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몇 살 터울 회사 선배가 심장마비로, 그리고 대학동기가 암투병 중에 유명을 달리했다. 태어나는 순서는 있지만 죽음에 순서는 없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너무도 허망하고 이른 죽음이란 생각에 가슴이 먹먹하다.

 

"시간과 죽음 앞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말이 새삼 다가온다. 그러나 "죽음은 삶의 반대가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처럼 두려워하고 벗어나려고 한다고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삶의 일부로서 잘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닐까?

 

 

죽음(死, 入沒) [명사] 죽는 일. 생물의 생명이 없어지는 현상을 이른다.

[비슷한말] 불귀, 사멸, 절명, 사망, 입적, 종신, 하직, 하세, 끝장

[반댓말] 삶

[속담]

죽음에는 편작(扁鵲)도 할 수 없다. 천하의 명의라도 죽는 사람은 어찌할 수 없다는 뜻으로, 죽음에 대하여 사람이 무력함을 이르는 말.

죽음에 들어 노소가 없다. 늙은이나 젊은이나 죽는 것은 매한가지라는 말.

죽음은 급살이 제일이라. 죽음을 당할 바에는 질질 끄는 것보다 빨리 죽는 것이 고통이 적어 좋다는 말.

 

(네이버 영어사전) death; (완곡한 표현) passing

죽음을 맞다, meet one's death

 

 

[글과 책 속에 쓰인 '죽음'에 대한 다양한 표현들]

 

 

도정일,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사람은 누구나 한 번 죽지만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새털보다 가볍다" - 사마천 '보임안서'

 

 

법정 스님,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삶의 배후에 죽음이 받쳐 주고 있기 때문에 삶이 빛날 수 있다. 우리는 순간순간 죽어 가면서 다시 태어난다.

우리 모두는 늙는다. 그리고 언젠가 자기 차례가 오면 죽는다. 그렇지만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늙음이나 죽음이 아니다. 녹슨 삶을 두려워해야 한다. 삶이 녹슬면 모든 것이 허물어진다.

 

 

오마에 겐이치, <난문쾌답>

후회 없는 인생.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 "괜찮은 인생이었다"하고 말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해두자. 그러면 인생이 단순해지고 고민 없이 편하게 잠을 이룰 수 있다.

 

 

정유정, <히말라야 환상 방황>

'어린 아이가 삶을 배워가는 존재라면 어른은 죽음을 배워가는 존재다.' - 스티븐 킹의 어느 소설...

 

 

파울로 코엘료, <흐르는 강물처럼>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사는 동안 쓸데없는 일들을 걱정하고, 일을 미루고, 중요한 순간들을 인식하지 못한 채 스쳐지나간다. 위험을 감수하려 하지 않고, 늘 푸념하면서도 막상 행동하기는 두려워한다. 모든 것이 달라지길 바라면서도 스스로는 변화하려들지 않는다.

 

죽음에 대해 조금만 더 생각한다면, 오랫동안 미뤄온 전화 통화를 더는 미루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 삶은 지금보다는 좀더 활기를 띠게 될 것이고, 육신의 종말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어차피 일어날 일을 두려워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

 

인디언들은 이렇게 말한다. '세상을 떠나기에 특별히 좋은 날은 없다.' 한 현자는 이렇게 말했다. '죽음은 언제나 당신 곁에 있다. 그리고 당신이 무언가 중요한 일을 할 때 필요한 힘과 용기를 주는 것은 바로 그 죽음이다.'

 

나는 그 경지에 이르기를 바란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어리석다. 우리 모두 이르든 늦든 언젠가 죽는다. 그리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자만이 삶 앞에 준비된 자이다.

 

 

앙드레 말로, <인간의 조건>

고통이란 그것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을 때에만 의미가 있는 법이야. 그런데 대개 고통은 죽음으로 끝나거든. ...

 

그렇군요. 하지만 그것은 아마 남자들의 생각이겠죠. 나로서는, 말하자면 한 여자로서는 고통이란 - 좀 이상하지만 - 죽음보다는 삶을 생각하게 하거든요. 아마 여자는 애를 낳기 때문이지.....

 

인간의 본질은 고뇌이고, 자기 자신의 숙명에 대한 인식이며, 거기서 모든 공포가 생긴다는 거야. 죽음의 공포까지도.... 사람은 항상 자기 자신 속에서 공포를 발견하는 거야. 그것은 자기 마음속을 좀 깊숙이 살펴보면 알 수 있어. 다행히 사람은 행동할 수 있거든...

 

 

사라 베이크웰, <어떻게 살 것인가?>

죽는다는 것은 죽음과 맞서는 것이 아니다. 죽음에 이르기 전에 이미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기 때문에 죽음은 잠든 것처럼 어디론가 떠내려가는 것이다. 죽음은 대비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다. 그것은 목표 없는 몽상이다. 어떻게 죽어야 할지 모르더라도 걱정하지 마라. 그때가 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자연이 소상하게 그리고 완별하게 일러줄 것이다. 자연이 그 일을 완벽하게 처리할 테니 그 문제로 고민하지 마라.

 

인생은 순식간에 흘러가버린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려고 소란을 피우지 않고 조용히 미끄러지듯 흘러간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 인생이 시간을 재촉하며 흘러가고 있어도 다른 일에 몰두하고 있으면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다. 죽음이 다가왔을 때 나 자신을 죽음에게 내어주는 수 밖에 도리가 없다.

죽음에서 벗어나라. 인생은 다른 사람의 의지에 좌우되지만, 죽음은 자신의 의지에 달려있다.

 

'철학자의 일생은 죽음을 명상하는 것' - 키케로

 

'죽음은 인생의 끝일 뿐 목적이 될 수 없다', '인생은 그 자체의 목표이자 목적이 되어야 한다' - 몽테뉴

 

 

사라토리 하루히코, <니체의 말>

인생은 그리 길지 않다. 어스름해질 무렵 죽음이 찾아와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때문에 우리가 무엇인가를 시작할 기회는 늘 지금 이 순간 밖에 없다. 그리고 이 한정된 시간 속에서 무언가를 하는 이상, 불필요한 것들을 벗어나 말끔히 털어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무엇을 버릴 것인가에 대하여 고민할 필요는 없다. 마치 노랗게 변한 잎이 나무에서 떨어져 사라지듯이, 당신이 열심히 행동하는 동안 불필요한 것은 저절로 멀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의 몸은 더욱 가벼워지고 목표한 높은 곳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 즐거운 지식

 

 

법륜 스님, <인생수업>

우리가 나이 들어가면서 후회하고, 만족하지 못하고, 불행한 것은 세상에서 추구하는 가치에 휘둘려 자기 중심을 잡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좋은 대학에 가야 하고,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하고, 더 높은 지위에 올라야 하고, 더 널리 이름을 알려야 하고... 숱한 욕망에 사로잡혀 인생을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오늘을 허투루 보내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을 돌아보세요. 죽음의 순간은 언제 올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오늘 최선을 다해야 하고, 그 마음을 잃지 않아야 내일 죽어도 후회 없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추구하는 성공과 상관없이 스스로 만족하는 삶을 살아갈 때 그것이 바로 좋은 인생입니다. 늘 오늘의 삶이 만족스러우면 그게 곧 행복한 인생이지요.

 

우리는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오늘 하루를 허투로 보내지만 죽음의 순간은 언제 올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오늘을 마지막처럼 최선을 다하다 보면 내일 죽어도 후회 없는 인생을 살 수가 있습니다.

인생이란 게 오래 살고 싶다고 오래 사는 것도 아니고, 오래 사는 게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하루를 살더라도 마음 편하게 살다 죽는 게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오래 살겠다는 집착을 놓아버리면, 몸과 마음이 가벼워져 오히려 더 오래 사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바다에 가면 파도를 볼 수 있습니다. 파도가 일어나고 사라지고 또 일어나고 사라지지요. 그런데 바다 전체를 보면 파도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만 물이 출렁거릴 뿐입니다. 바다 전체를 보듯이 인생을 관조하면 삶도 없고 죽음도 없습니다. 그러나 파도 하나하나를 보면 분명히 파도가 생기고 사라지듯이 인생도 언뜻 보면 생하고 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실재가 아닌 인식의 문제일 뿐입니다. ...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생멸의 관점을 갖고 세상을 보기 때문에 생겼다고 기뻐하고 사라졌다고 슬퍼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을 전체로 보면 변화일 뿐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불생불멸'이라고 합니다. 즉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사라지는 것도 아닌 변화할 뿐이라는 거예요. ... 실재하는 건 변화뿐인데, 보이면 살았다고 하고, 안 보이면 죽었다고 하고, 안 보이다 보이면 태어났다고 하는 겁니다. ...변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 변하는 것을 봤을 때 괴로움이 생기지 않습니다. 마치 바다에서 파도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생성되어 존재하는 모든 것은 반드시 소멸한다는 걸 깨쳐서 집착을 놓아버리면, 생겨난다고 기뻐할 일도 없고 사라진다고 괴로워할 일도 없어집니다. 그것을 직시하면 두려움도 아쉬움도 없을 텐데, 부분적으로 인식하니까 없어졌다고 생각해서 아쉬움이 생기고, 없어질까봐 두려움이 생기는 겁니다. 그러나 늙음도 죽음도 단지 변화일뿐임을 알고 나면,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반딧불이>

죽음은 삶의 반대가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

죽음은 삶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 ... 나는 죽음이라는 것을 삶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독립적인 존재로 파악하고 있었다. 즉 '죽음은 언젠가는 확실히 우리를 자신의 손아귀에 쥐게 된다. 그러나 거꾸로 말하면, 죽음이 우리를 사로잡는 그날까지 우리는 죽음에 붙잡히는 일이 없는 것이다.'

 

 

마크 맨슨, <신경 끄기의 기술>

내가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숙고하는 것. 조금은 멀고 추상적으로 느껴지겠지만,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왜냐하면 자신의 죽음을 깊이 숙고해본 뒤에야 비로소 다른 모든 가치를 올바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죽음은 인생의 의미가 만들어내는 그림자를 측정할 수 있게 해주는 빛이다. 죽음이 없다면, 우리는 모든 걸 하찮게 느낄 것이며, 모든 경험을 제멋대로 판단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기준과 가치가 갑자기 무의미해질 것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삶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된다. 삶을 충실히 사는 사람은 언제든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 - 마크 트웨인

 

죽음은 우리에게 훨씬 더 고통스럽고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나는 무엇을 남길 것인가?

 

 

류콴홍, <철학우화>

모든 사람에게 죽음은 자기 자신의 일일 뿐이며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고, 다른 사람에게 전해줄 수도 없어요. 사람이 죽음을 이해하게 되면 스스로 사람들과 구별되어 자기 존재의 의미, 즉 고독의 존재를 진정으로 깨닫게 됩니다.

 

인간 세상에서 가장 공평한 일은 죽음뿐이다. 청춘의 소년, 소녀에게나 병약한 할아버지, 할머니에게나, 부자에게나 거리의 거지에게나, 대통령에게나 일반 백성에게나 죽음은 맑은 하늘에 날아든 검은 구름처럼 불현듯 찾아옵니다.

 

햄릿...'살찐 국왕이나 비쩍 마른 거지나 구더기의 식탁 위 두 가지 식사에 불과하거늘. 국왕은 죽었고 땅속으로 들어갔다. 구더기에 먹혀 그들의 뱃속으로 들어가겠지. 거지는 다시 그 구더기를 잡아다 낚시를 할 테고, 잡은 물고기는 다시 거지의 뱃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결국 국왕은 거지의 뱃속으로 마지막 행차를 하는 것이 아닌가. 죽음 앞에서 누군들 다른 사람과 다를 수 있겠는가? 죽음 앞에서 대체 생명의 의미란 무엇인가?'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삶은 아름답지만 우리는 반드시 죽음과 대면해야 해요. 이는 매우 잔인한 일이에요. 죽음은 우리 삶에 대해 걱정하게 해요. 물론 이런 걱정은 우리 자신의 생활을 반성하게 하지요. 이런 걱정에서 벗어나려면 인류는 항상 생명의 의의에 대해 연구해야 해요. 인생은 마치 쏘아놓은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가요. 어쩌면 이런 인생의 유한성과 급박함 때문에 인류는 무한하고 영원한 것을 갈구하며, 현실의 생활을 더 소중히 여기게 됐는지도 몰라요.

모든 사람에게 삶은 한 번 뿐이며 뒤늦게 후회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어요. 어떻게 자신의 삶에 충실할 것인가? 이는 모두가 심사숙고해야 할 문제예요. 그렇지 못할 경우 이 단 한번의 기회를 놓치고 말테니까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철학을 연구하는 것을 죽음의 연습이라고 보았어요. 독일의 실존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의 존재는 죽음을 향해 사는 것이라고 주장했지요. 실존철학을 체계적으로 전개한 또 다른 독일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는 철학을 공부하는 것은 죽음을 공부하는 것이라고 말했답니다.

 

죽음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생각과 말...

  • 죽음에는 두 가지 상황이 있네. 첫 번째, 죽음이란 꿈을 꾸지 않을 뿐 긴 잠에 드는 것으로 이는 매우 얻기 힘든 기회일세. 두 번째, 죽음이란 앞선 선인들이 사는 세계로 떠나는 것이라네. 그러니 나는 죽으면 이 세계를 찾아가 수많은 현철(현명하고 재주와 지혜가 뛰어나며 사려 깊은 사람)을 만나게 되겠지.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 영혼과 육체가 이 세상에 함께 살 때 인간은 병이 들어 있는 것과 같지만 육체의 죽음을 통해 영혼은 치유를 얻게 된다. 우리의 인생이 죽음을 준비하고 연습하는 과정... 죽음은 비록 육체를 가져가지만 우리의 영혼은 세상의 근심과 수많은 욕망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이다.

  • "자네들이 땅에 묻는 건 그저 나의 육체일 뿐일세. 앞으로는 예전처럼 자네들이 알던 가장 선한 방식으로 생활하게나. 사실 깨달음만 얻는다면 죽음은 하나도 두려운 게 아니라네."

장자는 삶과 죽음을 하나의 꿈에 비유했지요.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다니고 있었다. 마음대로 이곳저곳을 날던 그는 어느 순간 장주가 되어 있는 게 아닌가. 과연 장주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꾼 것일까? 아니면 나비가 장주가 되는 꿈을 꾼 것일까/ 장주와 나비가 분간이 되지 않으니 이것이야말로 물화(物化)가 아닌가." 장자는 이 이야기를 통해 삶과 죽음 사이에 특별한 경계가 없음을 알려주려 했어요. 장자는 삶과 죽음 모두 한낱 꿈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어요. 장자는 자연의 입장에서 죽음을 보았고, 삶과 죽음은 변화의 과정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지요. 인간에게 기가 없던 상태에서 기가 생기고, 형태가 없던 것에서 형태가 생기고, 생명이 없던 것에서 생명이 생기고, 또 생명에서 죽음이 생겨나는 이런 변화는 사계절의 변화와 같은 것이에요.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는 것처럼 말이지요. 이런 변화에 대해 우리는 기쁘게 순응하고 받아들여야 하며, 슬퍼할 필요가 없어요.

 

인간은 넓은 우주 속에서 기(氣)의 운동이 변화하는 것으로 스스로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해요. 더욱이 어느 한 곳에서 영원히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지요. 사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이런 변화에 순응하는 것이에요. 삶은 그 삶에 순응하고, 죽음은 그 죽음에 순응하는 것이지요. 죽음은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일상적인 생활 가운데 하나에 불과해요.

 

차라투스트라는 산봉우리에 올라 눈부시게 빛나는 태양을 향해 물었다. "태양이여, 태양이여! 만약 당신이 인류를 비추지 않는다면 그 위대함은 어디에서 오겠는가? 만약 당신이 따뜻하게 대지를 감싸지 않는다면 그 빛은 어디에서 오겠는가?"

니체의 초인철학은 그의 독특한 생사관을 결정했어요. "생사를 초월해 인생의 고난을 극복하고, 적극적이고 낙관적인 사람이 되자." 니체는 창조 정신으로 우리의 인생을 충만케 할 때 인생에서 성공할 수 있고, 성공적인 죽음에 이르게 된다고 보았답니다. 우리가 죽음에 이르렀을 때, 우리의 정신과 도덕으로 세계를 노을처럼 널리 비춰줄 수 있다면 우리는 성공적인 죽음을 맞게 되는 것이죠.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죽으며, 죽음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현실이에요. 이는 인간 존재의 유한성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죽음이야말로 인간이 존재할 수 있는 극단인 것이에요.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사람과 시간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어요. 사람은 시간 속에 살고, 시간은 인간 존재의 조건이 됩니다. 인생을 일컬어 '세상에 산다.'라고 하는 것은 '인생이 시간 속에 있다.'는 뜻이지만 죽음은 엄밀히 말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생명이 '끝'나는 것에 불과해요. 사람이 죽으면 그의 육체는 다른 형식으로 변화하기 때문이지요.

 

죽음이란 어찌 보면 하나의 가능성일 뿐 현실성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어차피 죽음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일이니까요. 일단 죽음이 현실이 된다면 인간은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죽음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의 죽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죽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확실한 일입니다. 그러나 언제 어떤 방식으로 죽을 것인지는 모두 불명확합니다. 일상적인 경험으로 판단하자면 우리는 모두 죽지만, 언제 죽을 것인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지요.

 

사람은 죽음 앞에서 비로소 진정한 존재의 고독을 깨닫게 됩니다. 당신의 생명은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으며 스스로 대신해야 하는 것이랍니다. 사실 사람이 살아있을 때 가장 두려워하는 일 중의 하나가 바로 죽음을 직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의 의미를 깨닫고 죽음의 신과 마주하게 되면, 명예와 지위, 재물과 같은 세상의 모든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세상의 모든 것이 '무'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지요. 하이데거는 '죽음을 향해 가는 삶'이란 말로 이 깨달음의 상태를 설명했어요.

 

사람이 본질적인 모습은 바로 인생의 유한성과 독특성이에요. 우리 생명의 시작과 끝은 자신의 선택이 아니지만 짧은 생명이란 과정 속에서 여전히 우리가 힘을 발휘할 공간은 남아 있어요. 그것이 바로 자신의 인생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랍니다.

 

죽음을 수양하는 것은 곧 생명을 수양하기 위함이에요. 또한 죽음을 이해하는 것은 생명을 이해하기 위함이에요. 죽음에 맞서는 것은 우리 생활의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기기 위함이지요. 사람에게 죽음이 있기에 우리는 생명을 더 귀중하게 여길 수 있어요.

 

 

강제윤, <섬을 걷다>

대개 섬에서 사람 사는 마을의 뒤편은 공동묘지다. 볕이 잘 드는 봉분 근처에 자리 잡고 앉는다. 사람은 죽음의 뒷마당에서도 삶의 앞뜰을 생각한다. 죽음 곁에서도 삶은 따뜻하다! 어떠한 삶도 양면이다. 슬픔의 뒷면은 기쁨이고, 상처의 뒷면은 치유다. 실연의 뒷면은 사랑이고, 절망의 뒷면은 희망이다. 어둠의 뒷면은 빛이다.

 

 

권오상, <돈은 어떻게 자라는가>

경제학의 출발점은 '계의 균형 상태'라는 개념에 있다. 만약 금융 시장과 경제계가 균형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미래 예측이 조금은 가망 있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사실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균형 상태라는 것은 죽어 있는 상태다. 복잡계 이론가들에 의하면, 비유기적 대상에서 균형 상태는 관성에 의해 달성되지만, 유기적 대상에서는 오직 그 유기적 대상의 죽음만이 균형 상태를 가져온다. 즉 살아 있는 유기체는 살아 있는 한 영원히 균형 상태를 달성할 수 없다. 따라서 유기체라면 무작위성과 혼돈, 불확실성을 어느 정도는 좋아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른 한편으로, 예측이 의미를 가지려면 원인과 결과 사이의 관계, 즉 인과 관계가 성립돼 있어야 한다. 그런데 경제학은 이러한 인과 관계를 밝히기보다는 상관관계를 다룬다. 그리고 상관관계를 가지고 인과 관계를 다룰 수 있다고 주장하곤 한다.

 

 

법정 스님, <산에는 꽃이 피네>

우리 모두가 늙는다. 그리고 언젠가 자기 차례가 오면 죽는다. 그렇지만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늙음이나 죽음이 아니다. 녹슨 삶을 두려워해야 한다. 삶이 녹슬면 모든 것이 허물어진다. 우리가 순간순간 산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순간순간 죽어간다는 소식이다. 죽음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녹스는 삶을 두려워해야 한다. 단순한 삶을 이루려면 더러는 홀로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사람은 홀로 있을 때 단순해지고 순수해진다. 이때 명상의 문이 열린다.

 

임제 선사는 또 말한다. '바로 지금이지 다시 시절은 없다.卽時現金 更無時節' 지금이 바로 그때이지 다른 시절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의 삶과 죽음이 지금 이 자리에서 이렇게 전개되고 있다. 어떤 사람이 불안과 슬픔에 빠져 있다면, 그는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시간에 아직도 매달려 있는 것이다. 또 누가 미래를 두려워하면서 잠 못 이룬다면, 그는 아직 오지도 않은 시간을 가불해서 쓰고 있는 것이다. 과거는 강물처럼 이미 지나가 버렸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과거나 미래 쪽에 한눈을 팔면 현재의 삶이 소멸해 버린다. 보다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 항상 현재일 뿐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다면, 여기에는 삶과 죽음의 두려움도 발 붙일 수 없다. 저마다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자기 자신답게 살라!

 

 

가오싱 젠, <영혼의 산>

선율보다 더 고상하고, 어법과 문법의 한계 너머에 있고 주어와 술어 사이의 구별이 없는, 인칭을 초월하고 논리를 깨뜨리며 느낌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미지에도, 비유에도, 생각들의 연상이나 상징에도 의존하지 않는, 순수하고, 맑고, 음악적이고, 파괴될 수 없는 언어를 어떻게 하면 찾을 수 있을까? 사람의 고통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슬픔과 기쁨을, 고독과 위안을, 난처함과 기대를, 망설임과 결단을, 약함과 용기를, 질투와 후회를, 평온함을, 초조와 자신감을, 관대함과 옹졸함을, 자비와 증오를, 연민과 실의를, 담백함과 평화를, 비열함과 악의를, 고귀함과 악독함을, 연민과 실의를, 담백함과 평화를, 비열함과 악의를, 고귀함과 악독함을, 잔혹함과 선량함을, 열정과 냉담을, 동요하지 않음을, 솔직함과 무례함을, 허영과 탐욕을, 멸시와 존경을, 자만과 의심을, 겸손과 거만을, 고집과 분개를, 노함과 치욕을, 회의와 경악을, 권태와 혼미와 갑작스런 깨달음을, 그리고 끝내는 다시 모호해지고 아무리 명백히 하려 해도 명백해지지 않는, 이 모든 것으로 인한 출발을 완전히 표현할 수 있을 그런 언어를?

 

 

최인철, <굿 라이프>

굿 라이프는 의미가 가득한 삶이다. 의미는 우리 삶에 질서를 부여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해준다. 의미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연결시켜주는 접착제 역할을 하며, 죽음의 공포라고 하는 가장 본질적인 존재론적 문제를 해결해주는 역할을 한다. 심리학자 에릭 클링거(Eric Klinger)의 말처럼 "인간의 뇌는 목적 없는 삶을 견딜 수 없다(The human brain cannot sustain porposeless living)."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짧다는 자각을 갖게 된다. 이는 우리의 존재 자체를 뒤흔드는 인식이다. 죽음이라는 실존의 문제를 추상적 관념으로서가 아니라 또렷한 감각으로 생생하게 경험하게 하는 자각이다. 비로소 우리를 철들게 만드는 깨달음이고, 내 피부 경계 안쪽의 좁은 세계에만 머물러 있던 인식을 자연과 우주와 인류 보편과 신의 세계로 확장시키는 인식의 결정적 전환이 되기도 한다.

 

그런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에게서 우리는 큰 위로와 지혜를 얻는다. 미움받을 용기가 가득한 그들에게서 경외감을 느낀다. 죽음을 의식하며 살고 있기 때문에 드러나는 삶의 품격이다.

 

 

나루케 마코토, <교양고전>

'절망'이라는 병에서 '살아가는 힘'을 발견하다. 절망이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그것을 위해 살 수도 또 죽을 수도 있는 진실을 찾아내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이미 희망은 없어'라고 생각하며 그 이상 희망을 가지려 하지 않는 것 자체가 절망이다. '절망'의 병에 걸리는 것은 동물보다 뛰어난 인간의 장점이지만 최대의 불행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정신=자기. '자기'란 무엇인가? '자기'란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관계... 인간이란 무한과 유한, 시간과 영원, 자유와 필연의 종합이다.

 

몽테뉴가 노래한 삶의 태도 = '정신적 자유인', 가장 아름다운 정신은 가장 많은 다양성과 유연성을 지닌 정신이다. 철학이란 어떻게 죽을까를 배우는 것이다. 기적은 우리가  자연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지 자연의 본질에 따라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어디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다. 그러니 여기저기에서 그것을 기다려야 하지 않겠는가? 죽음의 준비는 자유의 준비다.

 

행복하다고 싶다면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다 잘되기를 바라고 힘쓰라. 톨스토이는 '이성'이야말로 인간이 지닌 최고의 능력이라고 생각하고, 이성을 발달시키지 않는 사람은 인생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성에 따라 동물적인 자아를 부정할 수 있을 때 진정한 의미에서 자기 이외의 다른 사람의 행복을 빌 수 있으며, 이것이야말로 '진실한 사랑'이다. 그리고 그 진실한 사랑을 얻었을 때 비로소 약육강식의 비참한 사회가 구제되고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도 해방된다고 말한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데이비드 케슬러, <인생수업>

죽음은 삶의 가장 큰 상실이 아니다. 가장 큰 상실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우리 안에서 어떤 것이 죽어 버리는 것이다. 죽음의 가장 큰 교훈은 바로 '삶'인 것이다.

 

우리가 한 말과 행동이 어쩌면 우리가 사랑하는 이에게 하는 마지막 말과 행동이 될지도 모른다. 어느 누구도, 단 한 사람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따라서 너무 늦을 때까지 기다려서는 안된다. 이것이 '죽어가는' 사람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가장 큰 교훈이다. 그들은 말한다. 지금 이 순간을 살라고. 삶이 우리에게 사랑하고, 일하고, 놀이를 하고, 별들을 바라볼 기회를 주었으니까.

 

삶의 이 여행을 하는 동안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당신의 임무는 사랑을 찾는 일이 아니다. 당신의 마음속에 스스로 만들어 놓은 사랑의 방해물을 찾아내는 일이다. 누군가 옆에 있다는 것은 사랑에서, 삶에서,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서도 가장 중요한 일이다.

 

죽음에 도달하는 순간 모두 제로가 된다. 삶의 끝에서 아무도 당신에게 당신이 얼마나 많은 학위를 가졌으며, 얼마나 큰 집을 가지고 있는지, 얼마나 좋은 고급차를 굴리고 있는지 묻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이것이 죽어가는 사람들이 당신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왜 오늘보다 내일 더 행복하고 강해질 거라고 생각합니까? '더 많은' 것을 원하는 게임을 아무리 훌륭히 치러 냈더라도 자신을 잊어버린다면 결국 힘을 잃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게임은 우리를 언제나 부족하다고 느끼는 결핍 상태에 머물게 합니다. 여전히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더라도 기분은 나빠집니다. 여전히 불행하긴 마찬가지입니다. '조금만 더 갖는다면!' 하고, 이 단순한 문제를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은 내일이 없으므로 더 이상 더 많은 것을 추구하는 게임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오늘 가진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은 바로 그 궁극적인 두려움, 죽음의 두려움과 마주해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깨닫습니다. 죽음이 자신을 파괴하지도 못하며,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도 못하리란 것을.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두려움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우리에게 두려움은 매우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 죽음은 우리를 최악의 두려움과 맞서게 합니다. 그것은 가능한 또 다른 삶을 보여 주고, 그럼으로써 우리의 남은 두려움을 사라지게 합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가장 후회하는 것은 '삶을 그렇게 심각하게 살지 말았어야 했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별의 순례자이며, 단 한 번의 즐거운 놀이를 위해 이곳에 왔다. 우리의 눈이 찬란하지 않다면, 어떻게 이 아름다운 세계를 반영할 수 있는가?

 

갓난아기와 어린아이들은 감정을 솔직히 느낀 후에 다음 단계로 나아가니다. 울고 난 뒤 잊어버리고, 화를 낸 뒤 잊어버립니다. 사람은 죽음의 시기에 이르면 다시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 정직해집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들은 "난 두려워요." 또는 "난 화가 나요." 하고 쉽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더 솔직해지는 법과 화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화는 우리 삶에서 스쳐지나가는 감정이어야지, 존재 그 자체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인내심의 열쇠는 모든 것이 잘 되리라는 믿음, 인간이 모르는 큰 계획이 존재한다는 신뢰를 키우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잊어버리기가 너무 쉽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계획에 맞지 않는 상황이 벌어지면 당황하며 어떻게든 상황을 통제하려 합니다. 삶을 마감할 때조차도 어떤 이들은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반면, 어떤 이들은 자신이 죽을 때를 성급하게 알고 싶어합니다. 그러다가 죽을 준비가 되기 전까지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말에 안심합니다. 죽음에서든 삶에서든 이것은 진실입니다. 당신이 준비가 되기 전까지는, 곧 모든 일이 나름의 질서에 따라 진행된다는 사실을 믿고 이해하기 전까지는 당신은 삶에서 어떤 것도 제대로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철학의 관점에서 볼 때, 인내심은 규칙적으로 사용해야 하는 근육과 같습니다. 날마다 훈련하고 격려해야 합니다. 전자레인지로 음식을 데우는 데 걸리는 1, 2분 같은 작고 일상적인 상황에서 그 근육을 사용하지 않으면, 삶의 더 큰 도전들에서 우리를 지탱해 줄 튼튼한 근육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항상 치유 중이라는 신뢰감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상황을 바꾸려는 경향이 있으므로, 모든 일이 정해진 순리대로 진행될 것이라고 스스로를 안심시켜야 합니다.

 

상실은 무엇이 소중한지 보여 주며, 사랑은 우리의 진정한 모습을 가르쳐 준다. 관계는 자신을 일깨워 주고 성장의 기회를 가져다준다. 두려움, 분노, 죄의식, 인내심, 시간조차도 훌륭한 교사이다. 삶의 가장 어두운 시간에도 우리는 성장하고 있다. 이 생에서 당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영혼이 성장할수록 가장 큰 두려움인 죽음조차도 점점 작아집니다. 미켈란젤로가 말했습니다. '삶이 즐겁다면 죽음도 그래야 한다. 그것은 같은 주인의 손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 삶, 행복, 사랑, 그 이상의 것들을 가져다주는 손은 죽음을 끔찍한 경험으로 만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누군가 말했듯이, 끝은 단지 거꾸로 된 시작일 뿐입니다. 삶은 그 특별한 매력을 나타내기 위해 굴곡이 있는 것이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가르쳐 주는 가장 놀라운 배움 중 하나는 삶은 불치병을 진단 받는 순간에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진정한 삶이 시작됩니다. 당신은 죽음의 실체를 인정하는 순간, 삶이라는 실체도 인정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자신이 아직 살아 있고, 지금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하고, 자신에게 있는 것은 지금의 이 삶뿐임을 깨닫습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모든 날들을 최대한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삶은 어떤 것을 이루어 나가는 일입니다. 그리고 죽음은 그 이루어 나감의 완성입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죽음은 물론 삶조차도 완성의 과정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삶은 이루어 나가는 과정입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은 우리가 삶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배움들을 일깨워 주는 스승입니다. 삶의 종착점에 이르렀을 때라야 삶을 가장 분명하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삶에서 배운 것을 우리가 함께 나누고, 삶의 소중한 의미에 대해 많은 것을 일깨워 줍니다. 그에게서 우리는 영웅을 발견합니다. 그 영웅은 삶에서 한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것들을 초월해서 존재하며, 우리를 가슴 뛰는 삶으로 인도합니다. 단순히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도록.

 

 

고미숙,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죽음에 대한 지혜가 없이는 결코 삶을 제대로 향유할 수 없다.

 

반복은 순환의 죽음이다. 아니, 반복 자체가 죽음이다. 암과 자폐증, 그리고 치매. 현대인을 두렵게 하는 이 병들의 공통점은 이웃과의 단절이다. 세포 단위든 개체 단위든 일단 소통이 단절되면 모든 존재는 자기 동일성만을 증식하게 된다. 자기 동일성의 증식이 곧 반복이다. 반복의 늪에만 빠지지 않아도 인생은 일단 살 만하다. 좋건 나쁘건 변화의 국면들을 헤쳐 가면서 끊임없이 다른 존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장 도르메송, <거의 모든 것에 관한 거의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

우리가 각각 사랑의 행위를 통해 만물 속에 태어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나, 그러나 그와 동시에 고통과 피 속에서 태어나고, 또 고통과 고뇌와 죽음 속에서 만물을 떠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가능성이 실제로 이행하는 과정에 사랑과 동시에 무언가가 슬그머니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악이 그것이다. 악은 이 세상의 누룩이며, 이 악은 불가사의한 관계로 시간과 깊이 결부되어 있다.

 

인간은 죽을 운명이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 않기 위해, 그리고 그들의 아이들 속에서 계속 살아남기 위해, 사랑을 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최악의 악인 죽음은 사랑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또한 죽음은 시간과도 불가분의 관계이다. 악은 시간 속에 존재한다. 영원과는 달리 일정한 기점으로부터 시작된 시간은 종말을 향해 줄달음치고 있다. 시간은 낡음과 늙음과 황폐를 통해 죽음을 향해 달음질친다. 악이 여기에 있다. 악은 사랑과 같은 이유로 시간의 수레에 실려 가고 있다.

 

우리는 과거에 살지 않는다. 우리는 가까스로 현재에 산다. 우리는 미래에 대한 기다림과 희망속에서 산다. 더 이상 미래가 없다거나, 더 이상 희망이 없다면, 거기에는 이미 죽음이 문턱을 넘어와 있다.

 

우리를 고용했던 연극 무대에서 결국에는 우리를 떠나게 할, 우리가 죽음이라고 부르는 최후의 시련에 이르기까지, 이곳 이승에서 고통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또 우리는 모두 운명 앞에 가로놓인 장벽을 체험해보았다. 삶은 잔인하고, 인간 역시 그러하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세상은 다만 눈물일 뿐이다. 그리고 가장 부유하고, 가장 행복하고, 눈부신 성공으로 충만한 삶 속에서도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하는 신성모독적인 원망이 한 번 이상 솟구친다. 삶에는 행복이 있고 행복 자체는 결국에는 권태로워진다. 인간은 끊임없이 겁을 낸다. 알 수 없는 장치가 우리를 내부로부터 바작바작 타들어가게 한다. 행복하다는 것은 수치스런 절망의 가장 교묘한 형태이다. 산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고통을 겪는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매력과 더없는 기쁨으로 충만하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저주받은 것이고 결국에는 죽음으로 귀착된다. 시간이 좀먹는 것은 생명뿐만이 아니다. 인간은 무엇보다도 허영심으로 부푼 뜻밖의 사건이자, 아무 쓸모없는 정열이다. 별들과, 행성들과, 은하들과, 블랙홀들과 함께, 우주는 눈이 가리운 채, 피할 수 없는 종말을 향해 굴러간다. 

 

나의 유일한 한계는 시간이다. 나의 유일한 주인은 시간이다. 나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도, 멈추게 할 수도, 늦출 수도, 피할 수도 없다. 나는 죽음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변화를 길들일 것이다. 나는 죽음을 우회함으로써 죽음에 맞서 싸울 것이다.

 

 

법정 스님, <텅빈 충만>

여기서 열반이란 죽음을 말한 것이 아니다. 온갖 번뇌와 갈등이 사라져 평온하고 청정하게 된 깨달음의 경지를 가리킨 말이다. 니르바나(nirvana)란 번뇌의 불꽃이 꺼져버린 상태, 그래서 적멸(寂滅)이라고도 번역한다.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은 우리가 지금 살아 있다는 증거다. 그러니 순간순간의 호흡에 대한 관찰은 자기 삶의 확인이다. 들이쉬었다가 내쉬지 못하거나 내쉬었다가 들이쉬지 못하면 우리 삶은 멈추고 만다. 그걸 죽음이라고 한다. 그러니 우리가 아무 생각없이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이 얼마나 소중하고 고마운 것인지 새롭게 인식해야 할 것이다. 삶과 죽음이 바로 이 호흡(呼吸) 사이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피천득, <인연>

하품을 하면 따라 하품을 하듯이 우정은 오는 것이다. 오랫동안 못 만나게 되면 우정은 소원해진다. 희미한 추억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나무는 심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르는 것이 더욱 어렵고 보람 있다. 친구는 그때그때의 친구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정말 좋은 친구는 일생을 두고 사귀는 친구다. 우정의 비극은 이멸이 아니다. 죽음도 아니다. 우정의 비극은 불신不信이다. 서로 믿지 못하는 데서 비극은 온다. - 「우정」

 

 

이 겨울의 어두운 창문 / 기형도, <입속의 검은 잎>

 

  어느 영혼이기에 아직도 가지 않고 문밖에서 서성이고 있느냐.

네 얼마나 세상을 축복하였길래 밤새 그 외로운 천형을 견디며

매달려 있느냐. 푸른 간유리 같은 대기 속에서 지친 별들

서둘러 제 빛을 끌어모으고 고단한 달도 야윈 낫의 형상으로

공중 빈 발에 힘없이 걸려 있다.

 

  아느냐, 내 일찍이 나를 떠나보냈던 꿈의 짐들로 하여 모든

응시들을 힘겨워하고 높고 험한 언덕들을 피해 삶을 지나다녔더니,

놀라워라. 가장 무서운 방향을 택하여 제 스스로 힘을 겨누는

그대, 기쁨을 숨긴 공포여, 단단한 확신의 즙액이여.

 

  보아라, 쉬운 믿음은 얼마나 평안한 산책과도 같은 것이냐.

어차피 우리 모두 허물어지면 그뿐, 건너가야 할 세상 모두

가라앉으면 비로소 온갖 근심들 사라질 것을. 그러나 내 어찌

모를 것인가. 내 생 뒤에도 남아 있을 망가진 꿈들, 환멸의

구름들, 그 불안한 발자국 소리에 괴로워할 나의 죽음들.

 

  오오, 모순이여, 오르기 위하여 떨어지는 그대. 어느 영혼이기에

이 밤 새이도록 끝없는 기다림의 직립으로 매달린 꿈의 뼈가

되어 있는가. 곧이어 몹쓸 어둠이 걷히면 떠날 것이냐. 한때

너를 이루었던 검고 투명한 물의 날개로 떠오르려는가. 나 또한

얼마만큼 오래 냉각된 꿈속을 뒤척여야 진실로 즐거운 액체가

되어 내 생을 적실 것인가. 공중에는 빛나는 달의 귀 하나 걸려

고요히 세상을 엿듣고 있다. 오 오, 네 어찌 죽음을 비웃을 것이냐

삶을 버려둘 것이냐, 너 사나운 영혼이여! 고드름이여.

 

 

마셜 매클루언, <미디어의 이해>

우리 육체의 새로운 전문가적인 확장의 표현인, 바퀴와 길에 의해 중심에 모이게 된 인간과 물품들이란 현상은 빨아들이고 토해 내는 스펀지 같은 움직임을 통해서 끊임없이 상호 작용하며 서로의 확장을 요구했다. 그리고 그것은 장소와 시간을 초월해 모든 도시 구조를 덮쳤다. 멈퍼드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나의 해석이 정확하다면, 도시의 공동체적인 형태는 처음부터 파괴적이고 '죽음을 지향하는 신화'에 의해 침식되고 손상되었다. ... 그 신화는 물리적 힘의 과도한 확장과 기술적 교묘함을 따라다니는 것이었다." 신체의 확장을 통해서 그러한 힘을 가지려면, 인간은 자기 존재의 내적 통일성을 외파시켜 명확한 파편들로 만들어야만 한다. 내파의 시대인 오늘날, 우리는 영화의 필름을 거꾸로 돌리듯, 고대로부터 진행되어 온 외파를 거꾸로 되돌리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너무나 큰 힘을 가지고 있어 그것의 모든 파괴적인 방식의 사용은 어리석은 사람들에게조차 무의미해 보이는 이 시대에, 우리는 인간 존재의 단편들이 결합되어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기주, <글의 품격>

'삶'은 동사 '살다'의 어간에 명사형 어미 '-ㅁ'을 붙여서 만든 명사다. 그저 들숨과 날숨을 번갈아 쉬면서 생명을 유지하는 상태가 아니라 의미와 의지를 갖고 영위해나가는 동적인 과정이 삶이다. 단, 삶은 유한하다는 불변의 진리 앞에서 인간은 무력한 존재다. 비관적인 시각으로 보면, 삶은 죽음으로 향하는 여정이다. 살아가는 일은 서서히 사라지는 일이기도 하다. 내가 먼저 사라지느냐, 나를 둘러싼 사람과 관계가 먼저 사라지느냐 하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시간의 개념을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로 구분했다. 둘은 흐르는 방향에서 차이가 있다. 크로노스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물리적인 시간이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떨어지듯 크로노스는 우리 곁을 자연스럽게 스쳐간다. 탄생에서 죽음으로, 시작에서 끝으로,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뻗어나간다. 카이로스는 한 개인이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의미를 부여하는 주관적인 시간 개념이다. 시간의 주인인 '나'를 향해서만 흐른다.

 

 

마시모 피글리우치, <그리고 나는 스토아주의자가 되었다>

모든 인간 악의 원천, 비열하고 비겁한 정신의 원천이 죽음 아니라 죽음의 공포라는 사실을 이제는 정말 그대가 깨닫게 될까요? 그래서 나는 그대가 이 공포에 맞서 스스로를 단련할 수 있게 할 것입니다. 이를테면 그대의 모든 이성적 사유들, 그대의 강의들, 그리고 그대의 훈련들이 모두 바로 그 일을 겨냥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그래야만 인간이 자유를 성취한다는 사실을 그대는 알게 될 것입니다.

 

만약 철학이 도움을 주어야 하는 한 가지가 있다면, 최선을 다해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만이 아니라 죽음이 전혀 두려울 것 없다는 사실을 수용하는 방법도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인간의 조건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죽음은, 가장 두려운 악이라 할 수 있는 그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존재할 때 죽음은 아직 온 것이 아니고, 죽음이 왔을 때 이미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만 안다면 말이지요.

 

 

알랭 드 보통,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윌리엄과 에스터의 두려움조차 사랑스럽다. 아주 쉽게 진정시킬 수 있고, 그만큼 세상에서 진짜 두려워해야 할 것들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무서워하는 건 늑대와 괴물, 말라리아와 상어다. 물론 아이들은 두려움을 가져 마땅하지만, 그들 마음속에는 아직 적절한 대상이 들어서지 않았다. 아이들은 성인의 삶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진정한 공포, 예를 들어 착취, 기만, 경력상의 실패, 시기, 자포자기, 죽음 등을 알지 못한다. 아이들이 불안은 중년이 겪는 실제 공포의 무의식적 행태다. 단, 마침내 공포가 닥쳤을 때 세상이 그 공포의 주인을 아주 사랑스럽게 보거나 꼭 껴안고 안심시켜주기에 적당한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한때 황금 전봇대의 生을 질투하였다 - 심보선

 

시간이 매일 그의 얼굴을

조금씩 구겨놓고 지나간다

이렇게 매일 구겨지다 보면

언젠가는 죽음의 밑을 잘 닦을 수 있게 되겠지

 

크리넥스 티슈처럼, 기막히게 부드러워져서

시간이 매일 그의 눈가에

주름살을 부비트랩처럼 깔아놓고 지나간다

거기 걸려 넘어지면

 

끔찍하여라, 노을 지는 어떤 초저녁에는

지평선에 머무른 황금 전봇대의 생(生)을

멀리 질투하기도 하였는데

 

 

인중을 긁적거리며 - 심보선

 

(중략)

내가 사랑하는 여인:

3일, 5일, 6일, 9일...

달력에 사랑의 날짜를 빼곡히 채우는 여인.

오전을 서둘러 끝내고 정오를 넘어 오후를 향해

내 그림자를 길게 끌어당기는 여인 그녀를 사랑하기에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죽음,

기억 없는 죽음 무의미한 죽음,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일랑 잊고서

인중을 긁적거리며

제발 나와 함께 영원히 살아요.

전생에서 후생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뿐인 청혼을 한다.

 

 

Stephen Haggard의 죽음  /  심보선

 

전쟁이 끝난 지 한참이 지났건만

그는 오늘도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물론 아주 오래는 아니고.

아주 깊이도 아니고.

말하자면 지나치게 과장된 배우의 몸짓으로.

조금은 설익은 비평가의 말투로.

자, 모두들 각자의 헛된 계획들에서 내려와 여기 누워라.

죽음에 대해 말해주지, 그러고 나서

아아, 오늘은 너무 지치는군, 내일 계속할까?

그런 식으로.

잠시 침묵하는 사이 그의 피곤한 혀는

다른 노래의 음들을 다정하게 끌어안고 짧은 선잠에 빠져든다.

 

전쟁이 끝난 지 한참이 지났건만

그는 오늘도 여행 중이다.

간지럽혀도 더 이상 간지럽지 않게 된 굳은 발바닥으로.

선박이 아니라 기차로,

웨일스에서 스코틀랜드가 아니라

카이로에서 팔레스타인으로,

촌충 같은 푸르름으로 갈래갈래 찢긴 허름한 먹구름 아래서

그는 휴식을 취하며 생각한다.

모든 가난한 고장들을 공평하게 방문하기.

죽음에 대한 집중력을 잃지 말기.

여행이란 가장 온순한 형태의 투쟁이다, 라고

그는 마른 강아지풀로 바람 한 방울을 찍어 어둠위에 기록한다.

 

그는 열차의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꾸들꾸들한 밀반죽처럼 낯설게 변해가는 것을 바라본다.

아아, 여기가 도대체 어디지?

수심에 가득 찬 표정이 유발하는 더한 수심 속에서

그는 자기 자신에게 말한다.

나의 유일한 독자여,

죽음에 대해 말해주지, 여기가 어디든 간에,

이제 그만 그 헛된 계획에서 내려와라.

이제 그만 그 위태로운 생명줄 위에 올라타라.

그는 눈물을 떨어뜨리며.

다시 한 번 자기 자신에게 말한다.

전쟁은 끝났다. 전쟁은 끝났다.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나에게 주어질 배역은 더 이상 없는 것이다.

 

별똥들이 국숫가락처럼 허공을 긋는 밤하늘 아래서

그는 배고픔에 젖어 써 내려간다.

"나는 어제 '금일 휴업'이 걸린 빵 가게 창문 앞에 오랫동안 서 있었다."

그는 식은 지 오래인 칡차를 홀짝이며

여러 나라를 전전했던 자신의 짧은 삶을 반추해본다.

그는 오랜만에 영국식 발음으로 '죽음'이라고 말해본다.

아아, 얼마나 익숙하고 아늑한다.

사실은 태어나면서부터 그의 이름 속엔

죽음의 알파벳들 -d, e, a, t, h-이 군데군데 숨어 있었으니.

 

어찌 됐든 전쟁은 끝났다.

그는 눈물을 떨어뜨리며

좀 전에 썼던 문장을 급하게 지운다.

그리고 그는 지체 없이 자신의 머리에 대고 피스톨의 방아쇠를 당긴다.

선박이 아니라 기차 안에서,

웨일스에서 스코틀랜드가 아니라

카이로에서 팔레스타인으로 가는 길 위에서,

그의 정수리에는 총탄 구멍이 뚫린다.

 

그렇게 전쟁은 끝났다.

이제 아무리 노력해도 그는

전쟁에 대한 두툼한 보고서를 완성하지 못할 것이다.

죽음에 대한 시 한 줄 쓸 수 없을 것이다.

심지어 그 비참한 진실에 대해서도

그는 더 이상 아무런 감흥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연보(年譜)  /  심보선

 

나는 소설책보다는 시집이 더 좋아

나는 시보다는 작가 연보가 더 좋아

나는 언제나 무덤에 가까운 쪽에 매혹되니까

물고기들은 죽으면 심해로 가라앉아

서로의 죽음을 가리키는 화살표(>---▷)가 되니 좋아

물고기 뼈가 물고기 연보의 끝이야

나는 상념의 심해로 빠져들어

내 주먹은 심해 문어의 대가리처럼 부풀다 터져버려

핏물 대신 먹물을 뿜고

그러나 어떤 먹물로도

세계를 암흑시대로 되돌릴 순 없어

상념의 원환은 끝이 없어

아무도 나를 붙잡을 순 없어

우주 전체가 나의 옷깃이야

아무도 나를 비웃을 수 엇어

나의 연보는 수십억 광년이야

영원으로부터 질주해오고 있어

아직 지구에 없는 내 초라한 무덤을 향해

아직 내 무덤이 없는 찬란한 지구를 향해

 

 

사랑은 나의 약점 - 심보선

(중략)

그는 내게 말하는 듯했다.

시인이여, 노래해달라.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나의 머지않은 죽음이 아니라

누구도 모르는 나의 일생에 대해.

나의 슬픈 사랑과 아픈 좌절에 대해.

그러나 내가 희망을 버리지 않았음에 대해.

모든 것을 극복하고 생존하여 바로 오늘

쪽동백나무 아래에서 당신과 우연히 눈이 마주쳤음에 대해.

나는 너무 많은 기억들을 어깨 위에짊어지고 있는데

어찌하여 그 안에는 단 하나의 선율도 흐르지 않는가.

창가에 서 있는 시인이여,

나에 대해 노래해달라. 나의 지친 그림자가

다른 그림자들에게는 없는 독특한 강점을 지녔노라고 제발 노래해달라.

 

 

유시민, <유럽 도시 기행>

마음만 먹으면 걸어서 나갈 수 있었는데도 소크라테스는 태연하게 독 당근즙을 마셨다. 그가 '악법도 법'이라고 말했다는 것은 오래된 가짜 뉴스다. 그는 스스로에게 질문했을 뿐이다. "폴리스가 정당한 절차에 따라 내린 결정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그것을 회피하는 것이 옳은가? 모두가 그렇게 할 경우 폴리스가 존속할 수 있는가?" 아테네 민주주의의 성장과 쇠락과 죽음, 그리고 일시적 부활을 모두 겪었던 소크라테스는 독 당근즙을 마시는 행위로 자신이 던진 철학적 질문에 대답했다.

 

플라카의 골목을 걸으며 생각해보았다. 아테네 시민들은 왜 소크라테스를 죽였나? 고정관념, 광신, 시기심, 무지, 무관심, 변덕이 그를 죽였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어떤 지식인은 국회의원을 차라리 추첨으로 뽑자고 주장한다. 국회의 무능과 부패에 대한 불만 때문이라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할지라도, 나는 이 주장에 공감하지 못한다. 플라톤은 민주주의가 반드시 중우정치로 흐른다면서 덕과 진리를 아는 '철학자의 통치'를 옹호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민들이 각자 훌륭해지지 않고, 훌륭한 시민들이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국가가 훌륭해지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소크라테스를 죽인 아테네 시민들보다 얼마나 더 훌륭하며 국가와 정치에 대해서 얼마나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얼마나 더 능동적으로 참여하는가? 나는 직접민주주의가 다수의 폭정으로 흐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비관론에 한 표를 던지고 싶다. 소크라테스의 삶과 죽음은 아테네 민주주의의 잠재력과 한계를 모두 확인해 주었다. 아태네의 품에서 태어났으나 시대의 경계 너머로 나아갔던 그는 민주주의라는 옷을 입은 다수의 폭정에 목숨을 빼앗겼다. 그런데도 민주주의는 문명의 대세가 되었고 소크라테스도 인류의 스승으로 인정받는다. 역사의 역설이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콜레라 시대의 사랑>

죽음의 천사는 잠시 진료실의 시원한 어둠 속으로 날더니, 펄럭이던 깃털의 흔적을 남긴 채 홀연히 창문 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두 사람은 마치 부부 생활의 지난한 고통의 언덕을 뛰어넘은 듯했고, 더 이상 머뭇거림 없이 직접 사랑의 심장부로 들어간 것 같았다. 열정의 함정과 환상의 잔인한 조롱, 그리고 환멸의 신기루를 극복하고, 인생을 달관한 것 같은 늙은 부부처럼 조용히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사랑은 시간과 장소를 막론하고 사랑이지만, 죽음이 가까워올수록 그 사랑의 농도는 진해진다는 것을 충분히 깨달을 수 있을 정도로 함께 충분한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선장이 물었다.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그러자 플로렌티노 아리사가 대답했다. "태어난 이래, 나는 진심으로 하지 않은 말이 단 한마디도 없소." 선장은 페르미나 다사를 쳐다보았고, 그녀의 속눈썹에서 겨울의 서리가 처음으로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그런 다음 플로렌티노 아리사와 그의 꺽을 수 없는 힘, 그리고 용감무쌍한 사랑을 보면서 한계가 없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일지도 모른다는 때늦은 의구심에 압도되었다. 선장이 다시 물었다. "언제까지 이 빌어먹을 왕복 여행을 계속할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플로렌티노 아리사에게는 53년 7개월 11일의 낮과 밤 동안 준비해 온 대답이 있었다. 그는 말했다. "우리 목숨이 다할 때까지."

 

 

요한 볼프강 폰 괴테, <괴테 청춘에 답하다>

죽음을 받아들인다. "인간은 다시 무(無)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뛰어난 사람은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는 것을 천직으로 삼는다. 그는 사명을 완수하면 더 이상 그 모습 그대로 지상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어진다." 모차르트는 36세, 라파엘로도 거의 같은 나이에 죽었다. "그들은 자신의 사명을 완벽히 수행했고, 가야 할 때 갔다. 그것은 오래도록 이어질 이 세상에 다른 사람에게도 할 일을 남겨두기 위함이다."

 

"죽음이란 기묘한 것이다. 아무리 죽음을 목격하고 경험해도 자신과 친한 사람에게는 죽음이 찾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게 된다. 죽음은 믿을 수 없을 때 예기치 않게 찾아온다. 잘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데 돌연 현실이 되어버리는 것이 죽음이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파우스트>

당장 계약을 맺도록 하세! / 순간이여, 멈추어라! 정말 아름답구나! / 내가 이렇게 말하면, / 자네는 날 마음대로 할 수 있네. / 그러면 나는 기꺼이 파멸의 길을 걷겠네. / 죽음의 종이 울려 퍼지고, / 자네는 임무를 다한 걸세. / 시계가 멈추고 바늘이 떨어져 나가고, / 내 시간은 그것으로 끝일세.

 

 

베르나르 베르베르, <죽음>

살아 있다는 게 행운임을 깨닫는 건.... 죽음을 경험하고 나서지.

 

 

한동일, <라틴어 수업>

Hodie mihi, cras tibi. 호디에 미기, 크라스 티비.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 로마의 공동묘지 입구에 새겨진 문장입니다. 오늘은 내가 관이되어 왔고, 내일은 네가 관이 되어 들어올 것이니 타인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라는 뜻의 문구입니다.

 

인간이란 존재는 영원으로부터 와서 유한을 살다 다시 영원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숨이 한번 끊어지면 그만인데도 영원에서 와서인지 인간은 영원을 사는 것처럼 오늘을 삽니다.

 

인간은 죽어서 그 육신으로 향기를 내지 못하는 대신 타인에 간직된 기억으로 향기를 내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기억이 좋으면 좋은 향기로, 그 기억이 나쁘면 나쁜 향기로 말입니다. 인간은 타인을 통해 기억되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그렇게 "오늘은 내가, 내일은 네가" 죽음으로써 타인에게 기억이라는 것을 물려주는 존재입니다.

 

Si vis vitam, para mortem. 시 비스 비탐, 파라 모르템. 삶을 원하거든 죽음을 준비하라.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백년의 고독>

두 사람은 죽은 자들이 배회하는 소리에 자주 잠에서 깨어나곤 했다. 가문을 보존하기 위해 창조 법칙과 싸우고 있는 우르슬라, 위대한 발명이라는 환상만을 좇고 있는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 기도하고 있는 페르난다, 전쟁과 작은 황금 물고기 때문에 실망해 난폭해지고 있는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 요란법석한 파티의 어수선함 속에서도 정작 고독으로 괴로워하는 아우렐리아노 세군도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두 사람은 강한 집념은 죽음을 압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곤충들이 인간에게서 막 빼앗고 있던 그 불행 가득한 낙원을 또다른 미래의 동물들이 그 곤충들로부터 빼앗을 정도로 많은 시간이 흐른 후, 이제 유령이 된 두 사람이 계속해서 서로 사랑하게 될 거라는 확신으로 다시 행복해졌다.

 

 

김영하, <살인자의 기억법>

"우리는 죽음에 대한 근심으로 삶을 엉망으로 만들고 삶에 대한 걱정 때문에 죽음을 망쳐버린다." - 몽테뉴, <수상록>

 

오디세우스의 여행을 생각해봐도 그렇다. 오디세우스는 귀환을 시작하자마자 연을 먹는 사람들의 섬에 기착한다. 사람들이 친절하게 권한 연 열매를 먹고 나자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잊어버린다. 그뿐만 아니라 부하들도 모두 잊어버린다. 무엇을? 귀환이라는 목적을 잊어버린다. 고향은 과거에 속해 있지만 그곳으로 돌아간다는 계획은 미래에 속한다. 그후로도 오디세우스는 거듭하여 망각과 싸운다. 세이렌의 노래로부터 달아나고 그를 영원히 한곳에 붙들어두려는 칼립소로부터도 탈출한다. 세이렌과 칼립소가 원했던 것은 오디세우스가 미래를 잊고 현재에 못박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디세우스는 끝까지 망각과 싸우며 귀환을 도모했다. 왜냐하면 현재에만 머무른다는 것은 짐승의 삶의로 추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억을 모두 잃는다면 더는 인간이랄 수가 없다. 현재는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가상의 접점일 뿐,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중증 치매 환자와 짐승이 뭐가 다를까. 다른 것이 없다. 먹고 싸고 웃고 울고, 그러다 죽음에 이르는 것이다. 오디세우스는 그것을 거부했던 것이다. 어떻게? 미래를 기억함으로써, 과거를 향해 나아가겠다는 계획을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무심코 외우던 반야심경의 구절이 이제 와 닿는다. 침대 위에서 내내 읊조린다. "그러므로 공空 가운데에는 물질도 없고 느낌과 생각과 의지작용과 의식도 없으며,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뜻도 없으며, 형체와 소리, 냄새와 맛과 감촉과 의식의 대상도 없으며, 눈의 경계도 없고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으며, 무명도 없고 또한 무명이 다함도 없으며, 늙고 죽음이 없고 또한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으며,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없어짐과 괴로움을 없애는 길도 없으며, 지혜도 없고 얻음도 없느니라."

 

 

헬렌 니어링,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겉으로 보이는 모양말고는 어떤 것도 죽지 않는다. 본질에서 자연계로 건너가는 것은 탄생이요, 자연계에서 본질로 돌아가는 것은 죽음처럼 보일 뿐이다. 실제로 창조되거나 사멸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다만 눈에 보이거나 안 보이게 될 뿐이다. - 티아나(Tyana)의 아폴로니우스(Apolonius)

 

많은 사람들은 죽음을 끝으로 생각하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죽음은 변화지. 낮에서 밤으로 바뀌는 것과 비슷하게, 언제나 다시 또 다른 날로 이어지지. 두 번 다시 같은 날이 오지 않지만 오늘이 가면 또 내일이 오네. 사람의 몸뚱이는 생명력이 빠져나가면서 먼지로 바뀌지만, 다른 모습을 띤 삶이 그 생명력을 받아 이어진다네. 우리가 죽음이라 부르는 변화는 우리 몸으로 보아서는 끝이지만, 같은 생명력이 더 높은 단계에 접어드는 시작이라고 볼 수 있지. 나는 어떤 식으로든 되살아남 또는 이어짐을 믿네. 우리 삶은 그렇게 계속되는 것이네.

 

삶에서 가장 커다란 수수께끼는 삶 그 자체가 아니라 죽음이다. 죽음은 삶의 결정이자 마지막에 피는 가장 아름다운 꽃이다. 죽음에서 전체로서의 삶은 응축된다. 죽음에서 당신은 도달한다. 삶은 죽음을 향한 순례이다. 시작 그 순간부터 죽음이 오고 있다. 탄생의 순간부터 죽음은 당신을 향한 출발을 싲가했다. ... 죽음은 전세계에 걸쳐 수백만 가지 방법으로 순간순간마다 일어나고 있다. 존재는 죽음으로 자신을 새롭게 한다. 죽음은 가장 커다란 수수께끼이다. 삶은 다만 죽음을 향한 순례이기 때문에 죽음은 삶보다 더 신비로운 것이다. - 라즈니쉬

 

우리가 어느 쪽으로 방향을 틀든 자연에는 생기를 주고 지속시킬 뿐 '죽임의 원칙'은 없다. 그 전체를 통해 자연은 모든 형태와 변화물로 나타나는 생명이다. 의심할 바 없이 특별한 현상의 소멸은 있으나 가장 약하고 작은 것에서조차 절대적이고 완전한 죽음은 없는 광대하고 무한한 생명체이다. 죽음처럼 보이는 것은, 이제 막 새로 시작하려는 생명의 상징이자 징표이다. 죽음과 삶은 더 높은 형태로 가고자 하는 생명 자체의 싸움일 뿐이다. - 브제레가르드(C. H. Bjerregaard), <위대한 어머니 The Great Mother>

 

죽음을 대비하여 주위 여러분들에게 드리는 말씀

  • 이 글은 다음과 같은 요망 사항을 기록해두기 위해 쓴다.

  • 마지막 죽을 병이 오면 나는 죽음의 과정이 다음과 같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 나는 병원이 아니고 집에 있기를 바란다.

    • 나는 어떤 의사도 곁에 없기를 바란다. 의학은 삶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며, 죽음에 대해서도 무지한 것처럼 보인다.

    • 그럴 수 있다면 나는 죽음이 가까이 왔을 무렵에 지붕이 없는 열린 곳에 있기를 바란다.

    • 나는 단식을 하다 죽고 싶다. 그러므로 죽음이 다가오면 나는 음식을 끊고, 할 수 있으면 마찬가지로 마시는 것도 끊기를 바란다.

  • 나는 죽음의 과정을 예민하게 느끼고 싶다. 그러므로 어떤 진정제, 진통제, 마취제도 필요없다.

  • 나는 되도록 빠르고 조용하게 가고 싶다. 따라서,

    • 주사, 심장 충격, 강제 급식, 산소 주입 또는 수혈을 바라지 않는다.

    • 회환에 젖거나 슬픔에 잠길 필요는 없다. 오히려 자리를 함께할지 모르는 사람들은 마음과 행동에 조용함, 위엄, 이해, 기쁨과 평화로움을 갖춰 죽음의 경험을 나누기 바란다.

    • 죽음은 광대한 경험의 영역이다. 나는 힘이 닿는 한 열심히, 충만하게 살아왔으므로 기쁘고 희망에 차서 간다. 죽음은 옮겨감이거나 깨어남이다. 모든 삶의 다른 국면에서처럼 어느 경우든 환영해야 한다.

  • 장례 절차와 부수적인 일들.

    • 법이 요구하지 않는 한, 어떤 장의 업자나 그 밖에 직업으로 시체를 다루는 사람의 조언을 받거나 불러들여서는 안 되며, 어떤 식으로든 이들이 내 몸을 처리하는 데 관여해서는 안 된다.

    • 내가 죽은 뒤 되도록 빨리 내 몸에 작업복을 입혀 침낭 속에 넣은 다음, 스프루스 나무나 소나무 판자로 만든 보통의 나무 상자에 뉘기를 바란다. 상자 안이나 위에 어떤 장식도 치장도 해서는 안 된다.

    • 그렇게 옷을 입힌 몸은 내가 요금을 내고 회원이 된 메인 주 오번의 화장터로 보내어 조용히 화장되기를 바란다.

    • 어떤 장례식도 열려서는 안 된다. 어떤 상황에서든 죽음과 제의 처분 사이에 언제, 어떤 식으로든 설교사나 목사, 그 밖에 직업 종교인이 주관해서는 안 된다.

    • 화장이 끝난 뒤 되도록 빨리 나의 아내 헬렌 니어링이, 만약 헬렌이 나보다 먼저 가거나 그렇게 할 수 없을 때는 누군가 다른 친구가 재를 거두어 스피릿 만을 바라보는 우리 땅의 나무 아래 뿌려주기 바란다.

  • 나는 맑은 의식으로 이 모든 요청을 하는 바이며, 이러한 요청들이 내 뒤에 계속 살아가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존중되기를 바란다.

 

씨앗이 터질 때가 되면, 식물은 갑자기 낱낱이 흩어진다. 그 순간 씨앗은 껍질 속에 갇혀 그렇게 오랫동안 좁게 누워 있던 상태가 파괴되는 것처럼 느낀다. 그러나 사실은 새 세상을 얻는다. ... 새로 태어나는 아이와 탄생의 관계는 우리와 죽음의 관계와 같은 것처럼 보인다.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지금까지 삶을 가능하게 했던 모든 조건들이 사라짐은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감이었던 것이다. - 구스타브 페히너, 죽은 뒤의 삶, 1836

 

단식에 의한 죽음은 자살과 같은 난폭한 형식이 아니다. 그 죽음은 느리고 품위있는 에너지의 고갈이고, 평화롭게 떠나는 방법이자, 스스로 원한 것이었다. 스코트는 언제나 '기쁘게 살았고, 기쁘게 죽으리. 나는 내 의지로 나를 버리네.'라는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말을 좋아했다. 이제 이것을 실천에 옮길 수 있었다. 스코트는 스스로 육체가 그 생명을 포기하도록 하는 자신의 방법으로 죽음을 준비했다.

 

 

정철, <한글자>

첫, 첫 죽음은 없다. 잘 죽어야 한다.

 

시, 사랑에 빠진 사람은 누구나 시인이다. 누구보다 열렬한 애독자 한 사람을 가진 시인이다. 그가 어떤 시를 쓰든 그의 독자는 감동할 자세가 되어 있다. 이를테면 이런 시. 제목: 사랑, 사랑해. 이 시를 받아 든 독자는 시의 함축성, 명징성, 확장성에 감탄한다. 다른 어떤 수식어도 필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 짧은 한 줄에 삶과 죽음과 우주가 다 담겨 있다고 말한다. 사랑은 내 시를 읽어 줄 단 한 사람의 독자를 만나는 일이다. 가장 평범한 내 이야기를 가장 특별하게 들어 주는 한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김영하, <보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어차피 죽을 인생을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이유

  • 죽음은 왜 그렇게 두려운 것일까? 에피쿠로스는 이 질문을 파고들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지 않고는 '고귀한 쾌락'을 있는 그대로 즐기기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 "죽음은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생각에 익숙해져라. 왜냐하면 모든 선과 악은 지각에 근거하는데, 죽음은 이러한 지각의 상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음은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점을 올바르게 통찰하면, 우리의 유한한 삶은 즐거울 수 있다. 왜냐하면 이 통찰이 우리 삶에 무제한적인 지속성을 부여하기 때문이 아니라 영원히 살고자 하는 욕구를 없애기 때문이다. ... 가장 끔찍한 악인 죽음은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오지 않고, 죽음이 오자마자 우리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 (폴커 슈피어링, <철학 옴니버스>, 자음과모음, 2013)

  • 노인들에게 가장 두려운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혼자 죽는 것'이라고들 답한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누구에게도 자신의 죽음이 인지되지 못한 채 오랫동안 버려지는 무연사가 가장 두렵다고 한다. 그들은 마치 죽은 뒤에도 살아 있을 것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죽음 이후의 우리는 아무것도 보지도, 느끼지도 못한다. 에피쿠로스가 이천삼백여년 전에 통찰했듯이 그런 상태를 바로 죽음이라 한다. 그러므로 혼자 죽든, 함께 죽든 혹은 가족들 앞에서 죽든, 죽음은 우리를 똑같은 상태로 인도한다. 그것은 절대적인 무와 침묵의 세계다. 

  • 그런데 '혼자 죽는 것'이 두렵다고 말하는 노인들의 말은 그냥 어리석기만 한 것일까? 혹시 그들은 죽음이 아닌 '혼자'를 강조하고 있는 것 아닐까? 인간이 정말 무서워하는 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철저하게 혼자가 되는 것이라고 읽을 수는 없을까? 죽음은 개별적이다. 탄생은 어미의 고통과 함께하지만 죽음은 홀로 겪는다. 요컨대, 우리는 모두 혼자 죽는다.

 

김용규, <생각의 시대>

로마인이여! 동포들이여, 친구들이여! 나의 이유를 들어주시오, 듣기 위해서 조용히 해주시오. 나의 명예를 생각하시고 나를 믿어주시오. 믿기 위해서 나의 명예를 생각해주시오. 여러분은 현명하게 나를 판단해주시오. 현명하게 판단하기 위해 여러분의 지혜를 일깨워주시오. 만일 여러분 중에 카이사르의 친구가 있다면,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소. 카이사르에 대한 브루투스의 사랑도 그이의 것만 못하지 않다고. 그러면 왜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게 반기를 들었느냐고 묻거든, 이것이 나의 대답이오. 내가 카이사르를 덜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라 로마를 더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여러분은 카이사르가 죽고 만인이자유롭게 사는 것보다 카이사르가 살고 만인이 노예의 죽음을 당하는 것을 원하시오? 카이사르가 나를 사랑한 만큼 나는 그를 위해 울고, 카이사르에게 행운이 있었던 만큼 나는 그것을 기뻐하고, 카이사르가 용감했던 만큼 나는 그를 존경하오. 그러나 그가 야심을 품었던 까닭에 그를 죽인 것이오. 그의 사랑에 대하여는 눈물이 있고, 그의 행운에 대하여는 기쁨이 있고, 그의 용기에 대하여는 존경이 있고, 그의 야심에 대하여는 죽음이 있소. 여러분 중에 노예가 되길 원하는 비굴한 사람이 있소? 있으면 말하시오. 나는 그에게 잘못을 저질렀소. 여러분 중에 로마인이 되길 원하지 않는 야만적인 사람이 있소? 있으면 말하시오. 나는 그에게 잘못을 저질렀소. 여러분 중에 조국을 사랑하지 않는 비열한 사람이 있소? 있으면 말하시오. 나는 그에게 잘못을 저질렀소. 나는 이제 말을 멈추고 대답을 기다리겠소. - 세익스피어, <율리우스 카이사르> 중

 

 

김영하, <여행의 이유>

신뢰란 죽음만큼이나 동기를 짐작할 수 없는 어떤 인물에게 의지하게 만드는 힘이다. 낯선 이를 신뢰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이야기는 다르다. 현실과 비슷한 일이 일어나지만 질서가 있다. 제한된 인물들, 특히 주인공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과학자들이 실험실에서 실험을 하듯, 작가들은 현실에서 어지러운 잡음을 제거한 뒤 이를 이야기로 재구성한다. 작가는 이야기를 적절히 통제하여 독자들이 이를 경험할 수 있도록 제공한다. 소설이나 영화에서도 별똥별은 운석이 되어 지붕 위로 떨어질 수 있지만, 현실과 달리 이런 사건들은 주인공의 삶과 인생에 중대한 의미를 부여한다. 이야기를 통해 인간은 현실에서 무질서하게 일어나는 여러 일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배운다. 죽음과 재난, 사랑과 배신 같은 일들이 우리 의지와 무관하게 닥쳐올 때, 우리는 자신의 내면을 지켜내야 하고 그럴 때 이야기가 우리에게 심리적 틀을 제공하는 것이다.

 

 

E. F. 슈마허, <작은 것이 아름답다>

민주주의, 자유, 인간의 존엄성, 생활 수준, 자아실현, 자기완성이라는 말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재화의 문제인가, 인간의 문제인가? 물론 그것은 인간의 문제이다. 하지만 인간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소집단에서만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규모 단위이 다양성에 대처할 수 있도록 분절화된 구조(an articulated structure)에 대해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경제학의 사고방식이 이 점을 파악할 수 없다면, 그것은 쓸모없는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폭넓은 추상 영역, 즉 국민소득, 성장률, 자본/산출 비율, 투입/산출 분석, 노동자 이동, 자본축적 따위를 극복할 수 없다면, 그래서 이 모든 영역을 넘어 빈곤, 좌절, 소외, 절망, 몰락, 범죄, 현실 도피, 스트레스, 혼잡, 추악함, 정신적 죽음 따위의 현실적인 인간의 모습과 대면할 수 없다면, 우리는 (이러한) 경제학을 버리고 새롭게 시작하도록 하자.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안티프래질>

기계적 형태 혹은 단순계에서 균형은 관성에 의해서 이루어지며, 유기적 형태 혹은 복잡계에서의 균형은 죽음과 함께 발생한다. - 스튜어트 카우프만Stuart Kaufman

 

 

알랭 드 보통, <뉴스의 시대>

사고에 관한 뉴스는, 삶이란 게 이렇게나 취약하고 우리 앞에 몇십 년의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게 결코 보장될 수 없다면, 오후 내내 사랑하는 사람과 말다툼을 벌이고 조그만 잘못을 저지른 친구를 용서하지 않으려 하거나 진정한 재능을 뒤로한 채 변변찮은 한직을 택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갖게 함으로써 우리를 겸허하게 만든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우리의 우선순위가 재조정되는 것이다. 또한 죽음 떠올리면서 일상의 갈등으로 인해 잠적해버리곤 하는, 우리의 보다 가치 있는 면을 삶의 표면으로 끌어올리게 된다.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것이 따로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겁을 주면서, 우리 존재의 핵심 속에서 우리가 응당 알고 있는 바대로 삶을 이끌어갈 기회를 부여한다.

 

죽음에 대한 생각이 삶의 의미를 회복시켜준다는 관념은 오랜 역사를 지닌 것이다. 유럽에서는 여러 세기 동안, 권력자의 서재와 침실에 진짜든 그리 것이든 인간의 해골을 장식품으로 놓아두었는데, 이 해골은 시선을 확실히 끌 수 있는 곳에 놓여 있어서 권력자가 라이벌에게 시시한 복수를 꾀하거나 연인을 배반할 궁리를 하는 동안 그의 사고의 흐름을 효과적으로 끊을 수 있었다. 뉴스가 전하는 음산한 이야기들은 이런 해골의 현대판으로 사용될 수 있다. 우리가 추호의 의심도 없이 이런 이야기에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도록 '바니타스'라는 제목 아래 기사가 놓이게 된다면 어떨까. 그러면 그 기사들은 그저 개인적인 고통을 기록하는 데서 멈추는 대신, 우리로 하여금 훨씬 더 중요한 일을 하도록 독려할 것이다. 땅에 떨어지는 나뭇가지가 우리에게 때가 다 되었다고 알려주는 순간까지, 우리의 소중한 시가이 얼마나 남았든 간에 우리의 진짜 재능과 간심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려줄 것이다.

 

예술(여기서는 문학, 음악, 영화, 연극과 시각예술을 포함한다)은 치유의 힘을 가진 매체로, 관객들을 인도하고 독려하고 위로하며 더 나은 자기로 진화하도록 거든다. 예술은 만약 그것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처리하는 데 무척이나 애를 먹었을 수많은 심리적 취약점들을 다루는 데 도움이 되는 도구다.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실수를 지혜롭게 웃어넘기지 못하고, 타인에게 깊이 공감하지 못하거나 타인을 용서하지 못하고, 괴롭힘을 당한다는 직접적인 느낌이 들지 않는 한 고통의 불가피성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희망을 품은 채 꾹 참고 견뎌낼 뚝심도 없으며, 일상의 아름다움에 감사할 줄 모르고, 죽음을 적절히 예비할 수도 없는 우리의 무력함을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재난뉴스에서 날마다 일어나는, 우리 동료 인간들을 쓰러뜨리는 사고들은 우리가 얼마나 상시적으로 갑작스런 죽음과 부상에 노출되는지 분명히 보여주게 마련이고 그리하여 고통을 겪지않는 모든 시간에 우리가 얼마나 감사와 관용을 베풀며 살아야 하는지를 선명히 드러내준다. 

 

 

제레미 리프킨, <육식의 종말>

자연 세계에서는 생산성(productivity)이 아닌 번식력(generativeness)이 지속 가능의 척도가 된다. 번식력은 삶을 긍정하는 힘이고, 그 본질은 유기체적이며 그 목적론은 재생이다. 반면에 산업 생산은 종종 죽음의 힘이고, 그 본질은 조작 가능한 물질이며 그 목적론은 소비이다. 경건한 번식력에서 관리되는 생산성으로 변한 인간과 소의 관계에는 자연 질서와 우주 계획 모두를 통해 자신과 그 관계를 정의하려고 부단히 애써온 서구 문명의 의시기 반영되어 있다.

 

 

김형경, <좋은 이별>

로맹 가리의 <자기앞의 생>은 유대인 유모 로자 아줌마와 그녀가 돌보던 아랍인 소년 모모의 이야기이다. 로자 아줌마는 비만과 노화로 죽음에 다다랐을 때 병원에 입원하는 것을 피해 지하실로 숨는다. 식물인간 상태로 병원에 누워 목구멍에 억지로 생을 쑤셔 넣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이별은 미의 창조입니다. 이별의 의미는 아침의 바탕 없는 황금과 밤의 올 없는 검은 비단과 죽음 없는 영원의 생명과 시들지 않는 하늘의 푸른 꽃에도 없습니다. 님이여, 이별이 아니면 나는 눈물에서 죽었다가 웃음에서 다시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오오 이별이여. 미는 이별의 창조입니다. - 한용운, <이별은 미의 창조>

 

이별이 삶의 일부분임을 기억하기. 이별은 평생 지속되는 삶의 한 요소이며 사는 동안 반복되는 일임을 받아들인다. 이별이나 죽음을 파괴자, 침입자, 도둑처럼 느끼는 시간들에서 벗어난다. 무엇보다 명백한 진실은 우리 모두 수십 년 이내에 죽을 것이라는 점이다. 떠난다, 혹은 세상을 뜬다고 생각하면 삶의 자세가 달라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생의 목표, 가치관에도 변화가 올 것이다. 삶이란 흘러가는 순간을 단호히 놓아 주는 과정임을 마음에 새긴다.

 

 

혜민 스님, <고요할수록 밝아지는 것들>

우리는 꿈이 없는 깊은 잠을 통해 마음의 회복과 몸의 원기를 되찾습니다. 이처럼 생각이 텅 빈 고요한 마음 상태는 죽음이나 무료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온전한 쉼, 생명, 치유, 평화, 자유, 창조를 뜻합니다.

 

 

김형석, <백년을 살아보니>

죽음을 전제로 하는 삶의 가치와 의미. 나무가 자라 꽃을 피우면서 즐기고, 열매를 익혀가면서 행복을 누린다. 완숙기인 가을이 되면 충분히 익은 열매는 떨어져간다. 그래서 또 다른 생명체들과 인간에게 생명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인간의 일생도 그렇다. 연륜이 차면 옆에 남아 있는 다른 열매들에게 "내 때는 찼으니까 먼저 갑니다. 남은 시간을 즐기다 오세요."라면서 떨어져가면 되는 것이다. 인간은 생명에 대한 지나친 욕심 때문에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느끼며 절망에 빠져 불행과 고통을 스스로 만들어간다. 자연의 섭리는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신체적 기능이 끝나는 죽음에 대해 좀 더 이성적이고 운명적인 해석을 내려도 좋을 것 같다. 문제는 그 죽음을 전제로 하는 삶의 가치와 의미가 무엇인가를 살피는 것이 다른 생명체들과의 차이인 것이다. 동물들은 동일한 절차를 밟아 죽음의 과정을 밟는다. 그리고 그 죽음은 의미를 남기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죽음을 예측할 수 있어, 지금부터 죽을 때까지의 삶에 대한 선택과 결단의 책임을 지게 된다. 중병으로 사경을 헤매다가 회복된 사람이 인생의 차원 높은 새 출발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면 나 자신에게 물어보기로 하자. 조만간 죽음에 직면하게 될 테니까, 앞으로 남은 시간의 빈 그릇에 어떤 삶의 내용을 채워가겠는가? 라고. 가장 행복한 사람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소중하기 때문에 그 일에 최선을 다하다가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다고 말할 것이다. 값있는 인생을 살아온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택할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죽음을 예상하기 이전보다 죽음을 맞게 될 것을 알았기 때문에 더욱 최선을 다하겠다는 각오를 다짐하게 될 것이다.

 

죽음이 내 삶 속에 둥지를 틀고 있을 뿐 아니라 손님이 나를 찾아 마중 나오듯이 다가오고 있다. 그 시간의 공간은 빠르게 축소되고 있다. 그 죽음의 시간이 찾아오기 전에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물어야 하는 것이 인생이다.

 

오늘 우리는 인간의 생명을 동물의 생명만큼도 소중히 여길 줄 모르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러나 생각을 평범하게 정리해보면 우리가 상실한 것이 얼마나 인간의 근원적인 과제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마치 사람들이 태양과 대지의 고마움을 잊고 사는 것같이 삶과 생명의 기본 가치를 잊고 사는 것 같기도 하다. 예수는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그러나 죽음을 거부하고 그대로 남으려 한다면 말라서 사라질 뿐'이라고 가르쳤다. 우리의 생명과 삶도 그렇다. 죽기를 거부하는 밀알이 되어서는 안 된다. 더 많은 생명과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희생의 제물이 되는 것이 인새의 순리인 것이다. 그것이 신의 섭리이다. 거부할 수 있는, 거부해서도 안 되는 생명과 삶의 순리인 것이다.

 

우리는 예술이나 학문의 업적은 남길 수 없어도 이웃에 대한 사랑의 봉사는 할 수 있고 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적 업적이나 경제적 유산은 남길 수 없어도 가난하고 병든 이웃들에게 따뜻한 정과 마음은 나누어줄 수가 있다. 그 사람들의 마음속에 사랑의 동상을 안겨줄 수는 있다. 그래서 무엇을 남기고 갈 것인가, 라고 물었을 때의 대답은 사랑을 나누어주는 삶인 것이다. 그보다 위대한 것은 없다. 그 사랑이 귀하기 때문에 더 높은 사랑은 죽음까지도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올더스 헉슬리, <멋진 신세계>

"'인간은 나이를 먹고, 자신의 내면에서 노화를 촉진시키는 나약함과 무기력함과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그러면서 자신이 그냥 병에 걸렸다고 생각하고, 이런 좌절스러운 상태가 어떤 특별한 원인 때문이며, 질병을 고치듯 이 원인으로부터 회복할 희망이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자신의 두려움을 달랜다. 헛된 꿈이로다! 그것은 노쇠함이라는 질병이다. 노쇠함이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그들은 사람이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종교로 귀의하게 되는 이유가 죽음과 죽음 이후에 찾아오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 자신의 경험으로 분명하게 터득한 바로는, 종교적인 감정은 그런 상상이나 두려움과는 아무 상관없이 우리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발전하는 경향을 보인다. 왜냐하면 격정들이 차분하게 가라앉아 상상력과 감수성이 덜 자극을 받고, 자극을 받는 가능성 또한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이성에 침투해서 방해를 하던 관념들과 욕구, 잡념들로 인해 간섭을 덜 받아 사고력이 명석해지면, 그제야 구름 뒤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하나님이 나타난다. 우리의 영혼은 모든 빛의 원천을 향하고 그 빛을 보고 느낀다. 그것은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일이다. 왜냐하면 존재라는 현상이 내면이나 외부로부터의 인상들에 의해서 더 이상 속박을 받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존속하는 무엇에 - 그러니까 절대적이고도 영구한 진실처럼 절대로 우리에게 거짓된 장난을 치지 않는 어떤 현실에 의존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따라서 감각들의 세계에 생명과 매력들을 부여하는 모든 힘이 이제는 우리로부터 흘러나가기 때문이라는 확신을 얻게 된다. 그렇다, 우리는 불가피하게 신에게로 향하기 마련인데, 그 까닭은 이 종교적인 감정이 본질상 너무나 순수하고, 그것을 경험하는 영혼을 매우 기쁘게 해주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의 모든 다른 상실을 보상해준다.'"

 

 

정재승, <열 두 발자국>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오늘 죽는다고 생각하면 그 어떤 상황도 그보다 비극적이진 않기 때문에, 두려움 없이 의사결정을 할 수 있습니다. ... 이건 아마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도 좋은 전략이 될 것입니다. 내일 혹은 한 달 후에 죽는다고 생각하면 앞으로 내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고민하게 되겠지요. 그리고 정말 소중한 일들에 집중하게 되고, 주변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일들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되고, 선택의 무게도 훨씬 가벼워집니다. '내가 눈 감을 때 무슨 후회가 들까'를 생각해보면 절실함 혹은 진정성은 커질테고요. 그런 면에서,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절대 불길하거나 우울한 것이 아니에요. 결국 삶을 살아내는 데 도움이 되지요. 죽음이라는 최악의 상황에서는 빠르게 결정하지 못할 일어 없어집니다.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집착을 완전히 버릴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그저 불행을 겪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아무런 위안이 없는 불행을 겪어야 한다. 위안을 느껴서는 안 된다. 어떠한 위안도 드러나서는 안 된다. 그럴 때 비로소 형용할 길 없는 위안이 위로부터 내려오게 된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빚진것을 면해 줄 것. 미래의 보상을 기대하지 않으면서 과거를 받아들일 것. 그 순간 시간을 정지시킬 것. 이것은 또한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기도 하다." - 시몬 베이유, <중력과 은총>

 

 

김연수, <소설가의 일>

결론적으로 나는 불멸을 믿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불멸은 사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우주적인 것이다. 우리들은 계속 불멸할 것이다. 우리들의 육체적인 죽음을 넘어서 우리의 기억은 남을 것이며, 우리의 기억을 넘어서 우리의 행위들과 우리가 한 일들과 우리들의 태도는 세계사의 경이로운 부분으로 남을 것이다. 비록 우리가 그것을 모른다고 할지라도, 아니 우리가 그것을 모르는 것이 좋을지라도. - 보르헤스

 

 

소노 아야코, <약간의 거리를 두다>

인생은 어디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끝까지 희망을 걸고 기다려야 한다. 죽음 직전에 다시 살아 돌아오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최후의 순간까지 내가 살아온 의미에 대한 해답은 정해지지 않는다.

 

 

빈센트 반 고흐, <영혼의 편지>

타라스콩이나 루앙에 가려면 기차를 타야 하는 것처럼, 별까지 가기 위해서는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죽으면 기차를 탈 수 없듯, 살아 있는 동안에는 별에 갈 수 없다. 증기선이나 합승마차, 철도 등이 지상의 운송수단이라면 콜레라, 결석, 결핵, 암 등은 천상의 운송 수단인지도 모른다. 늙어서 평화롭게 죽는다는 건 별까지 걸어간다는 것이지.

 

 

코에케 류노스케, <생각 버리기 연습>

죽음을 체험하면 평온해진다. 인간이면 누구나 노화의 길을 걷고 신체도 조금씩 그 기능을 상실한다. '노화'는 길게 봤을 때 완만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과 같고, 죽음을 천천히 체험하는 것이다.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면 우리의 마음은 평온해진다.

 

 

사노 요코, <사는 게 뭐라고>

"나 자신이 죽는 건 아무렇지도 않지만, 내가 좋아하는 가까운 친구는 절대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죽음은 내가 아닌 다른 이들에게 찾아올 때 의미를 가진다."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

롤스는 <정의론>에서, 프리드먼의 견해에 반영된 자기 위안식 조언을 거부한다. 그는 격앙된 어조로, 우리가 잊기 쉬운 익숙한 진실을 이야기한다. 즉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은 마땅히 존재해야 하는 방식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재능이 분배되는 방식과 사회 환경의 우연성이 부당하다는 이유로 제도를 강제하는 것은 언제나 문제가 있게 마련이며, 그러한 부당함은 인간의 합의에도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거부해야 한다. 더러 부당함을 간과하는 구실로도 이용되는 그 주장은 부당함을 묵인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죽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태도와 똑같이 취급한다. 자연의 분배 방식은 공정하지도, 불공정하지도 않다. 인간이 태어나면서 특정한 사회적 위치에 놓이는 것 역시 부당하지 않다. 그것은 단지 타고나는 요소일 뿐이다. 공정이나 불공정은 제도가 글거한 요소들을 다루는 방식에서 생겨난다."

 

 

로널드 T. 포터, <욱하는 성질 죽이기>

나는 강력한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였을 때 생존성 분노가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사고력을 마비시킬 정도로 강력한 두 감정이 조합되어 생기는 것이다. 물론 욱하는 성질을 내는 사람을 보면 화만 내는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핵심 메시지가 '네가 날 죽이기 전에 내가 널 먼적 죽여야 해'라는 걸 기억하라. 이것은 '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널 죽이겠다' 혹은 '나를 방해하지 못하게 너를 죽이겠다'와는 무척 다른 생각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공격적으로 변한 것이다.

 

 

이덕무, <문장의 온도>

병자가 신음할 때는 평생 품고 있던 모든 욕심이 전부 사라진다. 오직 회복되기만을 바라기 때문에 다른 일에 마음을 둘 겨를이 없다. 그런데 어떤 병자는 병을 앓고 치료를 받는 도중에도 돈과 쌀 등 자질구레한 일을 관장한다. 또한 영리를 도모하는 일이 자신의 오랜 병치레 때문에 기회를 잃지나 않을까 염려한 탓에 울화가 치밀어 간혹 생명을 잃는 자도 있다. 어찌 크게 불쌍한 일이 아니겠는가. 원래 병이 없거나 욕심이 없으면서 삶과 죽음을 계산하지 않은 사람은 지극히 덕이 높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안드레아 울프, <자연의 발명>

"꽃이 시든다고 해서 슬퍼할 이유는 없습니다. 가을 숲 바닥에 두껍게 쌓여 썩어가는 낙엽도 마찬가집니다. 이듬해 봄이 되면 숲이 모두 되살아날 테니까요. 죽음은 자연순환nature's cycle의 일부이며, 자연의 건강과 활력을 보여주는 징후입니다. 자연의 한복판에 사는 사람에게, 암흑 같은 절망은 있을 수 없습니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

 

 

카트린 지타, <내가 혼자 여행하는 이유>

"우리가 죽음을 통해 배우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이라는 톨스토이의 말처럼 여행을 통해 알게 되는 것은 삶의 터전을 단단하게 가꿔 나가는 방법이다. 그 방법을 직접 깨달을 수 있는 여행을 하게 되길 바란다.

 

 

호프 자런, <랩걸>

첫 뿌리가 감수하는 위험만큼 더 두려운 것은 없다. 운이 좋은 뿌리는 결국 물을 찾겠지만 첫 뿌리의 첫 임무는 닻을 내리는 것이다. 닻을 내려 떡잎을 한곳에 고정시키는 순간부터 그때까지 누리던 수동적인 이동 생활에 영원히 종지를 찍게 된다. 일단 첫 뿌리를 뻗고 나면 그 식물은 덜 추운 곳으로, 덜 건조한 곳으로, 덜 위험한 곳으로 옮길 희망(그 희망이 아무리 미약한 것이었다 할지라도)을 포기해야 한다. 서리와 가뭄과 굶주린 입이 찾아와도 그로부터 도망갈 가능성 없이 모든 것을 직면해야 한다. 그 작은 뿌리는 자기가 앉아 있는 그 장소에 몇 년, 수십 년 혹은 수백 년의 미래에 어떤 일이 생길지를 점칠 기회를 딱 한 번 가진다. 뿌리는 그 순간의 빛의 습도를 감지하고 자기 속에 내재된 프로그램으로 정보를 점검한 다음 글자 그대로 몸을 던져 뛰어든다. 종피(씨의 껍질)에서 첫 배축(식물의 배에서 중심축을 이루는 부분) 세포가 자라나는 순간 모든 것을 건 도박이 시작된다. 싹이 자라기 전에 뿌리가 먼저 내리기 시작하기 때문에 엽록소에서 양분을 만들어내기까지는 며칠, 때로는 몇 주를 기다려야 한다. 뿌리는 내리는 작업은 씨 안에 들어 있던 마지막 양분을 모두 소진시킨다. 모든 것을 건 도박이고, 거기서 실패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성공할 확률은 100만분의 1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도박이 성공하면 수확도 엄청나게 크다. 뿌리가 필요한 것을 찾게 되면 부피가 커져서 주근이라고 부르는 곧은 뿌리로 자란다. 커지면서 기반암을 쪼개는 힘까지도 발휘하는 주근은 식물 전체의 닻 역할을 할 뿐 아니라 몇 년에 걸쳐 내내 하루에 몇 갤런(1갤런은 약 3.79리터)의 물을 빨아들인다. 지금까지 인간이 발명해낸 어떤 기계적 펌프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다. 주근은 곁뿌리를 내보내 옆에 서 있는 다른 식물들의 뿌리와 얽혀서 위험 신호를 주고받는다. 시냅스를 통해 정보를 주고받는 뉴런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이 뿌리 시스템 즉 근계의 표면적을 모두 합하면 이파리 면적을 모두 합한 것의 100배가 넘는 경우가 많다. 땅 위의 모든 것, 정말이지 모든 것을 제고해도 멀쩡한 뿌리 하나만 있으면 대부분의 식물들은 비웃듯 다시 자라난다. 그리고 그런 희생은 한두 번에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반복된다.

 

부활초들은 대부분 작아서 우리 주먹보다 크지 않다. 보기 싫은 외모에 작고 쓸모없고, 그리고 특별하다. 비가 오면 부활초의 이파리는 다시 부풀어 오르지만 48시간 동안 초록색으로 변하지 않는다. 광합성을 시작하려면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죽음에서 다시 깨어난 직후 그 묘한 기간 동안 식물은 순수하게 농축된 당을먹으며 살아남는다. 1년 내내 먹고살 수 있는 수크로오스가 단 하루 만에 관을 통해 온몸에 퍼지면서 짙은 달콤함이 지속된다. 이 작은 식물이 불가능한 일을 해낸 것이다. 죽음의 시든 갈색을 뛰어넘어 다시 살아난 위업을 이루었지 않은가. 물론 이 기적은 오래가지 않는다. 하루 이틀 사이에 모든 것이 불가피하게 정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렇게 극적인 인생도 결국은 계속 갈 수 없어서 장기적으로는 부활초마저도 시들고 완전히 죽는 때가 온다. 그러나 잠시 스쳐지나가듯 누리는 영광스러운 그 순간 부활초는 다른 식물은 전혀 모르는 비밀스러운 지식을 누린다. 비록 초록이 아니면서도 성장을 하는 비밀 말이다.

 

 

구본권, <로봇시대, 인간의 일>

감정은 인간의 강점이자 결함이다. 논리적인 설명과 이해가 불가능한 사람의 행동은 모두 감정과 의지에서 비롯한 것이다. 감정과 의지를 빼고는 설명할 수 없는 행동은 인간을 예측 불가능한 존재로 특징짓는다. 인간의 감정과 의지는 수백만 년에 걸친 진화 과정에서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전략의 소산이다. 고통과 죽음에 대한 공포가 만들어낸 인간의 본질적 요소다.

 

 

유시민, <나의 한국현대사>

고령화와 에너지 위기, 양극화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필요한 변화를 이루려면 민주주의 제도와 절차를 통해 국민의 공감을 이루어야 하는데, 이것은 산업화나 민주화보다 훨씬 더 어렵고 복잡한 과제다. 각자의 욕망과 신념과 이기심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연민, 교감, 공감을 바탕으로 상호이해와 협력을 이루어야만 이 과제를 해낼 수 있다. 여기서 핵심은 시민들이 자신의 욕망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관리하면서 우선순위를 조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난 반세기 동안 욕망 피라미드의 아래쪽에 있는 '생리적 욕망'과 '안전에 대한 욕망' 충족에 지나치게 집착해 살면서 '자기 존중'과 '자아실현의 욕망'을 후순위로 밀어두었다. 더 많은 돈, 더 높은 지위, 더 큰 권력을 얻는 일에 매달려 자기 자신과 타인의 존엄을 무시하고 팽개쳤다. 협력보다 경쟁에, 원식과 상식보다 반칙과 편법에, 인간적 공감과 연대의식보다 자기중심적 이해타산에 끌리며 살았다. 세월호의 비극은 그렇게 달려온 욕망의 대한민국현대사가 도달한 곳이 어디인지를 보여주었다. 그 아이들이 애석한 죽음 앞에서 기성세대가 느낀 '미안함'은 그 역사에 대한 성찰과 반성에서 비롯한 감정이 아닌가 생각한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 아니다. 미래는 우리들 각자의 머리와 가슴에 이미 들어와 있다. 지금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이 미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 시각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는 것들이 시간의 물결을 타고 나와 대한민국의 미래가 된다. 역사는 역사 밖에 존재하는 어던 법칙이나 힘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역사를 만드는 것은 사람의 욕망과 의지다. 더 좋은 미래를 원한다면 매 순간 우리들 각자의 내면에 좋은 것을 쌓아야 한다. 우리 안에 만들어야 할 좋은 것의 목록에는 역사에 대한 공명도 들어 있다. 우리가 만든 대한민국현대사의 갈피마다 누군가의 땀과 눈물, 야망과 좌절, 희망과 성공, 번민과 헌신, 어리석은 악행과 억울한 죽음이 묻어 있다. 그 55년의 이야기를 마치면서, 나는 그 모든 것에 공명하고 싶어하는 동시대의 벗들에게 말하고 싶다. 벗이여, 미래는 우리 안에 이미 와 있습니다!

 

 

로제 폴 드루아, <걷기 철학자의 생각법>

세네카에게 철학자의 걷기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생각과의 관계다. 우리는 생각하듯이 걷고, 걷듯이 생각한다. 그러나 이 등치는 원칙적으로 걸음의 세세한 동작 속에 표현되지 않는다. 그것은 차라리 걸음의 방향에서 제 의미를, 고유의 스타일과 기능을 취한다. 세네카는 삶이 일종의 걷기라는 생각을 출발점으로 삼고 <루킬리우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거듭 강조한다. "너는 태어난 날부터 죽음을 향해 걷고 있다." 이것은 그저 수사법이 아니다. 산다는 건 사람들과 시간 속에서, 자연과 관계를 맺으며, 다시 말해 '선'과 관계를 맺으며 자신만의 고유한 리듬으로 걷는 일이다. 현자는 나아가기 위해 하나의 리듬을 선택한다. 그걸 세네카는 "항상 같은 길을  따르는 삶의 평온하고 중단 없는 걸음"이라는 말로 묘사했다. 모든 인간의 삶이 그 자체로 하나의 걷기이지만, 지혜를 추구하는 철학자의 걸음은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지혜를 바삐 좇는 문하생들은 끊임없이 추락을 거듭하며 걷는다."

 

자연 속에서 봉오리는 터지고 스스로 파괴되면서 불안정해진다. 그것은 죽음 속으로 추락하고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꽃으로 변신하고 새로운 형태로 다시 안정되기 위해서다. 꽃도 균형을 잃고 변신하고, 열매라는 새로운 형태로 다시 균형을 찾는다. 이 자가동력 작동은 모든 사물이 내면으로부터 파괴되어 다른 사물로, 같은 동시에 다르고, 파기되는 동시에 보존되는 사물로 지속되게 해준다. 우리는 이것을 '변증법'이라 부른다.

 

 

김난도 외, <트렌드 코리아 2018>

케렌시아는 회복과 모색의 장소다. 소설가 헤밍웨이는 그의 저서 <죽음의 오후>에서 이렇게 말한다. "소는 본능적으로 케렌시아를 찾는다. 그곳은 소의 머릿속에 바로 떠오르지 않는다. 인간과 쟁투하는 동안 서서히 발견된다. 소는 거기로 들어가면 뒤에 벽이 서 있는 것처럼 안정을 되찾는다.", 군중의 함성과 죽음의 공포가 뒤섞인 그곳에서 마지막 숨결 하나까지 모아 선다. 케렌시아에서 안정을 되찾는 순간 소는 마지막 죽을 힘을 폭발시킨다. 헤밍웨이도 "그곳에서 소는 인간이 꺾을 수 없는 막강한 힘을 갖는다"라고 말했다.

 

 

이기주, <말의 품격>

손무는 "전쟁은 죽음과 삶의 문제이므로 면밀히 살피지 않을 수 없다. 싸워야 할 때와 싸우지 말아야 할 때를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부전이굴인지병, 선지선자야不戰而屈人之兵, 善之善者也", 싸우지 않고 상대를 무너뜨리는 것이 최상의 전략.

 

 

김영하, <오직 두사람>

"전신마취를 하면 인간은 그때 그냥 죽는 거야. 문서를 복사하면 열화가 일어나듯이 오랜 시간 마취됐다가 깨어난 사람은 원래의 그 사람이 아니야. 일종의 복사물인 거지. 도마뱀의 꼬리도 잘리면 다시 자라나긴 하지만 원래 크기로는 자라지 않는다잖아." 오빠다운 말이죠. 오빠가 거제도의 조선소에서 일했던 건 아시죠? 얼마 전 정리해고를 당했어요. 요새 그쪽이 다 어려워요. 회사에서 잘리던 날, 회사 담벼락에 노조가 붙여놓은 플래카드를 봤대요. '해고는 죽음이다.' 그걸 보고 오빠가 뭐라고 했는지 저는 알아요. "아니지, 죽음이 해고지. 해고된다고 죽는 것은 아니지만 죽으면 모든 게 끝나니까" 명언이나 상투어를 뒤집어서 새로운 말을 만드는 것은 오빠의 오랜 버릇이거든요."해봐, 이상하게 다 말이 된다니까." 오빠가 사람들에게 장담하면 그때마다 사람들이 이것도 해보라, 저것도 해보라며 문장을 던져요.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누군가 이렇게 말하면 오빠는 빙글빙글 웃으며 "즐길 수 없다면 피하라"고 답하고요.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에 샘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라고 <어린왕자>의 유명한 구절을 제시하면, "어딘가에 샘이 숨겨져 있다면 그게 바로 사막이다"라고 받아요. 가끔 어떤 격언은 뒤집어놓으면 더 의미심장해 보이기도 하더라고요. 예를 들어, '금이 침묵이다' 같은 말이 그래요. 오빠가 해고를 당하던 날, 인사팀의 입사 동기가 그러더래요. "힘내라. 위기가 기회라잖아." 오빠가 뭐라고 했을지 언니도 이제 아시겠죠? " 웃기시네, 기회가 위기야."

 

 

유시민, <어떻게 살 것인가>

하루의 삶은 하루만큼의 죽음이다. 어떻게 생각하든 이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새날이 밝으면 한 걸음 더 죽음에 다가선다. 그런데도 우리는 때로 그 무엇엔가 가슴 설레어 잠들지 못한 채 새벽이 쉬이 밝지 않음을 한탄한다. 결코 영원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누군가에게 영원한 사랑과 충성을 서약한다. 죽음을 원해서가 아니다. 의미 있는 삶을 원해서다. 인생은 그런 것이다. 하루가 모여 인생이 된다. 인생 전체가 의미 있으려면 살아 있는 모든 순간들이 기쁨과 즐거움, 보람과 황홀감으로 충만해야 한다. 그런데도 때로 그것을 잊는다. 오늘의 삶을 누군가를 향한 미움과 원한으로 채운다. 가진 돈이 많은데도 더 많은 돈을 얻으려고 발버둥치면서 얼마 남지 않은 삶의 시간을 탕진한다. 이미 높은 곳에 있으면서도 더 높은 곳으로 오르기 위해 오늘 누릴 수 있는 행복을 내일로 미루어둔다. 그 모든 것이 나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묻지 않는다. 그리하여 운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때쯤에야 비로소, 자신이 의미없는 인생을 살았음을 허무하게 깨닫는다. 그러나 한 번 할아버린 인생은 되돌릴 수 없으며, 놓쳐버린 살므이 환희는 되찾을 수 없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삶을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방식이 최선이어서가 아니라, 자기 방식대로 사는 길이기 때문에 바람직한 것이다." 앞에서 인용한 바 있는 철학자 밀의 주장이다. 그냥 이 구절을 읽으면 그저 옳은 말로 보인다. 하지만 인생은 너무 짧은 여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읽으면 그 느낌이 사뭇 달라진다. 그렇다. 내 방식대로 살아야 한다. 누가 시키는 대로 또는 무엇인가에 얽매어 살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 그런 생각이 든다. 삶의 모든 순간은 죽음이라는 운명과 대비할 때 제대로 의미를 드러낸다. 

 

나는 요즈음 죽음에 대해서 예전보다 자주 생각한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인지, 아니면 자꾸 죽음이 생각나서 더 깊게 삶을 고민하게 된 것인지 선후를 알 수는 없다. 어떻게 죽는 것이 좋을까.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런 고민이다. 여기서 죽음이란 일반적 추상적 개념으로서의 죽음이 아니다. 개별적 주체적 사건으로서의 죽음, 즉 내 자신의 죽음이다. 사실 나는 죽어가고 있다. 열정적으로 일하고, 즐겁게 놀고, 깊게 사랑하고, 뜨겁게 연대하는 모든 순간마다 조금씩 죽는다. 나는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삶과 죽음의 마지막 순간을 맞게 될까....

 

'죽음 다음에 무엇이 있을까? 만약 내일 죽는다면 오늘 무엇을 할까? 잘 죽으려면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 것일까?' 혼자 이런저런 대답을 생각해본다. 답을 꼭 찾아야 할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남은 삶이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죽음은 단순히 삶의 끝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죽음은 삶의 완성이다. 소설도, 영화도, 연극도 모두 마지막이 있다. 마지막 장면을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따라 스토리가 크게 달라진다. 어떤 죽음을 준비하느냐에 따라 삶의 내용과 의미, 품격이 다라진다. 남아 있는 삶의 시간이 길수록 죽음에 대한 생각은 더 큰 가치가 있다. 아직 젊은 사람일수록 더 깊이 있게 죽음의 의미를 사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의미를 부여할 수 있고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한다면 휠체어를 타든 목발을 짚든 지팡이를 짚든 간에 그 삶은 언제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 의미가 사라지면, 그래서 그것을 이성으로 깨닫게 되면 그때가 죽을 때인 거지요. 전 지금처럼 살아가는 시간이 과연 저에게 가치 있는 것인가에 대해 많이, 아주 많이 생각했습니다. 결론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저의 고통은 아무 가치가 없고 제 고통의 원인 역시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저에게 제때 죽을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면 그 아픔은 인간적인 수준이 될 수 있었을 겁니다. 죽는다는 건 단지 그런 거예요. 태양이 제 기억 속에 가장 아름다운 작별 인사를 새겨두는 것처럼 각자 가지고 있는 좋은 추억을 이 세상과 우리가 사랑한 모든 것에 남겨두는 것, 잠드는 것에 대한 어떤 두려움도 슬픔도 원망도 없이 그저 피곤에 지쳐 고요하고 평온하게 눕는 겁니다. 그러나 죽음을 그렇게 느끼기 위해서는 지나치게 인간적이길 바란다고 할 만큼 굉장히 자유롭고 선해야 겠지요. 안락사, 또는 품위 있게 죽을 권리를 인정하려면 진정으로 인간과 삶을 사랑할줄 알아야 하고 선의 심오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 죽음은 내게 주어진 마지막 자유였다, 라몬 삼페드로.

 

개인이 생존하는 데는 사회적 결속과 유대, 상호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경쟁에서 이겨 살아남으려면 다른 사람을 이기는 능력 뿐만 아니라 타인과 쉽게 공감을 이루어 협력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타인의 기쁨뿐만 아니라 아픔에도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그대가 해고 노동자들의 고통과 죽음 때문에 마음이 불편하고 눈물이 나려 한다면, 그것은 그대가 지극히 정상적인 인간임을 입증하는 생물학적 증거가 된다.

 

칸트의 충고를 기억하자. 행복한 삶을 원한다면 스스로 세운 준칙에 따라 행동하되 그것이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도록 하라. 어떤 경우에도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 이름을 남기기 위해 사는 것은 자기 자신을 수단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훌륭하고 행복한 삶이라고 할 수 없다. 훌륭한 인생, 행복한 삶은 죽음 너머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다. 겉으로는 이름이 남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남는 것은 그 이름을 떠올리게 만드는, '지금 여기'에서 보낸 삶의 내용이다. 이름을 남기는 것이 삶의 이유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은 삶의 결과일 뿐이다. 누군가의 삶이 다른 사람의 마음에 잊기 어려운 무엇인가를 남기면 그 결과, 원하든 원치 않든 저절로 이름이 남는다. ... 훌륭한 삶을 살면 이름이 남는다. 그러나 이름을 남겼다고 해서 다 훌륭하게 산 것은 아니다. 이름이 길이 남지 않음을 애석하게 여길 필요는 없다. 그것은 행복한 삶의 본질적 요소가 아니다.

 

"사람의 수명이란 기껏해야 백 살, 중간 정도로 팔십 살, 밑으로 가면 6십 살이다. 그것도 병들어 여위거나 남의 죽음을 문상하고 또는 걱정거리로 괴로워하는 따위를 제하고 나면 사람의 일생 동안에서 입을 벌리고 웃을 수 있는 일은 한 달 중 불과 네닷새에 지나지 않는다. 하늘과 땅은 무궁하지만 사람은 때가 오면 죽게 마련이다. 이 유한한 몸을 무궁한 천지 사이에 맡기고 있기란 준마가 문틈을 휙 지나가 버리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자기의 기분을 만족시키고 그 수명을 보양하지 못하는 자는 모두 도에 능통한 사람이 아니다." - 莊子 雜篇 29. 도척(盜跖) 7. 공자의 도는 본성에 어긋나는 것이다. 

 

 

바버라 브래들리 해커티, <인생의 재발견>

활기차게 살라. 당신 삶의 일부(배우자, 자녀, 일)로부터 정서적으로 분리되면 산소가 부족한 환자처럼 죽음에 이르고 말 것이다. 끔찍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사실 의도한 바지만), 이제 당신 인생에서 자동조종장치는 사라졌다는 통찰이 거듭해서 당신을 찾아올 것이다. 주의를 기울여 열정을 쏟을 대상을 찾아라. 활기찬 중년을 보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목적의식을 가지고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8살 이하의 아이들이 40대 이상의 중년에게 최고의 롤모델일 수도 있다. 아이들은 열심히 공부하고, 새로운 기술을 익히고, 새로운 것에 열정을 쏟는다. 그들은 마침내 성공을 이룰 때까지 끊임없이 도전하고 실패하며, 마음의 상처를 무릅쓰면서 친구를 사귀려 든다. 여기서 중년을 위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물론 결혼생활에 열정과 애정을 쏟기 위해서는 많은 수고가 따르고, 단지 수입뿐 아니라 의미를 추구하는 일을 택하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며, 노화된 두뇌를 명석하게 만들려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연구결과 드러난 사실은 매우 명확하다. 사람은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일을 할 때, 그 순간뿐 아니라 장기적으로도 보다 큰 기끔과 만족을 느낄 수 있다.

 

 

이기주, <언어의 온도>

영화 'Youth'. 시간과 세월만으로 나이가 결정되지 않는다. 나이를 좌우하는 뜨거운 용광로가 있다고 치자. 거기에는 건강이나 신체적 상태가 가장 먼저 들어갈 테지만, 인간의 감정과 생각, 상상력, 그리고 두려움을 물리치는 용기, 안이함을 뿌리치는 모험심 같은 요소들도 뒤섞이기 마련이다. 단순히 '젊음'을 잃으면 '늙음'이 될까? 삶은 죽음으로 향하는 여정에 불과할까? 글쎄다. 어떤 이는 '늙은 젊은이'로 불리고 또 어떤 사람은 '젊은 노인'으로 불리는 걸 보면 '늙음=나이 듦'이라는 등식이 꼭 성립하는 건 아니다. 늙음은 무엇인가 하는 이 만만치 않은 질문에 여전히 나는 답을 하지 못하겠다. 다만 '낡음'이 '늙음'의 동의어라는 주장에는 절대 동의하지 않는다. 느끼는 일과 깨닫는 일을 모두 내려놓은 채 최대한 느리게 생을 마감하는 것을 유일한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순간, 삶의 밝음이 사라지고 암흑같은 절망의 그림자가 우리를 괴롭힌다. 그때 비로소 진짜 늙음이 시작된다.

 

'부드러움'에는, '강함'에 없는 것이 있다네. 그건 다름 아닌 생명일세. 생명과 가까운 게 부드러움이고 죽음과 가까운 게 딱딱함일세. 살아 있는 것들은 죄다 부드러운 법이지.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이와는 대조적으로 하이데거에게는 '죽음'이 현존재(Dasein)의 실존의 표지이다. 우리는 죽음 자체를 결코 경험할 수 없기에 하이데거는 현존재를 '죽음을 향한 존재'(Sein-zum-Tode)라고 정의했다. 죽음은 현존재의 실존의 표지가 되는데, 왜냐하면 나는 내 자신의 죽음을 죽어야 하며, 어떤 다른 사람도 나를 위해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음만이 현존재의 실존의 진정성(Eigentlchkeit)를 입증한다. 죽음, 오직 죽음만이 현존재의 실존을 진정한 것으로 만든다. <존재와 시간>에 나타난 하이데거의 사상 - 아도르노의 비판적 표현을 빌리자면 - 은 '진정성이라는 특수용어'로 소모되고 선점되어 있다. 따라서 불행하게도 하이데거는 사회적 사건으로서의 죽음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이데거와 아렌트의 차이는 한편에는 '죽음'과 '진정성',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탄생'과 '복수성'으로 이루어진 대립항 사이의 차이다.

 

기술, 특히 미디어 기술이 우리를 점점 더 일차원적으로, 심지어 전체주의적으로 만들고 있다. 미디어(매체)가 메시지가 되어감에 따라, 간단히 말해, 미디어는 우리를 더욱더 평범하게, 획일적으로, 그리고 생각 없이 만든다. 필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점점 더 일차원적으로 그리고 전체주의적으로 되어왔고, 또 그렇게 되어가게 될 이 지구상의 인류를 위해 아이히만의 '악의 평범성'에 대한 아렌트의 담론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 가장 궁극적이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 두 번째로 궁극적인 메시지라는 것이다. 여기서 벗어나는 길은 없어 보인다. 지구상의 인류뿐만 아니라 자연에 대해서도 불필요한 잔인함, 죽음, 고통을 끼치는 데 이를 것이라고 필자가 두려워하는 '무사유'를 우리 모두의 모습으로 갖는 데 이르게 될 것이다. 바로 이때 인류의 역사-아무도 생각하지도 못했던 제임스 조이스의 표현을 사용하자면-는 깨어날 길이 없는 악몽이 될 것이다.

 

 

틱낫한, <중도란 무엇인가>

'중도'는 '그것이 있기 때문에 이것이 있다', '그것이 없기 때문에 이것이 없다'라고 말한다. 무명(無明 : 무지 혹은 어리석음)이 있기 때문에 충동이 있고, 충동이 있기 때문에 의식이 있고, 의식이 있기 때문에 명색(名色 : 정신과 물질)이 있고, 명색이 있기 때문에 여섯 가지 감각기관(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이 있고,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있기 때문에 접촉이 있고, 접촉 있기 때문에 감정이 있고, 감정이 있기 때문에 갈망이 있고, 갈망이 있기 때문에 집착이 있고, 집착이 있기 때문에 생성이 있고, 생성이 있기 때문에 태어남이 있고, 태어남이 있기 때문에 늙음, 죽음, 고통, 슬픔이 있다. 이 세상의 모든 괴로움은 이렇게 일어난다. 그러나 무명이 사라지면 충동이 소멸하고, 충동이 사라지면 의식이 소멸하고, 의식이 사라지면 명색이 소멸하고, 명색이 사라지면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소멸하고,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사라지면 접촉이 소멸하고, 접촉이 사라지면 감정이 소멸하고, 감정이 사라지면 갈망이 소멸하고, 갈망이 사라지면 집착이 소멸하고, 집착이 사라지면 생성이 소멸하고, 생성이 사라지면 태어남이 소멸하고, 결국 늙음, 죽음, 고통, 슬픔이 사라질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괴로움이 이렇게 사라진다. - 잡아함경 301(Samyukta agama 301)

 

 

장 지글러,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풍요가 넘쳐나는 행성에서 날마다 10만 명이 기아니 영양실조로 인한 질병으로 죽어간다. 그렇지만 인간의 의식은, 희생자들뿐만 아니라 북반구 국민들의 의식은 이런 상태를 오래 참지 못할 것이다. 변화된 의식은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충분한 식량을 확보하고 인간다운 삶을 누리기를 원한다. 기아로 인한 떼죽음은 참으로 끔찍한 반인도적 범죄이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낄 줄 아는 유일한 생명체인 인간의 의식 변화에 희망이 있다.

 

"약자와 강자 사이에서는 자유가 억압이며 법이 해방이다." - 장 자크 루소, <사회계약론>. 시장의 완전한 자유는 억압과 착취와 죽음을 의미한다. 법칙은 사회정의를 보장한다. 세계시장은 규범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이것은 민중의 집단적인 의지를 통해 마련되어야 한다. 

 

 

유시민, <청춘의 독서>

삶도 내가 원하는 것이 의義도 내가 원하는 것이지만, 둘 모두를 가질 수 없다면 나는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할 것이다. 삶도 내가 원하는 것이지만 삶보다 더 절실히 원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구차하게 삶을 얻으려 하지 않으며, 죽음도 내가 싫어하는 것이지만 죽음보다 더 싫어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환란을 피할 수 있어도 피하지 않는 것이다. (······) 오직 현자賢者만 이런 마음을 가진 것이 아니라 사람마다 가지고 있지만 현자는 이를 잃지 않았을 뿐이다. - 맹자, 『고자 상』 10.

 

 

콜린 엘러드, <공간이 사람을 움직인다>

최초의 인류가 건축물을 지으려 한 이유는 인간의 유한성을 인식한 데 대응하기 위해서이고, 이런 원시 건축물은 죽음과의 원초적 투쟁의 표현이다.

 

 

프리초프 카프라,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

현대 물리학은 창조와 붕괴의 율동이 계절의 순환과 모든 생명 있는 피조물의 탄생과 죽음에서 나타날 뿐만아니라, 생명이 없는 무기 물질의 바로 그 본질이라는 것을 밝혀 왔다. 양자장 이론에 따르면 물질의 구성 요소들 간의 모든 상호 작용은 가상적 입자들의 방출과 흡수를 통하여 발생한다. 한층 더 나아가 창조와 붕괴의 무도는 물질을 존재케 하는 기본이 된다. 왜냐하면 모든 물질적 입자들은 가상적 입자들의 방출과 흡수를 통하여 '자체 상호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현대 물리학은 모든 아원자적 입자가 에너지 무도를 한다는 것뿐 아니라 창조와 붕괴의 고동치는 에너지 무도 바로 그것이라는 것을 드러냈다. 이 무도의 모형들은 각 입자들이 지닌 본성의 근본적인 양상이며 그 성질의 많은 것을 결정짓는다. 예를 들면 가상의 입자들의 방출과 흡수에 포함되어 있는 에너지는 자체 상호 작용하는 입자의 질량에 공헌하는 일정한 양의 질량에 상당한다. 다른 입자들은 그 무도에서 다른 모형을 전개시켜 다른 양의 에너지를 필요로 하며, 따라서 다른 질량을 갖게 된다. 끝으로 가상적 입자들은 모든 입자 상호 작용과 대부분의 입자 성질의 본질적인 양상일 뿐만 아니라 진공에 의해서도 생겨나고 붕괴된다. 따라서 물질뿐만 아니라 허공 역시 끝없이 에너지 모형을 생성시키고 소멸시키면서 우주적 무도에 참여하고 있다.

 

 

알랭 드 보통, <불안>

기독교적인 죽음의 경고memento mori의 훌륭한 전통 안에 자리 잡은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죽음에 대한 생각 때문에 세속적인 것보다 영적인 것을, 휘스트와 저녁 파티보다 진실과 사랑을 중요하게 여기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죽음에 대한 생각의 가장 큰 효과는 나일 강변에서 술을 마시든, 책을 쓰든, 돈을 벌든, 우리가 당장 일어나고 있는 일로부터 가장 중요한 일로 시선을 돌리게 해준다는 것이다.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판단에 덜 의존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어차피 다른 사람들이 우리 대신 죽어주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우리 자신이 소멸을 생각하다 보면 우리가 마음속으로 귀중하게 여기는 생활방식을 향해 눈길을 돌리게 된다.

 

에드워드 영의 시 <밤 생각Night Thought>

현자, 귀족, 권력가, 왕, 정복자

죽음은 이들을 겸손하게 만든다.

왜 한 시간의 영광을 위하여 그토록 애를 쓰는가?

부의 냇물에서 거닐고 명성인 높이 치솟으면 뭐하는가?

지상에서 가장 높은 자리도 "여기 그가 누워 있다"에서 끝이 나고,

가장 고귀한 노래도 "흙에서 흙으로"가 마무리를 하는데.

 

 

시어도어 젤딘, <인생의 발견>

인간의 고유성은 그들이 (혹은 대다수가) 삶은 죽음에서 시작된다고 믿는다는 데 있다. 모차르트가 삶의 목적은 죽음이라고 말했을 때 지상의 삶은 다른 어딘가의 영원한 사후세계로 가는 짧은 여행이라는 뜻이다. 그 여행이 천국으로 이어진다고 믿는 사람도 있고, 다른 육신으로 환생한다고 믿는 사람도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날마다 태양을 따라 여행하는 우주여행자가 된다고 믿었다. 부처는 삶의 목적은 삶과 불가피한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지만 몇 번의 죽음을 거쳐야 비로소 해탈할 수 있다고 말했다. 유대교 예언자들은 삶의 보상은 "아버지 쪽으로 모이는 것이라고 말했고, 많은 문명에서 조상들에게 살아 있는 후손을 수호하는 역할을 맡겼다. 죽음은 지고의 예술로서 삶보다 더 어려운 것이었다. 스페인의 극작가 칼데론은 "인간의 가장 큰 죄는 태어난 것"이라고 말했다. 출산과 사후세계를 중시하는 태도는 결혼이 서른 살로 늦춰지고 100세까지 살 가능성이  높아진 시대보다는 삶이 한낱 촛불 같던 시대에 더 강렬한 의미를 띠었다. 하지만 인류의 가장 파괴적인 저항은 '삶의 의미'가 자연이나 신에 의해 영원히 정해져 있고 평범한 인간의 소망과는 별개로 존재한다는 신념을 뒤엎으려는 시도였다. 인간은 각자 삶이라는 선물을 자신의 이상과 욕구에 맞게 해석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새로운 확신이다. 따라서 "무엇을 받아들여야 하는가"라는 질문 대신 "삶에서 무엇을 기대하는가, 그리고 삶을 어떻게 만들어나갈 것인가"라고 바꾸어 물어야 한다. '삶' 아니라 당신 자신의 삶에서 무엇을 목적으로 삼고 싶은가? 따라서 삶의 목적이라는 개념이 무의미해진다. 자기 삶에 목적을 부여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욕구가 순종을 권좌에서 몰아낸다. 그러자 갑자기 진보의 개념이 힘을 얻는다. 진보는 지독히 외로웠을 개인의 투쟁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틀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부모처럼 일하고 결혼하고 먹고 옷을 입으면서 부모처럼 살 거라고 기대했다. 지금은 혼자 힘으로 더 나아져야 한다. 삶은 이제 태초부터 유유히 흐르던 강물을 타고 흐르는 여행이 아니다. 대신 삶은 길고 가파른 사다리의 미로이고 우리의 미래는 그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떨어지지 않는 능력에 달려 있다. 자기를 조상과 후손으로 이어진 기다란 사슬을 이루는 한낱 연결고리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 꿈꾸던 것 이상의 자격을 갖추고 성취하기 위해 경쟁해야 한다. 

 

 

손미나, <페루, 내 영혼에 바람이 분다>

'역사는 쉬지 않고 흐른다. 우리는 그 역사의 강을 따라 흘러가버리는 운명을 안고 태어난 인간들. 창틀에 소복하게 쌓였다가 바람 한번 불면 포로로 날아가는 먼지와도 같은 존재인 것이다. 그러니 짧은 여행길 같은 인생에서 욕심 따위는 버리고 걸어도 좋다. 죽음도 너무 두려워하거나 애석해하지 말지어다. 그것 또한 삶의 일부인 것이니.'

 

 

알랭 드 보통, <고항에서의 일주일>

죽음을 생각하면 우리는 무엇이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향하게 됩니다. 죽음이 우리에게우리가 마음속에서 귀중하게 여기는 삶의 길을 따라가도록 용기를 주는 거죠

 

 

죽어라! - 잘랄루딘 루미

죽어라! 죽어라!

이 사랑 안에서 죽어라!

네 만일 이 사랑 안에서 죽는다면

영혼이 새로워지리니

 

죽어라! 죽어라!

알고 있는 것의 죽음을

두려워 말아라

네 만일 시간에 대하여 죽는다면

영원한 존재가 되리니

 

죽어라! 죽어라!

너를 집착의 세계에 갇힌

죄수로 만든

저 사슬을 끊어버려라

 

죽어라! 죽어라!

불사에 대하여 죽어라

영원히 살게 되리니

 

죽어라! 죽어라!

이 구름에서 벗어나라

구름에서 떠날 때에

밝은 달로 뜨리니

 

죽어라! 죽어라!

속된 관심과 잡담과 시끄러운

소리에 대하여, 죽어라

 

사랑의 침묵 속에서

생명의 불꽃을 발견하리니

 

 

김승호, <알면서도 알지 못하는 것들>

두려움은 나의 가치를 훼손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한 공포에서 오기에 순응하고 따르며 복종하게 된다. 아직도 많은 국가들에서는 두려움을 국가 통치의 기술로 사용한다. 종교 역시 지옥 등의 공포를 팔고 있다. 회사 역시 노조에게는 공멸이란 공포를, 개인에게는 해고란 공포를 경영 기술로 이용하고 있다. 이처럼 낙오되면 죽는다는 두려움은 사람을 움직이는 거대한 힘이다. 누구도 죽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또 다른 거대한 힘이 있다. 그것은 사랑이다. 두려움이 스스로를 위한 이기심의 표상이라면 사랑은 남을 위한 이타심의 표상이다. 자신에 대한 사랑보다 남에 대한 사랑의 발현은 오히려 두려움을 이겨낸다. 내가 누군가를 진정 사랑한다면 나를 바칠 수 있기 때문이다. ... 사랑이란 외투를 입으면 두려움은 허상이란 것을 알게 된다. 용기가 두려움을 이기는 순간, 두려움은 실재하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사실 두려움이란 불확실성이 증가되고 내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불확실성과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 자체를 통제하겠다는 용기를 가지면 두려움은 실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람들은 사랑하다 헤어질까봐 두려워하고 꿈에서 추락할까봐 두려워하며 비난과 조롱에 휩싸일까 두려워한다. 이 모두는 사랑과 용기만 있으면 무엇이든 헤쳐나갈 수 있다. 사는 것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고 죽는 것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면 모든 것에 용기를 가질 수 있다. 두려움을 버리지 못한다면 두려움과 맞설 용기를 키우면 된다.

 

 

버트런드 러셀, <행복의 정복>

행복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이 우주의 한 시민이라고 생각하여 우주의 아름다움과 기쁨을 마음껏 즐기며, 자기는 후대의 생명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고 느낀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하여도 마음이 흔들리는 법이 없다. 이렇듯 생명의 줄기와 본능적으로 깊이 연결될 때, 우리는 가장 큰 기쁨을 찾아볼 수 있다.

 

눈앞의 이득만을 내다보는 태도를 초월하여 원대한 그리고 서서히 발전하는 목표를 가질 때, 당신은 한 사람의 고독한 존재가 아니라, 인류를 문명생활로 이끌어 가는 행렬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인생관을 갖고 살아갈 때, 당신은 인생의 어떤 길을 걸어가든 깊은 행복을 느낄 것이다. 인간이 삶을 영위한다는 것은 모든 시대의 위대한 것과 정신적인 교섭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한 개인의 죽음은 작은 사건에 불과하다.

 

세계는 어떤 손실로 말미암아 치명상을 입을 만큼 비좁은 곳은 아니다. 한두 번의 실패로 패배하고 손을 드는 것은 결코 판단에 민감하다고 해서 치하할 일이 못 되며, 그것은 어디까지나 생명력의 파괴로서 슬퍼해야 할 일이다. 인간의 모든 사랑은 죽음에 지배된다. 죽음은 어느 때든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닥쳐올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활 터전이 있으면, 인생의 의의와 목적이 우연에 의해 지배를 받기 쉽다. 따라서 지혜롭게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은 먼저 생각의 중심을 세우고, 그 이외에 여러 가지 2차적인 흥미를 갖도록 힘써야 한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건전한 상식의 토대 위에서, 하루하루의 생활을 즐겁고 명랑하게 영위하도록 힘써 행복을 손에 넣어야 하며, 행복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우주의 시민이라고 느끼고, 우주의 아름다움과 기쁨을 마음껏 즐기며, 자기 자신을 자기 뒤에 오는 생명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고 느끼므로, 죽음을 생각하여도 마음이 동요되지 않으며, 이와 같이 생명의 물줄기와 깊이 본능적으로 결합될 때에 가장 큰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

 

 

류시화,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길을 가는 사람'이다. 공간의 이동만이 아니라 현재에서 미래로의 이동, 탄생에서 죽음까지의 과정도 길이다. 인간을 '호모 비아토르'라고 하는데 '떠도는 사람', '길 위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삶의 의미를 찾아 떠나는 여행자,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방황하며 스스로 가치 있는 삶을 찾는 존재를 가리킨다. 호모 비아토르는 길 위에 있을 때 아름답다. 꿈을 포기하고 한곳에 안주하는 사람은 비루하다. 집을 떠나 자신과 대면하는 시간을 가진 사람만이 성장해서 집으로 돌아온다.

 

대재앙이 일어나리라는 걸 알면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할 것 같은가를 묻는 프랑스 일간지의 질문에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이렇게 답했다. "우리가 죽음의 위협을 받으면 삶이 갑자기 멋있어 보인다. 삶이 얼마나 많은 계획, 여행, 사랑, 배워야 할 것들을 숨겨 놓고 있는지 생각해 보라. 우리의 게으름으로 인해 미래의 어느 순간으로 끊임없이 미루고 있는 그것들을. 하지만 그것들이 영원히 불가능해질 위기에 처하면 그것들은 다시 아름더워진다. 아, 대재앙이 지금 일어나지 않는다면 많은 것을 하리라! 새로운 화랑들을 구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을 내던지고, 인도로 여행 갈 기회를 놓치지 않으리라. ... 하지만 대재앙은 일어나지 않으며, 우리는 그 일들 중 어떤 것도 하지 않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게으름이 절실함을 무력화시키는 일상의 삶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오늘의 삶을 사랑하기 위해 대재앙이 반드시 필요한 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그리고 죽음이 오늘 밤에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죽음이 임박했을 때 가장 후회스러운 일은 '스스로를 무시하며 살았다'는 것이다. 가슴이 원하는 여행을 하지 않은 것만큼 큰 실수는 없다. 남의 기준에 맞추고 사회의 암묵적인 동의에 의문 없이 따름으로써,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경험했을 더 많은 기쁨들을 스스로 놓쳐 버린 것이다. ... "너의 가슴 뛰는 순간들, 네가 삶을 최대한으로 산 모든 순간이 너의 것이었지." ... 미국 시인 마야 안젤루는 "인생은 숨을 쉰 횟수가 아니라 숨막힐 정도로 벅찬 순간을 얼마나 많이 가졌는가로 평가된다."라고 말했다. ... 숨 막히게 사랑한 순간이 얼마나 많았는가? 숨 막히게 몰입한 순간, 삶과 숨 막히게 접촉한 순간이. 그것이 꼭 거창한 순간일 필요는 없다. 맨발로 비를 맞는 순간, 섬에서 붉은 보름달을 감상한 순간, 히말라야 능선에서 눈보라 날리는 하늘을 올려다본 순간.... 당신은 어떤 순간들로 채워져 있는가? 죽어서 여행 가방이 텅 비지 않도록 '가슴 뛰는 순간'을 많이 살아야 한다. 스스로 감동하는 순간들, 삶을 자신의 가슴에 일치시키는 순간들을. 이 세상을 떠날 때 당신이 가져갈 수 있는 유일한 것들은 당신의 가슴에 담긴 것들이다.

 

 

레이 커즈와일, <특이점이 온다>

특이점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미래에 기술 변화의 속도가 매우 빨라지고 그 영향이 매우 깊어서 인간의 생활이 되돌릴 수 없도록 변화되는 시기를 뜻한다. 유토피아도 디스토피아도 아닌 이때, 비즈니스 모델부터 인간의 수명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위해 사용하는 온갖 개념들에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죽음도 예외가 아니다. 특이점을 이해하게 되면 지나간 과거의 의미와 미래에 다가올 것들에 대한 시각이 바뀐다. 특이점을 정확하게 이해하면 보편적 삶이나 개인의 개별적 삶에 대한 인생관이 본질적으로 바뀐다.

 

 

가오싱젠, <창작에 대하여>

"죽어서 잊히기 전에, 너는 너의 생명을 네 손에 장악해야만 한다. 너의 인생을 남김없이 살아내는 것만이 죽어도 아쉽지 않을 유일한 방법" - <죽음에 대하여>

 

 

찬란 ㆍ 이병률

겨우내 아무 일 없던 화분에서 잎이 나니 찬란하다

흙이 감정을 참지 못하니 찬란하다

 

감자에서 난 싹을 화분에 옮겨 심으며

손끝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를 듣는 것도

오래도록 내 뼈에 방들이 우는 소리 재우는 일도 찬란이다

 

살고자 하는 일이 찬란이었으므로

의자에 먼지 앉는 일은 더 찬란이리

찬란하지 않으면 모두 뒤처지고

광장에서 멀어지리

 

지난밤 남쪽의 바다를 생각하던 중에

등을 켜려다 전구가 나갔고

검푸른 어둠이 굽이쳤으나

생각만으로 겨울을 불렀으니 찬란이다

 

실로 이기고 지는 깐깐한 생명들이 뿌리까지 피곤한 것도

햇빛의 가랑이 사이로 북회귀선과 남회귀선이 만나는 것도

무시무시한 찬란이다

 

찬란이 아니면 다 그만이다

죽음 앞에서 모든 목숨은

찬란의 끝에서 걸쇠를 건져 올려 마음에 걸 것이니

 

지금것으로도 많이 살았다 싶은 것은 찬란을 배웠기 때문

그러고도 겨우 일 년을 조금 넘게 살았다는 기분이 드는 것도

다 찬란이다

 

 

크리슈나무르티, <삶과 죽음에 대하여>

죽음은 놀라운 어떤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삶이 그런 것처럼. 삶은 그 자체로 완전한 것입니다. 슬픔, 괴로움, 고민, 기쁨, 터무니없는 생각들, 재산, 시기심, 사랑, 외로움이라는 마음 아픈 불행 - 이 모두가 삶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삶을 전체로 이해해야만 합니다. 우리들 대부분이 그러는 것처럼, 그중 파편 하나만 취해서 그 파편으로 살지 말고요. 바로 그렇게 삶을 이해하는 가운데에 죽음에 대한 이해가 있습니다. 그 둘은 분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단 하루를 살고 그날과 함께 죽으며 또 다른 날을 마치 신선하고 새로운 날인 것처럼 다시 시작한다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없다. 우리가 획득한 모든 것들, 모든 지식, 모든 기억, 모든 다툼을 날마다 멈추는 것, 그것들을 다음날로 가져가지 않는 것 - 그 안에 아름다움이 있다. 설사 끝남이 있더라도, 새로 태어남이 있다는 말이다.

 

삶 끝에 있는 것, 우리 모두가 그 상태가 되는 걸 두려워하는 물리적인 죽음이 아니라, 날마다 순간순간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것, 사랑, 미움, 기쁨, 즐거움... 그 모든 것을 버리는 일이 죽는 일이라고, 이런 죽음이 있어야만 새로 태어남이 있다고.... 죽음은 날마다, 순간순간, 당신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내려놓는 거예요. 그게 죽음이예요. 죽음이 이런 거라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겠지요? 어제를 오늘로 가져오지 말고, 오늘을 내일로 가져가지 않는 게 죽음이예요. 날마다 죽는 게 죽음이에요. 다음날 아침 완전히 신선한 존재로 새로 태어나는 게 죽음이고 삶이예요. 모든 것을, 남편을, 아내를, 자식을, 태양을 날마다 신선한 눈으로 보는 것, 그 모든 것을 신선하고 무구한 눈으로 보는 게 삶이라고요. 그러니 삶과 죽음의 경계가 어디 있겠어요? 그 둘은 항상 붙어 다니고, 늘 함께 있어요. 삶이 곧 죽음이고, 죽음이 곧 삶이에요. 날마다 죽지 않으면 새로 태어남이 없을 테니까 말이에요.

 

 

이희인, <여행의 문장들>

용감한 시골 귀족, 이곳에 잠들다. 탁월한 그대의 용기 죽음의 신도 그대 목숨 죽음으로써 빼앗지 못했다고 세상 사람들 전하도다. ... 광인으로 세상을 살다가 본 정신으로 세상 떠났으니. - 미겔 데 세르반테스 시아베드라, <돈키호테>

 

반짝이는 호수나 쓸쓸한 적송나무나 햇빛을 받는 바위보다도 더욱 마음이 끌린 것은 구름이었다. 넓은 세상에서 나보다 구름을 더 잘 알고 나보다 더 구름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 혹은 또 구름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있다면 그것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구름은 흘러가며 눈에 위안을 준다. 구름은 축복이요, 신의 선물이요, 노여움이요, 죽음의 힘이다. 구름은 갓난아이처럼 정답고 부드럽고 평화스럽다. 구름은 착한 천사처럼 예쁘고 부유하고 은혜로우며, 죽음의 천사처럼 어둡고, 피할 수 없고 사정을 모른다. - 헤르만 헤세, <페터 카멘친트>

 

 

린위탕(임어당), <생활의 발견>

중국 문확과 철학 방면을 대략 살펴보고 나면 중국인적 교양의 최고 이상은 늘 현자의 각성에 서서 대관정신(大觀精神)으로 인생에 대처하는 데 있다고 하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런 마음의 경지에서 넓은 도량의 정신이 생긴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아량있게 빈정거리는 맛으로 세월을 보내며 명성이나 부귀나 공명의 유혹에서 벗어나서 마침내는 죽음의 운명까지도 달게 받아들일 수가 있는 것이다. 또 이 대관정신에서 자유감, 방랑에의 애착, 긍지와 무관심이 생긴다.

 

 

도종환, <처음 가는 길>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은 없다. 

다만 내가 처음 가는 길일 뿐이다.

누구도 앞서 가지 않은 길은 없다. 

오랫동안 가지 않은 길이 있을뿐이다.

두려워 두려워하였지만 

많은 이들이 결국 이 길을 갔다. 

죽음에 이르는 길조차도 

자기 전 생애를 끌고 넘은 이들이 있다. 

순탄하기만 한 길은 길 아니다. 낯설고 절박한 세계에 닿아서 길인 것이다.

 

 

홍익희, <세 종교 이야기>

모든 교조주의의 특징은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이를 틀림으로 몰아 죽음으로 징계하려 한다. 역사를 보면 이러한 종교적 원리주의가 발흥하면 그 역사는 틀림없이 망하거나 쇠퇴했다.

 

 

전규태, <단테처럼 여행하기>

사람의 목숨은 물질영역에 있어서는 '물질의 법칙'에 지배되지만 정신영역에 있어서는 '마음의 법칙'에 의해 다스려진다.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자유로운 마음으로 '부유浮遊하다가 생체의 '조화'를 되찾게 되었다고, 그렇게 죽음을 삶으로 바꾸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인간은 사랑과 죽음, 그리고 여행을 통해서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실감한다. ... 인생은 고통과 죽음의 바다이지만 사랑과 여행으로 이를 메울 수 있다. 그런 사랑, 그런 여행은 죽을 것만 같은 시련 끝에 온다. 그리고 혼자만의 외로움을 통과해 새로운 눈을 갖게 되어야만 여행은 비로소 마침표를 찍는다. ... 사랑, 죽음, 여행, 이 세 가지는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어쩌지 못하는 것임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한 번뿐인 삶을 위해서.

 

여행한다는 것은 일상에서 벗어나는 일이고, 관습에서 탈피하는 일이며,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는 일이다. 굳이 해방을 꾀하는 여행이 아니더라도 여행을 하다보면 누구나 자유로워진다. ... 여행은 끊임없는 과정이다. ... 여행, 사랑, 죽음은 모두 벗어나야만 가능한 일이다.

 

죽음을 확실히 의식한다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무한한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듯 무한한 수명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생은 흥미로운 것이다. 이런 생각도 내가 여행에서 얻은 소득 중 하나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우리 인간은 평소 너무나도 대수롭지 않게 사물을 보아 넘기며 살아간다. 물리적인 시간은 일정하지만 시간을 대하는 각자의 방식에 따라 그것은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한다는 것 역시 여행을 통해 배웠다. 한순간이 영원이 될 수도 있고 하루가 일 년이 될 수도 있다. 여행 중에 즐겁고 행복했던 순간을 음미할 때마다 그것을 실감하곤 한다.  여행을 하면서, 그리고 돌아온 후 이를 반추하면서, 나는 나의 남은 시간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다. 흐름에 맡기기로 했다. '세상은 내 뜻대로만 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마음먹고 나자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자연을 '따른다' 또는 자연에 '맡긴다'는 것에 엄청난 힘이 숨어 있다는 것도 노경老境에 접어들어서야 알게 되었다. 이제야 또 하루가 다가오면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기대를 가져본다. ...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 시작하는 것임을 짐짓 알면서도 막상 결심하고 첫발을 내딛기가 어렵다. 그러나 결심을 해야 한다. 어디로 떠나야 할지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가장 여행다운 여행을 시작할 때다.

 

 

문요한, <여행하는 인간>

삶이란 우리가 잠시 머물렀다가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는 '일시적인 여정'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로 돌아가는 것일까? 나는 안식년 여행을 통해 그곳이 '자연'이라는 답을 얻었다. 우리는 자연에서 왔다가 이 땅에서 잠시 머물고 다시 자연으로 돌아간 보면 우리는 우주에서 왔다가 이 별에서 잠시 머물고 다시 우주로 돌아간다. 우리는 우주의 움직임 속에 존재한다. 인생이란 삶에서 죽음처럼 처음에서 끝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 우주에는 처음도 끝도 없으며 순환이 있을 따름이다.

 

 

강판권, <나무 철학>

생명체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오래도록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욕망이다. 그러니 죽음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어떻게 살 것인지를 고민하자. 지혜로운 사람은 죽음이 결코 축복일 수는 없어도 치열한 삶 속의 단풍처럼 아름다운 죽음이 있다는 것을 안다.

 

 

<여행의 이유>

인간은 이유도 모르고 태어나 고민하고 늙어가면서 죽음을 맞이한다. 여행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노자의 말처럼 "좋은 여행은 궤도나 정도가 없다"일지 모른다. 여행이나 인생에 어디 객관적인 이유가 있을까. 성숙이란 긍정적 변화를 만들면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우리가 떠나온 곳으로 서서히 걸어 들어갈 뿐이다. 인생이나 여행에서 무엇을 얻어서 들고 갈까. 그것은 여행길에서 만났던 황홀이라는 추억은 아닐까. 여행이 끝나는 시점 그러니까 죽음의 시점에서 지금을 바라보라. 텅 빈 사막의 모래바람 속으로 떠나지 못할 까닭이 어디에 있겠는가? - 최치헌, '모래바람 속으로 사라진 사내'

 

 

김화영, <행복의 충격>

"창 너머로는 피렌체가 내다보이고 책상 위에는 죽음이 놓여 있다. 절망 속에서 어느 만큼 계속하여 견디다보면 희열이 생겨날 수도 있다" - 카뮈, <사막>. 우리들 삶을 참으로 삶이게 하는 행복과 비극의 표리...피에솔레 언덕의 프란체스코 수도원...

 

안개 속의 곤돌라들은 저 깊은 잠과 같은 죽음 속을 끝없이 그렇게 가고 있는 듯하다. 배이자 관이고 관이자 배인 '카롱'의 통나무처럼, 삶과 죽음이 따로 없는 안개 속, 시간도 공간도, 위도 아래도 없는 몽환 속으로 곤돌라는 가고 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 <나와 세계>

건설적 편집증, 터무니없는 과민 반응이 아니라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 조심스런 자세.

한 번 행할 때는 위험 수준이 무척 낮지만 그 행동을 반복하면 위험의 가능성이 누적되므로 결국에는 그 행위로 인해 여러분이 죽음을 맞을 가능성이 커진다. 이런 위험을 피하는 방법에 대한 교훈이 '건설적 편집증'

 

인간을 살아남게 한 능력이 오히려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다.

 

 

스티븐 그린블랫, <1417년 근대의 탄생>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루크레티우스에 따르면, 이 땅에 머무는 시간을 죽음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힌 채 보내는 것은 그야말로 멍청한 짓이었다. 그것은 인생을 즐기지 못한 채 불완전하게 끝내는 확실한 방법이었다. ... 죽음에의 공포를 다른 이들에게까지 전염시키는 것은 간교하고 잔인한 짓이다.

 

그 어떤 것도 자연에 맞서 이길 수 없으며 생성과 파괴, 그리고 재생으로 이어지는 끝없는 순환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안전에 대한 거짓 환상을 팔거나 죽음에 대한 비논리적인 공포를 선동하는 자들에게 분노하는 한편, 루크레티우스는 일종의 해방감과 함께 이전에는 너무나 위협적으로 보였던 것을 직시할 수 있는 힘을 사람들에게 제공했다. 루크레티우스는 인류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은 죽음을 극복하고 우리 자신도 살면서 마주치는 모든 것들도 덧없는 것임을 인정하면서 세상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라고 썼다.

 

"다른 모든 것에 대해서는 안정을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죽음에 관한 한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는 모든 벽이 없는 도시에서 살고 있다." - 에피쿠로스

 

달랠 수 없는 욕망과 죽음에 대한 공포는 행복한 인생의 주요 장애물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성의 수련을 통해 이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다.

 

이 세계에 들어왔던 것처럼, 당신이 죽음에서 삶으로 왔던 그 똑같은 길을 따라 어떤 감정이나 두려움 없이 다시 삶에서 죽음으로 나아가자. 당신의 죽음은 우주의 질서를 이루는 한 부분이다. 죽음 역시 세상에서 산다는 것의 한 부분이다.

 

 

법인 스님, <검색의 시대 사유의 회복>

사람의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인데도 사람들은 죽음의 두려움은 저만치 던져 버리고 흥겨워한다. 사람들의 마음은 참으로 무디구나. 죽음의 길에 있으면서도 태평하구나. 무지 때문에 오는 불안에서 벗어나 안온한 평화를 얻기 위하여, 욕망 때문에 겪는 괴로움에서 해탈하기 위하여 나는 출가하고자 한다. - 싯다르타.

 

 

박웅현, <다시 책은 도끼다>

스페인은 두 얼굴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슬픈 얼굴의 기사>라는 돈키호테의 열정적이면서 긴 얼굴이고 다른 하나는 실용주의자인 산초의 멍청한 얼굴이다. ... 하느님은 번개와 천둥에 사여 오시지 않는다. 또한 하느님은 불쌍한 거지처럼 강림하지 않으신다. 그리고 조롱조의 야유를 받고 피를 흘리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지 않는다. 하느님은 찬물을 담아두는 청동 잔이나 지저귀는 새로, 혹은 사랑받는 동쪽의 나이팅게일의 모습으로 이곳에 오신다. 그것이 우리가 늘 준비하고 있어야만 하는 이유다. ... 여자와 포도주와 태양과 꽃의 진정한 의미와 그것들이 얼마나 소중한지는 죽음으로 가는 길에 있는 사람만 느낄 수 있다. - 스페인 기행

 

사회 현상의 실존적 영향력은 그것이 팽창할 때가 아니라 더할 나위 없이 미약한 상태인 초창기에 가장 날카롭게 인지될 수 있다. .... 출생에서 죽음 사이를 잇는 선 위에 관측소를 세운다면 각각의 관측소에서 세상은 다르게 보인다는 것이다. ... 시의 독창성은 상상력에 의해 발현되지 전체이 건축술에 의해 드러나는 것이 아니니까. 반대로 소설의 아름다움은 그 소설의 건축술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 커튼

 

<파우스트>에는 자본의 논리, 과학, 사랑, 남녀관계, 지식인, 종교, 자연, 죽음에 대한 이야기 등 수많은 인간사가 녹아들어가 있어요. 그래서 저는 이 책을 전체적인 스토리로 따라 읽기보다 한 편의 시를 읽듯, 한 줄 한 줄 명언을 읽듯 자신만의 문장을 찾아나가며 읽어보시길 권하는 겁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줄 만한 한 줄을 찾겠다는 목표로 이 책을 읽어보면 어떨까요? 그냥 내 몸속에 들어온 <파우스트>를 만나보셨으면 해요. 이렇게 펼쳐도 좋고, 저렇게 펼쳐도 좋은 책이 될 겁니다. 괴테가 우리에게 큰 선물을 줬다고 생각해요. 그 선물을 감사히 받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보시길 바랍니다.

 

 

레프 톨스토이,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오늘은 좋은 날이다. 매일 매일을 위한 생각 모음집을 완성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무작위로 생각들을 모아놓지 않고 논리적 체계를 갖추었다. 인생의 손님들인 사랑, 행복, 영혼, 신, 믿음, 삶, 죽음, 말, 행동, 진리, 거짓, 노동, 고통, 학문, 분노, 오만 등의 주제들이 반복되도록 했고, 하루의 생각이 앞선 생각과 관련해 의미를 가지도록 했다. 이렇게 하여 하루하루가 서로 연결된다. 또한 우리 행동의 지침이 되는 총체적인 철학으로 완결성을 가지도록 했다.

 

우리 모두 언젠가 죽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삶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리라. 30분 후에 죽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는다. ... 생각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우리를 가장 자유롭게 하는 것은 죽음이다. 죽어가는 사람의 행동은 깊은 인상을 남긴다. 그러니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죽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말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심지어는 죽음보다 더 큰 해악을 입힐 수도 있다. 말이 많은 사람일수록 행동은 거의 하지 않는다. 현명한 사람은 행동보다 말이 앞설까봐 경계하고 말하기 전에 오래도록 침묵한다. 말하고 싶을 때마다 입을 다물고 생각하라. 하고자 했던 말이 말할 가치가 있는 것인가. 그 말로 누군가에게 상처 주는 일은 없는지 생각하라.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하루하루 죽음에 가깝게 다가서고 있다. 하지만 삶의 의미는 시간의 흐름과는 무관하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이 얼마나 나아지는가에 달려 있다. ... 우리의 삶은 매 순간 일어나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변화들로 이루어진다. 이런 변화가 시작되던 때 우리는 어린아이였다. 그리고 변화가 끝날 때 죽음이 찾아온다. 죽음은 우리 영혼이 살아가는 틀이 바뀌는 것이다. 틀을 내용과 혼동하지 마라. 출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인생은 그 다음에 오게 될 더 큰 삶을 모른 채 지금이 전부라고 착각하는 한바탕 꿈이지는 않을까.

 

명상과 생각은 영원으로 가는 길이다. 반면 너무 많이 말하는 것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다. 명상하고 생각하며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믿음을 갖지 않고 공허한 말만 늘어놓은 사람은 죽은 존재나 다름없다.

 

우리는 영원한 삶과 현재를 동시에 살아야 한다. 일할 때는 영원히 살 것처럼 하고 남을 대할 때에는 오늘밤에 죽을 것처럼 하라. 인생의 모든 것은 단순하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 죽음을 제외한 모든 것이 그렇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삶을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로, 죽음을 단순하고 분명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영적 삶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한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어딘가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커다란 배에 올라탄 승객과 같다. 선장은 승객 중 누가 언제 배를 떠나게 될 것인지가 기록된 비밀 명단을 가지고 있다.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 동안 인생의 법을 지키며 평화와 사랑, 모든 친구들과의 화합 속에서 흘러가도록 하라.

 

삶이 선하다면 죽음 역시 선하다. 죽음이 없다면 삶도 없기 때문이다. ... 올바로 살지 못하면 삶의 법을 깨뜨린 사람만이 죽음을 두려워한다. 죽음에 대해 너무 많이 생각할 필요는 없다. 살면서 죽음을 기억하면 된다. 그렇게 하면 삶은 진지하고 즐거우리라.

 

우리는 과거를 괴로워하고 이로 인해 현재에 불충실함으로써 미래까지 망친다.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있는 것은 현재뿐이다. 현재의 삶은 매 순간이 그 어떤 것보다 더 소중하다. ... 과거나 미래의 일은 없다. 모든 것이 바로 지금, 이곳의 일이다. 현재 속에서 평생을 산다면 미래에 대해서도 죽음 이전이나 이후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지 않게 될 것이다.

 

삶에는 육체를 위해 사는 길과 영혼을 위해 사는 길이 있다. 육체를 위한 삶은 허무한 욕망 속에서 점점 약해지다가 결국엔 죽음으로 끝난다. 반면 영혼을 위해 산다면 삶의 기쁨이 점점 더 커지고 죽음은 더 이상 두렵지 않게 된다. ... 우리가 가진 물리적인 힘을 대자연의 힘과 비교하면 인간은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영혼의 힘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세상의 다른 모든 것보다 앞선다.

 

자신에게 닥친 불행은 피할 수 있지만 스스로 만들어낸 불행은 극복할 수 없다. 모두가 나름의 문제를 가진다. 하지만 겸허함을 갖는다면 그 짐을 지는 일은 어렵지 않다. 문제는 맞서 싸우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아프면 견뎌내라. 나를 심판하는 사람이 있다면 친절함으로 답하라. 모욕을 당했다면 겸허히 받아들여라.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감사히 죽음을 맞으라. 나쁜 기분은 한 사람에 그치지 않고 주변에 점염되기 때문에 나쁘다. 불행하다고 느낀다면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라. 그리고 기분이 좋아졌을 때 남들과 어울려라.

 

진정한 삶은 사랑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살아 있다. 새로운 사랑은 나무의 새순과도 같다. 처음에는 연약하지만 햇살과 사랑, 지적 능력을 받으며 자라난다. 어떤 행동이 좋은지 나쁜지 판단하려면 그것이 인간의 사랑을 크게 할 것인가 아닌가만 물어보면 된다. 그렇다는 답이 나오면 그것은 좋은 행동이다. 우리 육체는 허약하고 보잘것없다. 결국은 죽어 사라지는 존재이다. 하지만 그 안에는 위대한 보물이 숨어 있다. 사랑은 죽음을 이기고 인생에 의미를 가져오며 불행을 행복으로 바꾼다.

 

우리는 이 삶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지나간다는 것을 기억하라. 삶은 안락한 집이 아니라 죽음으로 향하는 기차이다. 죽는 것은 육체뿐 영혼은 영원히 산다. 영적인 삶은 물질적인 잣대로 잴 수 없다. 악과 고통은 나를 괴롭히지만 죽음은 나를 자유롭게 한다. 그러니 어떻게 죽음을 좋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가?

 

아침에 일어나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라. "오늘은 무슨 좋은 일을 할 수 있을까?" 한 사람이 씨앗을 심었다. 싹트는 것이 궁금하고 걱정된 그 사람은 흙을 파내고 계속 씨앗을 지켜보았다. 상해 버린 씨앗은 열매를 맺지 않았다. 우리는 뒤돌아보는 일 없이 쉬지 않고 일해야 한다. 때가 되면 노동의 열매가 열릴 것이다. 시간이란 없다. 우리 온 인생이 집약된 현재의 한순간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에 모든 노력을 집중하라. 시간이라는 개념을 넘어서지 못하는 우리는 죽음 이후를 상상할 수 없고 탄생 이전을 기억할 수도 없다. 진정한 삶은 시간을 벗어나 존재한다.

 

영원을 생각하지 않는 이는 인생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이 그저 육체적 존재라면 그 죽음은 가여울 뿐이다. 하지만 인간이 영적 존재이고 일시적으로 육체에 머무르는 것이라면 죽음은 거쳐 지나가는 변화가 된다. 죽음을 기억하며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죽음을 생각한다는 뜻이 아니다. 늘 기쁨 속에 살면서 죽음이 찾아오는 순간을 준비한다는 뜻이다. 동물은 죽게 된다는 것을 모르고 따라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면 어째서 인간은 종말을 예상하고 두려워하는 것일까? 지혜로운 사람은 삶을 육체적인 것에서 영적인 것으로 바꿔놓는다. 이렇게 해서 죽음의 공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를 긴 여행 끝에 집으로 돌아가는 방랑자로 느낄 수 있다.

 

삶을 깊이 이해하면 할수록 죽음으로 인한 슬픔은 그만큼 줄어들 것이다.

 

 

모리야 히로시, <남자의 후반생>

가난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 정작 부끄러운 일은 가난하면서도 뜻이 없음이다. 지위가 낮다 하여 자신을 비하해서는 안 된다. 지위가 낮으면서 아무 능력이 없음을 오히려 미워해야 한다. 또한 늙음을 한탄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아무 목적 없이 늙어감을 한탄해야 한다. 죽음이 찾아온다고 슬퍼해서는 안 된다. 죽어서 자신의 이름이 잊혀짐을 슬퍼할 일이다. - 여신오(여곤), <신음어>

 

 

베르나르 베르베르, <제 3인류>

나는 죽는 순간을 나 자신이 결정한다. 그럼으로써 매 순간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더는 겪지 않는다.

 

 

장 그르니에, <섬>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서 도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 그것은 불가능한 일 - 자기 자신을 되찾기 위하여 여행한다고 할 수 있다. ... 그런데 그 <자기 인식 reconnaissance>이란 반드시 여행의 종착역에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그 자기 인식이 이루어지고 나면 여행은 완성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탄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통과해 가야 하는 저 엄청난 고독들 속에는 어떤 각별히 중요한 장소들과 순간들이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 장소, 그 순간에 우리가 바라본 어떤 고장의 풍경은, 마치 위대한 음악가가 평범한 악기를 탄주하여 그 악기의 위력을 자기 자신에게 문자 그대로 <계시하여> 보이듯이, 우리들 영혼을 뒤흔들어놓는다.

 

전 우주가 무너져내리는 가운데, 죽음 같은 것은 전혀 대수롭지 않게 여길 뿐만 아니라 탄생이란 너무나도 당연하고 필연적인 일이어서 그저 그 탄생을 모면할 수만 있다면 그것이 대단한 일이라고 여기는 사고 방식을 어떻게 이해한단 말인가? 살아남는 것을 믿기 위해서 우리들에게 신앙이 필요하듯이 저들에게는 생명이 꺼지는 것을 믿기 위해서 신앙이 필요한 것이다.

 

 

클라우디오 마그리스, <다뉴브>

목숨이 최상의 가치는 아니며, 목숨보다 더 가치 있는 무엇, 해처럼 삶을 밝고 뜨겁게 만드는 무엇을 위해 헌신할 때 삶이 더 사랑스럽고 유쾌해진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두려움 없이 그들이 조용히 죽음을 맞았던 것은, 이 세상의 원칙이 이미 심판받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전영우, <비우고 채우는 즐거움, 절집 숲>

자연과 영원으로 가는 길... 태어남은 어디서부터 왔으며 / 죽음은 어디로 향해 가는가? / 산다는 것은 한조각 구름 일어나는 것이요 / 죽는다는 것은 한조각 구름 스러지는 것이라. / 뜬구름 자체는 실체가 없으며 / 나고 죽고 가고 옴도 또한 이와 같음이라. / 그 가운데 한 물건 항상 또렷이 드러나 있으니 / 맑고 맑아서 생사를 따르지 않음이로다.

 

 

웬델 베리, <지식의 역습>

인간은 아무리 애써도 죽음을 피할 수 없고 편견과 결함과 실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무수히 많고 다양한 형상과 형태 속에서 안정성의 법칙을 발견하려면 섬세한 지각 능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안정성의 법칙은 어디에나 적용된다. 안정성의 법칙은 조용히, 그리고 중단 없이 반복되는 영구적인 순환을 통해 실현된다. 그 순환은 생명의 계속성을 보장하며 '탄생-성장-성숙-죽음-소멸'이라는 연속적인 과정의 반복으로 이루어진다. - 앨버트 하워드, <토양과 건강 The soil and Health>

 

우리 삶과 노동의 목표는 무엇이며, 또 무엇이 되어야 할까? 이것은 아주 두려운 질문이므로 조심스럽게 대답해야 마땅하다. 또 어떤 개인이 다른 어떤 개인의 입장에서 대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옛날부터 인류는 자기 소명을 인식하고 그것을 성실하게 따르며 행복한 마음으로 일하는 삶을 모범이나 이상으로 여겼던 것 같다. 그것은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며 가족을 부양하는 삶, 이웃과 넉넉하게 어우러지는 삶, 자기 지역의 자연에서 얻은 것들을 먹고 마시며 즐기는 삶, 자기 아이들과 이웃의 아이들이 자신의 역할을 대신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늙어가지만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쓸모 있는 존재로 남는 삶, 그리고 마침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좋은, 또는 신성한 죽음을 맞이하는 삶을 말한다. 

 

오늘날의 인류는 완전한 삶에 대한 생각 자체를 잃어버린 듯하다. 우리는 더 이상 죽음을 삶의 바람직한 마무리라든가, 고통과 슬픔과 피로로부터의 반가운 해방으로 여기지 않는다. 죽음은 나이 든 사람의 형벌로서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연기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현대사회에서 사람의 생사를 책임지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특히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평균수명'을 비롯한 모든 것이 '더' 있어야 한다는 그리고 더 있으리라는 유일한 희망을 안고 살아간다. '더'를 끝없이 욕망하는 것은 불완전을 인식하고 괴로워하기 때문이며, 불완전은 '더'를 향한 끝없는 욕망의 결과다. 이것은 죽음의 바퀴다. 이 바퀴의 회전이야말로 현대사회의 기술을 발전시키는 동력이다. 우리의 삶이 피상적이고 불행할수록 우리는 더 빠른 진보를 원한다. 얇은 얼음판 위에 있을 때 더 속도를 내야 하는 것과 비슷하다.

 

과학이 인간과 토지 사이의 연결 고리가 될 수 있으니 농촌 공동체의 지식과 문화를 과학으로 대체해도 무방하다는 가정은 이제 공식적인 강령으로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과학은 자본과 이윤의 연결 고리 기능을 한다. 전문가로서 주도권을 가지려면 지역 지식, 즉 평범한 노동을 하는 사람들의 지식과 경험을 포기하거나 믿지 않아야 한다고 여겨진다. 그 결과 지역 지식은 경쟁력을 상실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지역 문제를 해결하는 지역 주민의 지혜를 잃고 있다. 이제는 어떤 문제가 생길 때마다 정부, 기업, 대학에서 전문가를 불러오는 것이 가장 올바른 방법으로 간주된다. 그 전문가는 중심에서 고안한 물리학이나 화학의 최신식 해법을 추천할 것이다. 경제의 토대가 토지에서 정보로 바뀌었듯이, 노동의 토대가 지혜에서 자본으로 바뀌는 것이다. 물론 전문가들이 추천한 해결책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기만 한다면 이것도 괜찮다. 하지만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사태가 악화되거나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건전 과학'과 기술 발전을 기업의 손에 맡겨두는 동안 우리의 농업은 갈수록 독성이 높아지고 있으며 유전자 및 종자의 개수와 다양성은 줄어들고 있다. 대수층과 강물이 고갈되고, 농촌 공동체가 죽어가며, 토지와 농산물의 건강 상태도 갈수록 나빠지는 실정이다. 또한 식품 공급은 장거리 운송과 외국인 노동자에게 더 의존하게 되고, 우리가 마시는 물은 질이 점점 더 나빠지며, 멕시코 만에 있는 '죽음의 해역'은 더욱 넓어지고 있다.

 

 

로버트 M. 피어시그,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 가치에 대한 탐구>

무언가가 죽임을 당하는 대신 무언가가 또한 새롭게 창조된다. 따라서 단지 죽임을 당한 것에 집착하는 대신 무언가가 새롭게 창조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또한 이 과정이 일종의 죽음과 창조의 연속 과정임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이 과정은 결국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그런 종류의 것이다.

 

 

리처드 도킨스, <눈먼 시계공>

복잡한 물건은 사전에 규정된 어떤 성질, 즉 단순한 우연만으로는 매우 얻기 힘든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생물의 경우 사전에 규정된 그 성질이란 일종의 '능숙함'이다. 그것은 항공 기술자가 가진 감탄할 만한 비행 기술과 같은 고도의 능력뿐 아니라, 더 일반적인 능력, 즉 죽음을 모면하는 능력이나 생식을 통해 유전자를 보전하는 능력 따위를 말하는 것이다.

 

다윈이 극도의 완벽함과 복잡성을 갖춘 기관이라고 부른 것들을 우리 모두가 불신하는 밑바탕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자리 잡고 있다. 첫 번째는 우리는 진화가 일어날 수 있는 거대한 시간을 즉각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 눈은 화석으로 남지 않는다. 그래서 무에서 시작하여 지금과 같은 복잡성과 완벽함을 갖춘 눈으로 진화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는지 알아낼 방도가 없다. ... 우리가 눈이나 박쥐의 귀 같은 매우 복잡한 기관의 진화에 대해 쉽게 의심하는 두 번째 이유는 확률 이론을 직관적으로 적용하는 데 있다. ... '개개의 과정이 전체의 성공에 필수적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각각은 그 자체만으로 쓸모가 없다. '완벽한 작품'은 전체가 동시에 이루어져야 가능하다. 무작위적인 조합에 따라 그러한 일련의 과정들이 동시 발생할 경우의 수는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천문학적이다.' - 레이븐, 이런 식의 주장은 원칙적으로 단순한 불신에 기초한 주장보다는 존중해 줄 만하다. 어떠한 주장이 들어맞을 통계적인 확률을 계산하는 것은 그 주장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자신의 생각을 뒷받침하기 위해 취해야 할 정당한 방법이다. ... 문제는 바르게 사용하는 것이다! 레이븐의 주장에는 두 가지 잘못이 있다. 첫째, 그 주장에는 나를 다소 짜증나게 하는 자연선택과 무작위성을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 돌연변이는 무작위적이다. 그러나 자연선택은 무작위성의 정반대편에 있다. 둘째, '각 부분은 그것만으로는 쓸모가 없다.'라는 말도 '진실'이 아니다. 전체로서의 완벽함이 동시에 달성되어야 한다는 말은 거짓이다. 모든 부분이 전체의 성공에 필수적이라는 말도 사실이 아니다. 단순하고 덜 발달되었으며 반만 완성된 눈이나 귀, 음향 탐지 체계, 뻐꾸기의 기생 생활 방식 등은 전혀 없는 것보다는 낫다. 눈이 없다면 전혀 볼 수 없다. 눈이 절반만이라도 있으면 비록 초점이 맞는 정확한 영상을 얻지는 못하더라도 천적이 움직이는 대강의 방향이나마 탐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삶과 죽음의 차이를 만들어 낼 것이다.

 

 

스티븐 핑커, <빈 서판>

인간이 그 자신을 두려운 존재로 만들 공동의 힘을 갖지 못화고 사는 동안에는 이른바 전쟁이라는 상황이 인간을 지배하게 된다. 그것은 만인이 만인에 대해 벌이는 싸움이다. .... 그런 조건 아래에서는 노동을 위한 여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성과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문화도 없고, 항해나, 해상을 통해 수입될 수 있는 상품의 사용도 없고, 널찍한 건물도 없고, 큰 힘을 필요로 하는 물건의, 이동과 운송 수단도 없고, 지형에 대한 지식도 없고, 시간 계산도 없고, 예술도 없고, 문학도 없고, 사회도 없다. 가장 끔찍한 것은 끝없는 두려움과 폭력적인 죽음의 위험이다. 인간의 삶은 외롭고, 가난하고, 더럽고, 짧다. - 토머스 홉스

 

내가 보기에 지구가 이토록 고귀하고 훌륭한 것은 바로 그 안에서 다양한 변경, 변화, 생성 등이 끊임없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변화도 없어서 지구가 광대한 모래 사막이나 벽옥의 산으로 남았거나, 대홍수가 일어났을 때 지구를 덮었던 물이 얼어붙어 거대한 얼음 덩어리로 남았다면, 내 눈에는 그저 이 우주 속에서 아무 운동도 하지 않는, 한마디로 불필요하고 존재 가치가 없는 무의미한 덩어리로만 보일 것이다. 이것은 살아 있는 동물과 죽은 동물의 차이인데, 나는 달과 목성과 그 밖의 모든 천체들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 사람들이 완벽함, 영원성 등을 높여 찬양한다면 내 생각에 그것은 계속 살고자 하는 욕구 때문이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박경철, <문병의 배꼽, 그리스>

스스로를 지킬 수 없는 민족은 노예의 신세를 면하지 못하며, 분열은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여가의 대가를 치를지도 모른다. 영혼의 종속을 용납지 않으려면 거부, 사랑과 고통 그리고 죽음을 초월하는 험난한 승부, 바로 그러한 저항이라야 진정으로 당당할 수 있는 것일 게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파괴한 것이든 자연의 힘에 의한 것이든 간에, 모든 인공 구조물은 언젠가는 무너진다. 제아무리 애를 써도 인간이라면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처럼! 그것은 법칙인 것이다. 올라간 것은 반드시 내려오고, 세워진 것은 반드시 무너지는 법. 그 어디에도 영원한 것은 없다.

 

 

웬델 베리, <생활의 조건>

하느님의 나라를 구하는 데는 특정한 경제적 제약이 따르며, 이 제약들은 주로 미래의 경제와 관계가 있다. 성서의 다른 구절을 보면 미래를 위한 어느 정도의 대비나 비축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대비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할 일들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그래야 '내일에 대한 아무런 걱정을 할'(마태복음 6:34)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대비는 너무나 먼 미래를 내다보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준비하는 것들이 쓸데없이 많아질 수도 있다. 누가복음 12장에 등장하는 '어떤 부자'의 죄는 그가 '오랜 세월 동안 너무 많은 곡식을 모아두었기' 때문에 '먹고 마시고 즐거울 수' 있으리라고 믿은 데 있다 (누가복음 12:15~19). 그의 잘못은 너무나 많은 것을 비축하고 그러면서 미래를 가벼이 생각했다는 점이다. 미래를 자신의 희망과 기대, 꼭 그만큼의 크기로 축소시킨 것이다. 그는 풍요롭게 살아갈 미래에 대한 준비는 마쳤는지 몰라도 죽음을 맞이할 미래에 대해서는 전혀 준비하지 않았다. 우리는 정신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미래를 축소해서 생각해야 현재를 살 수 있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다. 그래서 현재에 '많은 곡물'을 쌓아놓음으로써 미래에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표토, 화석연료, 화석수(지하수와는 별도로 지층이 퇴적될 당시에 격리된 후 수백만 년 이상 물 순환계와 분리되어 존재하는 물)와 같은 것들을 고갈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용'이라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미래에서 훔쳐옴으로써 결과적으로 미래를 축소시키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경제활동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를 구하지만, 그 행위가 잘못된 경우에는 원하는 나라를 얻지 못할 수 있다.

 

우리는 기계에 의한 대체가 오랫동안 뿌리내려온 과정의 하나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동안 산업경제는 분리, 퇴화, 교환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 속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우리가 서로서로 분리되자 노동과 그 산물이 퇴화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기계가 노동을 대신하게 되었다. 우리의 생각이 타락하면 정신은 기계나 전문가들, 정부에 의해 대체되고 만다. 더둑이 산업화 과정을 통해서 공짜로 주어지던 것이 비싼 대용품으로 탈바꿈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신체적인 건강은 삶에 필요한 노동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쓸모 없어진 신체를 대신해서 번영한 산업화 시대의 기계는 치명적이고 잔혹하리만큼 비싸다. 인간의 몸이 유용하던 시절에는 육체가 쓸모 없어지면 당연히 죽는 것이고, 죽음은 치유와 같은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산업화 시대에서 죽음은 점점 더 비싼 치료가 필요한 질병과 같이 멸시된다. 또한, 산업화가 진행되지 않았던 시골 마을과 도시 근교에서는 서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밀집해서 살았다. 자유롭게 생활하면서 공짜로 주어지거나 싼값에 얻을 수 있는 혜택을 누렸다. 산업화 시대에 이르러 이와 같은 단순하고도 너무나 취약한 결합은 쉽게 붕괴되었으며 값비싸고 파괴적인 통신 및 운송 산업에 의해 대체되었다.

 

 

제러미 리프킨, <3차 산업혁명>

열역학법칙에 따른 관점에서 보면 경제활동이란 저 엔트로피 에너지 투입물을 자연에서 빌려 와 그것을 가치 있는 일시적 상품 및 서비스로 변형시키는 활동일 뿐이다. 그 변형 과정에서 생산한 특정 재화나 서비스에 포함되는 에너지보다 더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고 주변으로 상실되는 경우가 빈번한다. ... 모든 생물은 비평형상태다. 다시 말해, 모든 생물체는 평형상태와 거리가 멀며 이는 주변 환경으로부터 이용 가능한 에너지를 끊임없이 먹어 치우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과 항상 환경 전체의 엔트로피가 증가한다. 예컨대 식물은 광합성 과정에서 태양에너지를 흡수하고, 그 집중된 에너지는 다른 동물이 직접 소비하거나 또는 동물이 다른 동물을 잡아먹을 때 간접적으로 소비한다. 대체로 더 진화한 종일수록 비평형상태에서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며 생명유지 과정에서 소비된 에너지를 주변 환경에 더 많이 토해 낸다. 노벨상을 수상한 물리학자 에어빈 슈뢰딩거는 열역학 과정의 핵심을 잘 포착해 냈다. 그는 "유기체는 음의 엔트로피를 먹고 살아간다. 유기체는 환경으로부터 계속해서 질서를 빨아먹는다."라고 말했다. 생물학자들의 설명은 생명유지 방식에 대해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바와 일치한다. 우리는 무언가를 먹을 때마다 끊임없이 에너지를 몸속에 흡수하고, 생명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계속해서 에너지를 고갈시키며 엔트로피 쓰레기의 축적에 기여한다. 에너지 흡수를 멈추거나 또는 질병 때문에 신체가 에너지 대사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우리는 죽는다. 신체는 죽음에 이르면 빠르게 분해되어 환경으로 돌아간다. 삶과 죽음은 모두 엔트로피 흐름의 일부이다.

 

450그램의 스테이크를 만들려면 사료용 곡물이 약 4킬로그램 필요하다. 사료의 11퍼센트만이 소고기를 만드는 데 쓰인다는 뜻이다. 나머지 사료는 변환 과정에서 에너지로 태워지거나, 정상적인 신체 기능 유지를 위해 사용되거나, 털이나 뼈처럼 먹을 수 없는 부위로 간다. 흔히 우리는 기름을 잔뜩 먹어 대는 차량의 에너지 비효율과 거기에 수반되는 낭비를 탄식하지만, 이는 곡물로 키우는 육류를 먹는 식습관에 수반되는 에너지 비효율과 낭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프랜시스 무어 라페는 <작은 행성을 위한 식단 Diet for a Small Planet>에서 곡류 생산에 사용되는 땅 1에이커는 육류 생산에 사용하는 땅 1에이커보다 다섯 배나 많은 단백질을 만든다고 설명했다. 1에이커를 소고기 생산에 사용하는 경우와 비교할 때 같은 면적에서 나오는 콩류는 열 배나 많은 단백질을, 잎 채소는 15배나 많은 단백질을 제공한다. 오늘날 전 세계에서 재배하는 곡류의 거의 3분의 1은 인간이 직접 소비하는 식량이 아니라 가축용 사료다. 따라서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있는 소수의 부유한 소비자들이 사치스러운 생활을 만끽하는 동안 다른 수억 명의 사람들은 영양실조, 기아, 죽음에 직면하는 것이다.

 

역사에 등장한 모든 문명은 중요한 심판의 순간을 경험했다. 어떤 문명이든 새로운 미래에 대비하기 위해 급격히 경로를 변경하거나 아니면 종말의 가능성을 맞이하도록 강요받았다는 얘기다. 일부는 제때에 스스로 변화할 수 있었지만 일부는 그렇지 못했다. 그러나 과거에는 문명의 붕괴가 시공간적으로 한정된 범위에서 일어났고 인류 전체에 영향을 미치지도 못했다. 지금 이 시점이 과거와 다른 까닭은 기후변화로 지구의 온도와 화학 구성의 질적 변화 가능성이 증대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이는 동식물의 대멸종을 불러올 수도 있고 그와 더불어 실제로 우리 인류가 대규모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는 사안이다.

 

 

리 호이나키,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

사람들이 건드리지 않는다면, 시골 공간은 언제나 아름답고, 언제나 찬탄할 만하다. 땅을 깊이 사랑하고, 땅에 뿌리박은 사람들이 시골에서 살고 있는 동안에도, 그 공간은 여전히 찬란한 빛을 내며 빛난다. 그러나, 사랑의 감정이 사라질 때,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황폐함이 지배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우리가 보는 것은 죽어버린, 폐허가 된 공간일 뿐이다. 시골의 공간은 공항이나 슈퍼마켓과 같은 대부분의 근대적인 미분화된 공간과는 전혀 다르다. 이런 종류의 건축공간은 완전히 무균처리된 죽음의 테크놀로지의 냄새를 풍긴다. 시골 공간은, 그곳에 일단 사람이 살게되면, 따뜻한 공동체의 온기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사랑받지 못한 생물처럼 쇠퇴한다

 

농사의 실천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유대관계는 나를 하나의 땅과 가족과 친구와 이웃들에게 연결시켜주었고, 나아가서는 내가 어떻게 덧없는 시간의 세계 속에서 존재해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주었다. 나는 산업경제 속에서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소유를 향해 - 내 집, 내 시간, 내 장래, 내 아이들 - 밀고가고 있는 내 자신의 모습을 보며 살았다. 그리하여, 나는 좌절감 속에서 지냈다. 왜냐하면 확실한 소유란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농촌공동체 속에서의 관계는 매우 다른 성격을 갖는다. 첫째, 모든 것은 순환적으로 움직인다. 계절과 식물과 동물과 사람들도 순환한다. 모든 것은 죽음에 이르지만, 다시 태어남은 되풀이된다. 이런 현상은 우리가 단작재배에 사로잡혀 있지 않고, 다양한 작물을 경작하면서 여러 다른 짐승들을 돌볼 때 특히 자명하게 드러난다. 자연세계의 경이와 신비로움에 일상적으로 접촉하면서, 우리는 '소유'의 세계가 요구하는 것과 같은 '통제'에 대해서는 상상도 하지 못한다. 땅과 동물과 사람들의 도움으로 생존을 영위하는 데에는 자연의 리듬과 조화를 이룬 노동과 보살핌의 섬세한 균형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동시에 나는 다만 하나의 피조물일 뿐, 결코 내가 세상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이런 종류의 활동 속에서 우리는 큰 친밀감을 누릴 수 있지만,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런 종류의 삶을 통해서 내가 깨닫는 것은 우주의 움직임 앞에서 내가 얼마나 작고, 의존적일 수밖에 없는가 하는 사실이다. 요컨대, 농업은 우리가 이 세계 속에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를 우리에게 가르쳐줄 수 있다. 그래서 어떻게 우리가 이 순간에 온몸으로 기쁨 속에서 살아있으며, 그러면서 동시에, 죽음이 바로 저 너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평화롭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우리는 배우는 것이다. ... 각 삶터의 토양과 이야기들은 서로 다르다. 따라서, 우리가 문화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그 문화적 고유성, 그 '좁은' 지역적 특성, 그 감각적 느낌을 보아야 한다. 직접적인 감각적 경험과 한 공동체의 특정한 사람들과 사건에 대한 기억 너머에 있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하나의 추상일뿐이며, 결코 민중의 문화가 될 수 없다.

 

 

알랭 드 보통, <우리는 사랑일까>

인간은 죽게 마련이고, 몽테뉴가 지적했듯이 죽음이 모든 이를 철학자로 만든다.

 

 

베르나르 올리비에, <나는 걷는다>

이 긴 여정, 이 고독한 여행 안에는 떠나는 삶과 다가오는 죽음이 있다. 삶에는 아직 쟁취할 승리가 남아 있다. 결국에 죽음이 이길거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기다리면서 나는 죽음을 비웃어준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미친 듯이 빠른 속도로 달려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긴박하게 속도를 늦추어야 한다. 나는 생각의 속도로 살기를 바랄 뿐이다. 걷기는 소위 문명화되었다고 하는 우리 사회를 뒤덮고 있고 있는 죽음 - 사람들은 삶과 혼동하고 있다 - 의 달리기에 브레이크를 건다. 내가 느끼기에 우리 사회는 텔레비전이 내미는 일그러진 거울을 통해서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장 보드리야르, <소비의 사회>

가계에서 지불되고 또 대부분의 집단적 소비에 재정적 뒷받침을 해주는 직접세 및 간접세 그리고 사회보장의 개인부담분은 전체적으로 볼 때 불평등을 줄이는 효과나 재분배하는 효과를 지니지 못하고 있다. ...계층/직업별 죽음에 대한 불평등도 대단히 크다.

 

사물을 기술적으로 변화시켜 보거나 사물의 기술적 가능성을 가지고 노는 것, 게임의 규칙을 새로 만들면서 노는 것, 인간의 운명적인 조합인 생과 죽음의 조합을 파괴하면서 노는 것이다

 

"시간과 죽음 앞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 과거 사회적 정의 대한 일체의 요구를 응축한 이 옛 격언은 '여가에서 모든 사람이 다시 평등하다'라고 하는 현재 주의 깊게 유지되고 있는 신화 속에서 살아남았다.

 

소외는 외관상으로만 사회적 갈등을 초래할 뿐이어서, 슐레밀은 사회적으로 고립하는 것으로 이 갈등을 추상적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반면에 <프라하의 학생>은 소외의 객관적 논리를 철저하게 밀고나가 죽음 이외에는 소외를 피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소외를 관념적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는 좌절할 수밖에 없다. 소외의 극복은 불가능한다. 왜냐하면 소외는 악마와의 거래의 구조 그 자체, 상품사회의 구조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제인 구달, <희망의 밥상>

자연은 모든 생명체에 생존의 본능을 부여했다. 화학 살충제가 한 지역에 뿌려지면, 벌레를 먹고 사는 생명체들은 금방 살충제의 독에 중독되고 이내 죽음에 이른다. 그러나 살충제 살포가 반복되면 해충들의 내성도 점점 강해진다. 항생제 남용이 동물과 인체에 질병을 일으키는 박테리아에 대한 항생제 내성을 키운 것처럼, 살충제 남용은 해충들의 몸속에서 살충제 내성을 키웠다. 살충제를 뿌려 가며 농사를 지은 지 50년 이상이 흐르자 살충제에 대해 점점 더 큰 내성을 갖게 된 수많은 '페스트' 해충들이 나타났다. 이 해충들에 반격하기 위한 농부들의 무기는 더 독한 살충제를 더 많이, 더 자주 뿌리는 것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계층에 속하는 10억의 인구가 먹을 것이 충분치 않아 고통을 받고 있거나 심지어는 죽어 가고 있다. 반면에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계층에 속하는 10억의 인구는 나쁜 음식을 너무 많이 먹어서 몸이 쇠약해지거나 죽음에까지 이르기도 한다. ... 선진 산업국가의 소비, 그리고 막대한 쓰레기....

 

 

미하엘 엔데. <모모>

죽음이 뭐라는 걸 알게 되면, 사람들은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게다. 그리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아무도 사람들의 인생을 훔칠 수 없지.

 

 

김형욱, <손끝에 닿은 세상>

자유로운 삶과 바람 같은 죽음을 원하노니. 어느 곳에도 머무르지 말고 길을 잃지 않기를.... 그리고 날이 밝으면 행복한 미소 지으며 길을 떠날. 이 길의 끝이 어드메일지 아직 알 수는 없지만 올곧게 내 의지로 자유롭기를 바라며. 그 끝에는 모든 것을 버리고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게 되기를.... 일평생 자유롭게 내 의지대로 바람같이 살아가길 바라며....

 

 

도정일, <별들 사이에 길을 놓다>

선진사회에서도 아직 빈곤은 남아 있지만, 그것은 굶주림이 죽음의 원인이 되는 그런 정도의 절대 빈곤이라기보다는 분배의 편차에서 발생하는 상대적 빈곤이다. 상대적 결핍감도 고통의 한 원인일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인이 느끼는 고통은 물질적 빈곤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위기, 의미의 위기, 가치의 위기에서 더 많이 초래된다.

 

 

강상구, <마흔에 읽는 손자병법>

     도망갈 곳이 없으며, 죽지 않으려면 이기는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아넣는다.

     (投之無所往 死且不北 투지무소왕 사차불배)

     죽음 앞에서는 못할 게 없다.(死焉不得 사언부득)

     병사들은 포위되면 방어하고, 다른 수가 없으면 맞서 싸우고, 그 단계가 지나면 맹목적으로 따르기

     마련이다.(故兵之情 圍則禦 不得已則鬪 過則從 고병지정 위즉어 부득이즉투 과칙종)

 

 

헬라레나 노르베리 호지, <오래된 미래>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라다크 사람들의 시각은 비영원성에 대한 직관적 이해에 그 근거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로 인해 집착을 버리는 태도를 갖게 되었던 것 같다. 일이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집착하는 대신 기쁜 마음으로 모든 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그들의 모습은 정말 축복받은 듯한 느낌을 준다.

 

 

강신주, <철학이 필요한 시간>

가장 두려운 악인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우리와 함께 있지 않으며, 죽음이 오면 이미 우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죽음은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 모두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산 사람에게 아직 죽음이 오지 않았고, 죽은 사람은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 에피쿠로스

 

 

박웅현, <책은 도끼다>

"보편적 죽음이 개별적 죽음을 설명하거나 위로하지 못한다" - 칼의노래, 김훈

 

인간은 보편적 죽음 속에서, 그 보편성과는 사소한 관련도 없이 혼자서 죽는 것이다. 모든 죽음은 끝끝내 개별적이다. 다들 죽지만 다들 혼자서 저 자신의 죽음을 죽어야 하는 것이다.

 

 

@ 윤동주의 서시 - 정호승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너의 어깨에 기대고 싶을 때

너의 어깨에 기대어 마음놓고 울어보고 싶을 때

너와 약속한 장소에 내가 먼저 도착해 창가에 앉았을 때

그 창가에 문득 햇살이 눈부실 때

윤동주의 서시를 읽는다

뒤늦게 너의 편지에 번져 있는 눈물을 보았을 때

눈물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기어이 서울을 떠났을 때

새들이 톡톡 안개를 걷어내고 바다를 보여줄 때

장항에서 기차를 타고

가난한 윤동주의 서시를 읽는다

갈참나무 한 그루가 기차처럼 흔들린다

산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인가

사랑한다는 것은 산다는 것인가

 

 

이외수, <글쓰기의 공중부양>

욕심이 잉태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불러들인다. 글쓰기에도 욕심은 금물이다. 욕심이 들어가 있는 문장은 모두 죽어 있는 문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잔 브라흐마, <술취한 코끼리 길들이기>

실제의 불만족과 행복의 부재를 심화시키는 것은 바로 이 '내려놓지 못하는 마음' 이다. 세상의 종교들이 가장 큰 어리석음으로 꼽는 망상은 '삶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착각'이다. 모두는 이 즐거운 망상 속에서 존재의 이유를 찾고 있다. 세속적인 삶의 목적은 기쁨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 그리고 부의 축적뿐이다. 죽음의 관점에서 보면 삶에서 우리가 행하는 이 모든 행위들은 두말할 나위 없이 바보 같은 짓이다. 감각기관을 즐겁게 하는 것, 관계를 갖는 것, 결혼하는 것, 집을 소유하는 것, 부를 축적하고 자동차를 사는 것, 다양한 즐거운 경험을 쌓는 일들이 죽음에 직면해서 무슨 의미를 갖겠는가?

 

마음을 내려놓고 삶과 죽음에 대해 명상하는 것은 다른 어떤 일보다 중요하다. 명상은 우리가 가진 재산, 우리의 인간관계, 아이들, 자동차, 소유물보다 더 중요하다. 재물을 쌓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것들은 당신이 죽을 때 모두 사라진다. 즐거움에 탐닉하는 것은 결국 좌절을 가져온다. 아무리 많은 기쁨을 가진다 해도, 그것들은 노년의 안개 속에 사라진다. 나이 듦에 따라 알아야 할 것 중 하나는, 삶의 쾌락이 일찍 올수록 마지막에 남는 것은 고통이라는 것이다.

 

 

이노우에 야스시, <둔황>

나라가 바뀌고 시대가 변해도 소멸되지 않고 영원히 남는 것은 종교와 민족, 그리고 역사의 결연한 흐름 속에서 시대의 추이와 인간들의 삶을 묵묵히 응시해온 위대하고 유구한 자연이라는 엄연한 진리를 새삼 자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결국 <둔황>을 비롯한 그의 역사소설의 참된 가치는 항상 인간과 역사의 관계를 인식하고, 역사의 흐름에 좌우되는 인간의 운명을 묘사하면서도 단순히 역사 속의 인간을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을 유유히 흐르고 지탱하는 고독한 '시간'의 의미를 공간적으로 도려내어 응시하는 가운데, 고독과 허무, 방랑으로 채색된 인간의 삶과 죽음의 근원적 의미를 제시하는 점에 찾아야 할 것이다.

 

 

마루야마 겐지,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

자연에서 배우지 않으면 안 될 것은 무엇보다 스스로를 다스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홀로서기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몸에 나쁜 것을 그만두지 못하는 야생동물은 곧 죽음을 통해 사라질 운명에 있습니다. 다른 것들에 의지하려 하거나 주의를 게을리하자마자 소리도 없이 슬며시 몸이 파멸되기 시작합니다.

 

어느 사이에 도시 친구들도 들르지 않게 되고, 지역 주민들과 삶의 방식이 달라 지칠 대로 지쳐 갑니다. 자연에서 받는 감동은 점점 줄어들고, 자연이 주는 위협에 겁을 먹게 됩니다. 자연은 결코 이미지가 아니라, 삶과 죽음이라는 절실한 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하는 현실 그 자체라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김선현, <그림의 힘>

죽음 역시 우리 인생을 이루는 하나의 과정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하며 두려움을 다독여주는 것입니다.

 

공기, 물 중력 등 평소엔 느끼지 못하지만 늘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이 사라지는 순간, 우리는 한없이 무력한 존재가 됩니다. 어쩌면 시간도 그런 것이 아닐까요? 당연하게 주어지는 것 같았던 시간이 희박해지는 것을 보고서야 우리는 시간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는 듯합니다. 그런 점에서 죽음이 임박한 시간을 리얼하게 포착한 조르주 쇠라의 <임종을 맞이하는 아나이스 페브르 오몽테>는 '지금 이 시간에 충실하라'는 얼얼한 메시지를 던져줍니다.

 

 

리칭즈, <여행의 속도>

인류는 영원히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설령 저승사자를 용케 피한다고 해도 영원히 육신에 머무르는 것이 과연 행복한 것일까?

예전에 읽었던 우화 한 편이 생각난다. 옛날 어느 국왕이 저승사자에게 연회를 베푼다고 속인 후 그를 감옥에 가둬 버렸다. 저승사자가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되자 나라에는 더 이상 죽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노쇠한 노인들은 병마에 시달리며 힘든 시간을 연명해야 했고, 마차에 치이는 등 불의의 사고를 당한 사람이나 동물들은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에 신음하면서 숨이 끊어지기만을 간절히 애원했다. 그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가족들도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겪기는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그제야 깨달았다. 죽음은 인간 최후의 존엄이라는 사실을, 국왕은 어쩔 수 없이 저승사자를 풀어 주었고, 고통받던 사람들은 그제야 안식을 찾을 수 있었다.

 

야나카 영원의 벚꽃은 매우 유명하다. 이곳의 벚꽃나무들은 대부분이 심은 지 오래되어 매년 봄이면 화사한 벚꽃이 만개해 상공을 뒤덮는다. 묘와 벚꽃은 보통 잘 어울리지 않지만 이곳에서는 묘한 조화를 이룬다. 마치 제아무리 화려했던 벚꽃도 봄이 가면 처량하게 땅에 떨어져 버리는 것처럼, 화려한 삶과 죽음도 종이 한 장의 차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야나카 영원의 흩날리는 벚꽃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짧은 우리의 삶과 부귀영화의 부질없음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더 가치 있는 일에 힘을 쏟아야겠다는 다짐도 해본다.

 

 

마루야마 겐지, <인생따위 엿이나 먹어라>

그들은 태어난 순간부터 죽음이 찾아오는 순간까지 끊임없이 위험에 노출되어 있지만, 수많은 위험과 정명으로 맞서는 데서 오는 충만감으로 삶을 이어 간다. 긴장으로 점철된 하루하루를 즐기는 것이 몸에 배어, 비록 수명은 인간보다 훨씬 짧아도 삶의 충만감은 인간과 비교할 수 없다. 이런 충만감이야말로 이 세상을 사는 자로서 누려야 마땅한 진정한 행복이라는 것을 온몸과 오감으로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삶의 노예가 되는 한이 있어도, 죽음을 좇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오랜 시간 이어 온 삶을 무시하고 찰나에 불과한 죽음에 집착하는 것은 너무도 바보스러운 짓이다.

생명의 친구는 어디까지나 삶이지 결코 삶에 부수적인 죽음이 아니다.

그러니 삶을 통해 죽음을 응시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죽음을 통해 삶을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알레프>

나는 내가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 그리고 죽음에 직면한다면 앞으로 몇 시간 내에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알기 위해 거울속에서 내 얼굴을 바라본다. 내 육체는 두려움을 느낄 수 있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가와구치 요시카즈, <신비한 밭에 서서>

필요한 것을 스스로 알고 발견해서 가져다주는 지혜는 무차별지다. 이 앎은 잘 발휘하면 필요한 것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고 얻을 수 있다. 대소의 구별이 없기 때문에 더 큰 양배추를 만들어 더욱 많은 돈을 벌고자 하는 어리석은 일을 하지 않는다. 부와 빈곤의 구별이 없기 때문에 가난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그래서 더 많이 벌어들이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삶과 죽음이 나누어지지 않은 곳이기 때문에 더 오래 살고 싶다든가 괴로워 죽고 싶다든가 또는 죽음과 병들고 늙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없이, 자신의 한 생명에 집착함이 없이, 목적에 눈이 어두워 무명의 세계에 떨어지는 일이 없이, 다른 생명을 탐내는 일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사용하면 반드시 반자연적인 작용을 하게 된다. 그 결과 죽음의 독약이 되어 반드시 자연의 생명을 죽이게 된다.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농약을 사용한 결과로서 드러나는 질병은 잠시 나을지 모르지만 그로 말미암아 본체의 생명력은 결핍되어 간다. 결국 죽음으로 몰아넣는 행위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벼의 생명이나 채소의 생명이나 인간의 생명이나 흙의 생명이나 죽음을 앞당기고 있는 점에서 모두 마찬가지다. 일개 현상에 지나지 않는 병은 낫지만 생명이 결핍되어 간다. 병이라고 하는 일시적인 현상을 치료하기 위해 생명을 맞바꾸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튼튼한 생명도 이와 같이 바보스러운 일이 거듭되는 사이에 급속도로 약해져 간다. 하나의 병이 낫는지는 몰라도 그로 말미암아 더 깊은 병에 대한 저항력이 사라지고 마침내는 생명을 다하게 된다.

 

필요한 것은 모두 갖추고

스스로 가득 채우며

필요한 것만을 주며

자기를 잃어버리는 일 없이

남을 살리는 우주

우주의 마음 지구의 마음

결코 예를 잃지 않고 정성을 잃지 않는다.

우리도 우주로부터 배워

예를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야 하리.

예와 정성을 다했을 때 우리의 생명은 평온함에 선다.

우리의 생명이 평안에 듦녀 일체는 대 조화의 영위

우리의 생명은 기뻐하며 두려움을 모르고

우주의 도움 신들의 도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매사에 전지전능하게 움직이며 우주 일체의 실행

우리 체내에 뜬 간장 신장 심장

모든 내장 장기 기관들

우주에 뜬 달과 가고 지구와 같고 별과 같다.

인간 바깥의 우주, 인간 안의 우주

생명은 무한대이자 무한소 모든 곳이 생명

우주가 우주를 만든다. 생명이 생명을 만든다.

스스로 태어나

스스로 사는

지구의 생물들 인간들

지구는 신들의 화원 우주의 낙원

나의 신체를 무대로 해서 사는

수많은 생물들 세균들

지구의 신체를 무대로 해서 사는

수많은 생물들 인간들

논밭의 신체를 무대로 삼고 사는

수많은 생명들 벼들 채소들

각각의 생명들이 각자의 무대에서 공존공영 대조화의 영위

지구의 생명은 늘어나는 일도 없고 줄어드는 일도 없다.

지구의 생명은 우주의 생명과 나누어질 수 없는 운명

무대와 무대 위에서 번영하는 생명들

공존공영의 한 생명의 관계

논밭에서 벼나 채소가 없더라도

그 밖의 수많은 생물들의 번영과 활기로 말미암아 논밭은 화원

지구에 인간이 없더라도

다른 수많은 생물들의 번영하고 번창하며 지구는 낙원

이 낙원에 인간들의 생명도 번영, 그 수가 많다.

모든 것은 우주의 의지 우주의 배려 우주의 마음

지구는 우주의 기틀에 따라 응하며 그릇되는 일 없는 실행

사람에게 탄생이 있고 늙음이 있고 죽음이 있는 것 같이

지구에게도 탄생이 있고 늙음이 있고 죽음이 있다.

사람은 자신의 늙음, 자신의 죽음,

자신의 자식, 자신의 어버이, 자신의 어머니인 지구의 죽음을 슬퍼하지만

대 우주는

신은

창조주는

자신의 자식인 인간의 늙음과 죽음, 자신의 자식인 지구의 늙음과 죽음을 묵묵히 바라보기만 할 뿐

슬퍼하지 않고 막으려고 하지 않고 또한 막을 수도 없다.

오로지 묵묵히 운행 또는 운행

마침내 인류의 늙음과 죽음, 지구의 늙음과 죽음

한편 새로운 생물의 탄생과 성장

새로운 별의 탄생과 성장

그 모든 것이 우주 생명의 영위

끝없이 돌아가는 한 생명의 활동

 

인간의 신체를 매개로 하여 활동하는 암세포가 인간의 신체를 마치 제 것인 양 먹어 치워가며 인간을 병들게 하고 죽음으로 내몰아 마침내는 인간과 함께 자신의 목숨도 파괴하는 일이 있다. 이와 같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디작은 생물이 인간을 파괴할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이 생명의 터전인 지구를 마치 제 것인 양 독점하여 다른 생명을 모조로 잡아먹어 버리면 인간도 마침내는 지구와 함께 멸망할 수밖에 없다. ...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영위할 수 없고, 자신이 걸어가야만 할 길을 발견할 수 없는 약하고 미숙한 생명은 오로지 소비, 소모, 소멸, 연소, 멸망의 활동을 하게 된다. ...

정말 살기 위해서 다른 생명을 먹는 것이 아니라 죽기 위해 먹기 시작한다. 무명의 떨어진 생명이다. 죽음을 서두르며 밥과 낮 자신의 생명을 갉아먹으며 다른 생명을 먹어대는 탐욕을 멈출 수가 없는 것이다. 남아 있는 자신의 생명을 이용하여 죽음을 향해 속도를 올리고 있다. 마침내 탐할 힘도 없어질 때는 무기력하게 남아 있는 생명마저 다 타버려 생명을 다해 간다.

 

 

알랭 드 보통, <영혼의 미술관>

자연은 생명의 동인이자 죽음으로 이끄는 힘이다. 자연의 순리대로 살 필요가 있다고 말할 때, 이는 우리를 젊음의 열정과 햇빛의 아름다움에 내맡기는 것은 물론이고, 가을과 내리막을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 함을 의미한다.

 

 

오르한 파묵, <내이름은 빨강>

삶에서 추억으로 옮겨가고 있는 것...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더 두려운, 망각되는 것의 두려움....

 

 

강신주, <감정수업>

사랑의 감정은 바로 우리를 현재에 살도록 하고, 안전한 삶에 대한 생각은 우리를 미래에 살도록 만든다. 안전한 삶을 위해 현재의 열정적인 감정을 교살하는 삶,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삶이 과연 행복할까? 절대 그럴 수 없다. 왜냐고? 지금은 미래로 보이는 때도 언젠가 우리에게 현재로 다가올 테니까. 그렇게 우리는 이미 현재가 된 미래에서도 또 다른 미래를 위해 '지금 이 순간'을 포기하게 될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미래에 더 큰 가치를 두느라 현재를 부정하는 삶이 이르게 되는 종착역은 바로 죽음이다. 이것은 유한한 삶의 진실이다. 그러니 현재 누려야 할 행복과 기쁨을 미래로 미루지 말라!

 

 

<작가란 무엇인가>

모든 예술가의 목적은 인위적인 방법으로 삶이라는 움직임을 잡아서 다시 고정시켜, 수백 년 후에 이방인이 그것을 보게 되었을 때 그것이 삶이기 때문에 다시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에게 유일하게 가능한 불멸은 언제나 살아 움직여서 불멸인 어떤 것을 뒤에 남겨놓는 것뿐입니다. 그것은 항상 움직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술가들이 언제가는 통과하게 될 최후이자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죽음이라는 망각의 벽에 "킬로이가 여기 왔었다."라고 적어놓는 방식입니다.

 

 

파울로 코엘료, <아크라 문서>

변화를 거부하는 사람들도, 변화를 받아들인 사람들도, 언젠가는 죽음의 방문을 받는다. 변화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죽음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참으로 흥미진진한 삶을 살았습니다. 축복을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모험이 위험하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나는 말하고 싶다. 계속 그렇게 살다간, 모험을 추구하며 사는 사람들보다 더 빨리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스스로 길을 택했다 해도, 그들이 그 길의 목표를 알게 되는 것은 죽음과 마주하는 순간에 이르렀을 때다. 열정을 품고 삶의 신비를 존중하며 나아가는 사람은 아름답다. 그의 길도 아름다우며 그의 짐은 가볍다.

 

인간의 탄생과 함께 불안도 태어난다. 불안을 완전히 제어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우리는 불안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폭풍우와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우듯이 불안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에게 삶은 악몽이다.

하루를 이루는 매 시간들, 감사히 여겨야 마땅할 그 시간들이 그들에게는 저주다. 그들은 죽음과의 만남을 재촉하는 것인 줄도 모르고 시간이 빨리 흐르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들이 불안을 떨치기 위해 하는 일은 결국 불안을 더욱 키우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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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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