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세븐에서 탐욕은 변호사에게 스스로 1파운드의 살을 도려내어 저울에 달게 한다. 복부를 도려낸 뒤 과다출혈로 사망하게 하는데,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Seven Deadly Sins : 오만, 질투, 분노, 탐욕, 탐식, 음탕함, 게으름
인간의 욕망, 집착과 이기심이 탐욕을 키운다. 탐욕은 더 많이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다. 과학 기술의 발전을 통해 이러한 욕망을 채워 주면서 더욱 부추기는 상승작용을 하며 부의 편중에 따른 사회 갈등과 혼란, 권력투쟁, 자연 파괴 등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간디는 '세상은 우리의 필요를 위해선 풍요로운 곳이지만 탐욕을 위해선 궁핍한 곳'이라 경고하였고 노자는 도덕경(46)에서 "천하의 재앙은 만족할 줄 모르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천하의 죄악은 탐욕보다 더 큰 것이 없다. 그래서 만족할 줄 아는 것만이 영원한 만족이다. 모든 사람이 만족할 줄 알면 천하가 태평성대를 누릴 것이다."라고 하며 욕심을 버리라고 한다.
안분지족[安分知足]과 비움의 철학을 바탕으로 인간과 자연이 조화롭게, 단순하고 소박하게 살아 감으로 '탐욕'의 재앙을 벗어나야 한다.
탐욕, 貪慾
1.지나치게 탐하는 욕심. ≒도모1(叨冒).
2.불교 십악의 하나.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을 갖고 싶어 하고 또 구하는 마음을 이른다.
(네이버 영어사전) greed, (formal) avarice
탐욕을 부리다, be greedy
탐욕을 부리다 be avaricious
탐욕을 부리다 (남의 물건에) be covetous
탐욕을 부리다가 더 큰 손실을 입을 수 있다. Greed can cause a bigger loss.
그는 탐욕에 눈이 멀어 판단력을 잃었다. Greed has blinded his (good) judgment.
All crime has its origin in greed. 모든 죄는 탐욕에서 비롯된다.
[속담] The avaricious man is always in want. 탐욕한 자는 언제나 모자란다.
He is greedy for money and power. 그는 돈과 권력에 탐욕을 부린다.
[시, 글과 책 속에 쓰인 '탐욕'에 대한 다양한 표현들]
E. F. 슈마허, <자발적 가난>
지구는 존재하는 모든 인간의 필요를 충분히 만족시킬 만큼은 자원을 제공하지만, 탐욕을 만족시킬 만큼 자원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 간디
벤저민 그레이엄, 데이비드 도드, <벤저민 그레이엄의 증권분석>
수많은 사람이 <증권분석>을 읽고 존중한다면, 그 원칙을 실천하는 사람은 왜 이렇게 적을까? 나는 인간의 세 가지 본성 때문이라고 믿는다.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감정이 이성을 압도하며, 탐욕을 부리는 세 가지 본성 말이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 <월든>
입에 들어가는 음식이 사람을 천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음식을 먹을 때의 탐욕스러운 식욕이 그를 천하게 하는 것이다.
로버트 그린, <권력의 법칙>
상대에게 탐욕스러운 기질이 엿보인다면 절대 자비에 호소하지 말라. 상대가 자비롭고 우아하게 보이고 싶어한다면 절대 탐욕에 호소하지 말라.
제레미 리프킨, <육식의 종말>
현대적인 축산단지와 인위적인 단백질 사디리는 사냥, 침략, 강탈, 식민지화, 탐욕의 폭력 아래에서 꾸준히 키워온 과거 의식의 가시적인 잔제이다. 북반구인들의 낭비가 심한 육식 습관은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것은 유라시아 스텝 지방에서부터 시작하여 고대 유럽과 신세계 그리고 그 너머 지역까지 전파되었다. 오늘날에는 식민지 정신을 되살리고 세계를 분리시키기로 작정한 다국적 기업에 의해 그 임무가 수행되고 있다. 육식이 지배하는 세상은 앞으로도 선택받은 소수와 아무것도 물려받지 못한 다수 간의 불균형을 더욱 심화시키면서 어느세 현실이 되어 우리 눈앞에 다가올 것이다.
미야자기 마사카츠, <흐름이 보이는 세계사 공부>
화폐가 기호화되어 금융조작에 의한 이익 추구와 탐욕이 더해져 버블이 생긴다.
유발 하라리,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근대 역사에서 최대 범죄는 증오나 탐욕이 아니라 무지와 무과심에서 더 많이 나왔다. 매력적인 영국 숙녀들은 아프리카나 카리브해 지역에는 발도 디뎌본 적이 없었지만, 런던 증권거래소에서 주식과 채권을 사는 방식으로 대서양 노예무역을 재정적으로 후원했다. 그러고도 오후 네 시가 되면 눈처럼 흰 각설탕을 차에 타서 즐겨 마셨다. 물론 각설탕은 지옥 같은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생산된 것이었다. 이런 사실을 그녀들은 몰랐다.
네이트 실버, <신호와 소음>
경제학자 래리 서머스는 가장 중요한 피드백이 '공포fear'와 '탐욕greed' 사이의 피드백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투자자는 위험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어떤 투자자는 위험을 무척이나 반긴다. 투자자들 사이의 이러한 선호 성향은 균형을 이룬다. 재무상태가 악화되어 회사의 주가가 떨어지면 공포에 질린 투자자들이 자기가 보유한 이 회사의 주식을 파는데, 이걸 사는 사람은 바로 이 주식이 바닥을 쳤다고 기대하는 탐욕스러운 투자자들이다. 그런데 탐욕과 공포는 변덕스럽다. 또 둘 사이의 균형은 언제든 흔들릴 수 있다. 탐욕의 과잉 상태가 되면 거품이 생기고, 공포의 과잉 상태가 되면 공항이 나타난다.
코에케 류노스케, <생각 버리기 연습>
인간의 세 가지 기본 번뇌. 분노, 탐욕, 어리석음
라 로슈푸코, <잠언과 성찰>
유능한 사람이라면, 이해의 경중에 따라서 일을 하나하나 차례대로 처리해 나갈 것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의 탐욕은 한 번에 너무 큰 것을 좇는 나머지, 때로 중요성의 순서를 뒤바뀌게 하는 수가 있다. 하찮은 물건에 지나치게 욕심을 부려 진짜 중요한 물건을 놓치고 마는 것이다.
탐욕은 때때로 뜻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온다. 수많은 사람들이 시시하고 당치도 않은 기대를 걸고 자기 재산의 전부를 날려 버린다. 또 어떤 자는 눈 앞의 작은 이해 관계에 눈이 어두워져 장래의 막대한 이익을 팽개치고 만다.
유시민, <어떻게 살 것인가>
정치를 '짐승의 비천함을 감수하면서 야수의 탐욕과 싸워 성인의 고귀함을 이루는 일'이라고 쓴 적이 있다.
알랭 드 보통, <뉴스의 시대>
뉴스는 '소비사회'의 작동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날마다 산출되는 뉴스의 결코 적지 않은 부분을 맛집, 여행, 첨단기술, 패션, 자동차, 가구 등의 상품과 서비스에 대한 정보들이 차지하고 있다. 이때 뉴스는, 우리가 실수를 모면하고, 보다 현명하고 알찬 구매를 할 수 있도록 거들면서 자신이 도움이 되길 바란다. 일각에서는 소비 욕망에 대해 커다란 반감을 가지고 있다. 생존에 정말 필요한 것과는 거리가 먼 물건을 소유하려는 현대인의 욕구는 흔히 얄팍하고 지구에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하며, 헛되고, 탐욕스럽고, 이 모든 비난들을 뭉뚱그려 한마디로 물질주의적이라고 묘사되곤 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자원 중 얼마나 많은 부분이 필수적이지 않은 상품의 생산과 판매에 투입되고 있는지를 고려해본다면, 우리의 소비 행위가 지속되도록, 그리고 가능한 한 확실하게 계속되도록 노력하는 건 결코 하찮은 과업이 아닐 것이다. 뉴스는 우리가 돈을 제대로 쓰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진지한 업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김진선, <적당히 벌고 잘 살기>
"비즈니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개인의 탐욕이 아니라 사회적 책임이다." - 아니타 로딕, 바디샵 창업자
앙드레 코스톨라니, <투자는 심리게임이다>
증권시장에는 언제나 경제적 사실들이 황당한 이야기, 무언가를 겨냥하여 퍼뜨려진 풍문들, 절반쯤 믿을 만한 사실들, 그리고 암시들과 함께 뒤섞여 있다. 걱정과 탐욕으로 움직여지는 이러한 것들은 번번히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인 시세의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로버트 해그스트롬, <현명한 투자자의 인문학>
역발상 투자자들은 탐욕이 주가를 내재가치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으로 밀어올리고, 공포가 주가를 내재가치보다 훨씬 더 낮은 지점으로 밀어붙이지만, 언젠가는 평균으로의 회귀가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변동은 시스템 내에서 바로잡힐 것이다. 하지만 골턴의 법칙이 철칙이라면, 왜 예측이 그렇게 어려운 것일까? 어려움은 세 가지 요인에서 비롯된다. 첫째, 평균으로의 회귀는 항상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고평가와 저평가는 이성적으로 인내할 수 있는 기간보다 더 오랫동안, 훨씬 더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다. 둘째, 변동성이 너무 크고 불규칙해서 주가가 제대로 바로잡히거나 평균에 쉽게 안착되지 않는다. 마지막이자 가장 중요한 것으로, 주식시장처럼 유동적인 환경에서는 평균 그 자체가 안정적이지 않을 수 있다. 어제의 평균이 내일은 평균이 아니다. 평균이 새로운 지점으로 이동할 수 있다.
시라토리 하루히코, <니체의 말>
아무리 좋아 보이는 행동이라도 '무엇을 위해서' 행동하는 것은 비열하고 탐욕적이다. 누구를 위해서든 어떤 일을 위해서든 그것이 실패했을 때에는 상대 혹은 상황, 그 어떤 것의 탓으로 돌리려는 마음이 생기고, 순조롭게 진행되었을 때에는 자신의 실력 덕분이었다는 자만심이 싹트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으로 자신을 위해서만 행동해야 한다. 하지만 순수하게 능동적인 사랑으로 행동할 때에는 '무엇을 위해서'라는 말도 생각도 결코 하지 않는다. - 차라투르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틱낫한, <중도란 무엇인가>
세상의 모든 탐욕과 괴로움은 자아에 집착하고, 자아를 고집하고, 자신의 생각에 집착하고, 생존에 집착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중도는 바로 이런 관념들로부터 벗어나 자유로 나아가는 길이다.
문병로, <메트릭 스튜디오>
추세선에서 멀어지는 움직임들은 시작과 끝의 관점에서 보면 모두 노이즈다. 매일 매일의 등락에 신경을 쓰지 않는 습관을 기르는 것이 좋다. 좀 긴 단위의 움직임을 보는 훈련을 할 필요가 있다. 뉴스는 잡음이다. 투자 정보로서의 가치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한다. 시장에 잡음을 주는 뉴스, 잡음을 주는 투자자의 비이성적 탐욕, 공포, 이런 것들이 없다면 평균을 넘는 수익을 올리는 투자는 정말로 힘들어진다. 다행히 전 세계 모든 시장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잡음투성이의 잔치판이다
프리초프 카프라,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
모든 괴로움의 원인은 '트리슈나', 즉 집착 또는 탐욕이다. ... 실제로는 무상하고 영원히 변전하는 것임에도 우리가 확고하고 영속하는 것으로 보는 사물들에 집착하려 한다면, 우리는 모든 행위가 행위를 낳고 매 질문에 대한 해답이 새로운 질문이 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알랭 드 보통, <불안>
시인 제라르 드 네르발은 재능과 기질 때문에 부르주아 세계에는 어울릴 수 없었던 그의 세대의 예민한 동지들의 경험을 이렇게 요약했다. "야망은 우리 시대에 속한 것이 아니다. ... 자리와 명예를 쫓는 탐욕스러운 경주에 질려 우리는 정치 활동의 영역으로부터 멀어져 간다. 우리에게는 시인의 상아탑만 남았는데, 우리는 이곳으로 점점 더 높이 올라가 군중으로부터 고립된다. 그 높은 고도에서 우리는 마침내 고독의 순수한 공기를 숨쉰다. 우리는 전설의 황금 컵으로 망각을 마셨다. 우리는 시와 사랑에 취했다."
헨리 조지, <진보와 빈곤>
빈곤의 진정한 원인은 과거나 현재나 인간의 탐욕이지 자연의 인색함이 아니다.
장하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애덤 스미스가 정육점, 양조장, 빵집 주인에 관해 한 이야기에서 잘 나타났듯이 자유 시장 경제학은 모든 경제 주체가 이기적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들은 탐욕, 이기심과 같은 인간의 가장 추악한 본성을 사회에 이롭고 생산적으로 바꾸는 것이 시장 시스템의 장점이라고 주장한다.
윤재수, <대한민국 주식투자 100년사>
투기란 '주가가 이미 기업의 내재가치를 초과하여 버블이 심한데도 불구하고 계속 상승할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매매차익을 얻기 위해 주식을 사는 것'이라 볼 수 있다. ... 투기장에서는 언제나 투자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오를 때 더 많이 오르고 떨어질 때 더 많이 떨어지는 것이 주가의 변함없는 속성이다. 오를 때는 탐욕이, 떨어질 때는 공포라는 인간의 투기 심리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구길본 등 16명, <길에게 길을 묻다>
내마음으로 섭취되는 것은 독초도 있고, 약초도 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는 탐욕, 시기, 질투, 애증, 분노, 경멸, 무시, 사기, 배반, 억압, 지배, 비난, 비판, 근심, 걱정, 슬픔, 비탄 등 부정적 생각과 행동은 마음을 병들게 하는 독초와 다름없을 것이다. 반면 사랑, 자비, 연민, 희생, 봉사, 인내, 신뢰, 자유, 평등, 조화, 칭찬, 공경, 존중, 희망, 기쁨, 희열 등 긍정적 생각과 행동은 우리 마음을 치유하는 약초에 해당된다. ... 걷는 것은 세심洗心하는 것이다. 걷기는 일상의 탈출을 통해 몸과 마음을 청결하게 하고 재탄생시킨다. 몸과 마음을 자연과 생명 본원의 청명한 기운으로 환원한다. - 구길본, <걷기와 세심>
법인 스님, <검색의 시대, 사유의 회복>
수행은 곧 내 삶의 참된 변화와 완전한 내적 혁명이다. 수행은 언젠가의 지향점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실현해야 할 삶 그 자체이다. 거짓에서 진실로, 탐욕에서 비움으로, 분노에서 자애로, 차별에서 평등으로, 불안에서 평안으로, 사견에서 정견으로, 늘 지금 이 자리에서 개선되고 탈바꿈하는 우리 삶의 모든 것이다. ... 그러므로 이런 삶을 이루어 내는 모든 실천, 곧 생각과 움직임이 수행이다. ... 세상을 벗어난 한적한 깊은 산중에서 번거로운 일 싫어하고 그저 고요히 내면을 관조하는 그 자체가 수행의 목적이 될수는 없다. '탐욕과 성냄과 자만과 위선이 떨어져 나간 사람, 거칠거나 속되지 않고 분명하게 진실을 말하고, 말로써 사람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는 사람, 바라는 것 없고 기대도 없고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는 사람, 아무런 집착도 없고 의혹이 없어 집착과 근심을 초월해 더러움이 없이 맑은 사람, 자비로운 생활을 하고 부처의 가르침을 행하는 사람이 진정한 수행자'라고 <법구경>은 말하고 있다.
김승옥, <무진기행>
남녀 관계란 근본적으로 경제적 관계야. 남자끼리의 관계만 사상적 관계지. .... 아이란 우리들의 신이야. 인간적인 사랑이란 삼각형의 관계 형식 속에서만 가능하다구 생각해. 한 꼭지점에는 남자, 또 한 꼭지점엔 여자 그리고 또 한 꼭지점엔 신이 있어야 하는 거야. 남자와 여자가 함께 바라보는 신이 있을 때 추잡한 거래 관계를 벗어날 수 있는 거야. 신이 없는 두 꼭지점만의 남자와 여자의 사랑이란 이기적으로 무한히 탐욕적인 동물적인 사랑에 지나지 않아. 어느 한 편이 상대를 잡아먹고서야 끝나는 투쟁에 지나지 않아. 끝나고 괴로운 투쟁이지. 왜냐하면 상대를 잡아먹어 버렸으니 남은 건 고독한 자기란 말야. 신이 있으면 달라. 신에게는 남자도 여자도 다 있어 줘야 한다는 걸 알고 남자와 여자는 진실로 평등하게 상대를 존중하게되지. 서양 사람들에게는 그 신이 있지만 신이 없는 우리들에겐 자식이 그 신 노릇을 하는 거야. 물론 그 신이 불변하고 영원한 하나의 신이 아니라 변하고 일시적이고 수많은 신이기 때문에 우리가 만드는 삼각형은 불완전한 삼각형이고 너무나 많아서 충동하기 쉬운 다신교라고 해야 하겠지만 어쨌든 남자와 여자 사이에 추잡한 동물적 사랑이 아닌 숭고한 인간적 사랑을 최소한이나마 가능하게 해 주는 거야. 신이 인간을 구제한다면 아이들이 우리를 구제해 주고 있는 거야. - <서울의 달빛 0장>
전영우, <비우고 채우는 즐거움, 절집 숲>
삼보일배는 '불보, 법보, 승보의 삼보에 귀의한다는 뜻을 담고 있으며, 흔히 첫걸음에 이기심과 탐욕을 멸하고 두 번째 걸음에 속세에 더럽혀진 진심을 멸하며, 세 번째 걸음에 어리석은 치심을 멸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웬델 베리, <생활의 조건>
가르침과 배움은 가치를 따질 수 없기 때문에 무료로 제공되어야 한다. 교육을 상품화하는 것은 곧 그것을 망치는 길이다. 우리가 굳이 교육의 가격을 따진다면, 그 가치가 손상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결국 학생들은 그들이 받아 누리는 선물에 늘 따라다니는 책임들, 다시 말해 받은 것을 잘 이용하고 후세에 온전하게 물려줄 책임을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교육을 상품화하는 것은 그것을 하나의 무기로 만드는 것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책임의식에서 멀어질 때 교육은 탐욕에 지배되기 때문이다.
리 호이나키,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
나는 독서를 통해서, 그리고 좀더 전통적인 내 이웃사람들과 함께 일 함으로써, 그들의 농사일에 두 가지 자질이 지배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즉, 무엇을 기른다는 것의 신비, 경이로움 앞에서의 외경, 그리고 자연과의 협력. 이러한 자질은 그들이 하는 말에서, 또 그들이 동물과 밭을 대하는 태도에 쉽게 드러나 있었다. 그러나, 다른 경향의 농부들 사이에서 내가 본 것은 전혀 다른 태도였다. 즉, 작물과 가축을 엔지니어의 입장에서 통제하려 하고, 주로 이익에 대한 갈망만이 동기 된 - 예전에는 하나의 도덕적 실패로 낙인찍혔을, 오로지 '탐욕'만으로 - 합리적인 계획을 짜고자 하는 태도였다.
베르나르 올리비에, <나는 걷는다>
무언가 나보다는 훨씬 크고 강한 어떤 것이 나를 앞으로 이끌고 간다. 호기심?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나의 첫 번째 동기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혼자인 나를 발견하고 싶다는 바람일 것이다. 그런 고독 속에서는 사회생활의 거짓과 탐욕은 줄어들고 내적인 진실함은 더욱 커지니까. 또한 세상의 광대한 신비로움 속에서 더욱 존재감을 느낄 수 있고, 기적적인 만남의 시간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 그러니 여행은 끝이 없어야만 하고, 삶 그 자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 여담처럼 잠시 삽입된 것이 아니라, 삶의 도정 속에서 아주 길게 지속되는.....
최지원, <유학들의 동물원>
자본주의는 (자유주의자들은 창조적 파괴라고 부르는) 끊임없는 경쟁으로 인간에게 좌절을 허용한다.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좌절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누구의 좌절을 금지할 것인가. 배를 태우던 사람들이 느끼던 좌절? 자본주의는 원래 소박했던 인간에게 탐욕을 불러일으키는 장치가 아니라, 언제나 창궐했던 인간의 탐욕을 좌절시키는 장치일 뿐이다. 그러나 정치가들과 중상주의자들은 자본주의가 악의 근원이라면서 뒤로는 자신들의 이기주의를 도모하며, 자본주의에 대한 대중의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반발 심리를 이용해서 부족주의적 영달을 추구한다.
도정일, <별들 사이에 길을 놓다>
탐욕은 사회적으로 전염되는 질병이다. "남들은 다 먹는데 나는 왜 못 먹어?"라고 생각하는 순간 사람들은 시기, 질투, 선망의 포로가 되고 '못 먹는 자'는 불출, 무능, 도태의 존재로 강등된다. 욕망이라는 것이 빠지면 인간의 삶은 동력을 상실할지 모른다. 그러나 욕망과 탐욕은 그 차원이 다르다. 사회 전체가 탐욕과 선망의 질병에 걸리면 인간은 존재의 품위와 광채를 잃고 거대한 입과 밥통으로만 살아야 한다. 그런 사회는 '좋은 사회'가 아니다. 그런데 정말로 심각한 딜레마는 우리가 의존해서 살아야 하는 지금의 세계 경제체제가 정확히 탐욕과 선망의 체제라는 점이다. 탐욕과 선망을 증폭시키지 않고서는 작동할 수 없다는 것이 현대 경제의 비극적 결함이며 그 결함의 체제 속에 살아야 한다는 것이 현대적 생존의 딜레마다. 우리가 이 딜레마를 헤쳐나갈 수 있을까? 이 시대를 어떻게 살까에 대한 지혜는 인간을 살아남게 한 위대한 어떤 능력이 동시에 현대적 난국의 기원이기도 하다는 아이러니를 인식하는 데서부터 나오지 않을까 싶다.
코이케 류노스케, <침묵입문>
불교의 삼독 : 탐욕(貪欲, 욕망), 진에(瞋에 분노), 우치(愚癡, 어리석음)
분노, 탐욕,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말들이 난무할 때, 그 속에서 조용히 침묵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박웅현, <책은 도끼다>
무욕만 한 탐욕이 없습니다.
왕가리 마타이, <지구를 가꾼다는 것에 대하여>
우리는 지구의 자원이 무한하다고 생각하고 자원이 베푸는 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으며 자원에 값을 매긴다. 우리가 바로 이런 태도로 지구를 대하기 때문에, 세계 곳곳에서 심각한 생태 위기가 그렇게나 많이 발생한 것이다. 환경 파괴는 더 많은 것을 바라는 탐욕 때문에 일어난다.
자연을 팔아 돈을 쌓는 것, 인간의 탐욕으로 환경과 삶의 터전을 파괴하는 길이다.
박노해, <다른길>
탐욕의 그릇이 작아지면 삶의 누림은 커지고 우리 삶은 '이만하면 넉넉하다'.
박노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탐욕은 작고 느린 삽질을 견뎌내지 못한다
강신주, <감정수업>
탐욕 (AVARITIA) : 사랑마저 집어삼키는 괴물, <위대한 개츠비> F. 스콧 피츠제럴드
"탐욕이란 부에 대한 무절제한 욕망이자 사랑이다."
나탈리 골드버그, <글쓰며 사는 삶>
자본주의의 바탕은 탐욕과 불만이다.
도정일,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21세기 초 도시 중산층 이상의 한국인을 지배하는 정신 상태는 두 개의 강력한 '코드'에 관통당해 있다. 더 날씬한 은유가 생각나지 않아 좀 투박하게 대놓고 말하자면, 하나는 '탐욕의 코드'이고 또하나는 '선망의 코드'이다.
탐욕의 코드는 폴 새뮤얼슨이 말한 자본주의적 '행복 방정식'을 따른다. 이 경제학자가 소개한 계산법에 의하면 행복(H)은 욕망(D) 분의 소비(C)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얼마만큼 소비했는가"가 나의 행복을 결정한다. 소비를 소유로 바꿔놓으면 이해하기 쉽다.
선망의 코드는 "저 자는 갖고 있는데 나는 없어, 이건 안되지, 암 안 될 일이고말고"라고 사람들을 들쑤셔 견딜 수 없게 만드는 전염성 질투의 부호다. 저 사람이 갖고 있는 것은 나도 가져야 한다. 내가 저 인간만큼 갖지 못한다면 나는 불행하다. 내가 가질 행복을 저 자가 갖고 있네그랴? 저런 도둑놈, 내 행복을 훔쳐가다니, 화가 치미는 바로 그 순간에 질투의 여신이 나타나 행복에 이르는 길을 확인시켜준다. 저 자가 가진 것은 너도 가져라, 뺏고 훔쳐서라도. 그러면 행복은 네것이다. 아니, 너는 저 자가 가진 것 이상으로 가져야 해.
탐욕과 선망의 부호가 행복 방정식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일찌감치 알려준 것은 석가모니다. 욕망의 크기는 무한해서 그것을 충족시킬 방도가 없다는 것, 그것을 알게 된 것이 붓다의 '깨침' 가운데 하나다. 욕망은 일정량의 크기로 묶이지 않는다. 100을 바라던 욕망은 그 100을 소유하는 순간 200으로 불어나고, 200을 갖는 순간 300으로 커져 달아난다. 욕망의 크기를 정할 수 없기 때문에 소유를 키우는 방법으로 행복에 도달한다는 것은 신기루 잡기다. 그러므로 욕망의 크기를 줄여라. 그것만이 평온에 이르는 길이다. 욕망이 제로일 때는 제로의 소유만으로도 너는 행복하다. 재갈을 물릴 수 없는 무한 욕망이 탐욕이다. 그 탐이 충족되지 않아 너를 화나게 하고 질투하게 하는 것이 '진, 분노'이며 이 간단한 진리를 모르는 것이 '치, 어리석음'다. 그러므로 욕망을 다스려라, 줄여라, 끊어라, 그리고 평화로워라, 친구여.
만약 행복의 추구가 불행의 완벽한 제거와 고통의 완벽한 회피에 목표를 둔다면 그 목표는 달성 불가능할 뿐 아니라 그 자체가 고통의 기원이 된다. 완벽한 행복의 추구란 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이미 삶의 진실이 아니며, 인간 사회의 도덕적 이상도 아니다.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법을 열심히 찾아 헤매야 하는 사회는 행복한 사회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절망의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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