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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11.21 우리는 왜 이런 시간을 견디고 있는가 - 전주희

기술과 사회의 발전은 사람들에게 여유와 자유를 더 줄 것이라 기대했지만, 자본과 권력 시스템의 부속품으로 전락시킬 수 있다. 잠깐의 시간 동안이라도 저만치 떨어져 바라보고 생각해 봐야 한다.

 

 

[본문 발췌]

 

인간의 시간이란 연속적이지 않다. 시계가 가리키는 초침과 분침은 균질적이지만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이란 기억과 미래일 뿐이다. 현재는 늘 순식간에 과거로 흘러가 기억으로 쌓인다. 기억으로 쌓인 시간이 미래를 정확하게 그릴 수 없다는 것은 언제나 정해진 시간에서 벗어나는 시간, 다른 시간을 꿈꿀 수 있는 이탈의 가능성을 포함한다. 하지만 자본의 시간, 부채가 결정하는 시간은 이러한 인간의 시간을 설계하고 계산하며 통제한다. 부채가 인간의 삶을, 인간의 모든 시간을 강탈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면 기억과 미래라는 연속적이지 않은 인간의 시간은 화폐가치로 환산된 시간표가 될 것이다. 1교시가 끝나면 어김없이 2교시가 기다리는 시간의 연속이 삶의 전부를 이루게 될 것이다. 이전과 이후로 나뉘는 사건을 찾아 여행을 떠나지 않는 개인에게는 시간이란 지금-지금-지금이 무한히 반복되는 시간만이 남겨지게 될 것이다. - 전주희, <시간을 강탈하는 부채>

 

 

"기계 그 자체는 노동시간을 단축시키지만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되면 노동시간을 연장시킨다. 기계 그 자체는 노동을 경감시키지만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되면 노동 강도를 높인다. 기계 그 자체는 자연력에 대한 인간의 승리이지만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되면 인간을 자연력의 노예로 만든다. 기계 그 자체는 생산자의 부를 증대시키지만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되면 생산자를 빈민으로 만든다." 마르크스가 쓴 이 글은 사회의 다른 요소들과 관계에서 기술이 전혀 중립적이지 않음을 지적하는 대목이다. 기술이 무엇과 결합하든 어떻게 발전하든 기술은 기술일 뿐이라는 명제는 탈맥락적일 뿐 아니라, 기술의 발전은 당대 지배계급의 이해와 밀접하다는 점을 은폐한다. 기술은 자본의 이윤과 축적 그리고 경쟁력을 확대시키는 특정한 이해와 긴밀하게 맞닿아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기술은 언제나 그것이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되는 관계를 통해 이해되어야 한다. - 김영선, <디지털 모바일 기술, 만인을 자영화하다>

 

 

노동 과정의 탈공간화는 이렇게 (노동일에 포함되어 있던) 집단이 공유하는 시공간에 대한 공통 감각, 다시 말해 집합적이고 관계적이고 의례적인 시공간감이 사라짐을 내포한다. 산업자본주의가 특정한 시공간에 붙박인 '근면한 신체'를 주조했다면, 디지털 모바일 기술을 매개로 자본은 사회적 인간형을 새로운 방식으로 주조한다. 그리고 그 형태는 '(시공간의) 구체성을 잃어버린 파편화된 신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김영선, <디지털 모바일 기술, 만인을 자영화하다>

 

 

"현재의 시스템이 효율적이라는 틀에서 벗어날 생각을 왜 못하나.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하고, 돈만 벌게 해주면 다른 열망은 다 억제해야 하는 무시무시한 시스템에 왜 질문을 던지지 않는가?" - 제니퍼소프트 이원영 대표

 

 

"축록자불견산 확금자불견인(逐鹿者不見山 攫金者不見人)이라는 말이 있다. '사슴을 쫓는 자 산을 보지 못하고 돈을 쫓는 자 사람을 보지 못한다'라는 뜻이다. 돈만 쫓다 보면 그 돈을 만들어내는 주체인 사람을 보지 못하게 된다. 그러면 크게 성공할 수 없다. 결국 경영은 '사람'을 어떻게 이끌지 고민하는 일이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한다. 그렇다면 경영자는 자연스럽게 행복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한다. 직원들 각 개인의 행복을 위해 회사를 운영하는 것. 그것을 통해 회사 전체의 성공을 이끌어내는 것. 이것이 내가 추구하는 '자연주의 인본경영'의 핵심이다." - 마이다스아이티 이형우 대표

 

 

인간다운 삶이란 무엇인가? 그냥 생존만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재미와 의미를 같이 누리는 생활이다. 그렇다. 재미와 의미, 이 두 가지는 인간다운 삶의 양대 바퀴다. 자본에 의해 규정된 삶이 소유와 소비에 집착하는 것이라면, 인간다운 삶은 경향적으로 재미와 의미를 추구한다. - 강수돌, <탈산업시대 근면 신화의 의미>

 

 

미하엘 엔데의 <모모>, 스텐 나돌리의 <느림의 발견>, 버트런드 러셀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 폴 라파르그의 <게으름의 권리>, 웬디 와서스타인의 <게으름: 나는 더 게을러질 권리가 있다>. 밀란 쿤데라의 <느림>, 칼 하인츠 가이슬러의 <시간>등은 근면에 대한 일종의 안티테제로 느림의 미학, 게으름의 미학, 여유의 미학을 설파한다. 이 모두는 빠름이나 근면이 아니라 느림이나 게으름이야말로 '삶-윤리'의 본질임을 설파한다. 물론 이러한 대당의 설정은 기존의 모순을 드러내는 데 중요하다. 하지만 그 모순을 지양하고 새로운 차원을 열기 위해서는 대립을 넘어 승화로 나아가야 한다. 그 시점에서 게으름과 부지런함은 새롭게 통일될 것이다. - 강수돌, <탈산업시대 근면 신화의 의미>

 

 

인생은 결과나 속도가 아니라 과정과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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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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