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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11.05 미디어의 이해 - 마셜 매클루언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관련 책이나 논문에서 많이 인용하지만 끝까지 읽어본 사람이 많지 않다는 소문의 책!

 

내용의 방대함과 추상화를 보는 듯한 모자이크적 구성, 한번에 이해되지 않는 어려운 문장들, 끈기를 가지고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하기가 쉽지 않았다.

 

1964년에 쓴 글이라고 믿기지 않는 직관과 통찰력, 그리고 상상력! 역사, 물리, 수학, 천문학 등 여러 분야를 오가며 미디어를 연결짓는 지식의 넓이와 깊이에 혀를 내 두를 정도다.

 

 

[본문 발췌]

 

우리는 미디어를 주로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과 같은 커뮤니케이션 매체로 받아들인다. 매클루언은 미디어를 인간의 육체나 정신이 확장된 것으로 생각했다. 즉 옷은 피부를, 집은 인간 신체의 체온 조절 기제를 확장한 것이라고 파악했다. 말안장, 자전거, 그리고 자동차는 모두 인간의 발을 확장한 것들이다. 어떤 미디어 혹은 어떤 기술이든 그것은 인간의 확장물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나르시스의 신화를 이야기하면서, 매클루언은 그 신화가 나르시스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된 이야기라고 설명하는 일반적인 설명이 틀렸다는 점을 지적한다. 사실은, 물에 비친 이미지가 자기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이 그가 죽게 된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는 모든 기술이 지니고 있는 효과, 즉 수용자를 최면 상태에 빠지게 하는, 전형적인 마비 효과에 굴복한 것이다. 기술은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 내고, 새로운 환경은 고통을 만들어 내며, 그런 고통을 차단하기 위해 신체의 신경체계는 작동을 중단해 버린다.

 

자연적이고 유기적인 혹은 생태적인 흐름은 밀도가 낮은 곳으로 혹은 가장 마찰이 적은 곳으로 흘러가며, 당연히 곡선과 우회의 경로를 통해서 진행한다. 직선으로 가면 최단거리로 진행하는 동안 속도는 얻겠지만, 그 와중에 많은 마찰을 통해 열과 에너지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고, 반생태적이고 소모적인 결과를 낳게 된다. 생태계의 일원인 인간의 경우, 감각을 이런 방식으로 확장하면 불가피하게 마비가 올 수밖에 없다. 중추신경이 마찰을 이기지 못해 절단하게 되는 것이다.

 

퇴조해가는 기계 시대에는 우리가 그리 큰 염려를 하지 않아도 많은 일이 가능했다. 모든 것이 느리게 진행된다는 것은 어떤 일에 대한 반응이 상당한 시간 뒤에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처할 시간을 확보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행위와 반응이 거의 동시에 일어난다. 실제로 우리는 신화적이고 통합적으로 살고 있다. 그러나 사고방식은 전기 이전 시대의 낡고 파편화된 공간과 시간에 머물러 있다.

 

선禪의 미술과 시는 사이와 틈을 통해서 참여를 창조해 낸다. 동양 예술에서 관람자는, 스스로가 작품 속의 여백을 메워야만 하기 때문에 작가가 되어 버린다.

 

연속성이 순간적인 것에 자리를 물려줄 경우 우리가 구조와 구성의 세계 속에 놓이게 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 아닌가? 물리학에서 일어났던 일도 회화와 시 그리고 커뮤니케이션 등에서 일어났던 일들과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특수화된 부분들에 주목하다가 이제는 전체적인 장에 주목하게 되었고 그래서 우리는 이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미디어가 메시지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전기의 속도와 전체적인 장이 확보되기 전까지는 미디어가 메시지라는 사실이 분명하지 않았다. 그 시절 메시지는 곧 '내용'인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그림은 무엇에 대한 것이냐고 묻곤 했던 것이다.

 

문자 문화의 동질화된 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은 다양하고 비연속적인 삶의 형식들에 대한 감수성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매클루언의 미디어 이론은 간단히 설명하면 미디어에 대한 균형 이론이다. 세분화, 전문화에 대한 폐해로 파괴된 미디어에 대한 균형 잡힌 접근을 전기 시대의 도전에 맞춰 다시금 탐색하려는 것이 그가 이 책을 쓴 목표이기도 하다.

 

전화 같은 차가운 미디어를 라디오 같은 뜨거운 미디어와, 텔레비전 같은 차가운 미디어를 영화 같은 뜨거운 미디어와 구별하는 기본적인 원리가 있다. 뜨거운 미디어란 단일한 감각을 "고밀도"로 확장시키는 미디어다. 여기서 고밀도란 데이터로 가득 찬 상태를 말한다. 사진은 시각적인 면에서 고밀도다. 반면 만화는 제공되는 시각적 정보가 극히 적다는 점에서 저밀도다. 전화는 차가운 미디어, 혹은 저밀도의 미디어다. 왜냐하면 귀에 주어지는 정보량이 빈약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어지는 정보량이 적어서 듣는 사람이 보충해야 하는 연설은 저밀도의 차가운 미디어다. 반면에 뜨거운 미디어는 이용자가 채워 넣거나 완성해야 할 것이 별로 없다. 따라서 뜨거운 미디어는 이용자의 참여도가 낮고, 차가운 미디어는 참여도가 높다. 당연히 라디오 같은 뜨거운 미디어는 전화 같은 차가운 미디어와는 매우 다른 영향을 미치게 된다.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이런 종류의 계획에 자극을 받아 나선적이고 동심원적인 형태를 기초로 구겐하임 미술관을 설계했다. 그것은 전기 시대에서는 피해 갈 수 없는 계속 반복되는 형식인데, 그 형식에는 전기 속도가 지니고 있는 순간적인 특성, 그리고 계속 덧씌워진 깊이에 의해 이루어진 동심원적 패턴이 부과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평면들이 끊임없이 교차하면서 이루어진 동심원적 패턴들은 통찰을 위해 필요하다. 사실 이 동심원적 패턴의 관찰은 통찰의 기법일 뿐만 아니라, 미디어를 연구하는 데에도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 어떤 미디어도 독자적으로는 의미나 존재를 갖지 못하고 오직 다른 미디어와의 지속적인 교섭 속에서만 의미나 존재를 갖기 때문이다.

 

중심부에서 주변부로 기계적, 일방적으로 팽창한다는 낡은 패턴에 집착하는 것은 우리가 사는 전기 세계에서는 이제 적절하지 못하다. 전기는 중앙집권화시키지 않고 탈중앙집권화시킨다.

 

관념과 형식 등이 집중적으로 혼합되고 갈등을 빚을 때, 최대의 사회적 에너지가 배출되고 이로부터 최대의 기술이 발흥된다.

 

소유주를 대신해 라디오나 신문 혹은 영화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프로그램 내용에 관심을 쏟는데, 이는 운영자 특유의 편견이다. 소유주들은 미디어 자체에 더 관심을 기울이며, '대중이 원하는 것들' 혹은 몇몇 모호한 공식들 이상을 넘어서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소유주들은 미디어가 권력이라는 점을 이해하고 있으며, 그들은 이 권력이 '내용' 혹은 미디어 내에 있는 또 다른 미디어와는 무관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흔히 서양의학은 'cure'를 강조하고 동양의학은 'healing'을 강조한다고 한다. 서양의학이 인간의 신체를 기능적인 부분들의 결합체로 보고 고장이 나거나 병이 난 부분을 교체 혹은 대체학나 환부를 제거하는 것에 관심이 더 많다면, 동양의학은 병의 원인에 더 집중하여, 전체 신체 기관의 균형을 회복시켜 주려는 경향이 있다. 즉 부족한 부분이 보완되면, 전체적인 저항력의 증가로 스스로 고쳐 가는 힘을 북돋아 준다는 것인데, 매클루언의 미디어에 관한 설명과 비교해 보면, 깜짝 놀랄 만한 시사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가 말하는 것은 미디어가 우리에게 미치는 힘으로부터 우리가 균형을 잡아야만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생력을 키울 수 있는 힘, 즉 'heal'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자 미디어 시대에는 문제 부위와 환자를 특정하고 파편화해서 'cure'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노예화된 사회는 전문화를 통해 지배자들에게 꼭 필요한 역할을 떠맡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전문가의 모습에 노예근성과 소심함이라는 낙인을 찍게 된 것은 아마도 하나의 대응 자극으로서의 전문가주의로 타락해 버린, 인간의 오랜 노예화 과정의 역사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서구 세계를 관찰해 온 많은 사람들은 서구인들이 전문화된 수요의 증가로 인해 기술에 굴복하게 된 것을 일종의 노예화로 파악했다. 그러나 그 결과로 생겨난 파편화는 정복당한 포로들의 의도적인 전문화 전략과 달리 자발적이고 열성적인 것이다.

 

언어와 지성 사이의 관계는 바퀴와 인간의 발 및 신체 사이의 관계와 같다. 바퀴가 있으면 발과 신체는 보다 쉽게 그리고 보다 빨리 이동할 수 있고 한층 적게 몰두해도 된다. 언어는 인간을 확장, 확대시키지만 동시에 인간의 능력을 여러 가지로 분할한다. 언어라는 이 같은 의식의 기술적 확장으로 인해 인간의 집합적인 의식 혹은 직관적 깨달음이 감소하게 된다.

 

문명은 문자 문화에 바탕을 둔다. 왜냐하면 문자 문화란, 알파벳에 의해 시간과 공간으로 확장된 시각에 따라 하나의 문화가 일률적으로 처리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부족 문화에서 경험은 시각의 가치들을 억누르고 있는 지배적인 청각 감각적 생활에 의해 얻어진다. 차갑고 중립적인 눈과 달리 청각은 감수성이 고도로 강하고 섬세하며 모든 것을 포괄한다. 구전 문화에서는 행위와 반응이 동시에 일어난다. 표음적인 문화는 어떤 행위를 할 때, 사람들에게 자신의 감정과 정서를 억누르는 수단을 제공한다. 반응 없이 행동하는 것, 관여 없이 행동하는 것은 서구의 문자 문화에 속한 사람들의 고유한 장점이다.

 

서구 문화권의 사람들은 구텐베르크 시대를 벗어남에 따라, 점차 우리 문화가 가진 동질성, 획일성, 연속성 등과 같은 특징들을 보다 쉽게 식별해 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특징들 때문에 그리스와 로마는 비문자 문화적인 다른 민족들을 손쉽게 누를 수 있었는데, 다른 민족 혹은 부족민들은 예나 지금이나 문화적 다원주의, 특이성, 불연속성 등을 자신의 특색으로 삼고 있다.

 

모든 기술들이 힘과 속도를 높이기 위해 우리의 신체와 신경체계를 확장한 것이라는 점은 이 책의 일관된 주제다. 또 그 같은 힘과 속도의 증가가 없다면 우리 자신의 새로운 확장은 일어나지 않거나 폐기될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식으로 구성 요소들을 배치하든 힘이나 속도의 증가 그 자체는 조직상의 변화를 야기하는 하나의 교란이기 때문이다. 사회 집단의 변화와 새로운 공동체의 형성은 종이 메시지 및 도로 수송에 의한 정보 이동 속도의 증가와 더불어 일어난다. 이같이 속도가 증가한다는 것은 보다 먼 거리에서도 훨씬 쉽게 통제할 수 있다는 말이다. 역사적으로는 로마 제국의 형성과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붕괴를 의미한다. 파피루스와 알파벳의 사용이 빠르고 견고한 도로의 건설을 촉진하기 전까지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마을과 도시 국가라는 것은 계속 유지될 수 있는 자연스런 형태였다.

 

기술적인 가속화 수단으로 인해 마을과 도시 국가들의 독립성이 사라져 버린다는 사실은 아주 분명해 보인다. 가속화 현상이 일어날 때마다 새로운 중앙집권적 권력이 가능한 한 많은 주변 지역들을 균일화하는 조치를 취한다.

 

통계에서는 숫자들을 모으거나 결집시키는데, 이 숫자들은 현대의 동굴벽화 혹은 손가락으로 그린 그림이라고도 할 수 있는 통계학자들의 도표를 만들어 낸다. 어떠한 의미에서건 모여진 숫자들은 통계를 통해, 대중적인 취향이나 감정에 관한 원초적인 직관과 마술적인 잠재의식이 사람들에게 새롭게 밀어닥치도록 하는 상황을 제공한다: 그래서 "여러분은 유명 브랜드를 사용할 때 보다 큰 만족감을 느낀다."

 

"고전 수학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수가 감각 기관들에 '지각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의 본질이라는 수학의 명제다. 고전 수학은 수를 척도로 규정함으로써, '여기'와 '지금'에 열정적으로 헌신하는 인간이 세계 전체에 대해 느끼는 감정을 담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척도를 잰다는 것은 가까이에 있고, 우리가 직접 접촉할 수 있는 그 무엇을 잰다는 것이다."

 

부의 대규모 축적이 갖는 속성과 마찬가지로, 성장하고 바깥으로 뻗어 나가려는 "군중 혹은 무리"가 지닌 신비스러운 욕구는, 돈과 수가 사실상 촉각의 힘과 손의 장악력을 확장하는 테크놀로지들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왜냐하면 수란, 그것이 사람의 수든 숫자의 수든 아니면 돈의 단위든, 그 대상을 장악하고 포섭하려는 마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무한히 세분화되고 또 반복 가능하다는 이러한 마술은 비대칭적인 것, 휘어진 것, 울퉁불퉁한 것과 같은 비시각적인 것 모두를 시각적으로 평탄하고 직선적이며 획일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같은 식으로, 음성 알파벳은 그보다 수 세기 전에 비문자 문화적인 사람들의 불연속적인 문화에 침투하여, 그들의 구불구불하고 뭉툭한 특성을 서구 세계의 시각적 문화가 이끄는 획일성으로 바꾸어 놓았다. 바로 이 균일하고 연속적이며 시각적인 질서가 아직도 우리의 "합리적" 생활을 이끄는 규범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모든 것이 즉각적이고 비시각적인 상호 관련의 형태를 갖는 이 전기 시대에 이르러, 우리는 "합리적"이라는 것이 어디서 비롯하였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지금 그것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라는 문제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다.

 

보들레는 도시를 우리 신체 기관들의 통합적인 확장물로 간주해 자신의 <악의 꽃>을 원래는 '가장자리Les Limbes'(역주)라고 부르려 했었다. 말하자면 보들레르는 다양한 기능들의 힘을 증복시키거나 늘리기 위해 우리 자신을 외재화시키는 것, 즉 그래서 나타나게 된 자기 소외를 악이 성장해서 핀 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인간의 탐욕과 감각적 충동의 확장으로서 도시는 그에게 하나의 완전한 유기적, 심리적 통일체였다.

 

피부와 체온 조절 기제의 확장으로서 옷과 주택은 무엇보다도 인간들끼리의 관계 맺음과 공동체의 유형들을 형성하고 재조정한다는 점에서 커뮤니케이션의 미디어다.

 

문자 문화가 고도로 발전하고 파편적인 사회에서 "시간은 돈"이며 돈은 다른 사람들의 시간과 노력의 축적물이다.

 

부족사회의 돈은 오늘날 먹을 수 있게 설계된 신종 우주선처럼 먹을 수도 있고 마실 수도 있고 입을 수도 있다.

 

(시각적으로 그리고 단위별로 측정되는) 시간과 (균일하고, 그림의 형식을 지니고 있으며, 닫혀 있는) 공간은 즉각적 정보가 지배하는 전기공학 시대에는 사라지기 때문이다. 즉각적 정보의 시대가 되면 인간은, 파편화하고 전문화하는 데 몰두하던 자신의 직업에 종언을 고하고 정보 채집자로서의 역할을 맡게 된다. 오늘날 정보 채집은 "문화"라는 포괄적 개념을 다시 도입하게 되는데, 이는 꼭 원시 시대의 식량 채집자가 자신의 모든 환경과 완전히 균형을 이룬 상태에서 일을 했던 것과 일치한다. 이 새로운 유목적이고 "노동 없는" 세계에서 우리가 가지게 되는 절박한 관심사는 인생과 사회의 창조적 과정들에 대한 지식과 통찰이다.

 

모든 미디어들은 우리 자신의 확장이거나 혹은 우리 일부를 다양한 물질적인 것들로 번역시킨 것들이기 때문에, 하나의 미디어를 이해하게 되면 다른 모든 것들을 이해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된다.

 

먼 거리에서 재료를 가져오기만 해도 그 재료에 노동이 더해진 것이다. 그 물건은 거기에 무언가가 더해진 만큼 노동과 정보, 혹은 기술적인 지식을 축적하게 된다. 하나의 물건이 다른 것과 교환될 때, 그것은 이미 다양한 사물들을 어떤 공통분모로 번역하거나 환원시키는 화폐의 기능을 전제하고 있다.

 

이제 힘과 정보가 분산되는 전기 시대에 우리는 시계-시간의 균일성 아래에서 초조해하기 시작했다. 공간-시간의 이 시대에 우리는 리듬의 반복성보다는 다양성을 추구한다.

 

"풍자란 자신의 얼굴을 제외한 모든 얼굴을 보는 거울이다" - 스위프트Swift

 

'반응 없이 행동할 수 있는 힘'은 뒤에도 설명이 이어지지만, 문자적 인간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문자적 인간들은 감정과 지식의 분리를 통해 자신의 행동이 일으키는 결과나 그것에 대한 자신의 반응과는 상관없이 움직인다. 멀리서 그 예를 찾을 것도 없이, 자신이 개발하는 무기나 집행하는 정책 등이 가져올 결과나 효과에 대해 반응하지 않고 행동을 할 수 있는 것도 바로 '반응 없이 행동할 수 있는 힘'을 가능하게 해 준 문자와 그 이후의 기술 덕분이다 그러나 이처럼 반응하지 않고는 행동할 수 없는 시대가 바로 전기 시대인데, 이 시기는 모두에 의한, 모든 일에의 개입이 불가피한 시대다.

 

서구 문화의 힘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가 되는 동질화에 의한 확장이라는 원리를 담고 있다. 열린 사회가 열린 까닭은 어떤 집단이건 수량적으로 추가될 경우 무한히 팽창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균일한 인쇄에 의한 교육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인쇄의 획일성과 반복성은 연속적이고 측정 가능한 양적 성격을 가진 것으로서 시간과 공간이라는 관념과 힘을 합쳐 르네상스에 스며들었다. 이 관념의 직접적 효과는 자연 세계와 권력 세계 모두 탈신성화시키는 것이었다. 세분화와 파편화에 의해 물리적 과정을 제어하는 새로운 테크닉은 신과 자연, 인간과 자연, 나아가 인간과 인간을 분리시켜 놓았다.

 

모든 기술의 변환은 유기체적 진화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왜냐하면 모든 기술들은 우리 신체라는 물리적인 것의 확장이기 때문이다. 새뮤얼 버틀러Samiel Butler는 진화의 과정이 기계적 양상으로 전환됨에 따라 놀라울 정도로 가속화되었다고 본 버나드 쇼의 통찰력에 탄복하였다. 그러나 쇼는 그 문제를 애매한 상태로 두는 것에 만족했다. 그러나 버틀러 자신은 적어도 다음과 같은 지적을 하였다. 기계는, 확장을 통해 자신들을 탄생시킨 바로 그 인간들의 몸에 바로 다시 영향을 줌으로써, 재생산에 있어서 인간을 대신하는 힘을 부여받았다. 우리 자신의 확장된 신체가 지니게 된 힘과 속도에 대한 반응은 새로운 확장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모든 기술은 그 기술을 만들어 낸 인간에게 새로운 스트레스와 욕구를 일으킨다. 새로운 욕구와 새로운 기술에 의한 반응은 우리가 기존의 기술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탄생하게 된다. 이것은 끊임없이 진행되는 과정이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하나의 순간들을 분리해 낸다는 것은 사진만이 가지는 독특한 성격 중 하나다.

 

오래된 미디어든 새로운 미디어든 간에, 다른 미디어와의 관계를 파악하지 않고 사진이라는 미디어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 육체와 신경체계의 확장인 미디어는, 새로운 확장이 일어날 때마다 새로운 균형을 이루어야만 하는 생화학적 상호 작용의 세계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신문은 사건을 보도하거나, 또는 전혀 보도하지 않음으로써 일어난 사건들에 "색깔"을 입힐 수 있다.

 

모자이크적인 수단을 가지고, 신문은 공동체의 이미지 혹은 공동체의 특징을 만들어 간다.

 

미디어의 소유자들은 항상 대중에게 대중이 원하는 것을 주려고 노력한다. 왜냐하면 미디어의 소유자들은 자신들의 힘이 미디어가 주는 메시지 혹은 프로그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미디어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동차는 획일화와 규격화의 메커니즘이 낳은 하나의 뛰어난 작품이며, 그것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계급이 없는 사회를 만든 구텐베르크의 기술과 문자 문화에 일치하는 것이다.

 

어떤 광고도 의식적으로 주목하게 되면 희극적인 것으로 보이게 된다. 광고는 의식적인 소비를 겨냥하는 것이 아니다. 광고는 사람들에게, 특히 사회과학자들에게 최면술을 걸기 위해 잠재의식에 작용하는 약과 같은 것이다.

 

언젠가 역사가와 고고학자는, 지금껏 어떤 사회가 자신들의 모든 일상 활동을 전 범위에 걸쳐 기록한 것보다, 오늘날의 광고가 훨씬 더 풍부하고 충실하게 매일매일의 삶을 반영한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이집트의 상형 문자도 이 점에서는 훨씬 뒤떨어진다. 영리한 광고주들은 텔레비전을 가지고 모피든 솜털이든, 희미하게 들리는 소리든 시끄러운 소음이든 자유자재로 이용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그들은 인간의 마음속에 스킨 다이빙해 들어간 것이다. 왜냐하면 시청자들이 하고 있는 일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시청자들은 스킨 다이버이며, 그들은 딱딱하고, 빛나는 표면에 반짝이는 햇빛을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다. 비록 그들이, 고통스럽고 시끄러운 라디오 소리는 계속 견뎌 내야 하지만 말이다.

 

예술과 게임은 우리를 틀에 박힌 일상과 관습에서 오는 현실의 압력에서 한 걸음 비켜설 수 있도록 해주고, 그것을 관찰하고 의문을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있게 해준다. 대중적인 예술 형태로서의 게임은 모든 사람들에게 사회의 어느 생활에든 참여할 수 있는 직접적 수단을 제공해 주는데, 그 어떤 단일한 역할이나 직업도 그러한 것을 인간에게 제공해 주지는 못한다.

 

모든 게임은, 모든 정보 미디어와 마찬가지로, 개인 혹은 집단의 확장이다. 집단과 개인에 대한 그것의 효과는 아직 그다지 확장되지 않은 개인이나 집단의 부분들을 새롭게 재배치하는 것이다. 예술 작품은 그것을 보는 사람에게 미치는 효과들을 제외한다면, 그 존재도 기능도 생각할 수 없다. 게임 또는 대중적인 예술, 그리고 커뮤니케이션 미디어들과 마찬가지로, 예술은 인간 공동체를 새로운 관계망과 상태로 설정함으로써 그것에 자기 자신의 고유한 전제를 심어 놓는 힘을 지니고 있다.

 

예술을 만드는 과정을 통해, 그들은 실제로 무엇이 일어나려고 하는지를 발견했으며, 따라서 그들은 "시대에 앞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예술가가 아닌 사람들은 언제나 지나간 시대라는 안경을 통해 현재를 바라본다.

 

오늘날 전체로서의 세계에 반응하도록 우리가 내몰리게 되는 이유는 바로 전기 미디어가 이와 같은 상호 작용의 장소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적인 의식과 공적인 의식 모두의 통합적 전체를 만들어 내는 것은 무엇보다도 전기로 인해 만들어진 개입과 관여의 속도다. 오늘날 우리는 '정보의 시대'. '커뮤니케이션의 시대'에 살고 있다. 왜냐하면 전기적 미디어가 모든 사람들이 참여하는 상호 작용의 총제적인 장을 즉시 그리고 끊임없이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대중적 상호 작용의 세계는, 이제까지 우리의 개인적 신경체계만의 특성이었던 통합적 상호 작용이라는 포괄적인 범위를 갖게 되었다. 이것은 전기가 그 특성상 유기적이고, 또 전신, 전화, 라디오,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전기적 형식들이 지닌 기술들을 사용함으로써 유기적인 사회적 유대감을 굳건히 해 주기 때문이다. 우리 신경체계의 특성이기도 한 전기 커뮤니케이션이 갖는 동시성은, 우리를 세계의 모든 사람들과 함께 있을 수 있고 또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전기 시대에 우리가 동시에 모든 곳에서 힘께 있을 수 있다는 것 자체는 적극적 경험이라기보다는 상당히 소극적 경험이라 할 수 있다. 신문을 읽거나 텔레비전 쇼를 봄으로써 우리는 이러한 의식의 경험을 보다 적극적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언뜻 보면 전기 미디어가 인간의 공간적인 조직의 힘을 확장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많은 연구자들은 전기 미디어를 잘못 이해해 왔다. 그러나 전기 미디어는 공간 차원을 확장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차원을 폐지해 버린다. 전기에 의하여 우리는 작은 규모의 촌락에서처럼 인간 상호 간의 깊은 관계를 어디에서나 되찾게 된 것이다. 그것은 기능과 힘의 이양이 없는 친밀한 관계다.

 

이전에 "식량을 채집하던 인간"이 뜻밖에도 "정보를 수집하는 인간"으로 다시금 나타난다. 이런 수집의 역할을 하면서, 전자 시대의 인간은 구석기 시대의 조상들만큼이나 유목민의 삶을 산다.

 

현재 영화는, 책의 방식으로 말하자면 필사본 단계에 있다. 그리고 곧 영화는 텔레비전의 압력을 받아, 휴대할 수 있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인쇄된 책의 단계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영화는 알파벳이나 인쇄만큼, 다른 문화 속으로 폭발해 들어가는 공격적이고 제국주의적인 형식이다. 그 폭발적인 힘은 발성영화에서보다 무성영화에서 훨씬 더 컸는데, 왜냐하면 전자기적인 사운드트랙은 이미 기계적 외파가 전기적 내파로 대체된다는 것을 예고했기 때문이다. 발성영화와는 달리 무성영화는 언어 장벽을 넘어서 즉시 받아들여졌다.

 

독일과 중부 유럽이 음악, 댄스, 조각의 세계를 풍요롭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청각적, 촉각적 형태와 같은 풍부한 비시각적 자원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부족적 사고방식 덕분에 그들은 새로운 비시각적인 아원자물리학의 세계에 쉽게 다가갈 수 있었는데, 그 세계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문자 문화를 누려 왔고 그리고 이미 오랫동안 공업화되었던 사회들은 결정적인 장애를 가지고 있다.

 

중립적인 눈에 비해 귀는 과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다. 귀는 완고하고 폐쇄적이며 배타적인 반면, 눈은 개방적이고 중립적이며 연대적이다.

 

드라마에 소리밖에 주어지지 않았을 때, 우리는 시각적으로 동작을 상상할 뿐만 아니라, 모든 나머지 감각들을 채워야 한다. 너무도 많은 부분을 "스스로 하기", 혹은 행위의 완성과 "폐쇄"는 젊은 사람들이 주위로부터 벗어나 고립된 태도를 지니게 하고, 그들을 멀리 떨어져 있고 접근하기 어려운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라디오가 주는 소리의 신비로운 병풍 덕분에, 젊은 사람들은 방해받지 않고 숙제를 할 수 있는 프라이버시를 얻고, 부모의 명령에 시달리지 않을 수 있다.

 

상업적인 오락 전술은 정신생활과 사회생활 모두에 동일하게, 모든 미디어가 미치는 영향의 속도와 힘의 최대치가 될 수 있게 보장해 준다. 따라서 그것은 변화보다는 영속성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 무의식적으로 자기 자신을 죽이는 희극적 전술이 된다.

 

모든 사람은 그가 이해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이 경험한다. 게다가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이해가 아니라 경험이다. 특히 미디어나 테크놀로지와 같은 집합적인 문제들이 관련되는 곳에서, 개인은 거의 불가피하게 자신에게 가해지는 효과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텔레비전은 행위의 미디어가 아니라, 반응의 미디어다.

 

텔레비전 미디어는 과정에의 참여와 복잡한 반응이라는 주제를 열망하는 미디어이기 때문에 다큐멘터리 형식이 주목을 끌게 되었다. 영화가 과정을 훌륭하게 다룰 수도 있지만, 영화 관객은 반응에의 참여자가 되기보다는 행위의 수동적인 수용자가 되기를 원하는 경향이 있다.

 

문자 문화에서 유래된 연속성, 획일성, 연결성에 대한 시각적인 강조는, 우리를 파편화된 반복 행위를 통한 연속성과 선형성을 실행하는 거대한 기술적 수단과 맞닥뜨리게 만들었다. 고대 세계에서는 이러한 수단을 벽이나 도로에 사용하는 벽돌에서 발견했다. 반복적, 획일적인 벽돌은 도시와 제국의 도로나 벽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였는데, 이것은 문자를 통해 이루어진 시각의 확장이다. 벽돌로 쌓은 벽은 모자이크적 형태가 아니다. 그리고 모자이크적 형태 또한 시각적 구조가 아니다. 모자이크적인 것은 춤처럼 눈에 보이긴 하지만, 시각적으로 구조화될 수 없다. 그리고 또한 시각적인 힘의 확장도 아니다. 왜냐하면 모자이크적인 것은 획일적이지도, 연속적이지도, 반복적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촉각적 텔레비전 영상과 비슷하게, 비연속적, 비대칭적, 비선형적이다. 촉각에서는 모든 사물이 갑작스럽고, 뒤집어져 있고, 근원적이고, 따로 떨어져 있고, 불가사의하다. ... 현대 예술의 비시각적인 모자이크적 구조는, 현대 물리학과 전기적인 정보 패턴들처럼, 직접 개입하지 않고 떨어져서 보는 듯한 자세를 허용하지 않는다. 촉각이 그러한 것처럼, 텔레비전의 영상의 모자이크적 형태 역시 존재 전체의 심층적 참여와 개입을 요구한다. 이에 비하여 문자 문화는, 심리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시간과 공간의 획일적인 조직화에 이르기까지 시각의 힘을 확장함으로써, 보는 사람에게 관찰 대상으로부터의 분리와 비관여의 힘을 부여하였다.

 

자동화가 이루어지면, 직능이 없어질 뿐만 아니라 복합적인 역할이 다시 나타난다. 교육에서, 그리고 데이터를 정리, 배열하는 것에서 지난 몇 세기 동안 전문화가 강조되어 왔지만, 전기에 의해 즉시 정보를 검색할 수 있게 된 현대에는 전문화가 다시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자동화는 정보다. 그리고 그것은 노동의 세계에서 직능을 없애 버릴뿐만 아니라, 학습의 세계에서 교과목을 없애 버린다. 그러나 그것이 학습의 세계를 없애지는 않는다. 미래의 노동은 자동화 시대에서 "살아가는 것 배우기"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전기 테크놀로지 일반에서 흔히 나타나는 패턴이다. 이것은 문화와 테크놀로지, 예술과 상업, 일과 여가라는 낡은 분법을 없애 버린다. 단편화가 지배적이었던 기계 시대에는 여가가 일이 없는 것, 또는 단순히 놀고 지내는 것이었지만, 전기 시대에는 그 반대가 맞는 말이다. 정보 시대가 모든 능력을 동시에 사용하는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시대의 예술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가장 열심히 대상에 관여함으로써 가장 한가하게 여가를 누리게 된다.

 

화가가 공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전기에 대해 이야기 하게 된다. 말하자면,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물체들이 가진 각각의 특수한 위치를 모두 포함하는, 변화가 가능한 상태라고 말하게 되는 것

 

매스 미디어 역시 그 수용자의 규모가 크기 때문에 매스 미디어인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거기에 동시에 관여되기  때문에 매스미디어인 것이다.

 

문자 문화와 인쇄의 오랜 발전과 그것들이 사회적 경험과 조직에 미친 영향을 거꾸로 돌려 보면, 기계 산업에 없어서는 안 될 고도의 사회적 획일성과 동질성을 문자 문화와 인쇄가 어떻게 해서 가져오게 되었는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거꾸로 돌려 보라. 그러면 우리는 익숙한 것들 속에 존재하는, 익숙하지 않은 낯선 것들이 주는 충격을 받게 되는데, 그것은 형식들의 삶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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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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