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양의 자연 환경적 변화와 제약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공간, 생각, 문화적 특징을 형성했다.

"공간은 생각을 만들고, 생각은 공간을 만든다. 기후, 농사법, 공간의 성격 그리고 이를 통해서 만들어진 생각, 이 네 가지는 때로는 한 방향으로 영향을 주고, 때로는 상호 영향을 미치면서 수천 년간 고유의 문화적 특징을 형성해 왔다."

 

 

[본문발췌]

 

 

생명이 무생물과 구분되는 차이점은 에너지의 흐름이 있느냐 없느냐다. 돌과 같은 무생물은 에너지가 들어가거나 나오지 않는다. 돌은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는다. 돌은 에너지의 흐름이 없는 '닫힌 시스템'이다. 하지만 인간과 같은 생명체는 에너지가 들어오고 나가는 에너지 흐름상 '열린 시스템'이다. 태양 에너지는 식물을 키운다. 우리는 그 식물을 직접 먹기도 하고, 식물을 먹고 자라난 동물을 먹고 힘을 얻는다. 우리가 음식을 먹고 배설하는 것은 태양 에너지가 유기물 음식의 형태로 변환된 것을 소비하는 작용이다. 음식을 먹는 것은 근본적으로 태양 에너지를 먹는 것이다. 이렇듯 모든 생명은 태양 에너지의 흐름을 이용해서 생명성을 만들어 내고 유지한다.

 

 

문화는 이러한 에너지 흐름의 과정 중에서 생명이 만들어 낸 2차 부산물이다. 둥그런 행성의 모양, 자전축의 기울어짐, 자전과 공전, 쏟아지는 태양 에너지는 지역마다 다른 '지리'를 만든다. 이렇게 만들어진 다양한 지리적 배경은 각기 다른 '기후'를 만든다. 각기 다른 기후는 각기 다른 '환경적 제약'을 만든다. 이런 환경의 제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친 인간 지능의 노력이 '건축물'이라는 결과물로 나타난다. 비가 와서 지붕을 만들었고, 추우니까 벽으로 방을 만들고 온돌을 만들었다. 건축은 기후가 주는 문제 대한 인간의 물리적 해결책이다. 빙하기가 끝나고 지구가 더워지면서 건조해졌기 때문에 물을 구하기 힘들어졌다. 물을 구하기 위해서 물가에 모여 살다 보니 인구밀도가 높아져 주변에 있는 사냥감과 열매로는 많은 인구가 살기에 부족했다. 인간은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이렇게 한 시대가 가지고 있던 기술적, 사회적, 경제적 제약 들 속에서 환경적 제약을 해결하려는 노력이 문화가 되었고 그 문화의 물리적 결정체가 바로 건축물이다.

 

 

<뇌의 배신>이라는 책을 보면, 사람이 가장 창의적인 순간은 빈둥거릴 때라고 한다. 이 명제는 문화 발생의 많은 부분을 설명해 준다. 엘빈 토플러는 문명의 첫 번째 혁명이 농업이라고 말한다. 농업이 문명적 혁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농업이 시작되면서 부가 축적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수렵 채집의 시기에는 경제적 재화를 저장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냉장고가 없으니 사냥감을 나눠 먹어야 하는 원시적 사회주의였다. 그런데 농사를 짓고 수확한 곡식을 말리면 저장이 가능했다. 한 장소에 머무르면서 곡식을 저장할 수 있는 창고를 만들 수 있게 되었고, 창고 안에 '부'가 곡식의 형태로 축적되었고, 축적한 곡식의 양 차이가 사회적 계층을 만들었다. 같은 인간 사이에 이전에는 없던 주인과 노예라는 계층이 생겨났다.

 

 

열역학 제2법칙인 '엔트로피'에 의하면 모든 쓸모 있는 에너지는 온도의 차이에 의해서만 만들어진다. 우주에서 생명이 가능한 것도 최초 빅뱅의 뜨거운 폭발에서부터 점점 식어 가는 우주 사이의 온도 차이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온도 차가 없으면 에너지가 없다. 에너지가 없으면 창조와 생명도 불가능하다. 과학자들은 수백억 년이 지나고 나면 우주가 전체적으로 같은 온도의 차가운 상태가 되고, 그러면 시간도 멈출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시간은 무질서의 정도를 말하는 엔트로피가 늘어나면서 부수적으로 만들어지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모든 창조는 온도 차에 의해서 시작된다.

 

 

인간 사회 안에서 '온도 차이'를 만든 것이 농업이다. 농업혁명을 통해서 사회적으로 계층과 부의 '온도 차이'를 만들어 내자 인간은 새로운 창조가 가능한 문화적 에너지를 만들 수 있었다. 계급의 차이는 갈등의 근본적인 문제지만 냉정히 말해서 문명 발생을 촉발시켰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계급 차이가 계속 존재해야 창조적인 사회가 된다는 말은 아니다. 차이에 의해서 나오는 '흐름'이 창조를 만드는 것이니, 사회의 계급이나 부가 고착화되면 차이에 의한 흐름이 정체되고 사회는 쇠퇴한다. 따라서 공정하고 평화적인 방식으로 사회 계급 간의 자리 배치의 변화가 많은 것이 사회 발전의 에너지를 만든다고 볼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 계급 간의 이동이 없어져 가고 있다는 점은 발전의 에너지가 소실되고 있다는 중대한 문제다. 인류 초기에 사회적인 계급의 형성은 문명의 변화를 촉발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열심히 일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놀아도 살 수 있는 계층이 생겨나면서 누군가는 빈둥거리게 되었고 창조성이 키워졌고 문명이 발생했다. 부가 한곳에 축적되면서 사람의 힘을 한곳으로 모아 무언가를 만들 수 있는 자본력도 만들어졌다. 그 자본력으로 무거운 돌로 만든 큰 건축물이 세워지기도 했다. 위대한 사상가들도 그러한 가운데 탄생했다.

 

 

인간 사회에 계층이 만들어지고 한참의 시간이 흐른 다음, 기원전 500년을 전후해서 유라시아 대륙의 오래된 지역인 그리스, 인도, 중국에서 위대한 사상가들이 나타났다. 피타고라스, 플라톤, 석가모니, 노자, 공자 등이 그들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시기 사람들의 '생각의 특성'이 지리와 기후에 의해서 결정됐다는 점이다. 강수량의 조건은 농업의 품종을 결정한다. 세계의 문화 권역은 크게 벼농사 지역과 밀 농사 지역으로 나누어지는데, 이 둘을 나누는 기준은 '연강수량 1천 밀리미터'다. 연강수량이 1천 밀리미터 이상이면 벼농사, 1천 밀리미터 이하면 밀 농사를 짓는다. 그런데 이 두 품종은 농사법이 다르다. 비가 많이 오는 지역에서 하는 벼농사는 홍수나 가뭄의 피해를 막기 위해 물을 다스리는 치수 사업이 필요했다. 벼농사는 저수지와 보를 만들거나 물길을 만드는 토목 공사가 필요한 것이다. 반면 밀 농사를 할 때에는 개인이 씨를 뿌리며 다니면 되고 치수를 위한 대형 토목 공사도 필요 없다. 노동방식 면에서 벼농사는 여러 명이 힘을 합쳐서 하는 방식이고, 밀 농사는 개인적으로 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벼농사 지역의 사람들은 집단의식이 강하고, 밀 농사 지역은 개인주의가 강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문화적 특징의 차이는 알파벳과 한자 같은 문자나, 체스와 바둑 같은 게임 문화에서도 나타난다. 그리고 강수량이라는 기후적 차이는 건축 디자인의 차이도 만들었다. 강수량은 땅의 단단한 정도를 결정한다. 비가 적게 오는 서양의 땅은 단단하다. 그래서 서양인들은 돌이나 벽돌 같은 무겁지만 단단한 건축 재료를 이용해서 벽으로 지붕을 받치는 '벽 중심'의 건축을 했다. 반면 비가 많이 오는 지역인 동양은 장마철에 땅이 물러지기 때문에 무거운 재료로 만든 벽은 쓰러진다. 따라서 가벼운 건축 재료인 나무를  사용하였고, 자연스럽게 나무 기둥으로 지붕을 받치는 '기둥 중심'의 건축을 하게 되었다.

 

 

잉여 농산물은 사회 계층을 만들었고, 나누어진 사회 계층은 잉여 시간을 만들었으며, 잉여 시간은 문화를 만들었다. 문화는 다시 기후적 제약의 차이에 의해서 서로 다른 유전적 특성을 만들었다. 1차적으로 문명의 생각이 창조되자 서로 다른 생각은 만나고 충돌하고 융합하면서 2차적인 창조가 만들어졌다. 서로 다른 생각들이 충돌하고 융합하려면 많은 사람이 좁은 공간에 모여서 살아야 한다. 도시는 그런 환경을 제공해 준다. 도시는 문명 발전의 '필요조건'이다. 도시는 창조의 플랫폼이었다. 다른 생각들의 융합이 새로운 창조를 만들어 낸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사례가 르네상스의 도시들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인간은 점점 더 빠른 교통수단을 만들게 되었다. 처음에는 걸어 다니다가 점차 말과 같은 동물의 에너지를 이용하면서 이동 속도가 빨라졌다. 교통수단의 발달이 '공간의 압축'을 만든 것이다. 공간이 압축되자 다른 문화 간의 융합이 일어나게 되었고 새로운 문화 변종이 만들어졌다.

 

 

다른 지역에서 발전한 문화는 이종 교배를 통해서 2차적인 창조를 만들고 그렇게 다음 세대의 문화가 탄생한다. 이렇듯 문화의 진화 과정은 생명체의 진화 과정과 동일하다. 그래서 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문화를 유전자적으로 이해하고 '문화 유전자(밈)'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차이'와 '융합'에 이어서 새로운 창조를 만드는 요소는 '기술'이다. 앞서 말한 융합 역시 교통 기술 발전이 만들어 낸 것이다. 교통수단이 발달할수록 문화의 2차적 변종의 탄생은 가속화되고, 여기에 새로운 기술혁명까지 더해지면 문화의 파생과 결합이 방향에 큰 흐름이 생겨난다. 

 

 

보통 수렵 채집을 통해서 한 사람이 먹고살려면 가로 세로 각각 1킬로미터 정도의 면적인 100만 제곱미터의 땅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런데 원시적인 형태의 농업을 하게 되면 한 사람이 먹고사는 데 5백 제곱미터의 땅만 있으면 된다. 수치상으로는 한 사람이 먹고사는 데 필요한 땅의 면적이 2천 분의 1의 면적으로 줄어든 것이다. 이는 과거 수렵 채집 때 1명이 사냥을 하면서 먹고살던 땅에 농사를 지으면 2천 명이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농업은 좁은 땅에서 더 많은 사람이 먹고살 수 있는 혁신적인 방법이었다. 그래서 배가 고팠던 인간은 수렵과 채집보다는 인공적으로 수확량을 늘릴 수 있는 농업으로 전환하게 된다. 최초의 문명인 농업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인간과 개미의 특징은 둘 다 좁은 지역에 많은 개체 수가 사는, 단위 면적당 개체수 밀도가 높은 군집 생활을 한다는 점이다. 단위 면적당 개체 수가 많은 종이 모두 농사를 짓는 것은 아니지만 개미와 인간의 경우로 미루어 보아 농업 기술은 고밀도 군집 생활을 하지 않는 집단에서는 나오지 않는 기술인 것 같다. 농업을 통해서 개미처럼 미로가 높은 군집 생활을 하게 된 인간은 개미처럼 사회 내에 신분 계층을 가지게 되었다. 개미 사회에 여왕개미가 있듯이 인간 사회에 왕이 생겨났고, 두 사회 모두 하층부에 생산을 담당하는 노동자 계급이 있다.

벌도 개미처럼 밀도가 높은 군집 생활을 하는 곤충이다. 하지만 벌은 농사를 짓지 않는다. 그 이유는 벌은 날개를 가지고 멀리까지 빨리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느리게 걸어야 하는 개미는 갈 수 있는 영역이 좁다. 반면에 벌은 날개 덕분에 넓은 면적에서 빠르게 꽃의 꿀을 수집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농사를 직접 짓지 않고도 고밀도 군집 생활이 가능했다. 그래서 벌 중에는 농사짓는 종이 발견되지 않는다. 인류 역사에서도 찾아보면 벌처럼 이동 속도가 빨라서 농사를 짓지 않고도 제국일 일궜던 민족이 있다. 바로 몽골 민족이다. 몽골 민족은 말을 타고 멀리까지 빨리 갈 수 있었다. 마치 날개 달린 벌처럼 몽골 민족은 농사를 짓지 않고도 사냐을 하거나 주변 민족을 약탈하면서 유목민족의 생활 양식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벌 같은 날개도 없고 몽골 민족 같은 말도 없었던 초기 인류는 농업 기술을 발전시키면서 좁은 공간에 모여 살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농업을 통해서 수렵 채집보다 2천 배 가량 높은 인구밀도를 가진 공간을 만들면서 인류는 지능상의 큰 변화를 만들게 된다.

 

 

농업은 인간이 만든 최초의 '인공 생태계'다. 인간이 선택한 몇 개의 종을 대량으로 복제하여 단순한 생태계를 만들고 그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방식이 농업이다. 인류 문명은 다양하게 계속 진화하는 것 같지만 사실 본질을 들여다보면 1만 년 전이나 지금이나 '문명은 단순한 인공 생태계를 만드는 일'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다. 인터넷 가상공간 역시 구글, 페이스북, 아마존을 대표로 '인공 생택를 만드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이 같은 인공 생태계를 만드는 역사의 첫 단추가 농업이다.

 

 

벼농사를 지으면서 집단행동이 필요해져 사람 간의 관계에 무게를 두는 가치관이 형성됐다면, 건축을 통해서는 사람과 건축과 주변 자연환경과의 관계에 무게를 두는 디자인관이 발전하게 된 것이다.

밀 농사를 짓는 서양에서 수학이라는 논리 위에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가치관이 만들어져 가는 동안, 벼농사를 짓는 동양에서는 '관계'를 중요시하는 상대적인 가치관이 만들어져 가고 있었다.

 

 

상대적인 가치관 외에도 동양 문화의 또 다른 중요 키워드는 '비움'이다. 여기에서 비움은 부정적 의미가 아니라 새로운 창조의 준비라는 의미가 더 크다.

  • "진흙을 이겨서 질그릇을 만든다. 그러나 그 내면에 아무것도 없는 빈 부분이 있기 때문에 그릇으로서의 구실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지게문과 창문을 뚫어서 방을 만든다. 그러나 그 아무것도 없는 빈 곳이 있기 때문에 방으로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있는 것(有)이 이로운(利)이 된다는 것은 없는 것(無)이 쓸모가 있기 때문이다.' - 노자 도덕경 11장, 남만성 역

  • 석가모니는 비움의 가르침을 펼쳐서, 마음을 비움으로써 열반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친다. 불교는 인생의 모든 고난은 무엇인가를 붙잡으려는 데서 시작한다고 보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소유하지 말고 비우라고 가르친다. 이는 일반적인 허무주의와는 다르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열반과 해탈이다.

 

 

SPACE vs 空間, 동서양의 다른 가치 체계는 공간을 뜻하는 단어만 비교해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서양인들의 공간을 뜻하는 단어는 'space'다. 이 단어는 우주를 뜻하기도 하는 'universe'와 같은 의마다. 'universe'는 'cosmos'와 동의어다. 그런데 'cosmos'는 '규칙'이라는 뜻을 가지기도해서, 반대말을 '불규칙'을 뜻하는 단어인 'chaos'다. 서양 언어 속 단어의 상관관계를 보면 '공간', '우주', '수학', '규칙'은 같은 범주에 속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서양인의 머릿속에 '공간은 수학적 규칙을 갖는 것'이라는 관점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렇듯 서양의 공간은 다분히 수학적인 분석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반면, 동양의 공간은 비어 있다는 뜻한 한자 '공(空)'과 사이라는 뜻한 한자 '간(間)' 합성된 단어다. '사이'라는 것은 두 개의 개체가 있어야만 만들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간(間)'은 둘 사이의 관계를 지칭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동양에서 공간이라는 단어는 '비움'과 '관계'의 합성어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렇듯 공간을 뜻하는 단어 하나만 살펴봐도 동양에서는 단순히 비어 있는 것 이상의 가능성을 보는 '비움'과 상대적 가치인 '관계'로 공간을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강수량이라는 환경 요소가 동서양에서 두 가지 다른 공간적 특징을 만들었다. 서양에서는 벽으로 공간의 경계가 명확하게 나누어져 있다. 서양 건축의 지붕에는 처마도 거의 없다. 반면 동양에서는 띄엄띄엄 놓인 기둥과 긴 처마로 인해 내외부 공간의 경계가 모호한 특징이 있다. 안팎의 경계가 모호한 동양에서는 철학자의 생각도 '구분'보다는 '융합'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노자는 "두 개의 근원은 하나다. 그 둘은 단지 이름이 다를 뿐이다. 비밀은 둘의 일치된 조화에 있다."라고 말했다. 동양 철학에서는 만물을 음과 양 두 개로 나누어서 생각하지만, 두 음양을 하나로 일치시키는 데 더 큰 의미를 두고 있다. 같은 이유로 동양의 건축 공간은 항상 내부와 외부, 자연과 건축물의 융화를 통해서 두 개체 간의 일치를 추구해 왔다. 따라서 동양의 빈 공간은 규정되어 있기보다는 유동적이며 내외부를 관통해서 흐르는 듯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강수량은 농사와 주요 품종을 결정하고 농사법은 사람의 가치관과 생각을 형성했다. 또한 강수량은 건축 재료를 결정했고, 그에 따라서 건축 공간의 성격을 만들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공간은 사람의 생각에도 영향을 미쳤고, 반대로 생각은 건축 공간의 디자인을 결정하기도 했다. 결국 자연환경이라는 부모는 사람의 생각과 건축 공간이라는 두 명의 자녀처럼 공통된 성격이 있다. 그리고 이 둘은 상호 영향을 미친다. 공간은 생각을 만들고, 생각은 공간을 만든다. 기후, 농사법, 공간의 성격 그리고 이를 통해서 만들어진 생각, 이 네 가지는 때로는 한 방향으로 영향을 주고,  때로는 상호 영향을 미치면서 수천 년간 고유의 문화적 특징을 형성해 왔다.

 

 

새로운 생각은 서로 다른 것이 만나서 융합할 때 이루어진다. 보통 이런 다른 생각들은 충돌하고 모순되어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모순이 새로운 생각으로 통합되면서 문화는 한 단계 발전한다. 모순을 새로운 이론으로 화합시키는 방식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분야가 과학이다. 카를로 로벨리의 <보이는 세상은 실잭 아니다>에 의하면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은 '지구상에서 물체가 움직이는 것을 관찰해서 규칙을 찾아낸 갈릴레오'의 생각과 '아주 거대한 천체의 움직임을 연구한 케플러'의 연구를 합쳐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패러데이와 맥스웰은 '전기에 대한 연구'와 '자기에 대한 연구'를 합쳐서 전자기 방정식을 완성했다. 아인슈타인은 '뉴턴의 역학'과 '맥스웰의 전자기학'의 괴리를 해결하기 위해서 특수 상대성이론을 완성했다. 그리고 '뉴턴의 역학'과 자신의 '특수 상대성이론' 사이의 충돌을 해결하기 위해 '일반 상대성이론'을 완성했다. 이처럼 역사상 뛰어난 생각은 모순되는 서로 다른 것들을 하나로 화합시키기 위한 노력의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문화적 요소의 융합이 배제된 상태에서 기술적인 부분만 적용하면 다양성이 소멸된다. 21세기 문화 다양성의 멸종 문제는 기술적 요소만 도입되었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다.

 

 

루이스 칸 안에 노자 있다.

  •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도道는 영원불변의 도가 아니다.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영원불변의 이름이 아니다. 이름 없는 것은 천지의 처음이고, 이름 있는 것은 만물의 어머니다.' - 노자 <도덕경> 1장, 남만성 역

  • '나는 위대한 건물은 '잴 수 없는 것unmeasurable'에서 시작하지 않으면 안되며, 디자인 과정에서 '잴 수 있는 것measurable'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마지막에는 '잴 수 없는 것'이 되어야 한다.' - 루이스 칸

 

미스나 코르뷔지에가 한 융합은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곳의 문화 유전자를 빌려 쓰는 '공간을 뛰어넘는 융합 능력'이라면, 루이스 칸은 다른 시간대에 존재하는 문화 유전자를 도입하는 '시간을 뛰어넘는 융합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시간을 초월한 융합 능력'이 칸을 위대한 건축가로 만든 것이다.

 

 

안도는 "건축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연의 존재감을 느끼게끔 해 주는 중간 장치다. 중정을 바라보면 그 안에서 자연은 매일 매일 다른 면모를 보여 준다. 중정은 집 안에서 펼쳐지는 생명의 핵이며 빛, 바람, 비와 같은 자연의 현상을 전달해 주는 도구이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이와 같은 안도의 건축 철학은 '물의 교회'에 잘 나타나고 있다. '물의 교회'는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방문객으로 하여금 마치 영화를 찍는 카메라처럼 계속해서 멋진 장면을 캡처하게 하는 도구이다. 그리고 그 장면들 속에 있는 요소들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관계를 보여 준다. 그리고 그 일련의 경험을 통해서 방문객에게 깨달음을 주게 하는 것이 안도가 추구하는 건축이다.

 

 

복잡한 진입로는 일본 전통 건축의 공간 구조적 특징이다. 일본 전통 건축은 그 안에서 경험하는 사람에게 기대감을 극대화하고 긴장감을 주기 위해 진입로를 특별하게 디자인해 왔다. 예를 들어서, 다도를 하는 방은 집에서 가장 구석에 위치하며, 그곳에 가기 위해서 보통은 '로지Roji'라고 불리는 정원을 통해서 가게 되어 있다. 이 정원을 통과하면서 방문객은 몇 개의 문을 거쳐야만 했다. 일본이 이런 디자인을 하는 이유는 귄터 니츠케의 '시간이 돈이고, 공간이 돈Time is Money - Space is Money'이라는 글에서 잘 설명되어 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미국과 같이 공간이 넘쳐 나는 지역에서는 시간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시간 거리를 줄이는 방향으로 건축이 발전해 왔다고 한다. 고속도로가 대표적인 예다. 멀리 떠러진 도시로 이동하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 발전한 건축 시스템이다. 이와는 반대로 일본 같은 섬 나라에서는 공간이 부족하고 시간은 오히려 남는다. 이런 경우에는 공간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시간을 지연시키는 쪽으로 건축이 발전해왔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같은 면적의 공간이라도 이동 시간을 늘리고 다양한 경험을 하게 하면 많은 기억이 남게 되고, 따라서 공간이 더 넓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일본 전통 정원의 경우, 좁은 공간을 넓게 인식되게 하려고 분절되고, 회전하고, 돌아가는 식의 장치를 만들어서 시간을 지연시켰고 그렇게 함으로써 같은 공간이라도 실제보다 더 넓게 인식되도록 했다는 것이다. 

 

 

안도 다다오의 건축은 오브제를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그의 건축은 자연과 건축의 입체적 구성을 만드는 데 초점을 둔다. 그러기 위해서 안도는 그의 건축물의 내외부에 복잡한 경로를 만들어 놓는다. 이 복잡한 경로를 따라 걸으면서 방문객들은 자연과 건축의 다양한 관계를 보여 주는 다양한 장면을 감상하게 된다. 본인들의 신체를 사용하여 이동하며 얻은 장면을 수집하면서 방문객들은 머릿속에 전체적 공간을 구축하게 된다. 안도의 건축에서 방문객의 신체는 측량 기구고, 건축물은 신체라는 측량 기구를 이동시키는 장치로서 역할을 하게 된다.

 

 

'신체를 측량 도구처럼 여기고 여기저기 다른 곳을 관찰하게 하고 경험자의 머릿속에서 전체를 구성하게 하는 방식'. 어디서 본 듯하지 않은가? 바로 영국 픽처레스크 조경 디자인의 대표 주자 험프리 랩턴의 디자인 방식과 동일하다. 동양의 1인칭 중심의 정원 디자인 방식은 도자기와 함께 유럽으로 건너가서 유럽의 조경 디자인을 바꾸고 수백 년이 지나서 다시 동양의 건축으로 돌아온 것처럼 느껴진다. 픽처레스크 조경 디자인과 안도의 건축이 비슷한 것은 동일하게 '1인칭 시점의 다양한 관계 변화의 경험'을 중요하게 여기는 동양의 문화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다른 종의 나비임에도 불구하고 유전자가 섞여서 똑같은 색깔과 패턴의 날개를 가지고 있는 '뮐러 의태'처럼, 영국의 픽처레스크 조경 디자인과 안도의 건축 디자인은 같은 전통 동양문화 유전자를 공유하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픽처레스크와 안도는 건축 분야의 뮐러 의태다.

 

 

20세기까지는 사람의 머릿속에 있는 상상력을 컴퓨터로 표현하는 시대였다면 21세기 들어서는 컴퓨터의 상상력을 빌리려는 노력이 진행중이다. 그런 시도를 파라메트릭Parametric건축이라고 부른다. 파라메트릭이란 굳이 번역하자면 수학에서 '매개 방정식'의 '매개'에 해닿아는 단어다. 매개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을 살펴보면, '둘 사이에서 양편의 관계를 맺어 줌'이라고 나와 있다. 한마디로 파라메트릭 건축은 건축가가 종이에 스케치를 하듯이 최종 결과물을 직접 조절하는 것이 아니라, 디자이너와 최종 결과물 사이에 숫자 같은 매개 변수를 조정해서 예상하지 못한 최종 형태를 만들어 내는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다.

 

 

복잡한 형태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규칙이 전혀 없는 불규칙한 복잡함이다. 프랭크 게리의 작품이 대표적인 예다. 게리는 디자인할 때 종이를 구겨서 던지고 맘에 드는 종이를 주워서 3D스캐너를 통해 형태를 컴퓨터 데이터화시킨다. 이런 형태는 완전 무작위한 복잡함이다. 이와는 달리 복잡해 보이는 수학적 규칙이 있는 경우가 있다. 과학에서 말하는 카오스 이론의 내용과 일맥상통한다. 날씨나 자연계 속의 디자인은 너무 복잡해서 불규칙해 보인다. 하지만 이런 자연계의 불규칙은 실은 아주 단순한 수학적 공식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거라는 생각이 카오스 이론이다. 이는 일종의 믿음과도 같다. 천체의 움직임을 보면서 수학적 규칙을 찾아냈던 생각 유전자가 이와 같은 디자인을 추구한다. 파라메트릭 건축 디자인은 후자에 속한다. 이들은 알고리즘을 통해서 복잡하면서도 아름다운 모양을 만들려고 한다. 컴퓨터와 프로그램을 이용하지만 엄밀하게 말해서는 수학적 규칙을 가진 형태를 추구하는 서양 전통 건축 디자인과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파라메트릭 디자인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숫자를 입력해서 만든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인류학적으로 한 언어를 사용하는 문화권은 서로 비슷한 생각과 공감대를 공유하게 되는데, 이와 유사하게 같은 컴퓨터 언어, 즉 같은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디자이너들이 생각과 결과물들은 서로 비슷하게 나올 수밖에 없다. 컴퓨터를 이용한 작업의 효율성이 높아진 점은 강점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서 '다양성의 소멸'이라는 치명적인 결함을 갖게 된 것도 사실이다. 과거에는 패션, 건축, 산업 디자인 등 각종 디자인 분야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물건을 만들어 왔다. 패션은 옷감을 가위로 자르고, 바느질했으며, 건축에서는 돌을 쌓고, 나무를 깎고, 콘크리트를 부어서 건축물을 만들어 냈다. 이렇듯 각 분야는 자신들만의 독특한 제작 방식에 근거해서 서로 전혀 다른, 다양한 결과물을 창조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 컴퓨터에서 디자인하고, 스크린상에서 컴퓨터로 만든 3차원 그림을 통해 시뮬레이션하고, 그 형태를 CAD, CAM(Computer Aided Design, Computer Aided Manufacturing)을 이용해서 제작하는 비슷한 프로세스를 가지고 있다. 또한 매스 미디어의 과다한 노출로 인해 서로 점점 더 베껴 가는 과정을 통해 디자인 분야의 '다양성'이 사라져 가는 추세다. 기술에만 의존하는 창조는 시간이 지날수록 다양성이 사라진다. 우리는 그런 현상을 20세기 중반 국제주의 양식에서 경험했다. 기술이 이끄는 획일화를 어떠한 방식으로 피하느냐가 이 시대의 중요한 화두다.

 

 

이렇듯 텔레커뮤니케이션의 발달은 현대 사회의 '공간의 의미'를 재구성하고 있다. 그리고 가상 공간과 현실 공간 모두에 '디지털과 융합한 사람들만이 사용 가능한 공간'이 만들어지고 있다. 지난 20년간 인터넷을 통해서 새로운 대륙이 만들어졌고, 기술로 인해서 우리의 실제 공간이 새롭게 재구성되어 가는 것을 보고 있다. 역사를 보면 창조적인 생각은 항상 '다른' 유전자와의 결합으로 만들어졌다. 그 '다름'이 기후 변화에서 온 것이든, 지리적 차이에서 오는 것이든, 전공 분야의 차이에서 온 것이든 상관없다. 지금 시대의 다름의 원천은 디지털이라는 새로운 유전자다. 아날로그 유기체인 인간이 디지털과 융합함으로써 새로운 생각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우리는 이미 디지털과 융합하여 새로운 생각을 만들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앞으로 이러한 현상이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다음 시대는 이 융합에 성공한 사람들이 생존할 것이고, 디지털과 융합에 성공한 자들만이 창조적 생각도 만들어 낼 것이다. 하지만 명심할 것이 있다. 역사가 말해 주듯이 기술혁명만으로는 획일화를 벗어나기 힘들다. 디지털과 융합 없이는 진화에서 뒤쳐지겠지만 동시에 디지털과의 융합만으로는 안 된다. 제대로 된 창조적 생각을 위해서는 디지털 이외에 다른 무엇이 더 있어야 한다. 역사를 보면 가장 쉬운 방법 중 하나는 루이스 칸처럼 과거에서 문화 유전자를 찾는 것이다. 그래서 최근 들어서 고전을 읽으려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누구보다도 디지털화되어 있는 젊은 친구들이 다 쓰러져 가는 건물이 있는 을지로에 가고, 1980년대 리메이크 노래를 듣고, 뉴트로에 열광하는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점점 더 디지털화되어 가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점점 더 아날로그적인 것을 찾는 이유도 있다. 손 글씨 쓰기 연습, 색칠하기 연습, 가구 만들기 같은 이해할 수 없는 아날로그 열풍은 지나치게 디지털화되어 가는 현실에 대한 반작용이다. 디지털화되어 갈수록 나 자신은 데이터화된다. 나라는 존재는 이제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 올라간 디지털 사진들로 대변된다. '나'라는 존재가 비트로 구성된 데이터화되는 현실은 원자로 구성된 몸을 가진 우리로 하여금 점점 불안감을 느끼게 만든다. 데이터로 대체되어 가는 나를 찾기 위해서 더욱 더 물질로 느낄 수 있는 아날로그적 문화에 애착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공간의 압축을 통한 융합, 서로 다른 학문 간의 융합,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융합으로 우리는 새로운 생각들을 만들어 냈다. 결국 창조는 서로 다른 재료의 융합에서 나온다. 한 번이라도 요리를 해 본 사람들은 이 원리를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요리는 서로 다른 재료가 만나서 섞일 때에만 완성된다. 섞이지 않으면 요리가 아닌, 그냥 재료일 뿐이다. 그런데 이 시대에 새로운 변수가 하나 생겼다. 다름 아닌 기후의 변화다. 인류 역사의 첫 번째 문명은 기후 변화, 다시 말해 빙하기가 끝난 지구 온난화에서 시작되었다. '지구 온난화',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말 아닌가? 그렇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 역시 지구 온난화 시대다. 다른 점이 있다면, 첫 번째 지구 온난화는 자연이 만들어 낸 것이지만 우리가 사는 시대인 두 번재 지구 온난화는 인간이 만들어 냈다는 점이다. 모든 문화혁명의 첫 번째 도미노가 기후 변화였다. 그 도미노가 쓰러졌을 때의 연쇄 반응을 생각하면 지금부터 시작될 또 다른 연쇄 반응은 엄청날 것이며, 어느 방향으로 갈지는 예측 불가능하다.

 

 

지난 1만 년 동안 인류 공간의 진화는 두 가지로 설명된다. '더 많이'와 '더 빨리'다. 단위 면적당 더 많은 사람이 살 수 있는 고밀화 공간으로 진화했고, 더 빠른 교통수단으로 공간을 압축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현재 인간은 인구 천만 명의 도시를 만들었고 하루 만에 지구 반대편을 가는 세상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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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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