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는 당연하다고 여기던 것들이 지금에 와서는 더 이상 상식이 아닐 수 있다.

 

 

[본문발췌]

 

 

기본소득 개념에 호의적인 사상가들과 반자본주의 활동가들은 가까이에서든 멀리서든 앙드레 고르츠의 분석 주위를 맴돌면서 노동 이데올로기와 자본주의적 소외, 파괴적인 공리주의, 무한한 성장이라는 환상, 환경친화적 관점에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생산제일주의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단 하나의 수단으로 모든 것을! 높은 기본소득은 실직을 매력적인 것으로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일자리를 잃는 것이 기회를 창조하고 사회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실업자가 스스로 무익한 사람이라는 죄의식과 실패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기본소득이 지불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새로운 실업자들은 시간을 내서 주말에 소비와 여가 활동에 몰두하기보다는 자본주의적 현대성의 원자화에 의해 사회관계가 파괴된 바로 그 자리에서 다시 관계를 만들어낼 것이다. 그들은 수입을 보충하기 위해 어느 정도 일을 하겠지만, 노인들을 돌본다거나 비영리단체를 만드는 등, 물질적으로는 간소하지만 인간적으로나 정치적으로는 훨씬 더 풍요한 생활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단순 반복 작업이나 개방된 공간에서의 잡일이 주는 소외를 더 이상 견뎌내려 하지 않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수입이 줄어들더라도 필요한 것도 줄어들기 때문에 그만큼 덜 소비한다. 이 것이 바로 행복한 간소함이다. 더 적은 돈을 벌더라도 직접 더 많은 일을 하므로 서비스에 돈을 지불할 일은 줄어든다. 이것이 바로 반공리주의다. 소비를 덜 하므로 생산도 덜한다. 이것이 바로 탈 성장이다.

 

 

공유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 공유가 혁신적인 것은, 그것이 이미 포기한 원칙들을 되살리고 우리의 고정관념을 갑작스럽게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유주의자들에게 반대하며 독점적인 사유재산권보다는 사용권에 토대를 둔 재산권 개념에 다시 활기를 불어넣는다. 또 그들은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반대하며 '과학적 사회주의'라고 가정되는 것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유토피아적'이라고 이름 붙인 사회주의적 전통을 회복시켰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언제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유효한 추상적 규정들을 만들어 계획을 세우고 개입하는 중앙집권적 국가에 반대하는 반면, 자주적으로 관리되는 지역에서의 경험과 계속해서 쇄신되는 개별적 권리를 옹호한다. 공유는 다른 측면을 통해서도 우리의 세계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므로 공유가 이렇게까지 크게 유행하는 것을 보고 놀라서는 안 된다. 그들은 '위에서 내려보내는' 결정보다 '현장에서 내려지는' 결정을 더 중요시한다. 또 그들은 공무원들의 평가보다는 실무 경험을, 인가증이나 제한적인 면허증보다는 '함께 건설해나가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더 근본적으로 얘기하자면, 그들은 좌파와 우파의 정치적 분열을 정당화하는 국가와 시장의 대립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주의의 토대를 다른 제도와 비교하고 분석하면서 선거를 통해 어떤 행정관직을 누군가에게 맡기는 것은 과두제라고, 즉 적은 숫자가 많은 숫자를 지배하는 제도라고 주장했다. 선거는 선택이며, 선택은 필연적으로 지적 엘리트(귀족정치)와 돈의 엘리트(금권정치), 기술의 엘리트(기술자 정치), 혹은 노인들의 엘리트(노인 정치)에게 권력을 부여하게 되어 있다. 몽테스키외는 <법의 정신>(1748)에서 이 같은 분석을 되풀이한다. "선택에 의한 선거는 귀족정치의 성격을 품고 있다." 만일 이러한 이데올로기적인 해석을 따른다면, 오늘날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실제로 일종의 보통선거로 선출하는 귀족정치가 될 것이다. 즉 우리는 거의 대부분 부유하고 교육받은(부유하다는 것과 교육받았다는 것은 보통 뒤섞인다) 계급에서 뽑힌 '가장 훌륭한 소수(귀족)'를 정기적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민주주의는 시민들이 교대로 통치자가 되기도 하고 피통치자가 되기도 해야 하며, 대중의 '양식'이 더 높은 가치를 부여받고, 정치에서의 '훌륭한 결정'은 가르칠 수가 없다고 여기는 아테네 정신과는 거리가 매우 멀다.

 

 

1962년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는 "참여 민주주의를 실현하겠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민주주의란 이따금씩 투표용지를 투표함 속에 넣고, 권력을 한 명이나 여러 명의 선량들에게 위임한 다음 5년 동안 무관심으로 일관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전통적인 제도 밖에서 각종 단체를 통해 집단적으로 참여할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프랑스에서 공산주의를 제외한 모든 좌파의 사조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다른 맥락에서 출현한 참여의 개념을 되풀이해서 말한다.

 

 

대의제는 시민들의 적극적 참여를 전제로 하는 구조를 통해 풍요로워져야 한다. 그것은 심지어 '공급의 민주주의'에서 단순한 소비자-유권자가 아닌 시민들을 실제로 만들어낼 수 있는 수단, 즉 대중들로부터 정치적 공동체를 만들어낼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다. 미국 정치학자 벤자민 바버(1939~2017)는 이러한 생각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대중들은 시끄럽게 떠들고, 시민들은 토론한다. 대중들은 처신하고, 시민들은 행동한다. 대중들은 서로 부딪치고 교차하며, 시민들은 참여하고 공유하고 기여한다."

 

 

시민의회, 토의를 통한 여론조사, 시민배심원, 시민 회의 등, 여러가지 실험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 실험들을 통해 어떤 정치적 결과를 기대하는 것일까? 첫 번째로 이 실험들에서 정당의 논리나 인기영합적 논리에 이의를 제기하는 수단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추첨으로 뽑힌 시민은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이 결정이 자신의 재선출이나 직업적 인맥에 미칠 영향에 대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때 추첨은 더 이상 의원들의 개인적 야망과 연관되지 않는 '자율 통치'의 수단이 되어, 추첨 제도가 없어다면 아마도 이 같은 책임에 접근하지 못할 일반인들에게 '통치' 수단을 제공해준다. 이렇게 해서 결정은 더 대표적이거나 사회의 현실에 더 충실한 집단에 의해 내려진다. 이것은 또한 시민배심원단이나 시민 회의에서 때로는 지나치게 복잡하다고 판단되거나 혹은 감정을 폭발시킬 수 있는 명확한 문제에 관한(특히 사회적이거나 생명윤리적인 주제에 관한) 갈등을 더 평화롭게 해결할 수 있는 수단이기도 하다. 토론을 통한 여론조사의 경우, 추첨으로 뽑힌 집단에서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서도(만일 사회가 토론을 들을 수 있다면) 식견 있는 여론이 형성됨으로써 동향을 살피는 것으로 만족하는 여론 민주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정식으로 내세워지는 논거는, 추첨이 일상생활의 현실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엘리트 계층보다는 보통사람들이 더 많이 알고 있는 일반적이며 관습적인 지식(때로는 대중의 '상식'을 덧붙이는 지식)을 전수하는 수단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인간 동물'과 '비인간 동물' 간에 본질의 차이가 없다면, 단지 인간이라는 이유로 그에게 몇 가지 특권을 부여하는 태도는 성차별주의나 인종차별주의와 유사하다. 프랑스에서  반종차별주의를 대중화시킨 저널리스트 에므리크 카롱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이성의 검토를 거치지 않은 범주화에 근거해 일부 인간을 학대한다. 흑인들이나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그들의 피부색 때문에 노예로 전락했고, 여성들은 그들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남성들과 똑같은 권리를 갖지 못했으며, 이제 동물들은 그들이 '닭'이나 '돼지', 혹은 '담비' 종에 속한다는 이유로 학대받고 죽는다." 반종차별주의는 어떤 종에 소속된다는 사실을 도덕적 배려의 조건으로 삼지 않는 것이다. 피터 싱어는 이러한 생각이 터무니없거나 충격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항상 "실존적 의식의 충격 상태"에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과거의 도덕적 태도는 "우리의 생각과 행위 속에 너무 깊이 뿌리박고 있어서 단순히 우리가 우리 자신과 다른 동물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지식을 변화시켜서는 바뀌지 않는다.

 

 

동물 보호를 위한 생태학적 논거. 공장식 목축으로 생산되는 동물성 제품을 정기적으로 소비하는 것.

자동차를 타는 것을 포기할 때보다 고기 먹는 걸 중단할 때 탄소발자국을 더 많이 줄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많은 현대 사상가들은 트랜스휴머니즘은 인간의 인지능력과 감각능력, 외부 자극에 대한 반응성, 기억력, 인내력을 향상하겠다는 의지라고 분석한다. 또한 초고속으로 접속하고 반응하며 끊임없이 우리의 주의와 시간과 에너지를 영구적으로 최적화하기를 요구하는, 자극으로 가득 찬 이 세계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겠다는 병적 의지의 표명으로 트랜스휴머니즘을 해석한다.

 

 

그러고 나서 이 철학자(귄터 안더스)는 인간의 인공화한 변환을 "세계의 법칙을 위반하는" 무언가로 보기를 거부하고, "우리의 자유를 아무 조건없이 포기한다"라고 선언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트랜스휴머니즘의 계획에서 조물주는 흔히 위대함에 대한 망상으로, 히브리스(정념과 오만이 불러일으키는 격렬한 감정)의 의지로 여겨지는 반면 안더스는 그것이 포기라고 주장한다. "상황에 맞추어 만들어진 존재처럼 행동하는 것은 한도를 뛰어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는 미묘한 차이를 고려해 표현한다. "그것은 자만심이 부추기는 복종이다." 우리가 물려받은 생물학적 여건과 인간의 조건을 뛰어넘을 수 있다고 믿고, 자신의 욕망과 자유를 마음껏 발산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트랜스휴머니스트는 기술에 모든 것을 넘겨주고 영원토록 골동품 취급을 받으며 끊임없이 자신을 갱신하고 변환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트랜스휴머니즘은 자유롭다는 것의 피곤함,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의 피곤함에 대한 해답으로 보인다.

 

 

자유주의적 우생론은 트랜스휴머니즘을 둘러싼 대부분의 의문과 비판을 반대로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한다. 최상의 유전자 개량은 가장 비싸고, 엘리트 계층만을 위한 것일 될까? 그 시대의 몇몇 사회적 기준과 일치하는 아기를 선택해 인류를 표준화하는 것일까? 이로써 자연적 진화 과정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지구에 존재하는 다양성의 근원인 불확실성과 우연성이 파괴될까?

 

 

보완 화폐의 주요 이론가 중 한 명인 베르나르 리에테르가 볼 때, 인간의 화폐 제조는 현재의 단기성과주의와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는 성장, 부의 집중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경쟁사회를 만들어낸다. 우리는 이익이 시간이나 위험을 보상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 이익을 수요와 공급의 결과로, 어떻게 보면 돈의 비용으로 보는 전통적 관점에서 멀어져 있는 것이다.

 

 

보완 화폐는 장기거래에 사용되는 '가치 저장' 화폐와 더 일상적이며 시간이 지나면서 가치가 떨어지는 '교환 화폐'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지역화폐 제도는 유명 회사는 철저히 제외하고 지역 생산자들을 중심으로 운영하기 때문에 이론상으로는 지역에서의 소비가 증가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렇게 해서 소비자는 사회적, 생태적 기준을 준수하는 기업의 상품을 구매하게 된다. 상품과 상품의 유통경로 축소, 고용 확대, 부정적 외부성(부정적 외부성이란 어떤 재화의 생산이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것을 말하는데, 오염을 예로 들 수 있다)에 대한 더 나은 검토 등 짧은 순환에 대한 호의적인 논거가 다시 등장한다.

 

 

지역화폐는 실용성이 없어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의 중요성을 증대시키는 여러 메커니즘과 결합할 수 있다. 기본소득의 전부 혹은 일부가 지역화폐로 지불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하면 이 보조금을 외국에서 만들어진 상품을 사는 데 써버릴 위험이 줄어든다. 또한 세금의 일부나 시민 활동 시간을 돈으로 환산한 금액을 특별 화폐로 지불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시민들은 시간을 내 이런저런 협회에서 활동하고 싶어 하게 될 것이다. 특히 이 지역화폐는 흔히 서서히 녹아 없어진다. 즉 시간이 지나면서 그 가치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이 메커니즘은 오늘날에는 거의 잊힌 독일 경제학자 실비오 게젤에 의해 이론화되었다. 게젤은 돈이 "잠자지 않기"를, 즉 그것이 쌓이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서 그는 "녹스는" 화폐를 상상한다. 즉 지폐의 가치를 간직하기 위해 일정한 시간 간격을 두고 스탬프를 찍어야 한다. 따라서 화폐는 더 빨리 유통되어(이론상으로)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고전적 경제학자들은 이 같은 생각이 화폐가 가진 세 가지 기능 중 하나, 즉 시간이 흘러도 그것의 부를 간직하도록 하는 가치 저장의 기능을 잃어버리게 할 것이라며 경계한다. 경제가 각자 그 자체의 화폐를 보유하고 있는 작은 공동체들로 분산되는 것은 비정상적이다. 왜냐하면 화폐의 목적은 교환을 수월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일 화폐를 가지는 것이 더 간단하고 효율적으로 보인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베르나르 리에테르는 대답한다. 그러나 그에 의하면 이 같은 효율성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만성적인 불안정이라는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1970년과 2010년 사이에 은행 공황이 145번, 화폐 가치 폭락이 208번, 국가채무로 인한 위기가 72번 일어났다. 리에테르는 생태계의 역학에 관한 연구로 알려진 생태학자 로버트 울라노비치의 연구를 토대로 최적화된 생태계가 가장 지속적이지는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자연은 효율과 탄성에너지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대안 화폐를 도입해서 전통 화폐를 안정시켜야 한다.

 

 

유한한 세계에 무한한 성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탈성장은 식별 가능한 세계의 축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녹색 자본주의와 지속 가능한 발전(이상기후에 직면하여 제시되는 잘못된 해결책)의 거부, 생산제일주의와 소비주의의 거부, 더 절제하고 연대하며 민주적인 '검소한 풍요사회'의 건설이 바로 그것이다.

 

 

어느 단계가 지나면 인간은 더 이상 소비하지 않고 소진한다. 우리는 생물다양성이 악화되고 생물들이 사는 자연환경이 교란(농업을 위해 토양을 개량하는 것, 단일 경작을 위해 높은 생산성을 가진 소수의 종을 선택하는 것, 화학비료를 집중적으로 사용하는 것 등)되면서 생물 종들이 소멸하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그리스 사상가 코르넬리우스 카르토리아디스는 "인간이 생산하고 소비하는 짐승으로, 멍청한 TV 리모컨 이용자로 바뀌면서 인류가 멸망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물질화되고 개인주의화되었으며 시장경제를 따르는 소비사회는 인간을 왜곡해 개인적인 이익과 욕망에 의해 인도되는 '단순한' 인간으로 변모시킨다.

 

 

자율적이고 진정한 행동력을 갖추고 있으며 의식을 가진 참여적 시민들은 그들의 이해관계에 덜 집착하는 한편, 그들의 생활양식과 안락함을 축소시키려 할 것이다. 탈성장주의자들은 민주주의야말로 여전히 사람들이 (앙드레 고르츠의 표현을 빌리자면) '적은 것으로 더 잘하고',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으려는 경제적 합리성 모델을 폐기하며, '충분함'의 윤리를 집단에서 재발견할 수 있게 만드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주장한다.

 

 

이미 세 개의 큰 경향이 페미니즘 운동의 발달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19세기에 시작된 첫 번째 경향은 시민의 권리들(그중에서 가장 상징적인 권리가 투표권이다)을 쟁취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 두 번째 경향은 페미니스트들의 관심사를 사적 영역까지 넓혔다. 이 경향의 결정적인 순간은 피임의 합법화(프랑스의 경우에는 1967년)와 낙태의 합법화(1975년)다. 이 두 번째 경향은 급진적이며 유물론적인 페미니즘과 연관된다. 1990년대에 시작된 세 번째 경향은 퀴어 운동과 상호교차성 페미니즘을 포함한다.

 

 

우버는 사람들이 플랫폼 자본주의라고 부르는 것의 선구자다. 플랫폼은 정보와 콘텐츠, 혹은 서비스를 교환하기 위해 사용자들(전문가이건 아니면 단순한 소비자이건 간에)이 접속하는 디지털 환경, 예를 들면 인터넷 사이트나 스마트폰용 애플리케이션이다. 우버와 이해당사자들의 경우에 이 플랫폼은 서비스를 교환하고 고객과 서비스업자 간에 상업적 관계를 만들어낸다. 이 경제적 인프라를 유지하기 위해 플랫폼은 실현된 거래에서 수수료를 공제한다. 이 플랫폼에 열광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협동경제나 공유경제의 동의어이며, 노동의 중요한 부분이 중개자가 덜 개입한 상태에서 디지털 수단을 통해 '도급으로' 이루어지는, 더욱 수평적인 사회를 예고한다. 미래에는 기업가들과 프리랜서들이 엄격한 임금제 밖에서 경제활동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즉 공급과 수요를 즉시 연결하는 기술 덕분에 시장이 원활하게 돌아가는 것이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호의적으로 보이는 이 외관 아래 악마가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디지털적인 것으로부터 만들어진 협동경제가 결국은 새로운 종류의 독점적이고 자본주의적이며 기생적인 플랫폼들에 의해 완전히 붕괴되어 사회적, 정치적 재난을 불러올 것이라고 주장한다. 

 

 

기업가라는 수사와 유연성, 자율성, 선택이라는 미명 아래 노동자들은 실업이라든가 질병, 노화 같은 엄청난 위험의 무게를 등에 짊어진다. 전통적인 일자리가 장기적인 협업에 참여하는 두 당사자들의 결합이었던 바로 그곳에서, 네트워크에 연결된 노동력은 이제 원나이트스탠드의 연속에 불과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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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 속에 새로움이 있다.

 

 

[본문발췌]

 

 

인간의 뇌가 세상을 이야기로 인식하다 보니, 세상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특성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의미를 부여하는 능력은 언어를 창조하고, 언어는 추상적인 의미마저 만들어내고, 결국 우리는 존재하지도 않는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종이 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삶과 예술의 의미에 대한 의문의 답은 우리 뇌 속에 있을 것이다. 

 

 

자연 속 생명을 가진 개체들이 소통하고자 하는 간절한 의지는 처연하고도 경이롭다. 달밤에 개구리는 구슬프게 울어 댄다. 소리를 내면 천적에게 잡아먹힐 위험이 높아지는데도, 개구리들은 목숨을 걸고 애타게 짝을 찾으며 운다. 소통이란 생명 그 자체이고, 때로 개체의 목숨을 초월해서 관철되기도 한다.

 

 

인간은 소통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백영옥 작가가 말했듯이 제대로 소통하는 것은 기적이다. 솔직히 우리는 자신이 무얼 원하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더구나 소통은 너무 적어도 안 되고 너무 많아도 안 된다. 불필요하게 상대의 주의를 빼앗는 것은 소통이 아니라 고통이다. 정보화 시대이자 소통과 연결의 시대, 오히려 우리는 더욱 외로움에 허우적거리며 소통이 얼마나 미묘한 것인지 배워 가고 있다.

 

 

유머란 어떤 일에 몰두하다가도, 여유를 갖고 주위를 넓게 둘러보며 균형을 잡는 힘이다. 한 발 물러서면 시야가 넓어진다. 그렇게 넓혀 놓은 공간에 경직된 당위를 해제하는 합리적인 의심도 들어서고, 근시안적으로 보면 엉뚱해 보일지 모를 해결책을 찾아내는 창의성도 들어선다. 여유는 세상과 더 잘 지내기 위해 개인들이 애써 확보해야 할 공간이다. 그 여유 공간 속에서 날선 감정들은 희석된다. 그리고 그 안에 유머가 채워진다.

 

 

중첩이나 관측이라는 '현상'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그런 현상을 제대로 기술할 언어가 우리에게 없다는 것이 문제의 본질이다. 언어는 세상을 기술하기에 충분치 않다.

 

 

우주는 엔트로피의 증가, 즉 죽음을 선호한다. 이런 우주에서 생명은 돌연변이이자 이단아다. 그래서 우주도 중요하지만 생명은 소중하다. 소중한 존재는 그 자체가 궁극이지만 중요한 존재는 궁극에 도달하기 위한 방편이다. 우리는 소중한 생명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사람이 새와 함께 사는 법은 새장에 새를 가두는 것이 아니라 마당에 풀과 나무를 키우는 일이다. 모든 생명이 그러하다.

 

 

칸딘스키는 음악을 보여 주려 했다. 음악은 결맞은 파동이다. 결맞은 파동은 양자역학이 가지는 기이함의 근원이다. 양자역학에서는 파동을 보면 결이 어긋난다. 소리를 보기 위해서도 결이 어긋나야 할까? 칸딘스키가 보여 준 음악은 결이 어긋나며 의미조차 상실해 버린 건지도 모른다. 이렇게 음악은 추상을 통해 그림이 되었다.

 

 

'자연스러움'이란 '자연 그대로의 상태'라기보다는 인간이 받아들이는 관념이다. 따라서 '자연스러움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인간의 보편성과 다양한 문화별, 개인별 특수성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인간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기계'에 대비해서 우리는 인간에게 '인간적'이라는 표현을 쓴다. '인간적'은 놀랍게도 '인위'보다는 '자연'에 가깝다. '다른 생물', 특히 '동물'에 대비해서는 '인간답다'라는 표현을 쓴다. '인간다움'은 '야만' 아닌 '문명적'이라는 뜻이다. 다시 정리하자면, 기계에 대응해서 자연과 우주의 섭리에 순응할 때 '인간적'이라고 하고, 동물에 대응해서 자연과 본능에 저항하는 문명적 의지를 '인간답다'고 한다. '인간적'과 '인간답다'가 이렇듯 반대에 가깝게 놓이니, 인간의 관념적인 '자연스러움'도 반어, 즉 아이러니를 종종 발생시킨다.

 

 

우리 주위에 존재하는 생명체의 모습은 자연스럽다. 자연스럽다는 말 자체가 자연과 같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현대과학에 따르면 생명의 모습은 진화의 결과다. 진화에는 목적이나 의도 따위는 없다. 그때그때 생존에 유리한 특성을 지닌 것들이 자연선택되어 생존에 성공한 것뿐이다. 어찌 보면 그런 결과는 무작위로 만들어진 것이라 할 수도 있다. 자연의 모습이 무작위로 선택된 것이라면 자연스럽다는 말에 어떤 심오한 의미는 없다. 물론 주어진 환경에 따라 선택된 생명체의 공통점, 그러니까 일종의 보편성은 존재할 수 있다. 지구의 온도가 내려가면 높은 온도에서만 살 수 있는 생명체는 멸종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생명체의 모습에 합법칙성까지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고 생각한다.

 

 

한 시대의 종말은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다. 이렇게 죽음은 생명이 될 수도 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하지만 생명은 영원하다.

 

 

미스 반 데어 로에는 "적을수록 낫다.(Less is more."는 경구로도 유명하다. 이 건물(바르셀로나 파빌리온) 안에서 나는 이 '레스(less)'의 의미를 완전히 새롭게 체득한 것 같았다. '레스'는 덜어 내어 부족한 것이 아니라, 고도로 집약되어 최후까지 남은 것이었다. 바닥과 기둥과 벽과 지붕이 모두 완벽하게 정확한 위치에 있었다. 한 치도 더 덜어 낼 것 없는 그 용감한 합리성이 상쾌했따. 벽들은 바르셀로나의 태양 아래서 기분 좋은 그늘을 적재적소에 드리웠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어서 모더니즘이 가치 있다기보다는, 이성과 합리를 '제대로' 가동시킬 때 좋은 모더니즘이 나오는 것이었다.

 

 

한때 유럽인은 유색인종을 짐승으로 취급했다. 이는 시각이라는 감각에 의존하여 내린 결론으로, 단지 피부색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자 수준에서 작동하는 유전자를 분석해 보면 인종 간의 유전자 차이보다 같은 인종 내 유전자변이가 더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프레더릭 생어가 개발한 염기서열화 방법을 이용하면 감각할 수 없는 유전자 세상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결국 어느 수준에서 보는지에 따라 상대를 인간으로 볼 수도 있고 짐승으로 볼 수도 있다는 뜻이다.

 

 

'안다는 것은 본 것을 기억하는 것이며, 본다는 것은 기억하지 않고도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어둠을 기억하는 것이다.' 오르한 파묵의 소설 <내 이름은 빨강>에 나오는 글이다. 이 소설은 오스만투르크제국의 세밀화가들에 대한 이야기다. 이들에게 그림이란 본 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규칙대로 그려야 하는 것이다. 규칙을 어기고 새로운 시도를 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다. 이들에게 궁극의 경지란 밤낮으로 연습하다가 눈이 멀어서 보지 않고도 그릴 수 있는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다.

 

 

역사는 깊고 다채로우며, 어느 시대에든 인간 활동의 모든 측면들은 서로 연결되어 왔다. 그래서 나는 '예술과 과학의 만남'이니 '융합'이니 하는 구호들이 새삼스럽다. 제도권 교육과 분과 학문 시스템 속에서 부자연스럽게 '칸 나누기'를 당하고 있을지는 몰라도, 예술과 과학은 애초에 서로 긴밀하게 스며 있다고 느낀다. 예술가의 머릿속에서 플라톤적이고 수학적인 발상의 세계는 물리적 현실 속에서 감각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조형으로 창작되어야 예술로 귀결된다. 이 '물화'의 과정은 불가피하게 물성, 힘, 운동의 원리와 관계를 맺는다는 점에서 '물리화' 그 자체다. 이때 표현의 팔레트에 여러 분야의 정확하게 정제된 지식들을 짜 두면, 풍부하고 대담한 조합의 생겨나기도 한다.

 

 

예술에는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가치도 있지만, 순수형식주의적이고 작가적인 가치라는 것이 있다. 세상을 보는 확장적인 방식을 제시하면서, 그것을 생생하게 체험하게 해 준다. 인식의 구속과 오류로부터 자유를 탐색하고, 왜곡되었을지 모를 구태의연한 시선에 대해 보다 나은 방식을 제안하려는 질문을 던진다. 이런 질문들은 개인의 자립감과 자존감을 높이고, 결국 공동체를 각성하게 하며 치유하는 사회적인 효과를 가진다. 인간이 세상과 더 잘 지내고자 하는 도정인 것이다.

 

 

과학의 눈으로 볼 때, 물질로 이루어진 우주에 인간이 말하는 의미나 가치는 없다. 중력에 의한 물체의 낙하 자체는 아름다운 일도 불행한 일도 아니다. 낙하하는 것이 낙엽일 때 아름답고, 유리잔일 때 불행하다.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의 낙엽은 불행하고, 이탈리아의 결혼 피로연에서 깨지는 유리잔은 행복하다. 가치는 인간이 임의로 부여하는 것이다.

 

 

자유로운 인간은 집단의 부분이 아니라 민주적으로 행동하는 존재다. 이들은 직접민주주의로 국가를 운영했고, 철학, 과학, 수학, 예술을 활짝 꽃피웠다. 이들의 과학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시각에서 나온 것이다. 인간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이들의 태도가 자연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된 것이다.

 

 

문화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성별, 나이, 민족, 문화가 다른 사람들 간의 교류가 있어야만 비로소 내가 속한 체계의 고유한 구조를 새삼 인지할 수 있다고 했다. 인류의 서로 다른 다양한 구성원들이 주고받을 수 있는 가장 값진 선물은 낯선 체제를 통해 우리 자신을 스스로 알아 가는 기회라는 것이다.

 

 

낯선 언어는 인식을 확장시킨다. 낯선 언어는 서로 다른 것들 간의 뜻밖의 연결을 만들어 낸다. 이 연결을 자유자재로 적절히 구사하는 능력이 곧 창의력이다. 

 

 

인간이 언어로 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을 예술로 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진짜 놀랄 일은 우리가 언어를 가지고 이 정도로 소통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꿈은 현실의 도피처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이성으로부터 도피하고자 꿈을 그렸다. 양자물리학자들은 원자의 세계가 초현실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만물은 원자로 되어 있다. 이 세상 모든 것의 근원인 원자는 초현실적으로 행동한다. 원자가 실재라면 꿈은 현실이다.

 

 

능숙한 기술을 연마하기보다는 개인의 기분과 정서를 존중함으로써 공동체의 자존감을 높이는 방식이어야 할 것 같았다. 시도하고 실행해낸 용기 자체가 칭찬받아야 한다. 잘해내지 않았더라도, 남들보다 조금 부족하더라도, 그 순간 행복한 몰입을 겪었다면 이 사실을 존중하고 격려해야 하지 않을까?

 

놀이와 장난, 무턱대고 해보는 시도는 소중하다. 해보지 않은 일에 도전을 해봐야 일상의 경험이 풍부해진다. 결과가 서툴더라도 그 과정은 소중하다. 시행착오에 겁을 먹지 않도록 해야 한다. 약간의 서투름과 실수조차 지울 수 없는 오점인 양 다그치거나 불이익을 준다면, 다양한 시도를 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한 공동체 속 여러 개인들이 다양한 경험을 해보는 일의 가치는 진화론과 뇌과학이 뒷받침해준다. 환경은 변화한다. 뜻밖의 상황이 닥칠 때도 있다. 이때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본 경험이 변화에 창의적으로 대처하고 적응하는 힘이 된다.

 

특정한 기준으로부터 평균이 산출되면, 그 평균을 벗어나는 것은 오류처럼 취급된다. 이때 수치적인 기준이란 과연 중립적이고 객관적일까? 산업시대 이후 서구 중심 성인 남성의 많은 기준들이 표준이라는 이름으로 맞춰진 것은 아닐까? 이런 획일적이고 편협한 기준이 다양한 문화와 다면적인 가치관과 어린이와 노인과 여성과 약자와 소수자를 힘들게 하는 것은 아닐까?

 

하나의 경로만 정상으로 간주하면, 개인의 고유성은 소외된다. 그런 기준으로부터 상정되는 평균이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같은 것이 아닐까? 이 침대는 거의 모든 사람들을 부적격자로 만든다. 애초에 침대를 사람에게 맞춰야지, 왜 사람의 키를 침대에 맞춰 늘였다 잘랐다 고통을 주는가? 특정한 기준에서는 정의되지 않는 능력들, 경제적 가치로 환원되지 않아 사장되는 다채로운 재능들을 놓친다면 그것은 사회적인 낭비가 아닐까?

 

자신의 고유한 역량을 이해받고 발휘하고 그에 몰입해서 인정받을 때 인간은 행복을 느낀다. 모든 개인의 가치를 고루 살피고 구성원의 자존감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가치의 기준들이 다원화돼야 한다. 평균을 산출하는 단편적인 잣대로는 규정되기 어려운 잠재적인 재능들을 돌보아야 한다. 교육은, 특히 교양 미술교육은 그렇게 가야 한다.

 

누군가 너무 힘이 들고 창피해서 포기하고 싶어지는 마음이 든다면, 그것은 그 개인이 아니라 사회와 시스템의 책임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개인들을 세심히 살피면서 사회적 잣대와 기준이 정당한지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모든 개인은 고유하게 존엄하다.

 

 

정규분포에서 평균은 집단을 대표한다. 평균이 집단을 대표하지 못하고, 부의 분포가 지나치게 치우치면 그 사회는 불안정해진다. 그 해답은 평균, 즉 집단지성을 이용해서 찾아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민주주의라고 부른다.

 

 

근본적으로 공간 자체에는 방향이 없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우주공간에 있다고 상상해보자. 사방 어느 방향을 봐도 똑같이 어둠이다. 일단 당신이 있는 위치는 특별하다. 다른 모든 위치가 갖지 못한 당신이라는 존재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곳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어느 방향이나 똑같다. 특별한 방향을 만들기 위해서는 당신 이외에 또 하나의 존재가 있어야 한다.

 

구에는 중심이 있지만 표면에서 중심을 볼 수 없다. 지구라는 구의 표면에만 사는 우리에게 세상의 중심은 없다. 중력과 전기력은 모두 구의 특성을 갖는다. 그래서 별과 행성뿐 아니라 원자도 구형이다. 인간이 사는 세상은 구형의 원자가 모여 삼라만상을 이룬다. 입체파 화가들이 깨달았듯이 모든 존재는 평등하게 원자로 되어 있다. 그 모든 것들은 구의 정신을 품고 있다. 편평해 보이는 세상의 저 깊숙한 곳에 구의 중심이 있어, 세상의 모든 곳은 평등하다는 것을 말이다.

 

 

검정은 끊임없이 흑체복사를 한다. 다만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인생이 어두운 것만은 아니듯, 검정도 검지만은 않다.

 

 

다른 길을 가더라도 틀린 길을 간 것은 아니다. 시를 읽는다는 것은 어차피 효율의 독서가 아니다. 정보를 명쾌하게 전달하기보다는, 시의 의미가 몸에 오래 머무르며 느리고 풍부하게 경험되도록 했다.

 

 

예술의 가치를 돈으로 평가하는 것 자체에 거부감이 있는 사람도 있으리라. 예술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에게는 특히 그럴 것이다. 하지만 예술품이 일단 시장에 나오면 그것의 가치는 예술이 아니라 시장이 결정한다. 대한민국 아파트의 가격은 그것을 만드는 데 들어간 자재비용이나 주거 환경의 가치보다 상품으로서의 교환가치로 결정된다. 아파트 가격이 7억원이라는 것은 7억원에 사서 더 비싼 값으로 팔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있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워홀의 작품에 매겨진 500억원은 그것이 500억원의 절대적 가치가 있다기보다 훗날 500억원 이상의 값으로 팔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다는 의미다.

 

 

“유쾌한 사람은 농담을 적절하게 잘 활용하며, 상쾌한 사람은 농담에 웃어줄 줄 알며, 경쾌한 사람은 농담을 멋지게 받아칠 줄 알며, 통쾌한 사람은 농담의 수위를 높일 줄 안다.” 김소연 시인의 <마음사전>에 나오는 글이다. 모두가 같으면서 다른 ‘쾌(快)’다. 쾌의 온도가 점점 올라가는 느낌이 든다.

 

 

자연의 복잡성은 무작위적이기만 하지는 않다. 물리적으로 유기적인 현상과 생명현상의 원리는 수많은 변수를 가진 방정식으로 기술된다. 항이 많아지고, 알고리듬은 길어진다. 디지털시대인 오늘날에는 컴퓨터가 이 복잡한 연산을 가능하게 해준다. 이런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이제 디자이너의 창의력이란 기존에 미처 지각하지 못한 변수들을 정의하고 찾아내는 데에서 새롭게 발휘된다. 디자이너들은 규칙을 디자인하고 이를 파생시킴(generate)으로써 전적으로 새로워진 자신의 역할을 규정하고 새로운 미학에 다가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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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은 차이를 좁히고 다양한 구성요소들을 비슷비슷하게 평균화 시킨다.

차이를 만들고 싶다면 무리에서 떨어져 자신만의 시선을 갖고 이해하며 혼자만의 생각을 해 봐야 한다.

 

 

[본문발췌]

 

 

마케팅이란 '기업'과 '실제의 사람'이 만나는 공간에서만 기능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는,  '실제의 사람'들은 기업들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실속의 사람들은 절대로 분명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알고리즘이나 생산공정으로 분석하지 않는다. 현실 속의 소비자들은 비즈니스 세계를 하나의 유기체로 이해한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은 독특하고 복잡하고 모순적이고, 그리고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다.

 

우리의 일상적인 생각과 행동들은 결코 논리적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일상 속의 생각들은 복잡하면서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과 마찬가지로, 비즈니스 세계의 진실 역시 모순투성이인 길을 걸어가지 않고서는 발견할 수 없는 법이다.

 

 

치열한 경쟁이 차별화를 약화시킨다. 경쟁관계로 얽혀 있는 수많은 기업들이 서로를 모방하는, 그래서 유효한 차이점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그저 그런 제품들만을 쏟아내고 있는 현실. 오늘날의 기업들은 점점 '차별화의 대가'가 아니라 '모방의 대가'가 되어가고 있다.

 

 

비즈니스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구체적인 실천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신선한 통찰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무리 다양한 실천적인 방법을 제시한다고해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이를 실행에 옮기는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실천방법을 찾아 갈 수 있는 통찰력과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

 

 

두 가지 유형의 여행 책

   1) 여행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를 담고 있는 책

   2) 여행을 통해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보는냐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책.

 

 

평가 시스템의 치명적 부작용,

무언가를 평가하려는 시도는 결국 그 속의 다양한 구성요소들을 비슷비슷한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물리학에서도 관찰하는 행위가 관찰 대상에 영향을 미친다고 하는 '관찰자 효과 observer effect'라는 개념이 있다.

시장조사를 멀리한는 기업이 1등이 되는 이유, 경쟁 브랜드와 비교 평가를 통해 약점을 보완하다 보면, 결국은 차별점이 없이 비슷해지게 된다.

 

 

차별화는 곧 포기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한 분야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서는, 다른 분야를 포기해야 한다.

 

 

시장조사를 통해 브랜드 인지도를 다양한 평가항목으로 소비자들에게 평가를 받고,

  1. 대다수의 접근방식 : 약점을 보완하려는 시도 (더욱 '평준화된' 모습), 취약점을 중간 정도의 수준으로 높이기 위한 일을 시작
  2. 극소수의 접근방식 : 강점을 강화하려는 시도 (더욱 '차별화된' 모습), 뛰어난 항목에 집중투자하여 평균 점수와 의 격차를 더 벌리려고 노력

 

설문조사를 실시하거나 포지셔닝 맵을 그려보는 등 다양한 형태의 시장분석 작업들은, 브랜드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한 순수한 시도라고 할지라도, 조직을 평범하게 만들어갈 위험을 안고 있다.

 

 

진정한 차별화, 즉 지속적으로 유지가능한 차별화는 이러한 평준화와는 정반대의 길로 나아가야만 가능하다.

즉, 차별화란 불균형의 상황을 더욱 불균형하게 만드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다른 분야들을 포기해야 한다.

 

 

무리를 따라 이동하는 철새, 자율조직 시스템 self-organizing system

자율조직 시스템의 개별 구성원이 갖추어야 할 조건

  1. 감각기관. 자신의 주위에 있는 다른 구성원들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기업들이 포지셔닝 맵을 만들어보는 시도가 바로 이러한 감각기관의 기능에 해당한다. 이러한 시도를 통해 기업들은 거시적인 관점에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할 수있다. 즉, 우리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 경쟁자들과 우리 자신의 관계를 이해할 수있다.
  2. 방향을 수정하는 능력. 근처의 구성원들이 갑자기 방향을 바꿀 때, 여기에 따라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무리 속에서 움직이기 위한 기본적인 능력이다.

 

 

경쟁이 치열할수록, 기업들은 더욱 상대방에 신경을 쓰게 된다. 다시 말해, 경쟁이 치열할수록 그리고 구성원들이 더욱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을수록,

  1) 신중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기업들도 무리에 움직임에 동조를 하고,

  2) 더 많은 기업들이 무리의 움직임으로 합류하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시장점유율을 놓고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기업들을 살펴보면, 집단적인 움직임이 보편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경쟁이 치열한 카테고리에 속해 있는 개별 기업들이 아무런 생각 없이 기계적으로 무리의 움직임을 쫓아가는 것은 아니다. 가령 교통체증에 갇혀 있을 때, 운전자들은 모든 것을 체념하고 앞차의 꽁무니만 따라가지는 않는다. 이리저리 차선을 변경하기도 하고, 더 빨리 갈 수 있는 다른 길을 계속해서 모색한다. 무리의 시선으로 개체를 바라보는 것과, 개체의 시선으로 무리를 바라보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길이 없을 때 길이 보인다. 구성원들의 다양성과 창조성을 높이고자 하다면, 구체적인 정의가 없는 상태가 더욱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과잉성숙 hyper-maturity' : 많은 기업들이 한 카테고리 속으로 몰려드는 경우, 제품확장은 기하급수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방식은 다분히 낭비적이고 비효율적이다. 그리고 한 카테고리가 이러한 형태로 발전해 나가면, 기존에 그 카테고리를 지배했던 원칙들은 한순간에 무너지고 만다. 이러한 단계를 과잉성숙이라 부른다.  한 카테고리가 과잉성숙 단계로 접어들면, 초세분화, 과잉확장, 과잉경쟁이 함께 나타난다. 과잉성숙 단계에 속해 있는 기업들 대부분은 아마도 마음 편하게 장사했던 옛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을 것이다.

 

치열한 경쟁에서 남는 것은 오직 자기파괴뿐이다.

  • 과잉성숙 단계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제품확장의 흐름에 대해 논의하면서 제품이 지속적으로 진화하고(추가적 확장), 소비자 선택권이 확장되고(증식적 확장), 그리고 그 과정에서 소비자들이 얻게 되는 이익에 대해 함께 들여다보는 시간을 갖는다.
  • 카테고리 내에서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경쟁자들보다 한 걸음 앞서 가기가 더욱 힘들어 진다.
  • 진화의 역설이란, 모두들 발전을 위해 달려가지만, 마지막에 도달하는 곳은 공동의 파멸뿐이라는 사실. 치열한 경쟁에서 남는 것은 오직 자기파괴뿐.
  • 카테고리 내 차별화가 희미해지기 시작할 때, 소비자들은 그 카테고리를 거시적인 차원에서 바라보려고 한다. 다시 말해, 그 카테고리 내 다양한 기업들의 전략들을, 개별 브랜드의 관점이 아니라, 하나의 카테고리 차원에서 이해하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특정 브랜드에 대한 구체적인 특성은 외면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숲을 바라보게 되면서, 그 속에 있는 나무들을 보지 못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소비자들은 하나의 브랜드를 바라보는 것처럼 하나의 카테고리를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과잉성숙 단계로 인한 두 번째 현상이 나타난다. 소비자들의 애착은 이제 특정 브랜드가 아니라, 특정 카테고리에 대해서 나타나게 된다.
  • 카테고리가 성숙할수록 카테고리 내 기업들은 점차 집단적인 움직임을 보이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집단적인 움직임은 비교적 뚜렷하고 일관적인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예측가능하다는 점도 지적했다. 그리고 그 결과, 카테고리는 '이종적 동종'의 특성을 띠게 된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게 되면 소비자의 선택권은 크게 확대되지만, 정작 소비자들은 제품들 간에 유효한 차이를 발견하지 못한다.

 

 

차별화

  • 고정관념 뒤엎기, 엉뚱한 가치를 선보여라.

    소비자들의 관심을 사로잡는 브랜드는 바로 만화와 같은 브랜드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소비자들이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기대들을 한순간에 무력화시킨다. 그리고 전혀 차원이 다른 가치를 제시함으로써, 소비자들의 기대가 마치 아무런 의미가 없는 양 만들어 버린다. 이러한 브랜드들은 현실적인 한계를 과감히 떨쳐버린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이러한 브랜드들이 제안하는 새로운 가치는 기존의 경쟁자들이 내놓았던 가치들보다 좋다 혹은 나쁘다고 수직적으로 비교, 평가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것은 이들 브랜드가 제시하고 있는 것은 수직적인 비교를 벗어난, 수평적인 차별화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추구하는 것은, 소비자들의 고정관념을 뒤엎는, 그리고 경쟁 무리로부터 벗어나는 진정한 차별화이다.

  • 아이디어 브랜드, 무리를 벗어나 혼자만의 길을 가라.

    새로운 집을 장만할 때, 집을 수리해서 쓸 것인지, 아니면 완전히 허물고 새로 지을 것인지 고민하게 될 것이다. 전자의 방법은 집의 기본적인 골격을 유지하면서 외형적인 부분만 수정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후자는 완전히 백지상태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비용과 시간이 당연히 더 많이 들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자유롭게 원하는 대로 집을 지을 수 있다.

    차별화된 아이디어 브랜드는 시장 내에서 기존의 가치를 전면적으로재검토한다. 이들으 기존의 기업들과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전혀 다른 형태의 새로운 집을 설계하고 있는 것이다. 이 브랜드들은 무리를 벗어나 혼자만의 길을 가고 있다. 이 브랜드들은 특정 시점에서 경쟁 무리를 떠나,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 나가고 있다. 그리고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통해, 전체 카테고리를 완전히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어 나아간다.

  • 창조적 파괴, 미래의 시장을 만들어라.

    다른 경쟁자들과 동떨어져서 혼자 차별화된 전략을 구사하기가 지극히 위험한 시대가 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아이디어 브랜드들은 '창조적 파괴 creative distruptive'를 통해 모험을 실천으로 옮기고 있다. 이들은 뚜렷한 목표를 향해 반항아임을 자처하고 있다. 아이디어 브랜드들은 파괴하면서 동시에 창조한다.

 

'역포지셔닝 브랜드 reverse-positioned brand' : 구글, 젯블루, 이케아, 인앤아웃버거

아주 독특한 아이디어를 통해 소비자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가기로 결단을 내린 아이디어 브랜드. 그들은 기존 브랜드들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요소들을 과감하게 삭제하기로 결정을 내린 용기 있는 브랜드다.

역 브랜드들은 그들만의 독창적인 가치를 기반으로 불리한 상황을 거꾸로 뒤집는다. 역 브랜드들은 핵심에서 벗어난 모든 부가적인 가치들을 털어내고, 혁신적인 조합을 통해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한다. 이들은 자칫 그동안 사람들이 눈여겨보지 않았던 가치들을 기발한 방식으로 결합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시장에서 자신들만의 고유한 입지를 마련한다.

역 브랜드는 기존 가치들을 없애 버리면서, 동시에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낸다. 많은 것들을 없애고, 그 자리에 새로운 것들을 세운다. 그리고 부가적인 가치들을 없애고, 핵심적인 가치들로만 조합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모습은 처음에는 낯설고, 때로는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역 브랜드가 진정한 차별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많이 주는 것보다 적게 주는 게 사람을 사로잡는 이유

역 브랜드들은 소비자들이 오히려 과잉만족의 상태에 빠져 있다고 생각을 한다. 즉, 역 브랜드들은 광잉성숙된 시장에서 소비자들은 그들 스스로 별로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제품과 서비스로 둘러싸여 있다고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다. 이처럼 역 브랜드들은 소비자들을 완전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기존 가치들을 계속해서 확장해 나가는 대신, 넘쳐나는 가치들을 관리가능한 수준으로 낮추고 이를 창조적인 방식으로 재조합하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다.

 

 

거꾸로 가는 전략

소비자들이 합리적인 차원에서 만족을 느낀다면, 기업들은 아마도 지금보다 훨씬 수월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케아 사례에서도 보았듯이, 소비자들의 심리는 복잡하고 아이러니한다. 즉, '더 많이'를 통해 만족을 느끼기도 하지만, '더 적게'를 통해서 더 큰 만족을 얻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의 많은 것들을 없앰으로써 소비자들의 관심을 받는 역 브랜드의 성공이 가능한 것이다.

역 브랜드들의 등장은 오늘날의 모순된 소비문화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역 브랜드들은, 과잉만족의 시대에서 부수적인 가치들을 과감하게 제거함으로써 소비자들에게 독특한 만족감을 제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다. 이들은 지금까지 우리가 누려 왔던 가치들을 빼앗아 가면서, 동시에 기대하지 못했던 새로운 가치를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새로운 욕망을 싹트게 만들고 있다.

 

 

'더'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덜'을 원한다.

소비자들이 원하는 것은, 넘쳐 나는 풍요의 바다속에서 단순함의 자유를 다시 찾는 것이다. 다양한 제품과 서비스로 넘쳐 나는 과잉만족의 시장에서, 소비자들은 마음의 휴식을 원하고 있다. 다시 말해, '더more'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덜less'를 요구하고 있다.

 

 

역브랜드는 원래의 순수성을 잃어버리지 않는 상태에서(차별점 유지) 소비자들의 불만을 부드럽게 처리해야 하는 과제를 떠안고 있다.

역 브랜드들은 처음부터 경쟁자들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기 때문에, 모방 브랜드들이 일구어내지 못한 진정한 차별화의 이익을 오랫동안 누릴 수 있었다.

'차별화 differentiation' : 기존의 개념에 새로운 의미를 추가함으로써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내는 시도

일탈 브랜드는 기존 카테고리의 경계를 벗어나지 않으면서, 그 경계의 가장자리에 최대한 가깝게 포지셔닝한다. 그리고 기존의 경계선을 끊임없이 밀고 나간다. 이러한 차원에서 일탈 브랜드는 기존 카테고리 내부에 존재하면서, 동시에 외부에 존재하는 브랜드이다.

 

 

소비자들의 고정관념에 돌을 던져라

카테고리 평준화의 흐름은 브랜드들을 부정적인 방향으로 몰아간다. 소비자들이 끊임없이 다양성을 요구하는 상황에서도, 평준화의 흐름에 빠진 기업들은 모두 동일한 가치만을 제안하려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일탈 브랜드들이 등장하여, 다양성에 목마른 소비자들의 갈증을 해소시켜 준다. 그들은 소비자들이 그동안 가져 왔던 고정관념들이 얼마나 근거 없는 것인지를 드러낸다. 그리고 이를 통해 경쟁자들에게 도전장을 내민다. 이처럼 일탈 브랜드들은 사람들이 그동안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을 파괴한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카테고리 개념에 정면으로 맞선다. 그리고 이러한 파괴는 새로운 창조로 이어진다.

 

 

카테고리의 경계를 무력화 시켜라.

일탈 브랜드들은 소비자들을 당황스럽게 만들면서, 동시에 그들이 새로운 시선으로 제품을 바라보도록 자극하고 있다. 일탈 브랜드들은 어울리지 않는 가치들을 창조적으로 조합함으로써 새로운 카테고리 개념을 보여 준다. 그리고 소비자들의 시선을 새롭게 변화시킨다.

 

 

마케팅이란 소비자들에게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는 것 - 전통적 마케팅 (Feel good)

  1) 제품 :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두어야 한다.

  2) 접근성 : 합리적으로 제품의 가격을 정하고 폭넓게 유통망을 구축하여 접근성을 높임

  3) 커뮤니케이션 : 소비자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함으로써 브랜드의 이미지를 높임

  --> 단점은 눈 감고, 장점은 과대 포장하는 기업의 광고 전략

 

적대적인 마케터 The Hotile Marketer, 적대 브랜드의 마케팅은 안티마케팅, 반대심리학

단점을 감추려고 하기보다 오히려 이를 더욱 적극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소비자들의 호기심을 유발한다. 뭔가 이상하다고 느낄 때, 사람들은 더 많은 관심을 가진다는 진리를 적대 브랜드들은 잘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느낌을 만들어내기 위해, 심리적인 부조화를 계속해서 강화해 나가는 것이다.

적대 브랜드가 번성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회적인 인식이 기반 되어야 한다. 합의와 통일이 없어도 우리 사회가 잘 굴러갈 수 있다는 관용적인 문화가 사회에 자리를 잡고 있어야 한다. 다양성에 대한 이해.

치열한 경쟁의 결과는? 도토리 키재기 - 아이디어 브랜드는 경쟁에 참여하지 않는다(핵심전략)

그들은 경쟁이나 비교에 관심이 없다. 그리고 소비자들의 불만과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래의 세가지 유형의 아이디어 브랜드들은 오늘날 소비자들이 동일함과 평범함에 지쳐 있을 때, 신선한 가치 제안으로 죽어 있던 소비 감성을 살려내고 있다.

   1) 역 브랜드 : 제품의 확장을 거부한다.

   2) 일탈 브랜드 : 카테고리의 경계를 극한으로 밀고 나가면서 새로운 하위 카테고릴 창조한다.

   3) 적대 브랜드 : 손님이 왕이라는 비즈니스 세계의 절대적인 진리를 무시한다.

 

 

차별화의 두가지 종류

   1) 세상에 별로 의미 없는 차별화 : 진지한 고민없이 즉석에서 생각난 대로 행동, 창조적이지 않음.

   2)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차별화 : 소비자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반향을 일으킨다.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 : 항상 삶에 변화를 주는 것, 변화와 자극이 있어야만 우리의 몸과 마음은 생기를 띤다.

2%의 아이디어가 세상을 움직인다. (100%의 정답이 아니라 2%의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보여 주는 것)

   1) 비즈니스 세계를 비딱하게 보려는 노력은 오늘날 충분히 가치 있는 시도이다. 익숙한 방식이과는 다른 방식으로 비즈니스 세계를 바라보는 것

   2) 논쟁을 유발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것 역시 충분히 가치 있는 시도이다.

 

 

 

기업의 마케터들은 그들의 브랜드가 분명히 차별화되어 있다고 열변을 토한다. 하지만 소비자들은 이를 인식하지 못한다. 오늘날 기업들은 분명 차별화를 위해 열심히 달리고 있다. 하지만 경쟁자들과 함께 무리를 지어 달리고 있기 때문에, 소비자들은 여기서 차별화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다.

 

소스타인 배블런 Thorstein Vevlen 의 '과시적 소비 conspicuous consumption'

 

오늘날 소비는 필요성을 충족시키는 활동이라기 보다, 주변의 사람을 따라잡는 활동이 되어버렸다. 즉, 소비활동은 점차 원래의 목표를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성과를 경쟁자들과 비교하는 작업에 지나치게 많은 에너지를 투자함으로써 경쟁의 악순환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보편적인 흐름... 실제로 오늘날 대부분의 기업들이 경재자를 따라잡는 데 너무나 많은 시간을 낭비하면서 원래의 목표를 잃어버리고 있다. 차별화를 추구하면서, 차별화를 잃가고 있는 것이다. 공급자가 아닌 소비자의 시선에서 지금의 경쟁 환경을 다시 바라보려는 시도가 필요하다.

 

 

기업들이 경쟁을 하는 목표가 동일화의 흐름 속으로 합류해 들어가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 반대로, 보편적인 흐름으로부터 빠져나와 자신만의 고유함을 드러내는 작업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차별화의 개념이다.

 

 

혁신의 세 가지 방법 (기술적 차원이 아니라 개념적 차원의 혁신), 혁신은 차별화의 출발점. 차별화란 완전히 새로운 관점으로 무언가를 창조해 내는 것만은 아니다.

  1. 혁신은 '확장'이 아닌 '제거'를 통해 가능하다. 추가적인 확장이나 증식적 확장과는 차원이 다른 경쟁 무리로부터 벗어나는 고유한 가치를 드러내는 진정한 혁신. --> 역 브랜드
    부수적인 가치들을 제거하고, 핵심가치들을 창조적인 방식으로 조합함으로써 차별화를 실현
  2. 분열을 통한 혁신 --> 적대 브랜드
    모든 소비자들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과감하게 떨치고 소비자 계층으로 양분함으로써 시장에서 고유한 자리를 차지함.
  3. 변형(transformation)을 통한 혁신. --> 일탈 브랜드
    제품 자체에 대한 변형 보다는 제품에 대한 소비자들의 인식의 변형, 이를 통해 그들은 소비자들의 태도에 영향을 미친다.

 

혁신적인 아이디어 브레인스토밍을 위해서는 내놓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토론을 벌이기에 앞서 긍정적인 차원에서 얘기해야 한다는 규칙이 필요하다.

 

 

시장을 믿지 마라.

시장조사는 그 자체로 한계가 분명한 접근방식이다. 설문조사 과정에서 소비자들은 제품에서 어떠어떠한 부분이 개선되었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말을 한다. 그러나 이 제품들이 어디까지 발전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얘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얼마나 획기적인 제품이 가능한지에 대해서도 말을 해 주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마케팅 활동을 지배하고 있는 '점진적 수정'의 수준을 뛰어넘고자 한다면, 시장조사를 통해 얻은 단편적인 데이터에만 집착해서는 안 된다. 물론 이러한 데이터에는 객관적인 정보도 담겨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러한 데이터들은 와전한 메시지를 전달해 주지 못한다. 이는 오직 절반의 메시지에 불과하다. 나머지 절반은 스스로 창조적으로 생각하고 독자적으로 결단을 내리는 과정에서 얻어진다.

 

 

기업의 마케터들은 객관적인 자료들을 엄밀히 분석하고,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자료들로 부터 곧장 어떤 구체적인 결론을 내려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서는 안된다. 마케터들에게 시장조사 데이터느 아주 중요하다. 하지만 통계 수치만 들여다보다가는 더욱더 중요한 통찰력을 놓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기업의 마케터들은 누구보다도 더 균형적인 사고방식을 유지해야 한다. 통계 데이터에만 주목하는 마케터는 누구라도 쉽게 얻을 수 있는 피상적인 정보밖에 얻지 못한다. 그리고 그 이면에 숨어 있는 소중한 진리를 놓친다.

(통계적인 자료에 집착하는 접근방식은 전체 상황을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

 

 

인간을 이해하라.

아이디어 브랜드들은 인간을 이해하고, 그리고 인간의 관심을 자극할 수 있는 새로운 가치를 개발해 나가고 있다. 데이터나 논리가 아니라, 사람이라고 하는 신비로운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복잡하고 모순된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일 기꺼이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바탕으로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인 가치를 제안한다.

 

 

차별화는 전술이 아니다. 일회적인 광고 캠페인도 아니다. 그리고 혁신적인 신제품을 출시하는 것도 아니며, 마일리지 프로그램을 만들어내는 것 또한 아니다. 진정한 차별화란, 말하자면 새로운 생각의 틀이다.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이다. 그리고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생각과 행동을 인정하는 태도이다.

정보가 흘러넘치는 상황일수록 직관의 중요성은 더욱 높아진다 - 존 나이스비트

조직 내에서 직관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마케터이다. 미래의 마케터들은 인간의 생각과 행동을 전반적으로 이해하고 수용하고, 그리고 이를 활용할 수 있는 인간적인 방법을 기업에 제시해야 할 의무가 있다.

 

 

다양한 소비 패턴으로부터 마케터들은 통찰력을 이끌어낼 수 있다.

차별화는 전술이 아니다. 차별화는 새로운 사고의 틀이다. 그리고 보고 듣고 분석하고 흡수하고 인정하는 태도이다. 차별화는 무엇보다 소비자들의 행동과 생각을 받아들임으로써 인간적인 관계를 형성해 나아가는 통찰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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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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