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발전에서 고독은 고립을 의미하고 다른 분야, 학문간 통섭이 혁신의 촉매가 된다.
예술에서 고독은 창작의 시작이며 밑거름이다. "아이는 홀로 있을 때 어른이 되기 시작하고, 개인은 홀로 있을 때 성장한다."
[본문발췌]
고독은 차가운 정신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자기 자신을 깊이 성찰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며, 어려움을 극복하고 새로운 일을 개척할 수 있는 힘을 준다.
휴머니즘을 말하기는 쉽다. 그러나 개인의 자유를 실현하는 것은 진정 어려운 일이다. 개인의 자주독립은 사회로부터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반드시 자기 자신이 싸워서 얻어내야만 한다. 그러려면 개인은 사회가 줄지도 모르는 명성이나 이익과 같은 유혹을 거부해야만 한다. 명리를 택하든 자유를 택하든 결정은 온전히 자신의 몫이다. 개인은 그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역량을 갖추고 있다.
창작의 자유는 거저 얻어지지 않으며 돈으로 살수도 없습니다. 이 창작의 자유는 먼저 작가 자신이 그것을 마음속으로 간절히 필요로 해야만 가질 수 있습니다. 마음속의 자유는 당신이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지켜봅니다. 만약 이 자유를 다른 무언가와 바꾸려고 한다면 자유라는 새는 멀리 날아가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것이 자유를 팔려고 한 대가입니다. 작가가 다른 보상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글을 쓰기 위해서만 글을 쓴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이지만, 그 사회에 대해서는 도전이 됩니다. 물론 그것은 의도한 도전이 아니므로 작가 스스로 영웅이나 투사가 된 척할 필요가 없습니다. 설령 영웅으로 받아들여지는 일이 있다해도 그것은 어떤 위대한 과업을 이루어서가 아니라 작품 외적으로 약간의 공훈이 더해졌을 때의 일입니다. 작가가 사회에 도전하는 방식은 어디까지나 언어를 통해서여야 합니다. 그조차도 작품 속 인물이나 배경을 빌려 표현하는 방식이 아니라면 큰 손실을 각오해야 합니다. 문학은 분노의 고함소리가 아니며, 개인적인 성토의 수단도 아닙니다. 작가는 다만 한 사람으로서의 감정을 작품에 녹여내 문학으로 완성시킬 뿐입니다. 그런 작품만이 시간의 풍화작용을 이겨내고 길이 남을 수 있습니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으로 사회에 도전합니다. 세월의 흐름을 견디고 살아남은 작품은 그 작가가 살았던 시대에 대한 유력한 답이 됩니다. 이로써 작가와 작품을 둘러싼 모든 소란은 사라지고, 작품 자체의 목소리만이 남아 독자의 가슴을 울립니다.
문학이 인간 삶의 증언이라는 견해는 대부분 반대하지 않으실 겁니다. 또한 진실성이 증언의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이라는 점에 대해서도 동의하시리라 믿고요. 진실 이외에는 그 무엇도 문학을 굴복시킬 수 없습니다. 문학이 자유정신의 터전이라면, 그 자리에서 작가가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명령 또한 진실추구입니다. 이익보다 중요한 가치를 위해 기꺼이 고통을 감수하며 글을 써 내려갈 때,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진실 그 자체입니다.
오늘날 전면화된 상품경제와 정보폭발 아래에서 우리가 목도하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날로 심각해지는 사유의 빈곤입니다. 20세기의 정치투쟁이 야기한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대립은 사람들의 삶 구석구석에 파고들어 '좌 아니면 우'라는 정치적 선택을 강요했고, 개인의 독립적인 사고는 설 자리가 없어졌습니다. 작가 개인의 목소리가 정치적 획일화에 갇혀버리면 그 목소리는 반드시 무력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 해도 문학은 자유정신의 피난처이자 개인의 존엄을 유지할 수 있는 마지막 방어선입니다. 작가에게 주어지는 천부적 선물이란, 동시대 사람들이 차마 말을 하지 못하는 벙어리 상태가 되었을 때 하늘로부터 하사받는 언어입니다. 문학이 필요로 하는 언어는 제대로 표현된 적 없는 언어, 직접적으로 진실을 가리키는 언어입니다. 그 언어는 지금 이 순간 살아 움직이는 감수성이자 일체의 주의나 관념이 없는 무엇습니다. 사람이 사람일 수 있는 것은 어떤 정의나 관념에 의해서가 아니라 언어를 통한 표현으로 자기 자신을 인식할 때입니다.
작가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야 합니다. 냉정한 관찰로 감정이 발설을 제어하고, 시비, 선악, 도덕의 판단도 내려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작가는 다만 냉정한 시선으로 세상을 관찰하면 됩니다. 세상은 본래 이러하다는 것, 그 누구의 의도로도 개조되지 않는다는 것을 똑똑히 보아야만 합니다. 작가는 그렇게 차가운 눈으로 외부세계를 관찰하는 동시에 자기 내면을 관조해야 합니다.
창작의 영역에 반드시 지켜야 할 법칙이란 없습니다. 정해진 법칙이 없다는 것만이 예술가에게는 불변의 진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술가는 그 어떤 규범에도 휘둘리지 않고 홀로 자신의 길을 갈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예술가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런저런 사회적 제약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사회에서의 인간관계란 늘 얼마간의 구속을 받는일이지요. 그러나 예술가라면 자신의 창작세계에서만큼은 충분한 자유를 누리고 용기와 신념을 발휘해야 합니다. 정치나 윤리의 교조를 벗어던지고 유행과 습속의 구속도 떨쳐내야 합니다. 창작의 자유는 결국 예술가 자신에게 달려 있는 문제입니다.
예술가의 혁신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새로운 형식을 낳는 개념을 만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존의 형식 안에서 표현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후자는 이미 존재하는 형식 안에서 새로운 표현의 가능성을 발굴하는 방식이다. 오래된 형식이라 할지라도 그것에서 길어 올린 생명력은 무궁무진하다. 화가의 창조력만 있다면 회화라고 하는 이 오래된 예술에는 영원히 끝이 없을 것이다. 한때는 예술가에게 창작 충동이 되었던 현대성은 이제 공허한 원칙이 되어버렸다. 새로움을 위한 새로움을 추구하며 끊임없이 앞 세대를 부정하던 정신은 예술가의 창조성을 불러일으키지 못한 채 끊임없이 유행만 교체시키는 상품기제로 바뀌었을 뿐이다.
심미는 영원히 개인적인 것이다. 예술가가 창작을 할 때도, 누군가가 작품을 감상할 때도, 저마다 조금씩 다른 심미 취향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뿐만 아니라 심미 활동은 어디까지나 지금 이 순간, 눈앞에 존재하는 것을 대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술은 역사와 다르다. 역사는 매번 다시 쓰이지만, 예술작품은 한번 완성되면 다시 만들어질 수 없다. 그러나 예술작품과 역사는 사람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다는 점과, 그 시대의 지배관념의 영향을 받는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예술가의 이론은 예술가 자신의 창작작업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에 지극히 개인적이다. 동조를 구하기보다 차이를 발견하는 데 예술가의 의의가 있다. 창조는 차이의 발견에서 오기 때문이다. 예술가는 보편적인 심미기준이나 가치관을 세우는 데 공을 들이지 않는다. 다른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관념이나 미적 표준을 따르지도 않는다. 그런 것을 따르는 순간 창작의 자유는 잃게 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예술가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자기만의 고유한 심미평가 기준을 갖는다. 예술가의 심미도 변하기는 하지만, 그 뿌리가 굳건하기에 시류와 풍속에 함부로 휘둘리지 않는다. 예술가가 자신이 오랜 세월에 걸쳐 이룩한 미적 취향과 판단은 혼자만의 자의적 기준이 아니라 오랜 역사적 문화적 연원을 지닌다. 바로 이런 공공성 덕분에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과 교류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때의 교류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직관과 감수성이라는 토대 위에서 이루어진다.
시공간에 대한 사변이 예술표현의 주제가 되는 것은 현대예술의 운명이다.
선禪은 신학의 문제가 아니다. 선은 철학의 문제며 언어학의 문제다. 예술 속의 선은 현대예술에 와서야 생긴 것이 아니다. 선은 말로 할 수 없고, 말해버리면 사실이 아니다. 오직 직관과 깨달음에만 의지할 뿐이다. 그러나 현대예술은 언어에 의존하므로 선과는 한참 거리가 있다. 허무를 장황하게 언급하는 현대예술의 언어는, 예술의 허무가 아무것도 없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예술의 허무란 일종의 정신이다. 예술가가 체험한 마음의 상태를 작품에 드러내는 것이다. 예술 속의 시공간은 바로 이런 정신과 하나로 맞물려 있다. 예술의 시공간은 물리학적 시공간과 일치하지 않으며, 물리학의 시공간과는 다른 형이상학적 시공 개념을 지니고 있다. 다시 회화로 돌아와보자. 선종 회화는 다양하지만 그 안에는 일정한 도상圖像이 있다. 공空은 도상 안에 있으면서도 도상 밖에 있다. 일종의 해탈이며 정신적 경지다. 사람은 일정한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만, 또한 그 제약을 뛰어넘어 자유롭고자 한다. 선은 현실세계를 살아가는 예술가에게 중요한 일깨움을 준다. 시간과 공간은 회화에 부여되는 일종의 한계다. 어떻게 하면 이런 한계에서 벗어나 무소부재하는 선에 다다를 수 있을까. 이렇듯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것이 바로 조형예술이다.
"죽어서 잊히기 전에, 너는 너의 생명을 네 손에 장악해야만 한다. 너의 인생을 남김없이 살아내는 것만이 죽어도 아쉽지 않을 유일한 방법" - <죽음에 대하여>
<고독의 필요성>, 2002년6월 8일 아일랜드 더블린 제 41회 국제평생공로아카데미 '세계정상회의' 황금공로상 수상 기념 연설
고독은 사람이 갖는 느낌입니다. 나무 한 그루나 새 한마리가 외로워보일 수 있지만, 그것은 나무와 새를 바라보는 사람이 부여한 감정이지요. 나무와 새 자신은 외로워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나무와 새가 있는 풍경이 고독을 간직한 사람의 마음을 건드린 것이지요. 그는 눈앞에 펼쳐진 풍경 때문에 자신의 마음을 자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바깥의 풍경과 내면의 감정이 한자리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객관적인 관찰이 아닙니다. 그의 내면에서 생겨나는 고독감은 일종의 심미가 됩니다. 바깥 풍경을 관찰하는 동시에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는 자아는 점차 자기 자신의 가치를 확신할 수 있게 됩니다. 나르시시즘에 뿌리를 두고 있을 이 고독감은 자기연민을 불러일으키고 나아가 오만으로 발전하기도 합니다. 이 감정이 맹목적인 충동으로 흐르면, 그 사람은 외부세계에 대한 관심을 잃고 자기 내면만을 고집스럽게 파고들게 되지요. 교만과 아집이라는 병통이 바로 이런 심리상태에서 빚어집니다. 고독감이 병통으로 이어지지 않으려면 차갑게 바라보는 자세기 필요합니다. 바깥의 풍경이든 내면의 심경이든 어느 하나라도 차갑게 관조할 수 있게 되면, 자아의 한계에 갇히지 않는 제 3의 혜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지혜지요. 지혜의 안목은 거리두기에서 옵니다. 사람과 사건은 한걸음 뒤로 물러났을 때 더 뚜렷하게 볼 수 있고 더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게 됩니다. 고독감은 일종의 심미적 판단일 뿐 아니라 자기 삶에 건설적 동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가 자기 자신에 대한 가치를 긍정하고 있다면, 그는 외따로 떨어져 있는 듯한 느낌을 떨쳐내기 위해 무언가 의미 있는 일에 매진하기로 마음먹을 수 있습니다. 그 의미 있는 일이 꼭 한 그루의 사과 나무를 심는 일일 필요는 없지만요.
아이는 고독감을 느끼며 어른이 되어갑니다. 개인은 고독 속에 있을 때 비로소 성장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고독감은 개인의 독립을 위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인격의 확립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개인의 고독감이 사회의 조건을 형성하는 데 꽤 많이 기여하는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꼭 필요한 거리가 없으면 온종일 충돌이 일어납니다. 가정과 모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함께 있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관용과 양해가 필요한데, 관용과 양해는 각자의 마음속에 충분한 공간이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고독은 개인의 자유에 필요한 최우선 조건입니다. 자유는 자유로운 사고에서 비롯되는데, 홀로 있을 때 비로소 자유로운 사고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옳고 그름, 찬성과 반대, 혁명과 반동, 진보와 보수, 정치적 올바름과 그릇됨이라는 이분법적 틀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선택을 할 때는 독립적인 사고의 여지를 남겨두고, 천천히 선택을 해도 됩니다. 특히 어떤 이념이나 사조, 유행, 열광이 밀려들 때는 고독만이 그 사람을 자유로울 수 있게 합니다. 미디어가 모든 시간을 장악해버린 이 소란스러운 세상에서 누군가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자 한다면, 고독만이 그 사람을 지탱해줄 것입니다. 고독이 병통으로 흐르지만 않는다면 고독은 그 사람을 그 사람답게 하는데 꼭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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