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난 속도와 양으로 텍스트를 쏟아내는 미디어 세상!

짧은 몇 단어, 몇 줄의 시[詩]에 호흡과 운율, 그리고 마음을 가득 채우는 의미가 있다.

 

그 시가 노래가 되어 감동을 주기도 한다. 정호승 시인의 시를 안치환이 부르는 노래처럼.....

 

 

[본문발췌]

 

 

세월이 가면 ㆍ 박인환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혜화역 4번 출구 ㆍ 이상국

 

딸애는 침대에서 자고

나는 바닥에서 잔다

그애는 몸을 바꾸자고 하지만

내가 널 어떻게 낳았는데....

그냥 고향 여름 밤나무 그늘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바닥이 편하다

그럴 때 나는 아직 대지의 소작이다

내 조상은 수백년이나 소를 길렀는데

그애는 재벌이 운영하는 대학에서

한국의 대 유럽 경제정책을 공부하거나

일하는 것보다는 부리는 걸 배운다

그애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

 

내가 우는 저를 업고

별하늘 아래서 불러준 노래나

내가 심은 아름드리 은행나무를 알겠는가

그래도 어떤 날은 서울에 눈이 온다고 문자메시지가 온다

그러면 그거 다 애비가 만들어 보낸 거니 그리 알라고 한다

모든 아버지는 촌스럽다

 

나는 그전에 서울 가면 인사동 여관에서 잤다

그러나 지금은 딸애의 원룸에 가 잔다

물론 거저는 아니다 자발적으로

아침에 숙박비를 얼마를 낸다

나의 마지막 농사다

그리고 헤어지는 혜화역 4번 출구 앞에서

그애는 나를 안아준다 아빠 잘 가

 

 

 

질투는 나의 힘 ㆍ 기형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수선화에게 ㆍ 정호승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용기 ㆍ 요한 괴테

 

신선한 공기, 빛나는 태양,

맑은 물, 그리고

친구들의 사랑

이것만 있다면 낙심하지 마라.

 

 

 

도보순례 ㆍ 이문재

 

나 돌아갈 것이다

도처의 전원을 끊고

덜컹거리는 마음의 안달을

마음껏 등질 것이다

 

나에게로 혹은 나로부터

발사되던 직선들을

짐짓 무시할 것이다

 

나 돌아갈 것이다

무심했던 몸의 외곽으로 가

두 선 두 발에게

머리 조아릴 것이다

한없이 작아질 것이다

 

어둠을 어둡게 할 것이다

소리에 민감하고

냄새에 즉각 반응할 것이다

하나하나 맛을 구별하고

피부를 활짝 열어놓을 것이다

무엇보다 두 눈을 쉬게 할 것이다

 

이제 일하기 위해 살지 않고

살기 위해 일할 것이다

생활하기 위해 생존할 것이다

어두워지면 어두워질 것이다

 

 

 

걸어보지 못한 길 ㆍ 로버트 프로스트

 

노란 숲 속 두 갈래길

나그네 한 몸으로

두 길 다 가 볼 수 없어

아쉬운 마음으로 덤불 속 굽어든 길을

저 멀리 오래도록 바라보았네

 

그러다 다른 길을 택했네

두 길 모두 아름다웠지만

사람이 밟지 않은 길이 더 끌렸던 것일까

두 길 모두 사람의 흔적은

비슷해 보였지만

 

그래도 그날 아침에는 두 길 모두

아무도 밟지 않은 낙엽에 묻혀 있었네

나는 언젠가를 위해 하나의 길을 남겨 두기로 했어

하지만 길은 길로 이어지는 법

되돌아올 수 없음을 알고 있었지

 

먼 훗날 나는 어디선가

한숨지으며 말하겠지

언젠가 숲에서 두 갈래 길을 만났을 때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길을 갔었노라고

그래서 모든 게 달라졌다고

 

 

 

갈대 ㆍ 신경림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해답 ㆍ 거트루드 스타인

 

해답은 없다.

앞으로도 해답이 없을 것이고

지금까지도 해답이 없었다.

이것이 인생의 유일한 해답이다.

 

 

 

비망록 ㆍ 문정희

 

남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남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가난한 식사 앞에서

기도를 하고

밤이면 고요히 일기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구겨진 속옷을 내보이듯

매양 허물만 내보이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사랑하는 사람아

너는 내 가슴에 아직도

눈에 익은 별처럼 박혀 있고

 

나는 박힌 별이 돌처럼 아파서

이렇게 한 생애를 허둥거린다

 

 

 

구부러진 길 ㆍ 이준관

 

나는 구부러진 길이 좋다.

구부러진 길을 가면

나비의 밥그릇 같은 민들레를 만날 수 있고

감자를 심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날이 저물면 울타리 너머로 밥 먹으라고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구부러진 하천에 물고기가 많이 모여 살 듯이

들꽃도 많이 피고 별도 많이 뜨는 구부러진 길.

구부러진 길은 산을 품고 마을을 품고

구불구불 간다.

그 구부러진 길처럼 살아온 사람이 나는 또한 좋다.

반듯한 길 쉽게 살아온 사람보다

흙투성이 감자처럼 울퉁불퉁 살아온 사람의

구불구불 구부러진 삶이 좋다.

구부러진 주름살에 가족을 품고 이웃을 품고 가는

구부러진 길 같은 사람이 좋다.

 

 

 

어쩌면 ㆍ 댄 조지

 

어쩌면 별들이 너의 슬픔을 데려갈 거야

어쩌면 꽃들이 아름다움으로

너의 가슴을 채울지 몰라

어쩌면 희망이 너의 눈물을

영원히 닦아 없애 줄 거야

그리고 무엇보다도,

침묵이 너를 강하게 만들 거야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ㆍ 킴벌리 커버거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내 가슴이 말하는 것에

더 자주 귀 기울였으리라

더 즐겁게 살고, 덜 고민했으리라

금방 학교를 졸업하고 머지않아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걸 깨달았으리라

아니, 그런 것들은 잊어 버렸으리라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말하는 것에는

신경 쓰지 않았으리라

그 대신 내가 가진 생명력과 단단한 피부를

더 가치 있게 여겼으리라

더 많이 놀고, 덜 초조해 했으리라

진정한 아름다움은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는 데 있음을 기억했으리라

부모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알고

또한 그들이 내게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사랑에 더 열중하고

그 결말에 대해선 덜 걱정했으리라

설령 그것이 실패로 끝난다 해도

더 좋은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아, 나는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으리라

더 많은 용기를 가졌으리라

모든 사람에게서 좋은 면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그들과 함께 나눴으리라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나는 분명코 춤추는 법을 배웠으리라

내 육체를 있는 그대로 좋아했으리라

내가 만나는 사람을 신뢰하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신뢰할 만한 사람이 되었으리라

입맞춤을 즐겼으리라

정말로 자주 입을 맞췄으리라

분명코 더 감사하고,

더 많이 행복해 했으리라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먼 행성 ㆍ 오민석

 

벚꽃그늘 아래 누우니

꽃과 초저녁달과 먼 행성들이

참 다정히도 날 대려다본다

아무것도 없이 이 정거장에 내렸으나

그새 푸르도록 늙었으니

나는 얼마나 많은 것을 얻었느냐

아픈 봄마저 거저 준 꽃들

연민을 가르쳐준 궁핍의 가시들

오지않음으로 기다림을 알게 해준 당신

봄이면 꽃이 피는 이유가 다 있을 것이다

잘린 체게바라의 손에서 지문을 채취하던

CIA 요원 홀리오 가르시아도

지금쯤 할아버지가 되었을 것이다

 

그날 그 거리에서 내가 던진 돌멩이는

지금쯤 어디로 날아가고 있을까

혁명의 연기가 벚꽃 자욱하게 지는 저녁에

나는 평안하다 미안하다

늦은 밤의 술 약속과

돌아와 써야할 편지들과

잊힌 무덤들 사이

아직 떠다니는 이쁜 물고기들

벚꽃 아래 누우니

꽃잎마다 그늘이고

그늘마다 상처다

다정한 세월이여

꽃 진 자리에 가서 벌서자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9127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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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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