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 석정휴스파에서 눈이나 비오는 날 노천욕, 담양 죽녹원이나 고창 모양성길에서 바람부는 날 대나무숲길 걷기, 변산 고사포 해송 숲길이나 증도해수욕장 해송 숲을 따라 모래사장 옆 소나무숲길 걷기. 소소한 행복을 주는 것들이다.
온천, 해송길, 죽림을 생각하면 교토-간사이의 온천마을과 아라시야마의 추억과 몇 번의 시도에도 가보지 못한 아마노 하시다테의 아쉬움이 떠오른다.
아라시야마는 교토시 외곽에 있는 대나무숲으로 근처에 뱃놀이를 할 수 있는 작은 강이 흐르고 유명한 사찰도 있어 이러저런 구경거리가 많은 곳으로 교토시 전철로도 접근성이 좋고, 근처에 유명한 장어덮밥집을 포함한 맛집들도 많아 교토에서 반나절 또는 한나절 코스로 즐기기 좋다.
교토 시내에도 여러 온천료칸이 있지만 교토 근교 오하라 산촌 마을로 산책을 떠나 온천욕도 즐기고 산젠인 정원을 둘러볼만하다.
내가 갔던 오하라산소우는 당일 온천욕과 점심메뉴를 셋트로 이용할 수도 있는데 조그만 욕탕이지만 온천물이 좋고 숲을 배경으로 한적함을 즐길 수 있다.
교토랑은 기차로 3시간여 가야하지만 좀 더 색다른 온천마을을 체험하고 싶다면 기노사키 온천을 가 볼만 한데, 기노사키 온천도 당일 입욕권으로 여러 온천을 함께 이용할 수 있지만 료칸을 정해 1박2일 숙박하며 여유롭게 마을 내에 7개 온천순례를 해보길 권한다.
료칸에서 제공하는 유카타를 입고 게다를 신고 목욕바구니를 들고 마을 이곳저곳 각기 특색을 갖춘 온천을 돌아다니는 재미가 있다.
마지막으로 몇 번의 교토와 교토 인근 여행 중, 시간과 교통편이 어긋나 가지 못한 아마노 하시다테, 자연이 만들어낸 모래사장과 해송숲이 멋진 경관을 자랑하는 곳이다. 이제 언제쯤 가 볼 수 있을까?
필요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욕구, 다른 사람의 시선과 판단기준에 얽메인 삶! 이것에서 벗어난다면 자유와 해방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본문발췌]
우리는 우리가 원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정보와 지식을 원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는 지혜를 원한다. 여기에는 차이가 있다. 정보는 사실이 뒤죽박죽 섞여 있는 것이고, 지식은 뒤죽박죽 섞인 사실을 좀 더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지혜는 뒤얽힌 사실들을 풀어내어 이해하고, 결정적으로 그 사실들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영국의 음악가 마일스 킹턴은 이렇게 말했다. "지식은 토마토가 과일임을 아는 것이다. 지혜는 과일 샐러드에 토마토를 넣지 않는 것이다." 지식은 안다. 지혜는 이해한다.
지식과 지혜의 차이는 종류의 차이이지 정도의 차이가 아니다. 지식이 늘어난다고 해서 반드시 지혜가 늘어나는 것은 아니며, 실제로 지식이 늘면 오히려 덜 지혜로워질 수도 있다. 앎이 지나칠 수도 있고, 잘못 알 수도 있다.
지식은 소유하는 것이다. 지혜는 실천하는 것이다. 지혜는 기술이며, 다른 기술과 마찬가지로 습득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려면 노력이 필요하다. 지혜를 운으로 얻으려는 것은 바이올린을 운으로 배우려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는 여기저기서 지혜의 부스러기를 줍기를 바라면서 비틀비틀 인생을 살아나간다. 그러면서 혼동한다. 시급한 것을 중요한 것으로 착각하고, 말이 많은 것을 생각이 깊은 것으로 착각하며, 인기가 많은 것을 좋은 것으로 착각한다.
철학은 새로운 렌즈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게 도와주고, 바로 거기에 큰 가치가 있다. 철학은 지식 체계가 아니라 하나의 사고방식, 이 세상에 존재하는 방식이다. '무엇을'이나 '왜'가 아니라 '어떻게'다. 우리의 대부분은 '실재의 본질은 무엇일까'나 '왜 무無가 아니고 무언가가 존재할까'를 고민하며 밤늦게까지 잠 못들지 않는다. 우리를 붙들고 놔주지 않는 것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처럼 어떻게를 묻는 질문이다.
과학과 달리 철학은 규범적이다. 철학은 세상이 현재 어떤 모습인지뿐만 아니라 어떤 모습일 수 있는지까지 말해준다.
사명은 내부에서, 의무는 외부에서 온다. 사명감에서 나온 행동은 자신과 타인을 드높이기 위한 자발적 행동이다. 의무감에서 나온 행동은 부정적인 결과에서 스스로를, 오로지 스스로만을 보호하려는 행동이다.
우리는 명백한 것은 좀처럼 질문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간과가 실수라고 생각했다. 명백해 보이는 문제일수록 더 시급하게 물어야 한다.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아는 지혜, 가장 최악의 무지는 지식의 가면을 쓴 무지다. 편협하고 수상쩍은 지식보다는 폭넓고 솔직한 무지가 더 낫다.
"모든 질문은 세상을 이해하려는 외침" - 칼 세이건
철학은 삶, 우리 자신의 삶에 관한 것이고, 어떻게 하면 이 삶을 최대한 잘 살아내느냐에 관한 것이다.
삶을 성찰하려면 거리를 둬야 한다. 자기 자신을 더 명확하게 들여다보면서 자신에게서 몇 발짝 물러나야 한다. 이렇게 거리를 둘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에게 철학과 대화는 사실상 동의어였다.
커다란 질문일수록 우리는 정보만 제공하는 답에 관심이 없다. 사랑은 뭘까? 악은 왜 존재하는 거지? 이런 질문을 할 때 우리가 원하는 것은 정보가 아닌 보다 더 큰 것, 바로 의미다. 질문은 일방향이 아니다. 질문은 (최소) 양방향으로 움직인다. 질문은 의미를 구하고 또 전달한다. 적절한 때 친구에게 적절한 질문을 묻는 것은 연민과 사랑의 표현이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자주 질문을 무기로 사용한다. 상대를 저격하고(네가 뭐라도 된다고 생각해?) 자신을 저격한다(왜 난 제대로 하는 게 없지?). 질문으로 변명을 삼고(이런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나중에는 정당화한다(내가 뭘 더 할 수 있었겠어?). 마음을 들여다보는 진정한 창문은 눈이 아니라 질문이다. 볼테르가 말했듯, 사람을 판단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사람의 대답이 아닌 질문을 보는 것이다.
영국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은 "행복하냐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그러면 곧 행복하지 않게 될 것이다."라는 말로 쾌락의 역설을 설명했다. 행복은 붙잡으려고 애쓸수록 우리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행복은 부산물이지, 절대 목표가 될 수 없다. 행복은 삶을 잘 살아낼 때 주어지는 뜻밖의 횡재 같은 것이다.
"모든 여행은 정확히 그 속도만큼 더 따분해진다." - 존 러스킨
정신은 시간당 5킬로미터의 속도, 즉 걷기에 적당한 속도에서 가장 활발하게 움직인다. 정신은 따분한 사무실, 사람들의 기대라는 폭군에서 풀려나 자유롭게 배회하고, 정신이 자유롭게 배회하면 예상치 못한 멋진 일들이 벌어진다. 이런 일은 항상은 아니지만 우리 생각보다 더 자주 발생한다. 걷기는 자극과 휴식, 노력과 게으름 사이의 정확한 균형을 제공한다.
가끔 우리는 의미를 너무 빨리 창출한다. 물건과 사람을 너무 빨리 정의 내리면 그것들의 유일무이함을 보지 못할 위험이 있다. 소로는 그러한 경향을 경계했다. "보편 법칙을 너무 성급하게 끌어내지 말 것." 소로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특수한 사례를 더 명확하게 들여다볼 것." 눈앞에 보이는 것을 바로 규정하지 않고 기다리면 더 많은 것을 보게 된다. 소로는 그 속도를 엉금엉금 기어가는 수준으로 낮추었다. 추측과 결론 사이의 틈, 보는 것과 본 것 사이의 틈을 최대한 길게 늘였다. 소로는 더 오래 머무르라고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상기시킨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주 오랜 시간 들여다봐야만 볼 수 있다."
"어떤 대상을 이해하는 것을 멈출 때에야 나는 비로소 그 대상을 보기 시작한다.", 아름다움은 이해하는 것보다 보는 것이 더 좋다.
"내가 숲속으로 들어간 것은 인생을 의도적으로 살고 싶기 때문이었다. 인생의 본질적인 실상에 직면하고 싶어서, 그것들이 가르치는 바를 내가 배울 수 있는지 알아보고 싶어서, 죽음을 맞이 했을 때 내가 제대로 살지 않았음을 깨닫고 싶지 않아서였다." - <월든>
사람들은 자신의 감각이 주변 환경을 훑으며 정보를 뽑아내는 안테나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감각은 홍수처럼 밀려드는 감각 정보에 압도되지 않도록 뒤엉켜 있는 온갖 잡다한 것에서 유의미한 신호를 걸러내는 필터에 더 가깝다. 소로의 말처럼 우리는 "무한한 세상에서 자신의 몫"만을, 더도 덜도 아닌 딱 그만큼만 받아들이도록 타고난다.
보는 행위는 의도적이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할 때조차 보는 것은 언제나 선택의 행위다. 소로는 제대로 보려면 "눈에 별도의 목적"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핵심은 각도다. 소로처럼 온갖 각도를 다 활용한 사람은 없었다. 관점을 바꾸면 어떻게 보느냐뿐만 아니라 무엇을 보느냐도 바뀐다. "제대로 된 관점에서 보면 모든 폭풍과 그 안에 든 모든 빗방울이 무지개다."
매일 틀에 박힌 것만 보지 않겠다는 다짐에서, 소로는 자신의 관점을 바꾸었다. 가끔은 작디작은 움직임만으로도, "늘 가던 길이나 늘 반복되는 일상에서 머리카락 한 올만큼만" 벗어나도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다. 1855년 12월의 어느 추운 날, 소로는 "겨울치고는 이상하리만큼 남쪽으로 내려온" 솔양진이 한 마리를 발견했는데, 그건 평소에 다니던 길과는 다른 길을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세상을 거꾸로 뒤집으면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다.
"무엇이든 제대로 보려면 거리를 두어야 한다."
좋은 철학자는 좋은 청자다. 지혜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므로 이들은 얼마나 낯설든 간에 다양한 목소리를 듣는다.
소음은 다른 소리를 가린다. 시끄러운 환경에서 우리는 신호를 놓치고 가야 할 길을 잃는다. 이메일이 발명되기 약 150여 년 전, 쇼펜하우어는 어수선한 받은편지함을 우려했다.
에세이 <저술에 대하여>에서 쇼펜하우어는 사람을 멍하게 만드는 소셜미디어의 소음을 미리 보여준다. 소셜미디어 안에서 진정한 소리는 새로움이라는 소음에 묻혀 들리지 않는다. "가장 최근에 쓰인 것이 늘 더 정확하다는 생각, 나중에 쓰인 것이 전에 쓰인 것보다 더 개선된 것이라는 생각, 모든 변화는 곧 진보라는 생각보다 더 큰 오산은 없다."
우리는 데이터를 정보로 착각하고, 정보를 지식으로, 지식을 지혜로 착각한다. "정보는 그저 통찰로 향하는 수단일 뿐이며 정보 그 자체에는 거의 아무 가치도 없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소음에 정신이 팔린 사람은 음악을 듣지 못한다.
사람들은 해롭지 않은 것을 두려워하고 필요하지 않은 것을 욕망한다.
우리는 습관의 폭압에서 벗어나려고 여행을 한다.
우리는 존재의 차원에서, 심리학들이 말하는 긍정 정서의 차원에서 쾌락을 떠올린다. 반면 에피쿠로스는 결핍과 부재의 측면에서 쾌락을 규정해다. 그리스인은 이러한 상태를 아타락시아ataraxia라고 불렀다. 말 그대로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우리를 만족으로 이끄는 것은 어떤 것의 존재가 아니라 바로 불안의 부재다. 쾌락은 고통의 반대말이 아니라 고통의 부재를 뜻한다. 에피쿠로스는 향락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평정平靜주의자'였다.
얼마큼이어야 충분하지? 언제나 그 답은 "지금 가진 것보다 더"라고 생각했다. 알고 보니 '더 많이'는 움직이는 과녁이었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쾌락의 챗바퀴"라고 부른다. 우리는 새로운 쾌락에 익숙해진다. 그러면 새로운 쾌락은 더 이상 새롭지도, 그리 즐겁지도 않은 것이 된다.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지금보다 훨씬 많은 것(예를 들면 돈과 명예, 친구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저 조금만 더 많으면 된다. 하지만 조금 더 갖게 되면 우리는 눈금을 재조정하고 생각한다. 그저 조금만 더 있으면 돼. 우리는 얼마큼이어야 충분한지를 모른다. 충분히 좋음은 안주한다는 뜻이 아니다. 자기변명도 아니다. 충분히 좋음은 자기 앞에 나타난 모든 것에 깊이 감사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속도는 조급함을 낳는다. 기다릴 줄 아는 능력은 삶의 속도와 반비례하여 줄어든다. 인터넷이 왜 이렇게 느려? 피자는 아직 안 온 거야? 조급함은 미래를 향한 탐욕이다. 인내는 시간에 너그러운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관심은 우리가 행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동의하는 것이다. 헬스보다는 요가에 더 가깝다. 베유는 이를 "소극적인 노력"이라고 불렀다. 베유는 진정한 관심이란 일종의 기다림과 같다고 믿었다. 베유에게 이 두 가지는 사실상 같은 것이었다. "우리가 가장 귀중한 선물을 얻는 것은 그것을 찾아 나설 때가 아니라 그것을 기다릴 때다." 관심의 반대말은 산만함이 아니라 조급함이다.
모든 말다툼은 오해에서 비롯된다기보다는 '범주의 오류'에서 비롯된다. 양측이 같은 문제를 다르게 보는 것이 아니다. 양측에게는 각자 다른 두 가지 문제가 있다. 한 사람에게는 그릇을 비효율적으로 넣어서 고성능 식기세척기의 세척력을 극대화하지 못하는 상황이, 다른 사람에게는 자신의 핵심 역량, 더 나아가 자신의 남성성이 후려침 당하는 상황일 수 있다. 전쟁과 심술은 바로 이렇게 시작된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악에 맞서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이다." 모든 폭력은 상상력의 실패를 나타낸다. 비폭력은 창조성을 요구한다. 간디는 언제나 새롭고 혁신적으로 싸우는 방법을 찾아 해맸다.
간디는 "구덩이 안으로 내려가지 않고 구덩이를 팔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고 말했다. 다른 이를 잔인하게 대하는 사람은 곧 스스로를 잔인하게 대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이 혁명이 결국 실패로 끝나는 것이다. 수단과 목적을 혼동한 사람은 스스로를 집어삼킨다. 간디가 보기에 목적은 절대로 수단을 정당화하지 못했다. 수단이 곧 목적이었다. "불순한 수단은 불순한 결과를 낳는다. 정확히 뿌린 대로 거두게 되는 법이다." 유독한 땅에서 장미나무를 키울 수 없듯이, 피 묻은 땅에서는 평화로운 국가를 세울 수 없다.
갈등의 양측은 전체 파이가 아닌 진실의 일부만을 지닌다. 파이의 조각을 거래하는 것보다 파이의 크기를 키우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충분한 걸로는 부족한 사람에게는 무엇이든 충분하지 않다.
예의는 사회의 윤활유이고, 친절은 사회의 초강력 접착제다. 예의 있는 문화가 꼭 친절한 문화인 것은 아니다.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그 불확실성이다." - 14세기 승려 요시다 겐코
순식간에 사라지는 삶의 작은 기쁨을 즐기려면 느슨하게 쥐어야 한다. 너무 세게 붙잡으면 부서져버린다.
한 학자의 말처럼 철학자의 일이 "사물을 다른 방식으로 보여주는 것"이라면 쇼나곤은 확실히 철학자다. 쇼나곤의 철학에 함축된 의미는 다음과 같다. 우리의 정체성은 자기 주위에 무엇을 두기로 선택하느냐에 크게 좌우된다. 주변에 무엇을 두느냐는 선택이다. 철학은 우리가 내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선택을 겉으로 드러내 보인다. 어떤 것이 자신의 선택임을 깨닫는 것은 더 나은 선택으로 향하는 첫걸음이다. 독일 자가 헤르만 헤세가 말했듯, "일하는 동안 곁에 두기 위해 처음으로 작은 꽃을 꺾은 사람은 인생의 기쁨에 한 발짝 다가간 것이다."
"우리는 자기 삶의 시인이 되고 싶어 한다. 가장 사소하고, 가장 일상적인 것에서부터"
니체는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행동이 아니라 태도라고 생각했다. 니체 철학의 핵심에는 "완벽한 불확실성의 세계에서 자신의 방향성을 바꾸려는 시도"가 있었다. 보통 우리는 불확실성에서 도망쳐 확실성으로 향해 달려간다. 니체는 그것이 불변의 사실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가치이며, 우리가 가치를 부여하는 모든 것은 재평가가 가능하다.
우리는 확실성이 아닌 정반대에서 즐거움을 찾기로 선택할 수 있다. 일단 그렇게 하면, 삶(외부인의 관점에서는 전과 똑같은 삶)은 꽤나 다르게 느껴진다. 불확실성에서 즐거움을 찾으면 낮에 회사에서 있었던 심란한 일은 하루의 끝에 이를 갈며 와인 한 잔을 더 마셔야 할 일이 아닌 축하할 일이 된다. 불확실성에서 즐거움을 찾으면 질병마저도, 신체적 고통이 계속될지라도, 더 이상 두렵지 않다. 이러한 관점의 변화는 미묘하지만 그 영향력이 엄청나다. 세상이 전과 달라 보인다. 니체 또한 이러한 방향 전환이 쉽지 않음을 인정하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게다가 지금까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가능성을 탐험하는 것이 바로 철학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막스플랑크 인간 발달과 교육 연구소의 지혜 프로젝트는 지혜를 규정하는 다섯 가지 기준을 제시했다. 사실적 지식, 절차적 지식, 인생 전체에 걸친 맥락주의, 가치 상대주의, 불확실성을 관리하는 능력이 그것이다. 나는 그중에서도 가장 마지막 기준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삶의 불확실성과 혼란을 관리해주겠다고 약속하는 알고리즘과 인공지능의 시대를 살아간다. 하지만 알고리즘과 인공지능은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삶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예측 불가능하고 혼란스럽게 느껴진다.
"바람에 수없이 시달리지 않은 나무는 땅에 튼튼하게 뿌리박지 못한다. 바람에 흔들려야 땅을 더욱 강하게 움켜쥐고 안정적으로 뿌리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 고난은 덕을 함양할 수 있는 기회다." - 세네카
소크라테스처럼 에픽테토스도 무지를 진정한 지혜로 향하는 길에 반드시 필요한 단계로 여겼다. 철학은 "우리 자신의 나약함을 의식하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에픽테토스는 말했다.
삶의 많은 것들이 우리의 통제 바깥에 있지만,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을 지배할 수 있다. 바로 우리의 생각과 충동, 욕망, 혐오감, 즉 우리의 정신적, 감정적 삶이다.
우리는 너무 자주 자신의 행복을 타인의 손에 맡긴다. 고압적인 상사나 변덕스러운 친구, 인스타그램 팔로어 같은 타인의 손에. 노예였던 에픽테토스는 이런 고난을 스스로 부여한 속박에 빗댄다. 원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만이 자유로울 수 있다.
"사람들을 화나게 하는 것은 문제 자체가 아니라 그 문제에 대한 그들의 판단이다."
자발적 박탈의 목표는 고통이 아니라 기쁨이다. 때때로 삶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들을 스스로 거부함으로써 우리는 그것들에 더욱 감사하게 되고, 덜 얽매이게 된다. 자발적 박탈은 자제력을 길러주며, 자제력을 키우면 여러 좋은 점이 있다. 기쁨을 포기하는 것은 삶에거 가장 큰 기쁨 중 하나다. 자발적 박탈은 용기를 길러준다. 또한 그리 자발적이지 않을 수도 있는 미래의 박탈에 대비해 예방 주사를 놔준다. 지금은 따끔한 고통을 경험하지만 미래의 고통은 훨씬 줄어든다.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상함으로써 우리는 미래의 고난이 가진 영향력을 빼앗고 지금 가진 것에 더욱 감사할 수 있다. 예상된 고난은 힘을 잃는다. 구체적으로 표현된 두려움은 크기가 줄어든다.
"무언가를 잃어버렸을 때 그 자리에서 즉시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가질 수 있었던 시간에 감사해라." 우리는 종종 자신의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혼동한다. 스토아철학은 헷갈릴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간단하다. 내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 몸조차도 내 것이 아니다. 우리는 늘 빌릴 뿐, 절대로 소유하지 않는다. 해방감이 느껴진다. 잃어버릴 것이 없다면 잃어버릴까 봐 두려워할 것도 없다.
고대 그리스에는 시간을 의미하는 단어가 두 개 있었다. 바로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다. 크로노스는 일반적인 시간이다. 시계 속의 분, 달력 속의 달이다. 카이로스는 딱 맞는 적절한 때를 의미한다. 무르익은 기회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나 "지금은 때가 아니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카이로스를 의미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반쯤 잠든 채로 인생을 살아간다. 우리는 사회적 역할과 자신의 본질을 혼동한다. 사르트르는 우리가 "타인에게 사로잡혀 있"으며 타인의 시선대로 스스로를 바라본다고 말한다. 우리는 자유를 박탈당했으며 진정성이 없다(진정성authenticity이라는 단어는 독립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이우덴테스authentes에서 나왔다). 나는 노인들이 특히 이렇게 자유를 포기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노인을 무력하고 하찮은 존재로 바라보고, 노인들도 곧 스스로를 그런 식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노인들은 노인을 연기한다.
친구는 현재의 우리 자신과 과거의 우리 자신을 연결해 준다. 그렇기에 나이 들었을 때 친구를 잃는 것이 특히 더 고통스러운 것이다. 우리는 친구와 함께 과거의 일부까지 잃어버린다. 자기 자신의 일부까지도.
우리는 나이 들수록 더 삶에 매달린다. 하지만 놓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내가 건설적인 물러남으로 부르는 것을 실천해야 한다. 건설적인 물러남은 만사 무관심하거나 세상에서 등을 돌리는 게 아니다. 조심스럽게 한 발 물러나는 것이다. 여전히 기차에 탄 승객이고 여전히 다른 승객을 신경 쓰지만, 부딪치고 흔들리는 것에 전보다 덜 불안해하고 목적지에 잘 도착할 수 있을지 덜 걱정하는 것이다.
인생을 강이라고 생각해보자. 둑 사이에서 가늘게 흐르기 시작한 강물은 돌 위와 다리 아래를 지나 폭포수가 되어 떨어진다. "강은 점점 더 폭이 넓어지고 둑은 점점 낮아진다. 물은 갈수록 더 잔잔히 흐르다 눈에 띄는 커다란 변화 없이 결국 바다와 어우러지고, 고통 없이 독자성을 내려놓는다." 나는 이것이 노년의 최종 과제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물길을 좁히는 것이 아니라 넓히는 것. 꺼져가는 빛에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빛이 다른 이들의 삶 속에서 계속 타오를 것임을 믿는 것. 카이로스의 지혜. 모든 것에는 알맞은 때가 있다. 심지어 물러나는 것에도.
죽음은 우리 모두를 철학자로 만든다. 몽테뉴는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 모든 지혜와 이론의 핵심은 결국 바로 이것이다. 우리에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
"우리가 존재할 때 죽음은 현재가 아니며, 죽음이 현재일 때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내가 태어나기 전의 비존재는 내가 죽고 난 뒤의 비존재와 동일하지 않다. 하나는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비존재이고, 다른 하나는 한때는 존재했던 비존재이며, 이것은 크나큰 차이를 낳는다. 공허와 빈자리는 같은 것이 아니다. 없음nothingness은 과거에 존재했던 것과 지금도 존재하는 것에 따라 정의된다.
"내가 두려운 것은 죽음이 아니라 죽기까지의 과정이다."
몽테뉴는 삶을 잘 살아내지 않고서 잘 죽을 수 없었고,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알지 않고서 삶을 잘 살아낼 수 없었다. 몽테는 죽음을, 자기 자신의 죽음을 온전히 직면하지 않고선 삶을 온전히 살아낼 수 없다고 말한다. "죽음에서 낯선 느낌을 제거하고, 죽음을 알고, 죽음에 익숙해지자. 다른 무엇도 죽음만큼 자주 생각하지 말자. 매 순간 죽음의 모든 양상을 상상하자. 말에서 떨어질 때, 건물 타일이 떨어질 때, 아주 살짝 바늘에 찔릴 때, 즉시 이렇게 생각하자. 지금 내가 죽는다면? 우리는 언제나 장화를 신고 즉시 떠날 준비를 해야만 한다."
죽음은 삶의 끝이지만 삶의 목표는 아니다. 죽음은 삶의 실패가 아니라 삶의 자연스러운 결과다.
죽음의 해결책은 더 긴 삶이 아니다. 절망의 해결책이 희망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죽음과 절망 모두 같은 약을 필요로 한다. 수용이다.
죽음의 존재를 인식하면 삶을 더 풍성하게 살 수 있다. 시인 호라티우스는 이렇게 말한다. "새로 시작되는 매일매일이 너의 마지막 날이라고 확신하라. 그 뜻밖의 시간들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니."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공포와 더불어 욕심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며칠, 또는 몇 년을 더 살고 싶어 한다. 그리고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그 시간을 얻은 후에는 더 많은 시간을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