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을 거스르는 유일한 자연 속 존재, 인간!
[본문발췌]
이 책의 유학자들은 동물 관찰기를 통해서 생명이라는 기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원리를 알려준다. 기계가 작동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리는 바로 작동을 가능하게 하는 연료가 무엇인지 알아보는 것이다. 바로 육체가 에너지로 삼는 '먹을 것'과 마음이 에너지로 삼는 '좋아하고 싫어하는 느낌'이다. 육체가 먹을 것으로 작동함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마음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느낌'으로 작동된다는 생각은 조금 낯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확률과 논리를 바탕으로 하는 이성적 사고 보다는 좋고 싫은 감정을 기준으로 생각한다는 최근의 뇌과학 연구를 참고한다면 이러한 생각이 크게 낯설지 않다.
만약에 정당성을 가질 수 없는 것이 숙명이라면, 함부로 정당성을 왈가왈부하지 않는 것이 유일하게 정당성을 가지는 길이다.
'동물 같다'는 말에는 '하등하다'는 뜻과 '자연스럽다'라는 뜻이 동시에 배어 있다. 동물은 먹고 자는 일의 즐거움에만 열중하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생활을 한다고 생각되지만, 그런 일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서 왠지 하등하고 미천해 보인다는 뜻이다. 반면 인간은 자연스러운 본능에 지배당하기도 하지만, 배우고 창조하며 새로운 습성을 만들기도 한다. 이는 인간과 동물을 구별해 주는 중요한 차이점으로 자주 부각된다. 인간은 자연이 부여한 본성을 넘어 문화와 개인적 개성이라는 습성을 의지대로 취득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여기서 본성과 습성의 관계는 기계성과 창조성의 관계, 또는 본능과 사회성의 관계로 대조된다.
모든 동물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 바로 호오(好惡)를 가진다. 살아 있는 것이라면 당연히 좋아하는 것을 할 때 마음이 편하고 싫어하는 것을 하면 가시방석이니, 기술을 제대로 적용하려면 우선 동물의 호오를 읽어야 한다. 우리는 한 인간을 마주할 때, 종종 그 인간의 호오보다는 성품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한다. 심지어 자기 자신을 마주할 때도 그렇다. 저 사람은 나쁘다, 착하다와 같은 가치 판단을 자동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물들의 나쁘고 착한 행동도 결국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의 가치가 모두 달라서 생긴 결과다. 정약용은 하늘이 부여한 성품이라는 추상적 담론에서 벗어나 식물, 동물, 사람의 성품이 단지 '기호'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 정양욕, <다산시문집> 제 19권, <편지>, 이여홍에게 답함
우리는 성공하는 개체의 능력에 주목할 뿐, 그 성공을 가능하게 한 기술을 내것으로 복제하려는 엄두를 내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남의 특출난 능력을 복제하려면 엄청난 연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
기술과 능력은 분명히 다르다. 기술은 지식이기에 그 방법을 알기만 하면 누구나 남의 능력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입맛에 맛게 변형시킬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능력은 단순히 어떤 일을 할 수 있다는 잠재된 에너지일 뿐이다.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확보했다는 믿음만으로도 인간은 쾌락을 얻는다. 누군가의 능력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없다면 그의 친구나 애인이 되기 위해 안달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실용적인 유학자들은 에너지를 확보했다는 '믿음'에 기대며 살아가는 미신적 태도보다는, 능력을 기술로서 통용시키기 위해 동물을 관찰하고 이를 통해 인간 사회를 반추해 보는 태도를 취한다. 그리고 인간성마저 기술로서 통용시킬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인간성은 인간이 자신의 동물성을 억누르기위해 육성시키는 의지력이 아니라, 누구나 그 방법만 알면 스스로의 마음에 이식시킬 수 있는 알고리즘인 것이다.
사람은 어떤 동물보다 두꺼운 가죽을 입고 있다. 바로 기술과 제도, 문명이라는 가죽이다.
노루에게 먹을 것을 주고 가까이 두어 사람과 친해지게 하면, 사람과 가까이 하는 습성이 천성이 되어 노루는 사람을 좋아하게 된다.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먹이와 사랑이라는 입력의 차이에 의해 무한히 달라지는 기계적 숙명의 지배를 받지 않는 자연물은 없다.
요즈음 어떤 친구가 파리하고 못생긴 호마 한 필을 보고 그것이 뛰어난 재주가 있다 하여 값을 후히 주고 사오게 되었으나, 집안이 매우 가난해서 그는 말을 늘 굶겼다. 이 호마가 더욱 파리해져서 걸음도 제대로 못 걷고 장차 죽기 직전이 되자, 그는 말을 그만 잡아서 고기로 팔고 말았다. 아! 이 호마가 참으로 못 생기고 쓸모가 없어서 그렇게 되었을까? 또는 그 옳은 주인을 만나지 못해서 있는 재주를 발휘하지 못했다고 할까? 또 이런 이유를 누구에게 물어 보아야 할 것인가? 이는 저 말만 그런 것이 아니고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 이익, <성호사설> 제6권, <만물문>, 천리마
이익은 '새' 실험을 통해서 동물의 '눈치 보기'라는 행위를 관찰한다. 새 한두 마리는 겁을 주어도 쉽게 날아가지 않는다. 그러나 새들이 여러 마리 있을 때, 한 마리 새가 겁을 먹고 날아가면 다른 새들도 반드시 그 새를 따라 날아가게 된다. 군중은 서로 눈치를 보며 자신의 의견을 조정하는데, 그 결과 군중 전체가 비슷한 의견, 비슷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 이익은 인간의 그러한 과정이 새 무리와도 비슷하다고 본 것이다.
상이 후하지 않으면 선을 권할 수 없고, 형벌이 엄하지 않으면 악함을 징계할 수 없는 것이다. - 이익, <성호사설> 제 14권, <인사문>
일벌과 여왕벌이 생긴 모습이 달라서 각자의 숙명에 따라 사는 것만큼, '어떤 사람들처럼 살고 싶지 않은' 우리의 욕망이란 꿀벌의 '생긴 모습의 숙명' 만큼이나 강력하다.
흡연 인구, 음주 인구, 비만 인구는 '내가 절대로 되고 싶지 않은 종족'에 속하는 천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 천한 종족이 내는 세금의 양을 생각해 보라. 그들이 내는 세금이 일벌이 토해 내는 꿀이라는 노동의 결과물과 닮아 있지 않은가? 세상의 문제는 임금벌과 일벌을 나누는 귀천의 권력에 있는가? 실은 서로가 서로에게 귀천의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또한 서로가 서로를 먹여 살리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이익은 차등적 세계를 해체할 수 없다고 한다. 동물 착취는 동물 세계를 식민화시킨 것이고, 착취당하는 동물은 식민지 시민보다 못한 노예나 다름없다. 어느 누구도 그 착취를 정당화화지 못한 채 착취를 계속한다. 이익은 여기에 한 수 더 놓기를, 굴레와 코뚜레를 제제의 술법에 비유하며 인간이 인간을 다루는 데에도 필요한 것이라 한다. 가축이나 백성이나 동물원에 살려면 코뚜레에 얽혀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 동물원의 자원이 한정되어 있을 때는 더더둑 그렇다. 이익은 여러 편의 글에서 재물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이편에서 이익을 보면 저편에서는 손실을 입는 것'이라 말했다. 그는 조선 사회를 부가 한정되어 있어 사슴 한 마리를 놓고 여럿이 싸우게 되는 제로섬 전략의 사회로 바라보았다.
이익은 화폐를 금지하고 농경사회로 돌아가자는, 반상업적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 이런 주장을 한 것이 아니다. 농업이나 목축의 기술을 발전시켜 생산성을 높이지 않는다면, 쉽게 화폐를 빌려 쓰는 것은 단지 현재의 만족을 위해 미래의 가난을 사는 행위라고 말하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자유주의자들은 창조적 파괴라고 부르는) 끊임없는 경쟁으로 인간에게 좌절을 허용한다.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좌절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누구의 좌절을 금지할 것인가. 배를 태우던 사람들이 느끼던 좌절? 자본주의는 원래 소박했던 인간에게 탐욕을 불러일으키는 장치가 아니라, 언제나 창궐했던 인간의 탐욕을 좌절시키는 장치일 뿐이다. 그러나 정치가들과 중상주의자들은 자본주의가 악의 근원이라면서 뒤로는 자신들의 이기주의를 도모하며, 자본주의에 대한 대중의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반발 심리를 이용해서 부족주의적 영달을 추구한다.
말을 타고 만 리 길을 가면서 마부에게 걸어서 따라오기를 강요하는 것은 오직 우리나라뿐이다. 단지 걸어서 따라갈 뿐 아니라, 항상 행렬의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한다. 때문에 마부로 중국에 같이 들어가는 자는 모두 죄수처럼 쑥대머리를 하고 맑거나 비가 오거나 상관없이 걸어서 가야 한다. 우리나라의 하인이나 일꾼들이 자주 병드는 이유는 모두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물건을 지나치게 많이 실어서 소나 말이 자주 다친다"고 명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짐승들도 이런 대접을 받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사람들조차 그런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 박제가, <북학의>, 내편
코뚜레 없이 사는 소들 vs 코뚜레에 꿰어 죽도록 일하고, 죽어서도 고기로 인간에게 바쳐지는 소, 우리나라의 소
세상에는 온갖 억울한 사람들이 많지만, 부모가 만드는 불행 속에서 크는 아이들만큼 억울한 인생들이 없다.
물과 불은 기운은 있으나 생명이 없고, 풀과 나무는 생명은 있으나 지각이 없고, 새와 짐승은 지각은 있으나 의로움이 없다. 사람은 기운도 있고 지각도 있고 의로움도 있다. 그래서 천하에서 가장 존귀한 것이다. - 순자, <왕제>
쇠똥구리는 스스로 쇠똥 굴리기를 좋아하여 용의 여의주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따라서 용도 여의주를 가졌다는 것을 스스로 뽐내어 저 쇠똥구리가 쇠똥 굴리는 것을 비웃어서는 안 된다. - 이덕무, <청장관전서> 제63건. 선귤당농소
만물의 생은 각각 기질을 따르므로 생을 영위하는 것도 다르고, 생을 영위하는 것이 이미 다르므로 일삼는 바도 같지 아니하다. 예컨대 깃과 털을 가진 금수는 누에의 옷감을 알지 못하고, 구멍을 뚫고 살아가는 발 있는 벌레와 발 없는 벌레는 궁실을 알지 못하고, 비와 이슬을 마시는 것은 어육을 알지 못하고, 사냥하는 동물은 경작하는 등 농사짓는 것을 알지 못한다. 저가 잘하는 것은 이가 하지 못하는고, 이가 잘하는 것은 저가 하지 못한다.
어찌 다만 유를 달리하는 것만이 그리할 뿐이리오. 같은 사람이라도 각각 처하는 바에 따라서 제반의 익히는 일이 또한 다르다. 그렇지만 환난을 알고 주리고 배부른 것을 깨달으며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하며 이익을 쫓고 해를 피하는 것은 사람과 물이 모두 같다. - 최한기, <추측록> 제6권, '추물측사', 동물과 식물은 일삼는 것을 달리한다.
큰 놈은 작은 놈을 먹이로 하고
힘센 놈은 약한 놈 포식하나니
잡아먹고 살아가는 이 세상 운명
먹이사슬 속에서 서로들 해치누나
그러나 강하다고 어찌 항상 강하리오
때때로 사나운 적 불시에 만나니
힘세다 자랑 말라 힘센 놈 한이 없고
꾀 많다 자랑 말라 꾀 많은 놈 즐비하니
나와 너 분별의식 지인에겐 아예 없어
그 마음 허공처럼 툭 트였나니
허공이 이기는 물건 하나 없지만
허공을 이기는 것도 하나 없도다
- 장유, <계곡선생집> 제25권, <오언고시, 혼자 쓸쓸히 지내면서 아무렇게나 읊어본 시 십수>
지능이란 무엇일까? 단순히 말하면 문제를 푸는 능력일 것이다. 그렇다면 계산기도 지능을 가지고 있을까? 계산기는 새로운 지식을 습득할 수 없다. 새로운 환경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많은 문제를 해결해도 지능이라 부르지 않는다. 사람보다 빠르고 정확한 계산력을 가졌지만 계산기를 보고 사람보다 똑똑하다거나 지능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지능에 대한 정의는 다양하지만, 여기에서는 문제를 풀기 위해 이해하는 능력 정도로 정의하겠다.
생에 알맞은 것은 좋아하고 생에 알맞지 않은 것은 미워하니, 감정으로 드러나는 것에 이름을 준 것이 비록 일곱 가지가 있으나, 기실은 호오뿐이다. 칠정이란 희(喜), 노(怒), 애(哀), 락(樂), 애(愛), 오(惡), 욕(欲)이다. 감정의 발현에 어찌 이같이 실마리가 많겠는가. 진실로 그 실(實)을 추구해 보면 대개 호오가 있을 뿐이지만, 그 호오의 깊고 얕은 정도가 모두 같지 않으므로 여러 가지 이름이 있게 된 것이다. 절박하게 싫어하는 것이 슬픔이 되고 성하고 격렬하게 싫어하는 것이 노여움이 되며, 좋아하는 것이 나타나면 기쁨이 생기고 좋아하는 것이 두드러지면 즐거움이며, 좋아하는 마음이 대상에 결부되면 사랑이고, 싫어하는 것을 회피하고 좋아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욕(欲)이 되는 것이다. - 최한기, <추측록> 제3권, <추정측성>, 칠정(七情)은 호오(好惡)에서 나온다.
벌레, 온갖 동물들, 그리고 사람은 자연의 도구다. 동물은 유전자와 자연선택의 역사가 빚은 하드웨어에 종속되어 있을 뿐 아니라, 자아의 역사에 종속된 노예이기도 하다. 동물은 유전자뿐 아니라, 자아의 역사에 종속된 노예이기도 하다. 동물은 유전자뿐 아니라 온갖 잡다한 역사적/개인적 기억과 습관을 나르는 도구일 뿐이다. 현재의 삶을 바꾸기 위한 일환으로 삶의 목적은 무엇일까를 고민하기 이전에, 왜 굳이 동물이란 특정한 목적을 가지도록 욕망하게 만들어졌는지 생각해 보는 것도 좋다. 삶에 목적이 있다면 그 삶은 반드시 어떤 것의 도구일 뿐이기 때문이다. 벌레와 짐승은 자연의 도구라는 자신의 숙명을 모른다. 도구의 숙명을 아는 도구가 사람이다. 방 안에 갇힌 숙명을 아는 사람만이 자신의 방을 나와 다른 방을 구경할 수 있다. 바로 다른 짐승의 방에 들어가 보는 것이다. 벌레, 고양이, 새의 방을 끊임없이 들락날락거리며 기계의 숙명을 이해하는 것이 바로 유학자들이 말하는 '습성이 천성이 되는' 상태이자 인간성이라는 기술의 한 방법이다. 이 인간성이라는 이름의 인공지능이 벌레와 고양이의 상태도 체험할 수 있게 해주는 가상현실을 제공한다. 그 가상현실은 바로 그들의 각기 다른 호오의 내용을 읽어보는 것이다. 도대체 어떤 최초의 짐승이 이 인공지능 소프트웨어에 인간이라는 이름을 붙였는가? 그 최초의 짐승이 지금도 당신 속에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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