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수 없는 부나 영원한 시간을 목표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그것이 충족되었을 때 행복할까? 삶은 부족하거나 결핍 가운데 충만함을 느끼기도 하고, 여러 제약과 제한 속에서 열정과 의미, 가치를 느끼기도 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각자에게 있으며, 가장 큰 원칙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스스로 설계한 삶을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본문발췌]
나는 열정이 있는 삶을 원한다. 마음이 설레는 일을 하고 싶다. 자유롭게, 그리고 떳떳하게 살고 싶다. 인생이라는 짧은 여행의 마지막 여정까지, 그렇게 철이 덜 난 그대로 걸어가고 싶다. 내 삶에 단단한 자부심을 느끼고 싶다. 그렇게 사는 게 나다운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런 내가 좋다. 자유로움과 열정, 설렘과 기쁨이 없다면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결정권'을 행사하는 일이다. '자기 결정권'이란 스스로 설계한 삶을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아가려는 의지이며 권리이다.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의 표현을 가져다 쓰자.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삶을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방식이 최선이어서가 아니라, 자기 방식대로 사는 길이기 때문에 바람직한 것이다." 사람마다 인생을 다르게 산다. 평생 공부하는 사람, 노래하고 춤추는 사람, 돈을 버는 데 골몰하는 사람, 일만하는 사람, 권력을 쫓는 사람, 신을 섬기는 사람 등 백 사람이 있으면 백 가지 삶이 있다. 어느 것이 더 훌륭한지 가늠하는 객관적 기준은 없다. 스스로 설계하고 선택한 것이라면 어떤 삶이든 훌륭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화려해 보여도 자유의지로 만들어낸 삶이 아니면 훌륭할 수 없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고 상상해보았다. 과연 행복할까? 그런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영생은 축복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의미를 말살한다. 영원히 산다면 오늘 만난 사람들, 그들과 나눈 대화와 교감, 함께한 일들이 의미가 없어질 것만 같다. 그 모든 것이 다 굳이 오늘 하지 않았어도 좋았을 일이 된다. 어디에도 굳이 열정을 쏟아야 할 필요가 없다. 오늘 다하지 못하는 일은 내일 하면 그만이다. 오늘 무엇인가 잘못해도 상관없다. 다음에 다르게 하면 된다. 영생은 삶을 시간의 제약에서 해방시킨다. 그런데 시간이 희소성을 잃으면 삶도 의미를 상실한다. 유한성의 속박에서 풀려나는 순간, 가슴을 설레게 하는 모든 것들이 무한 반복의 쳇바퀴를 도는 지루한 일상으로 변해버리는 것이다. ... 죽을 수 없다면 삶은 형벌이 될 것이다. 너무나 간절하게 영생을 원한 나머지 그것을 구하는 일에 몰두하느라 유한한 인생에서 맛볼 수 있는 모든 환희와 행복을 포기하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나는 영생을 원하지 않는다. 단 한 번만, 즐겁고 행복하게 의미 있게 살고 싶을 뿐이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삶을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방식이 최선이어서가 아니라, 자기 방식대로 사는 길이기 때문에 바람직한 것이다." 앞에서 인용한 바 있는 철학자 밀의 주장이다. 그냥 이 구절을 읽으면 그저 옳은 말로 보인다. 하지만 인생은 너무 짧은 여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읽으면 그 느낌이 사뭇 달라진다. 그렇다. 내 방식대로 살아야 한다. 누가 시키는 대로 또는 무엇인가에 얽매어 살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 그런 생각이 든다. 삶의 모든 순간은 죽음이라는 운명과 대비할 때 제대로 의미를 드러낸다.
'죽음 다음에 무엇이 있을까? 만약 내일 죽는다면 오늘 무엇을 할까? 잘 죽으려면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 것일까?' 혼자 이런저런 대답을 생각해본다. 답을 꼭 찾아야 할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남은 삶이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죽음은 단순히 삶의 끝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죽음은 삶의 완성이다. 소설도, 영화도, 연극도 모두 마지막이 있다. 마지막 장면을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따라 스토리가 크게 달라진다. 어떤 죽음을 준비하느냐에 따라 삶의 내용과 의미, 품격이 다라진다. 남아 있는 삶의 시간이 길수록 죽음에 대한 생각은 더 큰 가치가 있다. 아직 젊은 사람일수록 더 깊이 있게 죽음의 의미를 사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나이가 많이 든 후에도 철학적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 발전시킨 예외적 인물들은 공통점이 있다.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젊은 사람들과 수평적으로 대화한다는 것이다. 이런 분들은 나이가 많이 들어도 변함없이 개방적으로 생각하며 유연하게 행동한다.
언젠가는 죽어야 하고 잊혀질 수밖에 없는 것이 숙명이라면,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이다. 살아 있는 동안, 지금 바로 여기에서 나를 '나'로 인식하는 철학적 자아가 삶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나는 왜 자살하지 않는가? 무엇을 할 때 살아 있음을 황홀하게 느끼는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이 내가 진정하고 싶은 것인가? 내 삶은 나에게 충분한 의미가 있는가?' 스스로 이렇게 물어야 한다.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면 인생의 의미도 삶의 존엄도 없는 것이다.
칸트에 따르면 존엄한 것은 '가치value'를 따질 수 없다. 어떤 것의 '가치'는 사람들이 가치를 인정하는지, 인정한다며 얼마만큼 높게 평가하는지에 좌우된다. 그러나 '그 자체가 목적인 것'은 가치를 따질 수 없다. 도덕적 차원을 가진 것, 옳은 것과 그른 것 사이의 선택을 나타내는 것만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된다. 인간다움humanity, 존엄성dignity이 그런 것이다. 인간 존엄성의 필수 조건은 자유의지free will이다. 살든 죽든, 인간의 존엄은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결정하는 능력과 관련되어 있다.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의미를 부여할 수 있고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한다면 휠체어를 타든 목발을 짚든 지팡이를 짚든 간에 그 삶은 언제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 의미가 사라지면, 그래서 그것을 이성으로 깨닫게 되면 그때가 죽을 때인 거지요. 전 지금처럼 살아가는 시간이 과연 저에게 가치 있는 것인가에 대해 많이, 아주 많이 생각했습니다. 결론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저의 고통은 아무 가치가 없고 제 고통의 원인 역시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저에게 제때 죽을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면 그 아픔은 인간적인 수준이 될 수 있었을 겁니다. 죽는다는 건 단지 그런 거예요. 태양이 제 기억 속에 가장 아름다운 작별 인사를 새겨두는 것처럼 각자 가지고 있는 좋은 추억을 이 세상과 우리가 사랑한 모든 것에 남겨두는 것, 잠드는 것에 대한 어떤 두려움도 슬픔도 원망도 없이 그저 피곤에 지쳐 고요하고 평온하게 눕는 겁니다. 그러나 죽음을 그렇게 느끼기 위해서는 지나치게 인간적이길 바란다고 할 만큼 굉장히 자유롭고 선해야 겠지요. 안락사, 또는 품위 있게 죽을 권리를 인정하려면 진정으로 인간과 삶을 사랑할줄 알아야 하고 선의 심오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 죽음은 내게 주어진 마지막 자유였다, 라몬 삼페드로.
훌륭함, 존엄, 품격이란 자신의 내면에 있는 가치이고 쓸모는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타인의 상대적 가치 평가이다.
행복은 사람에서 기쁨을 느끼고 자기 삶에 만족하여 마음이 흐뭇한 상태를 말한다. 우리는 언제 이런 흐뭇함을 느끼게 되는가? 스스로 설계한 삶을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방식으로 살면서, 그것이 무엇이든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것을 성취했을 때 행복을 느낀다.
홍사중 선생은 아름답게 나이를 먹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일흔여덟에 쓴 수필집에서 그는 밉게 늙는 사람들의 특징을 정리했다. - <늙는다는 것 죽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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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잘난 체, 있는 체, 아는 체를 하면서 거드름 부리기를 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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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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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는 소리, 넋두리를 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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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옹졸하여 너그럽지 못하고 쉽게 화를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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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는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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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말을 안 듣고 자기 이야기만 늘어놓는다.
홍사중 선생이 예시한 '밉상짓 목록'은 젊은이들에게도 자기의 모습을 비추어볼 수 있는 거울이 된다. 만약 다음과 같이 정반대로만 한다면 노인이든 청년이든 똑같이 멋진 사람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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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난 체, 있는 체, 아는 체 하지 않고 겸손하게 처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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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어도 없는 티를 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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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일이 있어도 의연하게 대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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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사에 넓은 마음으로 너그럽게 임하며 웬만한 일에는 화를 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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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을 배려하며 신중하게 행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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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야기를 늘어놓기보다는 남의 말을 경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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