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은 고립 공간이자, 드넓은 바다와 수평선, 그리고 시원한 바람을 느낄 수 있는 자유의 공간이다.

 

 

[본문발췌]

 

 

가장 못한 것이 오직 다르다는 이유로 널리 쓰일 수도 있다. 가장 좋은 것도 없고 가장 못한 것도 없다. 이때에 좋은 것이 있고 저때에 좋은 것이 있다. 이 세상에는 완전한 것이란 없음을 나도 잘 알지만 이 세상에 일단 발을 들여놓기만하면, 이 세상 속에 일단 얼굴을 내밀기로 작정만 하면, 우리는 더할 수 없을 만큼 기묘한 악마의 유혹을 받게 된다. 목숨이 붙어 있는데 왜 안 살아? 왜 제일 좋은 걸 안 골라? 하고 귀에다 속살거리는 그 악마 말이다. 이렇게 되면 곧 뜀박질을하고 여행을 떠나고... 그러나 <이제 막> 욕망이 만족되려고 하는 순간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순간인가? 공(空)의 매혹이 뜀박질로 인도하게 되고, 우리가 한 발을 딛고 뛰듯 껑충껑충 이것저것에로 뛰어가게 되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공포심과 매혹이 한데 섞인다. - 앞으로 다가서면서도 (동시에 도망쳐) 뒤로 물러나는 것이다. 제자리에 가만히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 그칠 사이 없는 움직임의 대가를 받는 날이 찾아오는 것이니, 말없이 어떤 풍경을 고즈넉이 바라보고만 있어도 욕망은 입을 다물어버리게 된다. 문득 공(空)의 자리에 충만이 들어앉는다. 내가 지나온 삶을 돌이켜보면 그것은 다만 저 절묘한 순간들에 이르기 위한 노력이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그렇게 하기로 굳게 마음 먹은 것은 저 투명한 하늘의 기억 때문이었을? 내 어린시절, 반듯이 누워서 그리도 오래도록 나뭇가지 사이로 물끄러미 바라보았던 하늘, 그리고 어느 날 싹 지워져 버리던 그 하늘의 기억 때문이었을까? - <공의 매혹>

 

 

달은 우리에게 늘 똑같은 한 쪽만 보여준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의 삶 또한 그러하다. 그들의 삶의 가려진 쪽에 대해서 우리는 짐작으로밖에 알지 못하는데 정작 단 하나 중요한 것은 그쪽이다. 노동으로 살아가야 하는 개인들 - 그러니까 거의 모든 사람들 - 에 대하여 사회가 요구하는 바는 너무나 잔혹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바라는 단 한 가지 희망이 있다면(혁명에대한 희망은 물론 별도로 쳐야겠지만) 그것은 병에 걸리는 일뿐이다. 우리를 위협하는 질병과 사고가 그리도 많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놀라움을 표시한다. 그것들이 그리도 많은 까닭은 매일매일의 노동에 지쳐버린 인간들이 그들의 남아 있는 영혼을 구해 내고자 할 때 기껏해야 질병이라는 저 한심한 피난처밖에는 다른 방도를 찾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에게 병이란 여행과도 같은 값을 지닌 것이며 병원 생활이란 그 나름의 으리으리한 고대광실 생활이다. 만약 부자들이 그걸 알았다면 가난한 사람들은 병에 걸리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그러나 그런 비참 속에서,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시련 속에서, 만사에 대하여, 무엇보다 먼저 자기 자신에 대하여 회의를 느낄 때, 바로 그때 우리는 우리를 일으켜 세워주는 어떤 현실과 접촉하게 된다. 우리는 혼자서 살다가 혼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은 생각만 해도 심장이 멈춰버릴 것만 같다. - <케르겔렌 군도>

 

 

사람들은 여행이란 왜 하는 것이냐고 묻는다. 언제나 충만한 힘을 갖고 싶으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여행이란 아마도 일상적 생활 속에서 졸고 있는 감정을 일깨우는 데 필요한 활력소일 것이다. 이런 경우, 사람들은 한 달 동안에, 일 년 동안에 몇 가지의 희귀한 감각들을 체험해 보기 위하여 여행을 한다. 우리들 마음속의 저 내면적인 노래를 충동질하는 그런 감각들 말이다. 그 감각이 없이는 우리가 느끼는 그 어느 것도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 <행운의 섬들>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서 도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 그것은 불가능한 일 - 자기 자신을 되찾기 위하여 여행한다고 할 수 있다. ... 그런데 그 <자기 인식 reconnaissance>이란 반드시 여행의 종착역에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그 자기 인식이 이루어지고 나면 여행은 완성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탄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통과해 가야 하는 저 엄청난 고독들 속에는 어떤 각별히 중요한 장소들과 순간들이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 장소, 그 순간에 우리가 바라본 어떤 고장의 풍경은, 마치 위대한 음악가가 평범한 악기를 탄주하여 그 악기의 위력을 자기 자신에게 문자 그대로 <계시하여> 보이듯이, 우리들 영혼을 뒤흔들어놓는다. - <행운의 섬들>

 

 

가장 달콤한 쾌락과 가장 생생한 기쁨을 맛보았던 시기라고 해서 가장 추억에 남거나 가장 감동적인 것은 아니다. 그 짧은 황홀과 정열의 순간들은 그것이 아무리 강렬한 것이라 할지라도 - 아니 바로 그 강렬함 때문에 - 인생 행로의 여기저기에 드문드문 찍힌 점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순간들은 너무나 드물고 너무나 빨리 지나가는 것이어서 어떤 상태를 이루지 못한다. 내 마음속에 그리움을 자아내는 행복은 덧없는 순간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단순하고 항구적인 어떤 상태이다. 그 상태는 그 자체로서는 강렬한 것이 전혀 없지만 시간이 갈수록 매력이 점점 더 커져서 마침내는 그 속에서 극도의 희열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그런 상태인 것이다. - 생 피에르 섬에서 맛본 행복감에 대한 루소의 묘사..., <행운의 섬들>

 

 

나폴리에 살고 있을 때 나는 아침마다 만을 굽어보는 플로리디아나 장원을 찾아가서 시계가 정오를 칠 때까지 담배를 피우면서 이리저리 거닐곤 했다. 그 한가로운 무위의 시간들은 파이레서의 열에 들뜬 듯한 시간들보다도 더 내 가슴을 가득하게 해주었다. 이같이 가슴 깊이 파고드는 풍경 속에서 이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일하는 데에만 골몰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파리나 런던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그래도 괜찮다. 그러나 태양과 바다가 영원히 지배하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즐기고 고통하고 표현하는 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만물의 중심에 있는데 이 땅덩어리의 한 끝을 조금 움직여본들 무엇하겠는가? 천천히 시계가 정오를 치고 생텔름 요새의 대포 소리가 울릴 때 어떤 충만감이 - 행복의 감정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전반적인 현존의 감정이 - 마치 존재의 모든 틈은 다 막혔다는 듯이 나와 나를 에워싼 모든 것을 사로잡는 것이었다. - <행운의 섬들>

 

 

바다 위에 떠가는 꽃들아, 가장 예기치 않은 순간에 보이는 꽃들아, 해초들아, 시체들아, 잠든 갈매기들아, 배의 이물에 갈라지는 그대들아, 아, 내 행운의 섬들아! 아침의 예기치 않은 놀라움들아, 저녁의 희망들아 - 나는 그대들을 이따금씩 다시 보게 되려는가? 오직 그대들만이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해방시켜 준다. 그대들 속에서만 나는 나 자신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다. 티 없는 거울아, 빛 없는 하늘아, 대상 없는 사랑아.... - <행운의 섬들>

 

 

섬들을 생각할 때면 왜 숨이 막히는 듯한 느낌이 되는 것일까? 난바다의 시원한 공기며 사방의 수평선으로 자유스럽게 터진 바다를 섬 말고 어디서 만날 수 있으며 육체적 황홀을 경험하고 살 수 있는 곳이 섬 말고 또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섬에 가면 <격리된다 isole> - 섬 Ile의 어원 자체가 그렇지 않은가? 섬, 혹은 <혼자뿐인> 한 인간, 섬들, 혹은 <혼자씩일 뿐인> 인간들. <부활의 섬>

 

 

<상상의 인도>

  • 우리는 오로지 세계를 통해서만 세계로 갈 수 있고 신을 통해서만 신에게로 갈 수 있다.

  • 우리들의 행동과 독립된 것으로 존재한다고 우리가 믿는 우리의 개성이 사실은 우리들 행동들의 단순한 사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어떻게 인정한단 말인가? 우리는 이미 어떤 과거를 가지고 세상에 태어난다는 사실을? 하나하나의 사건은 우리들의 존재를 지배할 뿐만 아니라 그 존재를 구성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fieri가 esse 보다 먼저이며 더 상위의 것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인정한단 말인가? 

  • 전 우주가 무너져내리는 가운데, 죽음 같은 것은 전혀 대수롭지 않게 여길 뿐만 아니라 탄생이란 너무나도 당연하고 필연적인 일이어서 그저 그 탄생을 모면할 수만 있다면 그것이 대단한 일이라고 여기는 사고 방식을 어떻게 이해한단 말인가? 살아남는 것을 믿기 위해서 우리들에게 신앙이 필요하듯이 저들에게는 생명이 꺼지는 것을 믿기 위해서 신앙이 필요한 것이다.

  • 무케르지는 최근에 펴낸 그의 책에서 이야기하기를, 자기가 그냥 순진하게 왜 윌슨은 피케 카드 노름에서 <14점> 패를 잡지 못했느냐고 간디에게 물었더니 "그 사람이 만약 한 점 한 점마다 각기 일 년씩 명상을 하고, 단식을 하고, 한 점 한 점마다 불멸의 생명을 걸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오랫동안 신에게 기도를 했다면?" 하고 간디가 그에게 반문하더라고 한다. 이것이야말로 존재에 의한 사고의 전체적이고 완벽한 표현이다. 서양에서는 실용주의 덕분에 그 완벽한 표현의 위조 제품을 하나 얻어 갖게 되었으니 그것이 넌센스다(태도가 사고를 창조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고대 사람들의 이상이었던 그 완전한 표현(감옥과 죽음에서 도망치기를 거절하는 소크라테스, 의사가 자기에게 주는 약을 마시는 알렉산더 대왕)은 - 비록 고대 사람들이 성스러움이 아니라 예지의 한계속에, 경시가 아니라 명상의 한계 속에 묶여 있기는 했지만 -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너무나도 낯선 것이 된 나머지 우리는 언어라는 그 불완전한 (그러나 예술을 위해서는 그렇게도 중요한) 표현을 업수이 여길 지경에까지 이르렀다(사람들이 문학같은 것은 집어치우라고 말할 때, 그것은 사고는 아무런 실현이나 표현 따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뜻인데 이 경우 출발점을 도달점으로 착각하는 결과가 된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프루스트의 다음과 같은 짤막한 한 마디는 얼마나 의미심장한 것인가. <아마도 지적이고 정신적인 작업이 도달하게 된 경지는 예술적 장르가 어떤 것인가를 보고 판단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언어의 질을 보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

  • 인간은 변할 수가 없다고 누가 말하는가? 인간은 지금까지 변화밖에 한 것이 없다.

  • 탐구의 종착점이 <존재 l'Etre>냐 아니면 <무 le Neant>냐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도대체 탐구 같은 것은 있지도 않다. 왜냐하면 대상은 매순간 발견되고, 하나의 사실이 여러 사실들 사이의 어떤 관계에 의하여 대치되듯이 현실이 진실에 대치되기 때문이다. 만약 서양 사람이 무에 대하여 이야기한다면 아마도 그보다는 덜 위선적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행복의 감정이 존재의 표시라면, 그렇다, 존재는 실제로 있다. 천분의 일 초 동안만 정신을 딴 데 팔아보면 distraire 충분하다. 쇠사슬은 끊어져 버린다. 1830년대의 낭만주의자들은 오늘날의 낭만주의자들에 비해 본다면 얼마나 행복했던가! 낯선 풍경 속에 잠기려면 그저 딴 고장에 가보기만 하면 되었다(다만 네르발과 노발리스만이 예외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이성을 지워버리고자 하고 삶의 경계선을 뛰어넘어 보려고 한다. 이 새로운 낭만주의자는 다만 그 방향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In fieri, 실현 과정의 유(有). in facto esse 사실 상태의 유와 대조. [네이버 지식백과] In fieri (가톨릭에 관한 모든 것, 2007. 11. 25., 백민관)

 

한 살 더, 그러니까 살 날이 한 해 덜. 그리하여 그 생일날 나는 바캉스vacance를 가졌다. 바캉스란 일체의 행동이나 사고나 의사 교환이나 오락을 하지 않는 것을 뜻했다(그러니까 그것은 휴가vacances가 아니었다). 나는 진공을 만들려고 했고 시간을 중단시키고자 했다. 무슨 반성을 하자는 목적에서도 아니었고 무슨 준비를 하자는 목적에서도 아니었다. 과거는 분명 죽었고 미래는 형태가 없는 상태였다. 언제나 손에 잡으려면 벗어나는 것이 그 본질인 현재가 아주 예외적으로 마치 기름에 의해서 잔물결로 변하는 파도처럼 질펀해져 버릴 수는 없을 것인가? 나는 <묵상>을 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묵상이란 이 세계의 바탕과는 다른 바탕에서 여전히 계속되는 어떤 삶을 전제로 한다. 전진과 추락이 있고 또 무슨 방향이 있는 그것은 여전히 어떤 삶인 것이다. 나는 오히려 무가 되고 싶었다. 말을 거창하게 했지만 그저 나 자신을 잊어버리고 싶었다는 뜻으로 이해하라. - <사라져버린 날들>

 

 

바람에 펄럭이는 저 깃발을 보아라, 하고 입문하려는 제자에게 티베트의 승은 말한다. 펄럭이는 것은 그 깃발인가 바람인가? 이렇게 대답해야 한다. 그것은 깃발도 아니고 바람도 아닙니다. 그것은 정신입니다. 그날 내 정신을 펄럭이게 하던 것은 평소에 나를 괴롭히곤 하던 그 어느 것도 아니었다. 쳇바퀴 같은 습관으로 타락하는 어떤 직업의 고역, 불가능해져버린 다른 사람과의 의사 소통, 같은 땅에 모여 살면서 서로 싸우는 가운데서가 아니라 서로 믿는 가운데서 자신의 힘을 인정해야 마땅할 이 백성들의 상호 몰이해 등 - 어떤 성질의 기쁨에 다른 사람들이 소외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느껴야만 비로소 인생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한 이기주의자에게 슬픔을 안겨주는 그 모든 것들 중 그 어느 것도 아니었다. - <사라져버린 날들>

 

 

여행을 해서 무엇을 하겠는가? 산을 넘으면 또 산이요 들을 지나면 또 들이요 사막을 건너면 또 사막이다. 결국 절대로 끝이 없을 터이고 나는 끝내 나의 둘시네를 찾지 못하고 말 것이다. 그러니 누군가 말했듯이 이 짤막한 공간 속에 긴 희망을 거두어두자. 마죄르 호반의 자갈밭과 난간을 따라가며 사는 것은 불가능하니 그저 그것의 영광스러운 대용품들이나 찾을밖에! 그럼 무엇을? 에 - 또, 태양과 바다와 꽃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나 나에게는 보로메 섬들이 될 것 같다. 그리도 가냘프게 그리도 인간적으로 보호해 주는 마른 돌담 하나만으로도 나를 격리시켜 주기에 족할 것이고 어느 농가의 문턱에 선 두 그루의 시프레 나무만으로도 나를 반겨 맞아주기에 족할 것이니... 한 번의 악수, 어떤 총명의 표시, 어떤 눈길..... 이런 것들이 바로 - 이토록 가까운, 이토록 잔혹하게 가까운 - 나의 보로메 섬들일 터이다. <보로메의 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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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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