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에 보면 "역사는 끝없이 반복되는 하나의 톱니바퀴이며, 그 축이 서서히, 고칠 수 없을 정도로 마모되지 않는다면 영원히 계속해서 회전하는 하나의 바퀴"라고 역사의 지속성과 반복성, 그리고 순환에 대한 의미를 이야기한다.
역사는 또한 역사가 과거-현재-미래가 상호작용하고 있다.
"역사가들은 정확하고 그 무엇에도 쏠리지 않고 흔들리지 말아야 하는 만큼, 그 어떤 증오나 두려움 때문에 진실의 길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는 진실의 어머니이며 시간의 그림자이자 행위의 축적이다. 그리고 과거의 증인, 현재의 본보기이자 반영, 미래에 대한 예고인 것이다." -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중에서
[본문 발췌]
역사 서술은 사실을 기록하는 작업이자 사회 변화의 원인과 과정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활동이며 어떤 대상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만드는 창작 행위이기도 하다. 성실한 역사가는 사실을 수집해 검증하고 평가하며 중요한 역사의 사실을 정확하게 기록한다. 뛰어난 역사가는 사실들 사이의 관계를 탐색해 역사적 사건의 인과관계를 밝혀내며 사회 변화를 일으키는 동력과 역사 변화의 패턴 또는 역사법칙을 찾아낸다. 위대한 역사가는 의미 있는 역사적 사실로 엮은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독자의 내면에 인간과 사회와 자신의 삶에 대한 생각과 감정의 물결을 일으킨다. 역사는 사실을 기록하는 데서 출발해 과학을 껴안으며 예술로 완성된다.
교류가 전혀 없었던 두 문명에서 비슷한 때 본격적인 역사서가 등장했다는 사실은 과거를 기억함으로써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전망하려는 욕망이 우리 인류의 본성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흔히들 과거를 평가하고 미래에 대비하도록 사람들을 일깨우는 것이 역사 서설의 과업이라고 하지만 이 책은 그처럼 고매한 과업을 추구하지 않는다. 이 책은 단지 과거를 '있었던 그대로(wie es eigentlich gewesen)' 보이려 할 뿐이다. - <1494년붕터 1514년까지 라틴족과 게르만족의 역사> 서문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의 기록이다.비아를 정복하여 아를 드러내면 투쟁의 승리자가 되어 미래 역사의 생명을 잇고, 아를 없애어 비아에 바치는 자는 투쟁의 패망자가 되어 과거 역사의 묵은 흔적만 남긴다. 이는 고금의 역사에 불변하는 원칙이다. - <조선상고사> 13~14쪽
역사가의 선택을 받은 사실을 '역사적 사실'이라고 하자. 수많은 과거의 사실 가운데 어느 것을 사실로 인정할지, 그 사실에 얼마나 중요한 지위를 부여할지는 역사가의 주관적 평가와 해석에 달려 있다. 역사적 사실은 순수하게 그 자체로 존재하면서 발언하는 게 아니라 평가와 해석이라는 주관적 요소의 세례를 받은 다음에야 비로소 존재를 인정받고 무언가 할 수 있다.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것이다.
역사의 진로를 만든 것은 세 혁명이었다. 약 7만 년 전 일어난 인지혁명은 역사의 시작을 알렸다. 약 1만 2,000년 전 발생한 농업혁명은 역사의 진척을 가속했다. 과학혁명은 겨우 500년 전에 시작되었지만 역사의 종말을 부르거나 무언가 완전히 다른 것을 새로 시작하게 할지도 모른다. 이 세 혁명은 인간과 이웃 생명체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그것이 이 책의 주제다. - <사피엔스> 18~19쪽
뇌 배선이 달라지는 생물학적 돌연변이 덕분에 사피엔스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한다고 믿으며 협동하는 능력을 얻었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데도 우리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란 무엇인가? 첫손에 꼽을 수 있는 것이 '신'이다.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꽃이라고 하는 '법인', 우리가 소중이 여기는 '인권'과 '국민주권' 개념도 그렇다. 사피엔스는 이런 것을 믿으면서 거대한 공동 행동을 조직했고, 그런 능력 덕분에 네안데르탈인을 비롯한 다른 인간 종을 모두 밀어내고 지구 생태계의 패권을 장악했다.
표현의 자유와 관련해 "침묵을 강요당하는 의견이 틀렸다고 해도 일부 진리를 담고 있을 수 있으며 실제로 그런 일이 흔하다. 통설이나 다수 의견이 전적으로 옳은 경우는 드물거나 아예 없다. 대립하는 의견들을 서로 부딪치게 해야만 나머지 진리를 찾을 수 있다"는 이야기에 비추어 최근 조국 전 장관 이슈를 되새겨 본다. 서로의 주장이 대립하는 가운데 의심만으로 야당, 검찰과 언론의 무차별 폭력과 같은 일방적인 뉴스가 정상적인가?
진보와 보수, 자유와 평등, 서로 상충되는 다른 생각들..... 다른 이념과 주장이 상존하면서 적절한 균형을 이루어야 사회가 건전하게 발전한다.
[본문 발췌]
인간사회에서 누구든, 개인이든 집단이든, 다른 사람의 행동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경우는 오직 한 가지, 자기보호를 위해 필요할 때뿐이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면, 국가가 그 사람의 의지에 반해서 권력을 사용하는 것도 정당하다. 이 단 하나의 경우 말고는, 문명사회에서 구성원의 자유를 침해하는 그 어떤 권력행사도 정당화할 수 없다. -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밀은 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가 인간의 정신적 복리를 위해 가장 중요하다고 특별히 강조했다. 어떤 의견에 대해서든 침묵을 강요하면 인간과 사회를 해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그는 네 가지로 그 이유를 정리했다. 첫째, 자신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근본적으로 틀린 전제가 없는 한 침묵을 강요당하는 어떤 의견이 진리일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 둘째, 침묵을 강요당하는 의견이 틀렸다고 해도 일부 진리를 담고 있을 수 있으며 실제로 그런 일이 흔하다. 통설이나 다수 의견이 전적으로 옳은 경우는 드물거나 아예 없다. 대립하는 의견들을 서로 부딪치게 해야만 나머지 진리를 찾을 수 있다. 셋째, 통설이 진리일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옳은 것이라고 해도 제대로 검증을 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 근거를 이해하지도 못한 채 하나의 편견으로 간직하게 된다. 넷째, 소수 의견에 침묵을 강요하면 다수 의견 또는 통설이 독단적 구호로 전락해 이성이나 개인적 경험에서 강력하고 진심 어린 확산이 자라나는 것을 가로막게 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가운데 하나의 계급으로 단결하고, 혁명을 통해 스스로 지배계급이 되며, 새로운 지배계급으로서 낡은 생산관계를 폐지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이 생산관계와 함께 계급대립의 존립조건과 계급 그 자체를 폐지하고 종국적으로 자기 자신의 계급지배도 폐지한다. 이렇게 해서 계급과 계급대립이 있던 낡은 부르주아사회 대신에,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이 되는 연합체가 들어선다. -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산당선언>
우리의 민주주의는 여전히 중우정치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미디어 왜곡과 여론조작으로 인한 중우정치의 위험은 우리의 발밑에 똬리를 틀고 다음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 시민들이 자기 머리로 생각하고 대안미디어를 활용해 언론권력의 여론조작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그 위험에 또 발뒤꿈치를 물리게 될 것이다.
새는 좌우 두 날개로 난다. 보수주의는 생물학적 본능이고 진보주의는 목적의식적 지향이다. 보수가 구심력이라면 진보는 원심력이다. 사회는 진보와 보수가 있기에 유지되고 발전한다. 진보주의자만 있는 사회는 안정성이 없을 것이다. 생활환경의 사소한 변화조차도 통제할 수 없는 사회적 혼란과 정치적 혁명으로 번져나갈지 모른다. 반면 보수주의자만 사는 세상에서는 혁신이 불가능할 것이다. 그 사회는 존립을 위협하는 심각한 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몰락할 것이다. 사회가 건전하게 발전하려면 둘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진보주의자들이 생각하는진보는 무엇인가? 대표적인 견해를 몇 가지 살펴보자. 가장 좁은 의미의 진보는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것이다. 가장 넓은 의미의 진보는 인간 능력의 지속적 발전을 이루는 것이다. 둘 사이 어디엔가, 인간을 자유롭게 만드는 것이 진보라는 견해가 있다.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된다면, 자기 책임 아래 전개하는 자유로운 경쟁이 만들어낸 소득과 부의 분배는 정의롭다고 인정할 수 있다. 그 조건이란 무엇인가? 첫째, 모든 사람이 동등한 참여의 기회를 가져야 한다. 누군가 처음부터 아예 기회를 얻지 못하거나 출발선이 현저하게 다르다면 이러한 방식으로 부와 소득을 분배하는 것은 정의롭다고 할 수 없다. 둘째, 경쟁은 공정해야 한다. 경쟁의 규칙이 합리적이어야 하고 반칙하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 경쟁의 규칙 그 자체가 불합리하거나 반칙으로 승리를 거둘 수 있다면 그 결과는 정의롭다고 할 수 없다. 셋째, 만인이 자유롭고 독립적이며 동등한 주체로서 경쟁할 수 있어야 한다. 계약과 거래의 어느 한 당사자가 상대방의 시혜 또는 선의에 의존해야 하거나 진정 자유롭게 판단할 수 없을 때, 경쟁이 만들어낸 분배의 격차는 정의로울 수 없다. 모든 시민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받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진보정치는 국가로 하여금 최고의 도덕적 이상인 정의를 실현하도록 하기 위해 국가를 직접 운영하거나 국가운영에 영향을 미치려고 하는 활동이다. 국가의 정의는 시민들로 하여금 각자가 마땅히 가져야 할 것을 받게 만드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똑같이 누릴 자격이 있는 것을 만인으로 하여금 누리게 하고, 각자가 마땅히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을 저마다 받게 만드는 것이 국가가 사람들 사이에 세워야 할 정의이다. 국가가 최고의 도덕적 이상인 정의를 완벽하게 실현한다면, 우리는 자유롭고 풍요로우며, 평등하고 안전하며, 평화롭고 환경이 깨끗한 사회에서 살게 될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이 규정한 국가공동체의 최고 목표 또는 최고 가치는 자유, 복지, 평등, 안전, 평화, 환경 등이다. 자유는 자유권적 기본권에 대한 침해가 완전히 사라진 상태를 말한다. 복지는 1인당 국민소득으로 표현되는 좁은 의미의 물질적 후생을 넘어 국민의 삶의 질을 가리킨다. 안전은 범죄뿐만 아니라 각종 재해와 실업, 질병, 노령 등 사회의 위험으로부터 보호받는 것을 의미한다. 평화는 군사적 위협에 대한 단순한 방어를 넘어 한반도에서 무력충돌과 전쟁의 위험이 항구적으로 제거된 상태를 가리킨다. 환경은 단순한 주거환경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자연생태와 생활환경의 정착을 의미한다.
홉스의 국가는 좁은 의미의 안전과 평화를 보장하기 위한 생존의 방편이었다. 국가주의 국가론을 신봉하는 '이념형 보수'에게는 여전히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로크와 밀, 스미스, 루소의 국가는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자유주의 국가론을 따르는 '시장형 보수'에게는 자유와 이를 통해 가장 잘 성취할 수 있다는 물질적 부의 증진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국가주의와 시장형 보수가 손을 잡으면, 우리가 박정희-전두환 정권 아래에서 직접 경험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수많은 신생국가들이 시도했으며, 최근 세계 최고 경제성장률을 자랑하는 중국에서 그 나름 성공적으로 안착한 '개발독재'가 된다. 지금 대한민국 사회를 지배하는 이념도 이것이다. 보수정당 - 국가의 공안기관 - 보수 언론 - 재벌대기업 - 보수지식인들이 반세기에 거려 형성한 소위 주류의 지배 카르텔은 이념으로 보면 국가주의와 보수자유주의가 결합한 것이다.
나는 자유를 원하는 것과 똑같이 간절하게 정의를 소망한다. 자유주의 국가론이라는 땅을 딛고 정의를 실현하는 국가를 바라보며 나아간다. 그리고 이런 내가 진보자유주의자라고 생각한다. 진보자유주의자는 어떤 가치 하나를 절대화하여 다른 가치를 종속시키거나 무시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믿는다. 진보자유주의는 모든 형태, 모든 종류의 절대주의를 거부한다. 자유, 복지, 안전, 평등, 평화, 환경 등 헌법이 규정한 사회의 최고 목표 또는 최고 가치는 모두 평등한 지위를 가진다. 어떠한 우열관계나 종속관계도 인정하지 않는다. 어떤 하나의 가치를 절대화하여 다른 가치를 종속시키는 순간, 국가는 단일가치가 지배하는 전체주의로 흐를 수 있다고 본다. 전체주의는 필연적으로 국가의 정의를 파괴한다. 진보자유주의자는 민주주의를 통한 사회개량의 길을 선호한다.
진보의 힘이 '순수'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진보의 힘은 '섞임'에서 나온다. 진보를 추동하는 근본적인 힘은 인간의 보편적 이성이다. 사회의 진보는 인간 이성의 발전과 함께 이루어진다. 하나의 이념이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사회에서 이성이 성장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의 이념이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정치조직에서도 이성의 힘이 자라기는 어렵다. 다양성을 내포하지 않고서는 정당도 정치도 국가도 인간도 성장하지 못한다. 이념과 정치문화의 '섞임'을 통해 진보의 힘을 키우는 것이 연합정치이다. 연합정치가 지지를 받는 것은 국민들이 그 속에서 정치인의 책임의식을 보기 때문이다. 신념윤리에 투철한 정치인은 존경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책임윤리에 투철한 정치인은 믿음의 대상이 된다.
나는사람들 사이에 정의를 수립하는 국가를 원한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는 국가, 국민을 국민이기 이전에 인간으로 존중하는 국가, 그런 국가가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부당한 특권과 반칙을 용납하거나 방관하지 않으며 선량한 시민 한 사람도 절망 속에 내버려두지 않는 국가에서 살고 싶다. 그런 국가에서 개인으로서 훌륭한 삶을 살려면 우리들 각자는 "먼저 인간이고 그 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는" 시민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훌륭한 국가를 만들 수 있고 훌륭한 국가에서 살 합당한 자격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그런 나라가 되지 못했다고 해서 대한민국을 비하하거나 사회를 냉담하게 대하지는 않는다.
여행은 새로운 경험을 통해 견문을 넓히고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깨닫는 방법 중 한 가지다.
계획하지 않고, 예상하지 못한 만남을 통한 즐거움도 있겠지만 여행도 아는 만큼 더 잘 보고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여행기를 읽고, 여행 정보를 찾아보는 거겠지...
[이하 본문 발췌]
낯선 도시를 여행하는 데는 저마다의 이유가 있다. 나는 도시가 품고 있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새로운 것을 배운다. 나 자신과 인간과 우리의 삶에 대해 여러 감정을 맛본다. 그게 좋아서 여행을 한다. 그러려면 도시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한다. 건축물과 박물관, 미술관, 길과 공원, 도시의 모든 것은 '텍스트(text)'일 뿐이다. 모든 텍스트가 그러하듯 도시의 텍스트도 해석을 요구하는데, 그 요구에 응답하려면 '콘텍스트(context)'를 파악해야 한다. 콘텍스트는 '텍스트를 해석하는 데 필요한 모든 정보'를 말한다. 도시의 건축물과 공간은 그것을 만든 사람의 생각과 감정과 욕망, 그들이 처해 있었던 환경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다. 누가, 언제, 왜, 어떤 제약 조건 아래서, 어떤 방법으로 만들었는지 살피지 않는 사람에게, 도시는 그저 자신을 보여줄 뿐 친절하게 말을 걸어주지는 않는다. - 서문 중에서
도시는 대형서점과 비슷하다. 무작정 들어가도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할 수는 있다. 하지만 책이 너무 많아서 여기저기 둘러보다 보면 시간이 걸리고 몸도 힘들며, 적당한 책을 찾지 못할 위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구매할 책을 미리 정하고 가서 그것만 달랑 사고 돌아온다면 현명한 처사가 아니다. 인터넷서점에 주문하면 되지 무엇하러 굳이 서점까지 간단 말인가. 대형서점의 가장 큰 장점은 '뜻밖의 발견'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즐거움을 맛보려면 서점의 구조를 미리 파악하고, 어떤 분야의 책을 살펴볼지 계획을 세워야 한다. 사려고 마음먹었던 책이 신간 안내나 서평에서 본 것처럼 정말 괜찮은지 확인하는 건 기본이고, 신간 코너와 베스트셀러 진열대, 스테디셀러 판매대, 기획 도서 진열대, 귀퉁이 서가까지 다니면서 이 책 저 책 들춰보는 여유를 누리는 것은 덤이다. 나는 이런 방식으로 낯선 도시를 여행했다. 찍어둔 곳을 빠뜨리지 않았고 몰랐던 공간을 발견하는 즐거움도 맛보았다. - 서문 중에서
아테네, 멋있게 나이들지 못한 미소년
플라카의 골목을 걸으며 생각해보았다. 아테네 시민들은 왜 소크라테스를 죽였나? 고정관념, 광신, 시기심, 무지, 무관심, 변덕이 그를 죽였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어떤 지식인은 국회의원을 차라리 추첨으로 뽑자고 주장한다. 국회의 무능과 부패에 대한 불만 때문이라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할지라도, 나는 이 주장에 공감하지 못한다. 플라톤은 민주주의가 반드시 중우정치로 흐른다면서 덕과 진리를 아는 '철학자의 통치'를 옹호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민들이 각자 훌륭해지지 않고, 훌륭한 시민들이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국가가 훌륭해지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소크라테스를 죽인 아테네 시민들보다 얼마나 더 훌륭하며 국가와 정치에 대해서 얼마나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얼마나 더 능동적으로 참여하는가? 나는 직접민주주의가 다수의 폭정으로 흐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비관론에 한 표를 던지고 싶다. 소크라테스의 삶과 죽음은 아테네 민주주의의 잠재력과 한계를 모두 확인해 주었다. 아태네의 품에서 태어났으나 시대의 경계 너머로 나아갔던 그는 민주주의라는 옷을 입은 다수의 폭정에 목숨을 빼앗겼다. 그런데도 민주주의는 문명의 대세가 되었고 소크라테스도 인류의 스승으로 인정받는다. 역사의 역설이다.
세상에는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되는 일이 많다. 학자들은 '경로 의존성'이라는 개념으로 이런 현상을 설명한다. 우연히 어떤 길을 들어서고 나면 더 좋은 길을 알아도 가던 길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을 즐기면 되는 것, 무얼 위해서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를 근심하며 종종걸음을 친단 말인가.' - 그리스인 조르바
로마, 뜻밖의 발견을 허락하는 도시
로마는 전성기를 다 보내고 은퇴한 사업가를 닮았다. 대단히 현명하거나 학식 있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뛰어난 수완으로 돈과 명성을 얻었고, 나름 인생의 맛과 멋도 알았던 그는 빛바랜 명품 정장을 입고 다닌다. 누구 앞에서든 비굴하게 행동하지 않으며 돈지갑이 얄팍해도 기죽지 않는다. 인생은 덧없이 짧으며 모든 것이 부질없음을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때 거두었던 세속적 성공에 대한 긍지를 버리지는 않는다. 로마는 그런 도시인 것 같았다.
이스탄불, 단색에 가려진 무지개
인간은 지구의 바이러스이고 도시는 그 바이러스가 만든 피부병
sokakta hayat var, 길 위에 삶이 있다.
낯선 도시에서 눈썰미와 요령만으로 맛집을 찾는 데 성공하면 세 가지 즐거움을 얻는다. 혀로 맛보는 기쁨, 배로 느끼는 만족감, 그리고 마음이 누리는 뿌듯함이다.
파리, 인류 문명의 최전선
루브르를 지배하는 것은 작품의 아름다움과 예술가의 열정이 아니라 인간의 탐욕과 권력의 횡포, 집단적 허영심이다. 적어도 내 느낌은 그랬다. 루브르의 건물은 프랑스의 국력과 왕의 권력에 비례해 커지고 화려해졌다. 전시품도 마찬가지였다. 중세와 근대의 예술작품 중에는 왕가의 수집품이 적지 않고 남의 나라 고대 유물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약탈해 온 게 대부분이다.
어쩌다 한 번 해보는 사치여서 좋은 것이지, 날마다 그렇게 먹는다면 그다지 좋은 줄 모를 것도 같았다. 행복을 느끼는 데는 결핍이 필요하다.
에펠탑은 세 가지 측면에서 파리가 지구촌의 문화수도가 될 자격이 있음을 보여준다. 첫째, 에펠탑은 과학혁명의 산물이다. 세계박람회장 관문을 만들기 위한 건축 공모를 할 때 프랑스 정부는 '기술적 진보와 산업 발전을 상징할 기념물'이라는 조건을 달았다. 에펠탑은 금속 7천300톤을 포함해 전체 무게가 1만 톤이 넘으며, 자체 하중과 바람의 압력을 거뜬하게 견뎌낸다. 발명왕 에디슨이 괜히 공학이 발전과 기술자들의 능력을 찬양하는 글을 방명록에 남긴 게 아니다. 프랑스의 과학자, 엔지니어, 수학자 72명의 이름을 탑에 새긴 것도 같은 맥락이다. 둘째, 에펠탑은 공화정이라는 프랑스 정치제도의 특징을 체현하고 있다. 왕이나 교황이 취향 따라 만든 게 아니라 공모 절차와 전문적 평가를 통해 디자인을 결정했으며 전문가와 비평가들이 아니라 대중이 좋아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에펠탑은 민주주의 시대 도시의 주인은 권력자가 아니라 시민이며, 시민이 선출한 정부가 합당한 과정을 거쳐 중대사를 결정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정체제도가 문명의 대세로 확고하게 자리 잡은 계기는 1789년 터진 프랑스대혁명이었다. 에펠탑은 이 혁명의 심장이었던 도시의 대표 건축물로 손색이 없다. 셋째, 에펠탑은 자유와 평등, 인권의 시대에 맞는 방식으로 만들었다. 고대와 중세의 왕궁이나 교횡와 달리 에펠탑은 개인이 디자인한 예술품이며 노예 노동이나 강제 노동 없이 축조했다. 디자인을 설계한 에펠은 물론이요 과학자, 수학자, 엔지니어들도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위험이 따르는 작업을 수행한 노동자들도 저마다의 권리를 누리면서 일했고, 당국은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최대한의 안전 조처를 했다. 자본주의는 격차와 불평등을 만들어내는 시스템이지만 적어도 공공연한 강제 노동이 없다는 점에서는 인류 역사상 가장 진보적인 질서임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