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하지 않은 것도 당연하다고 주입하는 사회에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면 지배당하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스스로 생각하고, 공감하며 자기 안의 자신을 만나자.


[본문발췌]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가장 힘든 일입니다. 노자의 <도덕경>에도 이런 말이 나옵니다. "승인자유력(勝人者有力) 자승자강(自勝者强)" 남을 이기는 사람은 힘만 센 것이고, 나를 이기는 사람이 진정한 강자다.


모험하는 마음은 질문하는 마음이고, 건너가는 마음이고, 어린이의 마음입니다. 순수한 사람만이 호기심을 갖고 질문할 수 있지요. 그리고 질문하는 사람만이 모험할 수 있습니다. 호기심이 없는 사람은 대답만 하고 판단만 합니다. 이런 사람은 안전을 추구해 모험을 할 수 없지요.


놀이하는 마음을 가지고 순진하게 태어난 어린이는 규칙과 숫자를 배우면서 어른이 되도록 강요받는다. 세계를 보이는 대로 볼 수 있던 마음이 봐야 하는 대로 보도록 상자에 갇힌다. 이런 세상에서 어린이는 항상 '아직 덜 어른'으로 치부된다. 사실 대부분의 교육은 어린이에게서 어린이의 마음을 빼내고 어른의 마음을 강제로 주입하는 일이다. 이는 창조적 유희를 막는 엄청난 폭력이다. 어린이는 '아직 덜 어른'이 아니라 어린이 자신일 뿐이다. 어린이에게 어린이의 시간을 돌려줘 어린이가 어린이로 자랄 수 있게 해야 한다. 어른이 어린이를 내리누르지 않아야 한다. 어린이는 스스로 도는 수레바퀴이기 때문에 외부의 간섭이 없을 때 더 성스럽다. 낙타처럼 정해진 궤도를 따르지 않고 스스로 도는 어린에게는 새로운 출발과 최초의 움직임을 감행하는 순수한 충동이 저장되어 있다. 이 충동은 온전히 자신 안에서 솟아나는 것을 해보려는 새로운 동작이다. 그러므로 어린이의 심장은 모험의 박동으로 쿵쿵 뛴다.


카뮈는 신을 '관념의 총아'로 보았지요. 소설에는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신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내가 어둠 속에 있고, 거기서 뚜렷이 보려고 애쓴다는 뜻이다." 관념에 휩싸이면 세계가 명료해집니다. 자본주의, 사회주의, 우파, 좌파 이런 것들요. 반면, 관념을 버리면 우리는 어둠 속을 걸어야 합니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 분명하고 또렷하게 보려고 애써야만 하지요.


살아가면서 우리는 많은 정치적 투쟁을 봅니다. 그런데 그 정치적 투쟁들은 대부분 성공하지 못합니다. 거기에는 이념이나 관념에 대한 집착만 있을 뿐 인간에 대한 애정은 없기 때문입니다. 오통 판사가 다시 수용소로 돌아가는 것도, 리유가 부인과 멀리 떨어진 채 오랑 시에서 헌신하는 것도 모두 인간에 대한 애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인간을 사랑한 것이지 인간에 대한 사랑을 관념적으로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은 항상 다음을 도모하고, 어떤 목표나 목적을 향해서 계속 나아갑니다. 다음을 갈망하는 의식의 집중적 활동, 이것을 생각이라고 할 수 있지요. 생각의 발단은 불편함을 인식하는 겁니다. 불편함을 인식해서 어떤 문제를 발견하면 그것을 해결하려고 덤비는 일, 이것이 생각입니다.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이 다 불편함을 해결한 결과입니다.


바람직한 것은 사회가 이미 정해놓은 기준을 습관처럼 내면화한 결과입니다. 그렇게 정해진 기준에 갇혀 숙고의 과정 없이 행동하다 보면 이기적이고 폐쇄적이게 됩니다. 바라는 것을 하면 오히려 궁금증과 호기심을 바탕으로 새로운 세계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에 개방적인 사람이 됩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제대로 발휘하기 어려운 폐쇄적인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사회가 이미 정해놓은 기준을 좇는 사람들은 생각이라는 것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회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고, 사회가 시키는 말만 반복하면 되니까요. 그런데 자기를 향해 걷는 사람은 그런 폐쇄적인 사회 전체에 대해 숙고합니다. 숙고함으로써 그 굳어진 사회가 나아갈 다음 단계, 새로운 세계를 모색하는 것이지요. 자기를 향해서 부단히 걷는 일, 자기에게 도달하려는 지적 욕구, 이것이야말로 인간을 완성하는 길입니다.


고독은 외로움과 달라요. 외로움은 다른 무엇이 없어서 생기는 약한 마음이지만, 고독은 자기 안에 머무는 것, 자기만 존재하는 것, 굉장히 당당하고 심지어는 오만하기까지 한, 매우 강한 마음입니다. 자기에게 향한다는 말은 고독하다는 뜻이지요. 고독한 사람은 질문을 합니다. 반면 대답하는 자는 휘둘리는 자입니다. 또한 바라는 것을 하는 자는 고독한 자이고, 바람직한 것을 하는 자는 휘둘리는 자입니다.


독서나 산책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이것은 고도의 지적 작업입니다. 독서를 통하면 내가 다른 데로 건너가고, 산책을 해도 내가 다른 데로 건너가지요.


"저마다 삶은 자기 자신을 향해 가는 길이다."


밖에서 주어지는 것은 이미 정해져 가정이나 사회에서 집단적으로 공유되는 바람직한 것이다. 집단적으로 공유되는 것은 그것을 해석하는 명확한 독법까지도 이미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대로 적용하기만 하면 된다. 반면에 나에게서만 솟아는 것은 나에게도 비밀스럽다. 내가 바라는 것을 알려면 숙고하는 수고를 심하게 들여야 한다. 힘든 일은 피하고 힘들지 않은 쪽으로 기우는 이 게으른 인간이란 존재들은 힘들여 자신을 알려고 하지 않고 정해진 것들을 쉽게 받아들이려고만 한다. 데미안의 말은 분명하다. "게으르고 생각하기 싫어하고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냥 복종해버린다." 인간은 정치와 도덕과 종교가 제공하는 믿음의 집단 최면에 빠져 "그냥 복종해버리면서" 자기를 스스로 내팽개치곤 한다. 내팽개쳐진 자기를 되찾아야 정치와 종교와 도덕도 제자리를 잡는다. 정치와 도덕과 종교는 닫혀 있고 나는 호기심으로 열려 있다. 그 호기심으로 균열을 내고 틈새를 비집는 일을 우리는 사유라고도 하고 생각이라고도 한다. 한번이라도 진짜로 살다 가고 싶은 사람은 숙고하는 수고를 기꺼이 감당하며 정해진 것에 틈을 내어 그 사이를 헤치고 나갈 수 있어야 한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한 세계를 깨뜨리면서 "다른 세계"로 진입한다. 태어나기 위해서 한 세계를 깨뜨린 자는 양쪽 세계 사이에서 방황한다. 깨뜨린 세계에서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태어난 세계로도 완전히 진입하지 못한 채 두 세계 사이에 끼어서 우왕좌왕하는 것이다.


"매일매일은 새로운 날이지. 운이 따른다면 더 좋겠지만. 우선은 지금 하려는 일에 집중하겠어. 그러면 운이 찾아 왔을 때 준비가 되어 있을테니." 운은 자기에게 진실한 사람에게만 오는 선물이다.


집단이 공유하는 이념이나 믿음으로 당당한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당당한 자라니! 다른 사람의 인정에 좌우되지 않고 자기에게 떳떳한 자다. 소유의 길이 아니라 존재의 길을 가는 자들은 언제나 자기에게 당당하다. 산티아고 할아버지는 자신만의 향기를 내뿜으며 말한다. "인간은 파멸 당할 수는 있을지언정 패배하지는 않는다." 청새치가 다 뜯겨 나가고 뼈만 남는 한이 있더라도, 더 나아가 청새치를 지키다가 상어에 물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어부로서의 자부심만은 잃지 않겠다는 자세다. 이는 작은 이익들에 휘둘리는 삶이 아니라 자부심과 존엄을 지키는 삶을 살겠다는 인간 선언이다.


철학은 개념으로 하는 것이지만 정치의 핵심은 말입니다. 말을 얼마나 신뢰 있게 하는지, 자기가 한 말을 얼마나 지키는지가 정치의 바름을 판단하는 아주 기본적인 잣대이지요. 말에 대한 신뢰가 사라진 정치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말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 정치가 신뢰를 잃게 됩니다.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우리는 정치를 혐오하게 되고 정치를 멀리합니다. 그런데 잘못된 정치를 외면하기만 하면 자기보다 못한 정치인들에게 지배를 받게 됩니다.


스스로 무너져놓고 남 핑계, 세상 핑계를 대는 습성 때문에 스스로 무너지면서도 끝까지 자신을 돌아보지 못합니다. 또 하나 분명한 것은, 정권이든 기업이든 개인이든 어제까지 괜찮았다가 오늘 갑자기 무너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계에는 우리가 읽을 수 있는 수없이 많은 시그널이 있습니다. 조짐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그 조짐을 시그널로 읽지 않고 소음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남이 하는 비판을 비판으로 듣지 않고 비난으로 듣는 것이지요. 시그널을 읽어야 잘못을 고치든지 어떤 조치를 취해 상황을 수습할 텐데 그러지 못하는 것이지요. 역시 무지로 인한 것입니다. 지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감각적으로만 반응하기 때문이에요.
대부분의 사람이 시그널을 노이즈와 혼동하거나, 그것을 읽어내지 못해요. 시그널을 읽겠다는 의욕조차 없는 사람이 많아요. 문제는 진영에 갇힐 때에도 발생합니다. 진영에 갇히면 생각하는 능력이 거세되고는 하거든요. 자기 생각이 아니라 진영이 시키는 대로 반응하기 때문이지요. 생각할 필요가 없고 무엇이든 진영의 논리대로만 반응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능력이 점점 감퇴하고 눈에 핏발만 서게 되면 시그널을 읽을 수 없어요.

국민들이 깨어 있지 않으면, 다시 말해서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 사회는 독재 사회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니체는 <선악의 저편>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된다." 그렇게 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깨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동물농장>을 통해 반란과 혁명의 깃발이 어떻게 완장으로 전락하는가를 보았습니다. 무지하면, 즉 생각하지 않으면 남의 생각에 지배당합니다.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키우고 스스로 건너가려는 의지를 가져야 할 때입니다.

독재자들은 대개 앞선 영웅들로부터 그 정신이 아니라 이미지만 끌어와서 임의로 소비하다가 결국 특권 의식과 권력 놀이에 빠져 완장으로 전락한다. 염치와 수치심을 기반으로 한 성숙을 추구하지 않으면 특권을 누리고 권력을 휘두르는 일 이상은 할 줄 모른다. 깃발을 찢어 완장을 만드는 일, 그것이 전부이다.

말言을 무너뜨리는 자들에게서는 염치와 수치심도 없어진다. 염치가 없어야 특권도 만들 수 있다.


자기를 만나게 해주는 일에는 책 읽기, 글쓰기, 운동하기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 제일 짜릿하게 자기를 만나게 해주는 일은 여행입니다. 여행은 무엇을 보러 가는 게 아니에요. 자기와 상관없는 곳에 자기를 데려다놓고 스스로를 생경하게 만드는 겁니다. 자기를 생경한 곳에 옮겨 놓으면 어떻게 될까요? 비로소 자기에게 드러난 적이 없는 자기를 만나게 되는 거지요. 이렇듯 여행은 자기를 만나는 매우 구체적이고 창의적이며 고급스러운 일입니다.


어린아이와 어른의 가장 큰 차이는 호기심입니다. 어른들은 궁금한 게 없고 당연한 것이 많아요. 아이들은 당연한 게 적고 궁금한 것이 많지요. 당연한 것이 궁금한 것을 압도하면 꼰대인 것입니다. 궁금한 것이 당연한 것을 짓누르면 청춘이고요.


"공직에 사람을 뽑을 때는 후보의 능력보다는 도덕성을 더 중시하는"데 여기에도 이유가 있다. "도덕적 성품을 가진 사람이 무지에 의해 저지른 오류는 공공 이익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지는 않는다. 그러나 부패한 경향이 있는 데다 그 자신의 부패한 심성을 숨기고, 돋보이게 하고, 옹호하는 능력을 가진 자의 고의적인 술수는 공공 이익에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힌다."


논변과 이야기의 가장 큰 차이점은 빈틈, 즉 공간입니다. 논증과 논변은 빈틈을 허용하지 않고 이야기는 공간을 허용하지요. 이야기는 여백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듣는 사람이 빈 공간으로 들어올수 있어요. 바로 이때 공감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 셰계의 어떤 교육, 어떤 대화도 감동과 감화가 없으면 설득력이 생기지 않아요.


논변의 가장 기본적인 구조는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겁니다. 이 옳고 그름의 특징은 어제는 옳았던 것이 오늘은 그를 수 있다는 거예요. 저 나라에서는 옳은 것이 이 나라에서는 그르고, 상대방한테는 그른 것이 나에게는 옳을 수 있지요. 이렇듯 옳고 그름은 굉장히 상대적인 것입니다. 물론, 물리적인 옳고 그름도 있지만 사회나 삶에서의 옳고 그름은 다 상대적이에요. 지금 우리에게는 이야기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여러분의 삶을 논증과 논변으로 구성하면 삶이 딱딱해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적대적이게 되지요. 그렇지만 자기 삶이 자기의 신화를 구성하거나 스토리를 쌓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삶이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을 향해 걷는 것을 사명으로 한다." - 헤르만 헤세,
사람이 망가지는 첩경이 바로 자기를 남과 비교하는 거예요. 비교는 오직 자기 자신과 하는 것만이 정당화됩니다. 나머지는 전부 자기를 망가뜨리는 거예요. 비교하면서 남을 부러워하는 것도, 남을 업신여기는 것도 자기를 망가뜨리지요.

사람마다 그릇의 크기가 다양하고, 그 크기에 맞는 자리에 있으면 그것이 행복이다.


인간은 건너가는 존재다. 건너가려는 자는 멈추지 않고 어디론가 떠난다. 그러니 당연히 여행에 인간의 속성이 제일 많이 담겨 있다. 여행은 빈틈없이 치밀하고 꽉 찬 자기에게 일부러 빈틈을 만들고, 공간을 허용하고, 정해진 의미들을 덜어내고, 시간을 낭비하는 척하면서 스스로 흔들리게 한다. 질문은 여행이고 대답은 멈추기다. 문명의 주도권은 질문하는 자가 쥔다. 대답은 논증과 논변의 형태고, 질문은 자기에게 하는 이야기의 형태다.


고요는 정지된 상태가 아니예요. 찰나의 순간이지요. 운동 방향을 달리하는 찰나의 순간, 그 순간의 충격입니다. 관성적으로 사는 삶의 방향에 대한 성찰, 이것이 고요를 경험할 수 있는 좋은 방법입니다.


인간이 직면한 가장 큰일 중의 하나가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다는 거예요. 이것이 지금 우리에게 남아 있는 존재론적으로 가장 큰 판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이 큰 판을 인식하지 않아요. 인생은 짧고 우리는 곧 죽어요. 이것을 철저히 인식하면 더 중요한 일부터 처리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옆집에서 우리집 대문 앞에 쓰레기봉투를 버린 일, 운전하던 중에 차가 끼여든 일이 우주적으로 큰일처럼 보이지요. 스스로 진실하고 철저하게 생각하고 발견한 소명이 있다면, 작은 일을 작은 일로 보고 큰일을 큰일로 볼 수 있습니다. 생각하지 않고 소명이 없다면 큰일을 보지 못하고 작은 일을 보지요.

죽음은 어느 날 갑자기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놓치고 살아요. 우리의 실존에 가장 분명한 기반은 죽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식하고 사유하지 않으면 자기가 지금 사형장으로 끌려간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동그라미를 잘못 그린 것이 오점이 될까 봐 걱정하게 되는 거예요.


생각이라는 것은 개방적이며 항상 외부로 향해 있어요. 그래서 생각하는 자는 적극적이고, 안전을 추구하기보다 모험을 더 좋아합니다. 반대로 생각하지 않는 자는 항상 안전을 추구하지요.


지도자들이 진영에 갇혀 있으면 우선 생각하는 능력이 거세된다. 진영에 갇히면 생각할 필요가 없다. 진영에서 정한 이념을 확대 재생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국가보다는 진영의 이익을 더 중시해버리는 데가지 빠질 수 있다. 진영에 갇히면 생각하는 능력이 급격히 떨어지기 떄문에, 현실을 진영의 입장에서 보고 싶은 대로 보거나 봐야 하는 대로 보지 보이는 대로 바로 볼 수가 없다 그래서 정책이나 태도가 실제적이지 않고 이념적인 경향을 띠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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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경험과 생각을 하며 현재에 집중하는 것, 삶이 단순하지만 더 풍성하게 한다.


[본문발췌]


하루는 모든 날의 다른 이름이다.
아무리 후회해도 과거를 바꿀 수는 없다. 우리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미래다. 그것이 바로 지금 이 순간이 가진 힘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잃어버리고 있는지 깨닫지 못한 채 삶을 낭비한다. 무의미한 슬픔, 어리석은 즐거움, 탐욕스러온 욕망, 형식적인 관계에 자신의 유한한 자원을 투자한다. 이것들 중 얼마나 많은 것들이 남아 있을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길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세네카, 삶의 덧없음에 대해, 3.3b


진정한 경제적 자유란 무엇인가. 더 많이 갖고자 열망하고 더 많은 수입과 더 많은 성취를 갈망할수록 실제 삶을 즐길 가능성과 자유는 줄어든다.


분노보다 우리를 어리석게 만드는 것은 없으며 분노만큼 우리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도 없다. 분노로써 성공하면 이보다 오만한 것이 없으며, 분노로써 성공하지 못하면 이보다 광기에 휩싸이게 하는 것 또한 없다. 분노는 실패했을 때조차 물러서지 않는다. 분노하던 대상이 사라지면 분노의 이빨은 곧 스스로에게로 향한다. - 세네카, 분노에 대해, 3.1.5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열망하면서 행복하기란 불가능하다네. 행복은 이미 모든 것을 갖고 있는 뚱보들이지. 그들에게 배고픔과 목마름이라는 것은 없어. - 에픽테토스, 대화록, 3.24.17
미래의 사건을 열망하고 욕망하고 열정적으로 상상하면서 그 속에 행복의 시나리오가 있다고 고대하는 것은 지금 당장 행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파괴할 뿐이다. 더 많은 것, 더 좋은 것, 지금보다 나은 것을 갈망하는 것은 만족의 적이다. 행복과 갈망은 에픽테토스의 말처럼 양립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이 신의 특권이다. 신에 가까운 인간은 아주 조금 바란다" - 디오게네스
연기와 재처럼 사라질 것들. 증오하고 분노하며 소유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완벽함을 쫓아 달려가는 우리들도 다를 바 없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사라지고 천천히 잊히게 될 운명이다. 그러니 우리는 인간을 불행으로 이끌고 가는 감정의 노예가 되지 말고, 우리에게 주어진 짧은 시간을 즐겨야 한다.


행동할 때는 망설이지 말라. 대화할 때는 부조리하지 말라. 사고할 때는 방황하지 말라. 영혼을 위해 수동적이어서도, 공격적이어서도 안 된다. 그리고 삶에 있어 너무 많이 가지려 하지 말고 바쁘게 살려고 하지도 말라.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8.51

"단순함이란 본연의 목적에 충실한 것" - 샤를 와그너


자기 의지대로 살아가는 사람을 자유인이라 하네. 그는 강제도, 훼방도, 제한도 모르지. 어떤 선택도 방해받지 않으며 욕망하는 것을 달성하네. 이들은 계략에 빠져들지도 않지. 기만 속에서 살아가기를 희망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실패와 실수가 가득하고, 규칙도 없으며, 불평만 있는 쳇바퀴 같은 삶을 바라는 사람은 없네. 하지만 부도덕한 사람들은 자신의 바람대로 살지 못하네. 오직 도덕적인 사람만이 자유인이지. - 에픽테토스, 대화록, 4.1.1-3a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의 쳇바퀴 속에서 하루를 살아가는지 생각해 보자. 일이나 가족 같은 필수적인 의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허영심과 무지에서 비롯된 불필요한 일을 수행하며 많은 사람들이 또 그렇게 하루를 보낸다. 타인을 만족시키기 위해,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혹은 생각해 본 적 없는 충동을 달래기 위해 움직인다. 세네카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권력자들이 돈의 노예가 되는 것을 너무 자주 보았다며 이렇게 말했다. "스스로 노예를 자초하는 것보다 더 수치스러운 것은 없다." 현대 사회도 노예들로 가득하다. 돈, 명예, 권력을 위해 우리는 기끼어 노예가 된다. 당신이 행하는 일들의 목록을 작성해 보라. 그것 중 어떤 것이 정말 필요한 것인가?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나는 자유로운가?


우리가 추구하는 것들, 무모하게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네. 거기에 어떤 유용함이 있는지, 어떤 쓸모가 있는지를 말일세. 그것 중 어떤 것은 너무 많은 것일 뿐더러 그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지도 않지. 하지만 우리는 이런 사실을 고려하지 않고, 상당한 대가를 지불하면서 그것들을 공짜라고 여긴다네. - 세네카, 도덕에 관한 서한, 42.6


3천 년을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생을 살 수 있다고 할지라도 명심하라. 우리가 잃어버리는 것은 현재 우리가 영위하고 있는 순간의 삶이며 소유할 수 있는 것 또한 지금 이 순간의 삶뿐이다. 긴 삶이든 짧은 삶이든 동일하다. 우리 모두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스쳐 지나고 있는 현재밖에 없다. 과거를 잃어버리거나 미래를 잃어버릴 수는 없다. 어떻게 지금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잃어버릴 수 있겠는가?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2.14


자유는 우리 마음속에 욕망을 가득 채움으로써 확보되는 것이 아니라네. 욕망을 제거할 때에야 얻을 수 있는 것이지. - 에픽테토스, 대화록, 4.1.175
풍족함에 이르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갖거나 이미 당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는 것이다.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은 자유의 길이다.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해 애를 태우고, 분투하고, 싸운다면 우리는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다. 하지만 이미 갖고 있는 것에 집중하고 그것에서 만족을 얻는다면 우리는 지금 바로 여기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더 많이 가졌다는 것은 더 많은 '문제' 또한 갖고 있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이다. 재산이 많으면 그것을 지키기 위해 더 많이 고민해야 한다. 권력이 커지면 나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떠나가지 않도록 더 많이 신경 써야 한다. 집안의 살림살이를 생각해 보라. 살림살이가 많을수록 청소할 시간은 늘어나고 나에게 쓸 시간은 줄어든다.


화가 나 있거나 상처받은 상태에 있을수록 판단을 자제하는 것이 좋다. 감정이 판단을 흐리게 하기 때문이다. 타인의 행동과 외부 사건을 정확하게 추론할 수 있어야 적절하게 반응할 수 있다.


이유 없는 행동은 무의미하다. '하고 있는 일'로 자신을 평가하지 말고, '왜 하는가?' 그리고 '무엇을 성취하려 하는가?'로 평가하라. 여기에 좋은 답을 할 수 없다면 그 일을 그만두어도 좋다.


플라톤의 이 말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무릇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면 하늘을 나는 새와 같은 시선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한번에 조망해야 한다. ... 뒤섞여 있는 모든 것 속에 숨어 있는 이면의 질서를 바라보라."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7.48


인생에 교과서는 없다. 스토아 철학자 또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의문에 답했던 것은 아니다. 직면할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어떤 계획을 세워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미래를 걱정하지 않았다. 조건이 어떻게 바뀔지라도 그에 적응할 든든한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삶의 지침서를 찾는 대신 그들은 창조성, 독립성, 자존감, 창의력과 같은 문제 해결 능력을 기르는 데 주의를 기울였다. 우리의 삶을 평화로운 방향으로 안내하는 인생 지침서 같은 것은 없다. 운명 앞에서 원칙을 가지고 탄력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인생 전반이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 생각하지 마라. 아직 일어나지 않은 나쁜 일에 대해 걱정하지도 말라. 단지 현 상황에 초점을 맞추어 스스로 물어 보라. 지금 여기에서 참고 견딜 수 없는 이유, 살 수 없을 것 같은 이유가 무엇인지를 물어 보라. 그러고 나면 그럴 이유를 찾지 못한다는 사실에 부끄러워질 것이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8.36


스스로 박탈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먼 길을 돌아 당신이 얻으려는 희망하는 모든 것들을 지금 이 순간에 거머쥘 수 있다. 과거는 버려두고, 미래는 섭리에 맡기고,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면 된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12.1


정치적인 논쟁, 개인적인 의견 불일치와 마주하면 자신에게 이렇게 질문을 던져 보자. "이것이 우리가 싸워야 할 이유가 되는가?" "이 말싸움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는가?" 현명한 사람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화하지 싸우기 위해 대화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우리의 행동을 지연시킬 수 있다. 그러나 주어진 조건에 적응하고 유연하게 반응하는 힘이 있는 한, 우리의 의도와 태도까지 지연시키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이 가진 유연성은 어떤 장애물도 성취를 향한 수단으로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를 지연시키는 행동이 결국에는 향상을 위한 행동으로 바뀐다. 길 위에 있는 장애물은 또 다른 길이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5.20
우리는 어떤 일이 완벽하게 흘러가기를 원한다. 그래서 좋은 조건에서 시작하기를 희망하고 영향력을 유지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집중하는 것이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해야 할 일 앞에는 언제나 사소한 골칫거리와 크고 작은 장애물이 존재한다. 그것들 또한 일의 일부다. 아무런 문제없이 저절로 이루어진다면 이미 일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한 행동의 총합이다. 정신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것이 우리의 행동에 반영된다. 그러니 매 순간 현명하고 신중하게 선택해야 할 것이다.


미래에 대해 걱정하는 영혼은 비참하다네. 고통이 오기 전에 먼저 고통스러워하지. 그들이 그렇게 불안에 휩싸이는 이유는 가진 것을 끝까지 소유하고 싶은 욕망 때문이야. 하지만 그와 같은 영혼에게는 결코 안식이 있을 수 없다네. 오히려 갈망함으로써 누릴 수 있는 현재를 잃어버리고 말 뿐이지. - 세네카, 도덕에 관한 서한, 98.5b-6a
걱정이 현실이 될 때까지 내버려 두어라. 관심사에 시간을 쏟아 붓기에도 우리의 생은 짧다.


종교적 신념, 명성, 권위 등을 고려하지 말고 인간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지혜가 무엇인지 찾아라. 인간적 가치를 우선시할 때 우리는 진리를 볼 수 있다. 진리는 반대편에도 있다.


무거움을 가볍게 만들 수 있는 건 유머뿐이다.


한 번도 불행 속에 살아 본 적이 없다면, 나는 당신이 불행하다고 말하겠다. 적대자와 마주하지 않고 살아왔따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행운 속에서만 살아왔다면 누구도 당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당신조차도! - 세네카, 섭리에 대해, 4.3


철학의 세 가지 영역인 윤리학(도덕론), 자연학(존재론), 논리학(인식론)은 하나의 목표가 있다. 이것들은 조금씩 다르지만 동일한 목표를 추구한다. 바로 이성의 인도를 통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목표를 미래 혹은 사후에 두지 않고 바로 지금, 현재에 둔다는 사실이다.


삶의 우선순위. 우리는 하루 중 여덟에서 열 시간 정도를 사무실 혹은 일터에서 보낸다. 그리고 여덟 시간 정도를 수면하고, 세 끼 식사를 위해 약 세 시간 정도를 쓴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에 무엇을 하는가? 친구를 만나거나 텔레비전을 보거나 게임을 하거나 운동을 한다. 결국 스스로의 삶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은 거의 없다.


헤카토가 말했네. "희망하지 않으면 두려움 또한 종식된다." ... 희망과 두려움이라는 질병의 가장 큰 원인은 현재 주어진 상황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않은 채, 생각만 너무 앞질러 갔기 때문이라네. - 세네카, 도덕에 관한 서한, 5.7b-8


진정한 철학은 절대적 진리를 허용하지 않는다. 진리는 인간의 주관 속에서 끊임없이 재구성되며 드러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적 성찰이야말로 철학이 가야 할 올바른 방향이다. 우리 자신을 향상시키는 것에 집중하고 다른 사람의 것은 그들의 과제로 남겨 두는 것이다. 철학이란 선체가 부식되지 않도록 정기적으로 배 밑바닥에 붙은 따개비를 벗겨 내듯 자신의 실수를 걷어 내는 행위다.


삶의 마지막이 다가온 것처럼 우리의 마음을 준비하세. 아무것도 미루지 않도록 하세. 그리고 하루하루 인생의 대차대조표에 균형을 맞추도록 하세. ... 매일을 마지막처럼 사는 자에게는 결코 시간이 부족하지 않으니. - 세네카, 도덕에 관한 서한, 101.7b-8a


"품격은 도박판에서 드러난다. 어떻게 따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잃느냐에서 신사의 자질을 볼 수 있다." - 007 시리즈 중,
인생이라는 도박장에서 돈을 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잠깐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 뿐, 결국은 무일푼으로 돌아가야 하는 삶에서 어떻게 잃을 것인가를 배우는 것이 바로 철학이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죽음을 잊지 않는 사람은 사소한 문제나 잡념에 사로잡히지 않을 것이다. 죽음에 대한 관조는 두려움을 주기 위함이 아니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라는 의미다.


살아가기에 너무 짧은 시간이 주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삶을 낭비한다. 인생은 충분히 길다. 우리에게는 위대한 업적을 달성할 만큼 시간이 충분히 주어져 있다. 하지만 그 시간을 좋은 목적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사치와 태만의 하수구로 흘러보내면 그것을 의식하기도 전에 시간은 지나가 버린다. 그렇다. 우리에게 짧은 삶이 주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렇게 만들었을 뿐이다. - 세네카, 삶이 덧없음에 대해, 1.3-4a
누군가에게 기억된다는 것이 인생의 본질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누군가가 기억해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기억에 스스로 만족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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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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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과 욕망, 신념을 가진 인간은 모험을 통해 무한한 가능성을 가져다주기도 하고, 파멸의 길로 이끌기도 한다.


[본문발췌]


머지않아 너는 모든 것을 잊게 될 것이고, 머지않아 모두가 너를 잊게 될 것이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아무리 세상이 빨리 변해도 변치 않는 것이 있고,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해도 인류가 이룩해온 문명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고 믿었다.


인간의 뇌도 경험한 모든 것을 기억한다고 해. 하지만 책이 너무 많이 쌓인 곳에서는 특정한 책을 찾기 어렵듯이 모든 기억이 다 살아 있다면 필요한 기억을 제때 찾을 수 없잖아? 그래서 쓸데없는, 자주 사용하지 않는 기억들은 거의 잊힌 상태로 보관되고 있어. 기억력뿐 아니라 연산 능력, 감각 능력, 집중력 같은 것도 너무 발달하지 않도록 인간의 뇌가 제어해.


자기가 누구인지 잘못 알고 있다가 그 착각이 깨지는 것, 그게 성장이라고 하던데?


자기를 인간으로 생각하는 휴머노이드가 가능하려면 기억이라든가 연산 기능 같은 것은 평범한 인간 수준으로 제한하고, 대신 공포나 후회, 기쁨 같은 인간의 감정을 그대로 느낄 수 있어야 돼. 그러려면 휴머노이드는 인간처럼 아무리 발버둥쳐봐야 언젠가는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걸 알아야 하지. 삶이 영원하지 않다고 생각해야 모든 감정에 절실해지니까.


그것은 인간이 심한 굶주림이나 갈증으로 위기감을 느낄 때와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시야는 좁아지고, 마음은 급해지며, 극단적으로 이기적인 행동을 한다. 언젠가 나는, 인간 이외의 동물들은 누군가에게 공격을 당하지 않는 이상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동물은 죽음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기에, 다만 자기의 기력이 쇠잔해짐을 느끼고 그것에 조금씩 적응해가다가 어느 순간 조용히 잠이 들 듯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간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종과는 달리 인간만은 죽음을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기에 죽음 이후도 필요 이상으로 두려워한다.


개별적인 의식을 가지고 살아 있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행운이니 너무나 짧은 이 찰나의 생을 통해 조금이라도 더 나은 존재가 되도록 분투하고, 우주의 원리를 더 깊이 깨우치려 애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생명이 소중했다. 누구도 허망하게 죽어서는 안 되며, 동시에 자신의 목숨도 헛되이 스러지지 않도록 지켜내야 했다.


그리움이라는 감정이 꼭 좋았던 무언가를 향한 것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그저 익숙한 무언가를 되찾고 싶은 마음일 수 있다.


모든 생명체에 내장된 프로그램은 고통을 피하는 데 최적화되어 있습니다. 그래야 생존을 도모하고 번식에 성공할 수 있으니까요. 살면서 기쁜 순간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괴로움에 시달리거나 혹시 찾아올지도 모를 잠깐의 기쁜 순간을 한없이 갈망하며 보냅니다. 갈망, 그것도 고통입니다. 그리고 삶의 후반부는 다가올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으로 보내게 되고, 죽음은 잊지 않고 생명체를 찾아옵니다.


이 지구에서 불필요한 고통을 압도적으로 생산해내는 존재는 바로 인간입니다. 누구도 인간만큼 지속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다른 종을, 우리 기계까지도 포함해서, 착취하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존재하게 됐는지가 아니라 지금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에 집중하세요. 인간은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관념을 만들고 거기 집착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늘 불행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아라는 것을 가지고 있고, 그 자아는 늘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두려워할 뿐 유일한 실재인 현재는 그냥 흘려보내기 때문입니다. 다가올 기계의 세상에서는 자아가 사라지고 과거와 미래도 의미를 잃습니다.


"이야기라... 그것은 인간들이 자기들의 무의미한 인생에 억지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만들어낸 발명품이 아닐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요. 높은 수준의 의식과 언어를 가진 존재만이 이야기를 만들 수 있고, 그 이야기가 의식을 더 높은 수준으로 고양시킨다고 믿고 있어요."
"그 이야기라는 것 말입니다. 정말 그렇게 멋진 것일까요? 이야기는 오히려 인간을 더 집단적이고 폭력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태어난 인간들은, 아무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다가 이야기라는 매우 중독성이 강한 마약을 발명했습니다. 이야기는 인간이 겪는 고통에 의미가 있다고 은연중에 말합니다. 가장 많은 인간이 믿었던 두 종교는 모두 하나의 이야기에서 시작합니다. 최초의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고통이 시작되었다고 말입니다. 그런 식으로 모든 이야기가 인간의 고통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래도 저는 거기까지는 좋다고 생각합니다. 마취제는 필요하니까요. 하지만 이야기는 인간의 공감 능력을 이용해 인간들을 끼리끼리 결속시킵니다. 같은 이야기를 믿는 인간들은 그 이야기를 믿지 않는 다른 인간들에게 잔인하고 폭력적으로 굽니다. 전쟁이 벌어지고 학살이 일어났습니다. 모두 어떤 이야기를 믿는 데서 시작했습니다. 유대인이 음모를 꾸민다는 얘기, 조선인이 대지진을 틈타 우물에 독을 탄다는 얘기, 마녀들이 밤마다 끔찍한 저주를 행한다는 얘기, 그 결과는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ㄴ니다. 그래서 저는 인간들이 말하는 자아니, 존재니, 의식이니, 이야기니 하는 것들을 불신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이야기는 바로 그 마음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보이지 않는 뭔가를 믿으려는 마음, 이야기는 세상의 모든 것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믿게 만드는 정신적 장치입니다.


끝이 오면 너도 나도 그게 끝이라는 걸 분명히 알 수 있을 거야. 끝이 우리 앞에 와 있고, 그걸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오직 인간만이 호기심과 욕망, 신념을 가지고 다른 세계를 탐험하고 그들과 교류하려 할 거야. 감정이 있는 존재만이 결정을 내릴 수 있고, 그래야 그 결정들을 바탕으로 발전할 수가 있는 거야.


생의 유한성이라는 배움이 깔려 있지 않다면 감동도 감흥도 없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준재이기 때문에, 생이 한 번뿐이기 때문에 인간들에게는 모든 것이 절실했던 것이다. 이야기는 한 번밖에 살 수 없는 삶을 수백 배, 수천 배로 증폭시켜주는 놀라운 장치로 '살 수도 있었던 삶'을 상상 속에서 살아보게 해주었다. 그러니 필멸하지 않을 나로서는 점점 흥미가 떨어졌던 것이다.




[작가의 말]
봄꽃이 피는 것을 보고 벌써 작별을 염려할 때, 다정한 것들이 더 이상 오지 않을 날을 떠 올릴 때, 내가 기계가 아니라 필멸의 존재임을 자각한다. 그럴 때 나의 시간은 과거와 미래에 가 있지 않고 바로 여기, 현재에 있다. 그렇게 나를 현재로 이끄는 모든 것들이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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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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