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첫 다이빙은 세부섬 모알보알로 간다.

2016년 다이빙 교육을 받고 처음 갔던 펀다이빙 여행지였는데 9년만에 다시 방문, 최근에는 거의 로컬 다이빙샵을 이용했는데 픽업 및 싱글차지 서비스와 할인 등 조건이 좋아 Brand New라는 한인샵을 이용했다.

인천공항 짙은 안개로 1시간 가량 비행기 안에서 대기하다 출발했지만, 같은 시간대 도착 항공편이 없었는지 금방 입국수속을 마치고 기다리던 픽업 기사를 만나 3시간 가까이 새벽길을 달려 드디어 모알보알 도착.

모알보알 다이빙 포인트는 대부분 해변을 따라 다이빙샵 가까이 있기에 아침 먹고 9시 경 출발해 2회 다이빙을 하고 들어와 점심 먹고 오후 1회 다이빙 일정으로 진행해 3시 이전에 끝난다.

물속 온도는 27도, 시야는 5~10미터로 별로 좋지는 않고 대부분 포인트에 해파리가 많아 다이빙 하면서 주의가 필요하다.

같은 기간에 프리&스쿠버 다이빙 단체가 있어 다이빙샵이 북적북적 했지만, 이틀째부터 노련한 어르신 두분, 초보 부부팀과 같은 그룹으로 가이드 2명과 다이빙을 진행했다.

모알보알은 뭐니뭐니해도 Sardines 정어리 포인트와 Pescador가 핵심 포인트. 정어리 포인트는 매일 한 번씩 방문해 거대한 정어리 군무를 감상하고, 정어리 구경이 지루할 즘 가이드가 월을 따라 프로그 피쉬, 곰치, 누디 등 바다생물들을 찾아 주었다.

소그룹이라 Pescador는 작은 스피드보트를 타고 갔는데 첫 다이빙 심한 조류로 과호흡이 오신 분이 있어 같이 들어갔던 두 명은 먼저 출수하고 가이드와 단둘이 수중 동굴 구경을 했다. Pescador  두 번째 다이빙에서는 다행히 조류를 피해 하얀색 자이언트 프로그 피쉬를 한참 동안 바라보며 다이빙을 마쳤다.

3일간의 다이빙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시간 여유도 있고 남부 버스터미널 근처에 숙소를 잡아 로컬 버스를 이용해 세부 시티로 이동하는데, 버스 정류장 합승밴 호객꾼의 방행로 버스를 놓칠 뻔 했지만 무사히 에어컨 버스를 타고 3시간여 만에 도착했다.


세부-모알보알 이동 Tip
일행이 있고 새벽 도착한 경우 다이빙샵의 픽업과 Early Check-in 서비스를 이용하는 편하다. 혼자서 대중 교통을 이동한다면 Grab을 이용해 공항-세부남부터미널로 이동해 로컬버스를 이용한다. 에어컨 버스 기준 현재 요금은 210페소.

모알보알에서 세부 이동시에는 대부분 다이빙샵이나 숙소가 있는 파낙사마 비치에서 버스정류장까지는 트라이시클을 이용해야 하는데 외국인은 200페소가 기본이다. 버스 정류장에 의자에 앉아 기다리다 버스를 타면 되는데 논에어컨버스가 먼저 오면 20여분 기다려 에어컨 버스를 타는게 낫다. 단, 버스 정류장에 기다리면서 합승밴 호객꾼들을 조심해야 한다. 에어컨 버스가 1~2시간 기다려야 한다며 합승밴 타라고 유도하면서, 도착한 버스가 세부시티가는 버스가 아니라는 둥 방해도 하니 주의 해야 한다.




 

 

 

반응형
Posted by 소요유+
,

정년,
누군가에는 부러움,
누군가에는 두려움,
누군가에게는 아쉬움.


[본문발췌]

삶의 버거움을 느낄 때, 버거움을 뛰어넘는 고통으로 행복해지는 들숨과 날숨. 절망은 생각보다 쉽게 희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편리함에 익숙해져 기억해야 할 소중한 것들을 잊고 사는 시간이 있다.


난, 불확실한 긴 여행을 시작하는 자유인이다.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
힘겨운 나날들, 무엇 때문에 너는
쓸데 없는 불안으로 두려워하는가
너는 존재한다 – 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너는 사라진다 – 그러므로 아름답다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끝과 시작’ 중에서
 


‘나’라는 존재는 분인(分人)이 가능한가? 정말 어려운 질문이다. 타인과 더불어 산다는 것은 억지로 강요당한 가짜 ‘나’로 산다는 의미로 해석이 가능해진다. 단, 하나뿐인 진정한 나는 존재하지 않고 대인관계마다 더러 나는 여러 얼굴이 모두 ‘나’다. – 히라노 게이치로, ‘나란 무엇인가’ 중에서

‘나’라는 존재는 여러 개로 분인될 수 없는데도 때론 하나였다가 여러 개의 얼굴로 분인되는 존재다. 추상적이면서 어려운 물음에 어떻게 답해야 하고 이해가 가능할까?

 

살면서 ‘열심히’라는 말을 밥 먹듯이 들으면서 살아왔다. 열심히 살지 않으면 죽는 줄로만 알았고, 우리는 그렇게 교육받았다. 우리가 믿었던 것과는 다르게 인생은 이처럼 아이러니하다. 열심히 살지 않아도 잘 살 수 있다면 괜찮지 않을까?


중년의 삶은 삭힘의 미학이라 생각한다. 곧 찾아올 나의 겨울을 위해서 덜어내고 비우면서 내게 남은 중년의 시간을 푹 삭혀봐야겠다.


오히려 이해 관계가 없는 인연은 괴로움이 없지만,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킨 인연은 버거움과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동반하게 되는 것 같다. 잠시 호저의 거리를 생각한다. 쇼펜하우어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호저들의 안타까운 모순 속에 있다!;’라고 말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적절한 거리를 유지해야 오래 그리고 멀리 갈 수가 있다.


실체가 없는 삶을 살다 보니 남이 인정해 주는 명함에 탐닉한다. 알고 보면 명함에는 직위는 있으나 실체가 모호하다. 남을 의식하는 삶을 살다 보니 삶이 향기롭지 못하다. 직장 안에는 두 계절만 존재한다. 여름과 겨울 즉, 뜨거움(경쟁)과 차가움(평가)뿐이다.


많은 것을 소유하고 살아가면서도 늘 부족함을 느낀다.


삶이란 예측이 불가능하고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다. 그래서 매 순간 불안한 상태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일이다. 찰나에 집중하자. 걱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방법은 없을까? 과거와 미래를 고민하지 않고 현재를 충실하게 사는 일이 중요하다.


여행은 자신과 마주하는 독백이라 생각한다. 그 길에는 늘 설렘과 두려움이 공존한다.


지나고 나면 별일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순간의 감정이 제어되지 않는 순간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이 아팠고 힘들었다.
 
중년에게 필요한 것은 생각을 줄이고, 말을 줄이고, 불필요한 관계를 줄이는 일이 중요하다.


우리들 인생에 정답은 없다. 작은 일 큰 일 구분하지 말고 그냥 살아내는 것이다.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5690365

반응형
Posted by 소요유+
,

가해자들은 시간과 함께 기억을 지우거나 왜곡하는데, 피해자들은 그 때의 기억에 갇혀 괴로워 한다.
 
 
[본문발췌]

어떤 말도 허투루 뱉지 않는, 잠시라도 무기력과 혼란에 빠져 삶을 낭비하지 않을 것 같은 태도 때문일 거라고, 인선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 혼돈과 희미한 것, 불분명한 것들의 영역이 줄어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우리의 모든 행위들은 목적을 가진다고, 애써 노력하는 모든 일들이 낱낱이 실패한다 해도 의미만은 남을 거라고 믿게 하는 침착한 힘이 그녀의 말씨와 몸짓에 배어 있었다.



정말 누가 여기 함께 있나, 나는 생각했다. 동시에 두 곳에 존재하는, 관측하려 하는 찰나 한 곳에 고정되는 빛처럼. 
그게 너일까, 다음 순간 생각했다. 네가 지금 진동하는 실 끝에 이어져 있나. 어두운 어항 속을 들여다보듯, 되살아나려 하는 너의 병상에서.

아니, 그 반대인지도 모른다. 죽었거나 죽어가는 내가 끈질기게 이곳을 들여다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저 건천 하류의 어둠 속에서. 아마를 묻고 돌아와 누운 너의 차가운 방에서.

하지만 죽음이 이렇게 생생할 수 있나. 뺨에 닿은 눈이 이토록 차갑게 스밀 수 있나.



숨을 들이마시고 나는 성냥을 그렀다. 불붙지 않았다. 한번 더 내리치자 성냥개비가 꺾였다. 부러진 데를 더듬어 쥐고 다시 긋자 불꽃이 솟았다. 심장처럼. 고동치는 꽃봉오리처럼.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가 날개를 퍼덕인 것처럼.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0781116

반응형
Posted by 소요유+
,

호기심, 질문하고 성찰하고 비판하는 능력이 우리를 성장과 발전하게 한다.
 

[본문발췌]
 
세계에 대한 궁금증과 우주에 대한 신비감 없이 아이들이 잘 자랄 방법은 없다. 생각에 잠기는 아이가 인간의 미래이고 세계의 미래다.
사고력, 판단력, 집중력, 상상력, 이 네 가지는 시대 변화에 관계없이 교육이 성장 세대에게 반드시 길러주고 함양해야 하는 기본 능력이다. 
질문이 죽으면 호기심도 죽고 호기심이 죽으면 탐구의 열정도 죽는다.
 
 
 
인간적 위대성은 어떤 완전성의 결과이기보다는 오히려 결함의 결과이다.
 
 
 
민주주의를 할 줄 모르는 국민은 민주주의 느린 속도에 짜증내고 토론, 설득, 절충, 타협의 과정들이 불가피하게 요구하는 느릿느릿한 합의 절차들을 곧잘 무능과 비효율로 간주한다. 그 순간부터 그들은 우화 속의 개구리들처럼 옛날의 왕을, 혹은 독재자를, 그리워하기 시작한다.
 

보르헤스의 천국과 도서관. 과거, 현재, 미래가 만나고 기억과 상상력이 용접되는 곳, 지적 모험의 땅, 돈도 비자도 필요 없는 여행지, 국경과 인종과 계급이 영원히 퇴각한 코즈모폴리턴의 세계, 거기가 도서관이다.
 
 

여행자는 흔희 두가지 만남을 경험한다. 그는 여행길에서 많은 것을 보되 그가 본 어느 것도 소유하지 못한다. 새로운 것, 아름다운 것, 탐나는 것들이 제아무리 많아도 그는 그냥 빈손으로 돌아가야 한다. 소유의 왕국에서 해방된 사람처럼 그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소유할 수 없다. 여행이란 그러므로 소유와 집착으로부터의 자유로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그 낯선 자유와의 만남이다. 그리고 그는 남의 나라, 그 타자의 고장에 와서 어렵쇼, 어찌된 건가, 거기서 마치 거울 속의 자신을 만나듯 제 나라 자기고장,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여행은 그러나 이런 두 개의 만남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세번째 만남이 있다. 제 나라에 돌아왔을 때 그는 자신이 이미 이전의 자기가 아님을 문득 깨닫는다. 남의 고장에서 제 나라를 발견한 사람은 제 나라에서도 남의 고장을 발견한다. 그에게 가장 익숙하고 친숙한 것들에서 그는 그가 몰랐던 타자의 얼굴을 만나는 것이다. 그는 바뀌어 있다.
 
낯선 나라를 통해 되비쳐오는 제 나라의 얼굴 만나기, 그것이 여행의 한 소득이라면 대학 생활의 가장 자랑할 만한 성과도 나 아닌 것, 타자, 다른 세계들과의 만남을 통해 나를 알고 넓어지는 것이다. 이 자기 확장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자기에게 질문 던질 줄 아는 성찰과 비판의 능력이다. 질문하는 능력의 확장을 보장하기 위해 사회가 대학에 인정하는 높은 특권이 대학의 자유, 학문의 자유다. 그것은 특권이되 모든 기득권을 거부하고 진리의 소유 주장을 심문하는 특권, 정신의 가장 활발하면서도 겸손한, 그리고 겸손해지기 위한 특권이다.
 
 
 
돈은 인간 생활에 중요하다. 그러나 돈 그 자체가 삶의 목적인 것은 아니다. 쾌락 역시 인간의 삶에서 제외될 수 없으나 쾌락 추구만을 목적으로 하는 삶은 위험하고 허망하다. 삶의 목적은 '아름다운 삶'의 영위에 있다. 이해관계와 수지 타산을 떠날 줄 아는 삶, 용도와 유용성을 초월할 줄 아는 삶, 어떤 것을 '소유하기'나 '소유하는 자'를 벗어나 존재 그 자체를 중히 여기는 삶이 아름다운 삶이다. 아름다운 삶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쾌락pleasure이 아니라 즐거운joy이다. 쾌락이 자주 존재의 타락을 강요한다면 즐거움은 존재의 확장을 경험하게 한다. 존재 확장의 경험이 기쁨이라는 것이다.
즐거움과 기쁨을 위한 투자, 그것이 곧 아름다움에 대한 투자이다. 이 투자가 있을 때에만 인간은 즐거움과 기쁨이 있는 삶을 누릴 수 있다. 그 삶을 지향하는 것이 바로 '삶의 질' 높이기이다. 삶의 질은 향락의 수준에 있지 않고 아름다움의 수준에 있다. "정의가 없다면 인간은 수치다"라고 프란츠 카프카는 말했지만, 마찬가지로 아름다움이 없다면 인간존재는 수치일 것이다.
 
 
 
행복의 방정식.

  • 21세기 초 도시 중산층 이상의 한국인을 지배하는 정신 상태는 두 개의 강력한 '코드'에 관통당해 있다. 더 날씬한 은유가 생각나지 않아 좀 투박하게 대놓고 말하자면, 하나는 '탐욕의 코드'이고 또하나는 '선망의 코드'이다.
  • 탐욕의 코드는 폴 새뮤얼슨이 말한 자본주의적 '행복 방정식'을 따른다. 이 경제학자가 소개한 계산법에 의하면 행복(H)은 욕망(D) 분의 소비(C)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얼마만큼 소비했는가"가 나의 행복을 결정한다. 소비를 소유로 바꿔놓으면 이해하기 쉽다.
  • 선망의 코드는 "저 자는 갖고 있는데 나는 없어, 이건 안되지, 암 안 될 일이고말고"라고 사람들을 들쑤셔 견딜 수 없게 만드는 전염성 질투의 부호다. 저 사람이 갖고 있는 것은 나도 가져야 한다. 내가 저 인간만큼 갖지 못한다면 나는 불행하다. 내가 가질 행복을 저 자가 갖고 있네그랴? 저런 도둑놈, 내 행복을 훔쳐가다니, 화가 치미는 바로 그 순간에 질투의 여신이 나타나 행복에 이르는 길을 확인시켜준다. 저 자가 가진 것은 너도 가져라, 뺏고 훔쳐서라도. 그러면 행복은 네것이다. 아니, 너는 저 자가 가진 것 이상으로 가져야 해.
  • 탐욕과 선망의 부호가 행복 방정식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일찌감치 알려준 것은 석가모니다. 욕망의 크기는 무한해서 그것을 충족시킬 방도가 없다는 것, 그것을 알게 된 것이 붓다의 '깨침' 가운데 하나다. 욕망은 일정량의 크기로 묶이지 않는다. 100을 바라던 욕망은 그 100을 소유하는 순간 200으로 불어나고, 200을 갖는 순간 300으로 커져 달아난다. 욕망의 크기를 정할 수 없기 때문에 소유를 키우는 방법으로 행복에 도달한다는 것은 신기루 잡기다. 그러므로 욕망의 크기를 줄여라. 그것만이 평온에 이르는 길이다. 욕망이 제로일 때는 제로의 소유만으로도 너는 행복하다. 재갈을 물릴 수 없는 무한 욕망이 탐욕이다. 그 탐이 충족되지 않아 너를 화나게 하고 질투하게 하는 것이 '진, 분노'이며 이 간단한 진리를 모르는 것이 '치, 어리석음'다. 그러므로 욕망을 다스려라, 줄여라, 끊어라, 그리고 평화로워라, 친구여.
  • 만약 행복의 추구가 불행의 완벽한 제거와 고통의 완벽한 회피에 목표를 둔다면 그 목표는 달성 불가능할 뿐 아니라 그 자체가 고통의 기원이 된다. 완벽한 행복의 추구란 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이미 삶의 진실이 아니며, 인간 사회의 도덕적 이상도 아니다.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법을 열심히 찾아 헤매야 하는 사회는 행복한 사회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절망의 사회다.

 
 
우파니샤드에 벼락신의 언어. '다다다', 첫번째 '다' 소리는 '다미아타'의 다로 "너를 다스리라"는 의미다. 두번째 '다'는 '다타'의 다로 "주어라"를 의미한다. 세번째 '다'는 '다야디암'의 첫 소리이며 의미는 "자비로워야한다"이다.
 
 
스승이란 누구인가? 세상에 대한 바른 관점을 유지하고자 노력하고 그런 노력의 소중함을 가르치는 자, 경험과 지식과 상상력을 부단히 용접하고 관용의 정신을 유지하면서도 진실 앞에 자신을 세우려는 자, 좁은 이해관계의 울타리를 넘어서려는 공정한 정신의 소유자, 인간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것에의 감각을 전달하는 자. 그가 지식행상 아닌 '스승'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오늘날 인문학에 안겨지는 사회적 책임은 강단 인문학적 작업과는 다르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사유와 실천으로서의 인문학이 중시해야 할 네 가지 책임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인간에 대한 인간의 책임, 사회에 대한 인간의 책임, 역사에 대한 인간의 책임, 문명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환기시키는 일이 그것이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다 해서 화내지 않으니 군자답지 않은가 (논어 1장 3절)
남이 알아주지 않으면 불같이 화내고, 남의 눈을 잡기 위해 조석으로 안달하다가 안 되면 저주를 퍼붓는 사람들, 그게 '우리'다.  그 우리는 행복하지 않고 행복할 수가 없다. 행복이 전적으로 남들의 시선 여하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인문학 관계의 건축술
빵과 의미는 삶을 지탱하는 두 기둥이다. 빵이 삶의 바깥쪽을 버텨낸다면 의미는 삶의 안쪽을 지키고 지탱한다. 삶이 무의미해질 때 사람들은 시들시들 병들고 미치고 자살한다. 이 세계로부터 의미가 빠져나갈 때일수록 인간은 제 손으로 의미를 만들고 삶에 의미를 공급해야 할 책임 앞에 놓인다. 이 의미 공급 작업에 절대적 요청이 "나는 왜 여기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이것이 그 무용해 보이는 인문학적 질문의 '위대한 실용'이다. 나는 나 혼자 '나'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너'와의 관계속에, 그리고 '남'들과의 관계 속에 존재하고 그 관계 덕분에 내가 된다. 그 관계를 떠나면 나는 무의미하다.
 
 
우리가 이 지상에 태어나는 것은 우리 자신이 결정한 사항도, 선택한 사안도 아니다. 그러나 그 사실 때문에 삶에 대한 나의 책임, 당신의 책임, 우리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나의 탄생은 내가 결정한 바 없고 선택한 바 없는 일이지만, 그러나 탄생 이후의 우리 삶은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사건이다. 이것이 인간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생각하는 게 인문학적 사유의 첫번째 과제라는 말의 의미다.
 
 
 
인간은 무엇보다 자기 존재의 이유를 생각하는 동물이며 자기 삶의 의미와 가치와 목적을 확보하고자 하는 동물이다. 이것이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가장 중요한 기본 조건이다. 내 존재의 정당성("나는 왜 없지 않고 있는가?"), 내 삶의 문법("나는 어떤 삶을 살고자 하는가?")
 
 
 
인간은 인간을 발명해온 동물이다. 참이라는 가치를 추구하다가 인간은 과학자를 발명했고 선이라는 가치를 추구하다가 철학자를 발명했으며 아름다움을 추구하다가 시인을 발명하고 예술가를 발명했다. 생명이라는 가치를 위해 인간은 의사를 발명했고 지금도 발명하고 있다. 인간은 사랑과 우정이라는 가치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기도 하는 인간을 자유, 정의, 평등 같은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 목숨도 내던지는 인간을 발명했다. 지금도 발명은 계속되고 있다.
 
 
 
인간이 추구해온 중요한 가치들 : 자유와 평등, 진리와 정의, 사랑과 우정, 공존과 상생, 배려와 보살핌, 생명 존중과 평화 애호 등등
 
 
 
우리 시대를 괴롭히는 국지적 세계적 문제들 : 빈부 격차의 극단적 심화, 생태계 파괴, 넘쳐나는 쓰레기, 자원 고갈, 시장에 의한 사회 접수, 핵에너지의 위험성과 에너지 부족 문제, 노령화, 테러, 기후변화, 정보-지식의 왜곡과 조작, 과학과 윤리의 충돌, 말기 자본주의의 역기능, 민주주의의 위기 등
 
 
 
자기 성찰적 질문들을 던지고 그 질문들과 대면하는 일, 거기서부터 문제 해결의 작업은 시작된다. "나는 어떤 인간이 되고자 하는가?"(나의 형성과 발명), "나는 어떤 삶을 살고자 하는가?"(내 삶의 발명), "나는 어떤 사회에 살고 싶어하는가?"(가치 추구와 발명) - 이런 질문들은 우리를 성장하게 하고 성숙하게 한다. 성숙이란 결국 무엇인가? 인간, 사회, 자연, 문명, 역사에 대한 나의 책임을 망각하지 않는 능력의 형성, 그것이 성숙이다.
 
 
 
사회를 지탱하는 데 필요한 가치를 옹호하는 일은 인문학의 몫이며, 공공의 가치, 평화, 관용, 선의, 아름다움 같은 것에 대한 존중의 능력을 일깨우고 비판 정신과 대안적 상상력을 키우는 일도 인문학의 작업이다. 공동체 유지에 필요한 시민 덕목의 학문적 바탕을 다지는 것 역시 인문학이다. 이 시점에서 인문학의 위축은 그 차제로 사회적 위기다.
 
 
 
인간의 유한성의 프레임에 갇혀 있기 때문에 모든 일들에 같은 양의 시간을 투입하거나 동일한 중요성을 둘 수가 없다. 그는 가치 있는 일, 중요한 일들과 그렇지 않은 일들을 분별하면서 자신의 유한한 시간을 배분해야 한다. 중요한 일들 중에서 세상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동의할 만한 세 가지 '큰일'을 고른다면 무엇일까? 첫째는 의미없는 곳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 둘째는 희망 없는 곳에 희망을 주입하는 일, 셋째는 정의가 없는 곳에 정의를 세우는 일이다.
이들 큰일의 첫번째 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무의미성의 도전'에 대한 대응이고, 두번째 것은 '지옥의 조건에 대한 거부'이며 세번째 것은 '야만에 대한 저항'이다. 의미, 희망, 정의는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세 개의 지주와도 같다.
 
 
 
정치가 해야 할 일은 자연의 위대한 원리처럼, 사회의 가장 낮고 그늘진 곳, 빼앗기고 궁핍한 곳, 내팽개쳐지고 억눌리고 무시된 곳에 소생과 부활의 봄을 가져다 주어야 한다. 자연의 사계는 제각각의 소리와 색깔과 동작을 갖고 있다. 여름은 자라는 것들의 소리와 윤기를, 가을은 익어가는 것들의 색채와 자세를, 겨울은 다시 기다리기 위해 근본으로 드는 것들의 멈추어버린 듯한 호흡과 낮은 엎드림의 몸짓을 갖고 있다. 봄은 새로 깨어나는 것들의 소리와 움직임과 색깔로 가득하다. 긴 잠에서 깬 개구리들의 하품 소리, 곰들의 기지개, 터져나오는 싹들의 여린 녹색이 봄의 무대를 장식한다. 여름이 성장의 드라마이고 가을이 성숙의 서사, 겨울이 기다림의 형식이라면 봄은 단연 소생과 부활의 장르다.
 
 
 
인간은 기억과 망각의 균형 속에서 그의 현재를 관리하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 이것이 기억과 망각의 변증법이다. 양자 균형이 깨질 때 인간은 기억의 노예가 되거나 유쾌한 망각의 바보가 된다. "잊지 마라"라는 기억 명령은 과거의 신성화와 신비화를 위한 명령일 때에는 죽음을 동반할 수 있다. 그러나 기억은 과거를 섬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 봉사하기 위한 것이다. 망각도 그러하다. 비판력이 마비될 때 망각은 죽음의 책략이 된다. 그러나 기억과 마찬가지로 망각도 건강한 현재를 위해 필요하며, 이 경우에만 망각은 유용성을 갖는다.
 
 
 
"도덕의 나침반을 잃으면 우리가 지금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알 수 없게 된다" - 조지 워싱턴
 
 
 
요즘 한국의 대학생들에게 '원칙과 방향에 대한 질문'은 없다고 한다. 그들의 머리에는 한 달에 얼마 벌고 얼마를 쓰느냐, 어디 부동산을 언제 어떻게 살 것이냐는 생각만 꽉 차 있고 손익의 대차대조표만 중요할 뿐 삶을 이끌 원칙과 가치의 화살표 같은 것은 아예 없다고 한다. 나는 이런 소문들을 믿지 않는다. 나는 우리의 젊은 세대가 자기 혼자만 생각하는 좁좁한 울타리, 개구리 우물, 작은 세계의 수인들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과거의 어떤 세대와도 다른, 어쩌면 단군 이래 최고의 개인주의적 편향을 가진 세대일지는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개인주의가 공동체와 정의, 공존과 연민의 윤리를 완벽하게 시궁창으로 내던진 몰가치의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어려운 선택의 시대 속으로 내몰리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우리는 도대체 어떤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가"라는 질문, "어떤 사회가 좋은 사회인가"라는 질문을 그들의 모든 중요한 선택과 행위의 배경에 깔 줄 아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하버드 대학 졸업식의 로런스 서머스 총장의 축사
"나는 하버드 4년이 여러분들에게 편안한 안락지대 바깥에서 생각할 줄 아는 능력, 생각의 힘을 인정하며 바른 논리와 사유에 입각한 토론으로 세계를 바꾸어나갈 능력, 다수가 틀렸을 때에는 그 다수에 외로이 맞설줄 아는 능력을 길러주었기를 희망한다"
하버드가 길러내고자 하는 것은 생각할 줄 아는 사람, 생각의 창조자, 생각의 실천자이다.
"이치에 맞는 것들을 위해 일어서고 부당한 것들에 맞서며 남들이 싫어할 소리를 마다하지 않는 불편도 감내하라. 그대들을 불안하게 하는 사람들의 말도 존경하고 경청하라. 우리 대학 졸업생들은 창조자로서, 생각의 실천자들로서만 이 세계에서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이다."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0778915
 

반응형
Posted by 소요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