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임>이라는 책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의 창'이라는 개념과 통찰을 제공했던 최인철 교수의 <굿라이프>도 일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는 삶에 대한 통찰과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본문발췌]
행복한 삶이란 가슴에 관심 있는 것 하나쯤 담고 사는 삶이다.
심리학자 이선 맥머핸(Ethan McMahan)에 따르면 사람들은 행복의 본질을 다음 네 가지 차원에서 파악한다. 1) 즐거움을 경험하는 것, 2) 부정적인 경험을 하지 않는 것, 3) 타인의 웰빙에 기여하는 것, 4) 자신이 성장하는 것
행복을 위한 11가지 활동 : 1) 명상하기, 2) 운동하기, 3) 친절 베풀기, 4) 자신에게 중요한 목표 추구하기, 5) 감사 표현하기, 6) 낙관적 마음 갖기, 7) 삶의 즐거움을 만끽하기, 8)행복한 사람처럼 행동하기, 9) 지금 이 순간을 음미하기, 10) 스트레스를 이기는 효과적 전략들을 사용하기, 11) 타인과 비교하지 않기
행복한 사람들의 기술
1. 잘하는 일보다 좋아하는 일을 한다
2. 되어야 하는 나보다 되고 싶은 나를 본다.
3. 비교하지 않는다.
4. 돈의 힘보다 관계의 힘을 믿는다.
5. 소유보다 경험을 산다
6. 돈으로 이야깃거리를 산다. 행복한 사람은 돈으로 경험을 사서 삶의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낸다. 그들은 장식거리보다는 이야깃거리가 우리를 훨씬 더 행복하게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7. 돈으로 시간을 산다. 부의 증가는 행복을 살 수 있는 기회와 자원을 대폭 늘려주었지만, 동시에 행복을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의 결핍을 가져왔다.
8. 걷고 명상하고 여행한다
9. 소소한 즐거움을 자주 발견한다
10. 비움으로 채운다.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채움으로 채우려고 하지만, 행복한 사람은 비움으로 채우려고 한다. 시간과 돈의 여유가 없어서 나누어줄 수 없다고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하소연할 때, 행복한 사람은 나누지 않으면 시간과 돈의 여유는 갈수록 없어진다는 믿음으로 나눔을 실천한다.
경험하는 자기를 위한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은 지금 현재의 만족과 기분을 추구한다는 것이고, 기억하는 자기를 위한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은 삶 전체의 의미와 가치를 추구한다는 뜻이다.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자기가 누구인지를 드러낸다고 느낄때, 인간은 의미를 경험한다. 일이 잘되면 기분이 좋지만, 그 일이 자기다운 일이면 의미가 경험된다. 우리가 성공, 성취, 효용, 효율 등 무엇을 이루는 것에만 집착하게 되면 순간적인 기분의 행복을 누릴지는 모르지만, 의미 있는 삶을 경험할 가능성은 줄어든다. 의미 있는 삶이란 자기다움의 삶이다.
좋은 일이란 직업의 종류와 상관없이,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서 왔고,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제공해주는 일이다. 자신의 일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있다는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는 삶, 즉 소명이 있는 삶이 굿 라이프다.
"심성구지, 수부중불원의(心誠求之 雖不中不遠矣)", 마음으로 간절히 원하고 노력하면 비록 적중하지는 못해도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 <대학>
내 그럴 줄 알았지, 라는 말을 내뱉는 순간 스스로 똑똑하다고 느낄지는 몰라도 이런 반응이 습관이 되면 곤란하다. 이런 일에도 놀라지 않고 결과를 예측하지 못한 남들을 비난하며 우쭐해한다면,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놓칠 뿐만 아니라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면 왜 미리 말해주지 않았나요?'라는 냉소의 대상이 되고 말 것이다.
즐거움을 이야기할 때 뺄 수 없는 것이 <논어: 옹야편>에 나오는 ‘子曰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며 좋아하는 자는 즐거워하는 자만 못하다)’이다.
이에 대해 어떤 사람은 "아는 것은 행동이 없이 머리에만 있고, 좋아하는 것을 행함으로써 스스로 충만해지고, 스스로의 충만함을 남과 더불어 함께 조화를 이루는 것이 즐거움이 아닐까 합니다. 즐기는 사람은 왠지 여유가 있어 남을 배려할 수 있는 사람인 것 같다"는 해석을 했다.
독서는 나의 유일한 즐거움이다 Reading is my only[sole] pleasure.
그는 일에서 아무런 즐거움도 느끼지 못했다 He took no pleasure in his job.
봉사 활동은 나에게 큰 즐거움을 준다 Volunteer work gives me great pleasure.
먹는 것은 인생의 큰 즐거움 중 하나다 Eating is one of the great pleasures in life.
그녀는 자신의 일에 자부심과 즐거움을 느꼈다 She took pride and joy in her work.
그는 여행에서 커다란 즐거움을 얻었다 He got enormous pleasure from traveling.
그는 나를 놀리는 데서 큰 즐거움을 얻는 것 같다 He seems to take great delight in teasing[making a fool of] me.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보는 것이 나의 큰 즐거움이다 My greatest happiness[joy] in life is seeing my children grow.
[시, 글과 책 속에 쓰인 '즐거움'에 대한 다양한 표현들]
알랭 드 보통, <우리는 사랑일까>
시간, 즐거움에 따라 흐르는 속도가 다르다.
도정일, <별들 사이에 길을 놓다>
인간의 행복을 욕망의 규모와 소유의 크기로 계산해주는 것이 자본주의의 행복 모형이라면 붓다가 제시한 것은 욕망의 축소, 단절, 무소유의 모형이다. 근대 이후 사회에서 소유의 위력이 한층 커진 것은 소유가 인간의 행복만이 아니라 자유까지도 확대해준다는 산술이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이 산술로 따지면 자유는 지갑의 두께에 비례한다. 그러나 붓다적 자유의 모형은 돈지갑과 관계없고 두둑한 지갑과는 더더구나 관계없다. 지갑의 노예는 노예이지 자유인이 아니다. 소유의 즐거움을 내세우는 자본주의 행복론 앞에서 소중하게도 정확히 그 반모형을 제시해주는 것이 붓다의 행복론이자 자유론이다. 그러나 세속의 삶은 욕망과 소유의 충동을 벗어날 수 없다.
제러미 리프킨, <소유의 종말>
놀이에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즐거움과 삶의 본능을 긍정하는 것이다.
스티브 디거, <잠들기 전에 읽는 긍정의 한줄>
행복은 내안에 있다.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행복은 자급자족할 수 있는 사람의 것이다. 외부에서 찾은 행복과 즐거움의 원천들은 모두 그 본질상 불확실하고 불안정하고 허무하고 무상하게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Happiness belongs to those who are sufficient unto themselves. For all external sources of happiness and pleasure are, by their very nature, highly uncertain, precarious, ephemeral and subject to chance.
롤프 포츠, <VAGABONDING, 여행의 기술>
불확실한 것을 만나는 즐거움이 있을 때 여행은 더욱 풍요로워진다.
여행의 즐거움은 장애물과 피로감에 있다. 심지어 여행 중에 겪는 위험도 여행의 즐거움을 더해주는 것이다. 언제나 확실하게 목적지에 도착하고 말이 항상 대기해 있으며 포근한 침대와 멋진 식사가 준비되고 집처럼 편안하고 안락하다면 그런 여행에서 어떤 매력을 찾을 수 있겠는가! 현대인의 삶에서 가장 큰 불행 중 하나는 뜻밖의 사건이나 모험거리가 없다는 점이다. 모든 것이 너무도 잘 정돈되어 있으니까. - 테오필 고티에르, <에스파냐에서의 산책>
서은국, <행복의 기원>
스칸디나비아 행복의 원동력은 넘치는 자유, 타인에 대한 신뢰, 그리고 다양한 재능과 관심에 대한 존중이다. 그들 사회는 돈이나 지위 같은 삶의 외형보다자신에게 중요한 일상의 즐거움과 의미에 더 관심을 두고 사는 곳이다.행복한 사람들은 '시시한' 즐거움을 여러 모양으로 자주 느끼는 사람들이다.
행복은 거창한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경험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쾌락에 뿌리를 둔, 기쁨과 즐거움 같은 긍정적 정서들이다. 이런 경험은 본질적으로 뇌에서 발생하는 현상이기 때문에, 철학이 아닌 생물학적 논리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강판권, <나무 철학>
즐거움은 바로 좋아하는 데서 출발한다. 즐겁게 사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좋아하는 것이 있다는 점이다.
공자, 임자헌 옮김, <군자를 버린 논어>
내가 즐거움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이 나를 통제하고 있다면 그것은 '즐긴다'라고 말할 수 없다. '즐긴다'는 표현은 내가 시작하고 내가 맺을 수 있을 때에만 사용할 수 있는 것.
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우리가 여행으로부터 얻는 즐거움은 여행의 목적지보다는 여행하는 심리에 더 좌우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그렇다면 여행을 하는 심리란 무엇인가? 수용성이 그 제일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수용적인 태도를 취하면,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새로운 장소에 다가가게 된다. 어떤 것이 재미있고 어떤 것이 재미없다는 고정관념은 버리게 된다.
구름과 안개의 곡예사 - 심보선
구름과 안개에 대해서가 아니라면 나는 별 할말이 없다
그 둘을 설파할 때 내 몸은 기분좋은 기괴함에 젖어든다
나는 그것을 하나의 눈부신 곡예로 승화시키고자 했다
어쩌다 등을 뒤로 굽혀 완벽한 원을 만들게 됐냐고 사회자가 물은 적이 있다
싸는 똥을 바로 받아먹고 싶었죠
즉석에서 시범을 보이자 관객들은 박수 치다 말고 토했다
구름과 안개에 골몰하느라 학업과 노동을 작파한 지 오래
내가 펄쩍 뛰었다 착지한 자리엔 음모가 수북이 쌓이곤 한다
내 몸이 점점 구름과 안개로 화하기 때문일까?
어쨌든 내 행방을 찾으려거든 땅 위에 떨어진 털들을 따라오면 되는 것이다
나는 그저 고독한 아크로바트일 뿐
즐거움과 슬픔만이 나의 도덕
사랑과 고백은 절대 금물
이름이 무엇이고 거처가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결단코 침묵이다
간혹 나는 밤거리로 뚜벅뚜벅 걸어나가 진열장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본다
나 자신이 아득한 심연으로 되비치고
등뒤의 어둠과 눈앞의 환함이 서로를 환대할 때까지
나는 일생에 걸쳐 가장 가난한 표정으로 거기 오래 서 있는다
그러고는 오묘한 정취에 젖어 달이 뜬 쪽을 향해 물구나무로 걸어가는 것이다
자정의 밤거리는 언제나 취객과 창녀로 북적거린다
내 둥근 몸을 통과한 달빛에 젖은 자들이여
나를 비웃든 경외하든, 그대들의 삶에 다산과 다복이 넘치기를
또 간혹 나는 구름과 안개를 뚫고 달리고 또 달린다
구름과 안개가 걷히면 심심해져서 곧장 집으로 돌아온다
구름과 안개가 걷힌 거리는
지식 없는 선생이요
표정 없는 얼굴이기에
구름으로 다듬고 안개로 닦아야만 고독은 아름다운 자태를 얻는다고 믿는다
나는 그저 고독한 아크로바트일 뿐
굳이 유파를 들먹이자면
마음의 거리에 자우룩한 구름과 안개의 모양을 탐구하는 '흐린 날씨'파
고독이란 자고로 오직 자신에게만 아름다워 보이는 기괴함이기에
타인들의 칭송과 멸시와 무관심에 연연치 않는다
즐거움과 슬픔만이 나의 도덕
사랑과 고백은 나의 금물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결단코 침묵이다.
유시민, <유럽 도시 기행>
낯선 도시에서 눈썰미와 요령만으로 맛집을 찾는 데 성공하면 세 가지 즐거움을 얻는다. 혀로 맛보는 기쁨, 배로 느끼는 만족감, 그리고 마음이 누리는 뿌듯함이다.
한동일, <라틴어 수업>
호라티우스가 속했던 에피쿠로스 학파는 쾌락주의를 지향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이들이 추구한 쾌락은 세속적이고 육체적이며 일시적인 쾌락이 아니라 정신적인 쾌락, 다시 말해서 충만한 삶과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는 영혼의 평화로운 상태, 동양식으로 표현하자면 안분지족安分知足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호라티우스의 '오늘을 즐겨라'라는 의미도 당장 눈앞의 것만 챙기고 감격적인 즐거움에 의존하여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매 순간 충만한 생의 의미를 느끼면서 살아가라는 경구입니다.
김영하, <말하다>
저는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비관적 현실주의에 두되, 삶의 윤리는 개인주의에 기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과 다르게 생각하는 것, 남이 침범할 수 없는 내면을 구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타인에게 동조될 때, 경계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개인주의를 저는 건강한 개인주의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건강한 개인주의란 타인의 삶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독립적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그 안에서 최대한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라 정의하고 싶습니다. 이때의 즐거움은 소비에 의존하지 않는 즐거움이어야 합니다.물건을 사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이 아니라 뭔가를 행함으로써 얻어지는 즐거움입니다. 즉, 구매가 아니라 경험에서 얻는 즐거움입니다. 새로 나온 사진기를 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카메라로 더 멋진 사진을 찍는 삶입니다. 새로운 스마트폰을 사는 삶이 아니라 휴대폰을 잠시 끄고 글을 쓰는 데서 얻는 즐거움을 말합니다. 소비에 의존하지 않는 즐거움의 대부분은 인류가 오랫동안 쌓아온 유산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것들이 오래 살아남은 데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예술과 관련되었다는 겁니다. 글을 쓰고 노래하고 춤을 추고 연극에 참여하고 그림을 그리는 일, 여기엔 대부분 큰 돈이 들지 않습니다. 성장률이 제로로 수렴하는 저성장 시대가 이미 도래했습니다. 유럽 국가들은 툭하면 0펴센트의 성장 혹은 마이너스 성장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미국도 이민자들이 아니었다면 벌써 그런 일을 겪었을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많이 벌고 많이 쓰고 많이 저장하는 삶은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습니다. 이런 비관적 인식하에 지금 여기에서 어떤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까를 개인적으로, 독자적으로, 개별적으로, 현실적으로 고민해야 합니다.
임영익, <메타생각>
'창의성은 낯선 것에 대한 즐거움' - 어니 젤린스키
E. F. 슈마허, <자발적 가난>
항상 미래에 닥쳐올 불행을 염려하는 것이 정말로 현명한 것일까? 미래에 닥쳐올지도 모르는 재앙을 고민하느라고 현재의 즐거움을 모조리 잃어버리는 것이 과연 신중한 것일까? - 버트런드 러셀
야노 가즈오, <데이터의 보이지 않는 손>
'최적 경혐=몰입'에 빠지면 사람은 즐거움과 충족감을 느낀다. 반대로 관심의 대상이 자꾸 변해 하나에 집중할 수 없을 때에는 정신적인 에너지를 낭비한 듯 느끼고 즐거움과 충족감을 얻기 힘들다.
혜민 스님, <고요할수록 밝아지는 것들>
지성이 깨어날 때의 기쁨은 세상을 얻은 것같이 마음 부자가 된 느낌이고, 영성이 깨어날 때 즐거움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내 고향으로 돌아온 느낌입니다. 지성이 깨어나면 내 안에 가치 기준이 생겨 더 이상 남들 기준에 휘둘리지 않게 되며, 영성이 깨어나면 내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아 두 번 다시 현혹하지 않습니다.
김형석, <백년을 살아보니>
가장 불행한 사람은 아무 일도 없이 세월을 보낸 사람이었다.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가족들과 더불어 세월을 보내고 옛날 친구들과 때때로 만나는 사람들이었다. 반면, 새로운 행복을 찾아 누린 사람은 세 가지로 나타났다. 공부를 시작한 사람, 취미활동을 계속한 사람, 봉사활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이었다. 노후에는 일이 없는 사람이 가장 불행하다. 그 일을 미리부터 준비해두자는 생각이다. 노후를 위해 경제적 준비를 하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일을 준비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그래서 세 가지 즐거움 중의 하나는 선택해두는 것이 필요하다.
데이비드 색스, <아날로그의 반격>
페이스북 사무실에 걸린 "빠르게 움직이고 틀을 파괴하라"는 말처럼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 그런데 잠시 속도를 늦추고 파괴된 것을 고쳐볼 수는 없을까? 디지털 라이프가 영구적인 현실이 되어버린 전 세계의 모든 지역에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아날로그를 선택하고 있다. 기본 설정이 되어버린 디지털 기술에 비해 아날로그는 경제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비용이 훨씬 큰데도 불구하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아날로그를 찾고 있다. 왜일까? 즐거움이 한 가지 이유다. 아날로그는 물리적인 사물과 경험이 사라져가는 영역에서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실재적 물건을 창조하고 소유하는 기쁨을 준다. 그것은 사진관에서 필름을 찾아오는 즐거움일 수도 있고, 옛 친구들과 새로운 보드게임을 하는 즐거움일 수도 있고, 일요판 종이 신문이 내는 듣기 좋은 소리일 수도 있고, 내 생각이 펜으로 종이 위에 구현되는 모습을 보면서 느끼는 즉각적인 보상일 수도 있다. 그런 즐거움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두가 값을 매기기 힘든 경험이다. 또 다른 이유는 이윤이다. <아날로그의 반격>이 설명하는 포스트디지털 경제에는 모든 과정을 가능하게 하는 투자자와 소매상, 그리고 기업가가 필요하다. 작은 레코드점을 개장하든 거대한 시계 공장을 시작하든 아날로그에서는 수익이 생긴다. 언론은 실리콘밸리의 성공에 흥분하지만 사실 우리 경제의 절대적인 부분은 아날로그다. 아날로그 경제는 작은 지역에 집중된 디지털 자본에 비해 사회에 광범위하게 이득이 된다. 비즈니스 세계가 점점 더 디지털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아날로그 기술을 새롭고 참신하게 활용하는 기업이나 개인이 더욱더 돋보이고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인간의 역할은 더욱 값어치가 올라갈 것이고 아날로그 도구나 활동(가령 화이트보드나 오프라인 매장처럼 디지털 경험을 현실 세계에 옮겨놓는 것)은 선두 기업과 나머지 기업들을 갈라놓을 것이다. 아날로그는 생산성의 도구일 뿐만 아니라 때로는 최고의 생산성을 가진 도구이기 때문이다.
이반 일리치,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자급자족이 이루어지는 사회에서만 사람이 품위를 지닐 수 있다는 사실, 또 산업화로 나아갈수록 고통을 겪는다는 사실은 아주 명백한 것입니다. 이 오두막은 사회와 조화를 이룰 때 얻는 즐거움을 담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자급자족이 으뜸입니다. 불필요한 물품과 재화를 소유할수록 행복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그만큼 줄어든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해해야 합니다.
최인철, <굿라이프>
심리학자 이선 맥머핸(Ethan McMahan)에 따르면 사람들은 행복의 본질을 다음 네 가지 차원에서 파악한다. 1) 즐거움을 경험하는 것, 2) 부정적인 경험을 하지 않는 것, 3) 타인의 웰빙에 기여하는 것, 4) 자신이 성장하는 것
정재승, <열두 발자국>
과거의 방식으로만 문제를 해결하면 빠르고 효율적이고 안정적으로 예측 가능한 수준의 결과는 얻겠지만, 새로운 시도가 주는 큰 즐거움과 뜻밖의 수확은 얻을 수 없습니다. 삶에서 80~90퍼센트 정도는 기존 방법을 적용하더라도, 10~20퍼센트 정도는 방법 탐색의 전략으로 살아보시길 바랍니다.
목적지를 향해 정해진 삶의 코스를 완주하는 게 목표인 마라토너라면 페이스 조절만 잘하면 안전한 삶의 궤적을 그릴 수 있겠지요. 그러나 새로운 경험이 주는 아슬아슬한 즐거움과 열매의 풍성함을 만끽하고 싶다면, 위험을 감수하는 탐험가의 기질이 필요합니다. 정답은 없습니다. 내 삶의 철학이 무엇인가에 따라 그 질주의 방향이 달라질 것입니다.
미치오 카쿠, <미래의 물리학>
예술의 목적은 정신적 즐거움을 공유하는 것이지만, 두뇌의 발달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상징화된 정보를 해독하는 것이 두뇌의 주요기능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유전자가 크게 변하지 않는 한, 유흥산업과 연예잡지, 그리고 소셜네트워크는 앞으로도 결코 줄어들지 않고 꾸준히 팽창할 것이다.
소노 아야코, <약간의 거리를 두다>
역경 속에도 즐거움이 숨어 있고, 이를 재미있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경마저 평범한 일상 중 하나로 여겨야 한다. 조심스럽다기보다는 소심한 성격에 가까운 사람들은 평온한 일상을 유지하는 데 재능을 보인다. 하지만 그 이상의 세계는 얻지 못한다. 그래서 이들은 재미가 없다. 남들에게 들려줄 만한 실패나, 쉽게 경험하기 힘든 체험이 없어서다. 유난히 재미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경제적으로, 또한 시간적으로 고생과 위험 부담을 즐겁게 감당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인생처럼 정직한 것은 없다. 인생의 재미는 이를 위해 지불한 희생과 위험에 정확히 비례한다. 모험을 택하지 않고서는 사는 재미도 보장받을 수 없다.
코에코 류노스케, <생각 버리기 연습>
쾌락이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다. 뇌가 고통이 줄어드는 것을 그만큼 즐거움이 늘어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일절개고(一切皆苦)'라는 진리이다. 이 진리에 따르면, 한 번 쾌락을 맛본 뒤에는 '좀 더 좀 더' 하고 보다 큰 즐거움을 찾으며, 그 재료가 되는 괴로움을 더욱 구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분노에 대해 누군가 동의해 주면, 이때에도 만의 욕망이 생겨 자아가 자극되고 중독된다. 혹은 누군가 반론을 제기해도 괴로워하고 또 다른 분노를 느끼면서, 그것에 자극을 받아 중독된다.
이덕무, <문장의 온도>
중국 위나라 사람 동우는 <삼여지설>에서 '밤'과 '비 오는 날'과 '겨울철', 이 세 가지 여분의 시간이야말로 마음을 하나로 집중해 독서할 수 있는 좋은 때라고 말했다. 맑은 날 밤 고요하게 앉아 등불을 켜고 차를 달이면은 세상이 쥐 죽은 듯 조용하고 간혹 종소리만 들려온다. 이 때 이 아름답고 고요한 정경에 빠져 책을 읽으며 피로를 잊는다. 이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다. 비바람이 몰아쳐 길을 막으면 문을 잠그고 방을 깨끗하게 청소한다. 사람의 발길이 끊어지고 책만 앞에 가득히 쌓여 있다. 이처럼 그윽한 고요함이 두 번째 즐거움이다. 낙엽이 떨어진 나무숲에 한 해가 저물고 싸락눈이 내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깊게 눈이 쌓여 있다. 바람이 마른 나뭇가지를 흔들며 지나가고, 겨울새가 들녘에서 울음 운다. 방 안에 난로를 끼고 앉아 있노라면 차 향기에 달콤한 술이 익어 간다. 이러한 때 시와 글을 모아서 엮고 있으면 좋은 친구를 대하는 것처럼 마냥 즐겁다. 이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 허균이 옛사람들의 글을 모아 엮은 <한정록> <정업>편에 나오는 말이다.
법륜 스님, <인생수업>
보통 사람들은 주로 재미만 갖고 인생의 즐거움을 삼습니다. 그러면 반드시 뒤에 후회나 허전함, 공허감 같은 것이 생기게 됩니다. 한편 또 너무 삶의 의미 같은 것만 찾으면 현재의 삶이 힘들어지고, 스트레스도 많아져 지치기 쉽습니다. 이 두 가지가 적절하게 어우러지면 가장 좋은데, 바로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 곧 자기 일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가장 조화로운 상태가 되는데, 우리는 보통 이 둘이 분리된 삶을 삽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인생수업>
우리는 삶을 누리고 놀이를 하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그것도 일평생 동안. 흔히들 잘못 생각하고 있지만, 놀이는 아이들만의 소일거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생명 가진 존재의 생명력입니다. 놀이는 마음을 젊게 하고, 일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며, 인간관계를 잘 맺게 해줍니다. 또한 젊음을 되돌려 줍니다. 놀이는 삶을 가장 충만하게 사는 방법입니다. 놀이는 순수한 즐거움을 얻기 위해 하는 행위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놀이는 모든 한계를 초월해 즐거움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놀이는 내면의 기쁨이 바깥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웃음, 노래, 춤, 수영, 등산, 요리, 달리기, 게임 등 즐거움을 주는 것이면 무엇이든 놀이가 될 수 있습니다.
일과 놀이가 완전히 별개의 활동일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이 하는 일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은 하루를 살아가고 평생을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는 목표지향적이 되기 쉽습니다. 그리고 그 목표를 이루지 못할 때 불행해집니다. 일에서 즐거움을 찾는 동시에, 즐거움으로부터 일을 떼어 놓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카트린 지타, <내가 혼자 여행하는 이유>
세계적인 동화 작가 안데르센은 “나에게 여행은 정신의 젊음을 되돌려 주는 샘물이다”라고 말했다. 여행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는 즐거움과 도전 정신을 회복하게 되면 자연스레 우리의 생각도 ‘젊음’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혜민 스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스펙을 쌓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스펙을 쌓는 것이 아니라 / 하나하나 배우는 과정이 즐거워서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우다 보니 / 스펙이 하나둘씩 쌓이도록 하세요. / 과정의 즐거움이 빠지고 결과만 얻으려 하면 / 그게 바로 고통입니다. / 과정을 즐기십시오.
E. F. 슈마허, <굿워크>
인간을 기계나 시스템의 노예로 전락시키는 지겹고, 무의미하며, 신경만 괴롭히는 멍청한 일을 젊은이들이 거부하도록 독려해야 합니다. 노동이란 삶의 즐거움이자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하다는 것뿐만 아니라 무의미한 노동은 혐오스러운 것이라는 점도 젊은이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로제 폴 드루아, <걷기, 철학자의 생각법>
이런 방법론의 요구에 또 다른 철학자들은 생각의 나라에서 목표 없이, 때로는 나침반도 없이 걷는 방식들을 맞세웠다. 오직 산책의 즐거움만을 안내자로 삼고 아무것도 예측하지 않고 나아가는 방식이다. 이런 산책은 규칙도 정해진 목적지도 없이 거니는 것이다. 이 산책은 논증처럼 진행되지 않는다. 그것은 지식을 증대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을 강화한다.
김위찬, <블루오션 시프트>
구매자들은 간편하고, 사용하기 쉽고, 즐거움과 원하는 바를 주기 때문에 이를 좋아한다. 즉 구매자들은 기술이 고객가치의 획기적 향상에 본질적으로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제품과 서비스에 열광한다.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문학은 엄숙하고 진지하기만 하기보다는 '가벼움'과 '무거움'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은 희로애락이 교차하는 것이니, 삶의 활력과 즐거움도 문학의 중요한 주제가 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알랭 드 보통, <행복의 건축>
우리는 질서와 복잡성의 병치에서 생기는 즐거움 밑에서 이와 관련된 건축학적 미덕인 균형을 확인할 수 있다. 낡은 것과 새로운 것, 자연스러운 것과 인공적인 것, 사치스러운 것과 수수한 것,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을 포함한 여러 대립들을 건축가들이 능숙하게 중재할 때마다 아름다움은 피어나는 것 같다.
양재우, <불황을 이기는 월급의 경제학>
일상을 소중히 여겨 기쁨과 즐거움의 감정을 마음껏 표출하고, 기회가 닿을 때마다 도전하여 새로운 경험을 많이 쌓아야 할 것이며, 소중한 시간을 아껴 알차고 의미 있게 활용하여 나란 존재 혹은 내가 만들어 놓은 무언가를 이 세상에 남길 수 있어야 한다.
유시민, <어떻게 살 것인가>
하루의 삶은 하루만큼의 죽음이다. 어떻게 생각하든 이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새날이 밝으면 한 걸음 더 죽음에 다가선다. 그런데도 우리는 때로 그 무엇엔가 가슴 설레어 잠들지 못한 채 새벽이 쉬이 밝지 않음을 한탄한다. 결코 영원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누군가에게 영원한 사랑과 충성을 서약한다. 죽음을 원해서가 아니다. 의미 있는 삶을 원해서다. 인생은 그런 것이다. 하루가 모여 인생이 된다. 인생 전체가 의미 있으려면 살아 있는 모든 순간들이 기쁨과 즐거움, 보람과 황홀감으로 충만해야 한다. 그런데도 때로 그것을 잊는다. 오늘의 삶을 누군가를 향한 미움과 원한으로 채운다. 가진 돈이 많은데도 더 많은 돈을 얻으려고 발버둥치면서 얼마 남지 않은 삶의 시간을 탕진한다. 이미 높은 곳에 있으면서도 더 높은 곳으로 오르기 위해 오늘 누릴 수 있는 행복을 내일로 미루어둔다. 그 모든 것이 나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묻지 않는다. 그리하여 운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때쯤에야 비로소, 자신이 의미없는 인생을 살았음을 허무하게 깨닫는다. 그러나 한 번 할아버린 인생은 되돌릴 수 없으며, 놓쳐버린 사람이 환희는 되찾을 수 없다.
이기주, <언어의 온도>
'프로'는 프로페셔녈professional(전문가)의 준말로, 그 어원적 뿌리는 '선언하는 고백'이란 뜻의 라틴어 프로페시오professio에서 발견할 수 있다. 남들 앞에서 "난 전문가입니다"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할 수 있어야, 그리고 그에 따른 실력과 책임감을 겸비해야 비로소 프로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우리가 "프로"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하기 싫은 일도 끝까지 해내는 경향이 있다. 그냥 끝까지 하는 게 아니다. 하기 싫은 업무를 맡아도 겉으로는 하기 싫은 티를 잘 내지 않으면서 유연하게 마무리한다. 왜? 프로니까. 이와 달리 '아마추어'는 라틴어 아마토르amator에서 유래했다. '애호가' '좋아서 하는 사람'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데 말 그대로 취미 삼아 소일거리고 임하는 사람을 뜻한다. 아마추어는 어떤 일이나 과정에서 재미와 즐거움 같은 요소가 사라지면 더는 하지 않는다. 아마추어의 입장에선 재미가 없으면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새삼 이런 생각도 든다. 어쩌면 프로와 아마추어를 판가름하는 기준은 기술이 아니라 태도인지 모른다고. ... 살다보면 프로처럼 임해야 하는 순간이 있고 아마추어처럼 즐기면 그만인 때도 있다. 프로가 되는 것보다, 프로처럼 달려들지 아마추어처럼 즐길지를 구분하는 게 먼저가 아닐까 싶다. 프로가 되는 노력은 그 다음 단계에서 해도 된다. 이건 꽤 중요한 이야기다. 프로처럼 처리해야 하는 일을 아마추어처럼 하면 욕을 먹기 쉽고, 아마추어처럼 즐겨야 하는 일에 프로처럼 목숨을 걸다가는 정말 목숨을 잃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에 내몰릴 수도 있으니 말이다.
유시민, <청춘의 독서>
다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읽으면서, 그런 엄청난 세상의 변화를 다 견디고 내 마음에 남는 것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결국 남은 것은 사람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아무리 혹독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존엄을 지켜내는 사람, 땀 흘려 일하는 사람. 때로 보상받지 못하는 노동이라 할지라도 인간에게 유용한 것을 만드는 일에 즐거움을 느끼면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 그런 사람의 모습에서 얻는 감명이 긴 세월을 견디고 내 마음에 그대로 남아있음을 나는 이번에 알게 되었다.
시어도어 젤딘, <인생의 발견>
인류는 점차 특권에 의해서만 분류되는 것이 아니라, 기질적으로도 규칙적이고 질서정연한 삶을 인정하고 사회가 정해준 생활에 기꺼이 적응해서 스스로 결정하지 않아도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과, 자기가 하는 일과 그 일을 언제 할지를 통제해서 모든 활동을 자기 나름의 속도로 수행하고 예상 밖의 사건과 다양성, 놀라움과 즉흥성에서 큰 즐거움을 얻는 사람들로 나뉜다. 이로써 사람들이 원하는 미래상도 크게 달라진다.
버트런드 러셀, <행복의 정복>
일은 권태를 몰아낸다. 요긴하고 재미있는 일을 할 때 느끼는 권태는 할 일이 전혀 없을 때 느끼는 권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일에는 하나의 공덕이 따른다. 일이 있음으로 해서 후일이 즐거운 것이다. 건강을 해칠 정도의 어려운 일을 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자유로운 시간에 게으른 사람보다 훨씬 많은 즐거움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사이토 다카시, <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힘>
왜 사람들은 부나비처럼 도시로 모여들까요? 거기에는 화폐 문제가 큰 역할을 합니다. 또한 그 밖에는 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서 만들어지는 화려함과 즐거움, 다양성, 그리고 그런 환경에서 생겨나는 유행에 대한 강한 욕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로 발 디딜 틈도 없이 분비는 테마파크에 가면 '줄 서지 않고 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실제로 텅 빈 테마파크에 가면 반갑기는커녕 오히려 외롭다는 느낌을 갖기 쉽습니다.
류시화,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때로는 우회로가 지름길이다. 삶이 우리를 우회로로 데려가고, 그 우회로가 뜻밖의 선물과 예상하지 못한 만남을 안겨 준다. 먼길을 돌아 '곧바로' 목적지로 가는 것, 그것이 여행의 신비이고 삶의 이야기이다. 방황하지 않고 직선으로 가는 길은 과정의 즐거움과 이야기를 놓친다.
가오싱젠, <창작에 관하여>
관찰의 태도를 유지하면서 심미를 획득할 때 새로운 발견과 깨달음, 즐거움이 가능해집니다. 이러한 열매는 작가가 현실적 공리를 뛰어넘을 때 얻을 수 있는 보상입니다. 그렇지 않고 현실적 이익이나 효과에 얽매이게 되면 작가는 창작에 필요한 열정과 관찰자적 냉정함을 유지하기 어려워집니다.
마이크 비킹, <휘게 라이프>
휘게는 삶의 단순한 즐거움을 누리는 것.
버트런드 러셀, <게으름에 대한 찬양>
아이들에게만 놀이가 필요한 게 아니다. 어른에게도 현재의 즐거움 이외엔 아무 목적도 없는 행위에 빠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놀이가 제 구실을 다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일과 관계 없는 부분에서도 기쁨과 흥미를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린위탕(임어당), <생활의 즐거움>
결국 인생의 지혜란, 불필요한 것의 제거와 여러가지 철학문제를 몇 개의 것 - 가정의 즐거움(남편과 아내와 자식과의 관계), 살아가는 즐거움, 자연의 즐거움, 인류문화에 접촉하는 즐거움 - 으로 감소시키는 것과 다른 모든 적절치 않은 과학적 훈련이나 무익한 지식 추구 따위를 몰아내 버리는 것이다.
한적한 생활을 즐기는 데에 돈은 필요없다. 전혀 필요없다. 한적한 생활의 참된 즐거움은 부유 계급의 독점물이 아니다. 그것은 부귀를 가장 냉소하는 사람들에게만 찾아볼 수 있는 즐거움이다. 이것은 소박한 생활을 사랑하고, 돈 버는 일에 얼마나 싫증난 사람들의 마음의 함축에서 오는 것이어야만 한다. 생활을 즐기려고 결심한 사람에게는 즐길 수 있는 생활이 언제 어디서든지 발견된다. 만일 이 지상의 생활을 즐길 수 없다면 그것은 인생을 충분히 사랑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며, 평범한 그날그날의 생계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윌리엄 파워스, <속도에서 깊이로>
스크린은 개인과 기업을 비롯한 다양한 조직에 필요한 업무를 손쉽게 해결해주었다. 편리함과 즐거움을 제공할 뿐 아니라 세상을 한 걸음 더 가깝게 만들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스크린을 통한 네트워크가 촘촘해질수록 우리의 일상은 정신없이 바빠졌다. 그로 인해 우리는 매우 중요한 것을 잃고 말았다. 바로 시간을 두고 천천히 느끼고 생각하는 방법이다. 우리는 이를 두고 '깊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 사고와 감정의 깊이, 인간관계의 깊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깊이가 사라지고 있다. 충만하고 의미 있는 삶의 핵심인 깊이가 사라져간다는 것은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전규태, <단테처럼 여행하기>
여행이란, 여행자에게 있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경험이다. 자기 안의 '고독한 인간'을 만나는 즐거움이다. 스스로의 인생뿐 아니라 인류의 오랜 역사를 새삼스럽게 발견하는 놀라운 체험이다.
문요한, <여행하는 인간>
여행에서 느끼는 자유로움과 즐거움은 불확실성과 즉흥성에 기초한다. ... 여행은 불확싱설으로부터 끊임없이 도망치려는 우리에게 불확실성과 친구를 맺을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진짜 여행이 시작되는 것처럼 잘 닦여진 길에서 벗어나 자신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용기를 준다. 때로는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사람들이 별로 가지 않는 길이라 불편하고 두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불편과 두려움은 자신의 길을 걸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감내해야 할 조건이다.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이들은 명확한 방향을 정하고 확신에 차 걷는 사람이 아니다. 불확실성과 모호함을 견뎌낼 줄 알는 사람들이다. 다만 자신이 걷는 길 자체를 사랑하고 자신이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 자신의 시도 하나하나가 모여 곧 길이 된다는 믿음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여행은 결국 삶으로의 여행이다.
사사키 후미오,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
자기 혼자만의 즐거움을 위해 물건을 갖기보다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애쓰는 편이 훨씬 더 인생을 풍요롭게 한다. - 간디
스티븐 그린블랫, <1417년, 근대의 탄생>
루크레티우스는 인류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은 죽음을 극복하고 우리 자신도 살면서 마주치는 모든 것들도 덧없는 것임을 인정하면서 세상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라고 썼다.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행복이란 불쾌한 순간을 상쇄하고 남는 여분의 즐거움의 총합이 아니라, 그보다는 개인의 삶을 총체적으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으로 바라보는 데서 오는 것이다. 행복에는 중요한 인지적, 윤리적 요소가 존재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아기 독재자의 비참한 노예'로 볼 수도 있고, '사랑을 다해 새 생명을 키우고 있는 사람'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그 큰 차이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가치체계다. 니체가 표현한 대로, 만일 당신에게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면 당신은 어떤 일이든 견뎌낼 수 있다. 의미 있는 삶은 한창 고난을 겪는 와중이더라도 지극히 행복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의미 없는 삶은 아무리 안락할지라도 끔찍한 시련이다.
래리 킬리 외 3명, <비즈니스 모델의 혁신>
고객참여 혁신은 종종 다른 종류의 혁신(특히 브랜드 혁신이나 서비스 혁신)과 함께 수행되어서 발견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고객과 상호작용하는 부분에 집중하라. 고객과 어떻게 관게를 맺고 고객에게 어떻게 즐거움을 줄 수 있을지에 대해 집중한다면 고객참여 혁신을 이룰 수 있다.
해적처럼 생각하라. 해적처럼 생각하는 것이 모든 혁신 계획에 도움이 될 수 있다. 흔들림 없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며, 헌신적으로, 그리고 인습에 얽매이지 않게 혁신하라. 아마 우리보다 더 강한 경쟁자를 물리치기를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만약 정해진 규칙이 있다면 그 규칙에 얽매이지 마라. 오히려 틀에 박힌 규칙에서 벗어남으로써 즐거움을 얻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혁신가가 지녀야 할 자질이다. 해적선을 만드는 것처럼 혁신 계획을 세워라. 남들이 알아차리지 못하고, 조종하기 쉽고, 번개처럼 빠른 무서운 해적선을 만들어라. 배를 출항할 때는 늦은 밤, 경쟁자가 지키고 있는 항구로 곧장 가라. 동이 트기 전까지 가장 효과적으로 적의 진영을 파괴할 수 있는 순간을 계획하고 맹렬한 전쟁을 벌여라. 필요한 전술이나 스킬은 무엇이든 사용하고, 타협하지 마라.
박웅현, <다시, 책은 도끼다>
늘 거기 있는 것을 주목해 보아 또하나 삶의 즐거움을 만드는 것. 그것이 나이 들어가는 것이더라. 잘 익어가자.
레프 톨스토이,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부와 사치에만 익숙해지면 소박한 삶을 잊게 되고 내면적인 즐거움과 평화, 자유를 잃어버리고 만다.
시간이 흘러간다고들 말하지만 움직이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우리다. 인생은 너무 짧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충분한 즐거움을 안겨주지도 못할 만큼 짧다. 그러니 어서 서둘러 친절한 행동을 하라. ... 인생은 공간이나 시간으로 측정할 수 없다. 그것은 공간과 시간 바깥에, 영혼 속에 존재한다.
친절은 세상을 아름답게 한다. 모든 비난을 해결한다. 얽힌 것을 풀어헤치고, 곤란한 일을 수월하게 하고, 암담한 것을 즐거움으로 바꾼다.
즐거움을 추구하지 말라. 대신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서 즐거움을 찾으라.
테미 스트로벨, <행복의 가격>
소박한 삶을 살면 자신만의 생활방식을 창조할 수 있다.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며 살아갈 돈과 시간과 자유가 있는 생활을. 일의 즐거움을 되찾는다는 것은 곧 현명하게 일하고, 자기에게 맞는 일정을 세울 자유를 누리고, 일을 놀이처럼 대하는 법을 배우고, 변화 속에서 기회를 찾는다는 뜻이다.
기존의 작은 즐거움들을 목록으로 만들어라.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사소한 일들에는 무엇이 있는가? 얼마나 자주 그 일을 하는가? 그것을 생활 속에 더 깊이 스며들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작은 즐거움에 초점을 맞추고 그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작은 즐거움을 찾는 계획을 세우는 것이 좋다. 날마다 예기치 못했던 뜻밖의 즐거움들을 목록에 정리하는 건 더 좋다.
전영우, <비우고 채우는 즐거움, 절집 숲>
인적 드문 깊은 산속에서 찬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세상을 관조하는 탁족은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도락이 아니다. 자연을 즐기고, 자연의 가치를 아는 이들만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다. 흐르는 물속에 발을 담근 시간에 비례해 몸이 상쾌해지고, 기분이 깨끗해지는 쇄락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순간 도시의 온갖 욕망과 스트레스는 사라지고, 마음의 평화와 고요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프레데릭엠 허드슨 박사는 "노화는 육체는 쇠락해도 정신은 성장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던가. 나이듦을 두려워하고 거부하기보다 자연에서 찾는 작은 즐거움에도 늘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긍정의 힘이 정신을 성장시킨다는 것을 새삼 확인했던 걸음이었다.
이권우, <여행자의 서재>
여행의 즐거움의 반은 길 잃음의 미학이다. - 레이 브래드버리
리 호이나키, <정의의 길로비틀거리며 가다>
사람은 자기 장소가 주는 작은 즐거움들을 느끼는 그만큼, 그는 강하며, 반면에 꼭 돈이 들어야 누릴 수 있는 즐거움들이 필요한 그만큼, 그는 약하다. - 웬델 베리
베르나르 올리비에, <나는 걷는다>
실크로드에 대한 역사적 관심과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걷는 즐거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신비로움.
최지원, <유학자의 동물원>
생에 알맞은 것은 좋아하고 생에 알맞지 않은 것은 미워하니, 감정으로 드러나는 것에 이름을 준 것이 비록 일곱 가지가 있으나, 기실은 호오뿐이다. 칠정이란 희(喜), 노(怒), 애(哀), 락(樂), 애(愛), 오(惡), 욕(欲)이다. 감정의 발현에 어찌 이같이 실마리가 많겠는가. 진실로 그 실(實)을 추구해 보면 대개 호오가 있을 뿐이지만, 그 호오의 깊고 얕은 정도가 모두 같지 않으므로 여러 가지 이름이 있게 된 것이다. 절박하게 싫어하는 것이 슬픔이 되고 성하고 격렬하게 싫어하는 것이 노여움이 되며, 좋아하는 것이 나타나면 기쁨이 생기고 좋아하는 것이 두드러지면 즐거움이며, 좋아하는 마음이 대상에 결부되면 사랑이고, 싫어하는 것을 회피하고 좋아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욕(欲)이 되는 것이다. - 최한기, <추측록> 제3권, <추정측성>, 칠정(七情)은 호오(好惡)에서 나온다.
무라카미 하루키, <이렇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
생활 속에서 개인적인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찾기 위해서는 크든 작든 철저한 자기 규제 같은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꾹 참고 격렬하게 운동을 한 뒤에 마시는 시원한 맥주 같은 것이다. "그래, 바로 이 맛이아!" 하고 혼자 눈을 감고 자기도 모르는 새 중얼거리는 것 같은 즐거움, 그건 누가 뭐래도 '작지만 확실한 행복'의 참된 맛이다. 그리고 그러한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없는 인생은 메마른 사막에 지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스티브 도나휴, <사막을 건너는 여섯가지 방법>
지나친 자의식 때문에 춤추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누구도 어리숙해 보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림 수업, 시 쓰기, 외국어 배우기, 노래 배우기... 자아에서 공기를 조금만 빼면 수많은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다.
강신주, <철학의 즐거움>
우선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모든 놀이가 자발적인 행위라는 점이다. 명령에 의한 놀이는 이미 놀이가 아니다. 기껏해야 놀이의 억지 흉내일 뿐이다. 자유라는 본질에 의해서만 놀이는 자연의 진행과정과 구분된다. .... 어른이나 책임이 있는 인간들에게 놀이는 도외시해도 무관한 기능이다. 놀이는 여분의 것이기 때문이다. 놀이에 대한 욕구는 즐거움이 놀이하기를 원하는 한에서만 절실해진다. 놀이는 언제고 연기될 수도 있고 중지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놀이는 물리적 필요가 도덕적 의무로 부과되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놀이는 임무가 전혀 아니다. - 호모 루덴스, 하위징아
자신의 일에서 놀이가 가진 즐거움과 창조성을 되찾으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 아이 때 경험했던 놀이의 즐거움을 되찾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행복한 삶은 그만큼 멀어질 수밖에 없다.
정지훈, <무엇이 세상을 바꿀 것인가?>
우리는 이제 생산에 투입되는 부분에 대해서만 가치의 방점을 찍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자연스럽게 나눔의 문화가 확산되고 즐거움과 행복, 그리고 사람들의 만남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사회적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분배방식에 대한 근원적인 고민이 필요한 시기다.
이외수, <글쓰기의 공중부양>
아이들은 가식도 없고 욕심도 없다. 잘 그린다는 기준도 없고 못 그린다는 기준도 없다. 단지 자기의 생각이나 마음을 그대로 표현하는 즐거움에 심취한다. 아이들의 그림을 보면 어떤 대가도 따라갈 수 없는 경지에 도달해 있다. 아이들의 그림에는 기술 이상의 진실이 담겨 있다. 그래서 보는 사람에게 특별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대가들도 나이가 들면 아이들의 그림을 닮아간다.
아잔 브라흐마, <술취한 코끼리 길들이기>
세상의 종교들이 가장 큰 어리석음으로 꼽는 망상은 '삶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착각'이다. 모두는 이 즐거운 망상 속에서 존재의 이유를 찾고 있다. 세속적인 삶의 목적은 기쁨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 그리고 부의 축적뿐이다. 죽음의 관점에서 보면 삶에서 우리가 행하는 이 모든 행위들은 두말할 나위 없이 바보 같은 짓이다. 감각기관을 즐겁게 하는 것, 관계를 갖는 것, 결혼하는 것, 집을 소유하는 것, 부를 축적하고 자동차를 사는 것, 다양한 즐거운 경험을 쌓는 일들이 죽음에 직면해서 무슨 의미를 갖겠는가?
류콴홍, <철학우화>
생활 속에서 고통을 즐거움으로 바꿀 줄 아는 생활의 강자는 사람들의 존경을 받습니다. "고통을 즐거움으로 바꾸라." - 베토벤
리칭즈, <여행의 속도>
그 지역을 이해하는 가장 확실한 도구는 자신의 두 다리뿐이다. 발자국을 남겨야 비로소 그곳을 제대로 알 수 있다. 길을 잃고 헤매기도 하겠지만, 그것이 여행의 시작이기도 하다. '길을 잃는' 즐거움을 알아야만 진짜 여행이 시작된다.
조정래, <정글만리>
인생이 뭐고, 사는 게 뭡니까. 인생이란 추억 만들기고, 사는 건 때때로 무슨 계기 찾아가며 즐거움을 만들어가는 것 아니던가요?
박웅현, <여덟단어>
萬物 皆備於我矣 反身而誠 樂莫大焉(만물 개비어아의 반신이성 낙막대언) - 맹자
만물의 이치가 모두 나에게 갖추어져 있으니, 나를 돌아보고 지금 하는 일에 성의를 다하면 그 즐거움이 더없이 클 것이다.
도정일,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돈은 인간 생활에 중요하다. 그러나 돈 그 자체가 삶의 목적인 것은 아니다. 쾌락 역시 인간의 삶에서 제외도리 수 없으나 쾌락 추구만을 목적으로 하는 삶은 위험하고 허망하다. 삶의 목적은 '아름다운 삶'의 영위에 있다. 이해관계와 수지 타산을 떠날 줄 아는 삶, 용도와 유용성을 초월할 줄 아는 삶, 어떤 것을 '소유하기'나 '소유하는 자'를 벗어나 존재 그 자체를 중히 여기는 삶이 아름다운 삶이다. 아름다운 삶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쾌락pleasure이 아니라 즐거운joy이다. 쾌락이 자주 존재의 타락을 강요한다면 즐거움은 존재의 확장을 경험하게 한다. 존재 확장의 경험이 기쁨이라는 것이다.
즐거움과 기쁨을 위한 투자, 그것이 곧 아름다움에 대한 투자이다. 이 투자가 있을 때에만 인간은 즐거움과 기쁨이 있는 삶을 누릴 수 있다. 그 삶을 지향하는 것이 바로 '삶의 질' 높이기이다. 삶의 질은 향랑의 수준에 있지 않고 아름다움의 수준에 있다. "정의가 없다면 인간은 수치다"라고 프란츠 카프카는 말했지만, 마찬가지로 아름다우이 없다면 인간존재는 수치일 것이다.
제도와 시스템, 그리고 세분화와 전문화를 통한 역할 분담이 편리하고 풍요로운 삶을 도와주는 것 같지만 인간의 능력을 제한하고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경계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박노해 시인의 "돈으로 살 수 있는 능력보다 스스로 할 수 있는 능력"이란 표현이 생각납니다.
[본문 발췌]
우리는 살아가면서 모으는 갖가지 가구나 물건이 결코 내면의 힘을 키워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 편의를 더 많이 가질수록 거기에 더 많이 의존하게 되고 삶이 그만큼 더 제약을 받습니다.
불필요한 물품과 재화를 소유할수록 행복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그만큼 줄어든다.
엔트로피가 에너지의 퇴화와 연계됐듯 부정가치는 가치의 퇴화와 연계될 수 있습니다. 엔트로피는 더 이상 물리적인 '일'로 전환될 수 없는 형태로 탈바꿈한 에너지를 나타내는 척도입니다. '부정가치'는 공용과 문화가 폐기된 결과 전통적 노동이 자급 능력을 상실하는 상황을 나타내는 용어입니다.
돈의 흐름이 증가하면서 사회는 더욱 해체되고 있는데도 더 많은 사람의 기본적 필요를 충족하려면 근본적으로 돈을 점점 더 늘려야 한다는 제안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엔트로피는 이렇게 널리 퍼진 돈의 흐름에 따르는 사회 해체를 표현할 수 있는 솔깃한 유비로 보였습니다.
임금 노동을 보완하는 그림자 노동, 임금 노동과 그림자 노동에 대항하여 경쟁하는 자급 노동
고도의 상품 환경에서는 상품이 결정하는 필요에 적절히 반응한다 해도 더 이상 그 사람의 만족을 함축하지는 않습니다. 사람은 영영 뭔가가 '필요한' 상태로 이해됩니다. 필요가 무제한이 되면서 사람은 갈수록 더 궁핍해집니다. 역설적이게도, 필요의 만족을 위한다는 상품을 만드는 데에 시간과 자원을 소비할수록 사람의 욕망은 더 얕아지고 그것이 충족되는 구체적 형식에 더 무관심해집니다. 사람이 갈수록 더 궁핍해지고 가르치기 쉬워지고 욕구불만 상태로 넘어가는 문턱은 아주 낮습니다.
병원은 치료하는 것보다 더 많은 병을 만들어낸다. 학교는 학생들에게서 스스로 배울 능력을 빼앗고, 감옥은 죄를 양산하고, 자동차는 교통을 지체시킨다. 반생산성 단계에 이르면 제도로 인해 개인들은 스스로 삶을 꾸려나가고 문제를 푸는 능력을 빼앗기고, 그 대신 전문가의 지식에 의존하도록 내몰린다. 급기야 제도가 인간의 삶을 대신하고, "역사상 가장 부유한 인류가 역사상 가장 무기력한 인간"이 된다.
일리치는 그의 첫 저서 <의식의 축제>에서 마르크스가 리카르도 학파를 비판한 문장을 인용하며 끝을 맺는다. "그들은 '쓸모있는 물건'만 만들고자 한다. 하지만 쓸모있는 물건을 너무 많이 만들면 쓸모없는 사람도 늘어난다는 사실은 잊고 있다."
생각의 전환은 삶의 전환을 불러일으킨다. 해석과 재사유가 가능하면, 변화의 가능성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다.
'지성의 비관주의'와 '의지의 낙관주의'라는 그람시의 말처럼 낭만적인 생각으로는 미래를 낙관할 수 없다. 최악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최선을 다해 찾아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부정否定의 시대'를 살고 있다. 모든 것을 알지만 모르는 척하면서, 행동도 하지 않고 인정도 하지 않으면서 무턱대고 앞으로 달려가는 질주의 시대를 살고 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the greatest happiness of the greatest number
[시, 글과 책 속에 쓰인 '행복'에 대한 다양한 표현들]
행복 - 나태주
저녁 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힘들 때
마음속으로 생각할 사람이 있다는 것
외로울 때
혼자서 부를 노래 있다는 것.
이희인, <여행자의 독서>
아직 읽지 않은 책, 아직 가지 않은 여행을 향한 마음이 간절할 때, 어쩌면 그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인지도 모른다.
최갑수, <우리는 사랑 아니면 여행이겠지>
아이야, 행복이라는 건 인간의 수만큼 많단다. 다른 이의 행복을 부러워하지 말거라. 너에게는 네게 꼭 맞는 행복이 있을테니까.
김홍신, <인생사용설명서>
소유하려는 욕구보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남보다 많이 갖지 않아도 비교하지 않습니다. 온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자신이 더없이 존귀하기에 스스로 행복하다고 여기는 것이지요. 그래서 소박하게 살면서도 만족하고 행복해합니다.
웃으며 즐겁게 사는 사람은 참으로 멋스럽고, 소박하게 사는 사람은 진정 건강하며, 나누며 사는 사람은 덕을 짓는 자이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겸손하여 복을 받고, 희망을 갖는 사람은 참으로 자유로우며, 재미있게 일하고 세상에 보탬이 되는 사람은 아름답게 성공한 자이며, 보람 있게 사는 사람은 진정 행복한 자입니다. 희망은 결국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자 가장 사람다운 징표입니다.
최인철, <굿 라이프, 내 삶을 바꾸는 심리학의 지혜>
행복한 삶이란 가슴에 관심 있는 것 하나쯤 담고 사는 삶이다.
행복이 무엇인지 물어보면 많은 사람이 건강하고 가족이 화목한 것, 돈을 많이 버는 것, 좋은 사람과 결혼하는 것 등과 같은 행복의 조건들만을 이야기하고, 정작 행복 경험 자체의 본질은 언급하지 않는 이유도 幸福이라는 단어 자체가 행복의 조건만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행복한 삶을 위한 첫걸음은 행복의 조건과 행복 자체를 구분하는 것이다. 행복에 관해 대화를 나눌 때, 누군가는 행복의 조건(幸福)을 이야기하고 누군가는 행복 경험 자체(快足)를 이야기하고 있다면 대화의 접점을 찾기 어렵다. 행복의 조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幸福이라는 한자의 의미를, 행복 경험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快足이라는 한자의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심리학자 이선 맥머핸(Ethan McMahan)에 따르면 사람들은 행복의 본질을 다음 네 가지 차원에서 파악한다. 1) 즐거움을 경험하는 것, 2) 부정적인 경험을 하지 않는 것, 3) 타인의 웰빙에 기여하는 것, 4) 자신이 성장하는 것
행복을 위한 11가지 활동 : 1) 명상하기, 2) 운동하기, 3) 친절 베풀기, 4) 자신에게 중요한 목표 추구하기, 5) 감사 표현하기, 6) 낙관적 마음 갖기, 7) 삶의 즐거움을 만끽하기, 8)행복한 사람처럼 행동하기, 9) 지금 이 순간을 음미하기, 10) 스트레스를 이기는 효과적 전략들을 사용하기, 11) 타인과 비교하지 않기
행복한 사람은 돈으로 경험을 사서 삶의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낸다. 그들은 장식거리보다는 이야깃거리가 우리를 훨씬 더 행복하게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부의 증가는 행복을 살 수 있는 기회와 자원을 대폭 늘려주었지만, 동시에 행복을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의 결핍을 가져왔다.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채움으로 채우려고 하지만, 행복한 사람은 비움으로 채우려고 한다. 시간과 돈의 여유가 없어서 나누어줄 수 없다고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하소연할 때, 행복한 사람은 나누지 않으면 시간과 돈의 여유는 갈수록 없어진다는 믿음으로 나눔을 실천한다.
경험하는 자기를 위한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은 지금 현재의 만족과 기분을 추구한다는 것이고, 기억하는 자기를 위한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은 삶 전체의 의미와 가치를 추구한다는 뜻이다.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자기가 누구인지를 드러낸다고 느낄때, 인간은 의미를 경험한다. 일이 잘되면 기분이 좋지만, 그 일이 자기다운 일이면 의미가 경험된다. 우리가 성공, 성취, 효용, 효율 등 무엇을 이루는 것에만 집착하게 되면 순간적인 기분의 행복을 누릴지는 모르지만, 의미 있는 삶을 경험할 가능성은 줄어든다. 의미 있는 삶이란 자기다움의 삶이다.
아베 히로시, 노부오카 료스케, <우리는 섬에서 미래를 보았다>
인간 전체의 거대한 행복도 결국은 매일 매일의 작은 행복을 느끼는 마음의 집합체다.
알랭 드 보통, <행복의 건축>
아름다움은 행복의 약속이다. 행복을 바라보는 관점만큼이나 아름다움의 양식도 다양하다. - 스탕달.
정재승, <열두 발자국>
행복은 예측할 수 없을 때 더 크게 다가오고, 불행은 예측할 수 없을 때 감당할 만하다.
혜민 스님, <고요할수록 밝아지는 것들>
행복의 요소 가운데 중요한 부분이 바로 '삶의 주도성이 내게 있는가?' 하는 점이다. 즉 지금 하는 일을 남이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해서 할 때 사람은 행복하다고 느낀다.
자기 삶을 이끄는 가치가 무엇인지, 무엇을 했을 때 자유롭고 행복한지, 어떤 일을 하면 보람을 느끼는지 스스로 인지하고 삶을 선택해 나가야 하는데 인지를 못할뿐더러 그 선택을 자신이 하려 하지 않고 타인에게 묻거나,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보며 따라 하려고 한다. 더욱이 '남의 나'의 힘이 강할수록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가 아닌 타인을 통해서 세우려고 한다. 아버지의 아들로, 누군가의 아내나 남편으로, 아이들의 부모로 자신의 정체성을 삼는다. 이렇게 되면 자신의 행복을 위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없고 타인에게 자신의 행복을 의탁하게 된다. 아이가 공부를 잘하는가 못하는가에 따라, 혹은 배우자가 승진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내 인생의 행복이 결정된다. 자기를 위한 사람을 제대로 살아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희생적이면서도 의존적이 되기 쉽다. 게다가 아이나 배우자, 부모와의 경계선이 모호해져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함부로 넘으며 서로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고 간섭하고 간섭당하며 다툼을 반복하게 된다.
우리는 늘 행복할 수는 없지만 순간순간 행복했던 기억의 힘으로 살아간다.
행복을 소유의 개념이 아닌 감상의 개념으로 본다면 소유할 수 없는 자연의 아름다움, 친구와의 우정, 내 아이의 웃음소리, 음악이 선물하는 평온함, 내가 응원하는 스포츠팀 우승이 다 행복으로 다가옵니다. 아무리 돈 많은 부자라 하더라도 그들의 행복 역시 우리가 말하는 소확행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삶을 감상할 줄 아는 태도를 갖추었는지 아닌지가 중요한 것 같아요.
우리 마음은 변화에 민감해서 긍정적인 새로움을 경험할 때 행복해합니다.
행복이나 여유, 평화로움은 계속해서 뭔가를 구하는 마음이 쉴 때 비로소 경험하게 된다
E. F. 슈마허 외, <자발적 가난>
왜냐하면 부란 물질과 재산, 그리고 돈의 소유를 말하지만 행복이란 돈으로는 살 수 없는 불확실한 삶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복 받은 사람이 반드시 부자일 필요가 없으며, 부자들이 불행한 삶을 영위하는 것 또한 드문 일은 아니다.
필요하지 않은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던 그는 모든 것을 소유하고 필요로하는 사람보다 행복하다. 필요하지 않은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으니 최고의 사람인 것이다. - 에크하르트
발걸음이 가벼울수록 여행도 가볍듯, 삶의 여정에서 가난함으로 필요를 줄인 사람은 더 행복하고, 부의 무게 아래 신음하지 않는다. - 미누시우스 펠릭스
E. F. 슈마허, <작은 것이 아름답다>
경쟁과 속도전에서 벗어나, 인간이 자신의 행복을 위해 스스로 조절하고 통제할 수 있을 정도로 자그마한 규모를 유지할 때 비로소 쾌적한 자연 환경과 인간의 행복이 공존하는 경제구조가 확보될 수 있다
정철, <불법사전>
행복
위를 한 번 볼 때 아래를 두 번 보는 것. 즉 욕심을 절반으로 덜어내는 것. 뒤를 한 번 볼 때 앞을 두 번 보는 것. 즉 미련을 절반으로 덜어내는 것.
(동의어) 항복, 남들이 만들어놓은 행복의 까달운 기준을 따라가려고 아등바등 하지 않고 씩 웃으며 두 손을 들어버리는 것.
불행은 인생이 딱 한 번뿐이라는 것. 다행은 한 번 뿐인 인생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
행복을 파는 가게. 행복을 파는 가게에 들어가서 지갑을 열고 돈을 꺼내며 행복 만 원어치만 주세요 라고 말하면 아무 대답이 없을 것이다. 행복을 파는 가게는 돈과 행복을 교환하는 곳이 아니니까. 지갑 대신 가슴을 열고, 돈 대신 사랑을 꺼내줘야 한다. 주는 사랑에 인색한 사람은 행복을 포기한 사람과 다름없다.
오늘의 행복지수. 오늘 손잡은 사람의 수에 오늘 웃은 횟수를 더한 것. 행복지수가 1인 사람부터 행복한 사람에 속한다. 0이 아니면 오늘도 행복한 표정으로 잠자리에 들어도 좋다.
손해, 남보다 조금 덜 갖는 것. 남보다 조금 더 움직이는 것. 덜 가지면 마음이 가벼워져서 행복하고, 더 움직이면 몸이 가벼워져서 행복하고, 결국 남을 행복하게 해주려다 내가 더 행복해지는 것.
큰 기적은 행운이지만 작은 기적은 행복이다.
정철, <한글자>
천천히 가야 가는 길 곳곳에 놓인 행복이 보인다. 행복은 도달이나 도착이 아니라 도약과 도전을 즐기는 것이다.
덤, 행복은 땀이고 행운은 덤이다. 인생은 내가 땀 흘린 만큼 행복을 건네준다. 행복을 건네줄 때 행운도 조금씩 챙겨 준다. 그러니까 내가 땀 흘려야지! 하고 마음만 먹으면 행복은 물론 행운까지 덤으로 받을 수 있다. 단, 땀보다 큰 덤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건 상도에도 맞지 않고, 인생도 그런 밑지는 거래는 안 한다.
알랭 드 보통, <불안>
"시도가 없으면 실패도 없고, 실패가 없으면 수모도 없다. 따라서 이 세계에서 자존심은 전적으로 자신이 무엇이 되도록 또 무슨 일을 하도록 스스로를 밀어붙이느냐에 달려 있다. 이것은 우리가 상상하는 자기 자신의 잠재력에 대한 실제 성취 비율에 의해 결정된다. 자존심 = 이룬것 / 내세운것", 윌리엄 제임스의 방정식은 우리의 기대 수준이 높아지면 수모를 당할 위험도 높아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무엇을 정상이라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행복이 결정된다. ... 이 방정식은 우리의 자존심을 높일 수 있는 두 가지 방법도 암시한다. 하나는 더 많은 성취를 거두기 위해 노력하는 거이고, 또 하나는 성취하고 싶은 일의 수를 줄이는 것이다. ... "요구를 버리는 것은 그것을 충족시키는 것만큼이나 행복하고 마음 편한 일이다."
우리는 적은 것을 기대하면 적은 것으로 행복할 수도 있다. 반면 모든 것을 기대하도록 학습을 받으면 많은 것을 가지고도 비참할 수 있다. ... 우리는 조상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기대한다. 그 대가는 우리가 현재의 모습과 달라질 수 있는데도 실제로는 달라지지 못하는 데서 오는 끊임없는 불안이다.
행복한 삶을 영위하려면 고용주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 자신을 위해, 자신만의 속도로, 자신의 행복을 위해 일해야 한다. - 볼턴 홀, <3에이커와 자유>
이 세상에서 부유한 사람은 상인이나 지주가 아니라, 밤에 별 밑에서 강렬한 경이감을 맛보거나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해석하고 덜어줄 수 있는 사람이다. 러스킨은 말한다. "삶, 즉 사랑의 힘, 기쁨의 힘, 감탄의 힘을 모두 포함하는 삶 외에 다른 부는 없다. 고귀하고 행복한 인간을 가장 많이 길러내는 나라가 가장 부유하다. 자신의 삶의 기능들을 최대한 완벽하게 다듬어 자신의 삶에, 나아가 자신의 소유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의 삶에도 도움이 되는 영향력을 가장 광범위하게 발휘하는 그런 사람이 가장 부유하다.
"대부분의 사치품, 그리고 이른바 생활에 편리한 물건들은 필요불가결한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인류의 향상에 장애가 된다." 소로는 그렇게 쓰고 난 뒤에, 물질을 소유하는 것과 존경할 만한 사람이 되는 것을 연결시키는 사회적 태도를 뒤집고자 이렇게 덧붙인다. "사람은 없이 살 수 있는 것이 많아질수록 행복해진다." ... "영혼에 필요한 것을 사는 데 돈은 필요하지 않다." - 헨리 소로
유시민, <유럽 도시 기행>
행복을 느끼는 데는 결핍이 필요하다.
이기주, <한때 소중했던 것들>
세상엔 추한 것과 아름다운 것이 뒤섞여 있다. 그 뒤섞임과 혼란 속에서 나만의 시각으로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고 건져올릴 때 삶은 풍요로워진다고 믿는다. 우린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느낄 수 있을 때 행복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파우스트>
나는 행복을 경직된 것에서 찾지 않네. / 전율은 인류에게 주어진 최고의 것일세. / 세상이 전율의 감정을 자주 베풀지 않을지라도, / 인간은 감동해야만 엄청난 것을 깊이 느끼는 법일세.
롤프 포츠, <Vagabonding, 여행의 기술>
물질적 풍요가 곧 부자는 아니다! 이런 생각은 사회가 형성된 이후로 줄곧 인간의 정신에 깃들어 있었다. 힌두교의 경전 <우피니사드>는 "물질의 소유라는 사슬이 인간을 옭아매고 인간을 짓누른다"고 경고하고, 성경은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넉넉한 돈을 갖지 못하리라"고 가르친다. 예수는 "온 세상을 얻었더라도 네 자신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이겠느냐!"라고 말했다. 부처도 "물질적 욕망을 채움으로써 행복을 구하는 것은 바나나 나무에 망고가 열리지 않는다고 슬퍼하는 것만큼이나 덧없는 짓이다"라고 지적했다. 수천년 전부터 이런 경고가 있었지만 여유 있게 사는 것보다는 부자가 되어야 하고, 잘 사는 것보다는 출세하고 성공해야 한다는 사회적 강박관념은 여전히 존재한다. 나쁘게 말하면 모두가 이런 광기에 매몰되어 있다.
알랭 드 보통,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완벽한 행복은 아마 한 번에 5분이 채 넘지 않을, 작고 점진적인 단위들로만 찾아온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이 순간은 두 손으로 붙잡아 소중히 간직해야 할 행복이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콜레라 시대의 사랑>
훌륭한 결혼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행복이 아니라 안정이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괴테 청춘에 답하다>
괴테는 "행복을 원한다면 전체의 행복을 위해 일해야만 한다"라는 시각을 비판했다. "행복은 우선 자신의 주변에서부터 만들어나가야 한다. 그렇게 되면 전체가 행복해질 것이다."
한동일, <라틴어 수업>
'베아티투도beatitudo'라는 라틴어가 있습니다. '행복'을 뜻하는 단어인데 '베오beo'라는 동사와 '아티투도attitudo'라는 명사의 합성어입니다. 여기에서 '베오'는 '복되게 하다, 행복하게 하다'라는 의미이고 '아티투도'는 '태도나 자세, 마음가짐'을 의미합니다. 즉 '베아티투도'라는 단어는 '태도나 마음가짐에 따라 복을 가져올 수 있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오늘의 불행이 내일의 행복을 보장할지 장담할 순 없지만 오늘을 행복하게 산 사람이 내일이 불행하지만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카르페 디엠, 오늘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야마구치 슈, <철하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우리의 목적은 즐겁게, 나다운 인생을 살면서 행복해지는 것이다.
헬렌 니어링,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건강을 위한 우리의 간소한 식사법은 이렇습니다. 음식은 신선해야하고, 유기농법으로 거둔 생산물로 가공되지 않은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나치게 가공한 음식을 피합니다. 당신의 식사법이 이런 방식에 가까울수록 소화기관과 건강에 좋습니다. 마찬가지로 두 사람의 사려깊은 철학자가, 장수하면서 행복하게 살기 위한 필요 조건으로 이런 조언을 주었습니다. 임어당은 <생활의 발견>에서 '행복은 대체로 장의 운동이 어떠냐에 달려 있다.'고 했습니다. 버틀란트 러셀은 자서전에서 건강과 장수에 대해 말하면서 '하루에 두 번씩 빠짐없이 일정한 시간에 똥을 눈 것이 내 행복에 도움을 주었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앨버트 허바드가 한 말을 덧붙입니다. '당신이 건강하다면 아마도 행복할 것이고, 그러면 당신이 원하는 것 모두를 가지지는 못했더라도 당신에게 필요한 모든 부를 가진 것이다.' 우리가 건강과 장수를 위해 실천에 옮긴 몇몇 지침을 소개합니다. 적극성, 밝은 쪽으로 생각하기, 깨끗한 양심, 바깥 일과 깊은 호흡, 금연, 커피와 차를 포함해 술이나 마약을 멀리함, 간소한 식사, 채식주의, 설탕과 소금을 멀리함, 저칼로리와 저지방, 되도록 가공하지 않은 음식물, 이것들은 삶에 활력을 주고 수명을 연장시킬 것입니다. 약, 의사, 병원을 멀리하십시오."
유발 하라리 외, <초예측>
인간은 풍요로워졌으나 행복해졌다고 할 수 없다.
김용규, <생각의 시대>
가장 행복한 사람은 누구인가, "몸이 건강하고, 정신이 지혜롭고, 성품이 순수한 사람"
김영하, <여행의 이유>
인생과 여행은 그래서 신비롭다. 설령 우리가 원하던 것을 얻지못하고, 예상치 못한 실패와 시련, 좌절을 겪는다 해도, 우리가 그 안에서 얼마든지 기쁨을 찾아내고 행복을 누리며 깊은 깨달음을 얻기 때문이다.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행운에 속지마라>
행복하게 사는 사람은 대개 만족을 추구하는 유형. 인생에서 원하는 바를 미리 정해놓았고, 만족을 얻는 순간 멈출줄 안다. 목표를 달성해도 욕망을 계속 키워나가지 않는다. 최대화를 추구하는 사람은 끊임없이 수준을 높이려고 하기 때문에 불행한것인지, 아니면 불행한 사람이 최대화를 추구하는 것인지 인과관계도 분명치 않다.
야노 가즈오, <데이터의 보이지 않는 손>
행복한 사람은 창의성, 업무 실적, 소득 수준, 결혼 성공률 등이 높고 사교적이며 건강하고 장수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정량적 수치로 나타내면 행복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생산성이 평균 37%, 창의성이 300%나 높다. 중요한 점은 일을 잘하는 사람이 성공해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행복한 사람이 일을 잘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행복 수준은 성공 여부에 상관없이 오늘의 사소한 행동만으로도 끌어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행복 수준을 끌어올린다고 해서 반드시 성공을 거두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공 확률은 한층 높아진다. 행복한 사람은 창의적인 사고로 생산적인 일을 즐기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누리며, 건강과 장수를 얻을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다.
행복이란 사람마다 고유하고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위의 실험에서 드러난 것은 '행복한 사람은 신체를 잘 움직인다'는 단순하고 공통된 사실이다. 물론 하는 일이 다르면 그에 따라 움직이는 양도 달라진다. 그러나 같은 사람인 경우 행복 수준이 높으면 움직이는 빈도가 더욱 늘어난다는 것은 의외의 발견이다. 일의 조건이 다른 사람끼리 비교해서 움직이는 양의 많고 적음에 따라 어느 쪽이 행복한지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렇지만 행복할수록 움직임이 더 많아지나는 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행복이 적극적인 행동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내용과도 부합한다.
실뱅 다르니, 마튜 르 루, <세상을 바꾸는 대안기업가 80인>
생산자가 행복하면 더 맛있는 농산물이 생산되고, 소비자와 시장은 그런 농산물을 선호하게 되어 있다.
이 '대안 기업가'들은 강한 윤리의식을 갖고 있으며, 인간 저마다의 능력이 긍정적 변화의 원동력이 된다는 데 근본적인 믿음을 갖고 있다. 그들은 특히, 자신들의 가치체계에 맞추어 일상의 활동을 영위할 수 있다는 데 무한한 행복을 느낀다. 그들은 부의 창출과 인본주의를, 그리고 생산 활동과 생태적 책임감을 결합시킬 수 있는 대안적 해결방법을 모색하느느 데 큰 의미를 둔다. 그들은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데 만족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그 세계를 건설하는 데 참여한다.
김형석, <백년이 고독>
나는 지금도 성공보다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행복하며, 유명해지기보다는 사회에 기여하는 인생이 더 귀하다고 믿는다.
이기적인 경쟁은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고, 선의의 경쟁은 성장과 발전을 초래하나, 사랑이 있는 경쟁은 행복을 더해준다고 믿는다.
니콜라스 카, <유리감옥>
우리는 힘들지만 분명한 목표가 있고, 우리의 재능을 발휘하고 확장할 수 있게 해주는 일에 몰두할 때 가장 큰 행복감을 느낀다.
최인호, <네팔 히말라야 트레킹>
여행은 추억으로 남는다. 그 추억 속에는 맛도 있고, 사진도 있고, 그리움도 있다. 이 가운데 그리움은 행복을 맛본 자만이 느끼는 고통이 아닐까?
유발 하라리,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인간의 행복은 객관적 조건보다는 우리 자신의 기대에 더 크게 좌우된다.
이반 일리치,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불필요한 물품과 재화를 소유할수록 행복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그만큼 줄어든다
마조리 켈리, <그들은 왜 회사의 주인이 되었나>
이것이 바로 충족성이다. 충분히 가졌다는, 만족스럽다는 순수한 느낌 말이다. 충족성의 다른 말은 행복일 터다.
행복은 우리가 가장 살아 있다고 느낄 때 찾아온다. 여기서 핵심은 자신에게 진실한 것, 자신의 운명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이다.
김진선, <적당히 벌고 잘 살기>
하루하루가 새롭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이상한 일이 아닌가. 현재는 영어로 'present'이다. present는 현재라는 뜻도 있지만 선물이라는 뜻도 있다. 내가 발 딛고 있는 지금 여기는 곧 나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그렇다면 나는 현재를 충분히 행복하게 살아야 할 의무가 있다.
김연수, <소설가의 일>
외부의 사건이 이끄는 삶보다는 자신의 내면이 이끄는 삶이 훨씬 더 행복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심리적 변화의 곡선을 지나온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성장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다면, 상처도 없겠지만 성장도 없다. 하지만 뭔가 하게 되면 나는 어떤 식으로든 성장한다. 심지어 시도했으나 무엇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을 때조차도 성장한다.
유현준, <어디서 살 것인가>
평등은 다양성을 통해 이루어야 한다. 다양성은 행복의 가능성을 높인다.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밥을 먹고 똑같은 학교 건물에서 공부한다고 평등한 세상은 아니다.
야마시타 히데코, <소중한 것은 모두 일상 속에 있다>
일상의 책형에서 자유의지로 벗어나는 것이 바로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행복이란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일까의 문제이며, 당신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P. G. 해머튼, <지적 생활의 즐거움>
노동은 지상에서 맛볼 수 있는 최상의 행복입니다. 그리고 노동을 통해 인간은 이 세계를 창조한 질서를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노동은 신성한 본분이며, 삶의 기쁨인 것입니다. 일하지 않고 행복을 찾는 것은 세상에서 둘도 없는 어리석음입니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명언을 제시하지 않더라도 노동 없는 수확은 약탈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신성해야 할 노동이 사회적인 강요에 의해 자행된다면 이 또한 심각한 문제입니다. 행복해지기 위한 노동, 자아를 찾기 위한 노동이 아닌 강제적이고 수탈적인 노동이라면 그것은 인간이 가축화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신이 어떤 직업을 통해 행복해지고 싶다면 다음 세 가지를 유념해야 합니다. 첫째, 그 일에 필요한 능력을 갖출 것, 둘째, 지나치게 많이 일하려고 하지 말 것, 셋째, 그 일을 사랑한다고 당신 자신을 속이지 말것.
유시민, <표현의 기술>
행복하게 살려면 나하고 잘 맞는 사람, 통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과 교감해야 합니다. 맞지 않는 사람과 다투면서 시간을 보내기에는 우리 인생이 너무 짧으니까요. 같은 이치로 내게 재미있는 책,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책, 내가 감동받는 책을 읽으면서 사는 게 최선입니다.
마크 맨슨, <신경 끄기의 기술>
"행복이 무엇인지 계속 묻는다면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인생의 의미를 찾아 헤맨다면 결코 인생을 살아갈 수 없다." - 알베르트 카뮈
행복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서 나온다. 여기서 핵심은 '해결'이다. 문제를 피하거나 아무런 문제가 없는 척하면 불행해진다. 해결 못할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도 역시 불행해진다. 중요한 건 처음부터 문제 밖에 자리하는 게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거다. 행복하려면 우리는 뭔가를 해결해야 한다. 그러므로 행복은 일종의 행동이며 활동이다. 행복은 가만히 있으면 주어지는 게 아니다.
사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적으면 적을수록 더 행복을 느낀다. 기회와 선택지가 지나치게 많을 때, 우리는 심리학자들이 '선택의 역설'이라고 부르는 것에 시달리게 된다. 우리는 선택지가 많을수록 어떤 선택을 하든 덜 만족하게 되는데, 그 까닭은 하나를 선택함으로써 포기해야 하는 다른 모든 선택지에 신경을 쓰이기 때문이다.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
"어느 누구도 나더러 타인의 기준에 맞춰서 행복하라고 강요할 수 없다.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 저마다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행복을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덕무, <문장의 온도>
호기심과 상상력의 힘을 긍정해야 한다. 그 능력에 따라 인간의 미덕과 악덕, 행복과 불행, 환희와 고통, 현재와 미래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인간의 자유 의지에는 반드시 호기심과 상상력이 필요하다. 호기심과 상상력이 없다면 어떻게 새로운 세계, 자유로운 세상을 그려 볼 수 있겠는가? 새로운 발견과 발명, 그리고 창조의 진정한 에너지가 바로 어린아이의 호기심과 상상력 속에 존재한다.
법륜, <인생수업>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오늘을 허투루 보내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을 돌아보세요. 죽음의 순간은 언제 올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오늘 최선을 다해야 하고, 그 마음을 잃지 않아야 내일 죽어도 후회 없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추구하는 성공과 상관없이 스스로 만족하는 삶을 살아갈 때 그것이 바로 좋은 인생입니다. 늘 오늘의 삶이 만족스러우면 그게 곧 행복한 인생이지요.
진정으로 성공적인 인생, 좋은 인생이란 어떤 걸까요. 세상에서 추구하는 성공과 상관없이 자기가 만족하면 좋은 인생입니다. 세상의 성공 기준에 나를 맞추고 욕구가 충족된다고 행복해지는게 아닙니다. 오히려 욕구를 버리거나 기대를 낮추는 만큼 기쁨과 만족이 일어납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인생수업>
왜 오늘보다 내일 더 행복하고 강해질 거라고 생각합니까? '더 많은' 것을 원하는 게임을 아무리 훌륭히 치러 냈더라도 자신을 잊어버린다면 결국 힘을 잃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게임은 우리를 언제나 부족하다고 느끼는 결핍 상태에 머물게 합니다. 여전히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더라도 기분은 나빠집니다. 여전히 불행하긴 마찬가지입니다. '조금만 더 갖는다면!' 하고, 이 단순한 문제를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은 내일이 없으므로 더 이상 더 많은 것을 추구하는 게임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오늘 가진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강한 사람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에서 힘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모든 여유로움은 우리가 가진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터 나옵니다. 진정한 힘과 행복은 감사하는 마음이 그리는 미술 작품 속에 있습니다. 자신이 현재 가진 것에 감사하는 일,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감사하고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갖고 나온 것에 감사하는 일. 자신의 독특함에 감사하는 일
에르스무스, <바보예찬>
행복이란, 현재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머물러 있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을 뜻합니다.
유시민, <국가란 무엇인가>
칸트는 <실천이성비판>에서 행복과 도덕, 선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행복만으로는 우리 이성의 관점에서 아직 완전한 선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의 이성은 행복과 행복할 가치가 있는 것, 즉 도덕적 선행이 일치되어 있지 않는 한 행복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도덕성만으로, 또 그와 함께 행복할 가치를 갖춘 것만으로는 도저히 완전한 선이라고 할 수는 없다. 완전한 선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행복할 가치가 있는 행동을 한 사람이 행복을 맞이할 기대를 가져야만 할 것이다. 실천적 이념에서 이 두 요소(행복과 윤리)는 본질적으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그런 결합방식에서 도덕적 지향은 조건으로서 행복에 참여하는 것을 비로소 가능하게 하는 것이지, 반대로 행복에의 기대가 도덕적 지향을 비로소 가능하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왜냐하면 후자의 경우처럼 행복에의 기대를 조건으로 하는 지향은 도덕적인 것이 아니며, 따라서 또한 전적인 행복을 누릴 자격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선은 행복과 도덕의 일치이며 결합이다. 단, 행복해지고 싶은 마음 때문에 도덕을 지키면 행복할 자격이 없다. 동기가 도덕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카트린 지타, <내가 혼자 여행하는 이유>
"인간은 자신을 사랑해야 행복해지고 타인을 사랑할 수 있다." - 에리히 프롬
혜민 스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행복은 / 생각이 적을수록, / 함께 같이 나눌수록, / 지금 바로 이 순간에 마음이 와 있을수록 / 더해집니다. / 눈을 감고 숨을 깊게 쉬고 마음속으로 / '내 주변 사람들이 모두 평안하길...' 기도해보세요. / 이 말과 함께 평안이 곧 밀려옵니다.
행복의 지름길. / 첫째, 나와 남을 비교하는 일을 멈추십시오. / 둘째, 밖에서 찾으려 하지 말고 내 마음 안에서 찾으십시오. / 셋째, 지금 이 순간 세상의 아름다움을 찾아서 느끼십시오.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사람들에게는 / 행복을 결정하는 두 가지 질문이 있다고 합니다. / 첫째,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나에게 의미를 가져다주는가? / 둘째, 나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좋은가? / 이 두 가지 질문이 사람들의 행복의 열쇠라고 합니다.
내가 옳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같이 행복한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구본권, <로봇시대, 인간의 일>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도 <행복의 정복>에서 인간은 권태, 죄의식, 피해망상증 때문에 불행해진다며 열정, 사랑, 노력과 체념 그리고 일이 행복을 정복하는 중요 도구라고 주장했다. 행복하고 보람 있는 삶에 일이 필수적이라는 것은 굳이 부연할 필요가 없는 상식이다.
유시민, <나의 한국현대사>
인간이 불완전한 상태에서는 서로 다른 의견이 존재하는 것이 유익하듯이, 삶의 실험도 다양하게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각자의 개성을 다양하게 꽃피울 수 있어야 한다. 각자의 고유한 개성이 아니라 전통이나 관습에 따라 행동하게 되면,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이자 개인과 사회 발전의 불가결한 요소인 개별성을 잃게 된다. -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사람은 그 어떤 위대한 이념이나 가치를 실현하는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인 존재다. 누구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스스로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 때 행복을 느낀다. 우리 모두는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는 존엄한 인간이다. 우리는 자신의 존엄성을 확신하는 것과 똑같은 무게로 타인의 존엄성을 존중해야 한다.
알렉산더 폰 쇤부르크,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
듣기 좋은 말로 행복을 이야기하는 진부한 감언이설을 뒤쫓는 사람은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들기 십상이다. 진정한 가난은 물질적인 것의 결핍이 아니라 건강이나 아름다움, 부유함, 무엇을 쫓든지 완벽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삶은 기복을 평가할 줄 알고 위기 상황에 의연하게 대처하는 사람은 경우에 따라서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크게 부유해질 수 있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첫 번째 가능성은 마음에 품고 있는 모든 소원을 성취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악착같이 일하며 누리고 싶은 일들을 꿈꾼다. 그러다 마침내 실제로 소원을 이루게 되어도 행복해지지 않는다고 확정 짓는다. 두 번째 가능성은 소원을 수정하는 것이다.
내 힘이 닿는 일에 내 자존심을 걸면 부자가 될 것이고, 이루어지기 어려운 일에 내 행복을 걸면 가난할 확률이 아주 높다.
김난도 외, <트렌드 코리아 2018>
What’s Your ‘Small but Certain Happiness’? '소확행' 즉 작지만 확실한 행복. 행복은 멀리 있지 않으며 거창하지도 않다. 평범한 일상에서 행복을 찾는다는 뜻의 ‘소확행’은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만든 단어다. 일상에서 소확행을 추구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행복을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은 물질보다 경험에 돈을 지불할 때 사람은 더 큰 행복을 느낀다고 말한다. 물건은 구입한 직후부터 싫증을 느끼게 되는 반면 경험은 시간이 지날수록 긍정적인 기억만 남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간느 소비자의 두 손에 무엇을 들릴 것이냐보다 소비자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을 거이냐가 더 중요하다. 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깊은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행복, '미래'에서 '지금'으로, '특별함'에서 '평범함'으로, '강도'에서 '빈도'로
이언 해킹, <우연을 길들이다>
한 가지 매우 곤혹스러운 것이 있다. 즉 통계학자와 전문가들, 그리고 인간성의 애호자라는 분들이 인생의 밝은 면들을 나열하면서 어떻게 한 가지 특별한 점은 한결같이 빠트릴 수 있는 것인가? 자유롭고 구속 받지 않는 개인 의지, 즉 개인의 변덕(어느정도로 심하든 간에) 내지는 공상(때때로는 정신이상의 수준으로 격앙되기도 하지만)은 가장 큰 행복이자 가장 위대한 행복이며, 이는 어떠한 분류체계에도 들어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으나 이것이 빠진 일체의 시스템이나 이론은 악마에게나 어울리는 것이다. - 도스토예프스키, <Notes from Underground>
서은국, <행복의 기원>
먹고 자고 사랑할 때 인간이 행복을 느끼는 이유. 결국은 생존을 위해서다.
행복, 즉 쾌감을 느껴야만,
혹은 쾌감을 느끼기 위해 인간은 먹고 자고 사랑하는 데 몰두한다.
이 관점으로 보자면 행복은 삶의 최종 이유도 목적도 아니다.
생존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따라서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행복을 느끼는 것이다.’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다 (Happiness is the frequency. not the intensity, of positive affect)
유현준,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서 눈만 뜨면 이 세상의 TV, 라디오, 신문 같은 모든 매체에서 더 많은 물건을 소유해져야 더 행복해진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물건을 사기 위해서 열심히 일한다. 그리고 또 그 많은 물건을 넣기 위해서 더 큰 집을 구해야 한다. 그리고 더 큰 집을 사기 위해서 더 많이 일해야 한다. 그야말로 인간의 삶과 자연을 수탈하는 악순환이다.
양재우, <불황을 이기는 월급의 경제학>
행복을 돈으로 환산하려는 시도를 더 이상 하지 않게 될 때, 현재와 미래의 행복은 우리 인생의 여유 속으로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행복은 일상의 발견에서 시작됩니다. 현재의 행복은 현재에 온전히 집중해야만 얻을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내 일상을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합니다. 관찰을 통해 발견이라는 쾌거를 이룰 수 있는 거죠.
마스다 무네아키, <지적 자본론>
일을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행복해지기 위해서일 것이다. 행복해지려면 어느 정도의 경제적 기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을 해서 돈을 벌려고 노력한다. 이 경우, 행복이 목적이고 금전은 수단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적잖은 사람들이 돈을 버는 것을 목적으로 착각해 버린다. 그리고 그 목적에 사로잡혀 피폐해지고 행복에서 점차 멀어져간다.
사람들이 수단과 목적을 착각하는 이유는 그쪽이 편하기 때문이다. 행복이 목적이라고 하지만 그 행복이 무엇인지에 관해 지속적으로 자문하고 고민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힘든 일이다. 그래서 무의식중에 간단히 그 크기를 측정할 수 있는 금전 쪽으로 목적을 바꾸어 버리는 것이다.
효율과 행복은 다르다. 효율은 확실히 편리하고, 편리는 대부분의 경우 쾌적함을 이끌어 낸다. 단, 쾌적함과 행복은 등가가 아니다. 자동차가 다닐 수 없는 숲 속의 산책로를 지나가야 한다면 효율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곳을 걸을 때 느낄 수 있는 행복감은 결코 효율성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렇다, 어쩌면 효율과 행복은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바버라 브래들리 해커티, <인생의 재발견>
활기찬 삶을 사는 사람들은 그들의 에너지와 관심의 방향을 행복의 추구에서 의미의 추구로, 성공하는 것에서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고 매 순간을 즐기는 것으로 전환한 사람들이다.
지난 몇 년간 긍정심리학자들은 행복이 장수와 부를 포함한 온갖 종류의 유익을 갖다준다고 믿어왔다. 그렇지만 행복은 '삶의 목적'과 완전히 반대되는 것은 아닐지라도 확실히 조금 거리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데이비드 베넷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문득 크게 때달아지는 바가 있었다. 바로 행복은 단기적은 행복과 장기적으로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데서 오는 행복(에우다이모니아), 2가지로 나뉜다는 점이다.
이정우, <개념: 뿌리들>
철학적 언어 사용에 있어, 옳음의 짝은 그름이고 좋음의 짝은 나쁨이다. 선과 악은 이렇게 양의적으로 이해됩니다만, 두 경우는 매우 다른 내용을 뜻합니다. 옳음/그름은 초월적 가치 기준과 의무 개념을 함축하지만, 좋음/나쁨은 내재적 가치 기준과 행복/기쁨의 개념을 함축합니다.
때로 최고선은 행복eudaimonia과 동일시되기도 해요. "인간에게 고유한 선=좋음은 덕에 부합하는 영혼의 활동이다." 인간에게 고유한 선은 무엇이냐? 새에게 고유한 선/행복은 창공을 훨훨 나는 것이겠죠. 두더지에게 최고의 선/행복은 땅을 신나게 파는 것이겠죠. 마찬가지로 인간에 최고의 선은 뭐냐? 인간에게 최고의 선/행복은 덕에 부합하는 영혼의 활동이라는 겁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선/행복이란 "우리 자신에게서 가장 완전한 부분에 따라 사는 것"이며, 그것은 곧 관조적 이성epistemonikon의 신성한 원리입니다. 우리에게 새의 날개, 두더지의 발톱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이성인 것이죠.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자신의 본질인 이성을 최대한으로 발현하면서 사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덕과 정의의 만듦보다 더 위대한 만듦은 없는 것이고, 우리는 덕과 정의가 있는 곳에서만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습니다.
틱낫한, <중도란 무엇인가>
다른 사람의 행복은 우리 자신의 행복과 연관되어 있다. 만약 우리가 행복하지 않다면, 다른 사람도 행복할 수 없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의 공동체도 행복하지 않게 된다.
유시민, <청춘의 독서>
세상은 죽을 때까지도 전체를 다 볼 수 없을 만큼 크고 넓으며, 삶은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축복이다. 인간은 이 세상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살러 온 존재이며, 인생에는 가치의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여러 길이 있다. 그리고 어느 길에서라도 스스로 인간다움을 잘 가꾸기만 하면 기쁨과 보람과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
에릭 호퍼, <길 위의 철학자>
Happiness. 이런저런 것만 있으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는 것은 불행의 원인이 불완전하고 오염된 자아에 있다는 인식을 억누르는 것이 된다. 따라서 과도한 욕망은 자신이 무가치하다는 느낌을 억누르는 수단이 된다.
피코 아이어, <여행하지 않을 자유>
대개의 경우 우리의 문제는 (게다가 그 해결책, 즉 마음의 평화는) 내면에 있다. 자신의 바깥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동분서주하는 모습은 이슬람의 우화에 나오는 우스꽝스러운 인물과 똑 닮았다. 우화 속 남자는 자신의 집에서 열쇠를 잃어버렸는데 거리가 더 환하다며 거리로 나가 열쇠를 찾으러 다닌다. 2000년도 더 전에 에픽테토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말했다시피, 우리를 만드는 것은 우리의 경험이 아니라 그 경험에 반응하는 태도다.
시어도어 젤딘, <인생의 발견>
페리클레스는 행복을 결정하는 것은 자유이고, 자유를 결정하는 것은 용기라고 말했다. 하지만 사회는 사람들을 용기 있게 만들도록 조직되지 않았다. 사람들의 정신과 에너지를 쥐어짜는 일이 너무나 많다. 사람들을 생기 넘치고 흥미를 느끼게 하고 온전히 깨어 있게 하는 일은 너무 적다. 더 생생히 살아 있음을 느끼고 싶다면 일을 통해서 사회에 기여하는 노력을 인정받고 재능과 예술적 기교로 돈 많은 사람들의 변덕에 복종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해야 한다. 이런 요구에 대한 자각은 조직의 스트레스를 최소화하기 위한 진정제로만 조직에 투입되었다. 고대 아테네에서 고용은 노예를 위한 것으로 자유인은 남에게 굽실거리며 일을 해서 임금을 받는 것을 불명예로 여겼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거꾸로다. 고용되지 않으면 부끄러운 일이고 자기를 팔아서 시간제 임금을 받는 것을 성공으로 여긴다. 깨어 있는 시간의 절반을 자유롭지 않은 상태로 지내야 하는데도 그것을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여긴다. 그럼에도 국가가 번창할수록 국민은 자유로운 인간으로 일하기를 꿈꾸면서 굽실거리고 아첨하지 않고도 자신의 재능과 시간을 활용할 방법을 찾아나선다. 스스로 일을 통제하고 창조력을 발휘하고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되고 인정받는 방법을 찾기 위한 넓은 탐색의 영역이 열려 있다. 그러나 이런 기회를 허락하는 일은 많지 않다. 굳이 이런 기회를 요구하지 않는 사람도 많다. 일이란 본래 그런 것이라고 체념하고 일을 하고 얻는 알량한 보상에 만족하거나 일 밖에서 만족을 찾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김승호, <알면서도 알지 못하는 것들>
자존감을 갖지 못하면 자유를 얻을 수 없고, 자유가 없으면 행복할 수 없다. 자존감이 파괴되면 모든 것을 잃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현실과 맞서 싸우고 저항하고 의문을 갖고 행동하는 것을 주저하면 안 된다. 세상은 항상 변화하기 때문에 변화에 끌려다닐 것이 아니라 변화를 주도하고 변화를 이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자존감이 충분하면 누구와 비교해 자신을 평가하지 않게 된다. 나 스스로 가장 높은 곳에 있기에 비교할 이유도 방법도 없다. 이때야 비로소 막힘이 없어져 시야가 넓어지고 보는 만큼 자유롭게 되고 사랑하게 되며 행복을 얻게 된다.
행복의 비결은 내가 포기해야 할 것을 언제 포기해야 하는지 아는 데서 출발한다. 욕심과 욕망을 줄이는 순간, 행복이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행복을 잡으러 다니는 것을 포기하는 순간, 그 행복이 눈 앞에 보이게 된다. 우리가 태어나서 벌어놓은 모든 것은 소멸된다. 소멸되는 것에는 진정한 행복이 없다. 행복은 영속적인 것을 찾아 인간과 우주에 대한 사랑을 실현함으로써 가능하다. 물질적인 부를 추구하고 이기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은 아무리 부를 가져도 행복할 수 없다.
헨리 조지, <진보와 빈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난다. 인간은 남에게 줄 수 없는 몇 가지 권리를 창조주로부터 받는다. 이 권리에는 생명, 자유, 행복 추구가 포함된다."
버트런드 러셀, <행복의 정복>
요즘의 생존 경쟁이란 실상 성공 경쟁이나 다름이 없다. 누구나 경쟁을 할 경우에 두려워하는 것은 내일 아침의 끼니 걱정이 아니라 상대방보다 우세할 수 있느냐 하는 걱정이다. .... 성공하기를 바라고 또한 성공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의무이며, 따라서 성공을 거두지 못하는 자는 패배자라고 생각하는 한, 그의 사생활은 너무나 분주하고 걱정에 휩싸여 행복한 날을 전혀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의 행동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중대한 것이 못 된다. 또한 우리의 성공과 실패는 그다지 대단한 것이 아니다. 인간은 커다른 슬픔 속에서도 헤어날 수 있는 것이다. 인생의 행복에 종지부를 찍는 것처럼 생각되는 고민도 시간이 흐를수록 사그라져 나중에는 그 심각한 고통을 기억조차 못하게 된다. 그런데 자기중심적인 생각도 그렇거니와, 그보다도 인간의 자아는 이 세상에서 그렇게 대단한 것이 못 되는 것이다. 자기의 사상과 희망을 자기 이상의 존재자에게 집중시킬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어지간한 고민이라면 그 속에서 어떤 평화를 찾아낼 수 있다. 이러한 일은 철저한 이기주의자에게 발견할 수 없는 일이다.
참으로 만족스러운 행복은 자기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는 데 있으며,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완전히 실현하는 데 있는 것이다.
흥미의 분야가 넓어질수록 행복을 누릴 기회가 많아지며, 운명의 지배를 적게 받게 마련이다. 하나를 잃어버리면 다른 것으로 대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생은 모든 일에 대하여 한결같이 흥미를 느끼기에는 너무나 짧다. 그러나 하루하루를 충당하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일에 되도록 흥미를 느끼는 것은 좋은 일이다.
세계는 어떤 손실로 말미암아 치명상을 입을 만큼 비좁은 곳은 아니다. 한두 번의 실패로 패배하고 손을 드는 것은 결코 판단에 민감하다고 해서 치하할 일이 못 되며, 그것은 어디까지나 생명력의 파괴로서 슬퍼해야 할 일이다. 인간의 모든 사랑은 죽음에 지배된다. 죽음은 어느 때든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닥쳐올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활 터전이 있으면, 인생의 의의와 목적이 우연에 의해 지배를 받기 쉽다. 따라서 지혜롭게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은 먼저 생각의 중심을 세우고, 그 이외에 여러 가지 2차적인 흥미를 갖도록 힘써야 한다.
사뮈엘 베게트, <고도를 기다리며>
난 사람을 많이 만날수록 기쁘단 말이오. 아무리 하찮은 인간이라도 만나면 다 배울 점이 있고 마음이 넉넉해지고 더 많은 행복을 맛보게 되거든.
류시화,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자신이 걸어가는 길에 있는 것들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목적지에 도달해서도 행복하지 못하다.' ... 삶의 향기는 언제 목적지에 도착하는가의 여부와 관게없이, 우리가 걸어가는 길 중간중간에 피어 있는 들꽃 같은 얼굴들과 매 순간의 경험에서 우러나온다. 앞만 보고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담벼락에 핀 꽃을 보는 마음의 여유와 관심, 그곳에서 기쁨을 발견하는 쉬어 감이 그 여정을 풍요롭게 만든다.
김현성, <따시델레 티벳>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지 않은 사람은 행복하지 않다. - 퍼블릴리어스 사이러스
행복 ㆍ 김종삼
오늘은 용돈이 든든하다
낡은 신발이나마 닦아 신자
헌옷이나마 다려 입자 털어 입자
산책을 하자
북한산성행 버스를 타 보자
안양행도 타 보자
나는 행복하다
혼자가 더 행복하다
이 세상이 고맙고 예쁘다
긴 능선 너머
중첩된 저 산더미 산더미 너머
끝없이 펼쳐지는
멘델스존의 로렐라이 아베마리아의
아름다운 선율처럼.
오지혜, <지혜로운 생활>
젊고 아름답고 건강한 날은 금방 가니까, 오늘 지금 여기서 행복하기로 한다. 인생은 생각보다 기니까, 여유와 배짱을 좀 가지기로 한다. 사는 건 한번이니까, 내게 솔직해지기로 한다.그렇게 살아보기로 한다.
마이크 비킹, <휘게 라이프>
"행복은 어쩌다 한 번 일어나는 커다른 행운이 아니라 매일 발생하는 작은 친절이나 기쁨 속에 있다." - 벤자민 플랭클린
끝끝내 - 나태주
너의 얼굴 바라봄이 반가움이다
너의 목소리 들음이 고마움이다
너의 눈빛 스침이 끝내 기쁨이다
끝끝내
너의 숨소리 듣고 네 옆에
내가 있음이 그냥 행복이다
이 세상 네가 살아있음이
나의 살아있음이고 존재이유다.
버트러드 러셀, <게으름에 대한 찬양>
행복과 번영에 이르는 길은 조직적으로 일을 줄여가는 일이다.
문요한, <여행하는 인간>
니체의 말처럼 "가장 중요한 것들은 바로 길 위에 있었다." 나는 길 위에 있을 때 가장 순수했고, 가장 자유로웠으며, 가장 행복했고, 가장 많은 것을 배웠다.
강판권, <나무 철학>
행복을 위해서는 목표지향의 삶이 아닌 목적지향의 삶을 추구해야 한다. 스스로 왜 사는지를 매일매일 고민하는 사람은 결코 불행하지 않다.
목적지향적인 사람은 다양한 것에 가치를 두고, 하지 않은 일들을 시도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가치를 지니고 있고, 행복은 그 가치를 인정하는 자의 몫이다. 사람들 무척 부지런히 살면서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면 이는 자신이 하는 일에 큰 가치를 두지 않기 때문이다.
이진숙, <시대를 훔친 미술>
행복은 인간을 어린아이로 만들고, 고난은 인간을 철학자로 만든다.
사사키 후미오,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들에게 행복하게 보이기 위해 애쓴다. - 라 로슈푸코
'시간의 여유는 행복으로 직결되는 반면 물질의 풍요는 그렇지 않다.' - 팀 캐서
자기가 바라는 것을 갖는 건 커다란 행복이다. 그러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외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게 더 큰 행복이다. - 메네뎀
김화영, <행복의 충격>
'행복'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
엑상프로방스는 능률을 찾는 자, 시간이 바쁜 사람, 견문을 넓히려는 교양인, 소유의 노예들, 그리고 돈으로 살 수 있는 모든 것을 요구하는 이들에게 일체의 환상을 거부한다. ... 누구나 영원한 봄, 영원한 여름을 프로방스의 자산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햇빛이 참으로 우리들의 눈이 아니라 프로방스의 속담처럼 '나의 살을 노래하게 하는 것'이 되기 위해서 모든 부질없는 허영을 버릴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 지중해안의 따뜻한 가슴, 프로방스는 완전히 절망한 사람이 올 곳은 아니다. 오직 행복한 자, 아무것도 소유한 것이 없이도 이 땅 위에 태어난 것이 못 견디게 기뻐지는 자들만이 올 곳이다. 아니 적어도 많은 절망의 한구석에 아직 저 필사의 모든 생명들이 공유하는 생명의 행복감, 우리들의 건강한 육체가, 죄 없는 육체가 아는 행복감의 씨앗을 아직 죽이지 않은 자들만이 올 일이다.
머나먼 미래를 준비하기 위하여 현재의 행복을 끊임없이 희생하며 살아온 사람들에게 지중해안의 사람들은 철부지같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스티븐 그린블랫, <1417년, 근대의 탄생>
인생의 최고 목표는 쾌락의 증진과 고통의 경감이다. 인생은 행복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자신과 벗의 행복이라는 이 목적을 이루려는 것 이상으로 더 고귀한 윤리적 목적은 없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열광하는 부(富)라는 것이 많은 경우에서 무의미하며 더 행복한 인생을 만드는 것과는 거의, 어쩌면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을 이성적으로 알고 있다. "멋지게 장식한 불타는 듯한 주홍빛 옷을 입고 뒹군다고 해도 평범한 옷을 입고 몸져누워 있는 것보다 타는 듯한 열병이 더 빨리 가라앉지 않으리니." 그러나 신과 사후세계에 대한 공포에 저항하기 힘든 것처럼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위해서 열정적으로 물욕과 정복욕을 발휘하여 안전을 더욱 공고히 하겠다는 강박관념을 버리기도 힘들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들은 결국 행복의 가능성을 줄이고 모두를 파멸의 위험 속으로 밀어넣을 뿐이다.
쾌락에의 가장 큰 장애물은 고통이 아니라 망상이다. 인간의 행복을 방해하는 주요한 적은 유한한 세계에서 가능한 그 이상을 얻으려는 환상인 과도한 욕망과 삶을 좀먹는 공포이다. ... 실제로는 꿈에 불과한 것을 소유하려는 욕구, 마음을 파고들며 끝내 전소시키고 마는 그 망상적인 소유욕이 문제인 것이다.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인간은 권력을 확득하는 데는 매우 능하지만 권력을 행복으로 전환하는 데는 그리 능하지 못하다.
행복이란 불쾌한 순간을 상쇄하고 남는 여분의 즐거움의 총합이 아니라, 그보다는 개인의 삶을 총체적으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으로 바라보는 데서 오는 것이다. 행복에는 중요한 인지적, 윤리적 요소가 존재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아기 독재자의 비참한 노예'로 볼 수도 있고, '사랑을 다해 새 생명을 키우고 있는 사람'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그 큰 차이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가치체계다. 니체가 표현한 대로, 만일 당신에게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면 당신은 어떤 일이든 견뎌낼 수 있다. 의미 있는 삶은 한창 고난을 겪는 와중이더라도 지극히 행복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의미 없는 삶은 아무리 안락할지라도 끔찍한 시련이다.
법인 스님, <검새의 시대, 사유의 회복>
진정한 힐링은 나를 내 삶의 주체로 세우고 독창적으로 살아갈 때 가능하다. 이를 통해 자유와 행복은 성취된다. 스티브 잡스가 생전에 암 진단을 받고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시간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삶을 사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의 마음과 당신의 직관이 내는 소리에 따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진짜 하고 싶은 것을 이미 알고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행복을 꿈꾸고 있다. '인생에 주어진 의무는 아무것도 없으며, 그저 행복하라는 한 가지 의무뿐'이라는 헤르만 헤세의 말처럼 우리 모두는 행복해야 한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접하는 행복의 담론은 거의 모두가 성공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그 성공의 척도는 '부자가 되는 것'이다.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좋은 대학을 졸업해야 하고 고액 연봉을 주는 직장에 취업해야 한다. 할아버지의 재력과 엄마의 정보력, 그리고 아이의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명문 대학에 입학할 수 있고 그 바탕으로 '가문의 영광'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까지 나오는 현실이다. 국가는 늘 경제대국을 외치며 경제 발전을 국정의 최우선 목표로 삼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깃발 아래 무한경쟁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 온 힘을 다해 매진하라고 독려하고 있다. 높은 지위, 많은 돈, 좋은 직장, 드높은 명예 등 이른바 성공의 조건이라는 것이 과연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고 있을까. 답은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이다. 왜 그런가. 행복하다는 것은, '지금' '여기서' '내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진실로 행복하다면 이런 것들이 결코 불행의 재료가 될 수 없으며, 거부의 대상도 아닌 것이다. 그러나 또 이렇게 생각해 보자. 이런 것들이 충족되어 있어도 내가 진실로 행복하지 않다면, 이런 것들은 결코 나를 행복하게 하는 절대적 조건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인도 뱅갈의 성자 라마크리슈나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행복하지 않다면 집과 돈과 이름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리고 당신이 이미 행복하다면 그것들 또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렇듯 행복은 객관적 환경과 조건에 의해 규정되는 '절대적 실체'가 아니다. 따라서 행복은 지금, 여기서, 내가, 마음으로, 의미로 구성하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다. 달리 말해서 내가 행복하다고 느끼면 나는 행복한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상을 꿈꾸어야 하고 그 이상을 실현해야 한다. 그 이상은 개인과 사회가 삶의 방향을 바꾸는 데서 시작된다. 행복의 내용을 바꾸어야 한다. 과욕에서 소욕지족으로, 경쟁과 상극에서 협동과 상생으로, 획일과 차별에서 평등과 개성으로, 목표와 욕망에서 의미와 나눔으로, 그리하여 동상이몽이 아닌 동몽이상의 화엄세계를 꿈꾸고 실현해야 한다. 이처럼 모두가 긴장과 강박에 시달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삶의 방향 전환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현실'이다.
행복하다는 것은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송이 꽃과 바람소리, 물소리에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사람, 이웃의 슬픔과 고통에 절로 가슴 아파하는 사람, 소박한 음식 앞에서 맛을 느끼는 사람이 바로 행복한 사람이다..... 산과 빌딩, 자동차와 새 소리, 사람 소리와 물소리, 산바람과 매연, 한적함과 번잡함에 대해 차별하지 않고 오히려 연민과 사랑을 갖겠노라 다짐한다.... 무엇이 있어도 있는 경우가 있고, 무엇이 있어도 없는 경우가 있다. 마음을 열고 눈을 열고 귀를 열면 바로 그 앞에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눈앞에 있어도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길을 선택하여 살아가는 까닭은 행복하기 위해서이다. 무의미하고 불행하기 위해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것들을 온전히 '느끼며' 사는 것이 아닐까. 아무리 크고 비싼 집과 재물을 갖고 있고, 권력과 명예를 갖고 살아간다 해도 가치 있고 의미 있는 느낌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 아니다. 행복하다는 것은 느낄 수 있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한 송이 꽃과 바람소리, 물소리에 아름다움에 느낄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이웃의 슬픔과 고통에 절로 내 가슴에 아픔이 느껴지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소박한 음식 앞에서 맛을 느끼는 사람이 먹을 줄 아는 사람이다. 서로 만나 웃고 이야기 하며 사랑과 우정의 느낌을 함께하는 사람, 그러한 사람이 바로 행복한 사람이다.
박웅현, <다시, 책은 도끼다>
짧은 길을 긴 시간을 들여 여행한 사람은 경험상 행복한 사람입니다. - 포구 기행
행복을 추구하는 한 너는 / 행복할 만큼 성숙해 있지 않다. / 가장 사랑스러운 것들이 모두 너의 거일지라도 // 잃어버린 것을 애석해하고 목표를 가지고 초조해 하는 한 / 평화가 어떤 것인지 너는 모른다. // 모든 소망을 단념하고 / 목표와 욕망을 잊어버리고 / 행복을 입 밖에 내지 않을 때 // 그때 비로소 세상일의 물결은 / 네 마음을 괴롭히지 않고 / 너희 영혼은 마침내 평화를 찾는다. - 헤르만 헤세, [행복]
레프 톨스토이,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삶이 곧 끝나버린다고 생각하며 살라. 그러면 남은 시간이 선물로 느껴질 것이다. 현재의 삶은 최고의 축복이다. 우리는 다른 때, 다른 곳에서 더 큰 축복을 얻게 되리라 기대하며 현재의 기쁨을 무시하고는 한다. 지금 이 순간보다 더 좋은 때는 없다.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복을 바란다. 하지만 복은 이미 주어졌다. 타인을 사랑한다면 쉽게 복을 얻을 수 있다. 행복해지려면 한 가지만 하면 된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 그러면 끝없는 축복과 행복을 얻을 것이다. 모든 생명체와 더불어 사랑 속에서 살게 되면 고통과 고난의 삶이 순식간에 행복과 축복의 삶으로 바뀌게 된다. 축복은 사랑으로 가득 찬 심장 안에 있다.
다카무라 토모야, <작은 집을 권하다>
수요와 공급을 억지로 만들어내는, 자신의 목을 스스로 조르는 이러한 경제는 차라리 '쳇바퀴'라고 표현하는 편이 어울린다. 풍요로워졌다, GDP가 늘었다, 돈이 늘었다고 하면 듣기야 좋겠지만 실제로 증폭하는 건 욕망과 시기심 그리고 지루하고 가혹한 장시간의 노동뿐이다. 쳇바퀴 경제는 일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 욕망이나 시기심에 떠밀린 노동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도 없다.
경제적 자유(얼마든지 쓸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빚이 없고 매월 나가는 고정비가 적다는 의미에서)와 시간적 자유(오프그리드에서 생활하기 위해 다소의 관리는 필요하지만 내킬 때 하면 된다는 점에서)를 바탕으로 나름의 행복을 추구하며 살다가 어느 날 문득 돌아봤을 때 자신만이 아니라 지구환경에도 유익한 집과 생활이 완성되어 있는 삶을 추구한다.
테미 스트로벨, <행복의 가격>
물질만능주의는 우리를 실제로 행복하게 만드는 삶의 두 가지 주요 측면을 빼앗아간다. 그것은 바로 자기가 사랑하는 일을 하며, 튼튼한 인간관계를 쌓는 것이다.
자유와 행복과 직접 관계가 있는 건 돈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우리의 선택이다.
애덤 스미스 원저, 러셀 로버츠 지음, <내 안에서 나를 만드는 것들>
'행복이란 감정은 사랑받는다는 느낌으로부터 생겨난다.' .... 내가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리는 진정한 행복을 느낀다. 반대로 내가 미움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리는 깊은 불행을 느낀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제 3인류>
스스로 행복을 찾을 수 없는 사람, 자신의 행복이 외부의 어떤 사람에게 달려 있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하다.
김동우, <트레킹으로 지구 한바퀴>
여행은 가끔 생각지도 않은 장소와 상황에서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며 기쁨과 행복을 안겨준다. 우린 그걸 '인연'이라 부른다.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
행복이란 것은 그것이 부족할 때 더 간절해지는 법이다. 행복이란 손 닿는 곳에 있을 때 바로 잡아야 한다.
리사 나폴리, <행복한 라디오>
부탄의 국왕은 화폐 가치의 복잡한 행렬로 이루어진 국민 총생산(GNP : Gross National Product)을 대신하여 한 국가의 척도를 나타낼 수 있는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 냈다. 그는 여기에 국민 총행복(GNH : Gross National Hapiness)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어떤 의미로든 국민의 희생을 대가로 하는 경제 발전은 진정한 발전이 아니라는 것이 그의 철학이었다. 부탄의 전통과 환경을 위협하는 세력은 신중히 경계해야 할 대상이며 도입할 가치가 없었다. 국왕은 상품과 현금을 생산하는 것보다, 상승하는 그래프를 만들기 위해 무분별한 성장을 추구하는 것보다, 국민의 행복이 먼저 고려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경제적이고 물질적인 성공보다 삶의 질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남을 함부로 짓밟고 올라서서 성공을 도모하는 삶보다는 다른 인간을 향한 연민과 협력을 근본적인 미덕으로 삼는 삶이 필요하며, 이것이 국민 총행복이 추구하는 가치였다.
내가 행복할 수 있는 것은 앞으로 어떤 일이 닥쳐오더라도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나 자신에 대한 신뢰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나는 인생에서 바라는 것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나는 더 이상 어떤 일이 일어나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변화시켜 주기를 기대하지 않았다. 삶은 이미 내 주변에 충만하게 가득 차 있었다. 나는 남들에게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진리를 깨달았다.
로버트 M. 피어시그,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선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사람들마다 이를 다르게 정의하고 있는 것이 현실인데, 선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어떤 사람은 선을 행복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행복이 무엇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리고 행복에 대한 정의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겠는가? 행복과 선은 객관적 용어가 아니다. 우리는 이들을 과학적으로 다룰 수 없다. 아울러, 그것들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만 우리들 마음속에 존재하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만일 당신이 행복해지고 싶다면 당신의 마음만 바꾸면 될 것이다.
A. L. 바라바시, <버스트>
사람들의 행복과 안녕은 친구의 수와 질에 달려 있다고 한다.
타사 튜터, <타샤의 집>
기쁘게 일하고, 해놓은 일을 기뻐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 괴테
이권우, <여행자의 서재>
행복한 여행의 가장 큰 준비물은 가벼운 마음이다. - 생텍쥐페리
미하엘 엔데, <모모>
"시간은 삶이며, 삶은 우리 마음 속에 깃들여 있다는 것이다." 사실 시간이란 달력과 시계로 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시간 동안 어떤 일을 겪었는가에 따라 다른 의미를 지닌다. 그러기에 시간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각각 다른 모습으로,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막연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시간이란 소중한 비밀을 너무 소홀히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닐까? 목표를 이루고 나면 행복을 거머쥘 것 같지만 정말 그럴까?
도정일, <별들 사이에 길을 놓다>
인간의 행복을 욕망의 규모와 소유의 크기로 계산해주는 것이 자본주의의 행복 모형이라면 붓다가 제시한 것은 욕망의 축소, 단절, 무소유의 모형이다. 근대 이후 사회에서 소유의 위력이 한층 커진 것은 소유가 인간의 행복만이 아니라 자유까지도 확대해준다는 산술이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이 산술로 따지면 자유는 지갑의 두께에 비례한다. 그러나 붓다적 자유의 모형은 돈지갑과 관계없고 두둑한 지갑과는 더더구나 관계없다. 지갑의 노예는 노예이지 자유인이 아니다. 소유의 즐거움을 내세우는 자본주의 행복론 앞에서 소중하게도 정확히 그 반모형을 제시해주는 것이 붓다의 행복론이자 자유론이다. 그러나 세속의 삶은 욕망과 소유의 충동을 벗어날 수 없다.
물질적 삶의 안정과 풍요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행복감을 느끼지 못할 때, "나는 왜 사는가?"라는 질문과 "내 삶을 의미 있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끊잆없이 제기될 때, 사람은 의미의 위기를 경험한다.
행복은 "내가 행복을 찾아야 하는데" 하고 쫓아다니는 사람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에게 선물처럼 찾아오는 것 같아요.
야오간밍, <노자강의>
베푸는 것이 받는 것보다 훨씬 행복하다.
헬라레나 노르베리 호지, <오래된 미래>
일상에서 삶의 기쁨과 행복을 느끼는 차이는 넓고도 포괄적인 자아의식을 지니고 두려움과 자기보호의 경계선 뒤로 움츠러들지 않아야 한다.
정지훈, <무엇이 세상을 바꿀 것인가>
'행복은 내가 사랑하고, 잘하고, 세상이 원하는 것의 교차점에 있다. Happiness comes from the intersection of what you love, what you're good at, and what the world needs'
박웅현, <책은 도끼다>
행불행은 조건이 아니다, 선택이다. 행복은 추구의 대상이 아니라 발견의 대상이다.
법정 스님,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행복의 비결은 필요한 것을 얼마나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져 있는가에 있다. '위에 견주면 모자라고 아래에 견주면 남는다'는 말이 있듯 행복을 찾는 오묘한 방법은 내안에 있다.
마음이 맑고 투명해야 평온과 안정을 갖는다. 마음의 평화와 안정이야말로 행복과 자유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현대인의 불행은 모자람이 아니라 오히려 넘침에 있다. 모자람이 채워지면 고마움과 만족함을 알지만, 넘침에는 고마움과 만족이 따르지 않는다. 우리가 불행한 것은 가진 것이 적어서가 아니라 따뜻한 가슴을 잃어 가기 때문이다. 따뜻한 가슴을 잃지 않으려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동물이나 식물 등 살아 있는 생물과도 교감할 줄 알아야 한다.
소유와 소비 지향적인 삶의 방식에서 존재 지향적인 생활 태도로 바뀌어야 한다. 소욕지족, 작은 것과 적은 것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누리는 행복은 크고 많은 것에서보다 작은 것과 적은 것 속에 있다. 크고 많은 것만을 원하면 그 욕망을 채울 길이 없다. 작은 것과 적은 것 속에 삶의 향기인 아름다움과 고마움이 스며 있다.
아잔 브라흐마, <술취한 코끼리 길들이기>
실제의 불만족과 행복의 부재를 심화시키는 것은 바로 이 '내려놓지 못하는 마음' 이다
진정한 만족은 원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마음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욕망의 자유가 아니라 욕망으로부터의 자유, 세상에는 행복이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고 그 원하는 마음을 내려놓는 일이다. 고타마 붓다가 깨달은 첫 번째 진리가 '행복의 부재'였다면, 그의 두 번째 진리는 '세상에는 행복이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고, 행복을 원하는 그 마음을 내려놓으라'는 것이었다. 그것이 곧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길이므로.
원한다는 것은 곧 고통이다. 당신이 갈망하는 코끼리를 소유하려고 하는 시도, 조종하는 것, 생각하는 것, 계획하는 것 모두가 고통의 원인이 될 수밖에 없다. 원하는 것에는 끝이 없지만, 원하는 것으로부터의 자유에는 끝이 있다. 만일 당신이 전혀 원하는 것이 없고 계획도 필요없다면, 얼마나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을까? 만일 당신이 진정으로 내려놓는다면 거기 모든 문제는 사라진다. 당신은 이미 코끼리 등 위에 올라앉아 있다. 이것은 깨달음의 아름다운 순간이다.
행복과 고통을 거의 같은 비율로 얻는 것이 삶의 본질이다. 만일 우리가 지금 고통에 처해 있다면, 이것은 우리가 전에 받거나 잃은 행복 때문이다. 행복은 고통의 끝이 아니고, 고통은 행복의 끝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 이 순환을 돌고 있을 뿐이다. 조금 놓아 버리면 조금의 평화가 오고, 크게 놓아 버리면 큰 평화를 얻을 것이다. 만일 완전히 놓아 버린다면 완전한 평화와 자유를 얻을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을 상대로 한 그대의 싸움은 끝이 날 것이다.
류콴홍, <철학우화>
가장 단순한 방법으로 가장 기본적인 생존의 필요를 만족시켜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일 것입니다. 일단 재물과 명예, 권력같은 것을 포기하면 인간의 욕망도 단순해지고 인간의 생활 역시 평온해지게 마련이랍니다. 살아가는 데 꼭 필요치 않은 요구를 줄이고 스스로 즐길 수 있는 평범한 생활을 누리는 것이야말로 에피쿠로스가 주장한 행복의 정의지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픽션들>
문학이 줄 수 있는 많은 행복 중 최고의 것은 상상
존 로빈슨, <인생혁명>
소비가 행복한 인생을 위한 수단이라면 '최소한의 소비로 최대한의 행복을 얻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클레이트 M. 크리스텐슨, <당신의 인생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집에 있는 가족의 품속에서 보낸 얼마 안 되는 시간이었다. - 토머스 제퍼슨
나는 가족과 친구들과의 관계가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행복의 원천 중에 하나라고 진심으로 믿고 있다. 이 말이 단순해 보일지는 몰라도, 어떤 중요한 투자와 마찬가지로 인간관계들은 지속적인 관심과 배려가 필요하다. 그런데 계쏙해서 관계에 관심과 배려를 투자하지 못하게 막는 두 가지 힘이 존재한다.
첫째, 우리는 자원을 더 즉각적인 결과를 안겨다줄 다른 곳에 투자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둘째, 가족과 친구들은 우리에게 관심을 달라고 큰 소리로 외치는 법이 좀처럼 없다. 그들은 우리를 사랑하지만 또한 우리의 사회생활을 도와주고 싶어한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다 보면 결국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관심을 가져야 하는 사람들을 무시하기에 이른다. 좋은 돈과 나쁜 돈 이론은, 행복을 가져다줄 인간관계를 구축하는 데 시계가 애초부터 작동되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관계를 육성하고 개발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인생에서 중요한 도전적 시간을 극복해야 할 때 사람들은 우리를 도와주거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행복의 원천 가운데 하나로서 우리 곁에 머물지 않을 것이다.
박노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다 다르다 ... 삶은 숫자가 아니라고 / 행복은 다 다르다고 / 사람은 다 달라서 존엄하다고
조정래, <정글만리>
시간의 흐름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행복이다.
강신주, <감정수업>
사랑의 감정은 바로 우리를 현재에 살도록 하고, 안전한 삶에 대한 생각은 우리를 미래에 살도록 만든다. 안전한 삶을 위해 현재의 열정적인 감정을 교살하는 삶,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삶이 과연 행복할까? 절대 그럴 수 없다. 왜냐고? 지금은 미래로 보이는 때도 언젠가 우리에게 현재로 다가올 테니까. 그렇게 우리는 이미 현재가 된 미래에서도 또 다른 미래를 위해 '지금 이 순간'을 포기하게 될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미래에 더 큰 가치를 두느라 현재를 부정하는 삶이 이르게 되는 종착역은 바로 죽음이다. 이것은 유한한 삶의 진실이다. 그러니 현재 누려야 할 행복과 기쁨을 미래로 미루지 말라!
박웅현, <여덟단어>
개는 밥을 먹으면서 어제의 공놀이를 후회하지 않고 잠을 자면서 내일의 꼬리치기를 미리 걱정하지 않는다. '개들은 원형의 시간을 살고 있다. 행복은 원형의 시간 속에 있다'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행복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선 이자리를 행복의 공간으로 전환시키는 것.
파울로 코엘료, <아크라 문서>
패배해본 적 없는 사람들은 겉으로는 행복하고 우월하며 진리에 통달한 듯 보이지만, 사실상 그런 진리를 얻기 위해 손가락 하나 까딱한 적도 없다. 그들은 능 강자의 옆에 붙어서, 하이에나처럼 사자가 먹고 남긴 찌꺼기들을 주워먹으며 살아간다.
도정일,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21세기 초 도시 중산층 이상의 한국인을 지배하는 정신 상태는 두 개의 강력한 '코드'에 관통당해 있다. 더 날씬한 은유가 생각나지 않아 좀 투박하게 대놓고 말하자면, 하나는 '탐욕의 코드'이고 또하나는 '선망의 코드'이다.
탐욕의 코드는 폴 새뮤얼슨이 말한 자본주의적 '행복 방정식'을 따른다. 이 경제학자가 소개한 계산법에 의하면 행복(H)은 욕망(D) 분의 소비(C)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얼마만큼 소비했는가"가 나의 행복을 결정한다. 소비를 소유로 바꿔놓으면 이해하기 쉽다.
선망의 코드는 "저 자는 갖고 있는데 나는 없어, 이건 안되지, 암 안 될 일이고말고"라고 사람들을 들쑤셔 견딜 수 없게 만드는 전염성 질투의 부호다. 저 사람이 갖고 있는 것은 나도 가져야 한다. 내가 저 인간만큼 갖지 못한다면 나는 불행하다. 내가 가질 행복을 저 자가 갖고 있네그랴? 저런 도둑놈, 내 행복을 훔쳐가다니, 화가 치미는 바로 그 순간에 질투의 여신이 나타나 행복에 이르는 길을 확인시켜준다. 저 자가 가진 것은 너도 가져라, 뺏고 훔쳐서라도. 그러면 행복은 네것이다. 아니, 너는 저 자가 가진 것 이상으로 가져야 해.
탐욕과 선망의 부호가 행복 방정식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일찌감치 알려준 것은 석가모니다. 욕망의 크기는 무한해서 그것을 충족시킬 방도가 없다는 것, 그것을 알게 된 것이 붓다의 '깨침' 가운데 하나다. 욕망은 일정량의 크기로 묶이지 않는다. 100을 바라던 욕망은 그 100을 소유하는 순간 200으로 불어나고, 200을 갖는 순간 300으로 커져 달아난다. 욕망의 크기를 정할 수 없기 때문에 소유를 키우는 방법으로 행복에 도달한다는 것은 신기루 잡기다. 그러므로 욕망의 크기를 줄여라. 그것만이 평온에 이르는 길이다. 욕망이 제로일 때는 제로의 소유만으로도 너는 행복하다. 재갈을 물릴 수 없는 무한 욕망이 탐욕이다. 그 탐이 충족되지 않아 너를 화나게 하고 질투하게 하는 것이 '진, 분노'이며 이 간단한 진리를 모르는 것이 '치, 어리석음'다. 그러므로 욕망을 다스려라, 줄여라, 끊어라, 그리고 평화로워라, 친구여.
만약 행복의 추구가 불행의 완벽한 제거와 고통의 완벽한 회피에 목표를 둔다면 그 목표는 달성 불가능할 뿐 아니라 그 자체가 고통의 기원이 된다. 완벽한 행복의 추구란 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이미 삶의 진실이 아니며, 인간 사회의 도덕적 이상도 아니다.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법을 열심히 찾아 헤매야 하는 사회는 행복한 사회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절망의 사회다.
- '행복방정식' 중에서
존러스킨, <나중에 온 이사람에게도>
사람이 자기가 하는 일에서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그 일을 좋아하고, 그 일을 지나치게 해서는 안되며, 그 일이 성공하리라는 생각을 품고 있어야 한다는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스티브 디거, <잠들기 전에 읽는 긍정의 한줄>
행복은 스스로 찾는 것 (J. E. 부시로즈, J. E. Buchrose)
행복은 사랑받기보다 사랑을 줌으로써 오며, 사랑 때문에 상처 입은 것처럼 보이더라도 실제로는 자만심 때문인 경우가 흔하다. 사랑하고 그로써 상처 입는 것, 또다시 사랑하는 것, 이것이 용감하고 행복한 삶이다.
좋아하는 일을 하라 (존 D. 록펠러 3세)
행복으로 가는 길은 두 가지 원칙 위에 놓여 있다. 내가 좋아하고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을 찾은 다음, 거기에 온 힘을 다하는 것이다. 내가 가진 에너지, 야망, 그리고 타고는 재주 등을 하나도 남김없이.
The road to happiness lies in tow simple principles: Find what interest you and that you can do well, and put your whole soul into it-every bit of energy and ambition and natural ability that you have.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가 (벤자민 프랭클린)
미국 헌법은 행복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 추구를 보장한다. 이것을 따라잡는 것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다.
행복은 내안에 있다.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행복은 자급자족할 수 있는 사람의 것이다. 외부에서 찾은 행복과 즐거움의 원천들은 모두 그 본질상 불확실하고 불안정하고 허무하고 무상하게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Happiness belongs to those who are sufficient unto themselves. For all external sources of happiness and pleasure are, by their very nature, highly uncertain, precarious, ephemeral and subject to chance.
인생의 나이는 길이보다 의미와 내용에서 평가되는 것이다. 누가 오래 살았는가를 묻기보다는 무엇을 남겨주었는가를 묻는 것이 역사이다.
이기주의자는 사랑을 못한다. 사랑할 자격을 스스로 포기한다. 그래서 가정과 사회에서 외면당하거나 버림을 받는다.
나는 지금도 성공보다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행복하며, 유명해지기보다는 사회에 기여하는 인생이 더 귀하다고 믿는다.
이기적인 경쟁은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고, 선의의 경쟁은 성장과 발전을 초래하나, 사랑이 있는 경쟁은 행복을 더해준다고 믿는다.
의사가 환자를 치료할 때는 약으로 치료하는 처음 단계가 있고, 주사를 쓰는 다음 단계가 있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는 수술이다. 그것이 바로 대화, 토론, 투쟁의 순서에 해당한다. 이 수술의 단계는 역사적으로는 혁명의 단계인 것이다.
인간은 생명에 대한 지나친 욕심 때문에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느끼며 절망에 빠져 불행과 고통을 스스로 만들어간다. 자연의 섭리는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신체적 기능이 끝나는 죽음에 대해 좀 더 이성적이고 운명적인 해석을 내려도 좋을 것 같다. ... 죽음을 예상하기 이전보다 죽음을 맞게 될 것을 알았기 때문에 더욱 최선을 다하겠다는 각오를 다짐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아직도 내 인생이 오래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삶의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묻지 않는다. 아직 좀 더 많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 인생 최고의 희망이다.
Now, I understand that there is no room for ‘IFs,’ or ‘BUTs’ in life. 이제는 인생에 있어 ‘만약’이나 ‘하지만’이란 말을 쓸 여유가 없음을 이해한다.
Take your time / Take a few days to think over my offer. 며칠 여유를 갖고 제 제안을 생각해 보세요
'여유'라는 단어는 수많은 스승들의 가르침, 문학 작품과 여러 형태의 글에 단골로 등장한다.
'나는 나를 지나쳐 왔다' - 박노해
인생이 너무 빨리 지나간다
나는 너무 서둘러 여기까지 왔다
여행자가 아닌 심부름꾼처럼
계절 속을 여유로이 걷지도 못하고
의미있는 순간을 음미하지도 못하고
만남의 진가를 알아채지도 못한 채
나는 왜 이렇게 삶을 서둘러 멀어져 왔던가
달려가다 스스로 멈춰서지도 못하고
대지에 나무 한그루 심지도 못하고
아닌건 아니라고 말하지도 못하고
주어진 것들을 충분히 누리지도 못했던가
나는 너무 빨리 서둘러 왔다
나는 내 삶을 지나쳐 왔다
나는 나를 지나쳐 왔다
정철의 <불법사전>
여유, 여유있게 사는 여섯 가지 방법
시계를 자주 보지 않는 것. 조급한 사람은 시간의 명령에 따라 움직인다.
나이를 자주 묻지 않는 것. 조급한 사람은 세월을 붙잡으려고 헛힘을 쓴다.
남의 말을 끝까지 듣는 것. 조급한 사람은 대화에서도 도로에서도 꼭 끼어든다.
위에서 내린 세 가지 정의를 외우려고 하지 않고 그냥 흘려듣는 것. 나중에 정의가 필요한 그 순간에 생각나는 여유로운 그림을 내놓는 것.
미리미리 대답을 생각해두지 않는 것. 정답은 이거라고 서둘러 결론짓지 않는 것.
이렇게 같은 얘기를 여러 차례 반복해도 짜증내지 않고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주는 것.
법륜 스님, <인생수업>, "적게 먹고, 적게 입고, 소박하게 살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해서 있던 돈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음의 여유가 생깁니다. 반면에 많이 먹고, 많이 입고, 많이 쓰겠다는 마음을 내면 돈이 많은데도 부족함을 느낍니다. 부족함을 느끼면 가난한 자가 되고, 여유가 있으면 부자가 되는 거예요."
혜민 스님, <고요할수록 밝아지는 것들>, "우리가 궁극적으로 도달하기 원하는 행복이나 여유, 평화로움은 계속해서 뭔가를 구하는 마음이 쉴 때 비로소 경험하게 된다."
혜민 스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진중함이나,
무조건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고 즐기는 것입니다.
유머가 있을 때 삶이 풍성해지고 여유가 생겨요.
지금까지 우리는 너무 성실과 노력만을 따져왔습니다.
그러니 얼굴이 굳어 있고 마음이 항상 급한 것입니다.
최인철 교수, <굿 라이프>,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채움으로 채우려고 하지만, 행복한 사람은 비움으로 채우려고 한다. 시간과 돈의 여유가 없어서 나누어줄 수 없다고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하소연할 때, 행복한 사람은 나누지 않으면 시간과 돈의 여유는 갈수록 없어진다는 믿음으로 나눔을 실천한다."
롤프 포츠, <VAGABONDING 여행의 기술>, "단순하게 살아갈 때 대담해질 수 있고, 낯선 땅과 가슴으로 만날 수 있다. 또한 당신의 열정과 호기심을 좇아 독립심을 가지고 새로운 길을 걷는 것을 허락하는 것도 바로 단순한 삶이다. 집에서나 길에서나 단순하라! 그래야 지금까지는 거의 무시되어 왔지만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것, 즉 당신의 삶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는 시간의 여유가 허락될 것이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인생수업>,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강한 사람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에서 힘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모든 여유로움은 우리가 가진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터 나옵니다. 진정한 힘과 행복은 감사하는 마음이 그리는 미술 작품 속에 있습니다. 자신이 현재 가진 것에 감사하는 일,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감사하고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갖고 나온 것에 감사하는 일. 자신의 독특함에 감사하는 일..."
유현준,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아마도 우리나라의 정자가 이러한 종류의 자연과 대화를 가능케 하는 건축물이 아닌가 생각된다. 정자는 물의 가운데 위치해서 주변을 바라볼 수 있게 되어 있다. 자연과 건축물 사이의 물로 확보된 빈 공간에서 인간이 사유할 수 있는 여유를 주는 건축이라 할 수 있겠다. 이 같은 디자인은 자연을 극복할 대상으로 생각하지도 않고, 이용할 대상으로도 생각하지 않고, 다만 자연을 대화의 상대로 보는 동등한 관계 설정이 있고서야 나올 수 있는 디자인이다. 인간관계에서도 그러하듯이 디자인에서도 자연환경을 동등한 대화의 상대로 보는 것이 가장 성숙한 디자인의 방식이다."
박종인, <기자의 글쓰기>, "장면전환적인 국면을 만들어 숨을 쉬게 만든다. 이때까지 긴장했던 독자들에게 여유를 주며 긴장을 풀어줬다가 마지막에 한 방을 쳐올려본다. 결론은 뒤로 한 걸음을 후퇴했다가 내지를 때 더 무섭다."
류시화,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자신이 걸어가는 길에 있는 것들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목적지에 도달해서도 행복하지 못하다.' ... 삶의 향기는 언제 목적지에 도착하는가의 여부와 관게없이, 우리가 걸어가는 길 중간중간에 피어 있는 들꽃 같은 얼굴들과 매 순간의 경험에서 우러나온다. 앞만 보고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담벼락에 핀 꽃을 보는 마음의 여유와 관심, 그곳에서 기쁨을 발견하는 쉬어 감이 그 여정을 풍요롭게 만든다."
오지혜, <지혜로운 생활>, "젊고 아름답고 건강한 날은 금방 가니까, 오늘 지금 여기서 행복하기로 한다. 인생은 생각보다 기니까, 여유와 배짱을 좀 가지기로 한다. 사는 건 한번이니까, 내게 솔직해지기로 한다.그렇게 살아보기로 한다."
강판권, <나무철학>, "나무는 잎을 버린 뒤에야 여유를 찾는다. 잎을 달고 있을 때는 풍요롭지만 여유가 없다. 인간도 몸이 가벼워진 뒤라야 여유로울 수 있다. 여유는 비어 있는 여백과 같다. 나무가 잎을 떨어뜨리면 가지와 가지 사이에 여백이 생긴다. 겨울나무는 사람들이 겨울에 옷을 껴입고 움츠리는 것과 달리 옷을 입지 않고도 힘차게 생동한다. 여유가 있어야 자유롭다. 잎 떨어진 나무는 절대 자유 그 자체다. 충만한 기운으로 가득 찬 겨울나무의 모습은 인간이 가야 할 길을 안내하는 나침반이다."
도정일, <별들 사이에 길을 놓다>, "인간의 성장 속도가 느린 것은 그 느린 과정에 의해서만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능력들이 자라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조생 밀감이 아니다. 신의 설계이건 자연선택의 결과이건 간에 사람을 사람으로 키우는 과정은 느려야 하고 숨통 조이지 않는 것이어야 하며 여유로워야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아이들을 키우는 방법은 느림, 자유, 여유와는 정반대의 것이다. 속도의 포로가 된 어른들은 모든 아이들에게 어른에게나 적용될 속도계를 강요한다."
팀 캐서 '시간의 여유는 행복으로 직결되는 반면 물질의 풍요는 그렇지 않다.'
윌리엄 파워스, <속도에서 깊이로>, "속도가 곧 미덕인 오늘날 종이 수첩의 또 다른 장점은 바로 디지털 세상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단순한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보의 속도를 늦추고 마음을 여유롭게 한다. 스크린 안의 활동은 늘 변화하며 덧없이 사라진다는 점에서 매우 가볍다. 하지만 가끔은 무겁게 가라앉을 필요도 있다."
안동규, <길의 철학>, "길은 도로와 다르다. 길은 걷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고 도로는 차와 산업과 경제를 위해서 만든 것이다. 길은 자연스럽게 생긴 것이고 도로는 사람이 만들고 개발한 것이다. 길 위에는 인생과 삶과 철학이 있고 도로 위에는 산업과 경제와 과학이 있다. 길은 소통이고 도로는 속도다. 방향 중심이 길이고 속도 중심이 도로다. 도로에는 일이 있지만 길에는 관계가 있다. 도로에는 차가 있고 길에는 사람이 있다. 도로는 사업을 위해서 바쁘고 길은 만남을 위해서 여유롭다. 도로는 도시 중심이고 길은 지역과 시골 중심이다. 도로는 집권적이고 중앙 집중적이지만 길은 분권적이고 지역 중심적 분산적이다."
야마구치 세이코, <버리고 비웠더니 행복이 찾아왔다>, "여유롭고 단순한 삶을 살려면 가장 먼저 소유한 물건부터 버리고 마음도 비워야 한다. 우리는 뭔가를 추구하다 보면 비우기보다 채워 넣는 쪽으로 몰입하기 쉽다. ... 하나를 손에 넣으려면 그 전에 먼저 하나를 버려야 한다. 하나가 내 안에 들어오면 다른 하나를 내려놓고 수용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소유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는 자세가 중요하다. 다시 말해 지금 이 순간에 쓰지 않는 것은 버리고, 나아가 지금 이 순간에 필요한 생각 외에는 버리는 것이다."
야마시타 히데코, <소중한 것은 모두 일상 속에 있다>, "공간을 불필요한 물건으로 채우지 않으면, 그곳은 '여유'가 흘러갈 것입니다."
소노 아야코, <약간의 거리를 둔다>, "생각해보면 '감사하는 사람'으로 비치는 것이야말로 인생 최고의 모습이다. '감사하는 사람' 의 일생에는 향기로운 요소들이 가득하다. 겸손과 너그러움, 따뜻함, 위로, 기쁨과 여유가 있다. 그래서 '감사하는 사람' 주변에는 사람들이 모인다. '불평하는 사람' 에게서 자연스레 멀어지는 것과는 참으로 대조적이다."
코에케 류노스케, <생각 버리기 연습>, "세상 사람들에게 '이해해 주면 좋겠다'며 응석을 부리거나 기대감을 가지는 것에 대한 환상을 버려야 한다. 헛된 기대감 때문에 비난을 받으면 화가 치밀어 오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환상을 버리면 '이런, 또 당하고 말았군'이라고 넘겨버릴 수 있는 여유가 생겨 충격을 받지 않게 된다. 세상의 원리대로 '극히 자연스러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을 뿐이야'라고 생각하고 넘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좀 더 여유가 있다면 이렇게 생각하면 좋다. '그래, 내가 비난을 받은 데에는 그 사람이 비난하고 싶은 의견을 내세웠거나, 그 사람의 과거나 견해를 부정하고 말았나 보군. 그렇게 상처를 주었다면 내 잘못이야. 상처를 주고 피해를 준 내가 나빴어. 그 사람은 상처를 받았기 때문에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보호본능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자기방어에 충실했을 뿐이지. 나를 공격함으로써 자신을 납득시키려고 한 거야. 필연적인 과정이니 어쩔 수 없지. 이제 그만 잊어버리자'라고...."
행복은 거창한 게 아니다. 지금 여기에서 소박하게 먹고, 부지런히 움직이고 삶의 목적을 알고, 가족 이웃들과 교감하며 사는 것. 작고, 단순한 삶. 유연하고 여유 있게 삶 자체를 즐기는 것.
발리 우붓 시장을 지나다가 본 장식품에 적힌 “Karma”가 무엇인지에 대한 글을 실천하며 사는 것.
Karma!
Think good thoughts,
Say nice things,
Do good for others,
Everything comes back.
본문의 내용 중 와 닿는 글 귀들을 발췌해 옮겨 적는다.
감수성이 필요한 시대라고 여기저기 말한다. 그렇다. 나를 깨우고 사회를 사랑으로 연결하는 힘의 원천이 바로 감수성이다. 자연에 대한 아름다움과 사람에 대한 사랑, 고통, 선함, 사랑, 이 모든 것들에게 편견 없는 공감이 필요한 시대이다. 감수성을 회복하고 키우기 위해서는 우리의 감각을 가로막고 있는 것들에 대한 성찰과 확인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감각의 기를 살려 놓아야 한다. 감각의 회복은 일상에서 잘못된 습관을 바꾸는 일에서 시작한다. 사색의 시대는 가고 검색의 시대가 왔다고 걱정한다. 그만큼 우리의 눈은 많은 시간을 컴퓨터와 스마트폰 화면에 집중하고 있으며 손은 키보드를 두드리느라 바쁘다. 하늘, 구름, 별, 산, 꽃, 물소리, 바람소리, 흙을 멀리한 채 텔레비전과 인터넷, 스마트폰에 오감을 맡기고 있다. 이것들은 표정과 온기가 없다. 표정과 온기 없는 것들을 대하는 우리의 감각은 지극히 건조하다. 소통과 교감이 일어날 수 없다.
진정한 힐링은 나를 내 삶의 주체로 세우고 독창적으로 살아갈 때 가능하다. 이를 통해 자유와 행복은 성취된다. 스티브 잡스가 생전에 암 진단을 받고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시간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삶을 사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의 마음과 당신의 직관이 내는 소리에 따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진짜 하고 싶은 것을 이미 알고 있을 수 있습니다."
청춘들은 오로지 성공하고 출세하기 위해 '앞'과 '위'만을 바라볼 뿐, 우정과 사랑과 진리를 나누기 위하여 '옆'과 '뒤'를 보지 않는다. 학생들의 봉사활동도 사람에 봉사하는 삶의 실천이 아니다. 봉사조차도 입시와 취업을 위한 경력 쌓기의 수단이 되었다. 전제와 원칙, 방향과 과정이 바로 서지 못한 교육의 현실은 인간을 자본의 그물망에 희생시킨다. 또 자본의 대열에 끼어들기 위해 몸을 혹사시키고 감정을 빼앗아 버린다. 우리 시대 청춘들이 공부하고 일하는 목적이 오직 좋은 정규직을 얻기 위한 것이어야 하는가. 만약 평생 사람의 꿈을 직업의 이름에 묶어 두려 한다면, 그리고 명사로만 꿈을 묶어 버리는 자본의 음모에 대한 비판 없이 살게 되다면 상생하는 행복의 활로는 어디에서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꿈은 끊임없이 꾸는 것이다. 꾼다고 하는 것은 동사이고 형용사이고 부사이다. 그러므로 꿈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우리의 공부와 일과 삶에 아름답고 굳세고 지혜로운 형용사와 부사를 달아 주자. 그래서 우리 삶에서 꿈이 형용사와 부사의 날개를 달고 인간의 성취에 다다를 수 있어야 한다.
생명은 살아 있는 유기체이다. 생명은 그 자체로 주체이다. 주체적인 생명은 남의 삶을 엿보거나 자기 삶을 헛되게 소비하지 않는다. 가치 있는 것, 의미 있는 것을 찾아 자기만의 느낌과 감동으로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생명이다.
우리 모두는 행복을 꿈꾸고 있다. '인생에 주어진 의무는 아무것도 없으며, 그저 행복하라는 한 가지 의무뿐'이라는 헤르만 헤세의 말처럼 우리 모두는 행복해야 한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접하는 행복의 담론은 거의 모두가 성공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그 성공의 척도는 '부자가 되는 것'이다.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좋은 대학을 졸업해야 하고 고액 연봉을 주는 직장에 취업해야 한다. 할아버지의 재력과 엄마의 정보력, 그리고 아이의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명문 대학에 입학할 수 있고 그 바탕으로 '가문의 영광'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까지 나오는 현실이다. 국가는 늘 경제대국을 외치며 경제 발전을 국정의 최우선 목표로 삼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깃발 아래 무한경쟁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 온 힘을 다해 매진하라고 독려하고 있다. 높은 지위, 많은 돈, 좋은 직장, 드높은 명예 등 이른바 성공의 조건이라는 것이 과연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고 있을까. 답은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이다. 왜 그런가. 행복하다는 것은, '지금' '여기서' '내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진실로 행복하다면 이런 것들이 결코 불행의 재료가 될 수 없으며, 거부의 대상도 아닌 것이다. 그러나 또 이렇게 생각해 보자. 이런 것들이 충족되어 있어도 내가 진실로 행복하지 않다면, 이런 것들은 결코 나를 행복하게 하는 절대적 조건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인도 뱅갈의 성자 라마크리슈나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행복하지 않다면 집과 돈과 이름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리고 당신이 이미 행복하다면 그것들 또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렇듯 행복은 객관적 환경과 조건에 의해 규정되는 '절대적 실체'가 아니다. 따라서 행복은 지금, 여기서, 내가, 마음으로, 의미로 구성하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다. 달리 말해서 내가 행복하다고 느끼면 나는 행복한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상을 꿈꾸어야 하고 그 이상을 실현해야 한다. 그 이상은 개인과 사회가 삶의 방향을 바꾸는 데서 시작된다. 행복의 내용을 바꾸어야 한다. 과욕에서 소욕지족으로, 경쟁과 상극에서 협동과 상생으로, 획일과 차별에서 평등과 개성으로, 목표와 욕망에서 의미와 나눔으로, 그리하여 동상이몽이 아닌 동몽이상의 화엄세계를 꿈꾸고 실현해야 한다. 이처럼 모두가 긴장과 강박에 시달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삶의 방향 전환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현실'이다.
모든 것은 그것 하나로 서 있지 않다. 나무가 산에 의지하여 있고, 산은 나무에 의지하여 있다. 산과 나무는 바람과 햇볕, 물과 미생물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오로지 그것 하나만 살고자 하면 하나도 온전하게 살 수 없다. 내 곁의 것들이 건강하게 살아야 내가 살 수 있다. 자연의 생태계가 그러하듯이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사회의 생태계 또한 그러하다.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여 살아가는 사회 생태계의 그물망이 서로 건강해야 인간 개개인의 마음이 청정하고 평화로울 수 있다.
행복하다는 것은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송이 꽃과 바람소리, 물소리에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사람, 이웃의 슬픔과 고통에 절로 가슴 아파하는 사람, 소박한 음식 앞에서 맛을 느끼는 사람이 바로 행복한 사람이다..... 산과 빌딩, 자동차와 새 소리, 사람 소리와 물소리, 산바람과 매연, 한적함과 번잡함에 대해 차별하지 않고 오히려 연민과 사랑을 갖겠노라 다짐한다.... 무엇이 있어도 있는 경우가 있고, 무엇이 있어도 없는 경우가 있다. 마음을 열고 눈을 열고 귀를 열면 바로 그 앞에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눈앞에 있어도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길을 선택하여 살아가는 까닭은 행복하기 위해서이다. 무의미하고 불행하기 위해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것들을 온전히 '느끼며' 사는 것이 아닐까. 아무리 크고 비싼 집과 재물을 갖고 있고, 권력과 명예를 갖고 살아간다 해도 가치 있고 의미 있는 느낌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 아니다. 행복하다는 것은 느낄 수 있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한 송이 꽃과 바람소리, 물소리에 아름다움에 느낄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이웃의 슬픔과 고통에 절로 내 가슴에 아픔이 느껴지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소박한 음식 앞에서 맛을 느끼는 사람이 먹을 줄 아는 사람이다. 서로 만나 웃고 이야기 하며 사랑과 우정의 느낌을 함께하는 사람, 그러한 사람이 바로 행복한 사람이다.
"물론 오래 살아서 차비라도 벌어놓은 사람은 언젠가는 기차를 타게 되겠지만 그때는 활동력과 여행 의욕을 잃고 난 다음일 것이다. 이처럼 삶의 가치가 가장 떨어지는 시기에 미심쩍은 자유를 누리기 위하여 인생의 황금 시절을 돈 버는 일로 보내는 사람들을 보면, 고국에 돌아와 시인 생활을 하기 위하여 먼저 인도로 건너가서 돈을 벌려고 했던 어떤 영국 사람이 생각난다. 그는 당장 다락방에 올라가 시를 쓰기 시작했어야 했다." - 본문 발췌
내일의 행복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고 있지 않나요? 바로 지금이 가장 소중한 시간입니다. 하고 싶은 게 있고, 지금 당장 해 볼 수 있다면 시작해야 합니다.
"왜 우리는 성공하려고 그처럼 필사적으로 서두르며, 그처럼 무모하게 일을 추진하는 것일까? 어떤 사람이 자기의 또래들과 보조를 맞추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마 그가 그들과는 다른 고수(鼓手)의 북소리를 듣고 있기 떄문일 것이다.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든는 음악에 맞추어 걸어가도록 내버려두라. 그 북소리의 박자가 어떻든, 또 그 소리가 얼마나 먼 곳에서 들리든 말이다. 그가 꼭 사과나무나 떡갈나무와 같은 속도로 성숙해야 한다는 법칙은 없다. 그가 남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자신의 봄을 여름으로 바꾸어야 한단 말인가? 우리의 천성에 맞는 여러 여건이 아직 갖추어지지 않았다면 대신 끌어다댈 수 있는 현실은 무엇인가? 우리는 헛된 현실이라는 암초에 우리의 배를 난파시켜서는 안 되겠다. 우리가 애를 써서 머리 위에 청색 유리로 된 하늘을 만들어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것이 완성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분명 그런 것은 없다는 듯이 그 훨씬 너머로 정기에 가득 찬 진짜 하늘을 바라볼 것인데." - 본문 발췌
우리는 생김새가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삶의 가치가 다를 수 있습니다. 부모가 원하는, 사회가 원하는 삶이 가치있는 삶일까요?
자기다움을 찾고 스스로 만족하며 세상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삶이 가치 있는 삶입니다.
단순하고 작은 삶, 소박하게 먹고, 부지런히 움직이고 삶의 목적을 알고, 가족 이웃들과 교감하며 사는 것이 가치 있는 삶입니다.
박노해 시인의 말처럼 "돈으로 살 수 있는 능력보다 스스로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고 지금 당장, 하루하루 가슴 설레이는 일들을 만들어 가는 삶이 가치 있는 삶입니다.
"<룰>, 발톱보다 손톱이 빨리 자란다. 발톱보다 손톱이 일찍 잘린다. 빨리 자란다. 일찍 잘린다. 빨리 달린다. 일찍 지친다. 빨리 올라간다. 일찍 내려온다. 자꾸 까먹는 인생의 룰. ... <연>, ... 천천히 가야 가는 길 곳곳에 놓인 행복이 보인다. 행복은 도달이나 도착이 아니라 도약과 도전을 즐기는 것이다." - 본문에서 발췌
'소중한 것은 한 글자로 되어 있다', 제목 <한글자> 앞에 붙은 부제이다.
모바일 인터넷 시대에 하루에도 수많은 텍스트에 노출된 삶을 살고 있다. 요즈음 동영상 콘텐츠가 대세라고 해 텍스트 뿐 아니라 영상이 텍스트 노출의 일부를 잠식하더라도 아침에 일어나면 스마트폰으로 보는 뉴스, 집이나 직장에서 확인하는 이메일, 하루에도 수십차례 주고 받는 메신저와 수시로 확인하는 SNS에 넘쳐나는 텍스트의 양은 일일이 세어보기도 어렵다. 양적으로 늘어난 이 많은 텍스트 가운데 어떤 의미를 갖고 머리속에 남는 것은 얼마나 될까?
책의 시작에 저자가 하는 아래 당부의 말처럼 스피드와 양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한 번쯤 읽어보고 음미해 볼 이야기다.
☞ 당부의 말씀 *부탁입니다. 느려 터져 주십시오. 5초에 읽을 수 있는 글을 5분에 읽어 주십시오. 하루에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씩만 토막 내서 읽어 주십시오. 작가가 활자화하지 않고 행간에 넣어 둔 이야기를 당신이 꺼내서 읽어 주십시오.
*맞습니다. 별걸 다 간섭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이 책을 골랐다는 건 정철이라는 사람의 얘기를 들어 보겠다, 들어 주겠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 사람이 드리는 첫 부탁입니다. 못 들은 척하지 않을 거라 믿습니다.
쥐려하지 말자. 넘쳐 흐르는거 다 흘려 버리고 손가락 사이로 새는거 다 새어나가게 하고 조금이라도 남는게 있다면 그만큼으로 행복해하며 사는거야 쥐면 쥘수록 새어나가는게 많지만 펼치면 담기는게 더 많다는거. 미래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도 있고 누구나 그래~ 그래도 모든것은 다 지나가고 과정 뒤엔 결과도 있는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