수 있다.
  • 분산하라. 교토삼굴, '영리한 토끼는 굴 세 개를 파놓는다', 굴 세 개 중 하나가 위험해지면 다른 굴로 도망가야 한다.
  • 당장 눈앞의 만족보다 지연된 만족을 우선시하여 미래에 더 나은 상황을 마주하라.
  • 가능한 한 가장 똑똑한 사람들과 함께 사안을 다각도로 분석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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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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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과 북미 선진국들의 번영과 깨끗하고 정돈된 환경은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남아메리카, 태평양 섬들의 정복과 수탈, 희생의 결과물!


[본문발췌]

인간 집단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닮지 않은 자는 늘 증오의 대상이 되는 법.


조개를 줍고 있던 방드르디가 맑고 깨끗한 모래밭에서 하얗고 둥근 얼룩 모양의 조그마한 자갈을 주워 로빈슨에게 보여주었다. 그러더니 손으로 달을 가리키며 로빈슨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말 좀 들어봐. 달이 하늘의 조약돌이야? 아니면 이 작은 조약돌이 모래의 달이야?"
그러고는 로빈슨이 이 별난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갑자기 방드르디가 뛰쳐나가더니 쏟아지는 비에 몸을 맡겼다. 그는 얼굴을 뒤로 젖히고 빗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리고 로빈슨에게 다가와 말했다.
"자, 보라고. 모든 사물이 슬퍼서 울고 있어. 나무도 울고 바위도 울고 구름도 울고 있다고. 나도 그들과 함께 우는 거야. 우, 우, 우! 비는 섬과 세상의 모든 슬픔을 나타내지."
로빈슨도 방드르디의 말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달과 조약돌, 눈물과 비처럼 별로 상관이 없는 사물들이 서로 헷갈릴만큼 닮을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모호한 표현이긴 하지만 이 사물에서 저 사물로 옮겨갈 수 있다는 것을 조금씩 인정하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네 이름은 '디망슈'란다. 축제와 웃음과 놀이의 날이지. 그리고 나에게 너는 언제나 일요일의 아이일 거다."


이제 동굴이 폭발하고 로빈슨과 방드르디는 완전한 원시 자연 속에 놓이게 되었다. 이 세계에서 로빈슨은 방드르디보다 더 이상 우월하지 않다. 로빈슨이 섬에 인위적으로 만들어놓은 문명 세계의 시간은 자연의 시간으로 돌아갔으며, 계획된 노동과 일은 놀이와 유희로 바뀌었다. 일에는 의무가 뒤따르고 놀이를 하는 데는 자발성만 있으면 된다. 로빈슨은 방드르디가 더 이상 지배와 복종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 로빈슨은 방드르디를 지배하고 있다고 믿으면서도 사실은 그것이 불가능하고 자신에게는 큰 부담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인간관계는 지배와 복종의 관계가 아닌 수평적인 동등한 관계일 때 진정한 소통과 이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로빈슨의 후손들이 오늘날의 유럽인들이라면, 그들은 산업혁명과 전쟁, 과학기술의 발전 등이 자신들의 삶을 어떻게 피폐하게 만들었는지 깨닫고 자연에 동화되어 사는 삶, 친환경적인 삶을 실천하며 살아가려 한다. 반면 방드르디의 후손들일 수 도 있는 개발도상국이나 저개발 국가의 주민들은 과거에는 자연과 동화되어 사는 삶을 살았다면, 이제는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발과 환경 파괴에 내몰리고 있다.


태평양의 외딴섬에 표류한 문명인 로빈슨 크루소와 자연과 동화되어 사는 자유분방한 야만인 방드르디.
대니얼 디포 이후의 로빈슨 크루소 이야기들 가운데 주제 면에서 가장 큰 혁신과 변화를 만들어낸 작품은 단연코 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야생의 삶>이다. 그는 이 책에서 야만인 방드르디를 더 이상 노예가 아닌, 로빈슨과 평등한 관계로 끌어올리며 문명과 야만, 질서와 혼란, 이성과 본능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뒤흔드는 새로운 관점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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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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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된 인간으로 삶을 후회하지 않으려면, 인생을 욕하지 않으려면, 자기 삶을 살아라.


[본문발췌]

우리 인생은 외부로부터 강요된, 어처구니없는 조건에 안주할 수밖에 없는 실로 악랄한 것이다.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하고 절대 빼놓을 수 없는 행위에는 반드시 본능적인 기쁨이 따른다. 그런데 아쉽게도 문명의 발달이 일의 가치를 심하게 변질시키고 말았다. 삶의 기쁨을 누리기는커녕 오히려 고통을 강요하는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바꿔 놓은 것이다.
과거 인간은 다른 야생동물과 마찬가지로 비록 수명은 짧고 위험이 가득한 환경에 살았지만,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충만감을 얻을 수 있는 행복한 존재였다.
그런데 문명의 발달이 가져다준 편리함과 복잡함이 일의 대부분을 불쾌하고 고통을 수반하는 것으로 변질시켰고, 이는 비관적인 인생관과 불행의 원천이 되었다. 인류의 모든 고뇌가 바로 여기서 비롯되었다. 원래 산다는 것은 훨씬 즐겁고 사는 의미를 굳이 물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즉 철학 따위가 생겨날 여지가 없을 정도로 충만한 것이었을 터이다. 그러나 오늘날을 사는 인간은 좋고 말고 없이, 이 참을 수 없는 세상을 끝까지 살아가야만 한다. 사회적으로 의의가 있을지 몰라도 개인적으로는 아무 재미없는 일에 구속되어 잿빛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좋은 위치, 즉 높은 연봉에 안정적이고 남에게도 좋아 보이는 직업을 얻기 위함이다. 그러기 위해 배운 것에 불과하니, 충분히 학문을 익히지 않았다 한들 큰 문제는 없다. 고용주가, 단순히 사회적인 값어치를 매기는 데 목적이 있는 학력을 그렇게나 중시하는 까닭은 오로지 순종할 인물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세상의 가치관에 어디까지 순종적일 수 있는지, 그 어처구니없는 입시 전쟁에 얼마나 투신한 인간인지를 판단하고 싶기 때문이다.
남에게 고용되는 처지를 선택하는 것은 자유의 9할을 스스로 방기하는 일이다. 인생 전부를 남의 손에 빼앗기는 것이다. 쥐꼬리만 한 월급과 상여금과 퇴직금을 빌미로 지시에 따르기만 해야 하는 인형 취급을 당하고, 퇴직 후 제2의 인생이라는 거짓으로 점처된 무지갯빛 꿈을 꾸는 동안에 인간으로서의 존엄은 철저하게 무시된다. 직장을 떠날 때에는 이미 기력도 체력도 다 바닥나 좌절감과 소외감에 시달리는 노년이라는 함정에 내던져진다.


불합리에 대한 분노를 포기한 인간은, 저항의 정신을 내던진 인간은, 인간임을 포기했을 뿐만 아니라 삶 자체도 스스로 포기한 어리석고 우매한 자에 불과하다.
이치가 그러한데, 아직 청춘의 한창 때를 보내고 있으면서도 이미 죽어 있는 젊은이가 얼마나 많은가.
허황된 이미지나 좇게 하는 인터넷 세계를 전부라 여기고, 아주 적은 돈으로 살 수 있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즐거움으로 뻥 뚫인 마음을 메우려 몸부림치는 젊은이들의 허망하고 기이한 나날들.


이성이야말로 자아의 원천이다.
나란 무엇인가? 하는 철학적 질문에는 갖가지 대답이 있을 수 있지만, 본능이나 감정이 자신의 핵심을 이루지 않는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오히려 의지를 조절하는 사고력을 우선하는 삶, 즉 이성에 따른 선택에 그 대답이 존재한다.
이성의 길을 걷는 순간 인생은 빛나기 시작한다. 자립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더불어 인간이 무엇인지도 이해하게 된다.
이성을 꺼리고 감정을 우선시하며 본능에 따르는 삶이 편할지도 모른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느 옛말이 있듯이, 인간관계가 어긋나 남들이 멀리하는 탓에 점점 더 고립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로만 개성과 자립과 정체성을 부르짖는 게 아니라, 정말로 그것을 추구하고 분명하게 확립해서 새로운 삶을 열어가려 한다면, 진정한 자아를 증명해 주는 이성과 함께 독립의 길을 걸어야 마땅하다.


이 넓은 세상에 다양한 직종이 있는데, 월급 받고 일하는 직장인이라는 위치를 왜 그렇게 간단히 손쉽게 선택하는 것인가.
그 주된 이유가 일이 편하고 수입이 안정적이기 때문이라면, 말도 안 되는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예전 같으면 그럴 수 있지만, 경제성장이 한계에 도달했을 뿐만 아니라 침체기에서 후퇴기로 뒷걸음질하고 있는 지금, 그것은 오래전에 신화가 된 이미 통용되지 않는 낙관이다.
어쩌다 그런 직장이 몇 군데 남아 있다고 해도, 정년퇴직을 하는 날까지 어떤 나날을 보낼지 뻔히 예상할 수 있는 인생이 뭐가 그리 재미있는가. 비록 캄캄하지만 미래는 온갖 가능성을 품고 있다. 인생을 헤쳐 나가는, 설레고 두근거리는 참맛도 숨기고 있다. 이런 미래를 안정이라는 따분한 이름에 매달려 허비하려는가. 자신에게 잠재된 능력을 조금도 개척하지 않고 끝내는 생애에 어떤 의의가 있다는 말인가.


원하는 일은 아니지만 돈은 그 일로 벌고, 취미에 몰두하는 삶을 선택하는 자도 많다. 하지만 취미는 어디까지나 취미일 뿐이다. 일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덜고 기분 전환을 위한 것, 그 이상은 아니다.
그런 중용적인 선택은 본인이 생각하는 만큼 현명한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남의 밑에서 일한다는 점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남의 손에 급소를 내준 인생은 인생이라 할 수 없다.
애당초 일이냐 취미냐 하는 양자택일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생활의 기반인 일 자체가 재미있고 거기에서 사는 보람을 느낄 수 있어야지, 안 그러면 살고 있으면서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고 만다. 타인이 주는 월급을 대신해 하는 일로는 절대 만족할 수 없다. 거기에는 자신의 의지라는 것이 전혀 반영되지 않기 때문이다. 고용주의 목적은 고용인을 만족시키는 것에 있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충족에 있다. 공무원의 세계에서도 그 점은 다르지 않다. 상사는 부하를 출세의 도구로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튼 직장이란 인간 취급을 받을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얘기다.
수입이야 많든 적든, 소박하나마 성취감을 얻을 수 있고 평생을 매진할 수 있는 일을 찾으려면 자영업밖에 없다. 요컨대 이 세상에 직장이이라는 직업은 없다 치고 일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직장은 사육장이다.
하루 8시간 노동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직장에 구속되어 있는 시간이 고작 하루의 삼분의 일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 8시간을 위해 8시간의 수면이 필요하고 나머지 8시간에 출퇴근과 야근, 접대, 사교 등의 시간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자신만을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은 거이 없는 셈이다. 식사와 목욕, 때로는 독서까지도 직장을 위한 시간이 되고 만다. 쉬는 날 역시 육체와 정신의 피로를 푸는 데 다 쓰는 꼴이다 보니 이 또한 직장을 위한 시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즉 하루 24시간, 일 년 365일, 퇴직하는 날까지 몇십 년을 고스란히 직장에 빼앗기는 것이다. 그래서야 타인을 위한 인생이지, 아무리 열심히 해 봐야 본인을 위한 인생이랄 수 없다.


설사 안정된 생활이 실제로 존재한다 쳐도, 그런 생활이 대체 뭐가 재미있다는 것인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인생, 내일 또는 미래의 자신이 어떻게 변해 있을지 짐작도 할 수 없는 두근거림과 설렘의 연속 속에서 진정한 충만감을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의미 있는 삶이 아닌가. 그런데 출발선에 선 시점에 그 중요한 조건을 팽개치는 것은 대체 무엇 때문인가.


거울을 들여다볼 때마다 선명하게 비치는 것은, 젊음이라고는 한 톨도 지니지 않은, 회의에 절고 뭐라 설명할 수 없는 허탈감에 칭칭 휘감겨 있는, 온갖 결점을 드려낸 채 신빙성 없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노예의 처지에 깊이 길든 '가축 인간'이다.
노동자라는 호칭에 속아서는 안 된다. 그 실질적인 처지는 바로 노예이다.
폭력으로 강요하는 것도 아닌데 자진해서 노예의 처지를 선택하다니, 생각이 있기는 한 것인가.
자유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업신여김을 당할 뿐인 비참함 신분의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드는가.
그럼에도 일개 독립한 인간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
학생 시절에 넘쳐흘렀던 자부심과 자존심은 다 어떻게 한 것인가.
또는 처음부터 그런 것은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인가.
타자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숨을 쉴 수 없는 얼치기인가.
자유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하루 세 끼를 먹고, 그럭저럭 남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는데도, 왠지 하루하루가 밋밋하고, 살아 있음을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일도 없고, 새 아침을 맞아 본들 마음에서 우울함이 떠나지 않는 원인을 찾아본 일이 있는가. 그 이유를 알고 있는가. 인생이란 그저 그런 것이라고 믿는 것은 아닌가.
동물원의 동물이나 애완동물이 아닌, 즉 야생에 사는 동물들이 그렇게 가혹하고 불안정한 환경에서도 어떻게 그렇게 생기 발랄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그들은 태어난 순간부터 죽음이 찾아오는 순간까지 끊임없이 위험에 노출되어 있지만, 수많은 위험과 정면으로 맞서는 데서 오는 충만감으로 삶을 이어 간다. 긴장으로 점철된 하루하루를 즐기는 것이 몸에 배어, 비록 수명은 인간보다 훨씬 짧아도 삶의 충만감은 인간과 비교할 수 없다. 이런 충만감이야말로 이 세상을 사는 자로서 누려야 마땅한 진정한 행복이라는 것을 온몸과 오감으로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 안에서만 빛나도록 생겨 먹었다는 철칙을, 그 우선권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 어떻게 살든 본인 멋대로라는, 자유와 함께하는 삶만이 존재의 기반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인간도 동물의 한 족속이라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야생동물과 마찬가지로 인간 또한 같은 유의 자유 속에서 충만감과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으며, 그것 없이는 견딜 수 없는 구조를 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자유를 거머쥔 인간은 놀라우리만큼 적다. 많은 사람이 그 보물을 상실했으면서도 보통 다들 그렇다고 여기고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복잡한 탓에 거짓이 많은 사회라는 조직, 거기서 생겨난 문명과 지위와 재산의 격차로 인해 생물로서 누려야 마땅한 '멋대로사는' 지상의 특권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다 끝내는 편하게 사는 것이 최대의 꿈이 되었고, 그 꿈이야말로 혼을 치유할 수 있는 지름길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지금은 그 허황된 희망조차 실현되지 않고, 실제로는 조촐한 휴식의 장을 확보하는 것마저 어려운 실정이다.
살수록 인생이란 재미없고, 기대한 만큼은 아니었다고 실망하면서 행복이 멀어짐을 절감한다. 무엇이 옳은지 판단하기 어려워지고, 강한 자를 우러르며 우습기 짝이 없는 영웅을 은근히 기다리면서 출퇴근 전철 안에서 죽은 사람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인생의 절정기는 학교 축제 때뿐이었음을 절감하게 되는 이유는 바로 자유를 스스로 내던졌기 때문이다.
예정하고 계획한 대로 인생을 순조롭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의 표정이 어딘가 모르게 밝지 않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직장인이라는 노예의 처지가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목을 조여 온다. 마음을 갉아먹고, 정신을 썩게 하고, 생기를 빼앗아간다. 그러다 끝내는 혼에도 녹이 슬어 비인간적인 존재로, 자신에게도 반발하지 못하는 로봇 같은 무기물로 기울어 간다.
그러다 자신이 과연 어떤 인간이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된 시점에 정년의 날을 맞는다. 송별회의 애처로운 여운과 여생을 헤쳐나가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퇴직금과 허접한 꽃다발을 안고 직장 밖으로 쫓겨났을 때, 내일부터 할 일이 없는 공허함을 자유로 착각하고, 책임의 중압감에서 벗어난 편안함을 자유로 잘 못 알고, 마음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어떤 감정이야말로 오랜 세월 바라 왔던 심경이 틀림없다고 믿고, 제2의 인생이 시작된 것을 자축하며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지른다.
그러나 그 기쁨은 기껏해야 반 년 정도밖에 지속되지 않는다. 이것저것 취미 생활을 해 보지만 어느 것이나 허망하고, 하는 일이 없다는 처지가 몹시 비참하게 느껴지고, 사회에서 쓸모없는 존재라 낙인찍힌 듯한 소외감에 시달린다. 그렇게 반가웠던 자유가 오히려 한없는 고독감을 불러오고, 현역 시절의 무용담에 귀 기울여 주는 이도 없어지니 술에 절어 지내게 된다. 날로 깊어지는 주름과 노인병과 죽음의 예감에 떨며 비관론에 짓눌려, 좀 더 달랐을 수도 있는 생애를 속수무책으로 끝낸다.
이들은, 대체로 이런 것이 직장인의 평균적인 삶이라 수긍하고는, 똑같은 길을 걸으려 하는 아들을 한순 섞인 눈길로 바라본다. 그 긴 한숨이 끝났을 때, 직장인의 가면을 여전히 벗어던지지 못한 자신을 깨닫고는 자기도 모르게 모기 우는 소리처럼 자그많게 이렇게 중얼거린다.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처음부터 완벽한 인간을 만들었으면 고생을 덜었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일부러 완성도가 떨어지는 생물을 만들어 죄 많은 존재라 일방적으로 단죄하고 자기 책임을 전가하고는, 몸부림치는 그 가엾은 모습을 바라보며 즐기는 극단적인 사디스트라는 말인가.
아니면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가 나설 기회를 늘려 자신에게 의지하고 매달리게 하려는 냉혹한 나르시시트인가.
그렇게 천박한 존재가 신일 수는 없지 않은가.
무엇보다 신은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조차 잘 모른다. 만약 알고 있다면, 지구는 행성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그 간단한 사실 정도는 경전이나 성서에 기록되어 있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또 이 하잘것없는 별 하나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종교가 있는 것만 봐도, 그것이 사기극이 아니고 무엇이라는 말인가. 요컨대 신 따위는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불안과 주저와 고뇌야말로 살아 있다는 증거다.


자기 신뢰의 습관을 터득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수확은 전 생애에 걸친 목적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만의 흔들림 없는 목적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자립의 정도를 판단할 수 있다.
살아가는 자기만의 목적을 구체적으로 갖고 있고, 그 목적을 향해 하루하루 매진하면서 충만감을 느끼느냐 아니냐는 독립한 인간이 되었는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사람은 돈과 명예에 약하다. 너무 약하다.
그리고 불안과 공갈에도 약하다. 너무 약하다.


알아서 기니 그 따위로 살다 죽는 것이다.
사대주의는 자기가 없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또는 자기를 갖지 않으려 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래야 편히 살 수 있다는 이유로 자신의 권리를 버리고 추종의 길을 택한 자는 인간이기보다 곤충에 가깝다. 설령 국가 체제를 바꿔 본들, 불특정 다수의 인식과 의식이 근본부터 바뀌지 않는 한 유사한 비극이 끝없이 반복될 뿐이다.


사회주의 국가는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이념 때문에 붕괴했다.
자본주의 국가는 현실에 너무 맞추다 보니, 즉 욕망에 너무 충실하다 보니 붕괴하고 있다.


국가를 필요 이상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
국가를 안일하게 믿어서도 안 된다.
국가를 손아귀에 쥐고 좌지우지하는 것은 아주 평범하지만 욕망으로 가득한 그냥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들이 내미는 당근을 거부하고 그들이 휘두르는 채찍에 굴하지 않는 한, 그들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당근을 원하고 채찍 소리에 몸을 움츠리는 인간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현실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요컨대 국민 대부분은 상대가 강자이면 그게 누가 되었든 추종하는 지조 없는 인종이며, 그 때문에 언제나 동료를 배반하고 태도를 뒤집는다는 것을 늘 가슴에 새기는 것이 좋다. 그리고 자신이 그들에 동조하여 같은 부류가 될 것 같다는 조짐이 올 때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친다. "그런 인생 따위는 엿이나 먹어라!"


생각하는 것을 꺼리고 싫어하는 것은 사람임을 스스로 포기하는 일이고, 자기를 타자에게 맡기는 꼴이며, 인간으로 태어난 가치가 없다고 외치는 것이다.


자신을 스스로 단정하면 단정할수록 정답에서 멀어질 뿐, 무슨 일이든 직접 부딪쳐 보지 않고는 알 수 없다. 다 도전해 보라고 젊음이 있는 것이다. 이제 싫고 좋음이나 자기류의 해석은 모두 무시하고, 온갖 일에 도전해 보면서 자기 안에 소리 없이 숨겨져 있는, 곤히 잠들어 있는 재능을 발굴해야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자신을 발견할 기회는 늘 변화하고 새로운 나날 속에, 온갖 곳에 무진장하게 널려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심히 안타깝게도 이 나라에는 삶의 공식이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으며, 젊은이들이 자신의 가능성을 탐색할 시간도 거의 주지 않는다.
학교를 졸업하면 바로 취직한다. 게다가 그 직장에 오래 헌신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고, 그렇게 하는 것을 불변의 이념으로 받아들이고 말았다. 이 때문에 많은 젊은이가 정해진 틀에서 벗어나는 것에 강박관념 비슷한 불안을 느끼고, 무의식중에 안정을 최고의 목표로 삼게 되었다. 결국 가장 중요한 인생의 초기 단계에 이미 다른 길은 봉쇄되고 만 것이다.


국가는 골 빈 국민을 좋아한다. 다루기 쉽고 제어하기 쉬운 존재!


사람은 생각하기 위해 태어나고, 생각함으로써 생명을 불태우고, 생각하기에 존재 의의가 있다.


전심전력으로 노력할 가치가 있는 목적을 향해 길 아닌 길을 걸어가는 자에게 온갖 장소는 보고일 수 있다.


삶의 노예가 되는 한이 있어도, 죽음을 좇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오랜 시간 이어 온 삶을 무시하고 찰나에 불과한 죽음에 집착하는 것은 너무도 바보스러운 짓이다.
생명의 친구는 어디까지나 삶이지 결코 삶에 부수적인 죽음이 아니다.
그러니 삶을 통해 죽음을 응시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죽음을 통해 삶을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칠십 가까이 살면서 절체절명, 고립무원, 사면초가 등의 궁지에야말로 명실상부한 삶의 핵심이 숨겨져 있음을 느꼈다. 그안에서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과정에야말로 진정한 삶의 감동이 있다고 확신했다.
한 번 그 맛을 알고 나면 이성으로 자신을 계몽하면서 나아간다. 갖은 고난과 역경을 굳이 배척하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런 상황에 단호하게 대항하는 것에 삶의 참된 가치가 있음을 깨닫고 '자기 의존'이야말로 궁극의 목적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마음의 나태를 가벼이 여기고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지식을 열심히 쌓아 올리는 것은 지성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동물로 이 세상에 태어났지만, 맨 마지막에는 정신을 스스로 고취할 수 있는 인간으로 떠나야 비로소 고상한 인생이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죽을 몸인데, 왜 그렇게까지 겁을 내고 위축되고 주저해야 하는가.
자신의 인생을 사는 데 누구를 거리낄 필요가 있는가.
그렇게 새로운 마음가짐과 태도를 무기로, 애당초 도리에 맞지 않고 모순투성이인 이 세상을 마음껏 사는 참맛을 충분히 만끽해라.
약동감이 넘치는 그 삶을 향해 저돌적으로 나아갈 대 드높이 외칠 말은, 바로 이것이다.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너를 키우는 자가 너를 파멸시키리니."


남의 손에 급소를 내준 인생들에게

  • 부모의 사랑에 거짓이 없다고 믿는 것은 부모 자신뿐이다.
  • 그 어떤 국가도, 국가란 이름이 붙어 있는 나라는 하나같이, 실은 국민의 것이 아니다.
  • 모든 종교는 선이라는 옷을 두른 악이며, 원래 자유로워야 할 개인을 속박하는 컬트이다.
  • 노동자라는 호칭에 속아서는 안 된다. 그 실질적인 처지는 바로 노예이다.
  • 어떻게 살든 본인 멋대로라는, 자유와 함께하는 삶만이 존재의 기반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 불안과 주저와 고뇌야말로 살아 있다는 증거다.
  • 삶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의지로 쟁취하는 것이고, 죽음은 가능한 한 물리치는 것이다.
  • 자신의 껍데기를 깨부술 힘은 자신에게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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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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