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하면 용감하다고 했다. "사람은 모르는 것the unknown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알고 있는 것the known을 잃을까봐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본문발췌]

 

 

죽음은 놀라운 어떤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삶이 그런 것처럼. 삶은 그 자체로 완전한 것입니다. 슬픔, 괴로움, 고민, 기쁨, 터무니없는 생각들, 재산, 시기심, 사랑, 외로움이라는 마음 아픈 불행 - 이 모두가 삶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삶을 전체로 이해해야만 합니다. 우리들 대부분이 그러는 것처럼, 그중 파편 하나만 취해서 그 파편으로 살지 말고요. 바로 그렇게 삶을 이해하는 가운데에 죽음에 대한 이해가 있습니다. 그 둘은 분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삶의 움직임을 전체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세 가지를 매우 깊이 이해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시간, 슬픔, 그리고 죽음입니다. 시간을 이해하는 일, 슬픔이 지닌 진짜 중요한 의미를 충분히 납득하는 일, 그리고 죽음과 함께하는 일 - 이것들 모두가 명료한 사랑을 요구합니다. 사랑은 어떤 이론도, 이상도 아닙니다.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사랑은 가르쳐질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사랑하는 법이라는 과목을 수강할 수도 없고, 사랑이 뭔지 알게 될 때까지 날마다 연습해서 배울 방법도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진 의미를, 슬픔이 가진 놀라운 깊이를, 그리고 죽음과 함께 오는 순수함을 정말로 이해할 때 자연스럽고 쉽게 저절로 사랑하게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의 본성, 슬픔의 특성이나 구조, 그리고 우리가 죽음이라 부르는 놀라운 것을, 이론적으로나 추상적으로가 아니라 사실에 입각해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는 따로 떨어진 게 아닙니다. 시간을 이해하면 죽음이 뭔지 이해하게 되고, 슬픔이 뭔지도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나 시간을 슬픔이나 죽음과는 분리된 것으로 여기고 따로 떼어서 본다면, 우리가 접근하는 방법은 단편적인 것이 될 것이며, 그러면 우리는 사랑이 가진 놀라운 아름다움과 생명력을 절대 이해하지 못하고 맙니다.

 

 

삶을 조각조각 나뉜 것으로 다루면 끊임없는 혼란과 모순, 불행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삶의 전체성을 보아야 하는데, 애정이 있을 때에만, 사랑이 있을 때에만 삶의 전체성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만이 질서를 만들어내는 유일한 혁명입니다. 수학, 의학, 역사, 경제학에 대해서 더욱 더 많은 지식을 얻고, 그런 다음 그 지식 조각들을 한데 모으는 일은 좋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한 가지도 해결하지 못하지요. 사랑이 없으면, 혁명은 국가에 대한 섬김으로, 이미지에 대한 섬김으로, 또는 무수히 많은 전제적인 부패와 인간에 대한 파괴로 이끌어갈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두려움을 느껴서 죽음을 일상 삶과 멀리 떼어놓으면, 그 분리는 더 많은 두려움과 불안을, 그리고 몇 배나 더 많은 죽음에 대한 이론들을 키워갈 뿐입니다. 죽음을 이해하려면 삶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나 삶은 생각이 연속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 모든 불행을 키우는 것이 바로 이 계속성continuity이지요.

 

 

사랑이 그런 것처럼, 죽음은 삶의 순간순간 여기 있습니다. 일단 이 사실을 인지하고 나면, 여러분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전혀 없다는 걸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모르는 것the unknown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알고 있는 것the known을 잃을까봐 두려워합니다. 가족을 잃을까봐, 친구들도 없이 혼자 남겨질까봐 두려워합니다. 외로움이라는 고통을, 자신이 축적해놓은 경험들과 재산이 없어지게 될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놓아버리기를 두려워하는 건 바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알고 있는 것은 기억이며, 마음은 그 기억에 매달립니다. 그러나 기억은 단지 기계적인 것일 뿐입니다. 컴퓨터가 그걸 아주 잘 증명하고 있지요. 죽음의 아름다움과 놀라운 본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알고 있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죽으면, 그때 죽음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죽으면 마음이 신선해지고 새로워져서 두려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나면 죽음이라 불리는 그 상태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처음부터 끝까지 삶과 죽음은 하나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시간을, 생각을, 그리고 슬픔을 이해하며, 그런 사람만이 죽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코 축적하지 않고, 결코 경험을 모으지 않으면서 순간순간 죽는 마음은 무구하며, 그래서 늘 사랑의 상태에 있습니다.

 

 

모든 사물은 닳아 없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물이란 몸, 특성, 저항, 장애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닳아 없어지게 될 것이고, 닳아 없어질 수밖에 없지만, 생각하고 감정을 느낌에 있어 자유로운 사람, 저항이나 장애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불멸을 알게 될 겁니다. 갈망하는 것들, 움켜쥐고 있는 것들, 바라는 것들이 여러 층위를 이루며 쌓여 있는 것에 불과한 자기 자신 한계, 자기 자신 인격이나 개성을 지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불멸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은 동의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만일 여러분이 생각에서 자유롭다면, 만일 여러분이 그 자기의식self-consciousness을 통해 주의 깊음을 통해 그 강렬한 불꽃을 통해 꿰뚫어보았다면, 불멸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완벽한 조화이며, 그것은 '사랑 길'이나 '슬픔 길'이 아닌, 그 안에서는 모든 구분이 사라진 길입니다.

 

 

우리는 오직 시간이라는 관점에서만, 계속성이라는 관점에서만 생각합니다. 만일 우리가 계속성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하지 않는다면 끝남이 있을 것이고, 죽음이 있을 것이며, 그러면 우리는 사물을 선명하게,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단순하게 구체적으로 보게 될 겁니다. 우리는 끝난다는 사실을 시인하지 않는데, 그건 우리 마음이 계속성을 추구하고, 가족 안에서, 재산에서, 우리 직업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안전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려워합니다. 오직 안전에 대한 탐욕스런 추구에서 벗어난, 계속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벗어난, 계속성이라는 과정에서 벗어난 마음만이 불멸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그러나 일신의 불멸을 얻으려 애쓰고 있는 마음, 지속하고 싶어 하는 '나'는 불멸이 무엇인지 절대 알지 못합니다. 그런 마음은 두려움과 죽음에 들어 있는 중요한 의미를 모를 것이며, 따라서 그것을 넘어가지 못할 겁니다.

 

 

절대 하루 안에 마무리 짓지 않고, 단 하루만 사는 것처럼 살지 않는다. ... 우리는 언제나 내일 아니면 어제에 살고 있지. 누군가가 오늘이 끝나면 너도 죽게 될 거라고 말한다면, 넌 어떻게 하겠니? 그날 하루를 풍요롭게 살지 않겠니? 우리는 하루를 풍요롭고 완전하게 살지 않는다. 우리는 그날을 찬미하지 않아. 언제나 내일은 뭐가 될까, 내일 끝낼 크리켓 경기, 6개월 안에 끝낼 시험, 어떻게 하면 음식을 즐길까, 어떤 옷을 살까 등등, 언제나 내일 아니면 어제를 생각하지. 그러니 결코 살고 있는 게 아니다. 우린 잘못된 의식으로 언제나 정말로 죽어가고 있는 거야. 만일 우리가 단 하루를 살고 그날과 함께 죽으며 또 다른 날을 마치 신선하고 새로운 날인 것처럼 다시 시작한다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없다. 우리가 획득한 모든 것들, 모든 지식, 모든 기억, 모든 다툼을 날마다 멈추는 것, 그것들을 다음날로 가져가지 않는 것 - 그 안에 아름다움이 있다. 설사 끝남이 있더라도, 새로 태어남이 있다는 말이다.

 

 

두려움은 실상에 대한 무지이며, 우리 삶은 끊임없이 두려워하는 상태로 소모되고 있습니다.

 

 

명상은 삶을 이해하는 것인데, 그것이 질서를 가져옵니다. 질서는 덕이고, 덕은 곧 빛입니다. 이 빛은 다른 사람에 의해 밝혀지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경험이 많아도, 아무리 똑똑해도, 아무리 유식해도, 아무리 영적이라 해도 말입니다. 지상에서든 천국에서든 자신만이 이해와 명상에 빛을 밝힐 수 있는 사람은 여러분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마음은 언제나 비어 있고, 그 비어있음emptiness, 空에서 여러분은 관찰하고 이해하며, 그러면 사는 일이 곧 죽는 일입니다. 계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결코 창조적일 수 없습니다. 오직 끝나는 것만이 창조적인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삶이 또한 죽음이기도 할 때 사랑이 있고, 진리가 있고, 창조가 있습니다. 죽음은 모르는 것이고, 진리와 사랑과 창조도 모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매달리는데,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모르는 것은 죽음이며, 우리는 그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알고 있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에는 넓은 틈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르는 것 영역에 들어가느니 차라리 알고 있는 것에 매달리곤 합니다. 우리 마음은 언제나 알고 있는 것 안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며, 거기에 안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안전이 있다고 '생각'하고, 우리는 확실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며, 우리는 영속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살펴보면 그것은 영속하지 않고, 그것은 완전히 불확실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그것에 매달립니다. 그것이 우리가 아는 전부이기 때문이지요. 다시 말해서, 우리는 과거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마음이 이 진실을, 즉 죽음은 여러분이 집착하고 있는 것들이 (그것이 미래든, 여러분 얼굴이든, 이상이나 그 밖의 것들이든 간에) 끝나는 일이라는 걸 알 때, 죽음이라 불리는 이 아득히 먼 것을 삶이라는 즉각적인 행동으로 가져온 것이며, 그것은 곧 여러분 집착을 끝낸 것입니다. 따라서 죽음은 완전히 새로 태어나는 일, 과거에 사로잡힌 마음이 완전히 새로 태어나는 일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마음은 놀랍도록 생생하게 살아 있게 됩니다. 그 마음은 과거에서 살아가지 않습니다. 만일 사람이 집착하고 있는 모든 것을 날마다 완전히 끝내기 위해 마음이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다면, (그런데 그건 엄청난 행동이죠) 날마다 순간순간 여러분은 삶과 함께 그리고 죽음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죽음처럼 몹시 복잡한 인간 문제에 대해 조사하려면 자유롭게 살펴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뭐든 만일 선입견이나 믿음, 희망, 두려움이 있으면 관찰하거나 조사할 수 없습니다. 매우 진지하게 조사히기 위해서는 그것을 왜곡하는 선입견이 없어야 하고, 두려움이 없어야 하고, 위안을 바라는 욕망 희망이 없어야 하며, 그런 것들이 모두 없어야 합니다. 보기 위해서는 마음이 완전히 비어 있어야 합니다. 무엇인가를 가지기 위해, 알아내기 위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그것입니다. 

 

 

야생의 인간에게는 단순한 두려움 몇 가지만 있지만, 우리는 더 '문명화'되어 가면서 점점 더 복잡해지는 두려움을 셀 수도 없이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초연해지려고 한다면, 반대로 더 집착하게 될 뿐이며 그래서 모순이 계속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마음이 집착에서 자유로워지는 순간, 집착을 통해 계속된다는 느낌에서도 자유로워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왜 집착하시나요? 집착이 없으면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게 될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여러분 집이고, 여러분은 여러분 아내이며, 여러분은 여러분 은행예금이고, 여러분은 여러분 일자리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모든 것들입니다. 그래서 집착을 통해 계속된다는 이 느낌이 끝나면, 완전히 끝나면, 여러분은 죽음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삶 끝에 있는 것, 우리 모두가 그 상태가 되는 걸 두려워하는 물리적인 죽음이 아니라, 날마다 순간순간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것, 사랑, 미움, 기쁨, 즐거움... 그 모든 것을 버리는 일이 죽는 일이라고, 이런 죽음이 있어야만 새로 태어남이 있다고.... 죽음은 날마다, 순간순간, 당신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내려놓는 거예요. 그게 죽음이예요. 죽음이 이런 거라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겠지요? 어제를 오늘로 가져오지 말고, 오늘을 내일로 가져가지 않는 게 죽음이예요. 날마다 죽는 게 죽음이에요. 다음날 아침 완전히 신선한 존재로 새로 태어나는 게 죽음이고 삶이예요. 모든 것을, 남편을, 아내를, 자식을, 태양을 날마다 신선한 눈으로 보는 것, 그 모든 것을 신선하고 무구한 눈으로 보는 게 삶이라고요. 그러니 삶과 죽음의 경계가 어디 있겠어요? 그 둘은 항상 붙어 다니고, 늘 함께 있어요. 삶이 곧 죽음이고, 죽음이 곧 삶이에요. 날마다 죽지 않으면 새로 태어남이 없을 테니까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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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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