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으면 생각이 단순해지며 머리가 비워진다. 단순하고 비워진 머리 속에 번뜩이는 생각들이 다시 채워질 수 있다.
[본문발췌]
'무엇을 버릴까'가 아니라 '무엇을 가지고 있을 것인가'로 질문을 바꾸면 갖고 있어야 할 것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에 놀란다.
사람은 땅에 가까워야 한다. 땅에서 나는 것들을 별다른 손을 거치지 않고 먹는 것만으로도 몸이 바뀌고 몸이 바뀌니 생각도 바뀌고 생각이 바뀌니 삶을 여유롭게 바라보게 된다. 우리 모두에게 행복한 변화다.
하심(下心) : '마음 내려놓기' 난 걷는 것을 좋아한다. 가끔 내 뜻대로 일이 돌아가지 않을 때, 내 맘 같지 않은 사람들을 만날 때, 몸이 맘처럼 움직여주지 않을 때, 그때는 무작정 걷고 싶어진다. 걸으면서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 위해서일 때가 많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처음엔 생각을 하는 척하나 좀 지나면 아무 생각 없이 그저 타박타박 걷고 있는 나를 볼 뿐이다. 별거 아니구나. 그런 맘이 들 때까지 그저 걷는 일이 내개 주는 것은 단순함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그것을 알아채면서부터는 걸으면서 생각하는 일에 그다지 의미를 두지 않는다. 내 곁을 지나치는 것들을 있는그대로 느끼고자 할 뿐이다. 나뭇잎이 떨어지는구나. 물소리가 꺽이는구나. 새들이 요란스레 떠드는구나. 그렇다. 내게 걷는 일은 그저 나를 느끼고 주위를 느끼는 일이다. 그게 절로 비워지는 일에 가까워지기 위한 나만의 길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걷는다. 나는.
국회법 제24조(선서) 의원은 임기 초에 국회에서 다음의 선서를 한다.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하여 노력하며, 국가이익을 우선으로 하여 국회의원의 직무를 양심에 따라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삶속에 균열, 충돌. 한 순간 극단으로 치닫는 상황도 결국 정반합에 따라 평균으로 회귀한다.
[본문발췌]
'무덤과 정상 사이'가 '종이 한 장'의 두께에 지나지 않는다. - 라인홀트 메스너
태어난 것은 죽게 되고 모인 것은 흩어지고 축적한 것은 소모되고 쌓아 올린 것은 무너지고 높이 올라간 것은 아래로 떨어진다.
오늘도 세계 곳곳에서 갈망을 쫓아 보상 없는 길을 떠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었다. 길은 결국 두 갈래라고, 나는 생각했다. 하나의 길은 경쟁에 가위눌리면서 자본주의적 소비문화를 허겁지겁 쫓아가는 길일 것이고, 다른 하나의 길은 안락한 일상을 버릴지라도 불멸에의 영성을 따라 이상을 버리지 않고 나아가는 길일 것이었다. 선택은 각자의 몫이었다.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일상은 삶을 권태롭게 한다. 잠시 멈춰 과거와 현재를 음미해보는 것, 반성하고 의심하고 꿈과 열정을 갖는 것, 일상을 바꿔 새로운 길과 새로운 일들을 시도해 보는 것이 삶의 의미와 풍성함, 행복을 느끼는 방법일 수 있다.
[본문발췌]
연필의 다섯 가지 특징, 그걸 네 것으로 할 수 있다면 조화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게야
네가 장차 커서 큰일을 하게 될 수도 있겠지? 그때 연필을 이끄는 손과 같은 존재가 네게 있음을 알려줄거다. 명심하렴. 우리는 그 존재를 신이라고 부르지. 그분은 언제나 너를 당신 뜻대로 인도하신단다.
가끔은 쓰던 걸 멈추고 연필을 깍아야 할 때도 있다는 사실이야. 당장은 좀 아파도 심을 더 예리하게 쓸 수 있지. 너도 그렇게 고통과 슬픔을 견뎌내는 법을 배워야 해. 그래야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게야.
실수를 지울 수 있도록 지우개가 달려 있다는 점이란다. 잘못된 걸 바로잡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야. 오히려 우리가 옳은 길을 걷도록 이끌어주지.
연필에서 가장 중요한 건 외피를 감싼 나무가 아니라 그 안에 든 심이라는 거야. 그러니 늘 네 마음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렴.
연필이 항상 흔적을 남긴다는 사실이야. 마찬가지로 네가 살면서 행하는 모든 일 역시 흔적을 남긴다는 걸 명심하려. 우리는 스스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늘 의식하면서 살아야 하는 거란다.
먼 훗날 어딘선가 나는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겁니다. 숲속엔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 "로버트 프로스트"
뭔가를 원한다면, 먼저 상대와 눈을 맞추십시오. 세상의 어떤 소통 방식도 눈을 맞추는 것보다 나은 것은 없습니다.
새로운 긴 하루가 시작된다. 신문, TV 뉴스, 정원일, 점심, 짧은 취침.... 원하면 뭐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아무런 의욕이 없음을 돌연 깨닫는다. 마누엘은 자유롭지만 우울증에 걸리기 직전이다. 삶의 의미를 곱씹기에는 늘 너무 바쁜 나날들을 보냈고, 그저 세월이 다리 아래로 흘러가도록 내버려두었다. 한 시인의 말이 떠오른다. "그의 삶은 흘러갔네 / 그는 삶을 살지 않았다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변화를 추구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생각을 딴 데로 돌리는 게 최선이다. 그렇게 힘겹게 얻은 자유 속에서 그는 가면을 쓴 채 떠돈다.
'그는 살아서 죽었다', 말장난이나 모순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나는 일하고 먹고, 열심히 일상을 꾸려나가면서도 살아 있지 못한 사람들을 많이 봐왔어요. 그들은 하루하루 펼쳐지는 삶의 기적에 대해 되새겨보기 위해 잠시 멈추지도 않고, 다가오는 시간이 지상에서의 마지막 순간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이해하지 못한채 기계적으로 살고 있지요.
아무것도 아닌 동시에 가장 중요한 일 : 귀 기울여야 했던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것 일어나지도 않은 일 때문에 미리 걱정하는 친구들, 터무니없어 보이는 일로 인생을 낭비하는 지인들, 의미 없는 대화들, 핵심이 없는 길고 지루한 전화 통화들, 자릿값을 하느라 일거리를 만들어내는 상사들, 하루라도 중요한 업무를 맡지 못하면 책상이 없어질까 초조해하는 직장인들, 저녁에 아이들을 내보내고 전전긍긍하는 어머니들, 공부와 시험에 시달리는 학생들....
성스러운 순간 (기도문) 주여, 우리의 의심을 지켜주소서. 의심 또한 기도하는 한 방법입니다. 의심은 우리를 성장하게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의 문제에 대한 많은 답들과 두려움 없이 마주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주여, 우리의 결정을 지켜주소서. 결정 또한 기도하는 한 방법입니다. 우리의 의심을 이기고, 이 길과 저 길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용기와 능력을 주소서. 우리의 긍정이 늘 긍정이도록, 우리의 부정이 늘 부정이도록 하소서. 한번 결정한 길은 뒤돌아보지 않도록, 후회가 우리의 영혼을 잠식하지 않도록 하소서. 그러기 위하여.... 주여, 우리의 행동을 지켜주소서. 행동 또한 기도하는 한 방법입니다.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 우리가 맺는 가장 좋은 열매가 되게 하소서. 노동과 행동을 통해 우리가 받을 사랑을 나누게 하소서. 그러기 위하여... 주여, 우리의 꿈을 지켜주소서. 꿈 또한 기도하는 한 방법입니다. 나이와 외적 조건에 상관없이 가슴속에 성스러운 희망과 인내의 불씨를 품게 하소서. 그러기 위하여.... 주여, 우리에게 열정을 주소서. 열정 또한 기도하는 한 방법입니다. 우리를 하늘과 땅, 어른이나 어린아이들과 결합케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니. 열정은 우리의 욕구가 중요함을 일깨워주고 최선을 다하도록 북돋워줍니다. 우리가 하는 일과 혼연일체가 되어 있는 한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열정은 재삼 확인해줍니다. 그러기 위하여.... 주여, 우리를 지켜주소서. 생명은 우리가 당신의 기적을 다시 펼쳐 보일 유일한 길입니다. 이제까지 그랬듯 땅이 씨앗을 낟알로 여물게 하시고, 밀알을 빵으로 만들게 하소서. 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 사랑이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그러니, 우리를 외롭게 하지 마소서. 언제나 우리 곁에 머물러 계시며, 의심하고 행동하고 꿈과 열정을 품은 사람들, 매일매일 당신께 영광 돌리는 삶을 이들과 더불어 함께하게 하소서. 아멘
가난한 마음은 행복하다. "받은 게 있으면, 베풀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죠."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사는 동안 쓸데없는 일들을 걱정하고, 일을 미루고, 중요한 순간들을 인식하지 못한 채 스쳐지나간다. 위험을 감수하려 하지 않고, 늘 푸념하면서도 막상 행동하기는 두려워한다. 모든 것이 달라지길 바라면서도 스스로는 변화하려들지 않는다. 죽음에 대해 조금만 더 생각한다면, 오랫동안 미뤄온 전화 통화를 더는 미루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 삶은 지금보다는 좀더 활기를 띠게 될 것이고, 육신의 종말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어차피 일어날 일을 두려워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 인디언들은 이렇게 말한다. '세상을 떠나기에 특별히 좋은 날은 없다.' 한 현자는 이렇게 말했다. '죽음은 언제나 당신 곁에 있다. 그리고 당신이 무언가 중요한 일을 할 때 필요한 힘과 용기를 주는 것은 바로 그 죽음이다.' 나는 그 경지에 이르기를 바란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어리석다. 우리 모두 이르든 늦든 언젠가 죽는다. 그리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자만이 삶 앞에 준비된 자이다.
왜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행동해보려고 하지 않는 걸까?
모든 사람에게는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행복'이란 나 자신이 충만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지, 꼭 타인이 만족을 느끼게 하는 것일 필요는 없다.
현재의 모든 행동과 사건은 '결과'라는 형태로 미래에 영향을 미치며, '반성' 이라는 형태로 과거에 영향을 미친다.
그럼 이렇게 말해주세요. 사막보다 수명이 훨씬 짧은 인간들도 자신이 쓸모없다고 생각하면서 긴 세월을 허비한다고요. 인간은 자신의 진정한 운명을 발견하는 경우가 드물고, 신이 불공평하다고 느낀다고요. 어렵사리 세상에 태어난 이유를 발견한다 해도 어차피 늦었다며 삶을 바꾸지 않는 경우도 흔하다고요. 사람도 사막처럼 괴로워하며 헛되이 보낸 세월을 원망하는 편을 택하곤 하죠.
우리 어른들이 갖고 있는 우주에 대한 이해를 어린이들에게 강요하는 대신, 우리는 우리가 어린 시절에 갖고 있던, 아직 대답을 듣지 못한 질문들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우리는 죽으면 어디로 가나요? 화성인과 외계인은 존재하나요?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도 사고를 당하는 이유는 뭔가요? 신은 어떤 존재인가요? 우리가 결국 죽을 거라면 왜 태어나야 하나요? 하늘의 별은 몇 개나 되나요? 누가 전쟁과 행복을 만들어냈나요? 왜 가난하거나 병든 사람들이 존재하나요? 왜 하느님은 모기나 파리를 만들었나요?.....
누구나 살면서 피해갈 수 없는 비극과 맞닥뜨리는 때가 있다. 살고 있는 도시가 파괴되거나, 아이가 먼저 세상을 떠나거나, 근거 없는 비난을 받으며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갑자기 불치의 병에 걸리기도 한다. 삶은 위기의 연속이며, 이 사실을 망각한 사람은 운명이 준비한 도전에 무방비상태로 맞서게 된다. 고통에 직면할 때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일어난 사건의 의미를 묻고 두려움을 극복하고 다시 일어설 준비를 하는 것뿐이다. 고통과 위기가 닥치면, 우선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 감정을 우리와는 아무 상관 없는 것처럼 대해서도 안되고, 매사 자책하던 것처럼 벌을 받는 거라고 여겨서도 안된다.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심리적인 것이든, 거대한 상실과 마주할 때, 우리는 현자의 가르침을 기억해야 한다. 인내, 그리고 삶의 모든 것은 한시적이라는 깨달음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삶의 가치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면 어떨까? 세상이 다시 안전한 곳이 되지 못한다면, 적어도 수년안에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이 변화를 늘 하고 싶었지만 용기를 내지 못했던 일을 할 기회로 삼지 못할 이유는 또 무엇인가.
인간 존재의 흥미로움 한 남자가 내 친구 제이미 코언에게 물었다; "사람의 가장 우스운 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코언이 대답했다. "모순이죠. 어렸을 땐 어른이 되고 싶어 안달하다가도, 막상 어른이 되어서는 잃어버린 유년을 그리워해요. 돈을 버느라 건강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가도, 훗날 건강을 되찾는 데 전 재산을 투자합니다. 미래에 골몰하느라 현재를 소홀히 하다가, 결국에는 현재도 미래도 놓쳐버리고요. 영원히 죽지 않을 듯 살다가 살아보지도 못한 것처럼 죽어가죠."
실수하라, 즐겁게 "신은 위대한 예술가다. 그는 기린과 코끼리, 개미를 창조했다. 그는 그 어떤 양식도 따르려 한 적이 없다. 그저 그가 느끼는 대로 했을 뿐이다." - 파블로 피카소 누군가에게 해를 입히는 것이 아니라면 매순간 당신의 의견을 바꾸어보라. 부디 자기모순에 빠지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라. 그것은 우리의 권리이다. 다른 이들이 어떻게 여기건 상관하지 마라.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든 간에 그들은 그들 방식으로 생각하게 될 테니까.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려고 마음먹으면 정도를 넘어서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오믈렛을 만들기 위해선 달걀부터 깨뜨려야 한다'는 오래된 속담처럼. 예상치 못한 갈등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런 갈등으로부터 상처가 생기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흉터는 남겠지만 아픔은 지나가게 마련이다. 자신의 실패를 실수로 여기지 않고, 진정한 자아를 만나는 길로 이끄는 발걸음으로 여긴다.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입에서 나오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은 남을 돕는 것.
긴장해야 할 때는, 오직 그것을 필요로 하는 곳에만 초점을 맞춰라. 힘을 아끼고, 활과 더불어 배우라. 과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커다란 동작보다는 목표에 집중하는 것이 더 유용하다는 사실을... 활을 쏘는 순간은 본능적으로 감지된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활과 화살, 과녁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삶의 도전에 응할 때도, 완벽하게 움직이는 데도 직관은 필요하다. 완벽히 습득한 후에야 우리는 테크닉을 완전히 잊을 수 있는 것이다.
참 부끄러운 일이에요. 사람들이 서로를 가르는 차이점만을 본다는 건 말이죠. 좀더 애정을 가지면, 우리가 가진 공통점들이 먼저 보일 겁니다. 그것만으로도 이 세상의 문제가 반은 풀릴 거고요.
'시간은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의지의 힘도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변화를 가능케 하는 것은 오직 사랑이다.' - 헨리 드루먼드
"오늘 길을 가는데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다행히 우산과 외투가 있긴 했지만 문제는 그게 멀찌감치 주차한 차 트렁크 안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차를 향해 달리며 나는 생각했습니다. 지금 신께서 내게 기묘한 메시지를 보내고 계신 건 아닐까? 우리는 인생이라는 여정에서 만나는 폭풍에 대비해 필요한 것을 늘 챙겨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대개 우리 가슴 깊숙이 갇혀 있어 막상 필요할 때 찾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하게 되지요. 그리고 그것을 찾는 건 이미 역경에 패한 뒤입니다." 항상 준비하자.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기회를 놓치거나 싸움에 지게 된다.
폭풍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여느 폭풍처럼, 이것 역시 재해를 몰고 올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폭풍은 들판을 적셔주고 하늘의 지혜를 알려준다. 그리고 여느 폭풍처럼, 그것은 곧 지나갈 것이다. 사나울수록 폭풍은 빨리 지나간다.
마지막 기도문
의미 없는 천 마디의 말보다 마음에 평화를 부르는 한 마디 말이기를, 현란한 천 편의 시보다 영혼의 잠을 깨우는 단 한 줄의 시이기를, 귓가를 스쳐가는 천 곡의 노래보다 심금을 울리는 한 곡의 노래이기를. - (법구경)
저 밖에, 옳고 그름 너머 광대한 들판이 존재하느니. 우리는 거기서 만나리라. - (메블라나 잘랄루딘 루미)
오 알라여, 당신은 모든 것을 아시고 숨겨진 것도 아시나니 제게 가르쳐주소서. 지금 제가 행하는 일이 지금과 미래의 저 자신과 제 믿음과 제 사람에 유용한 것이라면, 이 일을 수월하게 하시고 축복하소서. 지금 제가 행하는 일이 지금고 미래의 저 자신과 제 믿음과 제 사람에 해로운 것이라면, 제게서 이 일을 거두소서. - (선지자 무함마드)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 구하는 이마다 구할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 (나사렛 예수, 마태복음 7장 7~8절)
주의 길을 좇아 우리도 주의 산으로 올라가자. 우리의 칼을 쟁기로 바꾸고, 우리의 창을 낫으로 바꾸자. 민족이 민족에게 칼을 휘두르지 않고, 더는 전쟁에 대해 배우지 않을 것이다.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이것은 주께서 주신 말씀이니. - (평화를 위한 유대인의 기도)
세상에 평화가 오려면 백성이 평화롭게 살아야 한다. 백성들이 평화롭게 살려면 부족들 간에 싸움이 없어야 한다. 부족들 간에 싸움이 그치려면, 이웃 간에 분란이 없어야 한다. 이웃 간에 분란이 없으려면, 가정이 화목해야 한다. 가정이 화목하려면, 각자의 마음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 (노자)
손을 계속 움직여라. 10분이든 한 시간이든 글을 쓰려고 자리에 앉았다면 발 앞에 폭탄이 떨어지더라도 꼼짝해서는 안된다.
억제하지 말라. 말하고 싶은 걸 말하라. 글의 내용이 정확한지 겸손한지 적절한지를 걱정하지 마라. 그냥 뱉어내라.
구체적으로 쓰라. 자동차라고 하지 말고 캐딜락이라고 하라. 과일이 아니라 사과라고 하라. 그냥 새가 아니라 굴뚝새라고 하라.
생각하지 말라. 처음 떠오르는 생각을 그대로 써라. 두 번째 세 번째 생각으로 나아갈 필요는 없다. 첫인상을 무시하지 말라.
마침표와 철자, 문법에 얽매이지 말라. 생각을 옮겨 적는 것이 중요할 뿐, 문법이나 철자는 한참 뒤에 생각해도 늦지 않다.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것들에 대해서도 마음껏 쓰라. 당신 앞에 있는 것 중 가장 쓸모없는 것, 우주에서 가장 하찮은 것에 대해서도 써보라. 쓰고 싶다면 망설이지 말고 당신 마음대로 써라.
급소를 건드려라. 두려운 것이 떠오르면 피하지 말고 맞서라. 그 곳에 에너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으면 계속 두려움의 주변을 멤돌며 시간을 낭비하게 될 것이다.
글쓰기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는 사람일수록 단어의 원래 뜻에 더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그럴 때 좀 더 유연해지는 방법이 있다. 틀을 깨고 밖으로 나와야 한다.
'유일한 시간은 현재뿐이다. 과거와 미래라는 개념은 단지 머릿속의 개념일 뿐이다.' - 조지프 골드스타인 <통찰의 경험>
자본주의의 바탕은 탐욕과 불만이다.
인생은 빈손으로 시작해서 빈손으로 끝나는 것, 이것이 당신이 매번 작가로서 배우게 될 오래된 진리다.
글쓰기는 글쓰기 자체로 그대로 두고 그 순간에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만 얻어야 한다. 지금 이 순간에 몰두하면 과거와 현재, 미래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장작을 패고 있다면 온전히 장작 패는 일에 몰두해야 하고, 양치질을 하고 있다면 양치질에만 몰두해야 한다. 걷고 있다면 걷기에만 몰두해야 한다. 책을 쓸 때면, 언제고 이 작업이 끝나기만을 갈망한다. 하지만 그건 어리석은 일이다. 기다리기에는 너무 긴 시간이다. 책을 다 쓰고 나면 또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또 다른 책을 쓰기밖에 더하겠는가. 그러니 뭔가 기대하는 것을 아예 포기해야 한다. 그냥 쓰는 것, 그것이 바로 글쓰기에서 얻는 미덕이다. 성공은 사람을 어리석게 만든다.
'한 줄의 멋진 시를 쓰라. 그러면 유명해질 것이다. 지루한 시를 길게 쓰라. 그러면 사람들이 잠들 것이다!' - 앨런 긴스버그
나는 앤더슨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글쓰기가 그들의 삶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글쓰기가 나의 삶과 어떤 연관이 있고 그것이 내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도 보여주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문학은 생명을 갖게 된다. 강의실에서 청중들을 지켜보라. 만일 강연 내용이 추상적이고 현실과 괴리되어 있으면, 우리의 생각도 그것을 반영하여 먼 곳을 떠돈다. 반면 강연 내용이 충실하고 강연자 자신의 구체적인 삶과 연관되어 있으면 청중들의 생각도 그곳을 벗어나지 않고 들은 내용을 쉽게 이해한다. 생각에 관한 똑같은 원리가 각 개인에게도 적용된다. 살아 있는 교사는 살아 있는 교실을 만든다. 작가도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현재에 집중하지 않은 채 애매하고 불명확하게 쓰면 독자를 잃고 말 것이다. 사람들은 구체적인 것, 자신과 연관된 것, 사적인 것을 좋아한다.
작가는 눈, 입술, 턱을 세밀하게 묘사할 뿐 아무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대부분의 멋진 글들은 원래의 세부묘사에 충실하다. 연속적인 세부묘사.
작가는 진실을 가로막는 벽과 싸우는 위대한 전사이며, 사회를 위해 사람들의 경험을 해석해주는 대리인이다.
독자가 답을 찾기 위해 책장을 넘기고 싶도록 만드는 질문이 적어도 하나는 있어야 한다. "각 장들은 질문을 계속 뒤로 넘겨야 해요. 만일 한 장이 질문의 경로에서 벗어났다면, 당신도 그 장과 함께 작품에서 벗어난 거예요."
글의 구성은? "E.M. 포스터가 말하길 '왕이 죽고 왕비도 죽었다.' 이건 줄거리고, '왕이 죽고 슬픔에 못이겨 왕비도 죽었다.' 이건 구성이라더군요." 구성은 원인과 결과 그리고 인연에 관한 것이다. 뭔가 일이 일어나면 그에 따른 결과가 있다. 모든 장이 결과를 향해 갈 때 우리가 흡족함을 느끼는 것은 그런 결론이 진실이라는 생각과 공명하기 때문이다. 구성은 원인과 결과, 인연을 통해 구조나 설계가 작품 전체를 장악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시간을 팔아 인생을 산다. 그 시간마저도 한도가 있어 인생에 쉼표, 잠시 멈춤을 두려워한다. 잠시 멈춤, 쉼표가 인생을 즐기는 시간을 늘려 줄 수도 있다.
[본문발췌]
마흔 살, 우선 멈추어라. 사는 게 너무 바쁘면 멈춰 서는 일을 잊기 쉽다.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으면 한숨 돌리는 시간조차 아깝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나이가 마흔쯤 된 사람들 중에는 이런식으로 달려온 이들이 많다. 그런데 지금까지 살아오던 대로 계속 달려도 괜찮을까? 또 앞으로도 이대로 계속 달릴 수 있을까? 마흔이라는 나이는 계속 달려야 하는 시기인 동시에 털썩 주저앉고 싶어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나이가 들면서 30대 때와는 또 다른 육체적인 피곤함을 느끼기도 한다. 정신적으로도 여러가지 고민거리가 생긴다. '지금까지 난 대체 무엇을 하며 산 것일까?', '이제 젊지도 않고 인생이라는 여행도 슬슬 내리막이겠지.' 이런 식으로 고민하다 주저앉기 쉽다. 실제로 그대로 주저앉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그렇지만 주저앉아 있다고 해답이 찾을 수 있을까? 계속 고민만 하고 있는 것 역시 힘들고 괴로운 일이 아닐까? 똑같은 마흔 살이라도 계속 달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주저앉은 사람도 있다. 성공한 사람과 성공하지 못한 사람 또한 마찬가지로 존재한다. 그렇지만 어느 쪽이든 마흔이라는 나이는 누구나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기회이다.
마흔부터 피해야 할 말들
"나는 그런 일은 안 해". 이 말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할지 안 할지를 규정하는 발언이다. 인간관계도 그렇고 업무처리도 그렇고 마흔 살쯤 되면 경험이 쌓이면서 자기만의 방식이 자리를 잡는다. 그렇기에 더더욱 별생각 없이하기 쉬운 말이지만 지금 부터는 잊어버리기 바란다. '지금까지 해 온 방식'을 반복만 하면 새로운 문은 열리지 않는다.
"미안, 나는 모르겠어". 배우는 일을 그만두는 순간 사람은 늙기 시작한다.
"인생이란 게 다 뻔하지. 지금처럼 계속 살면 돼". 자신이 쌓아온 것만 고집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면 스스로를 더욱 발전시킬 수 있다. 그러한 발전은 앞으로 계속 주변 사람을 위해 사용할 수 있다.
나의 연표 만들기 (20~40, 40세 이후)
나는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 (소유물 리스트 만들어보기) 마흔 살까지는 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노력만 해온 사람이 대부분이다. 멈춰 서서 정리하는 여유도 없이 달리기만 해왔기에 모르는 사이에 여러 가지 것들이 늘어나 있는 것도 당연하다. 또 거의 무의식적으로 늘어난 소유물이기 때문에 자신이 얼마나 좋은 것을 가지고 있었는지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키는 변하지 않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릇을 넓히는 일은 가능하다. 까치발은 30대쯤에서 그만두고 70세를 향한 인생 후반기에는 그릇을 넓히는 편이 낫다. 그릇을 넓히는 데는 '보다 나은 것은 무엇인가를 아는 현명함'을 갖추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순수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어떤 일에든 어린아이와 같은 투명한 마음으로 대하면서 감동하고 놀라고 기뻐해야 한다. 그런 마음으로 모든 일을 마주하면 보다 나은 것, 정말로 좋은 것을 찾아내는 힘이 조금씩 몸에 밴다. 어떤 존재든 한두 가지 장점은 반드시 갖고 있는 법이다. 순수한 마음을 가지면 반드시 장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을 계기로 책을 읽거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거나 직접 찾아보거나 하면서 깊이 공부하다 보면 점차 자신의 그릇이 커진다.
마흔부터 '줄 수 있는 인생'이 시작된다.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인생은 긴 것 같지만 짧고, 많은 일이 가능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그렇다고 포기하게 되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아주 적은 수의 일밖에 할 수 없다면 한 가지든 두 가지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 사람들이 원하는 일을 하는데 평생을 바치고 싶다. 내 개인적인 소원을 이루는 일에 인생을 바치면 아무래도 쓸쓸하고 즐겁지 않을 것이다. 반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거나 사회에 공헌하는 일에는 끝이 없다. 절대 완수할 수 없는 일이기에 더욱 보람이 있다. 30대까지는 나 자신을 위해 살아도 상관없겠지만 마흔 살부터는 조금씩 다른 사람을 위한 인생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은 세계적으로 행동은 지역적으로 (Think global, act local) 'Think global'은 자신이 글로벌한 관점에서 어느 정도 능력을 갖추었는지를 알아두는 것도 좋다. 'Act local' 관점에서 지금까지 소홀히 했던 이웃에게 먼저 적극적으로 말을 걸어보자. 밖으로만 향하던 관심을 가까운 커뮤니티로 돌릴 필요가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올바르다고 알려진 방법이야말로 더욱 의심하라.' 쉽게 얻을 수 있는 정보일수록 가치는 떨어진다. (인터넷) 정보를 얻는 세가지. 체험/경험, 다른사람으로부터 직접 듣는 것, 피부로 느끼는 것
"공짜만큼 비싼 것은 없다.", 불경기 속에서 극단적으로 저렴한 물건에는 반드시 저렴한 이유가 있다. 너무 가격이 싼 캐시미어 스웨터는 가혹한 노동환경에서 인내하는 사람들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것일지 모른다. 그런 물건을 사면 내가 그 사람들을 짓밟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마흔 살에 멈춰 서서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들 어떤 모습의 노후를 꿈꾸고 있는가? 20세부터 40세까지 인생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나?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 '필요한 것'과 '필요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이미 이룬 일'과 '이루지 못한 일'은 무엇인가? '고마운 것'과 '미안한 것'은 무엇인가? '자기만의 방식'을 세운다면 어떤 것일까누구를 닮아가고 싶은가? 내가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앞으로 30년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나에게 행복이란 무엇인가? 70세에 내가 거둘 결실은 무엇인가? 어떻게 필요한 사람이 될 것인가?
다시 시작하는 마흔을 위한 조언
기회는 균등하게 주어진다. 그러나 기회란 좋은 일만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사고나 실패는 자기 자신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오늘의 나는 '시작하는 1학년'이라고 생각하자. 익숙한 일이라도 처음 하는 기분으로 임하자. 예전의 싱그럽게 반짝이던 모습을 되찾을 수 있다.
힘들고 어려운 일로부터 도망치면 칠수록 더욱 힘들어진다. 받아들이도록 하자. 그러고 나면 해답이 보인다.
지금 집착하는 일은 없는가? 그 집착을 놓고 자신의 다리로 걸어보라. 당신은 더욱 멀리 갈 수 있을 것이다.
나의 가능성을 내가 결정해서는 안된다. 나이를 먹어도 수많은 가능성이 숨어 있다. 변신하는 일을 두려워 말라.
40대가 된 나 자신에게 "두 번째 생일을 축하해."라고 말해보자.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때라도 종이와 펜을 들고 있으라. 문뜩 떠오르는 것이나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을 꼭 종이에 적어 남겨라. 나중에 반드시 잘했다고 생각할 때가 올 것이다.
마음속에 존재하는 자물쇠가 걸린 서랍을 상상해보라. 거기에 언제, 무엇을 집어넣었을까?
"고맙습니다."라고 10번 소리를 내어 말해보자. 그러면 어떤 일이 떠오르는가? 누구의 얼굴이 떠오르는가?
예전의 좋았던 일이며 과거의 영광 등은 모두 잊고 아무것도 없는 나로 돌아가라.
'필요한 것'과 '필요하지 않은 것', '이미 이룬 일'과 '아직 이루지 못한 일', '고맙습니다' 리스트와 '미안합니다' 리스트 등을 종이에 써보자.
작은 약속일수록 지켜라. 특히 놀기로 한 약속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익이나 손해와 관계가 없는 약속일수록 지켜야 한다.정말로 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기에 항상 생각하고 잊어버리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어떤 때, 어떤 것에, 어떤 식으로 사람들이 행복을 느끼는지 상상해 보자. 직장생활과 일상생활의 힌트는 거기에 있다.
어떤 일이라도 이기고 지는 것에 집착하는 일은 그만두어라. 어차피 다른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다. 그렇게 하면 세계가 훨씬 넓게 보일 것이다.
머리 상태를 신경 쓰는 사람은 몸가짐도 신경을 쓴다. 입는 옷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일상생활도 소중히 한다. 일상생활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일도 소중히 한다.
가장 중요한 일은 건강관리이다. 건강할 수 있도록 매일 스스로 노력하라. 건강은 웃음을 낳는다. 웃는 얼굴로 일을 시작하라.
건강하고 아름다운 치아는 앞으로의 당신에게 보물이 될 것이고 부적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철저히 관리하라.
어떤 사람이라도 결점은 있기 마련이다. 그런 결점을 비난하지 말고 친구처럼 사이좋게 지내라. 결점이 도움을 줄 때도 있다.
부모님을 열심히 관찰하라. 나의 미래에 무엇이 필요한지, 어떻게 하면 좋은지, 배울 것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우리 라코타 족 인디언들에게는 모든 생명체가 인격을 갖추고 있었다. 오직 모습만 우리와 다를 뿐이었다. 모든 존재들 속에 지혜가 전수되어 왔다. 세상은 거대한 도서관이었으며, 그 속의 책들이란 돌과 나뭇잎, 실개천, 새와 짐승 들이었다. 그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대지의 성난 바람과 부드러운 축복을 나눠가졌다. 자연의 학생만이 배울 수 있는 것을 우리는 배웠으며, 그것은 바로 아름다움을 느끼는 일이었다." - 류시화의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중에서, 갓난아기 시절에 라코타 부족에게 키워진 테톤 수우족 출신의 인디언 '서 있는 곰'의 말
'미련한 사람들의 우직함이 세상을 조금씩 바꿔나갑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세상을 일구어나가는 당신을 우리는 뒷골목 선지식이라고 부릅니다.' - 농부네 텃밭 도서관장이 받은 감사패 글 중
법정 스님의 <산에는 꽃이 피네> 중에서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넘치는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내려놓음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비움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용서고, 이해고, 자비이다.' - 법정
예술 작품은 현재까지의 경험, 관찰, 상상력을 고정시켜 미래에 다른 사람이 그것을 보게 되었을 때 다시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것.
[본문발췌]
움베르토 에코
창조적으로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식인이랍니다. 어떤 농부가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새로운 접목 기술로 새로운 종류의 사과를 생산해낸다면 그 순간 지적인 행위를 생산하는 것이지요. 반면에 하이데거에 대한 똑같은 수업만 평생 되풀이하는 사람은 딱히 지식인이라고 하기 어렵지요. 비판적인 창조성 - 우리가 현재 하고 있는 것을 비판하거나 그 일을 할 수 있는 더 나은 방법을 만들어내는 것 - 만이 지식인의 역할의 유일한 징표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 쓴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글쓰기는 사랑의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주기 위해서 글을 쓰는 것이지요. 무엇인가 소통하기 위해서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감정을 나누기 위해서요. 작품이 얼마나 오래 살아남는가의 문제는 소설가나 시인만이 아니라 모든 작가들에게 근본적인 문제랍니다. 진실을 말하자면, 철학자는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론을 납득시키려고 책을 씁니다. 그리고 앞으로 3000년 동안 사람들이 자신의 글을 계속 읽기를 바라지요. 자식들이 당신보다 오래 살아남기를 바라고, 손자가 있다면 손자가 자식보다 오래 살기를 바라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사람들은 지속성의 느낌을 바란답니다.
오르한 파묵
소설가들은 공동체에 속하지 않고 공동체의 기본적인 본능을 공유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직접 체험하고 있는 문화와는 다른 문화를 가지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사람입니다.
우선 전략에서 시작한 뒤, 그것이 갖는 문학적 도덕적 진지함을 믿으면 결국 그것은 진지한 문학적 발명이 됩니다. 일종의 문학적인 언명이 되는 것이지요.
무라카미 하루키
제 일은 사람들과 세계를 관찰하는 것이지 판단 내리는 게 아닙니다. 저는 소위 결론을 내리는 것과는 언제나 거리를 두고 싶어요. 모든 것을 세상의 모든 가능성에 활짝 열어두고 싶거든요.
기억은 인간의 가장 중요한 재산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억은 일종의 연료 역할을 하지요. 타오르면서 인간을 따뜻하게 해주거든요. 제 기억은 일종의 궤짝과 같아요. 그 궤짝에는 수없이 많은 서랍이 달려 있답니다. 어떤 서랍을 열면 고베에서 보낸 소년 시절의 광경이 떠올라요. 공기의 냄새도 맡을 수 있고, 땅도 만질 수 있고, 초록색 나무도 볼 수 있답니다. 그게 제가 책을 쓰고 싶어하는 이유지요.
폴 오스터
글을 쓰는 노력은 똑같습니다. 정확한 문장을 쓰기 위해 들이는 노력도 똑같습니다. 그렇지만 상상력으로 쓰는 작품은 논픽션 작품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자유가 있고 훨씬 더 많이 조작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자유는 종종 상당한 두려움을 주기도 합니다. 다음에 무엇이 나올까? 내가 쓰고 있는 문장이 절벽의 가장자리에서 나를 떨어뜨리지 않을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자서전적인 작품에서는 미리 이야기를 알 수 있어서, 작가의 주요한 의무는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글 쓰는 것이 쉬워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고독의 발명>의 첫 부분에 사용된 제사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저는 헤라클리투스가 쓴 문장 하나를 인용하였습니다. 이것은 가이 데븐포트의 비정통적이지만 상당히 우아한 번역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진리를 찾아 나설 때 예상치 못한 일들에 대비하라, 왜냐하면 진리를 찾는 것은 어려우며, 그것을 찾았을 때 당혹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글쓰기는 글쓰기입니다.
예술 비평가인 로버트 휴즈가 명명한 것처럼 '오락 산업'이란 괴물이지요. 요즘 미디어는 유명인, 뜬소문, 스캔들 외에는 별로 보여주는 게 없잖아요. 또, 우리가 우리 자신을 텔레비전과 영화에서 묘사하는 방식이 너무도 왜곡되거나 변조되어서 실제로 사는 삶은 잊혀버렸어요.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라곤 충격적인 폭력물과 얼간이 같은 도피주의자의 환상물뿐이며, 뒤에 숨어서 이 모든 것을 몰아가는 힘은 바로 돈이지요. 사람들은 얼간이처럼 다루어지고요. 사람들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 필요하지 않은 물건들을 원하도록 조작된 소비자이며 잘 속아 넘어가는 바보에 불과하지요. 이것을 자본주의의 승리라 부를 수도 있겠지요. 또는 자유시장경제라고 부를 수도 있겠고요.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든지 간에, 그 안에는 실제적인 미국인의 삶을 재현할 공간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요.
인생은 너무도 짧고 너무도 연약하고 너무도 알 수 없지요. 결국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정말로 사랑하는 걸까요? 정말로 몇 사람뿐이겠지요. 몇 명 되지 않을 거예요. 이 사람들이 대부분 죽고 나면 당신의 내적 세계의 지도는 변할 겁니다. 제 친구 조지 오펜은 늙는 것에 대해 제게 "어린아이가 늙어간다는 것은 얼마나 기이한 일인가."라고 말한 적이 있지요. 늙음을 설명한 것 중에서 오펜의 설명이 제가 들어보았던 것 중에서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언 매큐언 아마도 우리는 공포심을 상상력이라는 안전한 범위 내에서 끝까지 시험해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일종의 희망을 띤 액막이의 형식으로.
밀란 쿤테라
비본질적인 부분을 완전히 제거하기 (현대사회에서 구조적인 명증성을 잃지 않고도 실존의 복잡함을 잡아내기 위하여)
독특하게 소설적인 에세이(당연한 메시지를 전달한다고 주장하기보다는 가설적이고 장난스럽고 아이러니한 특성을 간직하는)
소설 전체에 일관성을 부여해주는 것은 주제와 변주들의 통일성입니다. 소설은 가상의 등장인물을 통해 본 실존에 대한 성찰입니다. 소설의 형식에는 무제한의 자유가 있지요. 소설이 역사를 볼 때 소설은 자신의 무한한 가능성을 어떻게 활용하면 될지 알지 못했답니다. 자신의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지요.
레이먼드 카버
자기 삶의 이야기를 소설로 바꾸려면 아주 솜씨가 좋아야 해요. 엄청나게 대담해야 하고, 뛰어난 기술과 풍부한 상상력, 그리고 기꺼이 자신에 관해 모든 걸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젊었을 때는 잘 아는 것에 대해서 쓰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듣습니다. 자신의 비밀보다 더 잘 아는 게 뭐가 있겠어요? 하지만 특별한 종류의 작가나 아주 띄어난 재능을 지닌 작가가 아니라면, 계속해서 자기 삶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건 위험합니다. 자신의 소설에 지나치게 자서전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많은 작가들에게 큰 위험, 또는 적어도 큰 유혹이 됩니다. 약간의 자서전적 요소에다 많은 상상력을 가미하는 것이 최선이지요.
어떤 삶에서는 사람들이 성공을 합니다. 그렇게 성공하는 것은 멋지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다른 삶에서는 사람들이 하려고 애쓰는 일, 가장 하고자 원하는 일, 삶을 지탱하는 크고 작은 일에 성공하지 못하지요. 저의 직간접적인 경험은 대부분 후자에 가깝답니다. 제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행동이 뭔가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이기를 바란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 지점에 도달해 있지요. 어떤 일을 열심히 해봐야 의미가 없어요. 한때 중요하다고 생각했거나 그 일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목숨까지 걸 수 있다고 생각한 일들이 한 푼의 가치도 없다는 걸 알게 되지요. 삶 자체에 불편함을 느끼게 되고 삶이 무너져 내리는 걸 보게 됩니다. 그들은 사태를 바로잡고 싶어하지만 그럴 능력이 없어요. 대개는 그들도 그런 상황을 잘 알고 있어서 그냥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뿐이지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저널리즘에서는 기사가 가짜라는 한 가지 사실만이 기사 전체에 편견을 갖게 만듭니다. 대조적으로 소설에서는 이야기가 진짜라는 한 가지 사실이 작품 전체를 정당화해줍니다. 그것이 저널리즘과 소설의 유일한 차이이며, 그것은 작가가 얼마나 몰두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소설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야기가 진짜라고 믿게 만들 수 있는 한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습니다.
영감의 가장 큰 근원은 인생 자체이며 꿈은 인생이란 격류의 아주 작은 부분일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 글에서 진실한 것은 제가 꿈의 여러 가지 개념과 해석에 매우 관심이 많다는 것입니다. 저는 일반적으로 꿈을 삶의 부분으로 보지만, 현실은 훨씬 풍요롭습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창조적인 작가로서 예술의 역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왜 사실 그 자체보다는 사실의 재현을 선택하셨나요? 일어난 일로부터,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그리고 알고 있거나 알 수 없는 모든 것으로부터, 재현이 아니라 창작을 통해 살아 있는 어떤 것보다 더 진실한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지요. 당신은 그것을 살아 있게 할 수있고, 만일 당신이 충분히 잘할 수 있다면 그것에 영원성을 부여할수도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글을 쓰는 이유이고 우리가 아는 한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런 모든 이유가 있다면, 그런 이유는 어떤 것일까요?
윌리엄 포크너
작가의 의무는 최선을 다해 최고의 작품을 쓰는 것입니다.
작가는 경험, 관찰, 상상력이라는 세 가지를 필요로 합니다. 이 중의 두가지, 또는 한가지가 다른 것의 결여를 보충해줄 수 있습니다. 제게 이야기는 대개 한 가지 생각이나 기억이나 정신적인 그림에서 시작합니다.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왜 어떤 일이 일어났으며 다음에 무슨 일이 발생하게 되었는가를 설명하게 되는 지점에 이르기까지 발전시키는 것이지요. 작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감동적인 방식으로, 그럴듯한 감동적인 상황에서 그럴듯한 사람들을 만들려고 노력하지요.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환경을 자신의 수단의 하나로 분명히 사용해야 합니다. 음악은 인간의 경험과 역사에서 가장 먼저 등장했기 때문에 표현하기 가장 쉬운 수단은 음악일 것이라고 말하고 싶네요. 그러나 제가 가진 재능은 말을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순수한 음악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것을 말로 서투르게나마 표현하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즉, 음악이 더 훌륭하고 단순하게 표현할 수 있으나, 제가 듣는 것보다 읽는 것을 선호하는 것처럼 말을 사용하는 것을 선호합니다. 저는 소리보다 정적을 더 좋아하는데, 말로 만들어진 이미지는 정적 가운데서 만들어집니다. 즉, 산문의 천둥과 음악은 정적 가운데서 발생합니다.
사람들은 오직 삶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그들의 시간을 단지 살아 있는 데 써야 합니다. 삶은 움직이며, 움직임은 사람들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인 야망, 권력, 쾌락과 같은 것에 관심을 둡니다. 그는 조만간 선과 악 사이에서 선택을 받도록 강요받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일도 계속 살아가기 위해서 그 자신으로부터 도덕적 양심이 선택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도덕적 양심은 신들로부터 꿈꿀 권리를 얻기 위해서 신들로부터 받아들여야할 저주입니다.
모든 예술가의 목적은 인위적인 방법으로 삶이라는 움직임을 잡아서 다시 고정시켜, 수백 년 후에 이방인이 그것을 보게 되었을 때 그것이 삶이기 때문에 다시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에게 유일하게 가능한 불멸은 언제나 살아 움직여서 불멸인 어떤 것을 뒤에 남겨놓는 것뿐입니다. 그것은 항상 움직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술가들이 언제가는 통과하게 될 최후이자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죽음이라는 망각의 벽에 "킬로이가 여기 왔었다."라고 적어놓는 방식입니다.
E.M.포스터
어떤 책에서도 제가 좋아하는 사람, 제가 생각하는 저란 사람, 저를 짜증나게 하는 사람 그 이상을 모방하진 않습니다. 이렇게 하기 때문에 저 또한 진짜 소설가라고 볼 수 없는 수많은 작가에 속하게 되겠지요. 이런 작가들은 이 세 가지 범주를 갖고서 어떻게든 해보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이런 작가들에겐 다양한 삶을 관찰하고 그것을 냉정하게 묘사할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던 작가는 몇 명 되지 않습니다. 톨스토이가 그중의 하나이지요.
삶은 영원을 기대하지만 찰나의 순간, 시는 응축된 표현 속에 수많은 감정과 진리를 경험하게 한다.
[본문발췌]
시의 힘은 세상과 사물에 대해 눈을 뜨게 한다. 삶의 진정한 의미는 새로운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뜨는 데 있다.
예술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지는 인간 활동이다. 한 사람이 어떤 기호를 통해 자신의 삶에서 느낀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거기에 감염된 사람들은 같은 감정을 체험한다. - 톨스토이
"눈은 생의 아름다움과 삶이 짧다는 느낌을 불러일으켰고, 모든 적의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서로 닮아 있으며, 우주와 시간은 무한하지만 세계는 좁다는 것을 느끼게 했다. 그렇기 때문에 눈이 오면 사람들은 서로를 끌어안는다." - 오르한 파묵 <눈>
시인은 시간의 정원에서 사색하는 철학자이며 시는 '사라지는 것들에 바침'이다. 새로이 소생하는 것들의 경이로움, 계절과 함께 사라지는 것들의 애잔함, 끝없이 순환하는 시간, 단순하지만 미로처럼 보이는 그것들을 시인은 응시한다. 불가사의하게도 어떤 질문은 답을 찾을 수 없다. 인생이 무엇이냐고 누군가 물으면 이슬과 같은 것이라고 답하라고 잇사는 말한다.
"한 줄의 시를 쓰기 위해서는 때가 오기를 기다려야 하고 한평생, 되도록이면 오랫동안 의미와 감미를 모아야 한다. 그러면 마지막에 열 줄의 훌륭한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다. 새들이 어떻게 나는지 느껴야 하며, 작은 꽃들이 아침에 피어날 때 어떤 몸짓을 하는지 알아야 한다. 시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감정이 아니고 경험이기 때문이다. 시는 알지 못하는 곳에 난길, 뜻밖의 만남이다." - 릴케 <말테의 수기>
인간은 '호모비아토르' 라고 하는데 '떠도는 사람'. '길 위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삶의 의미를 찾아 스스로 떠나는 존재를 가리킨다. 호모 비아토르는 길 위에 있을 때 아름답다. 꿈과 열정을 잃고 현실과 타협하며 남들과 똑같이 살아가는 삶은 비루해진다. 집을 떠나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시간을 가진 사람만이 성장해서 돌아온다. 신영복은 '부딪치는 모든 것을 배우고 만나는 모든 것과 소통하며 끝없이 변화하는 것'이 길 가는 사람의 자세라고 했다.
"자연은 결코 서두르는 법이 없다. 짧은 봄날이 마치 무한히 지속되기라도 하듯, 싹은 서두르거나 허둥대는 일없이 천천히 부풀어 오른다. 귀뚜라미의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라. 언제나 변함없는 고르디 고른 곡조의 그 울음소리는 지금의 시간을 영원으로 여기라는 충고이다." - 소로우, 자연은 순환하며 순환의 과정에 이별이란 없다.
인간의 궤적은 안에서 밖으로, 밖에서 안으로를 반복한다. 나무가 자라듯이 밖으로 성장하는 고통이 있고, 나이테처럼 안으로 응축되는 고통이 있다. 한 편이 예술 작품을 탄생시킨다는 것은 그만큼 성장했다는 의미이다. 고통을 수반하지 않는 성장은 없다.
뛰어난 하이쿠는 영원한 것과 순간적인 것을 동시에 표현한다. 어떤 것은 영원처럼 보여 아름답지만 실제로는 순간을 머무는 것이기에 그 아름다움이 절실하다. 설령 영원한 것이라 하지라도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 자신은 찰나를 살 뿐이다.
"시인은 인간의 본성을 깊이 알고, 예민한 감성을 지닌 사람이다. 그에게는 두드러진 특성이 있다. 그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마치 어떤 것을 보듯 마음을 움직인다." - 윌리엄 워즈워스
R. H. 블라이스 "하이쿠는 짧은 시 속에 섬광처럼 지나가는 삶의 진실에 대한 깨달음을 담고 있다." 롤랑 바르트는 <기호의 제국>에서 "글쓰기는 깨달음이다."라고 전제한다. 그러면서 하이쿠를 가리켜 '아무것도 말하려 하지 않는 독특한 성격의 문학'이라고 정의한다.그 뒤에 첨언하면 하이쿠는 '아무것도 말하려 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것을 말하는 문학이다.'
긴 말로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쉽다. 시는 눈에 보이는 것들을 매개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 주려는 노력이다. '시를 읽는다는 것은 그 시를 창조한 시인의 언어와 그 언어에 담긴 의미를 읽는 것만이 아니라, 독자 스스로 그 언어에 자신의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라는 말이 가장 정확하게 해당하는 장르가 하이쿠이다.
칠레 시인 빈센테 우이도브로는 <시학>에서 쓴다. '시가 열쇠가 되기를 / 수많은 문을 열 수 있기를 /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은 무언가가 날아가는 것'
중국의 왕부지는 "작가는 한 가지 생각으로 쓰고, 독자는 각자의 감정에 따라 이해한다."라고 했다. 그리고 사르트르는 말했다. "창조는 독자에게서 완성된다. 예술가는 자신이 시작한 일을 완성하는 배려를 타인에게 맡겨야만 하며, 자기 자신을 작품의 본질적인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떠나는 내게 머무는 그대에게 가을이 두 개 - 시키
이 숯도 한때는 흰 눈이 얹힌 나무가지였겠지 - 다다토모
오두막의 봄 아무것도 없으나 모든 게 있다 - 소도
손바닥 안의 반딧불이 한 마리 그 차가운 빛 - 시키
외로움에 꽃을 피웠나 보다 산벚나무 - 부손
나의 별은 어디서 노숙하는가 은하수 - 잇사
날이 밝으면 반딧불이도 한낱 벌레일 뿐 - 아온
손바닥에서 슬프게도 불 꺼진 반딧불이여 - 교라
문을 나서면 나도 길 떠나는 사람 가을 저물녘 국화 키우는 그대는 국화의 노예여라 가엾은 민들레 꽃대가 부러져서 젖이 흐르네 재 속의 숯불 숨어 있는 내 집도 눈에 파묻혀 쇠못 같은 앙상한 팔다리에 가을 찬 바람 - 잇사
저녁 제비여 나에게는 내일도 갈 곳 없어라 새끼 참새야 저리 비켜 저리 비켜 말님 지나가신다 나무 아래 나비와 머무는 것도 전생의 인연 고향에는 부처 얼굴을 한 달팽이들 달팽이가 머리를 쳐드니 나를 닮았네 - 시키
나팔꽃 덩쿨에 두레박줄 빼앗겨 얻어 마신물 손으로 꺾는 이에게 향기를 주는 매화꽃 저 나비 무슨 꿈을 꾸길래 날개를 파닥이나 줍는 것마다 모두 다 움직인다 물 빠진 갯벌 잠자리 잡으러 오늘은 어디에서 헤매고 있니 굴러떨어지면 그저 그런 물일 뿐 잇꽃의 이슬 강물에서만 어둠이 흘러가는 반딧불이여 가을 밝은 달 아무리 가도 가도 딴 곳의 하늘 모자 멀어져 나비가 될 때까지 그리워하네 동틀 녘이면 어제의 반딧불이 둔 곳을 잊어 썰물에 발끝으로 서 있는 나비여라 백 개의 열매 덩굴 한 줄기의 마음으로부터 보름달 뜬 밤 돌 위에 나가 우는 귀뚜라미 붉은색 바른 입술도 잊어버린 샘물이어라 어찌 되었든 바람에 맡겨 두라 마른 억새꽃 물 시원하고 반딧불이 사라져 아무도 없네 나무 뒤에 숨어 찻잎 따는 이도 듣는가 두견새 울음 - 바쇼
조만간 죽을 기색 보이지 않는 매미 소리 이 가을에는 어찌 이리 늙는가 구름 속의 새 흰 이슬의 외로운 맛을 잊지 말라 한겨울 칩거 다시 기대려 하네 이 기둥 가는 봄이여 머뭇거리며 피는 철 늦은 벚꽃 - 부손
이 세상은 지옥 위에서 하는 꽃구경이어라 첫 반딧불이 왜 되돌아가니 나야 나 가지 마 가지 마 모두 거짓 초대야 첫 반딧불이 가을 바람 속 꺽고 싶어 하던 붉은 꽃 이슬의 세상은 이슬의 세상이지만 그렇지만 손을 마구 휘둘러도 나비는 닿을 듯 닿지 않네 - 세이손
감정에 충실해야 현재에서 충만한 삶을 누릴 수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나 주변의 평가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만의 기준을 따라 자유롭고 당당해져야만 한다.
[본문발췌]
"우리들은 정신이 큰 변화를 받아서 때로는 한층 큰 완전성으로, 때로는 한층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이 정념(passiones)은 우리에게 기쁨(laetitia)과 슬픔(tristitia)의 감정을 설명해 준다." - 스피노자, <에티카>
비루함(ABJECTIO) :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 극복해야 할 노예의식, <무무> 이반 투르게네프, "비루함이란 슬픔 때문에 자기에 대해 정당한 것 이하로 느끼는 것이다"
자긍심(ACQUIESCENTIA IN SE IPSO) : 사랑이 만드는 아름다운 기적, <정체성> 밀란 쿤테라, "자긍심이란 인간이 자기 자신과 자기의 활동 능력을 고찰하는 데서 생기는 기쁨이다"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는 단순한 사실 하나만으로 우리는 금방 자긍심을 회복할 수 있다. 내 자신이 충분히 소중하고 매력적인 존재가 아니고서는, 어떻게 타인이 나를 사랑하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겠는가.
사랑(AMOR) : 자신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변화시킬 수 있는 힘, <동풍서풍> 펄 벅, "사랑이란 외부의 원인에 대한 생각을 수반하는 기쁨이다." 사랑이란 무엇보다도 먼저 기쁨의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스피노자는 기쁨의 감정은 "인간이 더욱 작은 완전성에서 더욱 큰 완전성으로 이행할 때" 발생하는 감정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결여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더욱 충만해진다는 감정이 바로 기쁨이다. 기쁨이라는 감정과 사랑이라는 감정을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척도는, 사랑에는 외부 원인이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대담함(AUDACIA) : 나약한 사람을 용사로 만드는 비밀, <1984> 조지 오웰, "대담함이란 동료가 맞서기 두려워하는 위험을 무릎쓰고 어떤 일을 하도록 자극되는 욕망이다." 대담함을 욕망이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스피노자의 비범함을 발견하게 된다. 욕망이란 기본적으로 기쁨의 증진을 도모하는 작용이기 때문이다. 사랑만큼 살아갈 힘과 기쁨을 증폭시키는 경험이 또 있을까? 조지 오웰이 <1984>에서 모색했던 것도 바로 사랑의 파괴력, 그러니까 압도적인 힘 앞에서 주눅 들지 않는 대담함이라는 감정이었다. 오직 위기를 감내하려고 할 때에만 용기와 대담함은 빛을 발한다.
탐욕(AVARITIA) : 사랑마저 집어삼키는 괴물, <위대한 개츠비> F. 스콧 피츠제럴드, "탐욕이란 부에 대한 무절제한 욕망이자 사랑이다." 돈에 대한 갈망은 집요한 것이다. 더군다나 자본주의 사회는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회체제 아닌가. 이제 돈은 원하는 것을 구하기 위한 단순한 결제 수단이 아니라 절대적인 수단이 된 것이다. 절대적인 수단은 동시에 절대적인 목적이기도 하다. 돈에 대한 갈망에서 빠져나올 방법은 있을까? 그것은 나름대로 최적생계비를 생각하며 돈을 버는 것이다. 돈을 목적의 자리가 아니라 원래 자리, 그러니까 수단의자리로 만들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 돈은 여행을 가려고, 맛난 음식을 먹으려고, 혹은 멋진 옷을 사기 위한 수단이다. 그리고 돈은 또한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부드럽게 해주는 윤활유다. 바로 이것이다. 돈에 대한 갈망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있다. 최적생계비를 계산하고, 그것을 삶에 관철하는 것이다. "됐어. 이 정도면 됐어. 이제 삶과 사랑을 향유해야지." 갈망에서 자유로워지는 첫걸음은 이렇게 내딛는 것이다.
박애(BENEVOLENTIA) : 공동체 의식을 가능하게 만드는 원동력, <레 미제라블> 빅토르 위고, "박애란 우리가 불쌍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친절하려고 하는 욕망이다." 사랑의 원리는 무소유의 원리를 토대로 한다. 겨울 찬바람에 사랑하는 사람이 떨고 있다면 기꺼이 추위를 무릅쓰고 자신의 옷을 벗어 줄 것이다. 이럴 때 두 사람은 최소한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게 된다. 이렇게 공동체의 범위는 자신이 가진 것을 어디까지 나누어주느냐에 의해 측정될 수 있다. '자발적인 가난', 이것이 바로 박애가 드러나는 행동 양식이다.
연민(COMMISERATIO) : 타인에게 사랑이라는 착각을 만들 수도 있는 치명적인 함정, <초조한 마음> 슈테판 츠바이크, "연민이란 자신과 비슷하다고 우리가 상상하는 타인에게 일어난 해악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다.", 타인의 불행에서 생기는 슬픔.
물은 꿈처럼 헛된, 사라지게 될 운명만을 암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끊임없이 존재의 실체를 변화시키는, 근원적인 운명의 전형이다. - 가스통 바슐라르, <물과 꿈> 에서
욕망(CUPIDITAS) : 모든 감정에 숨겨져 있는 동반자, <프랑스 중위의 여자> 존 파울즈, "욕망이란 인간의 본질이 주어진 감정(affectione)에 따라 어떤 것을 행할 수 있도록 결정되는 한에서 인간의 본질(essentia) 자체이다. 욕망은 자신의 의식(conscientia)을 동반하는 추동(appetitus)이고, 충동은 인간의 본질이 자신의 유지에 이익이 되는 것을 행할 수 있도록 결정되는 한에서 인간의 본질 자체이다."
동경(DESIDERIUM) : 한때의 기쁨을 영속시키려는 서글픈 시도, <아우라> 카를로스 푸엔테스, "동경이란 어떤 사물을 소유하려는 욕망 또는 충동이다. 우리가 자신을 어떤 종류의 기쁨으로 자극하는 사물을 회상할 때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같은 기쁨을 가지고 그것이 지금 눈앞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도록 노력한다. 그러나 이 노력은 그 사물이 있다는 것을 배제하는 사물의 이미지에 의하여 곧 방해받는다."
절망(DESPERATIO) : 죽음으로 이끌 수도 있는 치명적인 장벽, <책 읽어주는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절망이란 의심의 원인이 제거된 미래 또는 과거 사물의 관념에서 생기는 슬픔이다. 공포에서 절망이 생긴다." 희미하게 흔들리던 촛불처럼 존재하던 희망이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 절망이 찾아온다. 미래에 대한 어설픈 기대, 혹은 불안한 희망이 없었다면, 우리는 그렇게 절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절망은 냉철한 이성을 가진 사람보다는 우유부단한 성격의 소유자에게 더 자주 찾아오는 감정이다.
호의(FAVOR) : 결코 사랑일 수 없는 사랑, <노르웨이의 숲> 무라카미 하루키, "호의란 타인에게 친절을 베푼 어떤 사람에 대한 사랑이다."
영광(GLORIA) : 모든 이의 선망으로 타오르는 위엄, <노인과 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영광은 우리가 타인이 칭찬할 거라고 상상하는 우리 자신의 어떤 행동의 관념을 동반하는 기쁨이다." 그렇지만 영광을 추구하는 이면에는 다른 사람에게 당할 멸시나 경멸에 대한 원초적인 두려움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권력이나 자본이 항상 상벌의 논리로 우리를 유혹할 수 있는 것도 우리에게 영광을 추구하고 치욕을 멀리하려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진정 커다란 고독이 닥쳐오고 완벽한 정적에 휩싸이면, 몽상가의 마음에도 불꽃의 핵심에도 같은 평화가 존재한다. 그때 불꽃은 자신의 형태를 지키며 확고한 사상처럼 수직성의 운명을 향해 똑바로 내닫는다. - 가스통 바슐라르 <촛불의 미학>에서
감사(GRATIA) :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품고 친절을 베풀 수밖에 없는 서러움, <거미여인의 키스> 마누엘 푸익, "감사 또는 사은(gratitudo)은 사랑의 감정을 가지고 우리에게 친절을 베푼 사람에게 친절하고자 하는 욕망 또는 사랑의 노력이다."
겸손(HUMILITAS) : 진정한 사랑을 위한 자기희생,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 에밀 졸라, "겸손이란 인간이 자기의 무능과 약함을 고찰하는 데서 생기는 슬픔이다."
분노(INDIGNATIO) : 수치심이 잔인한 행동일 될 때까지, <죄와 벌> 도스토예프스키, "분노는 타인에게 해악을 끼친 어떤 사람에 대한 미움이다."
질투(INVIDIA) : 사랑이 드리우는 짙은 그림자, <질투> 알랭 로브그리예, "질투란 타인의 행복을 슬퍼하고 반대로 타인의 불행을 기뻐하도록 인간을 자극하는 한에서의 미움이다."
두려움(METUS) : 과거가 불행한 자의 숙명, <유령> 헨리크 입센, "두려움이란 우리가 그 결과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의심하는 미래 또는 과거 사물의 관념에서 생기는 비연속적인 슬픔이다." 불행한 과거는 과거지사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현재와 미래의 삶에도 질식할 것 같은 무게를 가하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은 과거를 통해 미래를 꿈꾸는 동물이다. 그러니 과거가 행복한 사람은 미래를 장밋빛으로, 과거가 불행한 사람은 미래를 잿빛으로 꿈꾸게 된다. 과거의 아픈 기억과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염려! 두려움을 극복하고 현재의 삶을 향유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벼움을 확보하는 것이다. 지금 가진 것에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동정(MISERICORDIA) : 비참함이 비참함에 바치는 애잔한 헌사, <티파니에서 아침을> 트루먼 커포티, "동정이란 타인의 행복을 기뻐하고 또 반대로 타인의 불행을 슬퍼하도록 인간을 자극하는 한에서의 사랑이다." 삶이 너무나 궁핍하고 남루하면 우리는 그 현실을 도피하기 우해 근사한 꿈을 꾼다. 니체의 말대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우리의 자화상이다. 누군가가 꾸고 있는 현실 도피의 꿈을 응시해 보면, 역설적으로 그가 도피하려고 하는 현실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지 직감할 수 있다.
공손(AVERSIO) : 무서운 타자에게 보내는 친절, <인간 실격> 다자이 오사무, "공손함(humanitas)이나 온건함(modestia)은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일은 하고 그렇지 않은 일은 하지 않으려는 욕망이다." 온건한 사람은 표면적으로는 타인을 배려하는 공동체 의식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타인에 대한 공포가 드리우고 있는 짙은 그늘이 있다. 말 잘 듣는 아이는 그 공포감으로 인해 자신의 욕망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는 세 종류의 인간이 있다. 첫째 부류는 모든 사람에게서 온화하다고 칭찬이 자자한 사람이다. 두 번째 부류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악당이라고 지탄받는 사람이다. 세 번째 부류는 칭찬도 받고 욕도 먹는 사람이다. 모든 사람에게 욕을 먹는 두 번째 부류의 인간은 그냥 쓰레기니까 조심하면 된다. 반면 진짜로 위험한 것은 첫 번째 부류의 인간들이다. 억압된 욕망을 자신보다 약한 존재에게 폭발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공손하고 온화한 사람을 조심하라!
미움(ODIUM) : 내가 파괴되거나 네가 파괴도거나, <피아노 치는 여자> 엘프리데 옐리네크, "미움이란 외적 원인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다."
역동적 상상력 속에서는 모든 것이 활기를 띠고 그 무엇도 멈추지 않는다. 운동이 존재를 창조하며 소용돌이치는 대기는 별들을 창조하고, 외침은 이미지를 낳고, 외침은 말을, 생각을 준다. - 가스통 바슐라르, <공기와 꿈> 에서
후회(POENITENTIA) : 모든 불운을 자기 탓으로 돌리는 나약함, <캐스터브리지의 읍장> 토머스 하디, "후회란 우리가 정신의 자유로운 결단으로 했다고 믿는 어떤 행위에 대한 관념을 수반하는 슬픔이다."
겁(PUSILLANIMITAS) : 실패를 예감하는 위축된 자의식, <여명>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 "겁남은 동료가 감히 맞서는 위험을 두려워하여 자기의 욕망을 방해당하는 그런 사람에 대해 언급된다." 미래에 벌어질 수 있는 가장 불행한 일에 대한 공포, 이것이 바로 겁이라는 감정의 정체다. 그러니까 겁이 많은 사람은 미래의 불행에 미리 젖어 현재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돌보지 않게 된다. 한마디로 겁이 많은 사람은 실패를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결국 겁이라는 감정에서 빠져나오는 유일한 방법은 현재 자신의 욕망에 몰입하고 그것을 관철시키려는 자세 이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희망(SPES) : 불확실해서 더 절절한 기다림, <위대한 유산> 찰스 디킨스, "희망은 우리들이 그 결과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의심하는 미래나 과거의 사물의 관념에서 생기는 불확실한 기쁨(inconstans laetitia)이다." 인간의 희망은 여전히 사람 그 자체를 향해야만 한다. 속물은 속물을 만나고, 진지한 사람은 진지한 사람을 만나는 법이다. 이것은 불확실성을 내포하는 단순한 희망이 아니라, 경험이 쌓이면 누구나 확실히 알게 되는 삶의 진리가 아닌지.
오만(SUPERBIA) : 사랑을 좀먹는 파괴적인 암세포, <위험한 관계> 피에르 쇼데를로 드 라클로, "오만이란 자신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신을 정당한 것 이상으로 느끼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말의 동의어는 '알려고 한다'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제 모든 것을 알았다는 오만에 빠지는 순간, 그래서 더 이상 알 것이 없다는 오만이 생기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소심함(TIMOR) : 작은 불행을 선택하는 비극,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프랑수아 사강, "소심함은 우리들이 두려워하는 큰 악을 더 작은 악으로 피하려는 욕망이다."
쾌감(TITILLATIO) : 포기할 수 없는 허무한 찬란함, <도나 플로르와 그녀의 두 남편> 조르지 아마두, "정신과 신체에 동시에 관계되는 기쁨의 정서를 쾌감이나 유쾌함(hilaritas)이라고 한다." 인간에게는 두 가지 시간이 존재한다. 하나는 지속이란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순간이란 시간이다. 지속은 우리에게 예측 가능한 시간을 주면서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안겨 준다. 반면 순간은 첫 만남처럼 과거 자신의 안정적인 모습을 파국으로 몰고 가는 위험한 시간이다. 예를 들어 어떤 남자를 보자마자 인생이 앞으로 완전히 달라질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그래서 결코 과거로는 되돌아갈 수 없다고 느낄 때, 바로 그때가 '순간'인 셈이다. 완전한 기쁨은, 몸이나 마음 중 어느 하나를 희생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몸과 마음이 모두 기쁨으로 충만할 때, 다시 말해 우리의 삶이 쾌감으로 전율할 때, 바로 그 시간이 우리가 꽃으로 피어나는 순간이다.
슬픔(TRISTITIA) : 비극을 예감하는 둔탁한 무거움, <미국의 비극> 시어도어 드라이저, "슬픔은 인간이 더 큰 완전성에서 더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부와 사랑, 둘 중에 어느 것이 기쁨을 주고 어느 것이 슬픔을 주는지가 문제의 핵심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두가지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하는 자본주의 자체가 바로 슬픔의 기원이라는 통찰일 테니까 말이다. 타자와의 마주침이 없다면 감정도 존재할 수 없다. 타자를 만나서 삶이 충만해진다고 느낄 때의 감정이 기쁨이라면, 슬픔은 그와 반대로 타자를 만나서 삶의 충만함이 훼손된다고 느낄 때의 감정이다.
수치심(VERECUNDIA) : 마비된 삶을 깨우는 마지막 보루, <더블린 사람들> 제임스 조이스, "치욕(pudor)이란 우리가 부끄러워하는 행위에 수반되는 슬픔이다. 반면 수치심이란 치욕에 대한 공포나 소심함이고 추한 행위를 범하지 않도록 인간을 억제하는 것이다." 수치심은 앞으로 치욕을 당하면 어쩌나 하는 공포감이나 소심함으로 드러난다. 따라서 수치심을 느낄 때에 비로소 우린느 타인의 시선을 의식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신의 언행을 반성하게 된다. 그러니 마비된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에게서는 수치심을 찾아보기 힘들다.
<에필로그> '선과 악(Good and Evil)'을 넘어. 이것은 적어도 '좋음과 나쁨(good and bad)'을 넘어선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 프리드리히 니체
사랑의 감정은 바로 우리를 현재에 살도록 하고, 안전한 삶에 대한 생각은 우리를 미래에 살도록 만든다. 안전한 삶을 위해 현재의 열정적인 감정을 교살하는 삶,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삶이 과연 행복할까? 절대 그럴 수 없다. 왜냐고? 지금은 미래로 보이는 때도 언젠가 우리에게 현재로 다가올 테니까. 그렇게 우리는 이미 현재가 된 미래에서도 또 다른 미래를 위해 '지금 이 순간'을 포기하게 될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미래에 더 큰 가치를 두느라 현재를 부정하는 삶이 이르게 되는 종착역은 바로 죽음이다. 이것은 유한한 삶의 진실이다. 그러니 현재 누려야 할 행복과 기쁨을 미래로 미루지 말라!
감정은 우리 삶의 속도만큼 충분히 지속적이다. 그러니 감정의 색채를 믿고 따르라! 자신의 심장 소리와 함께 지속되는 그 감정의 목소리르 존중하라! 그것만이 당신이 현재에서 충만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물론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은 주변의 평가에서 자유롭고 당당해져야만 한다.
감정을 순간적으로 저주하면서 현재를 부정하는 사람들, 그래서 현재에 살지만 과거나 미래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행동 준칙은 '선(Good)과 악(Evil)'이다. 반면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의 목소리에 충실한 사람들이 따르는 행동 준칙은 '좋은(good)과 나쁨(bad)'이다. 돌이켜 보면 경제적인 이유로 사랑하는 남자를 포기한 여성은 '좋음과 나쁨'의 기준이 아니라 '선과 악'의 기준을 따른 것이다. 여러 가지로 무능력해 보이는 남자와 결혼하는 것, 그것은 자본주의 공동체의 가치를 수용하고 있는 부모나 친구들에게는 악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들은 지금 그 여자의 감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간단히 말해 '선과 악'이 대다수 공동체 성원들이 내리는 평가 기준을 의미한다면, '좋음과 나쁨'은 다른 누구의 판단이나 평가가 아니라 스스로 내리는 평가 기준을 의미한다. 니체가 선과 악에 'Good'과 'Evil'이란 대문자를 사용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선과 악은 사회의 안전이나 통념을 위해 어떤 개인이라도 반드시 따라야만 하는 절대적이고 유일한 규범을 상징하니까. 반면 니체는 좋음과 나쁨에 'good'과 'bad'라는 소문자를 붙인다. 사람마다 좋음과 나쁨의 기준이 다르고 동시에 좋음과 나쁨의 내용도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감정을 지키려는 사람들은 우선 선과 악이라는 규범을 버리고 좋음과 나쁨이라는 자기만의 기준에 따라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다. 단지 지금 내가 마주하고 있는 대상이 삶을 향한 의지를 강화시켜 준다면, 다시 말해 내 삶에 경쾌함을 준다면, 그것은 '좋은' 것이다. 반대로 삶을 향한 의지를 약화시켜 내 삶을 우울하고 무겁게 만든다면, 그것은 '나쁜'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의 감정을 따르지 않는다면 자기 삶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없다는 진실을. 비극이 발생하는 두 번째 이유는 우리가 자신의 마음을 뒤흔드는 다양한 감정들에 너무나 서툴렀다는 데 있다. 두 번째 이유로 발생하는 비극을 막기 위해서, 지금 자신을 휘감고 있는 감정이 슬픈 것인지 아니면 기쁜 것인지 정확히 식별할 수 있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