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학은 물체 사이의 상호작용과 물체의 운동, 물질의 구성과 성질과 변화, 에너지의 변화 등을 연구하여 자연을 이해하는 학문이다. 화학, 생물학 등과 더불어 자연과학을 이루며, 자연과학 중에서 제일 기본적이고 가장 먼저 체계화된 학문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물리학 [Physics] (물리학백과)

 

고전 물리학을 넘어 아원자적 세계의 양자역학과 자연, 우주의 상호연관성을 다루게 되면서 과학적 이해와 설명의 과정에 동양적 사고를 접목해 볼 수 있다.

 

 

[본문발췌]

 

 

기계적인 서양적 관점과는 대조적으로 동양의 세계관은 '유기적인' 것이다. 동양의 신비론에 있어서는 감각에 비치는 모든 사물과 사건은 상호 관련되고 연결되어 있으며 다 같은 궁극적인 실재의 다른 양상 내지 현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를 개별적이고 분리된 것으로 구분하고 이 세계 내에서 고립된 자아로서 우리 스스로를 체험해 보려는 경향은 우리들의 측정하고 분류하려는 심성에서부터 연유되는 환각이라고 보이는 것이다. 그것은 불교 철학에서는 아비댜(avidya), 즉 무지라고 불리며 극복해야 할 마음의 불안 상태로 간주되는 것이다. '마음이 흔들리면 잡다한 사물이 생기지만, 마음이 고요하면 잡다한 사물이 사라진다.'

 

 

동양 철학의 이 같은 유기적, 생태학적 세계관이야말로 동양 철학이 최근 서방에서, 특히 젊은이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끌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다. 아직도 기계론적인 분열된 세계관이 지배하고 있는 우리의 서양 문화권에서는 바로 그것을 우리 사회의 저변에 만연되고 있는 불만의 잠재 이유로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들의 수가 점증하고 있으며,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동양적인 해방에의 길로 돌아서고 있는 것이다. 

 

 

추론적 지식과 추론적 행위는 확실히 과학적 탐구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만약 과학자에게 신선한 통찰력을 부여해서 그를 창조적이게 하는 직관에 의하여 탐구의 추론적 면이 보완되지 않는다면 기실 그것은 아무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이러한 통찰은 갑자기 일어나는 경향이 있는데, 책상 앞에 앉아서 등식을 풀고 있을 때가 아니라 욕탕 속에서 심신을 녹이고 있을 때나 숲 속이나 해변을 거닐 때처럼 허심할 때에 홀연히 떠오르는 특성이 있는 것이다. 지적 활동에 골몰하고 나서 잠시 쉬는 틈에 이 직관적 마음은 솟아나는 듯하며, 이것이 과학 연구에 희열을 가져다주는 명석한 통찰을 갑작스레 생겨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직관적인 통찰은 그것이 일관성 있는 수학적 체계로 형성되고 일상 언어로 해석되어 보완되지 않는다면 물리학자들에게는 무용한 것이다. 이 기본 작업에 있어서 추상화가 가장 요긴한 특성이다. 그것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실재의 지도를 그려 내는 개념들과 상징들의 체계로 짜여진다. 이 지도는 다만 실재의 어떤 특성만을 나타낼 따름이다.

 

 

동양적 신비주의는 실재의 본질 속으로 꿰뚫고 들어가는 직접적인 직관 위에 기초하고 있고, 물리학은 과학적 실험을 통한 자연 현상의 관찰에 기반을 두고 있다. 양쪽 다 그 관찰은 해석되고 이 해석은 자주 언어에 의해 소통된다. 언어란 언제나 추상적이고 실재의 근사한 지도에 불과하기 때문에 과학적 실험이나 신비적 직관을 언어로 해석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애매하고 불완전하게 마련이다. ... 물리학에 있어서는 실험의 해석을 모형이나 이론이라고 부르며, 모든 모형이나 이론들이 근사치란 사실을 깨닫는 것이 현대 과학 연구의 밑바탕을 이룬다. 그래서 아인슈타인도 이런 경구를 말했다. "수학의 법칙들이 실재에 관해 언급하는 한 그것은 확실하지 않고, 그것들이 확실하다면 실재를 가리키지 않는다."

 

 

모든 과학적 모형과 이론들은 근사치밖에 안 되고 그것의 언어적인 해석도 우리의 언어가 지닌 애매모호성 때문에 곤란을 겪는다는 생각은 금세기 초 새롭고 전혀 예기치 않던 발전이 이루어지면서 과학자들에 의해 이미 널리 받아들여졌다. 원자의 세계를 연구하면서 과학자들은 일상 언어가 애매모호할 뿐만 아니라 원자와 아원자적인 실체를 기술하는 데 전적으로 적절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현대 물리학의 두 기반인 양자론과 상대성 이론은 이 실체가 고전적 논리를 초월하며, 그것은 일상 언어를 통해서는 말해질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아원자적 단계에서 물질은 어떤 한정된 장소에 확실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존재하려는 경향'을 나타내며, 원자적 사건들은 확실성 있게 한정된 시간에 한정된 방식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발생하려는 경향'을 나타내 보이는 편이다. 양자 이론의 형식론에서 이러한 경향성은 확률로써 표현되며 파동의 형태를 취하는 수학적인 양과 연관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어떻게 입자가 동시에 파동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까닭이다. 그것은 음향이나 물결처럼 실재하는 3차원적 파동이 아니다. 그것은 공간의 특정 지점과 특정한 시간에 입자를 찾아내는 확률과 관계 있는 파동의 모든 특유한 속성을 가진 추상적이고 수학적 양인 '확률파'다. 원자 물리학의 모든 법칙들은 이러한 확률로 표현된다. 우리는 원자적 사건을 결코 확실성 있게 예언할 수 없다. 단지 그것이 어떻게 일어날 것 같은가를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양자론은 이렇게 견고한 물체와 엄격한 결정론적인 자연 법칙이라는 고전적인 개념들을 말소시켰다. 아원자적 단계에서 고전 물리학의 견고한 물체는 파동과 같은 확률 모형들로 분해되며, 궁극적으로 이러한 모형들은 사물의 확률이 아니라 상호연관의 확률을 나타낸다. 원자 물리학에 있어서 관찰의 과정을 주의 깊게 분석해 본다면 아원자적 입자는 독립된 실체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험의 준비와 그 다음의 측정 사이에 있는 상호 연관으로서만 단지 이해될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리하여 양자론은 우주의 근본적인 전일성을 드러내 주었다. 그것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최소의 단위로 이 세계를 분해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물질을 뚫고 들어가 보면 볼수록 자연은 어떤 독립된 기본적인 구성체를 보여 주지 않고 오히려 전체의 여러 부분들 사이에 있는 복잡한 그물의 관계로서 나타난다. 이러한 관계들은 언제나 그 본질적인 면에서 관찰자를 포함한다. 인간이라는 관찰자는 관찰되는 과정들의 연쇄에서 마지막 연결을 이루며, 어떤 원자적 대상물의 성질도 단지 관찰자와 대상의 상호 작용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이것은 자연의 객관적인 기술이라는 고전적 이상은 이미 빛을 잃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와 세계, 관찰자와 관찰 대상 사이의 데카르트적 구분은 원자적 물질을 다룰 때에는 성립할 수가 없다. 원자 물리학에서는 우리 자신을 동시에 언급하지 않고서는 자연에 관해서 결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현대 물리학에서 우주는 본질적으로 항상 관찰자를 포함하는 역동적이며 불가분의 전체로서 체험된다. 이러한 체험에서 공간과 시간, 독립된 대상, 원인과 결과라는 식의 전통적 개념들은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체험은 동양 신비가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다. 그 유사성은 양자론과 상대성 이론에서 분명해지며 이 두 이론이 통합된 아원자적 물리학의 '양자-상대론적' 모델이서는 한층 더 강하게 되는데, 이것은 동양의 신비주의(힌두교, 불교, 도교의 종교 철학...)에서 가장 놀랄 만한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동양적 세계관의 가장 중요한 특징 - 그 본질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것 - 은 모든 사물과 사건들의 통일성과 공동의 상호 관계에 대한 깨달음, 곧 세계의 모든 현상을 기본적인 전일성의 현시로서 체험하는 것이다. 모든 것들이 이 우주 전체의 상호 의존적이며 불가분의 부분들로서, 다시 말하면 동일한 궁극적 실재의 다른 현현으로써 이해된다. 동양의 전통들은 그 자신을 만물에서 나타내며, 만물은 그의 부분들인 이 궁극적이고도 불가분의 실재에 관해 끝없이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힌두교에서는 '범', 불교에서는 '법신', 도교에서는 '도'라고 불린다. 그것은 모든 개념과 범주를 초월하기 때문에 불교도들은 그것을 일러 또한 '진여'라고도 부른다.

 

 

대립자란 것은 사고 영역에 속하는 추상적인 개념들이요 또한 그러한 것으로서, 그것들은 상대적인 것이다. 어떤 하나의 개념에 주의를 집중하는 바로 그 우리의 행위 때문에 그 개념의 대립자가 생겨난다. 노자는 이르기를 "세상에서 미를 모두 아름다운 것이라고만 이해할 때 추가 존재하며, 선을 모두 선한 것이라고만 이해할 때 사악한 것이 존재한다"라고 하였다. 신비가는 지성적인 개념의 영역을 초월하며, 그것을 초월하는 가운데 그는 모든 대립적인 것들의 상대성과 양극 관계를 알게 된다. 그는 선과 악, 쾌락과 고통, 생과 사가 서로 다른 범주에 속하는 절대적인 경험이 아니라 단지 동일한 실재의 양면이라는 것, 즉 단일한 전체의 양극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모든 대립자는 양극적인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리하여 하나의 통일체를 보는 것이 동양의 정신적인 전통에 있어서는 인간으로서 최고의 목적 중의 하나라고 여겨진다. <바가바드 기타> 경전 속에는 "현세의 대립성을 넘어서, 영원한 진리 속에 안주하라!"라는 크리슈나의 가르침이 있으며, 한편 불교에서도 그와 같은 가르침이 불제자들에게 베풀어졌다. 스즈키 다이세쓰는 이렇게 쓰고 있다. '불교의 근본 이상은 지적인 분별과 감정적인 오탁으로 만들어진 이 대립적 세계를 넘어서 정신적인 무분별의 세계를 깨닫는 것이다. 그것은 절대적인 여실지견(an asolute point of view)을 성취하는 것이다.'

 

 

모든 대립적인 것의 양극적인 것이라는 개념 - 즉 광명과 암흑, 득과 실, 선과 악 등이 동일한 현상의 다른 면에 불과하다는 생각은 동양인의 생활 방식에 있어서 기본적인 원리 중 하나다. 따라서 일체의 대립적인 것은 상호 의존적이기 때문에 그것들의 투쟁은 결코 어느 한쪽의 완전한 승리로 끝날 수 없고 항상 양자 간의 상호 작용을 표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양에서 덕이 있는 사람이란 선을 위해 분투하고 악을 소멸시키는 불가능한 과업을 떠맡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선과 악 사이에 역동적인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다.

 

 

동양적인 견지에 있어서는 모든 현상들을 떠받치고 있는 실재는 어떠한 형태도 초월하고 있으며 어떠한 묘사와 상술로도 설명이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그것은 종종 무형(無形), 공(空) 또는 허(虛)라고 일컬어진다. 그러나 이 공은 단순한 무로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것은 모든 형태들의 본질이며 모든 생명의 원천이다. <우파니샤드>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브라만은 생명이요, 브라만은 환희요, 브라만은 허다. .... 환희는 진실로 허와 같은 것이요, 허는 진실로 환희와 같은 것이다.'

 

 

중국 철학에서 공허하며 형체가 없으나 모든 형상들을 산출할 수 있는 도의 개념 속에 장의 관념이 함축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기의 개념에도 그것은 명백히 표시되어 있다.... '기(氣)'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가스' 혹은 '에테르'를 뜻하는데, 고대 중국에서는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호흡이나 우주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에너지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인체에서의 '기의 통로'가 전통적인 ㅎ나방의 기초가 되고 있다. 침술의 목적은 이 채널을 통하는 기의 소통을 자극하는 데 있다. 기의 소통은 또한 무사의 도교식 무용인 태극권의 흐르는 듯한 몸놀림의 기본이기도 하다.

 

 

양자장 개념과 함께 현대 물리학은 물질이 개별적인 원자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인지 혹은 근본적인 연속체로 되어 있는 것인지 하는 오래 전부터 제기된 의문점에 예기치 않았던 해답을 찾아내었다. 장은 공간의 어느 곳에나 존재하는 연속체지만 그것의 입자성은 비연속적인 '알갱이 모양'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외관상으로 모순되는 이 두 개념은 통일되어, 단지 동일 실재의 양면성으로 보게 된다. 상대성 이론에서 항상 그러하듯이 대립되는 두 개념의 통일은 역동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물질의 그 양면성은 끊임없이 서로 모습을 바꾼다. 동양의 신비주의도 공(空)과 그것이 창조해 내는 형상들 사이의 하나의 유사한 역동적인 통일성을 강조한다. 라마 고빈다의 말을 빌리면 이렇다. '색(色)과 공(空)의 관계는 서로 배타적인 대립의 상태로서 생각될 수가 없으며, 다만 동일 실재의 양면성으로서 공존하면서 연속적인 협력 고나계 속에 존재한다.' 이와 같은 반대되는 개념들이 하나의 단일한 전체로 융합되는 것은 불경 속에 다음과 같이 유명한 말로 표현되어 있다. '색(色)은 공(空)이요, 공은 곧 색이다. 공이 색과 다르지 아니하며 색 또한 공과 다르지 아니하니, 색인 것이 공이요 공인 것이 곧 색인 것이다.'

 

 

현대 물리학은 창조와 붕괴의 율동이 계절의 순환과 모든 생명 있는 피조물의 탄생과 죽음에서 나타날 뿐만아니라, 생명이 없는 무기 물질의 바로 그 본질이라는 것을 밝혀 왔다. 양자장 이론에 따르면 물질의 구성 요소들 간의 모든 상호 작용은 가상적 입자들의 방출과 흡수를 통하여 발생한다. 한층 더 나아가 창조와 붕괴의 무도는 물질을 존재케 하는 기본이 된다. 왜냐하면 모든 물질적 입자들은 가상적 입자들의 방출과 흡수를 통하여 '자체 상호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현대 물리학은 모든 아원자적 입자가 에너지 무도를 한다는 것뿐 아니라 창조와 붕괴의 고동치는 에너지 무도 바로 그것이라는 것을 드러냈다. 이 무도의 모형들은 각 입자들이 지닌 본성의 근본적인 양상이며 그 성질의 많은 것을 결정짓는다. 예를 들면 가상의 입자들의 방출과 흡수에 포함되어 있는 에너지는 자체 상호 작용하는 입자의 질량에 공헌하는 일정한 양의 질량에 상당한다. 다른 입자들은 그 무도에서 다른 모형을 전개시켜 다른 양의 에너지를 필요로 하며, 따라서 다른 질량을 갖게 된다. 끝으로 가상적 입자들은 모든 입자 상호 작용과 대부분의 입자 성질의 본질적인 양상일 뿐만 아니라 진공에 의해서도 생겨나고 붕괴된다. 따라서 물질뿐만 아니라 허공 역시 끝없이 에너지 모형을 생성시키고 소멸시키면서 우주적 무도에 참여하고 있다.

 

 

아원자의 세계는 리듬과 운동과 연속적인 변화의 세계다. 그러나 그것은 임의적으로 무질서하게 운동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뚜렷하고 명확한 모형에 따라서 움직이고 있다. 

 

 

입자 세계에 있어서의 대칭적 모형들의 발견은 많은 물리학자들로 하여금 이러한 모형들이 자연의 기본 법칙을 반영한 것이라고 믿게 하였다. 지난 15년 동안에 지금까지 알려진 모든 입자들을 통합하고, 물질의 구조를 '설명할' 궁극적인 '기본적 대칭'을 타맥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이 경주되어 왔다. 이러한 목적은 고대 그리스 인으로부터 물려받아 수많은 세기를 거쳐 발전되어 온 철학적 태도를 반영하고 있다. 대칭은 기하학과 더불어 그리스의 과학, 철학, 예술에서 중대한 역할을 하였으며, 거기서는 대칭은 미와 조화, 그리고 완성과 동일시되었다. 그러므로 피타고라스 학파는 대칭적인 수 모형들을 만물의 본질로 보았으며, 플라톤은 네 개의 원자 요소들이 일정한 고체의 형상을 이루고 있다고 믿었다. 또 대부분의 그리스 천문학자들은 천체가 원운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것은 원이야말로 지고의 대칭성을 지닌 기하학적 형상이었기 때문이다. 대칭에 대한 동양 철학의 태도는 고대 그리스 인들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극동의 신비적 전통들은 대칭적 모형들을 상징이나 명상의 방편으로 자주 활용하지만, 대칭의 개념이 그들의 철학에서 어떤 중요한 역할을 한 것 같지는 않다. 기하학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자연의 속성이라기보다는 마음의 소산으로 여겨졌으며, 따라서 그것은 근본적인 중요성을 가진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따라서 많은 동양의 예술 형식들은 비대칭을 현저하게 편애하였으며 완전히 규칙적이거나 기하학적 형상은 종종 기피되고 있다. 선(禪)의 영향을 받은 중국과 일본의 회화는 소위 '여백(餘白, onecorner)' 양식이라 불리는 방법으로 자주 그려졌다. 또한 일본 정원에 불규칙적으로 배열된 부석(敷石)은 극동 문화의 이런 면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현대 물리학에서) 우리는 세계를 대상물들의 여러 가지 그룹으로서가 아니라 여러 가지 연결 관계의 그룹으로 세계를 나눈다. .... 식별될 수 있는 것은 어떤 현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연결 관계의 모습이다. ... 따라서 세계는 사건들의 복잡한 조합으로서 나타나며 그 안에서 다른 종류의 연결 관계들이 서로 엇갈리거나 겹쳐지거나 결합하고, 이렇게 하여 천체의 구조를 결정짓는 것이다. - 하이젠베르크

 

 

원자와 아원자 물리학의 이론들은 기본적 입자들의 존재를 점점 더 있을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게 했다. 그 이론들은 운동 에너지가 질량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것을 보였고, 그 입자들이 대상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진행 작용들이라는 것을 제시하면서 물질의 근본적인 상호 연관성을 드러내 보였다. 이 모든 진전들은 기본적인 구성체라는 단순한 기계론적인 상이 폐기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하게 암시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물리학자들은 여전히 그렇게 하기를 주저하고 있다. 복합적인 구조를 더 단순한 구성 요소로 분해하여 설명하려는 해묵은 전통은 서양의 사고에 아주 깊이 뿌리 박혀 있어 이러한 기본적인 구성체에 관한 탐구가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자연은 소립자나 근본적인 장(場)과 같은 기본적인 실체로 환원될 수 없다는 생각으로부터 출발하는, 근본적으로 사상이 다른 입자 물리학파가 있다, 그것은 그 구성 요소들이 상호간에도 그 자체로도 어느 쪽으로나 모순되지 않는 자체 조화를 통해서만 전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S행렬 이론과의 관계에서 일어났으며 그것은 '부트스트랩(bootstrap : 구두끈)' 가설로 알려져 있다. 이 이론의 창시자며 주요 주창자는 제프리 추(Geffrey Chew)인데 그는 이 생각을 한편으로는 자연의 일반적인 상호 작용의 철학에로 발전시켜 왔으며, 또 한편으로는 S행렬이라는 말로 형식화된 입자들의 특정한 모델을 작성하는 데 그것을 이용하였다. ... 부트스트랩 철학은 현대 물리학에 있어서의 기계론적 세계관에 대하여 최종적인 반론을 제기하였다. 뉴턴의 우주는 어떤 근본적인 특성을 지닌 기본적인 실체로부터 구성되었는데 이것은 신에 의해 창조된 것이므로 그 이상의 분석을 추구할 필요가 없었다. 아무튼 더 이상 분석될 수 없는 실체들의 집합으로서는 이 세계가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을 부트스트랩 가설이 명백히 표명했을 때까지는 이러한 개념은 자연 과학의 모든 이론에 절대적이었다. 새로운 세계관에 있어서 우주는 상호 연결된 사건들의 역동적인 망(網)으로 보이게 되었다. 이 망의 어느 부분의 특성도 근본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모든 다른 부분들의 특성으로부터 이어져 나오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들 서로의 상호 관계의 전체적 조화가 그 망 전체의 구조를 결정짓는다. 이와 같이 부트스트랩 철학은 양자론에서 하나의 본질적이고 우주적인 상호 연관성을  깨달음으로써 발생하여 상대성 이론에서 그 역동적인 내용을 획득하고, S행렬 이론에서 반응 확률에 의하여 형식화된 자연관에 있어서의 최고 정점을 나타낸다. 동시에 이러한 자연관은 계속 동양적인 세계관에 더욱 가까이 접근했으며 지금은 그 일반적인 철학과 물질에 관한 특수한 상의 양면에서 동양의 사상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부트스트랩 가설은 물질의 근본적인 구성 요소의 존재를 부정할 뿐만 아니라 근본적인 법칙이나 등식, 원리 등의 근본적 실체들을 모두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수백 년 동안 자연 과학의 본질적 요소가 되어 왔던 또다른 개념을 파기한다. 

 

 

"모든 사물의 근본적인 본성은 이름지어질 수도 설명될 수도 없다. 그것들은 어떤 언어의 형식으로도 적절하게 표현될 수 없다." - 아슈바고샤, <The Awakening of Faith>. 그러므로 동양의 현인들은 대체로 사물을 설명하는 데 흥미를 가지지 않고 오히려 모든 사물의 통일성에 관한 직접적이고 비지성적인 경험을 체득하는 데에 더욱 흥미를 두고 있다. 바로 이러한 것이 인생의 의미, 세계의 기원, 열반(nirvana)의 세계에 관한 모든 질문에 대해 '고귀한 침묵'으로 대답을 해주었던 부처의 태도다. 무엇인가를 설명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선사들이 하는 불가해한 대답도 제자들에게는 동일한 목적 가진 것으로 여겨진다. 즉 모든 것이 다른 것의 결과라는 것, 또 자연을 '설명' 한다는 것은 단지 그것의 통일성을 보여 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뜻한다는 것, 궁극적으로는 설명할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는 것으로 여겨진다.

 

 

나는 과학과 동양의 신비주의(힌두교, 불교, 도교의 종교 철학...)를 각각 추론적인 것과 직관적인 것 두 능력을 지닌 인간 정신의 상보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 신비주의적 경험은 사물의 가장 깊은 본성을 이해하는 데 불가결하고 과학은 현대 생활에 긴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종합이 아니라 신비주의적 직관과 과학적 분석 사이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이다.

 

 

생태학적 세계관(ecological worldview), 생태학적 인식은 모든 현상들이 근본적으로 상호 의존하고 있으며 개인과 사회가 자연의 순환 과정에 깊이 관련되어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 생태학적 패러다임은 현대 과학의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과학의 틀을 넘어서 모든 생명의 일체성, 다양한 현상들의 상호 의존성, 그것의 변화와 변형의 순환성 등으로 나아가게 하는 실재에 대한 인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궁극적으로 그런 깊은 생태학적 자각은 정신적인 자각이다.

 

 

과학에서의 새로운 패러다임 사고

  • 부분과 전체의 관련성. 부분과 전체의 관계는 보다 더 대칭적이다.
  • 구조를 통한 사고에서 과정을 통한 사고로의 변화. 세계는 운동 흐름, 변화를 통해서 지각된다.
  • 객관적 과학으로부터 '인식론적' 과학으로의 전환. 지식의 과정에 대한 이해가 자연 현상에 대한 기술 속에 분명히 포함되어야 한다.
  • 지식을 어떤 확고한 토대도 없는 그물로 비유. 부트스트랩 이론에 따르면, 자연은 물질로 된 기본적인 토막처럼 어떤 기본적인 실재로 환원될 수 없으며 자기모순이 없음을 통해서 완전히 이해되어야 한다. 사물들은 상호 모순이 없는 관계들에 의해서 존재하며, 모든 물리학은 그 구성 성분들이 서로 모순이 없어야 하고 자기들끼리 모순이 없어야 한다는 요구를 따라야 한다.
  • 진리로부터 근사적인 기술로 전환. 모든 과학적 개념과 이론들이 한계를 가지며 근사적이라는 것. "과학은 잠정적인 대답을 통해서 자연 현상의 본질에 더욱 깊이 도달하려는 일련의 더욱 미묘한 물음들을 향해 나아간다." - 루이 파스퇴르
  • 인간을 포함하고 있는 자연을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태도로부터 협조와 비폭력의 태도로 전환. ... 17세기 이전의 과학의 목표는 자연과 더불어 조화를 이루어 살면서 자연의 질서를 이해할 수 있는 지혜를 얻는 것이었다. 생태학적 태도라고 부를 수 있는 이런 태도는 17세기에 정반대로 바뀌었다.  베이컨 이래로 과학의 목표는 자연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데 사용될 수 있는 지식을 얻는데 있었으며, 오늘날 과학과 기술은 위험스럽고 유해하며 반생태학적인 목적에 주로 사용되고 있다. ... "자연의 질서를 따르려는 자는 도의 흐름을 따라 흘러간다."

 

현대 물리학이 두 가지 커다란 주제인 우주의 기본적인 통일과 상호 연관성 그리고 우주의 자연 현상의 본래적인 역동성은 미래의 연구에 의해 무효로되지는 않는다고 믿는다. 그것들은 재구성될 것이며 우리가 현재 주장하고 있는 많은 개념들은 내일에는 다른 개념들로 대체될 것이다. 그러나나는 이러한 대체는 순차적으로 일어날 것이며 내가 신비주의적 전통과 비교하면서 사용하고 있는 기본 주제들은 무효가 되기보다는 강화될 것으로 믿는다. 이러한 믿음은 이미 물리학에서의 새로운 발전뿐만 아니라 생물학과 심리학에서 두드러진 새로운 발전으로 확증되고 있다.

 

 

한편 나는 서양의 정신적 전통들이 새로운 패러다임의 가치관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몇 가지 근본적인 변화를 겪어야 할 것이라고 믿는다. 여기서 내가 약술한 실재에 대한 통찰에 대응하는 정신(spirituality)은 생태학적, 지구 중심적, 탈가부장주의 정신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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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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