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의는 고사하고 국가 시스템과 법은 무시하며 상식과 염치 마저 없는 자들이 판치는 사람의 정치, 침팬지 무리도 권력을 얻고 유지하기위한 시스템이 작동한다.
 

[본문발췌]

'모든 인간의 일반적 경향 중에 하나가 
죽음에 이르러서야 멈추는
그들의 끝없고 쉼 없는
권력에 대한 욕망이다.' - 토마스 홉스


침팬지 사회에는 권력탈취, 계급구조, 권력투쟁, 동맹, 분할 지배 전략, 연합, 조정, 특권, 거래 등이 만연해 있다. 인간 사회의 권력 주변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은 거의 모두 침팬지 사회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마키아벨리적 지능(권모술수에 능한 지능)'


미래의 새로운 리더는 스스로 그 길을 개척해 나가지만 혼자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단독으로 자기의 리더십을 집단에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의 지위는 부분적으로 다른 침팬지에 의해 주어진다. 리더, 즉 우두머리 수놈도 다른 구성원들과 마찬가지로 역시 감시망에 걸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처음에 우리는 인식하는 것만 볼 수 있다. 장기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도 장기판 위에서 벌어지는 긴장감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그 사람이 곁에서 한 시간 동안 지켜보더라도 게임 상황을 다른 판에 복기해 보라고 하면 정확히 재현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만약 장기에 뛰어난 사람이라면 몇초 동안만 바라봐도 말들의 배치를 모두 파악해서 기억할 수 있다. 이는 기억력의 차이가 아니라 지각력의 차이에 의한 것이다. 문외한에게 체스 말의 위치는 각각 아무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용을 아는 사람은 말의 위치에 커다란 의미가 있으며 그들 상호 간에 서로 위협하거나 지원하는 관계가 성립한다는 것을 이해한다. 무질서한 것의 집합보다는 어떤 유기적인 구조를 가진 편이 훨씬 기억될 수 있는 원리이다.
이것이 이른바 게슈탈트 지각(Gestalt perception)의 종합 원리이다. 즉, 게슈탈트(전체)란 단순한 부분들의 합 이상이며 지각을 학습한다는 것은 구성 부분들이 규칙적으로 전개되는 여러 가지 패턴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침팬지들 사이에 일어나는 상호작용의 여러 패턴에 익숙해지면 그것들이 너무나 인상적이고 명확해지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지엽적인 문제에 구애받거나 상황의 기본적인 논리를 놓치는 것을 상상도 할 수 없게 된다.


우리는 하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과거의 경험을 새롭게 조합시키는 능력을 표현하는 데 '추리력' 혹은 '사고력'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달리 적합한 단어는 없을 것이다. 실제로 시행착오를 통해 특별한 행동을 시험해보지 않고서도 침팬지들은 그들 머릿속에서 선택의 결과를 가름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신중하고 합리적인 행동을 보인다. 영장류들은 수많은 사회적 정보를 고려하며 상대방의 의도와 기분에 민감하게 잘 조율되어 있따. 그래서 그들이 가진 높은 지능이 복잡한 집단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진화되어 왔다고 추측한다. '사회적 지능 가설(Social Intelligence Hypothesis)'로 알려진 이 개념은 우리 자신의 계통에서 벌어진 막대한 뇌 용량의 팽창에도 적용될지 모른다. 이런 견해에 따르면 기술적인 창의성은 부차적인 발전이다. 영장류 지능의 진화는 꾀로 상대방을 이기고, 속임수 전략을 감지하고, 상호 이익이되는 타협을 이루며, 자신의 삶에 이득이 되는 사회적 연대를 증진시키기 위한 필요성에서 출발했다. 침팬지들은 이런 영역에서 분명히 뛰어나다. 그들이 가진 기술적인 재주는 인간보다 떨어지는 것이 확실하지만, 그들의 사회적인 능력도 그렇다고는 쉽게 단정하지 못하겠다.


"싸움 능력이 아무리 탁월한 젊은 수놈이라 해도 상당히 많은 구성원의 지지를 얻어내지 못하면 결코 권력을 탈취할 수 없다." - 어윈 번슈타인


강자의 보안관 역할과 그 강자가 위협에 직면했을 때 약자로부터 받는 지원 사이에 어떤 관련이 있을지는 뻔하다. 암놈과 그 새끼들을 지켜주지 못하는 1인자 수놈은 장차 라이벌과의 권력투쟁에서 어떠한 지원도 기대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1인자 수놈의 보안과 역할은 호의라기보다 의무에 가깝다. 


리더는 질서를 유지해주는 대가로 집단 구성원들로부터 지원과 존경을 받는데, 이와 동일한 현상이 두 번째 정권 교체에서도 일어났다. 하지만 이번의 경우 크게 달라진 점은 이런 자질이 지도자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평화를 수호한 대가로 광범위한 존경을 얻은 것은 니키가 아니라 그의 연대 파트너인 이에룬이었다. 이런 상황 전개가 무엇보다 나를 놀라게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한 마리의 개체가 공식적인 지배와 이런 역할을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에룬과 라윗은 단독 지도자였던 데 반해, 니키는 다른 수놈과 지도력을 '공유'했던 것이다.


니키의 지도력과 구질서와의 중요한 차이는, 니키가 야심 많은 타인의 어깨 위에 서 있다는 점이다. 그로 인해 생기는 문제는 인간 세계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이런 유의 리더가 갖는 상대적 무력감에 대해 설명한 적이 있다. 아래 <군주론> 인용문에서 '귀족'을 '서열 높은 수놈'으로, '평민'을 '암놈과 새끼들'로 고쳐서 읽어보라. 그러면, 우리는 니키의 '군주권'이 두 전임자의 '군주권'과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귀족의 원조를 받아 군주권을 얻는 것은 평민들의 지원을 받아 군주가 되는 것보다 더 어렵다. 왜냐하면 귀족들은 스스로를 군주와 동등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군주는 원하는 대로 그들을 지배하거나 통제할 수 없다."


서열을 결정짓는 원리는 성별에 따라 다르다. 수놈 사이에서는 연합이 우열을 결정한다. 수놈이 암놈에 비해 우위에 있는 것은 주로 육체적 우월성에 기인한다. 한편, 암놈끼리의 서열을 결정하는 결정적인 요인은 무엇보다 '성격'과 '나이'다. 


아르험 침팬지 집단에 속한 암놈들의 서열은 위로부터의 위협과 과시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아래로부터의 존경에 바탕을 둔 것처럼 여겨진다. 


우리는 남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길 원하고 그걸 위한 전술도 개발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목표라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지 못할 수도 있다. 그것에 대해 생각하거나 이야기하는 것조차 회피할지도 모른다. 네덜란드의 사회심리학자 마우크 뮐더는 '인간은 권력을 행사함으로써 만족을 얻으며 타인에 대한 영향력을 키우려고 노력한다'는 사실을 일련의 실험을 통해 밝혔다. 그러나 동시에 '권력'이라는 단어의 주변에는 일종의 터부가 존재한다는 사실도 지적한다. "우리가 권력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 하지만 우리 자신에 대해 말할 때는 '책임을 지고 있다', '권위 있는 지위에 있다'거나 혹은 '힘겨운 결단을 통해 남을 돕고 있다'는 따위의 표현을 즐겨 쓴다. 


실험 심리학자인 닉 험프리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사회적 동물의 이기성은, 다른 용어가 마땅치 않기 때문에 내가 '공감'이라고 부르는 것에 의해 전형적으로 완화된다. 이때 '공감'이란 상대를 자신과 동일시하면서 상대의 목표를 어느 정도 자신의 목표로 인정하는 성향을 말한다." 이런 직관적인 해석을 증명하려면 공감의 정도를 측정할 수 있는 독립적인 수단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공감이 친밀함이나 친숙함과 연관되어 있다고 보고 이것들이 두 개체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느냐로 측정할 수 있다고 해보자. 


사회심리학자인 존 본드와 애드가 비나크는 여성들 간의 연합을 '협조적'이라 부르고 남자의 연합을 '착취적'이라고 지칭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연구들은 상당히 많다. 그리고 그 결론들은 한결같다. 즉, 남성은 승리에 집착하고 전략적 고려에 사로잡혀 있는 반면 여성은 개인간 접촉에 더 큰 흥미를 느끼며 주로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과 인간적인 연합을 이룬다는 것이다. 


착취적 연합과 기회주의는 정치 무대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 인류학, 정치학적 연구에 따르면 여성은 자신과 멀리 떨어진 정치적 사건보다는 주변의 사건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반면, 남성은 '거대' 정치에 참여하려 하고 권력의 핵심에 더 큰 매력을 느낀다. 이런식의 성차는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 문제를 종합적으로 검토한 디아든은 사회, 문화적 요인보다는 생물학적 요인을 더욱 강조했다. 하지만 성차는 언제나 통계적인 성질을 띠고 있다.예를 들어 인간의 정치 무대에서 이 규칙에 들어맞지 않은 사례들은 얼마든지 있으며 침팬지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친밀한 파트너와 협력함으로써 성공의 기회를 높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수놈들은 분명 그렇게 할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물질적인 인심과 사회적인 관용의 경계는 아주 모호하다. 심리학자인 하비 긴스버그와 셜리 밀러가 어린이들을 관찰한 바에 따르면 가장 우위에 있는 아이는 싸움에 개입해서 약자를 지켜줄 뿐만 아니라 친구들에게 기꺼이 자신의 물건을 나눠주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이런 행위가 동년배들 사이에서 높은 지위를 누리는 데 도움을 준다고 연구자들은 밝히고 있다. 인류학자들의 원시부족 연구에서도 유사한 모습이 발견된다. 거기서 추장은 통제적 역할에 필적하는 경제적 역할을 수행한다. 즉, 추장은 주면서 받는 것이다. 추장은 부유하지만 부족 사람들을 착취하지 않는다. 오히려 거대한 축제를 베풀고 가난한 자들을 돕는다. 그가 받은 선물이나 물자를 공동체로 되돌리는 것이다. 모든 것을 독점하려믄 추장은 위험에 빠지기 마련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제', 즉 높은 신분에는 더 많은 도덕적 의무가 따르는 것이다. 살린즈는 "인간은 존경 받기 위해서 너그럽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이런 보편적인 인간 체계, 즉 재산 획득과 재분배의 체계는 그것이 원시부족 사회의 추장에 의해서건 아니면 현대 사회의 정부에 의해서건 간에 침팬지들이 사용하는 체계와 다를 바 없다. 단지 '재산'이란 말을 '지원과 사회적 베풂'이라는 말로 바꾸기만 하면 된다.


균형(balance), 서로 라이벌 관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놈들은 강한 사회적 연대를 형성한다. 그들은 상호간의 연합, 각자의 싸움 능력, 암놈의 지지 등에 기반을 둔 세력균형 체계를 발전시키는 경향이 있다.


안정(stability), 암놈들 사이의 관계는 수놈들에 비해 덜 계층적이며 훨씬 안정적이다. 암놈들이 안정을 희구한다는 사실은 수놈드르이 지위 경쟁에 대한 그들의 태도에서도 엿볼 수 있다. 암놈은 수놈들을 중재하기도 한다.


교환(exchanges), 중앙집권적이며 호혜적 거래가 이뤄지고 있는 인간의 경제 시스템은 침팬지의 집단생활에서도 발견된다. 침팬지들은 선물이나 재화보다 사회적 호의를 교환한다. 그들의 지원은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는 리더에게 집중되고, 이 리더는 이런 기득권을 사용하여 사회적 안전을 제공한다. 만약 리더가 자신이 받은 구성원들의 지원을 재분배하는 데 실패하면 그의 지위가 위협받는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의 안녕을 지키는 것은 그의 의무이다.


내가 이 책에서 영향력과 권력이라는 용어로 묘사한 것들을 불완전한 첫 시도일 뿐이다. 내가 봤던 것은 어떤 개체가 최고의 자리를 잃었다고 해서 완전히 잊혀진 존재로 추락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들은 여전히 많은 것을 조종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지위가 상승해서 언뜻 두목처럼 보이는 개체일지라도 매사에 가장 강력한 발언권을 자동적으로 갖지는 못한다는 사실이다. 사회 조직에서 벌어지는 이런 이중성을 인간의 용어로 설명할 수밖에 없다면, 그것은 우리네 인간 사회에서 그들과 아주 비슷한 막후 영향력 때문일 것이다. 


만약 정치를 영향력 있는 지위를 획득하고 유지하는 사회적 술수라고 넓게 정의한다면 정치는 모든 사람과 관계된다. 중앙정부나 지방정부는 말할 것도 없고, 가정, 학교, 직장, 그리고 각종 모임에서 우리는 정치라는 현상과 일상적으로 마주하고 있다. 우리는 매일 갈등을 야기하거나 혹은 다른 이들의 갈등에 개입한다. 우리에게는 지지자와 경쟁자가 있다. 그리고 이들과의 유익한 관계를 매일매일 다져간다. 그러나 이러한 일상적인 정치 행위가 항상 그 자체로서 인식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의도를 은폐하는 데 달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정치인들은 그들의 이상과 공약에 대해서는 목소리를 높이지만 권력을 향한 개인적 야망을 노출시키지 않도록 애쓴다. 그러한 야망을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다. 결국 누구나 똑같은 게임을 벌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더 흥미로운 사실은 인간들이 자신의 동기를 타인에게 숨기려 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동기가 자신의 행동에 미치는 영향에 관해서도 과소평가 한다는 사실이다. 반면, 침팬지는 '더욱 천박한' 자신의 동기를 아주 뻔뻔스럽게 알린다. 권력에 대한 침팬지의 관심이 인간보다 더 강해서가 아니다. 단지 아주 적나라할 뿐이다. 


모든 파벌들은 일시적인 권력 균형에 이를 때까지 사회적 영향력을 계속해서 찾는다. 그리고 이런 균형은 서열상의 지위를 새롭게 결정한다. 다소 유동적인 지위가 '고정'될 때까지 관계는 계속해서 변한다. 이 같은 서열의 공식화가 어떻게 화해 가운데 일어나는지를 보게 되면, 집단 내의 서열이 경쟁과 충돌을 제한하는 '응집적' 요소임을 이해할 수 있다. 육아, 놀이, 섹스, 협력 등은 그로 인해 찾아오는 안정 상태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수면 아래의 상황은 늘 유동적인 상태이다. 권력의 매일매일 시험되며, 만일 그것이 매우 취약하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도전이 일어나고 새로운 균형이 찾아올 것이다. 결국 침팬지들의 정치도 건설적이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로 분류되는 것을 명예롭게 여겨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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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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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며 스크랩 했던 문장들 중 키워드와 엮어서 정리했던 검색사전을 다시 꺼내 본다.

 

 

  1. 여유(餘裕), 생각하기 나름인것 같지만 정말 갖기 어려운 게 '여유' 아닐까? 행복하다고 느끼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여유'를 갖고 있다.
    https://wanderingplus.tistory.com/141
  2. 낭만(浪漫), '낭만'이라는 단어에서 제일 먼저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가 떠오르고, 가사중 '도라지위스키'가 뭐지? 검색해보니 과거 국산 양주 브랜드란다. 나폴레옹과 비슷한 것이라는 글을 보고 고등학교 졸업 후, 친구랑 성산인출봉 근처 해변에서 해돋이 본다고 밤새며 처음 마셨던 술이 나폴레옹이었다. 한잔 마시고 도저히 먹을 수 없겠다고 버렸던 술! 나에게 낭만은 스무살 무렵 고등학교 동창 셋이서 해변 모래사장에 누워 나눠 마시던 싸구려 위스키와 밤새며 이야기 나누고 밝아오는 하늘을 보며 커피 끓여 마시던 추억!
    https://wanderingplus.tistory.com/144
  3. 청춘(靑春), 시간, 열정, 순수, 무모함, 도전, 꿈, ..... 청춘의 힘이다.
    https://wanderingplus.tistory.com/147
  4. 시간, 시간의 역사는 얼마나 될까? 과학자들은 우주의 나이를 대략 138억년으로 예상하는데, 그렇다면 시간의 시작을 138억년으로 볼 수 있을까? 숫자로 표현되는 시간의 역사, 그 진실을 모르더라도 세상의 시작과 함게 시간이 존재했음은 사실일 것이다. 시간의 정의도 상황과 사람에 따라 카멜레온 처럼 변하고, 시간의 가치와 소중함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https://wanderingplus.tistory.com/150
  5. 탐욕(貪慾), 인간의 욕망, 집착과 이기심이 탐욕을 키운다. 탐욕은 더 많이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다. 과학 기술의 발전을 통해 이러한 욕망을 채워 주면서 더욱 부추기는 상승작용을 하며 부의 편중에 따른 사회 갈등과 혼란, 권력투쟁, 자연 파괴 등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간디는 '세상은 우리의 필요를 위해선 풍요로운 곳이지만 탐욕을 위해선 궁핍한 곳'이라 경고하였고 노자는 도덕경(46)에서 "천하의 재앙은 만족할 줄 모르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천하의 죄악은 탐욕보다 더 큰 것이 없다. 그래서 만족할 줄 아는 것만이 영원한 만족이다. 모든 사람이 만족할 줄 알면 천하가 태평성대를 누릴 것이다."라고 하며 욕심을 버리라고 한다. 안분지족[安分知足]과 비움의 철학을 바탕으로 인간과 자연이 조화롭게, 단순하고 소박하게 살아 감으로 '탐욕'의 재앙을 벗어나야 한다.
    https://wanderingplus.tistory.com/156
  6. 편향(偏向), 자연은 생존과 번영을 위해 평균을 중심으로 모이고 편향의 극단에서 변혁과 진화가 일어난다. 평균과 편향의 원리가 작동하며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사회도 다양성과 다면성 유지를 위한 편향과 균형의 중도가 공존해야 건강해 진다지만, 작금의 상황은 경제, 정치, 사회 모든 분야에서 극단의 편향성을 넘어 거짓과 왜곡 투성이 미디어가 판을 치고 대중은 거기에 부화뇌동하지 않는지 우려된다. 오로지 깨어있는 시민의 판단과 시간에 맡길뿐!
    https://wanderingplus.tistory.com/162
  7. 지혜(智慧/知慧), 플라톤은 철학자를, 지혜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지혜는 가지고 싶다고 가져지는 게 아니라, 삶 속에서 터득되는 것이기에 부단히 생각하고 마음을 닦음으로써 얻어진다는 것이겠지요. 지식은 외부에 두고 찾아 쓸 수 있지만 지혜는 그럴 수 없습니다. 지식은 복사에서 붙여넣기가 가능하지만 지혜는 그러기 어렵습니다. 지식이 복잡하다면 지혜는 단순합니다. 삶의 지혜를 터득하여 삶을 좀 더 자유롭게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https://wanderingplus.tistory.com/172
  8. 고향(故鄕), 여름의 끝자락이 아직 멀리 가지 않은 9월 초, 추석 명절이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두 손 가득, 부모님과 가족들 만남의 기대도 가득 안고 고향 갈 준비들을 하고 있겠지요. 그러나 어떤 사람은 가족들의 기대와 다른 현재의 삶, 남에게 제대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그 무엇 때문에 고독한 시간이 될 수도 있다. 내가 태어난 고향, 가족이 머무르고 있는 고향, 과거의 추억이 있는 각자의 고향이라도 찾아보며 마음의 위안을 받는 추석이길 바래봅니다.
    https://wanderingplus.tistory.com/181
  9. 고독(孤獨), 고독과 외로움은 가끔 비슷한 의미로 혼동할 때가 있다. 철학자 폴 틸리히는 "'외로움loneliness'은 '홀로 있는 괴로움'을 표현하기 위한 단어인 반면 '고독solitude'은 '홀로 있는 영광'을 표현하기 위한 단어"라고 말했다. 문요한 작가는 <여행하는 인간>에서는 "물론 둘 다 홀로 있는 것이지만 '고독(solitude)'이 스스로 관계에서 물러나 자신을 벗 삼고 있는 시간이라면 '외로움(loneliness)'은 다른 사람과 단절되고 자신도 의지가 되지 않는 공허의 시간이다. 여행은 자신과 함께하는 고독의 시간이다."라고 했다. 고독의 삶의 긍정적 과정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겠지. 우리는 홀로 걷는 산책, 혼자 떠다는 여행 등을 통해 긴 고독의 시간을 갖거나 샤워기 아래에서 짧은 고독의 시간을 음미하기도 한다. 생각이 필요할 때, 우리는 고독을 찾는다. 내면의 시간을 보낸다.
    https://wanderingplus.tistory.com/192
  10. 기억(記憶), 기억은 시간과 함께 쌓여가지만 그 길이가 오래될수록 어떤 기억들은 잊혀진다. 기억과 망각의 균형으로 우리 뇌가, 생각이 과부하에 걸리지 않는 것일지도.... 오래 간직하고 싶은 기억도 있지만 잊고 싶어도 잊혀지지 않는 기억들도 있다. 간직하고 싶은 좋은 기억들의 시간을 늘리는 방법 : 감동, 반복적 회상, 기록, 다양한 감각을 동원한 기억 등....
    https://wanderingplus.tistory.com/198
  11. 행복(幸福), 재미와 즐거움이 없는 일을 하고, 행복하지 않게 시간을 보내기에는 인생은 너무 짧다.
    https://wanderingplus.tistory.com/205
  12. 불평등(不平等), 많은 사회학자, 철학자, 경제학자, 정치가, 그리고 작가들이 '불평등'을 이야기했다. 나에겐 심보선 시인이 표현한 '불평등'이 마음에 꽃힌다. ‘불평등이란 / 무수한 질문을 던지지만 제대로 된 답 하나 구하지 못하는 자들과 / 제대로 된 질문 하나 던지지 않지만 무수한 답을 소유한 자들의 차이다 - 심보선, 「집」 중에서. 경제적 불평등, 사회적 지위나 계층적 불평등, 정보 격차에 의한 불평등.... 사회가 변하고 기술이 발전하며 불평등의 영역도, 대상도 늘어가기만 한다.
    https://wanderingplus.tistory.com/214
  13. 즐거움(樂), 즐거움을 이야기할 때 뺄 수 없는 것이 <논어: 옹야편>에 나오는 ‘子曰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며 좋아하는 자는 즐거워하는 자만 못하다)’이다. 이에 대해 어떤 사람은 "아는 것은 행동이 없이 머리에만 있고, 좋아하는 것을 행함으로써 스스로 충만해지고, 스스로의 충만함을 남과 더불어 함께 조화를 이루는 것이 즐거움이 아닐까 합니다. 즐기는 사람은 왠지 여유가 있어 남을 배려할 수 있는 사람인 것 같다"는 해석을 했다. 그래서 여유, 즐거움과 행복은 가까이 있는지도 모른다.
    https://wanderingplus.tistory.com/223
  14. 여백(餘白) / 空, 동양 미술에서 '여백의 美'는 대상의 형체보다는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을 표현하기 위한 방법 중의 하나라고 한다. 구체적 표현의 한계를 극복하고 상상력과 마음의 소통을 여백으로 전달한다고 해야 할까? 불교에서 '空'은 존재의 시작과 끝, 수양으로 다다를 지향점으로 이야기 하기도 한다. 점과 점을 선으로 연결하듯, 삶은 '空'에서 태어나 죽어 '空'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선으로 연결한다는 것이겠지.
    https://wanderingplus.tistory.com/228
  15. 자유(自由), 통계학에 '자유도'란 개념이 있다. '통계적 특성치를 계산하는데 자유로이 값을 취할 수 있는 관찰치의 수', 자유롭게 고를 수 있는 선택지! 노예의 삶은 스스로가 선택할 수 있는게 별로 없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자의든 타의든 사회라는 시스템에 구속 된 삶에 적응해 삶의 가치와 의미를 갖는 삶의 방법에 대한 선택을 잊어 버렸기에 불행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https://wanderingplus.tistory.com/236
  16. 정의(正義), 개인이 정의롭게 사는 일은 스스로가 비난하는 다른 사람의 행위를 하지 않으면 된다. 사회가 정의롭기 위해서는 정부와 사법, 의회, 언론, 재벌 등 권력집단이 힘의 논리가 아닌 법과 원칙, 상식에 맞게 권력을 사용해야 한다. 정의가 소수의 저항이 될 때, 사회의 정의는 무너진 것이다.
    https://wanderingplus.tistory.com/243
  17. 여행(旅行), 여행은 현재에 충실하며 다른 환경과 사람에 대한 수용성을 높이고 과정을 즐기며 더 많은 생각을 하지만 생각이 행동으로 표현되는, 소유와 집착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이다. 법정 스님의 글 중에 "시끄럽고 어지러운 세상 살이이기 때문에 때로는 맑고 고요하고 한적한 삶의 여백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여백을 통해서 시들해지기 쉬운 일상을 비춰봄으로써 우리들의 삶을 되돌아보고 개선할 수 있다. 개선과 개혁이 없는 삶은 한낱 타성이고 습관에 지나지 않는다. 타성과 습관은 사람을 찌들게 하고 시들게 한다."고 했다. 우리는 가끔 삶의 긍정적 변화의 시간으로서 여행, 그리고 인생의 쉼표를 잘 활용하기 위한 용기를 내야한다.
    https://wanderingplus.tistory.com/251
  18. 불안(不安), 우리의 감정과 상상력이 불안을 만들어 낸다. 마음의 여유를 통해 불안에 지배당하지 않고 균형을 잡아야 한다.
    https://wanderingplus.tistory.com/257
  19. 감동(感動), 감동이 있어 삶이 풍요롭고 아름답다.
    https://wanderingplus.tistory.com/264
  20. 가치 (價値), 가치 있는 삶을 찾으려 방황하지 말고, 순간순간을 가치 있는 삶이 되도록 살자!
    https://wanderingplus.tistory.com/287
  21. 소유(所有), 얼마전 두 식구 가지고 있는 옷과 책을 정리해 보니, 이삿짐 수준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옷을 정리하는 데 다시 한 짐이 나온 것을 보고 집을 둘러보니, 집에 소유한 것들을 세어 볼 엄두가 안났다. 문요한님의 <여행의 인간> 중 소유한 물품과 자유의 관계를 적은 글이 있다. "여행의 시간 동안 우리의 존재감은 커지고 우리는 살아 있음을 체감할 수 있다. 그러면 자연히 소유욕과 저장강박이 약해진다. 일본의 한 사진작가에 의하면 몽골인은 평생 가지고 있는 물품이 300여 개인데 비해 일본인은 한평생 6200여개를 갖는다고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평생을 여행하듯 사는 사람에게는 많은 것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행을 통해 불필요한 욕망을 걷어내고 소유에 덜 연연할 수 있다. 그것은 자유의 지평을 한 차원 넓혀준다. 불필요한 내부의 욕망에서 벗어나는 것은 단순히 외적 구속에서 벗어나는 것과는 다른, 새로운 차원의 자유다. 그 자유는 때로는 여행이 끝난 후의 삶으로도 확장된다. 그 자유를 경험함으로써 덜 쓰고 덜 일하되 더 여유로운 삶을 모색할 수 있다. 마음의 에너지가 물질을 소유하는 대신에 자기 세계를 구축하는 쪽으로 흐르게 된다." 그렇게 보면, 법정  스님의 말처럼 우리는 무엇인가를 소유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소유를 당하는 것이 맞다. 소유물에 구속됨 삶!
    https://wanderingplus.tistory.com/294
  22. 시비(是非), 옳음과 그름. 우리는 옮음을 추구하지만 세상의 기준은 하나가 아니고 때와 상황에따라 변하기도 하기에, 세상 모든일이 옳고 그름으로 나뉘지는 않는다. 옮음을 추구하기 위해 시간이 필요한 경우도 있고, 반대편이나 다른 시각에서의 관찰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https://wanderingplus.tistory.com/300
  23. 분노(憤怒), 분노에 사로잡힌 삶을 살 것인가? 자비와 용서를 통해 원망과 분노에서 자유로와질 것인가?
    https://wanderingplus.tistory.com/308
  24. 진보(進步), 익숙한 것, 기득권을 지키기에만 머무르지 않고 장애물과 실패, 오류가 있더라도 한 발, 한 발 앞으로 내딛는 것! 진보의 시작이다.
    https://wanderingplus.tistory.com/315
  25. 희극(喜劇) vs 비극(悲劇), 찰리 채플린이 말한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Life is a tragedy when seen in close-up, but comedy in long-shot)"은 동일한 상황이 시간, 관점에 따라 다른 결론에 다다를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내 인생은 희극으로 끝마칠까? 비극으로 끝마칠까? 그 선택은 나에게 있다.
    https://wanderingplus.tistory.com/323
  26. 용기(勇氣), 변화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가지고 있는 것을 버리거나, 크고 화려함보다 작고 소박한 것을 선택하거나, 어렵고 힘든 일에 앞장서서 나가거나, 절제와 침묵을 위해서도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용기에는 행동이 수반됩니다.
    https://wanderingplus.tistory.com/333
  27. 두려움(恐懼), 나 자신을 믿고 두려움의 감정을 극복할 때 삶의 전환, 새로운 변화, 그리고 자유를 누릴 수 있다.
    https://wanderingplus.tistory.com/340
  28. 믿음(信), 스스로에 대한 믿음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열정과 자존감을 높여주고, 다른 사람에 대한 신뢰는 사회적 관계를 좋게 유지시키다.
    https://wanderingplus.tistory.com/346
  29. 희망(希望), '희망' 삶을 유지시키는 정신적 에너지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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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 죽음(死, 入沒), 얼마전 몇 살 터울 회사 선배가 심장마비로, 그리고 대학동기가 암투병 중에 유명을 달리했다. 태어나는 순서는 있지만 죽음에 순서는 없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너무도 허망하고 이른 죽음이란 생각에 가슴이 먹먹하다. "시간과 죽음 앞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말이 새삼 다가온다. 그러나 "죽음은 삶의 반대가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처럼 두려워하고 벗어나려고 한다고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삶의 일부로서 잘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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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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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고 그름의 법칙에 따라 사는 것이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고유한 특성인데, 어떤 사람은 자신들의 이익, 눈앞의 이익만을 좇아 이웃과 후손들에게 해로운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본문발췌]
 
인간이 추구해야 할 유일한 부는 곧 '생명' 이고, 이 '부'를 얻기 위한 선결조건은 '정직'과 '애정'이다.
 
생명은 사랑과 환희와 경외가 모두 포함된 총체적인 힘이다. 가장 부유한 국가는 최대 다수의 고귀하고 행복한 국민을 길러내는 국가이고, 가장 부유한 이는 그의 안에 내재된 생명의 힘을 다하여 그가 소유한 내적, 외적 재산을 골고루 활용해서 이웃들의 생명에 유익한 영향을 최대한 널리 미치는 사람이다.
 
너의 정직은 종교나 정책에 기초해서는 안된다. 너의 종교와 정책이 정직에 기초해야 한다.
 
 
 
아주 작은 일이라도 그것이 큰 일과 이어진다. 작은 벽돌을 한 장 한 장 쌓아서 거대한 건물을 짓는다. 벽돌을 쌓는 일을 하찮게 여겨 소홀히 한다면 결국 큰 일을 그르치게 된다. 따라서 작은 일을 하지 못하면 큰 일도 할 수 없다.
 
 
'부'라는 것은 마치 전기와 그 성질이 유사해서 오직 불평등과 격차에 의해서만 발생하는 법이다.
 
 
정치경제학은 한 국가의 국민이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물품을 시의 적절하게 생산, 보존 그리고 분배하는 전반을 다루는 경제학을 의미한다. 반면 상업경제학은 개인의 수중에 소유되는 타인의 노동력에 대한 법적 혹은 도덕적 청구권, 즉 개인에게 소유화되는 타인에 대한 노동 지배권의 전반을 다루는 경제학을 뜻한다.
 
 
사람이 자기가 하는 일에서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그 일을 좋아하고, 그 일을 지나치게 해서는 안되며, 그 일이 성공하리라는 생각을 품고 있어야 한다는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세상에서 부유한 사람은 상인이나 지주가 아니라, 밤에 별 밑에서 강렬한 경이감을 맛보거나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해석하고 덜어줄 수 있는 사람이다.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사는 것은 쥐나 늑대의 특성일 뿐 아니라 물고기의 특성이기도 하지만, 옳고 그름의 법칙에 따라 사는 것은 다른 동물들과 구별되는 인간만의 고유한 특성이다.
 
 
일을 바르게 처리하는 방법은 한 가지 뿐이지만 일을 바르게 보는데도 한 가지 방법뿐이다. 곧 일 전체를 보는 것이다.
 
 
진실로 가치 있고 유용한 것이란 바로 그 기능을 다해 인간을 생명으로 이끌어 주는 것이란 뜻이다. 생명을 향해 끌지 않는 힘의 크기에 비례해서, 혹은 생명으로 끄는 힘이 손실된 정도에 비례해서 가치는 감소된다. 생명의 정반대 방향으로 이끄는 힘이 강할수록 물건은 무가치한 것, 곧 유해한 것이 된다. 따라서 물건의 가치는 그것에 대한 사람의 평판이나 소유된 수량과는 관계가 없다. 사람들이 그 물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지에 따라, 혹은 그 물건이 사람들의 수중에 얼마나 들어 있는지에 따라 물건의 고유 가치가 늘거나 줄어들지 않는다는 말이다. 만물의 조물주에게 부여받은 그 물건 고유의 힘은 인간이 중시한다고 증가하는 것도 아니고 경시한다고 감소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유익하거나 아니면 무익하도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결정되었다.
 
 
국민들이 무지하여 청명한 공기와 빛과 같이 은혜로 값없이 주어지는 고귀한 것들을 가치 없이 여기는 이 시대에, 그리고 평화와 신뢰와 사랑과 같이 그런 것이 없이는 인간의 존재 자체가 성립되지 않기에 다른 물건의 소유와 활용 자체도 불가능하게 만드는 그런 것들을 시장에 매매 나온 금은 덩이나 진주 같은 것들과 교환하는 것이 남는 장사라고 여기는 이 시대에, 실로 참되기에 위대한 경제학만이 무엇이 헛되고 무엇이 영속하는지를 가르쳐준다. 그리고 또한 낭비와 영원한 허무의 제왕인 죽음을 섬기는 것이 절양과 영원한 충만함의 여왕인 지혜를 섬기는 것과 어떻게 다른지도 가르쳐 준다.
 
 
존 스튜어트 밀, '부유한 상태는 곧 쓸만한 물건을 많이 가지고 있는 상태'. 사람의 역량과 생명력이 반영된 부에 대한 정의는 '부란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유용한 물건에 대한 소유 상태를 뜻한다.'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철저하게 지켜지고 치안이 철저하게 유지되는 사회에서 부자가 된 사람들은 대개 억척스럽게 일하고, 결단력이 있고, 자존심이 강하고, 승부욕이 있으며, 추진력이 있고, 수완이 좋고, 시세를 잘 읽고, 헛된 생각은 하지 않고, 감상에 빠지는 일도 없고,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오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일 것이다. 반면 가난에 처한 사람들은 바보 이나면 천재이고, 게으르고, 무모하며, 숙맥이고, 사려 깊고, 성격이 좋으며, 상상력이 풍부하고, 감상적이고, 박식하며, 계산적이지 않고, 원칙보다는 상황에 충실하고, 서투른 강도이거나, 금방 발각되는 도둑이거나, 한없이 자비롭고 공정한 성인군자 같은 그런 부류의 사람들일 것이다.
 
 
성직의 거룩함과 왕위의 엄위함은 자비와 분별력이 아닌 길게 늘어뜨려진 사제복과 높이 솟은 왕관에서 근거한다는 생각이 보편화되면서 성직과 왕위에 깃든 신성함은 이미 오래 전에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경제적인 교환, 즉 공정한 교환에 대한 보편적인 법칙
1. 교환 당사자 양쪽 모두가 이득을 보아야 한다. 아니면 한쪽이 이득을 볼 때 상대방은 적어도 손해가 없어야 한다.
2. 흔히 상인이라 부르는 거래 중개인에 대해서는 그가 거래를 위해 소요한 시간과 전문지식 그리고 노력에 대해 정당한 보수가 지불되어야 한다.
3. 거래를 통해 양쪽 당사자가 얻은 이득과 중개인에게 지급된 보수는 모든 관계자에게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수요 중에 75%는 환상과 이상, 희망과 애착에서 비롯된 낭만적인 것들이다. 즉, 돈지갑을 단속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상상력과 감정을 단속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이유로 가격의 본질에 제대로 접근한다는 것은 지극히 형이상학적이고 심리학적인 차원의 문제다. 그러나 이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 조건은 어떤 물건의 가격은 그 물건을 원하는 사람이 그것을 얻기 위해 들인 노동의 양이다.
 
 
한 국가의 번영은 생활 수단을 획득하고 활용하는 과정에서 국민들이 투입하는 노동의 양에 정확히 비례한다. '획득하고 활용하는 과정'이란 표현에 주목해 주기를 바란다. 이 과정에는 현명한 생산뿐 아니라 현명한 분배와 소비도 포함되어 있다.
 
 
생산물은 노동의 결과로 만들어진 물건이 아니라 유용하게 소비할 수 있는 물건을 뜻한다. 그렇기에 국가가 대답해야 할 질문은 '얼마나 많은 노동자를 고용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생명을 잉태해 내는가'이다. 그 이유인즉, 소비야말로 생산의 목적이자 열매이고, 생명이야말로 소비의 목적이자 열매이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함부로 버리는 것이 없도록 하고, 아무것도 인색하게 움켜쥐는 것이 없도록 해야 한다. 또한 돈을 많이 벌려고 마음을 쓰기보다는, 돈을 적당하게 사용하는데 마음을 쓰도록 해야 한다. 한편으로는 일상생활을 영위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중대한 경제의 법칙과 그 근본을 늘 명심해 두어야 한다. 즉, 한 사람이 무언가를 소유하면 다른 사람은 그것을 소유할 수 없는 법, 그리고 어떤 종류이든지 사용되고 소비된 모든 물건에는 그만큼 누군가의 생명력이 소비되는 법, 그래서 그 결과로 생명을 계속 유지할 수 있게 되거나 더 풍성하게 누리게 된다면 그것은 결과적으로 성공한 소비가 되는 것이다. 반대로 생명을 약화시키거나 살육했다면 그것은 결과적으로 실패한 소비가 되는 것임을 늘 명심해 두어야 한다.

  • 다시 말해서, 첫 째로 물건을 살 때마다 먼저 이 구매가 물건 생산자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생각해야 한다.
  • 둘째로 지물하는 돈이 생산자가 생명을 소비한 가치에 합당한지, 그리고 그 가치만큼 합당한 비율의 이윤이 그에게 분배될지를 생각해야 한다.
  • 셋째로 구입하는 물건이 음식과 지식과 만족감 같은 생명에 유용한 것들을 위해 얼마나 긍정적으로 소용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 넷째로 구입한 물건이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가장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분배되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모든 상거래는 투명하게 이루어지고 그 계약은 일획도 틀림없이 이행되도록 하며, 그리고 계약의 이행 착오 없이 순탄하게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 마지막으로 일상 용품을 거래하는 시장에서는 특별히 순정품만 팔도록 요구해야 한다. 이와 함께 일상의 평범한 행복을 추구하는 방법과 이를 가르치는 방법도 다각도로 모색해야 한다. 또한 만족은 맛보는 음식의 양이 아니라 맛보는 사람의 즐기는 마음과 인내심에 달려 있음을 깨닫도록 돕는 방법도 모색해야 한다.

 
 
마태복음 20:14, 때가 되면 하나님의 나라가 오리니, 그때에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양식과 평강의 유업이 너희에게와 같이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주어지리라.
 
 
개인의 이익이 모든 사람의 이익보다 우선될 수 없다.
노동을 통해 생존권을 확보한다는 점에서 변호사의 직무나 요리사의 직무나 그 가치는 동일하다.
농부의 삶과 직공의 삶과 같이, 노동하는 삶이야 말로 가치 있는 삶이다.
 
 
모든 인간은 세가지 지식과 세가지 미덕을 갖추어야 하고, 교육의 목적은 이 여섯 가지에 대한 이해를 키우는 것이다.
남자 아이든지 여아 아이든지, 모든 아이들은 맑은 '공기'와 깨끗한 '물'과 비옥한 '토양'의 특성에 대해 배워야 하고, 또한 이러한 환경을 어떻게 지키고 누려야 하는지도 배워야 한다.
이를 위해 인간이 갖추어야 할 세 가지 미덕은 '감사'와 '소망'과 '사랑' 이다. 누구든지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인생의 아름다움과 깊은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자들은 자기세계 안에 갖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기쁨을 만끽하지 못한 채로 살아가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소망 없이 살아가는 자, 곧 신의 공의 대해 믿음이 없이 살아가는 자들은 그 마음이 늘 우울하기 마련이다. 사랑 없이 살아가는 자, 모든 살아 움직이는 생물들을 자신의 친지와 친척으로 여기는 '아히삼(불살생)'의 정신이 없는 사람 역시 인생의 비밀을 절대 깨닫지 못할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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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
누군가에는 부러움,
누군가에는 두려움,
누군가에게는 아쉬움.


[본문발췌]

삶의 버거움을 느낄 때, 버거움을 뛰어넘는 고통으로 행복해지는 들숨과 날숨. 절망은 생각보다 쉽게 희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편리함에 익숙해져 기억해야 할 소중한 것들을 잊고 사는 시간이 있다.


난, 불확실한 긴 여행을 시작하는 자유인이다.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
힘겨운 나날들, 무엇 때문에 너는
쓸데 없는 불안으로 두려워하는가
너는 존재한다 – 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너는 사라진다 – 그러므로 아름답다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끝과 시작’ 중에서
 


‘나’라는 존재는 분인(分人)이 가능한가? 정말 어려운 질문이다. 타인과 더불어 산다는 것은 억지로 강요당한 가짜 ‘나’로 산다는 의미로 해석이 가능해진다. 단, 하나뿐인 진정한 나는 존재하지 않고 대인관계마다 더러 나는 여러 얼굴이 모두 ‘나’다. – 히라노 게이치로, ‘나란 무엇인가’ 중에서

‘나’라는 존재는 여러 개로 분인될 수 없는데도 때론 하나였다가 여러 개의 얼굴로 분인되는 존재다. 추상적이면서 어려운 물음에 어떻게 답해야 하고 이해가 가능할까?

 

살면서 ‘열심히’라는 말을 밥 먹듯이 들으면서 살아왔다. 열심히 살지 않으면 죽는 줄로만 알았고, 우리는 그렇게 교육받았다. 우리가 믿었던 것과는 다르게 인생은 이처럼 아이러니하다. 열심히 살지 않아도 잘 살 수 있다면 괜찮지 않을까?


중년의 삶은 삭힘의 미학이라 생각한다. 곧 찾아올 나의 겨울을 위해서 덜어내고 비우면서 내게 남은 중년의 시간을 푹 삭혀봐야겠다.


오히려 이해 관계가 없는 인연은 괴로움이 없지만,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킨 인연은 버거움과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동반하게 되는 것 같다. 잠시 호저의 거리를 생각한다. 쇼펜하우어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호저들의 안타까운 모순 속에 있다!;’라고 말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적절한 거리를 유지해야 오래 그리고 멀리 갈 수가 있다.


실체가 없는 삶을 살다 보니 남이 인정해 주는 명함에 탐닉한다. 알고 보면 명함에는 직위는 있으나 실체가 모호하다. 남을 의식하는 삶을 살다 보니 삶이 향기롭지 못하다. 직장 안에는 두 계절만 존재한다. 여름과 겨울 즉, 뜨거움(경쟁)과 차가움(평가)뿐이다.


많은 것을 소유하고 살아가면서도 늘 부족함을 느낀다.


삶이란 예측이 불가능하고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다. 그래서 매 순간 불안한 상태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일이다. 찰나에 집중하자. 걱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방법은 없을까? 과거와 미래를 고민하지 않고 현재를 충실하게 사는 일이 중요하다.


여행은 자신과 마주하는 독백이라 생각한다. 그 길에는 늘 설렘과 두려움이 공존한다.


지나고 나면 별일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순간의 감정이 제어되지 않는 순간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이 아팠고 힘들었다.
 
중년에게 필요한 것은 생각을 줄이고, 말을 줄이고, 불필요한 관계를 줄이는 일이 중요하다.


우리들 인생에 정답은 없다. 작은 일 큰 일 구분하지 말고 그냥 살아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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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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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들은 시간과 함께 기억을 지우거나 왜곡하는데, 피해자들은 그 때의 기억에 갇혀 괴로워 한다.
 
 
[본문발췌]

어떤 말도 허투루 뱉지 않는, 잠시라도 무기력과 혼란에 빠져 삶을 낭비하지 않을 것 같은 태도 때문일 거라고, 인선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 혼돈과 희미한 것, 불분명한 것들의 영역이 줄어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우리의 모든 행위들은 목적을 가진다고, 애써 노력하는 모든 일들이 낱낱이 실패한다 해도 의미만은 남을 거라고 믿게 하는 침착한 힘이 그녀의 말씨와 몸짓에 배어 있었다.



정말 누가 여기 함께 있나, 나는 생각했다. 동시에 두 곳에 존재하는, 관측하려 하는 찰나 한 곳에 고정되는 빛처럼. 
그게 너일까, 다음 순간 생각했다. 네가 지금 진동하는 실 끝에 이어져 있나. 어두운 어항 속을 들여다보듯, 되살아나려 하는 너의 병상에서.

아니, 그 반대인지도 모른다. 죽었거나 죽어가는 내가 끈질기게 이곳을 들여다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저 건천 하류의 어둠 속에서. 아마를 묻고 돌아와 누운 너의 차가운 방에서.

하지만 죽음이 이렇게 생생할 수 있나. 뺨에 닿은 눈이 이토록 차갑게 스밀 수 있나.



숨을 들이마시고 나는 성냥을 그렀다. 불붙지 않았다. 한번 더 내리치자 성냥개비가 꺾였다. 부러진 데를 더듬어 쥐고 다시 긋자 불꽃이 솟았다. 심장처럼. 고동치는 꽃봉오리처럼.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가 날개를 퍼덕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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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 질문하고 성찰하고 비판하는 능력이 우리를 성장과 발전하게 한다.
 

[본문발췌]
 
세계에 대한 궁금증과 우주에 대한 신비감 없이 아이들이 잘 자랄 방법은 없다. 생각에 잠기는 아이가 인간의 미래이고 세계의 미래다.
사고력, 판단력, 집중력, 상상력, 이 네 가지는 시대 변화에 관계없이 교육이 성장 세대에게 반드시 길러주고 함양해야 하는 기본 능력이다. 
질문이 죽으면 호기심도 죽고 호기심이 죽으면 탐구의 열정도 죽는다.
 
 
 
인간적 위대성은 어떤 완전성의 결과이기보다는 오히려 결함의 결과이다.
 
 
 
민주주의를 할 줄 모르는 국민은 민주주의 느린 속도에 짜증내고 토론, 설득, 절충, 타협의 과정들이 불가피하게 요구하는 느릿느릿한 합의 절차들을 곧잘 무능과 비효율로 간주한다. 그 순간부터 그들은 우화 속의 개구리들처럼 옛날의 왕을, 혹은 독재자를, 그리워하기 시작한다.
 

보르헤스의 천국과 도서관. 과거, 현재, 미래가 만나고 기억과 상상력이 용접되는 곳, 지적 모험의 땅, 돈도 비자도 필요 없는 여행지, 국경과 인종과 계급이 영원히 퇴각한 코즈모폴리턴의 세계, 거기가 도서관이다.
 
 

여행자는 흔희 두가지 만남을 경험한다. 그는 여행길에서 많은 것을 보되 그가 본 어느 것도 소유하지 못한다. 새로운 것, 아름다운 것, 탐나는 것들이 제아무리 많아도 그는 그냥 빈손으로 돌아가야 한다. 소유의 왕국에서 해방된 사람처럼 그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소유할 수 없다. 여행이란 그러므로 소유와 집착으로부터의 자유로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그 낯선 자유와의 만남이다. 그리고 그는 남의 나라, 그 타자의 고장에 와서 어렵쇼, 어찌된 건가, 거기서 마치 거울 속의 자신을 만나듯 제 나라 자기고장,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여행은 그러나 이런 두 개의 만남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세번째 만남이 있다. 제 나라에 돌아왔을 때 그는 자신이 이미 이전의 자기가 아님을 문득 깨닫는다. 남의 고장에서 제 나라를 발견한 사람은 제 나라에서도 남의 고장을 발견한다. 그에게 가장 익숙하고 친숙한 것들에서 그는 그가 몰랐던 타자의 얼굴을 만나는 것이다. 그는 바뀌어 있다.
 
낯선 나라를 통해 되비쳐오는 제 나라의 얼굴 만나기, 그것이 여행의 한 소득이라면 대학 생활의 가장 자랑할 만한 성과도 나 아닌 것, 타자, 다른 세계들과의 만남을 통해 나를 알고 넓어지는 것이다. 이 자기 확장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자기에게 질문 던질 줄 아는 성찰과 비판의 능력이다. 질문하는 능력의 확장을 보장하기 위해 사회가 대학에 인정하는 높은 특권이 대학의 자유, 학문의 자유다. 그것은 특권이되 모든 기득권을 거부하고 진리의 소유 주장을 심문하는 특권, 정신의 가장 활발하면서도 겸손한, 그리고 겸손해지기 위한 특권이다.
 
 
 
돈은 인간 생활에 중요하다. 그러나 돈 그 자체가 삶의 목적인 것은 아니다. 쾌락 역시 인간의 삶에서 제외될 수 없으나 쾌락 추구만을 목적으로 하는 삶은 위험하고 허망하다. 삶의 목적은 '아름다운 삶'의 영위에 있다. 이해관계와 수지 타산을 떠날 줄 아는 삶, 용도와 유용성을 초월할 줄 아는 삶, 어떤 것을 '소유하기'나 '소유하는 자'를 벗어나 존재 그 자체를 중히 여기는 삶이 아름다운 삶이다. 아름다운 삶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쾌락pleasure이 아니라 즐거운joy이다. 쾌락이 자주 존재의 타락을 강요한다면 즐거움은 존재의 확장을 경험하게 한다. 존재 확장의 경험이 기쁨이라는 것이다.
즐거움과 기쁨을 위한 투자, 그것이 곧 아름다움에 대한 투자이다. 이 투자가 있을 때에만 인간은 즐거움과 기쁨이 있는 삶을 누릴 수 있다. 그 삶을 지향하는 것이 바로 '삶의 질' 높이기이다. 삶의 질은 향락의 수준에 있지 않고 아름다움의 수준에 있다. "정의가 없다면 인간은 수치다"라고 프란츠 카프카는 말했지만, 마찬가지로 아름다움이 없다면 인간존재는 수치일 것이다.
 
 
 
행복의 방정식.

  • 21세기 초 도시 중산층 이상의 한국인을 지배하는 정신 상태는 두 개의 강력한 '코드'에 관통당해 있다. 더 날씬한 은유가 생각나지 않아 좀 투박하게 대놓고 말하자면, 하나는 '탐욕의 코드'이고 또하나는 '선망의 코드'이다.
  • 탐욕의 코드는 폴 새뮤얼슨이 말한 자본주의적 '행복 방정식'을 따른다. 이 경제학자가 소개한 계산법에 의하면 행복(H)은 욕망(D) 분의 소비(C)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얼마만큼 소비했는가"가 나의 행복을 결정한다. 소비를 소유로 바꿔놓으면 이해하기 쉽다.
  • 선망의 코드는 "저 자는 갖고 있는데 나는 없어, 이건 안되지, 암 안 될 일이고말고"라고 사람들을 들쑤셔 견딜 수 없게 만드는 전염성 질투의 부호다. 저 사람이 갖고 있는 것은 나도 가져야 한다. 내가 저 인간만큼 갖지 못한다면 나는 불행하다. 내가 가질 행복을 저 자가 갖고 있네그랴? 저런 도둑놈, 내 행복을 훔쳐가다니, 화가 치미는 바로 그 순간에 질투의 여신이 나타나 행복에 이르는 길을 확인시켜준다. 저 자가 가진 것은 너도 가져라, 뺏고 훔쳐서라도. 그러면 행복은 네것이다. 아니, 너는 저 자가 가진 것 이상으로 가져야 해.
  • 탐욕과 선망의 부호가 행복 방정식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일찌감치 알려준 것은 석가모니다. 욕망의 크기는 무한해서 그것을 충족시킬 방도가 없다는 것, 그것을 알게 된 것이 붓다의 '깨침' 가운데 하나다. 욕망은 일정량의 크기로 묶이지 않는다. 100을 바라던 욕망은 그 100을 소유하는 순간 200으로 불어나고, 200을 갖는 순간 300으로 커져 달아난다. 욕망의 크기를 정할 수 없기 때문에 소유를 키우는 방법으로 행복에 도달한다는 것은 신기루 잡기다. 그러므로 욕망의 크기를 줄여라. 그것만이 평온에 이르는 길이다. 욕망이 제로일 때는 제로의 소유만으로도 너는 행복하다. 재갈을 물릴 수 없는 무한 욕망이 탐욕이다. 그 탐이 충족되지 않아 너를 화나게 하고 질투하게 하는 것이 '진, 분노'이며 이 간단한 진리를 모르는 것이 '치, 어리석음'다. 그러므로 욕망을 다스려라, 줄여라, 끊어라, 그리고 평화로워라, 친구여.
  • 만약 행복의 추구가 불행의 완벽한 제거와 고통의 완벽한 회피에 목표를 둔다면 그 목표는 달성 불가능할 뿐 아니라 그 자체가 고통의 기원이 된다. 완벽한 행복의 추구란 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이미 삶의 진실이 아니며, 인간 사회의 도덕적 이상도 아니다.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법을 열심히 찾아 헤매야 하는 사회는 행복한 사회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절망의 사회다.

 
 
우파니샤드에 벼락신의 언어. '다다다', 첫번째 '다' 소리는 '다미아타'의 다로 "너를 다스리라"는 의미다. 두번째 '다'는 '다타'의 다로 "주어라"를 의미한다. 세번째 '다'는 '다야디암'의 첫 소리이며 의미는 "자비로워야한다"이다.
 
 
스승이란 누구인가? 세상에 대한 바른 관점을 유지하고자 노력하고 그런 노력의 소중함을 가르치는 자, 경험과 지식과 상상력을 부단히 용접하고 관용의 정신을 유지하면서도 진실 앞에 자신을 세우려는 자, 좁은 이해관계의 울타리를 넘어서려는 공정한 정신의 소유자, 인간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것에의 감각을 전달하는 자. 그가 지식행상 아닌 '스승'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오늘날 인문학에 안겨지는 사회적 책임은 강단 인문학적 작업과는 다르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사유와 실천으로서의 인문학이 중시해야 할 네 가지 책임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인간에 대한 인간의 책임, 사회에 대한 인간의 책임, 역사에 대한 인간의 책임, 문명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환기시키는 일이 그것이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다 해서 화내지 않으니 군자답지 않은가 (논어 1장 3절)
남이 알아주지 않으면 불같이 화내고, 남의 눈을 잡기 위해 조석으로 안달하다가 안 되면 저주를 퍼붓는 사람들, 그게 '우리'다.  그 우리는 행복하지 않고 행복할 수가 없다. 행복이 전적으로 남들의 시선 여하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인문학 관계의 건축술
빵과 의미는 삶을 지탱하는 두 기둥이다. 빵이 삶의 바깥쪽을 버텨낸다면 의미는 삶의 안쪽을 지키고 지탱한다. 삶이 무의미해질 때 사람들은 시들시들 병들고 미치고 자살한다. 이 세계로부터 의미가 빠져나갈 때일수록 인간은 제 손으로 의미를 만들고 삶에 의미를 공급해야 할 책임 앞에 놓인다. 이 의미 공급 작업에 절대적 요청이 "나는 왜 여기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이것이 그 무용해 보이는 인문학적 질문의 '위대한 실용'이다. 나는 나 혼자 '나'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너'와의 관계속에, 그리고 '남'들과의 관계 속에 존재하고 그 관계 덕분에 내가 된다. 그 관계를 떠나면 나는 무의미하다.
 
 
우리가 이 지상에 태어나는 것은 우리 자신이 결정한 사항도, 선택한 사안도 아니다. 그러나 그 사실 때문에 삶에 대한 나의 책임, 당신의 책임, 우리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나의 탄생은 내가 결정한 바 없고 선택한 바 없는 일이지만, 그러나 탄생 이후의 우리 삶은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사건이다. 이것이 인간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생각하는 게 인문학적 사유의 첫번째 과제라는 말의 의미다.
 
 
 
인간은 무엇보다 자기 존재의 이유를 생각하는 동물이며 자기 삶의 의미와 가치와 목적을 확보하고자 하는 동물이다. 이것이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가장 중요한 기본 조건이다. 내 존재의 정당성("나는 왜 없지 않고 있는가?"), 내 삶의 문법("나는 어떤 삶을 살고자 하는가?")
 
 
 
인간은 인간을 발명해온 동물이다. 참이라는 가치를 추구하다가 인간은 과학자를 발명했고 선이라는 가치를 추구하다가 철학자를 발명했으며 아름다움을 추구하다가 시인을 발명하고 예술가를 발명했다. 생명이라는 가치를 위해 인간은 의사를 발명했고 지금도 발명하고 있다. 인간은 사랑과 우정이라는 가치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기도 하는 인간을 자유, 정의, 평등 같은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 목숨도 내던지는 인간을 발명했다. 지금도 발명은 계속되고 있다.
 
 
 
인간이 추구해온 중요한 가치들 : 자유와 평등, 진리와 정의, 사랑과 우정, 공존과 상생, 배려와 보살핌, 생명 존중과 평화 애호 등등
 
 
 
우리 시대를 괴롭히는 국지적 세계적 문제들 : 빈부 격차의 극단적 심화, 생태계 파괴, 넘쳐나는 쓰레기, 자원 고갈, 시장에 의한 사회 접수, 핵에너지의 위험성과 에너지 부족 문제, 노령화, 테러, 기후변화, 정보-지식의 왜곡과 조작, 과학과 윤리의 충돌, 말기 자본주의의 역기능, 민주주의의 위기 등
 
 
 
자기 성찰적 질문들을 던지고 그 질문들과 대면하는 일, 거기서부터 문제 해결의 작업은 시작된다. "나는 어떤 인간이 되고자 하는가?"(나의 형성과 발명), "나는 어떤 삶을 살고자 하는가?"(내 삶의 발명), "나는 어떤 사회에 살고 싶어하는가?"(가치 추구와 발명) - 이런 질문들은 우리를 성장하게 하고 성숙하게 한다. 성숙이란 결국 무엇인가? 인간, 사회, 자연, 문명, 역사에 대한 나의 책임을 망각하지 않는 능력의 형성, 그것이 성숙이다.
 
 
 
사회를 지탱하는 데 필요한 가치를 옹호하는 일은 인문학의 몫이며, 공공의 가치, 평화, 관용, 선의, 아름다움 같은 것에 대한 존중의 능력을 일깨우고 비판 정신과 대안적 상상력을 키우는 일도 인문학의 작업이다. 공동체 유지에 필요한 시민 덕목의 학문적 바탕을 다지는 것 역시 인문학이다. 이 시점에서 인문학의 위축은 그 차제로 사회적 위기다.
 
 
 
인간의 유한성의 프레임에 갇혀 있기 때문에 모든 일들에 같은 양의 시간을 투입하거나 동일한 중요성을 둘 수가 없다. 그는 가치 있는 일, 중요한 일들과 그렇지 않은 일들을 분별하면서 자신의 유한한 시간을 배분해야 한다. 중요한 일들 중에서 세상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동의할 만한 세 가지 '큰일'을 고른다면 무엇일까? 첫째는 의미없는 곳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 둘째는 희망 없는 곳에 희망을 주입하는 일, 셋째는 정의가 없는 곳에 정의를 세우는 일이다.
이들 큰일의 첫번째 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무의미성의 도전'에 대한 대응이고, 두번째 것은 '지옥의 조건에 대한 거부'이며 세번째 것은 '야만에 대한 저항'이다. 의미, 희망, 정의는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세 개의 지주와도 같다.
 
 
 
정치가 해야 할 일은 자연의 위대한 원리처럼, 사회의 가장 낮고 그늘진 곳, 빼앗기고 궁핍한 곳, 내팽개쳐지고 억눌리고 무시된 곳에 소생과 부활의 봄을 가져다 주어야 한다. 자연의 사계는 제각각의 소리와 색깔과 동작을 갖고 있다. 여름은 자라는 것들의 소리와 윤기를, 가을은 익어가는 것들의 색채와 자세를, 겨울은 다시 기다리기 위해 근본으로 드는 것들의 멈추어버린 듯한 호흡과 낮은 엎드림의 몸짓을 갖고 있다. 봄은 새로 깨어나는 것들의 소리와 움직임과 색깔로 가득하다. 긴 잠에서 깬 개구리들의 하품 소리, 곰들의 기지개, 터져나오는 싹들의 여린 녹색이 봄의 무대를 장식한다. 여름이 성장의 드라마이고 가을이 성숙의 서사, 겨울이 기다림의 형식이라면 봄은 단연 소생과 부활의 장르다.
 
 
 
인간은 기억과 망각의 균형 속에서 그의 현재를 관리하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 이것이 기억과 망각의 변증법이다. 양자 균형이 깨질 때 인간은 기억의 노예가 되거나 유쾌한 망각의 바보가 된다. "잊지 마라"라는 기억 명령은 과거의 신성화와 신비화를 위한 명령일 때에는 죽음을 동반할 수 있다. 그러나 기억은 과거를 섬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 봉사하기 위한 것이다. 망각도 그러하다. 비판력이 마비될 때 망각은 죽음의 책략이 된다. 그러나 기억과 마찬가지로 망각도 건강한 현재를 위해 필요하며, 이 경우에만 망각은 유용성을 갖는다.
 
 
 
"도덕의 나침반을 잃으면 우리가 지금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알 수 없게 된다" - 조지 워싱턴
 
 
 
요즘 한국의 대학생들에게 '원칙과 방향에 대한 질문'은 없다고 한다. 그들의 머리에는 한 달에 얼마 벌고 얼마를 쓰느냐, 어디 부동산을 언제 어떻게 살 것이냐는 생각만 꽉 차 있고 손익의 대차대조표만 중요할 뿐 삶을 이끌 원칙과 가치의 화살표 같은 것은 아예 없다고 한다. 나는 이런 소문들을 믿지 않는다. 나는 우리의 젊은 세대가 자기 혼자만 생각하는 좁좁한 울타리, 개구리 우물, 작은 세계의 수인들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과거의 어떤 세대와도 다른, 어쩌면 단군 이래 최고의 개인주의적 편향을 가진 세대일지는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개인주의가 공동체와 정의, 공존과 연민의 윤리를 완벽하게 시궁창으로 내던진 몰가치의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어려운 선택의 시대 속으로 내몰리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우리는 도대체 어떤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가"라는 질문, "어떤 사회가 좋은 사회인가"라는 질문을 그들의 모든 중요한 선택과 행위의 배경에 깔 줄 아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하버드 대학 졸업식의 로런스 서머스 총장의 축사
"나는 하버드 4년이 여러분들에게 편안한 안락지대 바깥에서 생각할 줄 아는 능력, 생각의 힘을 인정하며 바른 논리와 사유에 입각한 토론으로 세계를 바꾸어나갈 능력, 다수가 틀렸을 때에는 그 다수에 외로이 맞설줄 아는 능력을 길러주었기를 희망한다"
하버드가 길러내고자 하는 것은 생각할 줄 아는 사람, 생각의 창조자, 생각의 실천자이다.
"이치에 맞는 것들을 위해 일어서고 부당한 것들에 맞서며 남들이 싫어할 소리를 마다하지 않는 불편도 감내하라. 그대들을 불안하게 하는 사람들의 말도 존경하고 경청하라. 우리 대학 졸업생들은 창조자로서, 생각의 실천자들로서만 이 세계에서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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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치열하게 살아 보지 않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 대한 공감, 존중, 측은지심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온실속에서 실패를 모르고 키워진 엘리트라는 사람들이 리더가 되어 사회를 망가뜨리고 역사에서 후퇴시키는 모습이 안타깝다.
 
 

[본문발췌]
 
자연의 대순환 속에는 승자도 패자도 없다. 그저 거쳐가야 할 단계가 있을 뿐이다. 이 이치를 깨달을 때 우리 마음은 자유로워지며, 역경의 시기를 받아들이게 되고, 영광의 순간에 도취되어 그 순간이 영원할 것으로 착각하지 않게 된다.
 
 
 
포기하는 사람이 패배자이고, 그 외에는 모두 승리자이다.
 
패배자는 패배한 사람이 아니라 실패를 선택한 사람이다. 패배는 특정한 전투나 전쟁에서 지는 것을 의미한다. 실패는 아예 싸우러 나가지도 않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간절히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때 패배했다고 느낀다. 실패는 애초에 무언가를 꿈꿀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마라. 그러면 실망도 없을 것이다'가 실패의 표어이기 때문이다.
 
패배는, 두렵지만 열정과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것이다. 또한 패배는 용감한 사람들의 것이다. 용감한 사람만이 패전의 명예와 승전의 기쁨을 알기 때문이다.
 
패배해본 적 없는 사람들은 겉으로는 행복하고 우월하며 진리에 통달한 듯 보이지만, 사실상 그런 진리를 얻기 위해 손가락 하나 까딱한 적도 없다. 그들은 늘 강자의 옆에 붙어서, 하이에나처럼 사자가 먹고 남긴 찌꺼기들을 주워먹으며 살아간다.
 
 
 
고독 속에 놓일 때 마음이 무거워지는 사람들은 삶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 우리는 늘 혼자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사랑이 신의 영역이듯, 고독은 인간의 영역이다. 삶의 경이를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사랑과 고독은 평화롭게 공존하는 개념이다.
 
 
세상만물은 모두 존재할 이유가 있다.
 
 
진정으로 타인을 돕는 사람들은 억지로 쓸모 있는 삶을 살려고 애쓰지 않는다. 그저 유익한 삶을 이끌어갈 뿐이다. 남들에게 이래라저래라 조언을 하지도 않는다. 그저 조용히 모범을 보이며 살아간다. 자신이 늘 바라온 삶을 사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타인에 대한 비판을 그만두고 자신의 꿈을 이루는 데 집중하라. 그런 삶이 대단찮게 여겨질지도 모르지만, 만물을 주관하는 신의 관점에서는 남들에게 본보기가 되는 그런 삶이야말로 세상을 개선하려는 신의 뜻에 부합한다. 따라서 신은 그런 삶을 사는 이에게 매일 더 많은 축복을 내릴 것이다.
 
 
 
 
옳은 길은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길이다. 자연의 길은 사막의 모래언덕처럼 늘 변화한다.
여행자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온갖 새로운 일들 때문이 아니라, 그런 일이 다쳤을 때 제대로 대처하는 방법을 모를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번민한다. 하지만 나아가야 하는 길 위에 서 있고 다른 대안이 없으면 그는 굳건한 의지력을 발휘하게 되고, 결국 주변 상황이 그에게 유리한 쪽으로 흘러가게 된다.
 
'어려움'이란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게 해주는 오래된 도구의 또다른 이름이다.
변화를 거부하는 사람들도, 변화를 받아들인 사람들도, 언젠가는 죽음의 방문을 받는다. 변화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죽음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참으로 흥미진진한 삶을 살았습니다. 축복을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모험이 위험하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나는 말하고 싶다. 계속 그렇게 살다간, 모험을 추구하며 사는 사람들보다 더 빨리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아름다움은 같음이 아닌 다름 속에 존재한다. 기다란 목이 없는 기린, 가시 없는 선인장을 어느 누가 상상할 수 있겠는가. 우리를 둘러싼 산봉우리들은 그 높이가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웅장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이다. 산봉우리들의 높이를 전부 똑같이 만들어버리면 더이상 그런 분위기를 내지 못할 것이고 우리의 우러름도 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 우리를 놀라게 하고 마음을 끌어당기는 것은 바로 불완전함이다.
이미 괜찮은 모습인데도 자신을 아름답게 꾸미지 못해 안달한다. 사랑이 독창적인 아름다움을 찾아다닐 때 남들과 비슷해지려고 안간힘을 쓴다. 자신의 내면에 가장 밝은 빛이 있다는 사실을 잊고, 외부의 빛으로만 자신을 꾸미려 한다.
 
 
스스로 길을 택했다 해도, 그들이 그 길의 목표를 알게 되는 것은 죽음과 마주하는 순간에 이르렀을 때다. 열정을 품고 삶의 신비를 존중하며 나아가는 사람은 아름답다. 그의 길도 아름다우며 그의 짐은 가볍다.
목표는 거창할 수도 소박할 수도 있고, 먼 미래에나 실현될 수도 가까운 시일 내에 이뤄질 수도 있다. 다만 그 목표를 향해 가는 과정에서 그들은 늘 겸허하고 명예를 중시한다. 그들은 한 걸음 한 걸음의 의미를 알고 있으며,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고된 훈련을 받고 직감을 발휘했는지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달성해야 할 목표뿐 아니라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다보니 힘에 부쳐 길을 걷다 말고 멈춰 서야 할 때도 자주 있다.
그럴 때면 사랑이 나타나 말한다. "넌 구체적인 목표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향해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그렇지 않아. 넌 그 목표 자체를 사랑하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거야. 힘들면 좀 쉬더라도, 최대한 빨리 일어나 다시 걸어. 네 목표가 널 발견하고 너에게 달려올 테니까."
그 질문을 무시하는 사람, 그 질문에 답하는 사람, 그 질문에 직면하는 유일한 방법이 행동에 나서는 것임을 아는 사람 모두가 같은 난관에 부딪히고 나름의 행복을 찾는다. 그러나 자신이 옳은 길을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는 이는 겸허하고 용감하게 신의 계획을 받아들이는 사람뿐이다.
 
 
우리는 주는 만큼 받는 데 익숙해 있다. 하지만 사랑에 대해서는 주는 만큼 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접어야 한다.
사랑은 믿음을 보여주는 행위이지 교환 행위가 아니다.
사랑은 열쇠고리 맨 끝에 달린 마지막 열쇠다. 그 열쇠를 써야 비로소 문을 열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기를..
 
 
기쁨과 좌절의 순간을 타인과 나누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자질과 부족한 면모를 완전히 알아내지 못한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하면 남들에게도 사랑과 존중을 받는다. 남들에게 잘 보이려 애쓸 필요는 없다. 그래봐야 누구에게도 존중받지 못한다. 자신이 하는 행동, 있는 그대로의 자신에 대해 확신을 가진 사람들을 친구로, 동맹자로 삼아야 한다.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찾아내라는 말이 아니다. 그대들과 다른 생각을 하고, 그대들의 생각에 무작정 따르지 않는 사람을 찾으라는 말이다.
  
 
우정은 사랑의 여러 얼굴 중 하나다. 사랑은 누가 다른 의견을 내놓는다고 하여 흔들리지 않는다. 사랑은 조건 없이 친구를 받아들이고 나름의 방식으로 성장해가도록 지켜본다. 사랑은 타인에게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믿는 행동이다. 비싼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사랑받으려 노력할 필요는 없다. 사랑은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다. 입장을 결정하기에 앞서 미적대며 사태를 관망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위험을 무릎쓰고라도 당장 결단을 내리는 사람들을 친구로 두어야 한다.
 
 
군더더기를 모두 덜어내고 단순함과 집중에 초점을 맞추면 우아함을 얻을 수 있다.
단순함은 무엇일까? 단순함은 인생의 진정한 가치와 맞닿아 있다.
삶에서는 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훌륭한 것이기도 하다. 단순한 것들은 스스로 그 가치를 드러낸다.
 
 
일을 하면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 없이는 살아갈 수 없으며, 그들 또한 우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일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생활을 위해 의무적으로 하는 일이다. 이 경우, 사람들은 시간을 팔아 돈을 벌지만 훗날 그 시간을 돈으로 되살 수 없음을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언젠가 쉬게 될 날을 꿈꾸며 일생을 보낸다. 마침내 그런 날이 왔을 때 그들은 너무 늙어 인생을 제대로 즐길 수 없다. 그런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온 것이 자기 책임이 아니라고 여기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어쩔 수가 없었어."
둘째, 마찬가지로 생활을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타인에 대한 헌신과 사랑을 충실히 이행하는 일이 있다. 이런 종류의 일을 우리는 '봉헌'이라고 칭한다. 가령 두 사람이 같은 재료를 사용해 같은 요리를 한다고 하자. 한 사람은 요리에 사랑을 쏟고 다른 한 사람은 그저 배나 채울 수 있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요리를 한다. 사랑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무게를 달 수도 없지만, 결과적으로 두 사람이 만들어낸 요리는 확연히 다르다. 
 
 
운명은 아무에게도 불공정하지 않다. 자기 일을 사랑하는 것도 미워하는 것도 모두 자신의 선택인 것이다.
 
 
 
 
성공은 자신의 일을 남들과 비교하며 시간 낭비를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찾아간다. 성공은 매일 "나는 최선을 다할 거야"라고 말하는 사람의 집으로 찾아간다. 성공만을 좇는 사람은 오히려 성공하기 어렵다. 성공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 살다보면 주어지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나름의 목표를 가지고 살아야 하지만,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위 풍경을 즐긴다고 해서 크게 잘못되지는 않는다. 앞으로 한 발 한 발 나아갈수록 멀리까지 내다볼 수 있게 되고,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게 된다.
 
금고에 황금을 가득 채워넣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풍요롭게 사는 것이 바로 진정으로 성공한 삶이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돈으로 씨앗을 사서 뿌리고 가꾸고 수확하여 창고에 곡물을 가득 채우고 풍요롭게 살 거야." 그러나 죽음이 찾아오면 그 사람이 쏟았던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남들보다 빨리 가려고만 하지 말고 땅을 더욱 비옥하게 하고 풍경을 더욱 아름답게 만드는 행동을 하며 나아가야 한다. 때가 무르익지도 않았는데 무조건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 심어놓은 나무에 과일이 열렸다고 설익은 것을 너무 일찍 따버리면, 먹는 이에게 아무런 기쁨도 주지 못한다. 반대로 두려워서든 불안해서든 열매를 따 봉헌해야 할 시기를 너무 미뤄버리면, 열매는 썩어버리고 만다.
 
   그러니 파종에서 수확까지의 시간을 존중해야 한다.
   변화의 기적이 일어날 때까지 참고 기다려야 한다.
   밀이 화덕에 들어가 익기 전에는 빵이 될 수 없다.
   단어들이 잘 어우러져 입에서 나오기 전까지는 시가 될 수 없다.
   사람의 손이 실을 잣기 전에는 천이 만들어질 수 없다.
   성공한 삶이란 어떤 삶일까? 매일 밤 평화로운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으면 성공한 삶이다.
 
 
 
 
인간의 탄생과 함께 불안도 태어난다. 불안을 완전히 제어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우리는 불안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폭풍우와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우듯이. 불안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에게 삶은 악몽이다.
하루를 이루는 매 시간들, 감사히 여겨야 마땅할 그 시간들이 그들에게는 저주다. 그들은 죽음과의 만남을 재촉하는 것인 줄도 모르고 시간이 빨리 흐르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들이 불안을 떨치기 위해 하는 일은 결국 불안을 더욱 키우고 만다.
 
 
자신이 지나온 걸음걸음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만이 자신의 가치를 인정할 수 있다.
 
 
 
 
누군가를 몰락시키고 싶으면, 현명한 사람은 우선 그가 세상에서 제일 높은 산을 오르게 하여 자신이 매우 강한 사람이라는 착각을 하게 만든다. 그러면 그 사람은 더 높이 올라갈 수 있다고 자만하다가 깊은 구렁으로 거꾸러지게 된다.
 
타인에게 속한 무언가를 갖고 싶으면, 현명한 사람은 먼저 그에게 선물을 잔뜩 안겨준다. 그러면 그 사람은 수중에 쓸데없는 물건들이 너무 많아져 그것들을 돌보느라 나머지 물건에는 소홀해지게 된다.
 
적의 계획을 알고 싶으면, 현명한 사람은 거짓으로 공격을 시도한다. 우리는 누구나 남들이 우리를 좋아하지 않을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피해망상 속에 살기 때문에, 늘 스스로를 방어할 준비가 되어 있다.
 
아무리 똑똑한 적이라도 먼저 공격을 받으면 불안감 때문에 지나치게 격한 반응을 보이면서 보유중인 무기들을 노출하게 된다. 현명한 사람은 이런 식으로 적의 강점과 약점을 알아낸다.
 
현명한 사람은 상대가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 정확히 파악한 후 공격과 후퇴 여부를 결정한다. 이것이 바로 고분고분하고 약해 보이는 사람들이 힘있고 강한 적을 물리치고 무너뜨리는 방법이다.
 
 
 
 
가장 파괴력이 강한 무기는 사람을 다치게 하는 창이 아니다. 성벽을 무너뜨리는 공성포가 아니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다. 말은 핏자국 한 점 남기지 않고 인생을 망가뜨릴 수 있으며, 말로 인해 생겨난 상처는 결코 아물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는 혀를 잘 간수하고 말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누군가 우리에게 불쾌한 말을 한다고 해도, 승자가 없는 싸움이니 싸우지 않는 편이 낫다. 우리가 품성 나쁜 상대방과 같은 수준이 되어 어둠 속에서 싸울 때, 유일한 승자는 어둠의 왕인 악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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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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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서는 많이 보려고 촘촘한 시간 계획을 세워 돌아다니며,
식당에서 주문한 음식은 언제나오냐고 다그치다가 나오자마자 금새 먹어치우고,
오가는 길 발걸음도 빨리빨리,
사람들과 말하는 것도 빨리빨리다.
 
하나씩 음미하고 소화해 그것의 본질을 이해하며 적은것에 만족하는 작은 삶을 살아보자.
짧은 길도 느릿느릿 긴 시간을 들여 천천히 살펴보며 걸을 수 있는 여유로운 삶을.
 
 

[본문발췌]
 
책 이야기와 더불어 삶에 대한 태도, 방향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책을 읽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좀더 올바른 시각으로 삶을 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생의 정답을 찾지 마시길. 정답을 만들어가시길.
내일을 꿈꾸지 마시길. 충실한 오늘이 곧 내일이니.
남을 부러워 마시길. 그 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
시류에 휩쓸리지 마시길. 당대는 흐르고 본질은 남는것.
멘토를 맹신하지 마시길. 모든 멘토는 참고 사항일 뿐이니.
이 책의 모든 내용을 단지 하나의 의견으로 받아들이시길.
그리고 당신 마음속의 올바른 재판관과 상의하며
당신만의 인생을 또박또박 걸어가시길.
당신이란 유기체에 대한 존중을 절대 잃지 마시길.
 


1) 자존 : 당신 안의 별을 찾으셨나요?
메멘토 모리와 아모르 파티, '죽음을 기억하라'와 '운명을 사랑하라'는 죽음과 삶이라는 상반된 의미의 조합이지만 결국 같은 방향을 바라봅니다. 내가 언젠가 죽을 것이니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하라는 것이고, 그러니 네가 처한 너의 운명을 사랑하라는 것이죠. 저는 이런 태도가 자존 같습니다. 어떤 위치에 있건, 어떤 운명이건 스스로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것. 사실 많은 사람들이 자존을 말합니다. 그런데 진짜 자존을 지키며 사는 사람들은 드뭅니다.
 
나의 기준점은 어디에 있는가?
자존감을 가지는 데 가장 방해가 되는 요인은 아마 우리 교육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 교육은 아이들 각자가 가지고 있는 것에 기준을 두고 그것을 끄집어 내기보다 기준점을 바깥에 찍죠. 명문 중학교, 특목고,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엄친아, 엄친딸을 따라가는 게 우리 교육입니다. 다시 말해 판단의 기준점이 '나'가 아니라 엄마 친구의 아들과 딸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교육받은 우리는 '다름'을 두려워해요. 기준점이 되는 누군가와 다른 내 모습을 상상하지 못합니다. 다 같이 몰려가는 대열에 합류하지 못하면 불안해 합니다. 저마다 생김새도 다르고 위치도 다르고 삶의 지향점도 다른데 똑같이 살아야 마음이 편해요.
 
우리는 나의 '자존'을 찾는 것보다는 바깥의 '눈치'를 보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지는 않은지.
 
미국 교육은 '네 안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를 궁금해 한다면 한국 교육은 '네 안에 무엇을 넣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가장 큰 차이라고 한다. 바깥에 기준점을 세워놓고 맞추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 있는 고유의 무엇을 끌어내는 교육을 이야기한 것이죠.
 
내 안에 있는 걸 존중하게 해주는 교육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죠. 우리는 늘 우리에게 없는 것에 대해 지적 받고 그것을 가져야 한다고 교육 받아왔어요. 칭찬은 자존감을 키워주는데, 가진 것에 대한 칭찬이 아닌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질타는 눈치를 자라게 합니다. 중심점을 바깥에 놓고 눈치 보며 바깥을 살핍니다. 자존은 중심점을 안에 찍고 그것을 향해 나가는 겁니다.
 
내 마음속의 점들을 연결하면 별이된다. 밖에 찍어놓았던 기준점을 모두 안으로 돌려 자신이 제일 잘할 수 있는 것을 찾아냈고 점을 다시 찍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의 점들을 연결해 하나의 별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2) 본질 : Everything Changes but Nothing Changes (모든 것은 변하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현상은 복잡하다. 법칙은 단순하다. 버릴 게 무엇인지 알아내라.' - 생각에 관한 생각
 
우선 본질을 알아야 혁신도 존재한다.
 
모든 것은 변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그것입니다. 사람들의 웃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본질의 시대고 '변하지 않는' 그것을 잡아야 해요. 전화기의 본질은 궁금하고, 그립고, 보고 싶은 사람의 목소리라도 듣고 싶은 마음입니다. 전화기가 발전해 개인 휴대전화가 생기고, 그 휴대전화로 얼굴을 마주보면서 통화할 수 있는 시대가 됐지만 전화기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변화하는 것 속에 변하지 않는 것이 인생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게 콘텐츠가 되는 겁니다.
 
교육의 본질은 교양과 삶의 태도를 가르치는 전인교육이 되어야 한다. 지식은 본질을 익힌 후에 있어야 합니다.
 
예술은 궁극의 경지에서 단순해지고 명료해진다는 것을 예술가들의 작품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연륜은 사물의 핵심에 가장 빠르게 도달하는 길의 이름이다.' - 곽재구 <포구기행>
 
경험상 돈을 따라가면 재미도 없고 재미를 따라가면 돈도 따라오더군요. 그런 경험에 따른 제 생각을 말씀 드리자면 돈은 본질이 아닙니다. 돈을 따라가지 말고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내 실력은 무엇인지 어떤 것을 할 수 있는지를 고민해보고 그것을 따라가세요.
 
 
 
 
3) 고전 : Classic, 그 견고한 영혼의 성
"우주를 한 사람으로 축소시키고 그 사람을 신으로 다시 확대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 빅토르 위고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을 가리기도 한다.
진짜 알려면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궁금해질 겁니다. 그 대상의 본질에 대해서. 그리고 그걸 알기 전에는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위험합니다. 모르면 모른다고 해야 합니다. 정보는 인터넷으로 조금만 찾아보면 다 나옵니다. 알려고 하기 전에 우선 느끼세요. 우리는 모두 유기체잖아요? 고전을 몸으로 받아들이고 느껴야 해요. 그러다 보면 문이 열려요. 그 다음에는 막힘 없이 몸과 영혼을 타고 흐를 겁니다.
 
 
 
 
4) 견(見) : 이 단어의 대단함에 대하여
아이디어의 시작, 경험
경험, 제가 보고 겪은 것들, 말하자면 그 아이디어들은 제가 본 것이 아니면 나올 수가 없었던 겁니다.
 
심부재언 시이불견 청이불문 식이부지기미 (心不在焉 視而不見 聽而不聞 食而不知其味) - 대학
마음에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그 맛을 모른다.
우리의 대부분의 행동은 시청을 하는 거죠. 간장게장을 먹을 때 그저 흘려 보고 들은 겁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안도현은 간장게장을 견문을 한 거예요. 그 차이입니다. 흘려 보고 듣느냐, 깊이 보고 듣느냐의 차이. 결국 생각해보니 지금까지의 나의 경쟁력이 되어준 단어는 '見'이었습니다.
 
견의 범위 : 내 눈앞의 것, 내 행동만 잘 본다고 해서 아이디어가 샘솟고 창의력이 솟아나지 않습니다. 때로는 주변의 모든 것들, 예를 들어 회의실에서 하는 한마디, 친구들과의 대화,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에도 주목해야 합니다. 그들의 말을 시청하지 말고 견문해야 하죠.
 
"네가 창의적이 되고 싶다면 말로 그림을 그려라" - 존 러스킨
 
"시인의 재능은 자두를 보고도 감동할 줄 아는 재능이다" - 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
 
'발견은 모든 사람들이 보는 것을 보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것을 생각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 생각의 탄생
모두가 보는 것을 보는 것, 시청.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 견문이죠.
 
Beauty is in the eye of beholder.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들의 눈 속에 있는 법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무것인 게 인생이더라.
시를 쓰든 말든, 광고를 하든 말든, 창의적이 되든 말든 다 떠나서 보는 건 정말 중요합니다. 제대로 볼 수 있는 게 곧 풍요니까요. 그래서 인문이라는 단어는 법학, 의학, 과학, 물리학에 다 필요한 거예요. 이런게 있어야 행복한 상태로 살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보배롭게 봐야 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보는 힘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아무것이고, 아무것이라고 생각했던 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어요.
 
"온 세상이 태어나는 것처럼 일출을 보고 온 세상이 무너지듯 일몰을 봐라!" - 앙드레 지드
 
"여행을 생활처럼하고 생활을 여행처럼 해봐", 생활이 여행처럼 되다면 정말 매 순간이 소중하고 안타까울 겁니다.
"여행지에서 랜드마크만 찾아가서 보지 말고 내키면 동네 카페에서 동네 사람들과 사는 이야기도 하고 벼룩시장에 가서 구경도 하면서 거기 사는 사람처럼 여행하는 거야. 그게 더 멋져. 그리고 생활은 여행처럼 해. 이 도시를 네가 3일만 있다가 떠날 곳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갔다가 다신 안 돌아온다고 생각해봐. 파리가 아름다운 이유는 거기에서 3일밖에 못 머물기 때문이야. 마음의 문제야. 그러니깐 생활할 때 여행처럼 해."
 
호학심사(好學深思), 즐거이 배우고 깊이 생각하라. 이 말에서 더욱 깊이 새겨야 할 것은 심사입니다. 너무 많이 보려 하지 말고, 본것들을 소화하려고 노력했으면 합니다. 피천득 선생이 딸에게 이른 말처럼 천천히 먹고, 천천히 걷고, 천천히 말하는 삶. 어느 책에서 '참된 지혜는 모든 것들을 다 해보는 데서 오는 게 아니라 개별적인 것들의 본질을 이해하려고 끝까지 탐구하면서 생겨나는 것이다'라는 문장을 읽었습니다. 이게 지금의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길거리의 풀 한 포기에서 우주를 발견하고, 아무 생각 없이 먹는 간장게장에서 새로운 세상을 얻을 수 있습니다. 깊이 들여다본 순간들이 모여 찬란한 삶을 만들어낼 것입니다.
  
 
 

5) 현재 : 개처럼 살자
답은 내 앞에 있다.
개는 밥을 먹으면서 어제의 공놀이를 후회하지 않고 잠을 자면서 내일의 꼬리치기를 미리 걱정하지 않는다.
'개들은 원형의 시간을 살고 있다. 행복은 원형의 시간 속에 있다'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Seize the Moment, Carpe diem (순간을 잡아라, 현재를 즐겨라)
 
만물은 준비되어 있으니 나만 성의를 다하면 된다.
만물 개비어아의 반신이성 낙막대언 (萬物 皆備於我矣 反身而誠 樂莫大焉) - 맹자
만물의 이치가 모두 나에게 갖추어져 있으니, 나를 돌아보고 지금 하는 일에 성의를 다하면 그 즐거움이 더없이 클 것이다.
 
내 답이 옳다. 다른 답은 내 답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의 인정, 현재에 집중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결국 이것은 자존과 연결됩니다.
 
모든 선택에는 정답과 오답이 공존합니다. 그러니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고민하지 말고 선택을 해봤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선택을 옳게 만드는 겁니다. 어떤 선택을 하고 그걸 옳게 만드는 과정에서 제일 중요한 건 뭐냐, 바로 돌아보지 않는 자세입니다. 어느 하나를 선택하고, 그 선택을 옳게 만들려면 지금 있는 상황에서 무엇이 최선인지 생각하고 실천하는 게 제일 좋은 답이에요.
 
'나는 지금 내가 차지하고 있는 이 공간적 지점에, 시간 속의 이 정확한 순간에 자리잡고 있다. 나는 이 지점이 결정적이지 않은 것을 허락할 수 없다.' - <지상의 양식>, 현재가 나한테 결정적이지 않은 것을 허락할 수 없다.
 
삶은 '현재 순간들의 지속적인 일어남', '하루에 매 순간 그대는 신을 송두리째 가질 수 있음을 잊지 말라', '그대 온 행복을 순간 속에서 찾아라' - 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
 
'인생은 잘 짜인 이야기보다는 그 하나하나가 관능적인 기쁨인, 내일 없는 작은 조각들의 광채다.' - 사르트르, 카뮈의 <이방인>에 대한 비평문 중
 
'후회는 또 다른 잘못의 시작일 뿐' - 나폴레옹
 
'살아 있다는 그 단순한 놀라움과 존재한다는 그 황홀함에 취하여' - 김화영
 
'풍부하게 소유하는 게 아니고 풍요롭게 존재하는 것' - 법정
 
'하늘 아래 가을의 작은 나뭇잎 이상 위대한 것은 없다' - 장자, 이 세상에 아무리 위대한 것들이 많다고 해도 지금 내 눈앞에 나타난 이 가을 나뭇잎만 못 하다는 지혜를 얻은 겁니다.
 
삶은 순간의 합이다.
답이 내 앞에 있다는 사실, 현재에 있다는 사실을 알면 행복합니다.
봄이 어디 있는지 짚신이 닳도록 돌아다녔건만 정작 봄은 우리 집 매화나무 가지에 걸려 있었다.
현재에 집중하자.
삶은 순간의 합이지 결코 경주가 될 수 없다.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삶을 경주로만 봅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레이스가 시작되죠. 요즘은 더 빨리 시작된다고 합니다. 어쨌든 초등학교 때부터 선행학습을 합니다. 그리고 명문 중학교에 가야 하죠. 거기 갈 때까지 행복을 유보해요. 명문 중학교에 가서 3일 정도 좋아하다가 다음부터 다시 행복을 유보하고 특목고를 향해 달립니다. 특목고에 들어가면 또 서울대에 가기 위해 다시 행복을 유보해요. 서울대에 가면 대기업에 들어가기 위해, 부장이 되기 위해, 임원이 되기 위해, 아파트 평수를 늘리기 위해 행복을 유보해요. 그러고 나면 나이 60, 70이 되죠.
 
지금 이 순간, 현재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행복은 삶이 끝나갈 때쯤에나 찾게 될 겁니다. 순간에 의미를 부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의미 없는 순간들의 합이 될 테니까요. 만약 삶은 순간의 합이라는 말에 동의하신다면, 찬란한 순간을 잡으세요. 나의 선택을 옳게 만드세요. 여러분의 현재를 믿으세요. 순간순간 의미를 부여하면 내 삶은 의미 있는 삶이 되는 겁니다. 순간에 이름을 붙여주고, 의미를 불어넣으면 모든 순간이 나에게 다가와 내 인생의 꽃이 되어줄 겁니다. 당신의 현재에 답이 있고, 그 답을 옳게 만들면서 산다면 김화영의 말대로 '티 없는 희열'을 매 순간 느낄 겁니다. 티 없는 희열로 빛나는 관능적인 기쁨에 들뜨는, 예외 없는 작은 조각들의 광채가 온전히 여러분의 인생을 빛내기를 바랍니다.
 
 
 
  
6) 권위 : 동의되지 않는 권위에 굴복하지 말고 불합리한 권위에 복종하지 말자
"다른 문화를 접할 때 우리에겐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호기심과 존중. 그리고 윗사람이 될수록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의 재능을 사는 일입니다. 프랑스 속담에 '재능은 다른 사람들의 재능을 발견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죠." - TBWA 월드와이드 CEO 장 마리 드루
 
'동의되지 않는 권위에 굴복하지 말고 불합리한 돈의 힘에 복종하지 말자'

인생을 멋지게 살고 싶다면, 강자한테 강하고 약자한테 약해져라.
 
 
 
 
7) 소통 : 마음을 움직이는 말의 힘
피터 드러커 <CEO에게 필요한 8가지 덕목>, '무엇을 하고 싶나' 보다 '무엇을 해야 하나' 묻는다. 무엇이 기업을 위한 길인가 생각한다. 계획표에 따라 행동한다. 기꺼이 책임을 떠맡고 결정을 내린다.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 구조를 만든다.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생산적 미팅 시스템을 구축한다.항상 '우리'라고 말한다.
 
소통이 안되는 세 가지 문제: 서로 다르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다.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다.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전하지 못한다.
 
소통을 위한 자세

  • 다름을 인정한다. (역지사지), 사람들은 대부분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다는 욕구가 더 강하죠. 상대의 이야기를 잘 듣지 않아요. 그러다 보니까 소통이 어려워집니다.
  • 문맥을 생각하자. 소통을 방해하는 두 번재 문제는 상대에 대한 배려심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문맥의 문제이기도 한데, 같은 말이라도 상대에 따라 문맥이 전혀 달라지기 때문이에요. 문맥을 잘 파악하는 건 지혜이고 센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남자들이 특히 취약하고, 여자들은 매우 뛰어납니다.
  • 생각을 디자인하자. 자신의 생각을 좀 더 세련되게 전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은 주술 구조를 제대로 갖추고 문맥을 파악하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처럼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말에 담긴 힘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생각을 디자인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상대의 입장에서 어떻게 생각할지 먼저 헤아릴 줄 아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자신의 생각을 잘 정리해 말함과 동시에 어떤 문맥으로 해야 하는지를 잘 파악해야 한다는 거에요. 여기에 힘을 싣기 위해서 지혜롭게, 생각을 디자인을 해서 말하는 것이 필요하고요.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소통을 잘하고 싶으면 몇 가지 노력이 필요합니다. 역지사지, 문맥파악, 생각을 정리해서 말하는 습관. 스케치할 때 형태를 잡는 데생이 필요하듯 자기 생각을 데생해야 해요. 연습하고 말을 만들어보는 거죠.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정리해보고, 어떻게 하면 내 말이 설득력이 있을까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합니다.
 
소통은 사회생활은 물론이고 개인생활에서도 매우 큰 차이를 만들어내요. 행복한 가정생활을 하고 싶다면 소통을 잘 하면 돼요. 아무것도 아닌 일로 오해가 생겨서 싸움이 되고 일이 꼬여 걷잡을 수 없게 되면 그냥 포기해버리는 집든을 대부분 소통이 안되는 집이에요.
 
소통을 잘 할 수 있는 방법 : 7 words rule, 내가 말하고 싶은 게 일곱 단어로 정리되지 않는 건 아직 내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생각의 증류, 30분 정도 설명해서 이해시킬 수 있는 이야기를 딱 한마디로 알아들을 수 잇는 지점까지 좁혀나간다. 현상은 복잡하고 본질은 단순한 이 세상에서 단순한 본질을 뽑아내기 위한 증류 과정은 필수적인 일입니다. 이런 생각의 증류 과정을 거쳐 이야기를 해보세요. 소통의 폭이 훨씬 넓어질 겁니다.
 
 
 
 
8) 인생 : 급한 물에 떠내려가다 닿은 곳에 싹 틔우는 땅버들 씨앗처럼
인생은 자존, 본질, 고전, 견, 현재, 권위, 소통이라는 싱싱한 재료를 담아낼 아름다운 그릇이다.
 
모든 인생은 다 다릅니다. 이 모퉁이를 돌면 다음 모퉁이에 무엇이 있을지 아무도 모르죠. 그래서 산다는 건 더 흥미롭고 즐거운 일입니다. 만약 모퉁이 다음에 기다릴 것을 알고 살아간다면 다람쥐 쳇바퀴와 다를 게 없는 삶일 거에요.
그렇다면 전인미답의 길을 즐기기 위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우리들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이고 실수에 휘둘리지 않는 겁니다. 전인미답이잖아요. 실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본 적인 없는 길입니다. 가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완벽하겠습니까? 길을 걸으며 당연히 실수할 겁니다. 그러니 실수를 못 견디고 좌절하지 마세요. 나만 그런 게 아닙니다. 우리는 때로 바깥에 선을 그려놓고 누구 누구의 인생은 이런 실수가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겠지만 전혀 아니에요. 전인미답, 누구의 인생이나 같습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에 너무 안달복달하지 않는 태도가 정말 지혜로운 삶의 태도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패는 나와 먼 이야기고, 불행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내 뜻대로 일이 풀릴 거라는 전제 하에 삶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실패하면 하늘이 무너진 듯 좌절하죠. 아쉽게도 인생은 종종 내 뜻과 무관하게 실패와 마주하게 됩니다. 때문에 실패를 기본 조건으로 놓고 살면 작은 일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몸에 병이 없기를 바라지 마라.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기를 바라지 마라.공부하는 데 마음에 장애가 없기를 바라지 마라.수행하는 데 마가 없기를 바라지 마라.일을 꾀하되 쉽게 되기를 바라지 마라.친구를 사귀되 내가 이롭기를 바라지 마라.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주기를 바라지 마라.공덕을 베풀려면 과보를 바라지 마라.이익을 분에 넘치게 바라지 마라.억울함을 당해서 밝히려고 하지 마라. - 선운사 <보왕삼매론>  
 
인생은 개인의 노력과 재능이라는 씨줄과, 시대의 흐름과 시대정신 그리고 운이라는 날줄이 합쳐서 직조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나의 의지와 노력과 재능이라는 씨줄만 놓고 미래를 기다립니다. 
 
'훌륭한 요리사는 자기 눈앞에 있는 신선한 재료가 무엇인지 먼저 본다' - 고미숙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인생은 똑같이 반복되지 않습니다. 모든 인생은 전인미답이에요. 인생에 공짜는 없어요. 하지만 어떤 인생이든 어떤 형태가 될지 모르지만 반드시 기회가 찾아옵니다. 그러니 이들처럼 내가 가진 것을 들여다보고 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준비해야 하죠. 나만 가질 수 있는 무기 하나쯤 마련해놓는 것, 거기서 인생의 승부가 갈리는 겁니다.
 
집 앞 화단에 대추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대추나무는 꽤 크게 자라기 때문에 평평한 땅에서 커야 좋아요. 그런데 그만 씨앗이 좁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이제 어쩔까요? 좁은 땅에 떨어져버렸다고 대추나무가 자살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최선을 다해 올라옵니다. 삐뚤어지고 꺽이겠지만 거기에서 최선을 다해 살 겁니다. 원하는 방향으로 인생이 흘러가지 않는다고 해서 지레 포기하고 주저앉을 필요 없습니다. 씨줄과 날줄이 함께 직조되는 게 인생이니까요. 꿈과 희망의 여지를 남겨둘 줄 알아야 합니다.
 
최선의 선택을  했다고 해서 그 인생이 성공한 인생이라고 누가 보장할 수 있습니까? 때로는 차선에서 최선을 건져내는 삶이 더 행복할 수도 있습니다.
 
 
인생은 기필코 되는 게 아닙니다. 뭔가를 이루려 하지 말고 흘러가세요.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살고 싶고, 인생 전체는 되는 대로 살고 싶다" - 이동진 <밤은 책이다>
하루하루를 꽉 채워 살다가 돌아보면 펼쳐져 있는 게 인생이지, 단 하나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하루하루를 허술하게 보내는 건 의미가 없습니다.
 
 
인생을 잘 살아갈 수 있는 세가지 팀

  • 인생에 공짜는 없습니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불행은 언젠가 내가 잘못 보낸 시간의 결과다.' - 나폴레옹
    하루하루가 쌓여서 언젠가 내 인생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잘 보낸 시간은 긍정으로 돌아오고, 지금 잘못 보낸 시간은 부정으로 돌아온다는 걸 염두에 두고 하루하루를 살아야 합니다.
  • 인생은 마라톤입니다.
    인생이라는 마라톤을 달릴 때는 일희일비하며 흔들리지 말고 묵묵히 내가 생각하는 본질이 무엇인지, 내 안에는 실력이 잇다는 자존을 가지고 'Be Yourself' 하는 게 제일 잘 사는 방법인 것 같아요.
  • 인생에 정답은 없습니다.
    답을 찾지 마세요. 모든 선택에는 정답과 오답이 공존합닏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선택한 다음에 그걸 정답으로 만들어내는 것이고,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걸 선택하고 후회하면서 오답으로 만들죠. 후회는 또 다른 잘못의 시잘일 뿐이라는 걸 잊고 말입니다.
    인생에 정답은 없습니다. 다만 정답으로 만들어가는 과정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문제에 직면했을 때 우선 판단을 잘해야 합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판단을 신중하게 하고 그 다음에 셔텨를 내리세요. 그 셔터는 열 수 있는 문이 아니고 벽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선택하지 않은 답은 이미 내 답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사는 것이 맞다.

 
최선을 다했다면 후회하지 말아야죠. 최선을 다한 인생이 아름다운 것이지 아름다운 인생이 따로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인생을 살면서 무엇보다 행복을 가장 우선으로 두었으면 좋겠습니다. 두렵기도 하고 흥미진진하기도 한 삶을 살아내면서 먼저 행복을 추구했으면 합니다. 그러기위해서는 자존이 필요하고 보는 힘이 필요하겠죠.
 
행복은 풀과 같습니다. 풀은 사방천지에 다 있어요. 행복도 그렇고요. 풀은 생명력이 무척 강합니다. 행복도 마찬가지죠. 긍정적인 풀의 생명력 덕분에 우리가 살아갈 수 있듯 어떤 조건에서도 행복을 찾아낸다면 살아가는 게 그렇게 힘들지 않을 겁니다. 최근에 읽은 책이라 자꾸 반복하게 되는데 고미숙씨의 책속에서 이런 구절도 발견했습니다.
 
'해방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선 그 자리를 해방의 공간으로 전환시키는 것'
여기에서 '해방'을 '행복'으로 바꿔보세요. 행복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선 이자리를 행복의 공간으로 전환시키는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묵묵히 자기를 존중하면서, 클래식을 궁금해 하면서, 본질을 추구하고 권위에 도전하고, 현재를 가치있게 여기고, 깊이 봐가면서, 지혜롭게 소통하면서 각자의 전인미답의 길을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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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과 직장을 오가며 루틴한 일상을 살며, 문득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거지?' 되뇌며 현실을 벗어나는 것을 꿈꾼다.
미래를 위해 현재의 시간을 소모하며 다른 삶을 상상한다.
 
짧던, 길던 여행을 떠나야 할 때다.
 

[본문발췌]

봇짐을 짊어지고 히말라야를 오르내리는 나귀와 트레킹 중인 사람들과 비슷한 점은 주어진 짐을 짊어지고 삶의 가파른 능선을 끝없이 오르내려야 한다는 것.
 
 
스티븐 킹, <생존자>. 미래를 위해 현재를 소모하는 어리석은 인간의 이야기
 
 
 
이제는 '새장의 문을 열어놓아도 밖으로 날아갈 줄 모르는, 퇴화된 날개근육을 지닌 가여운 늙은 새'다. - 조용호 <떠나니네> 중 '신천옹'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버려야 하는 게 세상의 섭리일까.
1번 나는 둥지를 지키는 대신 자유를 잃니다.
2번 나는 자유를 지켰으나 둥지를 잃는다.
두 사람은 똑같이 자신이 상실한 그것에서 자신의 그림자를 본다.
 
'둥지 위의 새들은 가까이 다가서도 경계심이 없다. 지상의 바람이 아무리 광포해도 녀석들에게 피난처는 따로 없다. 바람을 타고 바람을 희롱하며 바람 속에서 살아갈 뿐이다. 앨버트로스의 다른 이름은 신천옹이요. 나그네새다. 바람이 거세다.'
 
 
 
어떤 이는 여행에서 평화를 얻는다고 했다. 어떤 이는 삶의 행복을 느끼고, 어떤 이는 사랑을 깨닫고, 어떤 이는 자신과 화해하기도 한다. 드물게 피안에 이르는 이도 있다. 나로 말하면 확신 하나를 얻었다. 나를 지치게 한 건 삶이 아니었다. 나는 태생적으로 링을 좋아하는 싸움닭이요, 시끄러운 뻐꾸기였다. 안나푸르나의 대답은 결국 내 본성의 대답이었다. 죽을 때까지, 죽도록 덤벼들겠다는 다짐이었다. 결론적으로 떠나온 나와 돌아갈 나는 다르지 않았다.
 
 
'네팔병'이라는 게 있다고 한다. 한 번 히말라야에 다녀오면 반드시 또 가고야 만다는 불치병이란다. 여정의 험난함과 육체적 고통 속에서 누리는 영혼의 자유로움, 온전히 자기 자신과 만나는 특별한 순간들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린 아이가 삶을 배워가는 존재라면 어른은 죽음을 배워가는 존재다.' - 스티븐 킹의 어느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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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으면 생각이 단순해지며 머리가 비워진다. 단순하고 비워진 머리 속에 번뜩이는 생각들이 다시 채워질 수 있다.

 

[본문발췌]

'무엇을 버릴까'가 아니라 '무엇을 가지고 있을 것인가'로 질문을 바꾸면 갖고 있어야 할 것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에 놀란다.
 
 
사람은 땅에 가까워야 한다. 땅에서 나는 것들을 별다른 손을 거치지 않고 먹는 것만으로도 몸이 바뀌고 몸이 바뀌니 생각도 바뀌고 생각이 바뀌니 삶을 여유롭게 바라보게 된다. 우리 모두에게 행복한 변화다.
 
 
하심(下心) : '마음 내려놓기'
난 걷는 것을 좋아한다. 가끔 내 뜻대로 일이 돌아가지 않을 때, 내 맘 같지 않은 사람들을 만날 때, 몸이 맘처럼 움직여주지 않을 때, 그때는 무작정 걷고 싶어진다. 걸으면서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 위해서일 때가 많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처음엔 생각을 하는 척하나 좀 지나면 아무 생각 없이 그저 타박타박 걷고 있는 나를 볼 뿐이다. 별거 아니구나. 그런 맘이 들 때까지 그저 걷는 일이 내개 주는 것은 단순함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그것을 알아채면서부터는 걸으면서 생각하는 일에 그다지 의미를 두지 않는다. 내 곁을 지나치는 것들을 있는그대로  느끼고자 할 뿐이다. 나뭇잎이 떨어지는구나. 물소리가 꺽이는구나. 새들이 요란스레 떠드는구나. 그렇다. 내게 걷는 일은 그저 나를 느끼고 주위를 느끼는 일이다. 그게 절로 비워지는 일에 가까워지기 위한 나만의 길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걷는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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