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는 당연하다고 여기던 것들이 지금에 와서는 더 이상 상식이 아닐 수 있다.
[본문발췌]
기본소득 개념에 호의적인 사상가들과 반자본주의 활동가들은 가까이에서든 멀리서든 앙드레 고르츠의 분석 주위를 맴돌면서 노동 이데올로기와 자본주의적 소외, 파괴적인 공리주의, 무한한 성장이라는 환상, 환경친화적 관점에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생산제일주의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단 하나의 수단으로 모든 것을! 높은 기본소득은 실직을 매력적인 것으로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일자리를 잃는 것이 기회를 창조하고 사회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실업자가 스스로 무익한 사람이라는 죄의식과 실패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기본소득이 지불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새로운 실업자들은 시간을 내서 주말에 소비와 여가 활동에 몰두하기보다는 자본주의적 현대성의 원자화에 의해 사회관계가 파괴된 바로 그 자리에서 다시 관계를 만들어낼 것이다. 그들은 수입을 보충하기 위해 어느 정도 일을 하겠지만, 노인들을 돌본다거나 비영리단체를 만드는 등, 물질적으로는 간소하지만 인간적으로나 정치적으로는 훨씬 더 풍요한 생활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단순 반복 작업이나 개방된 공간에서의 잡일이 주는 소외를 더 이상 견뎌내려 하지 않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수입이 줄어들더라도 필요한 것도 줄어들기 때문에 그만큼 덜 소비한다. 이 것이 바로 행복한 간소함이다. 더 적은 돈을 벌더라도 직접 더 많은 일을 하므로 서비스에 돈을 지불할 일은 줄어든다. 이것이 바로 반공리주의다. 소비를 덜 하므로 생산도 덜한다. 이것이 바로 탈 성장이다.
공유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 공유가 혁신적인 것은, 그것이 이미 포기한 원칙들을 되살리고 우리의 고정관념을 갑작스럽게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유주의자들에게 반대하며 독점적인 사유재산권보다는 사용권에 토대를 둔 재산권 개념에 다시 활기를 불어넣는다. 또 그들은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반대하며 '과학적 사회주의'라고 가정되는 것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유토피아적'이라고 이름 붙인 사회주의적 전통을 회복시켰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언제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유효한 추상적 규정들을 만들어 계획을 세우고 개입하는 중앙집권적 국가에 반대하는 반면, 자주적으로 관리되는 지역에서의 경험과 계속해서 쇄신되는 개별적 권리를 옹호한다. 공유는 다른 측면을 통해서도 우리의 세계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므로 공유가 이렇게까지 크게 유행하는 것을 보고 놀라서는 안 된다. 그들은 '위에서 내려보내는' 결정보다 '현장에서 내려지는' 결정을 더 중요시한다. 또 그들은 공무원들의 평가보다는 실무 경험을, 인가증이나 제한적인 면허증보다는 '함께 건설해나가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더 근본적으로 얘기하자면, 그들은 좌파와 우파의 정치적 분열을 정당화하는 국가와 시장의 대립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주의의 토대를 다른 제도와 비교하고 분석하면서 선거를 통해 어떤 행정관직을 누군가에게 맡기는 것은 과두제라고, 즉 적은 숫자가 많은 숫자를 지배하는 제도라고 주장했다. 선거는 선택이며, 선택은 필연적으로 지적 엘리트(귀족정치)와 돈의 엘리트(금권정치), 기술의 엘리트(기술자 정치), 혹은 노인들의 엘리트(노인 정치)에게 권력을 부여하게 되어 있다. 몽테스키외는 <법의 정신>(1748)에서 이 같은 분석을 되풀이한다. "선택에 의한 선거는 귀족정치의 성격을 품고 있다." 만일 이러한 이데올로기적인 해석을 따른다면, 오늘날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실제로 일종의 보통선거로 선출하는 귀족정치가 될 것이다. 즉 우리는 거의 대부분 부유하고 교육받은(부유하다는 것과 교육받았다는 것은 보통 뒤섞인다) 계급에서 뽑힌 '가장 훌륭한 소수(귀족)'를 정기적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민주주의는 시민들이 교대로 통치자가 되기도 하고 피통치자가 되기도 해야 하며, 대중의 '양식'이 더 높은 가치를 부여받고, 정치에서의 '훌륭한 결정'은 가르칠 수가 없다고 여기는 아테네 정신과는 거리가 매우 멀다.
1962년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는 "참여 민주주의를 실현하겠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민주주의란 이따금씩 투표용지를 투표함 속에 넣고, 권력을 한 명이나 여러 명의 선량들에게 위임한 다음 5년 동안 무관심으로 일관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전통적인 제도 밖에서 각종 단체를 통해 집단적으로 참여할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프랑스에서 공산주의를 제외한 모든 좌파의 사조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다른 맥락에서 출현한 참여의 개념을 되풀이해서 말한다.
대의제는 시민들의 적극적 참여를 전제로 하는 구조를 통해 풍요로워져야 한다. 그것은 심지어 '공급의 민주주의'에서 단순한 소비자-유권자가 아닌 시민들을 실제로 만들어낼 수 있는 수단, 즉 대중들로부터 정치적 공동체를 만들어낼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다. 미국 정치학자 벤자민 바버(1939~2017)는 이러한 생각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대중들은 시끄럽게 떠들고, 시민들은 토론한다. 대중들은 처신하고, 시민들은 행동한다. 대중들은 서로 부딪치고 교차하며, 시민들은 참여하고 공유하고 기여한다."
시민의회, 토의를 통한 여론조사, 시민배심원, 시민 회의 등, 여러가지 실험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 실험들을 통해 어떤 정치적 결과를 기대하는 것일까? 첫 번째로 이 실험들에서 정당의 논리나 인기영합적 논리에 이의를 제기하는 수단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추첨으로 뽑힌 시민은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이 결정이 자신의 재선출이나 직업적 인맥에 미칠 영향에 대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때 추첨은 더 이상 의원들의 개인적 야망과 연관되지 않는 '자율 통치'의 수단이 되어, 추첨 제도가 없어다면 아마도 이 같은 책임에 접근하지 못할 일반인들에게 '통치' 수단을 제공해준다. 이렇게 해서 결정은 더 대표적이거나 사회의 현실에 더 충실한 집단에 의해 내려진다. 이것은 또한 시민배심원단이나 시민 회의에서 때로는 지나치게 복잡하다고 판단되거나 혹은 감정을 폭발시킬 수 있는 명확한 문제에 관한(특히 사회적이거나 생명윤리적인 주제에 관한) 갈등을 더 평화롭게 해결할 수 있는 수단이기도 하다. 토론을 통한 여론조사의 경우, 추첨으로 뽑힌 집단에서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서도(만일 사회가 토론을 들을 수 있다면) 식견 있는 여론이 형성됨으로써 동향을 살피는 것으로 만족하는 여론 민주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정식으로 내세워지는 논거는, 추첨이 일상생활의 현실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엘리트 계층보다는 보통사람들이 더 많이 알고 있는 일반적이며 관습적인 지식(때로는 대중의 '상식'을 덧붙이는 지식)을 전수하는 수단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인간 동물'과 '비인간 동물' 간에 본질의 차이가 없다면, 단지 인간이라는 이유로 그에게 몇 가지 특권을 부여하는 태도는 성차별주의나 인종차별주의와 유사하다. 프랑스에서 반종차별주의를 대중화시킨 저널리스트 에므리크 카롱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이성의 검토를 거치지 않은 범주화에 근거해 일부 인간을 학대한다. 흑인들이나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그들의 피부색 때문에 노예로 전락했고, 여성들은 그들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남성들과 똑같은 권리를 갖지 못했으며, 이제 동물들은 그들이 '닭'이나 '돼지', 혹은 '담비' 종에 속한다는 이유로 학대받고 죽는다." 반종차별주의는 어떤 종에 소속된다는 사실을 도덕적 배려의 조건으로 삼지 않는 것이다. 피터 싱어는 이러한 생각이 터무니없거나 충격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항상 "실존적 의식의 충격 상태"에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과거의 도덕적 태도는 "우리의 생각과 행위 속에 너무 깊이 뿌리박고 있어서 단순히 우리가 우리 자신과 다른 동물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지식을 변화시켜서는 바뀌지 않는다.
동물 보호를 위한 생태학적 논거. 공장식 목축으로 생산되는 동물성 제품을 정기적으로 소비하는 것.
자동차를 타는 것을 포기할 때보다 고기 먹는 걸 중단할 때 탄소발자국을 더 많이 줄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많은 현대 사상가들은 트랜스휴머니즘은 인간의 인지능력과 감각능력, 외부 자극에 대한 반응성, 기억력, 인내력을 향상하겠다는 의지라고 분석한다. 또한 초고속으로 접속하고 반응하며 끊임없이 우리의 주의와 시간과 에너지를 영구적으로 최적화하기를 요구하는, 자극으로 가득 찬 이 세계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겠다는 병적 의지의 표명으로 트랜스휴머니즘을 해석한다.
그러고 나서 이 철학자(귄터 안더스)는 인간의 인공화한 변환을 "세계의 법칙을 위반하는" 무언가로 보기를 거부하고, "우리의 자유를 아무 조건없이 포기한다"라고 선언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트랜스휴머니즘의 계획에서 조물주는 흔히 위대함에 대한 망상으로, 히브리스(정념과 오만이 불러일으키는 격렬한 감정)의 의지로 여겨지는 반면 안더스는 그것이 포기라고 주장한다. "상황에 맞추어 만들어진 존재처럼 행동하는 것은 한도를 뛰어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는 미묘한 차이를 고려해 표현한다. "그것은 자만심이 부추기는 복종이다." 우리가 물려받은 생물학적 여건과 인간의 조건을 뛰어넘을 수 있다고 믿고, 자신의 욕망과 자유를 마음껏 발산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트랜스휴머니스트는 기술에 모든 것을 넘겨주고 영원토록 골동품 취급을 받으며 끊임없이 자신을 갱신하고 변환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트랜스휴머니즘은 자유롭다는 것의 피곤함,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의 피곤함에 대한 해답으로 보인다.
자유주의적 우생론은 트랜스휴머니즘을 둘러싼 대부분의 의문과 비판을 반대로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한다. 최상의 유전자 개량은 가장 비싸고, 엘리트 계층만을 위한 것일 될까? 그 시대의 몇몇 사회적 기준과 일치하는 아기를 선택해 인류를 표준화하는 것일까? 이로써 자연적 진화 과정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지구에 존재하는 다양성의 근원인 불확실성과 우연성이 파괴될까?
보완 화폐의 주요 이론가 중 한 명인 베르나르 리에테르가 볼 때, 인간의 화폐 제조는 현재의 단기성과주의와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는 성장, 부의 집중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경쟁사회를 만들어낸다. 우리는 이익이 시간이나 위험을 보상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 이익을 수요와 공급의 결과로, 어떻게 보면 돈의 비용으로 보는 전통적 관점에서 멀어져 있는 것이다.
보완 화폐는 장기거래에 사용되는 '가치 저장' 화폐와 더 일상적이며 시간이 지나면서 가치가 떨어지는 '교환 화폐'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지역화폐 제도는 유명 회사는 철저히 제외하고 지역 생산자들을 중심으로 운영하기 때문에 이론상으로는 지역에서의 소비가 증가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렇게 해서 소비자는 사회적, 생태적 기준을 준수하는 기업의 상품을 구매하게 된다. 상품과 상품의 유통경로 축소, 고용 확대, 부정적 외부성(부정적 외부성이란 어떤 재화의 생산이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것을 말하는데, 오염을 예로 들 수 있다)에 대한 더 나은 검토 등 짧은 순환에 대한 호의적인 논거가 다시 등장한다.
지역화폐는 실용성이 없어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의 중요성을 증대시키는 여러 메커니즘과 결합할 수 있다. 기본소득의 전부 혹은 일부가 지역화폐로 지불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하면 이 보조금을 외국에서 만들어진 상품을 사는 데 써버릴 위험이 줄어든다. 또한 세금의 일부나 시민 활동 시간을 돈으로 환산한 금액을 특별 화폐로 지불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시민들은 시간을 내 이런저런 협회에서 활동하고 싶어 하게 될 것이다. 특히 이 지역화폐는 흔히 서서히 녹아 없어진다. 즉 시간이 지나면서 그 가치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이 메커니즘은 오늘날에는 거의 잊힌 독일 경제학자 실비오 게젤에 의해 이론화되었다. 게젤은 돈이 "잠자지 않기"를, 즉 그것이 쌓이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서 그는 "녹스는" 화폐를 상상한다. 즉 지폐의 가치를 간직하기 위해 일정한 시간 간격을 두고 스탬프를 찍어야 한다. 따라서 화폐는 더 빨리 유통되어(이론상으로)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고전적 경제학자들은 이 같은 생각이 화폐가 가진 세 가지 기능 중 하나, 즉 시간이 흘러도 그것의 부를 간직하도록 하는 가치 저장의 기능을 잃어버리게 할 것이라며 경계한다. 경제가 각자 그 자체의 화폐를 보유하고 있는 작은 공동체들로 분산되는 것은 비정상적이다. 왜냐하면 화폐의 목적은 교환을 수월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일 화폐를 가지는 것이 더 간단하고 효율적으로 보인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베르나르 리에테르는 대답한다. 그러나 그에 의하면 이 같은 효율성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만성적인 불안정이라는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1970년과 2010년 사이에 은행 공황이 145번, 화폐 가치 폭락이 208번, 국가채무로 인한 위기가 72번 일어났다. 리에테르는 생태계의 역학에 관한 연구로 알려진 생태학자 로버트 울라노비치의 연구를 토대로 최적화된 생태계가 가장 지속적이지는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자연은 효율과 탄성에너지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대안 화폐를 도입해서 전통 화폐를 안정시켜야 한다.
유한한 세계에 무한한 성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탈성장은 식별 가능한 세계의 축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녹색 자본주의와 지속 가능한 발전(이상기후에 직면하여 제시되는 잘못된 해결책)의 거부, 생산제일주의와 소비주의의 거부, 더 절제하고 연대하며 민주적인 '검소한 풍요사회'의 건설이 바로 그것이다.
어느 단계가 지나면 인간은 더 이상 소비하지 않고 소진한다. 우리는 생물다양성이 악화되고 생물들이 사는 자연환경이 교란(농업을 위해 토양을 개량하는 것, 단일 경작을 위해 높은 생산성을 가진 소수의 종을 선택하는 것, 화학비료를 집중적으로 사용하는 것 등)되면서 생물 종들이 소멸하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그리스 사상가 코르넬리우스 카르토리아디스는 "인간이 생산하고 소비하는 짐승으로, 멍청한 TV 리모컨 이용자로 바뀌면서 인류가 멸망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물질화되고 개인주의화되었으며 시장경제를 따르는 소비사회는 인간을 왜곡해 개인적인 이익과 욕망에 의해 인도되는 '단순한' 인간으로 변모시킨다.
자율적이고 진정한 행동력을 갖추고 있으며 의식을 가진 참여적 시민들은 그들의 이해관계에 덜 집착하는 한편, 그들의 생활양식과 안락함을 축소시키려 할 것이다. 탈성장주의자들은 민주주의야말로 여전히 사람들이 (앙드레 고르츠의 표현을 빌리자면) '적은 것으로 더 잘하고',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으려는 경제적 합리성 모델을 폐기하며, '충분함'의 윤리를 집단에서 재발견할 수 있게 만드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주장한다.
이미 세 개의 큰 경향이 페미니즘 운동의 발달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19세기에 시작된 첫 번째 경향은 시민의 권리들(그중에서 가장 상징적인 권리가 투표권이다)을 쟁취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 두 번째 경향은 페미니스트들의 관심사를 사적 영역까지 넓혔다. 이 경향의 결정적인 순간은 피임의 합법화(프랑스의 경우에는 1967년)와 낙태의 합법화(1975년)다. 이 두 번째 경향은 급진적이며 유물론적인 페미니즘과 연관된다. 1990년대에 시작된 세 번째 경향은 퀴어 운동과 상호교차성 페미니즘을 포함한다.
우버는 사람들이 플랫폼 자본주의라고 부르는 것의 선구자다. 플랫폼은 정보와 콘텐츠, 혹은 서비스를 교환하기 위해 사용자들(전문가이건 아니면 단순한 소비자이건 간에)이 접속하는 디지털 환경, 예를 들면 인터넷 사이트나 스마트폰용 애플리케이션이다. 우버와 이해당사자들의 경우에 이 플랫폼은 서비스를 교환하고 고객과 서비스업자 간에 상업적 관계를 만들어낸다. 이 경제적 인프라를 유지하기 위해 플랫폼은 실현된 거래에서 수수료를 공제한다. 이 플랫폼에 열광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협동경제나 공유경제의 동의어이며, 노동의 중요한 부분이 중개자가 덜 개입한 상태에서 디지털 수단을 통해 '도급으로' 이루어지는, 더욱 수평적인 사회를 예고한다. 미래에는 기업가들과 프리랜서들이 엄격한 임금제 밖에서 경제활동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즉 공급과 수요를 즉시 연결하는 기술 덕분에 시장이 원활하게 돌아가는 것이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호의적으로 보이는 이 외관 아래 악마가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디지털적인 것으로부터 만들어진 협동경제가 결국은 새로운 종류의 독점적이고 자본주의적이며 기생적인 플랫폼들에 의해 완전히 붕괴되어 사회적, 정치적 재난을 불러올 것이라고 주장한다.
기업가라는 수사와 유연성, 자율성, 선택이라는 미명 아래 노동자들은 실업이라든가 질병, 노화 같은 엄청난 위험의 무게를 등에 짊어진다. 전통적인 일자리가 장기적인 협업에 참여하는 두 당사자들의 결합이었던 바로 그곳에서, 네트워크에 연결된 노동력은 이제 원나이트스탠드의 연속에 불과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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