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읽고쓰기(reading & essay)

굿워크 - E. F. 슈마허

소요유+ 2020. 3. 4. 06:33

더 많은 물질과 욕망을 추구하는 일은 개인을 물질과 욕망의 노예, 시스템의 노예로 전락시키고, 비민주적이고 비인간적인 사회문화, 반생태적인 환경으로 세상을 이끌 것이다.

 

양보다는 질, 작고, 간단하고, 자본이 적게 들고, 비폭력적인 기술을 활용해 개인이건 공동체건 자기 힘으로 자립할 수 있는 일이 '굿워크'가 아닐까?

 

 

[본문발췌]

 

 

노동을 하지 않으면 삶은 부패한다. 그러나 영혼 없는 노동을 하면 삶은 질식되어 죽어간다. - 알베르트 카뮈

 

 

노동의 세 가지 목적

  • 첫째는 인간 삶에 꼭 필요하고 유용한 상품이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

  • 둘째는 선한 청지기처럼 신이 주신 재능을 잘 발휘하여 타고난 각자의 재능을 완성하기 위해서

  • 셋째는 태생적인 자기중심주의에서 해방될 수 있도록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협력하기 위해서

  • 세 가지 차원에서의 이런 역할을 통해 노동은 인간 삶의 중심이 됩니다. 그러므로 노동이 없는 인간의 삶은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행동'은 우리가 처한 상황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고,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각자의 마음속에서 확신과 결심, 남을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을 쌓아가는 것입니다. ... 문제를 이해한 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압니다. 그리고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사람들은 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말하는 중간기술로 나아가기 이전에 먼저 체제부터 바꾸자, 자본주의와 이윤추구 동기를 없애자, 다국적 기업을 해체하고 관료주의를 폐지하자, 교육을 개혁하자고 합니다.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 체제를 바꿀 방법은 약자들이 자기 힘으로 생산함으로써 지금보다 더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줄 새로운 형태의 기술을 도입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고 말이지요.

 

 

지난 수백 년간에 걸쳐 기술 발전이 점점 더 커지고, 더 복잡해지고, 더 자본집약적이며, 더 폭력적인 흐름으로 진행되었다는 것이 올바른 진단이라면 치료방법은 분명히 정반대 방향에서 찾아봐야 합니다.

 

 

새로운 기술을 연구하고 개발하는 데 필요한 위의 네 가지 기준 혹은 '지침'이 모든 사람에게 호소력을 갖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이 네 가지 지침은 단순한 이론 작업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실제 현실과 경험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제 경험으로 보자면 작고, 간단하고, 자본이 적게 들고, 비폭력적인 기술 혹은 이 가운데 어느 한 가지라도 갖춘 기술을 만들어낼 수 있으면 개인이건 공동체건 자기 힘으로 자립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이 생기게 됩니다. 이런 기술은 보다 인간적이고 생태적이며, 화석연료에도 덜 의존하는 생활양식을 낳게 되고, 여기서 나온 생활양식은 거대하고 복잡하며 자본이 많이 들고 폭력적인 기술로 생긴 생활양식보다 인간이 지닌 현실적 욕구에 더 다가갈 수 있습니다. 위의 지침이나 기준이 마음에 안 든다면 다른 지침이라도 제시해야 합니다. 지침이 없으면 대안을 찾는 일을 시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실제로 할 일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 작업은 체계적인 토대 위에서 서둘러 시작할수록 더 좋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많은 사람들이 벌써 시작하여 수년간 활발하게 일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비록 힘은 적지만 서로에게 배우며 서로의 경험을 통해 결실을 얻을 수 있도록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영국에서는 돈을 모으는 것이 너무 어려워서, 첫째가 돈이고 그다음에 돈으로 무얼 좀 해보자고 생각하는 사람은 성공할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그보다는 '그래, 비록 생계를 위해 일을 하지만 나한테는 다른 일을 할 시간도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결국 최고의 일을 하게 됩니다. 이런 식의 최고의 일은 생계를 버는 일과 달리 사회에 빌붙어서 할 필요가 없습니다.

 

 

'최선'을 쫓느라 '차선' 마저 놓치게 되는 시대 흐름에 휩쓸려 과거에 있었던 훌륭한 지식과 장비가 사라져 버린 사례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당연히 더 좋은 것을 쫓아야 진보하게 되고, 이런 흐름은 환영할 만한 것이겠죠. 적어도 그런 흐름이 '최선'을 누릴 형편도 안 되는 많은 사람들에게서 최소한 누릴 수 있는 '차선'이라도 앗아가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서구식 경제학은 외국에서 물건을 더는 싸게 들여올 수 없을 때가 될 때까지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아무것도 생산하지 말라고 합니다. 풍요로운 환경을 가진 푸에르토리코에 갔더니 당근을 미국의 텍사스에서 수입하고 있었습니다. 텍사스산 당근이 국내산보다 값이 더 싼 이상 푸에르토리코 농부들은 당근을 재배할 수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지금의 시스템입니다. 중국인들이 이것을 뒤집어버렸습니다. 중국인들은 자기가 만들 수 없다고 확신하지 않는 한 외국에서 사들여 와서는안 된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너무나 간단합니다. 더 싸게 사 올 수 있다면 생산하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발전이 저하됩니다. 반면에 확실히 만들어낼 수 있는 한 사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경제학적으로 말하자면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도전하게 만듭니다.

 

 

노동은 인간에게 1) 자신의 잠재력을 사용하고 계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2)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동의 일을 함으로써 태생적인 자기중심주의를 극복하게 해주며 3) 품위 있는 생존을 위해 인간에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는 역할을 합니다.

 

 

인간을 기계나 시스템의 노예로 전락시키는 지겹고, 무의미하며, 신경만 괴롭히는 멍청한 일을 젊은이들이 거부하도록 독려해야 합니다. 노동이란 삶의 즐거움이자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하다는 것뿐만 아니라 무의미한 노동은 혐오스러운 것이라는 점도 젊은이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이 좋은지를 결정하여 좋은 것은 잘 자라도록 최선을 다하고, 마찬가지로 무엇이 나쁜지를 결정하여 나쁜 것은 줄여나가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두 과정을 합산해서 전체적으로 커졌는지 작아졌는지에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양이 아니라 바로 삶의 질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위기를 인간이 진정 무엇인지를 우리 마음속에 되살리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저 역시 새로운 내용을 전하려는 게 아니라 오래된 지혜를 다시금 일깨우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인간의 본질에 대해 여러가지 설명이 있지만 결국 인간은 신의 위치에서 지상으로 내려온 존재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신의 아들이거나 딸입니다. 둘째로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며 혼자서 살 수 없습니다. 인간은 사회적 환경 속에 놓여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 온 것은 자신을 완성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에 대한 모든 윤리와 가르침은 바로 이런 통찰력을 바탕으로 형성되었습니다. 하느님이 보내신 존재이기에 인간은 전통적 언어를 통해 신을 사랑하라는 부름을 받습니다. 사회적인 존재이기에 인간은 자신의 이웃을 사랑하도록 부름을 받습니다. 그리고 불완전한 개별적 존재이기에 인간은 자신을 사랑하도록 부름을 받습니다. 인간이 만든 사회조직에는 이 세 가지 절대적 욕구가 반드시 반영되어야 합니다. 이 욕구가 충족되지 않는다면 인간은 불행하게 되고, 파괴적이 되며, 야만적인 자살 미치광이가 될 것입니다. 사회 정치 경제 조직에 인간의 욕구가 반영되어야 합니다. 

 

 

[옮긴이의 글]

 

슈마허는 경제와 마찬가지로 과학기술 역시 정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보았다. 점점 커지고, 복잡하며, 자본집약적이고, 폭력적인 현대의 산업기술은 바로 자본주의의 산물이며, 결국은 소수를 위한 기술, 착취를 위한 기술, 비민주적이고 비인간적이며 반생태적인 기술이 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전문가란 점점 덜 중요한 것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쌓느라 결국에는 아무 가치도 없는 것에 대해서만 잘 알게 되는 사람들"이라는 비판은 산업사회의 소위 전문화된 지식이 전문가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공동체의 좋은 삶을 구현하는데도 지극히 무력하다는 슈마허의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에너지에 대해서도 지금의 과학기술은 에너지를 오직 동력을 얻기 위한 물질로써만 취급할 뿐 에너지 그 자체가 바로 모든 생명의 시작이자 끝이며, 우리 삶의 생기이자 창조의 기쁨이라는 영적 진리에 대해서는 무지하기만 하다.

 

 

영혼 없는 노동으로 인간은 돈벌이의 수단이 되었고, 악의에 찬 경쟁으로 인간 정신은 굴종과 복종에 순응하게 되었다. 신이 주신 활력과 기쁨이라는 노동의 본질이 굴종과 굴욕이라는 노예노동으로 변질됨으로써 우리의 노동시간은 해방과 깨달음의 시간이 아니라 불안과 근심, 두려움과 절망의 시간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일을 해도, 일을 하지 않아도 모두 불안하게 되었다. 직업이 있어도 직업이 없어도 아이들도 노인도 모두 불안하긴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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