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속에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불확실하지만, 그것을 피하거나 외면할 수 없다. 오로지 정면으로 맞서 이겨낼 수 밖에는....

 

 

[본문발췌]

 

 

경제학자나 정치철학자의 이념은 그것이 옳은 것이든 그른 것이든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강력하다. 실제로 이 세계가 그러한 이념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어떠한 지적 영향과도 무관하다고 스스로 믿고 있는 경험 많은 사람들도 이미 고인이 된 어떤 경제학자의 노예가 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다. - 존 메이너드 케인스

 

 

인간은 자기들이 이미 갖고 있는 것을 지키거나, 갖고 싶은 것을 정당화시키려는 경향이 강하다. 이로 인해 그러한 목적에 이바지하는 사상을 옳다고 보기도 한다. 물론 사상이 기득권을 초월하지만, 그 반대로 사상이 기득권의 소산인 경우도 대단히 많다.

 

권력은 지배자로부터 지주로, 지주로부터 농업 노동자에게로 흘러내려 갔다. 권력이 위로부터 아래로 흘러내려 온 것과 반대로, 권력으로 얻어진 소득은 아래에서 위로 거슬러 올라갔다. 이것은 명심해 둬야 할 원칙이다. 소득은 항상 권력과 같은 축을 따라서 흘러가지만 방향은 정반대인 것이다.

 

 

토스타인 배블런의 <유한계급의 이론>은 재산으로 부자가 누리게 되는 뿌리 깊은 우월감을 중심 문제로 다룬다. 우월감을 즐기기 위해서는 이 우월감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부자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신중히 숙고하여 재산을 과시하는 것이다. 이 목적에 이바지하는 것이 현시적 여가와 현시적 소비 두 가지이다. 특히 현시적 소비는 배블런이 미국의 언어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게 한 것이다. 현시적 여가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세계, 일 이외의 것에는 마음과 몸을 쓸 겨를이 없는 세계에 빠졌을 때 얻게 되는 것이다. 부자라고 몸소 일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아내나 딸의 한가로움을 사람들의 눈에 띄게 함으로써 커다란 우월감을 얻는다. 현시적 소비란 소비에 드는 비용의 크기를 사람들에게, 오로지 인상 깊게 하는 것만을 노린 소비이다. 그들의 취향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유한계급의 이론>이 출판되고 나서부터는 부자가 허세, 방종, 향락에 돈을 사용하면 누군가가 저것은 현시적 소비라고 비웃게 되었다.

 

 

구조 변화와 발전의 유기적인 과정은 이윽고 마르크스의 사상의 핵심이 되었다. 이러한 구조 변화의 원동력은 사회계급 간의 투쟁이다. 이것에 의해 사회는 끊임없이 변화의 상태에 놓이게 된다. 일단 사회 구조가 외관상 안정된 상태로 발전하고 나면, 그 속에서 그 구조에 도전하고 파괴하려는 적대적인 힘이 자라난다. 이렇게 해서 새로운 사회구조가 출현하고, 투쟁과 파괴의 과정이 새로이 시작되는 것이다.

 

 

혁명에는 세 가지 조건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우선 먼저, 자신들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를 정확하게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얻게 되느냐, 아니면 모든 것을 잃게 되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한 인물은 드물다. 혁명은 기회를 포착하는 사람을 끌어들인다. 다음으로, 지도자 밑에는 명령만 내리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움직여 주는 잘 훈련된 부하가 있어야 한다. 이것 또한 좀처럼 바랄 수 없는 일이다. 혁명가에게는 끝까지 혼자서 생각하고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려고 하는, 사람을 당황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공론만 떠벌리는 무리들을 끌어들이거나 그들에게 말려들 우려도 없지 않다. 그러한 무리들은 끌여들여서는 안 된다. 그러한 무리들은 끝도 없이 논쟁만 하며 그 동안에 스스로 파멸되게 퇼테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혁명의 상대가 약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성공한 혁명은 모두 썩어서 무너질 듯한 문을 박차고 들어가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혁명의 폭력이란, 말하자면 진공 상태 속으로 돌진해 들어가는 사람들의 폭려고가 마찬가지이다. 프랑스 혁명이 그러했고,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이 그러했다. 제 2차 세계대전 후의 중국 혁명도 역시 그러했다. 그러나 1848년의 혁명은 그렇지 않았다.

 

 

화폐는 역사의 전 과정을 통해서 다음 두 가지 중의 어느 한 가지 방법으로 거의 모든 사람들을 괴롭혀 왔다. 즉 풍부하면서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이었거나, 아니면 믿을 수는 있지만 극히 부족하거나 두 가지 중에 하나였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제3의 고통이 있었으니 그것은 화폐가 부족한 동시에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정치라는 것은, 이 방면에서 가장 오래된 상투적인 문구 하나로 말하자면, 가능성의 예술이다. 마찬가지로 그것이 최고로 발전한 단계에서, 정치란 중요한 것과 말초적인 것을 구분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아무리 어렵다 하더라도 중요한 것에 전력을 기울이는 예술이다. 우리 시대에 있어서 어떠한 문제도 미소 간의 무기 경쟁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또한 불확실성의 원천으로서 이것만큼 확실한 것도 없다. 이 경쟁은 이제 두 나라가 서로를 보복적으로 파멸시키고, 세계의 나머지 부분까지도 몇 시간 내로 끌어들이는 수단까지 개발시키고 있다. 거대한 기술 자원이 파멸에 필요한 시간을 분 단위로 축소시키기 위한 노력에 쓰여지고 있다. ... 앞에서 지적한 경쟁은 두 갈래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이것과 연관되어 있는 두 가지 모두 아주 불길한 것인다. 첫 번째, 본래적으로 적대적인 경제, 정치, 사회 체제 간의 충돌 -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대립 - 이라는 개념이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전제주의적 규제와 개인의 자유, 무신론과 종교적 신앙 등 어느 것 사이에도 화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 두 번째, 군비 확대 경쟁이 우리들의 사회를 움직이고 있는 힘의 결과이며, 미국에서나 소련에서나 군부 체제 및 무기를 만드는 사람들이 갖는 공적 권력의 표시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이중의 유착 관계가 엿보인다. 미국에서는 거대한 무기 회사가 군부에 그들이 요구하는 무기를 공급한다. 공군, 해군, 그리고 육군은 그 답례로 회사에 이익과 고용을 주도록 주문하고, 이것으로 회사는 기능하고 번영한다. 회사와 군부는 연구와 개발을 공동으로 하고, 현재 사용하고 있는 무기를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만드는 것과 동시에 새로운 무기를 필요로 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유착 관계다. 두 번째는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과 거의 비슷한 형태의 과정이 이 두 나라 사이에도 존재하고 있다. 이들 양대국은 각각 혁신과 무기 축적을 추진해서 상대국이 동일한 또는 그 이상의 일을 할 필요성과 동기를 만들어 낸다. 이런 식으로 양국은 서로 경쟁하는 것이 자기 영속적인 것임을 확신하게 한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자유와 권위, 진보와 반동, 마르크스와 그리스도 간의 차이가 인용되기는 하지만, 이것은 의례적인 인용이지 진정한 것은 아니다. 어떠한 신앙도 무기 경쟁을 지지하지 않는다. 또 어느 정도 지식이 있는 모든 사람들은 충돌이 생겨나면 어느 체제도 존속될 수 없다는 점에 의견을 일치하고 있다. 양국은 모두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함정에 빠져 있는 것이다.

 

 

'불확실성의 시대'에 있어서 법인 기업은 그 불확실성의 주요한 원천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어떻게, 누구에 의해 그리고 어떠한 목적으로 지배되는가에 대해 의문을 품게 한 채 그 대답을 주지 않는다. 이 불확실성에 대한 하나의 응답은 분명한 것이다. 그것은 신화를 꿰뚫어 보고 현대의 법인 기업의 실체를 바라보는 것이다.

 

 

기업의 경영자는 쫓기는 사람이다. 다른 시대나 다른 세계에서 온 철학자는 그들의 인생관에 놀랄 것이다. 어째서 그들은 이와 같이 시간과 건강을 희생하는가 하고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그 철학자는 그들의 호기심을 끄는 보수라는 개념 - 부하에게는 하찮은 복종을 요구하고, 자신은 막상 쓸 시간도 없는 돈에 집착하는 - 에 의아해할 것이며, 어째서 그들이 이처럼 열심히 일하는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철학자는 그들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더라도 어리석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사악한 회사보다 더 나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능한 회사이다. 잘못된 결정과 마찬가지로 나쁜 것은 시기를 놓치고 마는 결정이다.

 

 

빈곤의 균형을 깨뜨릴 수 있는 방법은 원칙적으로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보다 많은 토지를 공급하거나 물이나 비료의 형태로 토지의 공급을 대신하는 효과를 나타내는 것을 주어야 한다. ...그것에 착수하기에 충분한 최소한의 토지를 경작자가 소유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두 번째의 가능성은 농민이 생산한 생산물로 그들의 노력이 보상될 수 있도록 토지 소유제를 변경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도 또한 충분한 토지가 있어야만 한다. 세 번째의 답은 아이를 조금만 낳는 것이다. 네 번째로는 주인이 아예 그곳을 떠나는 것이다(이주). 만약 토지가 정말로 충분하지 못하다면 이 마지막의 두 가지 답만이 도움이 될 것이다.

 

 

지도자는 타협을 할 수 있다. 정치는 가능성의 예술이다. 그러나 지도자가 곤란을 회피한다고 여겨져서는 안 된다. ... 지도자는 그 시대의 불안에 맞설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문제가 변화함에 따라 자기도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민주주의에 있어서의 교육에는 두 가지 필요한 조건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 교육은 반드시 필요한 공동체 의식의 배양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경우에 따라서는 그정한 이익은 비록 그것이 개인의 이익이라 하더라도, 일반의 이익에 양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식, 그리고 전체에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은 당사자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의식이 그것이다. 동시에 일반의 이익에 저항하는 인물은 그 인물 자체에 대한 저항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수반되어야 한다. 법인 기업이나 동업조합, 군인이나 관료, 노동조합이나 변호사, 의사나 교수들이 공공의 이익보다 자기들의 금전적 또는 관료주의적 이익을 우선시키려고 하는 경우에 국민은 이것을 깨닫고 반응하며, 반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민주주의 교육이란 이런 인식과 이런 책임을 가르치는 것이어야 한다. 둘째로, 교육은 사람들에게 당면한 과제에 의심 없이 명확한 결단을 내릴 수 있게 하는 동시에 그렇게 하는 사람과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을 구별하게 하여 개인적 안정감을 심어 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 현대의 방관자 같은 정치의 나쁜 점은, 시대의 불안에 대한 대책을 공약하면서도, 이에 필요한 행동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자신을 선출해도 아무 걱정할 것이 없다고 교묘히 설득하는 정치가를 추어올린다는 점에 있다. 이를테면 "나는 평화에는 찬성하지만 군사력의 약화는 원치 않는다."라든가, "빈곤은 없어져야 하지만 납세자에게 새로운 부담을 주어서는 안 된다."라든가 "소득의 보다 적절한 분배에는 찬성하지만 개인기업의 보수에는 개입하지 않겠다."라고 하는 정치가가 그것이다. ... 우리는 이들 학생들이 민주주의에서 그들이 주권자라는 것, 즉 스스로 결정을 내릴 권리와 책임과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확신을 갖게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우리들은 또한 지도자를 양성하고 싶어 하는데, 그것은 타인을 위해 결정을 내리고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을 만한 지식과 자존심을 구비한 남녀의 양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지도력이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는 동시에 지도력이 그들에게 있다는 것을 전해야 하는 추종자를 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모순은 원칙적으로는 양립하지 않는 것이지만 실제 문제로서는 해결이 가능한 것이다.

 

 

결단의 중요성을 이해한다는 것은 바로 여기서 논의해 왔던 문제를 총체적으로 전망한다는 것을 뜻한다. 해결이 곤란한 문제는 있다 하더라도 극히 드물다. 곤란이 있다면 그것은 문제와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는 점에 있다. 우리는 무엇이 이루어져야 하는가를 알고 있지만, 무기력과 금전상의 이해와 감정 또는 무지 때문에 그것을 말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의 문제는 현재의 부 또는 적어도 잠재적인 부의 재분배 외에는 해결 방법이 없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만 이 해결책을 공약으로 내거는 결단력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을 뿐이다. 또한 앞에서도 본 바와 같이 가난한 나라에서 부유한 나라로 사람들이 이동해야 한다는 가장 오래된 해결책에 이르면 이것을 제안하는 사람은 더욱 적어진다. 가난한 나라에서의 잔인한 인구 증가는 산아제한이라는 방법 이외로는 억제할 수 없다. 중국인과 점점 늘어만 가는 인도인은 산아제한이 강제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이 두 나라 이외에 이 냉혹한 진리와 정면으로 대결하고 있는 나라는 거의 없다. 나라가 가난하면 가난할수록 행정면에서의 인적자원도 부족하다. 다만 예부터 조직 능력이 풍부한 중국인의 경우는 예외이다. 따라서 일반적으로는 고도로 조직화된 노력에 의존하는 것이 가난한 나라의 경우 한층 곤란한데, 사회주의가 그 극단적인 예이다. 빈곤의 정도가 심하면 심할수록 가난한 나라는 일반적으로 애덤 스미스나 카를 마르크스가 경제 발전의 초기에서는 불가결한 것이라고 믿었던 개인 에너지의 해방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난한 나라 중에서 이처럼 외관상으로도 대단히 보수적인 진리에 정면으로 대결하려 하는 나라는 결코 많지 않은 것이다. 

 

 

부유한 나라에서도 빈곤의 문제에 대처하는 데에는 마찬가지 어려움이 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소득을 주는 이상으로 효과적인 해결책은 없는 것이다. 식량, 주택, 의료 서비스, 교육 또는 현금, 어떠한 형태를 취하든 간에 소득은 빈곤에 대한 최선의 구제책이다. 그러나 이처럼 명백한 진리이면서도 이만큼 교묘한 핑계를 낳게 한 예는 없다. 우리는 우리 주위를 둘러싼 대기나 물, 풍경에 대해 무엇을 할 수 있고 없는가를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우리들의 환경을 보호한다. 이것도 어려움을 수반하는 진리이다. 왜냐하면 에너지 부족에 대처하기 위해서라든지, 고용 확보를 위해서라든지, '나의 자동차를 위해서'라는 이유에서 예외 취급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자원을 장기간 지속시키기 위해 그 이용을 절약해야 한다는 것도 역시 곤란을 수반하는 진리이다. 정치가로서 실업이나 인플레이션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소득과 가격에 대한 어떤 통제 없이 높은 고용 수준과 가격 안정을 동시에 달성하는 방법은 없는 것이다. 그러한 통제 없이는 더욱더 소비를 늘리려는 투쟁, 그리고 그 소비를 지탱하기 위해 소득을 향상시키려는 투쟁 - 그것은 현대의 법인 기업, 현대의 노동조합 및 현대의 민주주의가 한결같이 촉진하고 장려하는 경쟁이다 - 은 물가를 상승시키게 될 것이다. 그때는 심각한 실업을 발생시키는 것 이외에는 이 가격 상승의 압력을 완화시킬 방도가 없다. 현대의 경제는 오로지 인플레이션이냐 실업이냐 아니면 통제냐 하는 선택밖에 주어지지 않는데, 이 진리를 진심으로 받아들이려는 의욕이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거대 도시 지역의 문제는 결코 복잡하지 않다. 그것은 대부분 돈 문제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웃해서 또는 아래 위로 겹쳐서 살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많은 비용이 든다. 만약 우리가 그와 같은 생활을 하려면 우리들은 그 비용을 부담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만약 사람들이 도시에서 빠져나오는 것으로 비용 부담을 면할 수가 있다면, 약간의 또는 많은 사람들이 도시를 빠져나갈 것이다. 그럴 경우 도시의 경제적 기반은 침식될 것이고 돈 문제는 더욱 심해질 것이다. 즉 보다 효율적인 시정, 낭비적 지출의 억제, 교직원이나 경관이나 청소 관계 조합에 대한 강경한 태도 등을 약속하는 연설을 하는 편이 나은 것이다. 핑계가 가장 잘 통할 때는 문제가 복잡할 경우이다. 문제의 해결이 곤란해 보이면, 우리는 해결을 뒤로 미루고 타협하며, 정치적 편의주의에 굴복해 버리고 만다. 우리들이 복잡함을 어떻게 핑계 삼고 있는가를 알려면 때때로 문제의 회피가 불가능할 만큼 사태가 명백한 도시나 시골에 찾아가 보는 것이 좋다.

 

 

최초의 (핵)미사일을 서로 발사한 뒤에는 흐루쇼프가 세계에 대해 경고했던 것과 같이 공산주의의 재와 자본주의의 재를 구별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열광적인 이데올로기론자라 하더라도, 그도 또한 이 세상에 살고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 차이에 대해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불확실한 시대이기는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바로 이 같은 진리에 우리들이 정면으로 맞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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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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