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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11.07 [검색사전] 정의(正義)

개인이 정의롭게 사는 일은 스스로가 비난하는 다른 사람의 행위를 하지 않으면 된다. 

사회가 정의롭기 위해서는 정부와 사법, 의회, 언론, 재벌 등 권력집단이 힘의 논리가 아닌 법과 원칙, 상식에 맞게 권력을 사용해야 한다. 정의가 소수의 저항이 될 때, 사회의 정의는 무너진 것이다.

 

 

정의(正義) 1. (명사) 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 2. (명사) 바른 의의(意義). 3. (명사) 철학 개인 간의 올바른 도리. 또는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공정한 도리. 4. 철학 플라톤의 철학에서, 지혜ㆍ용기ㆍ절제의 완전한 조화를 이르는 말.

[유의어] 정당, 도리

[반의어] 불의

 

(네이버 영어사전) (바른 도리) justice, (formal) righteousness      

정의를 위해 싸우다 fight for justice

정의를 위해 싸우다 fight in the cause[for the sake] of justice

정의를 옹호하다 defend what is right

정의 사회를 구현하다 realize a just society[society of justice]

정의는 우리 편이다 Right and justice are on our side.

정의는 결국 승리한다 Right will prevail in the end.

정의는 결국 승리한다 Justice prevails in the end.

 

 

 

[시, 글과 책 속에 쓰인 '정의'에 대한 다양한 표현들]

 

 

김용규, <생각의 시대>

가장 올바르고 정의롭게 사는 일은 "우리가 비난하는 다른 사람의 행위를 우리 스스로 하지 않으면 된다"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

정의롭지 못한 사람들이 더 편안하게 잠을 자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남의 일에 아랑곳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정의로운 사람들은 매사에 걱정이 많아서 잠을 제대로 잘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정의로운 사람들이 아닐 것이다.

 

 

이정우, <개념: 뿌리들>

플라톤에게는 영혼의 세 가지 힘이 존재합니다. 하체(욕망, 생산자 계층), 어깨(의지/열정의 삶을 살게 하는 기개, 전사 계층), 머리(이성, 지도자 계층)... 이렇게 세 계층이 가져야 할 덕이 절제, 용기, 지혜입니다만, 마지막에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 세 가지 덕을 모두 전제하면서 동시에 이 세 가지를 통일적으로 조화시켜 주는 것이 마자믹 네번째 덕으로서 바로 정의인 것이죠. 특정한 영혼, 특정한 계층이 아니라 영혼의 모든 측면에, 그리고 사회의 모든 계층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정의입니다. 플라톤은 이렇게 세 개의 특수한 덕(절제, 용기, 지혜)에 하나의 일반적 덕(정의)을 추가해 덕론을 전개했는데, 그래서 이를 플라톤의 '사주덕'이라 부릅니다.

 

오늘날 정의란 바로 소수자들의 저항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헨리 조지, <진보와 빈곤>

정의는 두 사물 사이에 내재하는 조화로운 관계이다. 이 관계는 신이든, 천사든, 인간이든 어떤 존재가 보더라도 동일하다. - 몽테스키외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

고대의 정의론은 미덕에서 출발하는 반면 근현대의 정의론은 자유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도 있다.

 

사회가 정의로운지 묻는 것은,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 이를테면 소득과 부, 의무와 권리, 권력과 기회, 공직과 영광 등을 어떻게 분배하는지 묻는 것이다. 정의로운 사회는 이것들을 올바르게 분배한다.

 

미국 정치철하자 존 롤스는 <정의론>이라는 책에서, 정의를 고민하는 올바른 방법은 원초적으로 평등한 상황에서 어떤 원칙에 동의해야 하는가를 묻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롤스가 생각한 사회계약은 이처럼 원초적으로 평등한 위치에서 이루어지는 가언합의다. 롤스는 이 가언계약에서 정의의 원칙 두 가지가 나온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언론의 자유와 종교의 장 같은 기본 자유를 모든 시민들에게 평등하게 제공한다는 원칙이다. 이는 사회적 공리나 일반적 행복에 앞선다. 두 번째는 사회적, 경제적 평등과 관련한 원칙이다. 이것은 소득과 부를 똑같이 분배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지만,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을 인정한다면, 그 이익이 사회 구성원 가운데 가장 어려운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마시모 피글리우치, <그리고 나는 스토아주의자가 되었다>

소크라테스와 스토아주의자들에게 정의란 사회를 어떻게 운영해야 하느냐에 관한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라 다른 인간들을 존엄하고 공정하게 대우하는 실천을 가리킨다.

 

정의: 건강한 공동체 생활의 기초가 되는 시민적인 힘. 이의 사례들로는 공정성, 지도력, 시민 정신 혹은 협동 정신 등이 포함된다.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이건 상관없이 모든 인간을 공정하고 친절하게 대우하기.

 

 

E. F. 슈마허, <작은 것이 아름답다>

우리는 이토록 폭넓은 지혜에 기초해서만 정의와 용기, 그리고 절제에 도달할 수 있다. 절제란 적절한 선에서 만족할 줄 아는 것이다. "지혜란 진리에 대한 인식을 현실에 부합되는 의사결정으로 변형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정의가 진리와 연결된다면, 용기는 선과 연결되며, 절제는 미와 연결된다. 반면에 지혜는 어떤 의미에서 이 세 가지를 모두 포함한다.

 

 

유시민, <국가란 무엇인가>

진보정치는 국가로 하여금 최고의 도덕적 이상인 정의를 실현하도록 하기 위해 국가를 직접 운영하거나 국가운영에 영향을 미치려고 하는 활동이다. 국가의 정의는 시민들로 하여금 각자가 마땅히 가져야 할 것을 받게 만드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똑같이 누릴 자격이 있는 것을 만인으로 하여금 누리게 하고, 각자가 마땅히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을 저마다 받게 만드는 것이 국가가 사람들 사이에 세워야 할 정의이다. 국가가 최고의 도덕적 이상인 정의를 완벽하게 실현한다면, 우리는 자유롭고 풍요로우며, 평등하고 안전하며, 평화롭고 환경이 깨끗한 사회에서 살게 될 것이다.

 

 

리처드 니스벳, <생각의 지도>

평균적으로 동양인과 서양인 사이에는 매우 큰 사회심리적 차이가 존재한다. 동양인들은 상호의존적인 사회에서 살기 때문에 자기(self)를 전체의 일부분으로 생각하지만, 서양인들은 독립적인 사회에서 살기 때문에 자기를 전체로부터 독립된 존재로 여긴다. 동양인들에게 있어서 성공과 성취란 자신이 속한 집단의 영광을 의미하나, 서양인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개인의 업적을 의미한다. 동양인들은 인간 관계 속에 조화롭게 '적응'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기비판을 하지만, 서양인들은 개성을 중시하기 때문에 자신을 긍정적으로 보려고 노력한다. 동양인들은 타인의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인간 관계의 조화를 추구하지만, 서양인들은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고 인간 관계를 희생해서라도 정의를 추구한다. 동양인들은 위계 질서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집단의 통제를 수용하지만, 서양인들은 형평성을 존중하고 개인의 자유를 선호한다. 동양인들은 모순과 논쟁을 회피하지만 서양인들은 법률, 정치, 과학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적극적으로 논쟁을 끌어들인다. 동양과 서양 사이의 차이가 동양 사람과 서양 사람 모두에게 그대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서양 사회에도 동양인과 비슷한 사람이 있고, 동양 사회에도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서양인에 더 가까운 사람이 있다. 또한 나이가 들면서 한 개인의 특성이 변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 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평균적으로 보았을 때 동양인과 서양인 사이에 큰 차이가 존재하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소노 아야코, <약간의 거리를 두다>

세상은 모순투성이다. 그리고 이 모순은 인간에게 생각하는 힘을 준다. 모순 없이 만사가 계산대로 척척 진행되었다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처치 곤란한 장애물이 되었으리라고 확신한다. 생각이라는 게 필요 없을 만큼 세상이 공리적이고, 그래서 신앙과 철학이 무의미하며 정의가 완수되어 불만이 사라진 세계는 행복할 리 없다. 역설적이게도 인간이 인간답게 숭고해질 수 있는 까닭은 세상이 매우 불완전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정의는 행해지지 않고 약육강식이 난무하며, 사람들은 권력과 금전에 수시로 유혹을 받는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들에 저항하고자 보다 인간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조지 오웰, <위건 부두로 가는길>

우리가 함께 목표로 삼고 단결할 수 있는 이상은 사회주의의 바탕이 되는 이상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정의와 자유다. 허나 이런 이상은 거의 완전히 잊어버려 '바탕'이란 말을 쓸 수도 없는 지경이다. 이 이상은 이론 일변도의 독선과 파벌 다툼과 설익은 '진보주의'에 층층이 묻혀버렸다. 똥더미 속에 감춰져버린 다이아몬드가 되어버린 셈이다. 사회주의자가 할 일은 그것을 찾아내는 것이다. 정의와 자유 말이다! 이 두 마디야말로 온 세계에 울려퍼져야 하는 나팔소리이다.

 

 

장 지글러,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약자와 강자 사이에서는 자유가 억압이며 법이 해방이다." - 장 자크 루소, <사회계약론>. 

시장의 완전한 자유는 억압과 착취와 죽음을 의미한다. 법칙은 사회정의를 보장한다. 세계시장은 규범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이것은 민중의 집단적인 의지를 통해 마련되어야 한다.

 

 

유시민, <청춘의 독서>

사회 정의와 평등을 주시하는 진보주의자들이 다윈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데는 확실히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 자체가 아니라 보수주의의 기초를 이루는 맬서스와 스펜서의 사회진화론, 경쟁과 적자생존을 예찬하고 정당화하는 그 이론을 싫어하는 것이다.

 

 

린위탕(임어당), <생활의 발견>

이해를 동반치 않는 지식, 감상을 동반치 않는 비판, 사랑을 동반치 않는 미, 정열을 동반치 않는 진리, 자비를 동반치 않는 정의, 온정을 동반치 않는 예의가 판을 치는 이 세상은 얼마나 비참한 세상이냐!

 

 

공자, 임자헌 옮김, <군자를 버린 논어>

세상과 삶의 이치를 깨우친 지성인은 세상의 모든 것, 모든 일에 대해서 꼭 이래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없고, 절대 이래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도 없습니다. 그저 오직 정의를 기준으로 거기에 따라 갈 뿐이죠.

 

됨됨이가 된 사람은 정의에 밝고 됨됨이가 시시한 사람은 잇속에 밝다.

 

경제는 그 첫발을 부의 총량 이라는 관점에서가 아니라 분배의 관점에서 떼어야 한다. 분배는 사회적인 안정과 직결된다. 분배의 정의가 확립되어야만 국민들은 마음으로부터 자기 나라 지도자를 신뢰하고 좋아하게 된다.

 

 

애덤 스미스 원저, 러셀 로버츠 지음, <내 안에서 나를 만드는 것들>

인간의 삶이 비참하고 혼란스러운 가장 큰 이유는 소유물이 곧 나 자신이라 착각하기 때문이다. ... 무언가를 격렬하게 바라는 상황들 중 비교적 바람직한 상황도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신중의 원칙, 정의의 원칙을 위반하면서까지 격정적인 욕망을 가질 만한 상황은 없다.

 

스미스는 정의를 두고 타인에게 피해, 혹은 상처를 주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나쁜 짓을 하지 않는 미덕, 즉 소극적인 미덕을 말한다. 유대 현인 힐렐도 수천 년 전에 '내가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을 타인에게 하지 말라'고 말한 바 있다.

 

스미스는 정의의 원칙을 지킬 때는 아주 엄격하고 정확하게 지키라고 조언했다. 어떠한 예외나 수정도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면서, 정의의 원칙들을 아주 정확하게 지킬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 삶에서도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

 

정의의 원칙은 문법의 규칙에 비교할 수 있다. 반면 그 외의 다른 미덕에 관한 원칙들은 비평가들이 고상하고 격조 높은 문장을 쓰는데 필요하다고 얘기한 규칙과도 같다. 전자는 정밀하고 정확하고 필수불가결하다. 그에 비해 후자는 모호하고 명확하지 못하다. 또한 후자는 우리가 완벽을 추구할 때 필요한 정확한 지침을 주지 못한다. 단지 완벽함에 대한 추상적인 관념을 제시해줄 뿐이다.

 

 

도정일, <별들 사이에 길을 놓다>

가치의 다양성을 살리는 것이 인간의 삶을 훨씬 더 풍요롭게 하는 문화적 선택이며, 정의로운 사회의 길이라는 사실을 세계는 점점 더 깊게 인식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관용의 문화 없이는 어떤 문명도 공존의 정의를 실현시킬 윤리적 토대를 갖지 못한다. 그러나 패권주의자들에게 차이의 존중, 사랑, 관용이라니, 얼마나 허약해 보이는 제안이가!

 

 

오쿠다 히데오, <남쪽으로 튀어>

어느 누구에게도 지배받으려 하지 않고 혼자 국가에서 튀어나와 살아가겠다니, 그건 너무 자기 멋대로인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국가가 정의라고도 할 수 없었다. 튀어나갈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은 지배자의 생각이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아주 작고 작아. 이 사회는 새로운 역사도 만들지 않고 사람을 구원해주지도 않아. 정의도 아니고 기준도 아니야. 사회란 건 싸우지 않는 사람들을 위안해줄 뿐이야.

 

 

도정일,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인간의 유한성의 프레임에 갇혀 있기 때문에 모든 일들에 같은 양의 시간을 투입하거나 동일한 중요성을 둘 수가 없다. 그는 가치 있는 일, 중요한 일들과 그렇지 않은 일들을 분별하면서 자신의 유한한 시간을 배분해야 한다. 중요한 일들 중에서 세상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동의할 만한 세 가지 '큰일'을 고른다면 무엇일까? 첫째는 의미없는 곳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 둘째는 희망 없는 곳에 희망을 주입하는 일, 셋째는 정의가 없는 곳에 정의를 세우는 일이다.

이들 큰일의 첫번째 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무의미성의 도전'에 대한 대응이고, 두번째 것은 '지옥의 조건에 대한 거부'이며 세번째 것은 '야만에 대한 저항'이다. 의미, 희망, 정의는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세 개의 지주와도 같다.

 

 

스티브 디거, <잠들기 전에 읽는 긍정의 한줄>

쓸모없는 것은 없다 (소크라테스, Socrates). 바르게, 아름답게, 정의롭게 사는 것, 이것은 모두 하나다. Living well and beautifully and justly are all one 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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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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