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하지 않은 것도 당연하다고 주입하는 사회에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면 지배당하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스스로 생각하고, 공감하며 자기 안의 자신을 만나자.
[본문발췌]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가장 힘든 일입니다. 노자의 <도덕경>에도 이런 말이 나옵니다. "승인자유력(勝人者有力) 자승자강(自勝者强)" 남을 이기는 사람은 힘만 센 것이고, 나를 이기는 사람이 진정한 강자다.
모험하는 마음은 질문하는 마음이고, 건너가는 마음이고, 어린이의 마음입니다. 순수한 사람만이 호기심을 갖고 질문할 수 있지요. 그리고 질문하는 사람만이 모험할 수 있습니다. 호기심이 없는 사람은 대답만 하고 판단만 합니다. 이런 사람은 안전을 추구해 모험을 할 수 없지요.
놀이하는 마음을 가지고 순진하게 태어난 어린이는 규칙과 숫자를 배우면서 어른이 되도록 강요받는다. 세계를 보이는 대로 볼 수 있던 마음이 봐야 하는 대로 보도록 상자에 갇힌다. 이런 세상에서 어린이는 항상 '아직 덜 어른'으로 치부된다. 사실 대부분의 교육은 어린이에게서 어린이의 마음을 빼내고 어른의 마음을 강제로 주입하는 일이다. 이는 창조적 유희를 막는 엄청난 폭력이다. 어린이는 '아직 덜 어른'이 아니라 어린이 자신일 뿐이다. 어린이에게 어린이의 시간을 돌려줘 어린이가 어린이로 자랄 수 있게 해야 한다. 어른이 어린이를 내리누르지 않아야 한다. 어린이는 스스로 도는 수레바퀴이기 때문에 외부의 간섭이 없을 때 더 성스럽다. 낙타처럼 정해진 궤도를 따르지 않고 스스로 도는 어린에게는 새로운 출발과 최초의 움직임을 감행하는 순수한 충동이 저장되어 있다. 이 충동은 온전히 자신 안에서 솟아나는 것을 해보려는 새로운 동작이다. 그러므로 어린이의 심장은 모험의 박동으로 쿵쿵 뛴다.
카뮈는 신을 '관념의 총아'로 보았지요. 소설에는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신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내가 어둠 속에 있고, 거기서 뚜렷이 보려고 애쓴다는 뜻이다." 관념에 휩싸이면 세계가 명료해집니다. 자본주의, 사회주의, 우파, 좌파 이런 것들요. 반면, 관념을 버리면 우리는 어둠 속을 걸어야 합니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 분명하고 또렷하게 보려고 애써야만 하지요.
살아가면서 우리는 많은 정치적 투쟁을 봅니다. 그런데 그 정치적 투쟁들은 대부분 성공하지 못합니다. 거기에는 이념이나 관념에 대한 집착만 있을 뿐 인간에 대한 애정은 없기 때문입니다. 오통 판사가 다시 수용소로 돌아가는 것도, 리유가 부인과 멀리 떨어진 채 오랑 시에서 헌신하는 것도 모두 인간에 대한 애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인간을 사랑한 것이지 인간에 대한 사랑을 관념적으로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은 항상 다음을 도모하고, 어떤 목표나 목적을 향해서 계속 나아갑니다. 다음을 갈망하는 의식의 집중적 활동, 이것을 생각이라고 할 수 있지요. 생각의 발단은 불편함을 인식하는 겁니다. 불편함을 인식해서 어떤 문제를 발견하면 그것을 해결하려고 덤비는 일, 이것이 생각입니다.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이 다 불편함을 해결한 결과입니다.
바람직한 것은 사회가 이미 정해놓은 기준을 습관처럼 내면화한 결과입니다. 그렇게 정해진 기준에 갇혀 숙고의 과정 없이 행동하다 보면 이기적이고 폐쇄적이게 됩니다. 바라는 것을 하면 오히려 궁금증과 호기심을 바탕으로 새로운 세계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에 개방적인 사람이 됩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제대로 발휘하기 어려운 폐쇄적인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사회가 이미 정해놓은 기준을 좇는 사람들은 생각이라는 것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회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고, 사회가 시키는 말만 반복하면 되니까요. 그런데 자기를 향해 걷는 사람은 그런 폐쇄적인 사회 전체에 대해 숙고합니다. 숙고함으로써 그 굳어진 사회가 나아갈 다음 단계, 새로운 세계를 모색하는 것이지요. 자기를 향해서 부단히 걷는 일, 자기에게 도달하려는 지적 욕구, 이것이야말로 인간을 완성하는 길입니다.
고독은 외로움과 달라요. 외로움은 다른 무엇이 없어서 생기는 약한 마음이지만, 고독은 자기 안에 머무는 것, 자기만 존재하는 것, 굉장히 당당하고 심지어는 오만하기까지 한, 매우 강한 마음입니다. 자기에게 향한다는 말은 고독하다는 뜻이지요. 고독한 사람은 질문을 합니다. 반면 대답하는 자는 휘둘리는 자입니다. 또한 바라는 것을 하는 자는 고독한 자이고, 바람직한 것을 하는 자는 휘둘리는 자입니다.
독서나 산책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이것은 고도의 지적 작업입니다. 독서를 통하면 내가 다른 데로 건너가고, 산책을 해도 내가 다른 데로 건너가지요.
"저마다 삶은 자기 자신을 향해 가는 길이다."
밖에서 주어지는 것은 이미 정해져 가정이나 사회에서 집단적으로 공유되는 바람직한 것이다. 집단적으로 공유되는 것은 그것을 해석하는 명확한 독법까지도 이미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대로 적용하기만 하면 된다. 반면에 나에게서만 솟아는 것은 나에게도 비밀스럽다. 내가 바라는 것을 알려면 숙고하는 수고를 심하게 들여야 한다. 힘든 일은 피하고 힘들지 않은 쪽으로 기우는 이 게으른 인간이란 존재들은 힘들여 자신을 알려고 하지 않고 정해진 것들을 쉽게 받아들이려고만 한다. 데미안의 말은 분명하다. "게으르고 생각하기 싫어하고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냥 복종해버린다." 인간은 정치와 도덕과 종교가 제공하는 믿음의 집단 최면에 빠져 "그냥 복종해버리면서" 자기를 스스로 내팽개치곤 한다. 내팽개쳐진 자기를 되찾아야 정치와 종교와 도덕도 제자리를 잡는다. 정치와 도덕과 종교는 닫혀 있고 나는 호기심으로 열려 있다. 그 호기심으로 균열을 내고 틈새를 비집는 일을 우리는 사유라고도 하고 생각이라고도 한다. 한번이라도 진짜로 살다 가고 싶은 사람은 숙고하는 수고를 기꺼이 감당하며 정해진 것에 틈을 내어 그 사이를 헤치고 나갈 수 있어야 한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한 세계를 깨뜨리면서 "다른 세계"로 진입한다. 태어나기 위해서 한 세계를 깨뜨린 자는 양쪽 세계 사이에서 방황한다. 깨뜨린 세계에서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태어난 세계로도 완전히 진입하지 못한 채 두 세계 사이에 끼어서 우왕좌왕하는 것이다.
"매일매일은 새로운 날이지. 운이 따른다면 더 좋겠지만. 우선은 지금 하려는 일에 집중하겠어. 그러면 운이 찾아 왔을 때 준비가 되어 있을테니." 운은 자기에게 진실한 사람에게만 오는 선물이다.
집단이 공유하는 이념이나 믿음으로 당당한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당당한 자라니! 다른 사람의 인정에 좌우되지 않고 자기에게 떳떳한 자다. 소유의 길이 아니라 존재의 길을 가는 자들은 언제나 자기에게 당당하다. 산티아고 할아버지는 자신만의 향기를 내뿜으며 말한다. "인간은 파멸 당할 수는 있을지언정 패배하지는 않는다." 청새치가 다 뜯겨 나가고 뼈만 남는 한이 있더라도, 더 나아가 청새치를 지키다가 상어에 물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어부로서의 자부심만은 잃지 않겠다는 자세다. 이는 작은 이익들에 휘둘리는 삶이 아니라 자부심과 존엄을 지키는 삶을 살겠다는 인간 선언이다.
철학은 개념으로 하는 것이지만 정치의 핵심은 말입니다. 말을 얼마나 신뢰 있게 하는지, 자기가 한 말을 얼마나 지키는지가 정치의 바름을 판단하는 아주 기본적인 잣대이지요. 말에 대한 신뢰가 사라진 정치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말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 정치가 신뢰를 잃게 됩니다.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우리는 정치를 혐오하게 되고 정치를 멀리합니다. 그런데 잘못된 정치를 외면하기만 하면 자기보다 못한 정치인들에게 지배를 받게 됩니다.
스스로 무너져놓고 남 핑계, 세상 핑계를 대는 습성 때문에 스스로 무너지면서도 끝까지 자신을 돌아보지 못합니다. 또 하나 분명한 것은, 정권이든 기업이든 개인이든 어제까지 괜찮았다가 오늘 갑자기 무너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계에는 우리가 읽을 수 있는 수없이 많은 시그널이 있습니다. 조짐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그 조짐을 시그널로 읽지 않고 소음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남이 하는 비판을 비판으로 듣지 않고 비난으로 듣는 것이지요. 시그널을 읽어야 잘못을 고치든지 어떤 조치를 취해 상황을 수습할 텐데 그러지 못하는 것이지요. 역시 무지로 인한 것입니다. 지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감각적으로만 반응하기 때문이에요.
대부분의 사람이 시그널을 노이즈와 혼동하거나, 그것을 읽어내지 못해요. 시그널을 읽겠다는 의욕조차 없는 사람이 많아요. 문제는 진영에 갇힐 때에도 발생합니다. 진영에 갇히면 생각하는 능력이 거세되고는 하거든요. 자기 생각이 아니라 진영이 시키는 대로 반응하기 때문이지요. 생각할 필요가 없고 무엇이든 진영의 논리대로만 반응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능력이 점점 감퇴하고 눈에 핏발만 서게 되면 시그널을 읽을 수 없어요.
국민들이 깨어 있지 않으면, 다시 말해서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 사회는 독재 사회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니체는 <선악의 저편>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된다." 그렇게 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깨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동물농장>을 통해 반란과 혁명의 깃발이 어떻게 완장으로 전락하는가를 보았습니다. 무지하면, 즉 생각하지 않으면 남의 생각에 지배당합니다.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키우고 스스로 건너가려는 의지를 가져야 할 때입니다.
독재자들은 대개 앞선 영웅들로부터 그 정신이 아니라 이미지만 끌어와서 임의로 소비하다가 결국 특권 의식과 권력 놀이에 빠져 완장으로 전락한다. 염치와 수치심을 기반으로 한 성숙을 추구하지 않으면 특권을 누리고 권력을 휘두르는 일 이상은 할 줄 모른다. 깃발을 찢어 완장을 만드는 일, 그것이 전부이다.
말言을 무너뜨리는 자들에게서는 염치와 수치심도 없어진다. 염치가 없어야 특권도 만들 수 있다.
자기를 만나게 해주는 일에는 책 읽기, 글쓰기, 운동하기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 제일 짜릿하게 자기를 만나게 해주는 일은 여행입니다. 여행은 무엇을 보러 가는 게 아니에요. 자기와 상관없는 곳에 자기를 데려다놓고 스스로를 생경하게 만드는 겁니다. 자기를 생경한 곳에 옮겨 놓으면 어떻게 될까요? 비로소 자기에게 드러난 적이 없는 자기를 만나게 되는 거지요. 이렇듯 여행은 자기를 만나는 매우 구체적이고 창의적이며 고급스러운 일입니다.
어린아이와 어른의 가장 큰 차이는 호기심입니다. 어른들은 궁금한 게 없고 당연한 것이 많아요. 아이들은 당연한 게 적고 궁금한 것이 많지요. 당연한 것이 궁금한 것을 압도하면 꼰대인 것입니다. 궁금한 것이 당연한 것을 짓누르면 청춘이고요.
"공직에 사람을 뽑을 때는 후보의 능력보다는 도덕성을 더 중시하는"데 여기에도 이유가 있다. "도덕적 성품을 가진 사람이 무지에 의해 저지른 오류는 공공 이익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지는 않는다. 그러나 부패한 경향이 있는 데다 그 자신의 부패한 심성을 숨기고, 돋보이게 하고, 옹호하는 능력을 가진 자의 고의적인 술수는 공공 이익에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힌다."
논변과 이야기의 가장 큰 차이점은 빈틈, 즉 공간입니다. 논증과 논변은 빈틈을 허용하지 않고 이야기는 공간을 허용하지요. 이야기는 여백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듣는 사람이 빈 공간으로 들어올수 있어요. 바로 이때 공감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 셰계의 어떤 교육, 어떤 대화도 감동과 감화가 없으면 설득력이 생기지 않아요.
논변의 가장 기본적인 구조는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겁니다. 이 옳고 그름의 특징은 어제는 옳았던 것이 오늘은 그를 수 있다는 거예요. 저 나라에서는 옳은 것이 이 나라에서는 그르고, 상대방한테는 그른 것이 나에게는 옳을 수 있지요. 이렇듯 옳고 그름은 굉장히 상대적인 것입니다. 물론, 물리적인 옳고 그름도 있지만 사회나 삶에서의 옳고 그름은 다 상대적이에요. 지금 우리에게는 이야기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여러분의 삶을 논증과 논변으로 구성하면 삶이 딱딱해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적대적이게 되지요. 그렇지만 자기 삶이 자기의 신화를 구성하거나 스토리를 쌓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삶이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을 향해 걷는 것을 사명으로 한다." - 헤르만 헤세,
사람이 망가지는 첩경이 바로 자기를 남과 비교하는 거예요. 비교는 오직 자기 자신과 하는 것만이 정당화됩니다. 나머지는 전부 자기를 망가뜨리는 거예요. 비교하면서 남을 부러워하는 것도, 남을 업신여기는 것도 자기를 망가뜨리지요.
사람마다 그릇의 크기가 다양하고, 그 크기에 맞는 자리에 있으면 그것이 행복이다.
인간은 건너가는 존재다. 건너가려는 자는 멈추지 않고 어디론가 떠난다. 그러니 당연히 여행에 인간의 속성이 제일 많이 담겨 있다. 여행은 빈틈없이 치밀하고 꽉 찬 자기에게 일부러 빈틈을 만들고, 공간을 허용하고, 정해진 의미들을 덜어내고, 시간을 낭비하는 척하면서 스스로 흔들리게 한다. 질문은 여행이고 대답은 멈추기다. 문명의 주도권은 질문하는 자가 쥔다. 대답은 논증과 논변의 형태고, 질문은 자기에게 하는 이야기의 형태다.
고요는 정지된 상태가 아니예요. 찰나의 순간이지요. 운동 방향을 달리하는 찰나의 순간, 그 순간의 충격입니다. 관성적으로 사는 삶의 방향에 대한 성찰, 이것이 고요를 경험할 수 있는 좋은 방법입니다.
인간이 직면한 가장 큰일 중의 하나가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다는 거예요. 이것이 지금 우리에게 남아 있는 존재론적으로 가장 큰 판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이 큰 판을 인식하지 않아요. 인생은 짧고 우리는 곧 죽어요. 이것을 철저히 인식하면 더 중요한 일부터 처리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옆집에서 우리집 대문 앞에 쓰레기봉투를 버린 일, 운전하던 중에 차가 끼여든 일이 우주적으로 큰일처럼 보이지요. 스스로 진실하고 철저하게 생각하고 발견한 소명이 있다면, 작은 일을 작은 일로 보고 큰일을 큰일로 볼 수 있습니다. 생각하지 않고 소명이 없다면 큰일을 보지 못하고 작은 일을 보지요.
죽음은 어느 날 갑자기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놓치고 살아요. 우리의 실존에 가장 분명한 기반은 죽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식하고 사유하지 않으면 자기가 지금 사형장으로 끌려간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동그라미를 잘못 그린 것이 오점이 될까 봐 걱정하게 되는 거예요.
생각이라는 것은 개방적이며 항상 외부로 향해 있어요. 그래서 생각하는 자는 적극적이고, 안전을 추구하기보다 모험을 더 좋아합니다. 반대로 생각하지 않는 자는 항상 안전을 추구하지요.
지도자들이 진영에 갇혀 있으면 우선 생각하는 능력이 거세된다. 진영에 갇히면 생각할 필요가 없다. 진영에서 정한 이념을 확대 재생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국가보다는 진영의 이익을 더 중시해버리는 데가지 빠질 수 있다. 진영에 갇히면 생각하는 능력이 급격히 떨어지기 떄문에, 현실을 진영의 입장에서 보고 싶은 대로 보거나 봐야 하는 대로 보지 보이는 대로 바로 볼 수가 없다 그래서 정책이나 태도가 실제적이지 않고 이념적인 경향을 띠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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