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여년 전 우리 선조들의 해외 여행은 어떤 모습일까? 상상만으로 그려지지 않는 이 질문에 생생한 여행길의 풍경, 여행지에서의 낯선 만남과 우정, 느낌을 엿볼 수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허생전, 호질 이야기가 열하일기 속 액자구조(소설)로 포함되어 있다는 걸 알랑가 모르겠내?\
중국말도 잘 못하면서 어떻게 그렇게 많은 이방인들과 '찐한' 우정을 나눌 수 있느냐고, 그러면 연암은 그렇게 답할 것이다. 우정을 나누는 데 필요한 건 외국어 실력이 아니라 마음을 열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것이라고, 또 그러기 위해선 언제, 어디서건 웃음을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한다고. --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 머리말 중에서
"자네, 길道을 아는가" 수역 홍명복에게 물었다. "네? 무슨 말씀이시온지?" "길이란 알기 어려운 게 아니야. 바로 저편 언덕에 있거든" "'먼저 저 언덕에 오른다'는 말씀을 이르시는 겁니까?" "그런 말이 아니야. 이 강은 바로 저들과 우리 사이에 경계를 만든느 곳일세. 언덕이 아니면 물이란 말이지. 사람의 윤리와 만물의 법칙 또한 저 물가 언덕과 같다네. 길이란 다른 데서 찾을 게 아니라 바로 이 사이에 있는 것이지." "무슨 뜻인지요?"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은미한 법이지. 서양 사람들은 기하학이 한 획을 변증하면서 선 하나를 가지고 가르쳤다네. 그런데도 그 미세한 부분을 다 변증하지 못해 '빛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경계'라고 말했어. 이건 바로, 부처가 말한 '닿지도 떨어져 있지도 않는다'는 그 경지일세. 그러므로 이것과 저것, 그 '사이'에서 존재하는 것은 오직 길을 아는 이라야만 볼 수 있는 법, 옛날 정자산 같은 사람이라야 될걸." - <도강록> 신미일 6월24일
'사이'란 무엇인가? 흔히 생각하듯, 두 견해 사이의 중간이나 평균을 뜻하는 건 결코 아니다. 양변의 절충이나 타협으론 결코 새로운 길이 열리지 않기 때문이다. 굳이 말하자면, 이것과 저것, 그 양변을 떠난 제3의 경로라고 할 수 있다. 거기에는 어떤 방향도, 목적도 없다! 따라서 그것은 삶의 구체적 장면 속에서 매순간 새롭게 구성되어야 한다. - 머리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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