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공기를 그리는 사람입니다. 예전에는 복잡한 그림을 그리려고 애썼지만, 이젠 여백을 많이 남기면서 단순하게 표현합니다. 고수의 동작은 단순해야 해요. 솜씨를 죽일 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고수입니다." - 수묵화가 김호득의 한 언론 인터뷰 中
여백과 단순함, 힘을 빼고 솜씨를 죽일 줄 아는 삶의 이치는 글을 쓸 때도, 그림을 그릴 때도, 심지어 운동을 배우기 시작할 때 종종 듣는 "힘을 빼세요!" 까지 이어진다.
<논어, 위정편>의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말씀처럼 마음이 하는대로 행동해도 세상 법도에 어긋남이 없는 삶일까?
[본문 발췌]
문장을 쓰고 매만지는 과정에서 말에 언품言品이 있듯 글에는 문격文格이 있음을 깨닫는다. 사전을 찾아보면 '격格'은 '주위 환경이나 형편에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분수나 품위'다. 세상 모든 것에는 나름의 격이 있다. 격은 혼자서 인위적으로 쌓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삶의 흐름과 관계 속에서 자연스레 다듬어지는 것이다. 문장도 매한가지다. 품격 있는 문장은 제 깊이와 크기를 함부로 뽐내지 않는다. 그저 흐르는 세월에 실려 글을 읽는 사람의 삶 속으로 퍼져나가거나 돌고돌아 글을 쓴 사람의 삶으로 다시 배어들면서 스스로 깊어지고 또 넓어진다.
'기억'과 어울리는 동사는 '잊다'가 아니라 '접다'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레 잊히는 기억이 있지만, 사랑과 이별로 얼룩진 기억만큼은 종이학처럼 곱게 접힌 채 마음 속 한구석에 보관되니 말이다.
타인이라는 객체가 존재하지 않으면 '나'라는 주체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남이 있으므로 내가 존재하고, 내가 존재하기에 남이 있는 것이다.
한자 '욕慾'을 쪼개보면 욕심의 본질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골짜기 곡谷, 하품 흠欠, 마음 심心으로 이루어진 형태다. 본래 '흠欠'은 갑골문에서 입을 크게 벌리는 모습을 나타냈는데 훗날 의미가 확장되면서 '마시다', '노래하다' 같은 뜻을 지니게 됐다. 깊은 골자기처럼谷 입을 크게 벌려欠 끊임없이 목구멍에 집어넣으려는 마음心이 바로 욕심이다.
고유한 리듬을 타며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건, 세월의 흐름 속에서 자기만의 방식과 박자로 적절히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은 똑같은 풍경 앞에서 저마다 다른 것을 보고 다른 감정을 느낀다. 눈으로 스며든 하나의 풍경은 각자가 지닌 선입견이나 기분과 맞물려 머리와 가슴에서 순식간에 다른 정경과 상황으로 변모한다. 자연의 풍광처럼 눈에 보이는 것만 그런 건 아닐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무수한 갈등과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진실이야말로 그렇지 않을까. 우린 진실이라는 커다란 거울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을 각자 유리한 입장에서 바라본 뒤 "내가 진실을 알고 있어"라고 힘주어 말하곤 한다. 깨지기 전 온전한 상태의 거울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면서 말이다.
글도 그림도 힘을 빼고 여백을 만들어야 지면과 화폭에서 불필요한 요소를 밖으로 밀어내고 본질에 집중할 수 있다. 어쩌면 글쓰기의 가장 본질적인 재료는 문장이 아니라 여백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문장을 다 채우기보다 적절하게 비워내고 그 비움의 파편들을 모아서 크기와 높이를 쉽게 가늠할 수 없는 여백의 공간을 지을 때, 문장과 문장 사이로 햇빛과 바람을 불러들일 수 있고 글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다.
잡념으로 뒤엉킨 머릿속을 비우고 생각의 속도를 늦추는 데 산책만큼 좋은 것도 없다. 산책은 외부의 풍경뿐 아니라 내부의 풍경, 즉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산책은 보행을 통해 이뤄진다.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며 하얗게 부서지는 햇살을 몸에 바르고 뺨을 스치는 바람의 결을 음미하다 보면 평소보다 시간이 더디게 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시간을 천천히 흘려 보내면 내 안과 밖에서 일어나느 것을 두루 살필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그러면 어느새 내면의 소용돌이도 잦아든다. 잔잔해진 마음 위에 '생각의 집'을 쌓아 올리는 과정에서 새롭고 신선한 생각이 움트기도 한다. 웹페이지를 최신 버전으로 업데이트하기 위해 누르는 '새로고침refresh'처럼 말이다.
우린 종종 별것도 아닌 일을 어렵게 바라보면서 사안의 본질과 멀어진다. 실타래처럼 엉킨 삶의 문제를 이리 당기고 저리 당기면서 외려 더 엉키게 만들어버린다. 뒤엉킨 실뭉치를 풀기 위해선 실이 맨 처음 꼬이기 시작한 지점을 정교하게 찾아내야 한다. 문제의 근원을 파고들어야 한다. 불필요한 것을 솎아내고 본질에 집중하기 위해 우린 질문을 던진다. 질문質問에서 '질質'은 '본질'과 '성질'을 의미하는데, 도끼斤로 조개貝를 자르거나 나무를 팰 때 아래에 두는 밑받침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따라서 질문은 사물과 현상의 본바탕, 즉 근원根源을 묻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근원은 곧 수원水源이다. 흐르는 물줄기가 처음 시작한 곳이다. 그래서일까. 밀도 있는 질문은 깊고 너른 생각을 끌어내는 마중물 역할을 한다. '왜?'라는 질문을 머릿속에 떨구는 순간 우리 안의 깊은 곳에 생각의 씨앗이 심어진다. 새롭게 움튼 생각이 호기심을 먹고 튼실하게 자라면 사고의 폭과 깊이는 자연스레 확장된다.
말수가 적음을 뜻하는 한자 '눌訥'은 말하는 사람의 안內에서 말言이 머뭇거리는 것을 가리키는데, 이는 신중하게 말하는 자세를 뜻하기도 한다. 글쓰기에서도 때론 머뭇거림이 필요하다. 쓰고 싶은 욕망을 억눌러 문장에 제동을 걸 줄도 알아야 한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달필達筆의 능력이 아니라 눌필訥筆의 품격이 아닐까?
글쓴이의 감정에 떠밀려 정확성과 객관성이 찬밥 신세로 전락한 글은, 독자 입장에선 먼지 낀 거울처럼 흐리터분하고 모호하게 느껴질 수 있다. 초고를 에워싼 불필요한 포장지, 예컨대 과잉 감정 따위를 퇴고 과정에서 벗겨내야 한다. 그래야 연필을 깎아 흑심을 드러내듯, 모호함을 걷어내 글에 담은 메시지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도 가능하다.
지향점은 본디 과거가 아니라 미래의 문제다. 지향점이 어딘가에 따라 걸음을 옮기는 방법과 속도와 리듬이 달라진다. 무엇보다, 지향점이 명확하면 나아갈 힘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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