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이 모이는 곳에 권력이 만들어 지기에 언론과 미디어가 편향, 왜곡되지 않은 사실에 기반해 진실을 투명하고 책임감 있게 전달해야 하는 이유다. 학교, 회사, 교회 등 사람이 모이는 일상 공간에서 시간적 제약과 공간적 배치가 어떻게 권력과 연결되는지에 대한 설명이 흥미롭다.
[본문발췌]
관계는 사람간의 거리를 결정한다. 그리고 사람 간의 거리는 공간의 밀도를 결정한다. 공간의 밀도는 그 공간 내 사회적 관계를 결정한다. 코로나19라는 전염병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간격을 바꾸었다. 가까웠던 사람도 멀리 떨어지게 만들었다. 극장, 야구장, 공연장에 갈 수가 없게 되었다. 사람 간의 간격이 바뀌자 사람 간의 관계가 바뀌었고, 사람 간의 관계가 바뀌자 사회도 바뀌고 있다.
우리가 보는 많은 권력은 공간이 만드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일반적으로 시선이 모이는 곳에 위치한 사람은 권력을 가진다.
시공간적 제약이 곧 사회 시스템이다. 공간이 만드는 사회 시스템이 주는 제약은 보이지 않게 사람을 조종한다. 이때 공간이 만드는 권력의 크기는 모이는 사람의 숫자와 비례한다. 더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곳에는 공간에 의해서 더 큰 권력이 만들어진다.
과거 4인 가족 시대에는 부엌과 식탁이 하나로 묶였다면, 일이인 가구 시대에는 식탁과 책상이 하나로 묶이는 것이 맞다. 자연스럽게 부엌, 식탁, 거실이 한데 모여 있는 쓰리베이 아파트의 평면은 미래에는 거실과 침실, 식탁과 책상이 하나로 묶이는 공간으로 재구성되는 것이 맞다.
기존의 집은 잠을 자는 곳은 침실, 쉬는 곳은 거실, 음식을 준비하는 부엌으로 공간을 분리했다. 그리고 그 공간 안에 각각 다른 가구를 배치했다. 기능에 따라 공간과 가구를 나누는 것은 근대적 사고방식의 산물이다. 현대 사회는 기능에 따라 물건이 나누어지기보다는 합쳐지는 추세다. 소비와 행동의 개인화와 기술적인 발전은 공간의 의미를 바꾸고 있다. 이러한 경향에 맞추어서 가구들의 통폐합 혹은 융합이 되어 새로운 가구가 나오는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처음에는 가구에서 시작해서 나중에는 건축 평면상 방의 구획이 바뀌는 방향으로 가게 될 것이다.
포스트 코로나 아파트의 5원칙: 1가구 1발코니, 소셜 믹스 공원(아파트 단지 1층 지면을 공원, 상업시설, 문화시설로 사용할 수 있게 개방), 기둥식 구조, 복합 구성(건물 내에 작은 위성 학교, 공유 오피스 등을 작게 나누어서 주거와 섞어서 배치), 친환경적인 목구조
알타미라 동굴 벽화와 횃불, 고딕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테마파크의 AR/VR같이 어느 시대나 당대 최첨단 기술은 상상을 공간화시키는 데 사용되었다. 이 모두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다.
내가 만든 '공간과 권력의 제1 원칙'은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 사람을 모아서, 한 방향을 바라보게 하면 그 시선이 모이는 곳에 권력이 창출된다"는 것이다.
시선이 모이는 곳에 권력이 생겨난다는 것은 현대 사회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현대 사회에서 가장 시선을 많이 받는 사람은 미디어에 노출되는 사람들이다. 정해진 시간에 하루에 한 시간씩 시선의 집중을 받는 뉴스 앵커맨이 대표적인 사례다. 인스타그램 팔로워 숫자가 높을수록 권력이 높은 사람이고, 유튜브 동영상 조회 수가 높을수록 권력자가 된다. 시대가 바뀌고 기술이 바뀌면 플랫폼은 바뀌지만 시선이 모이는 곳에 권력이 만들어진다는 법칙은 그대로 유지된다.
시간과 공간적인 자유가 적을수록 그 시간과 공간을 통제하고 조정하는 주체가 권력을 갖는다. 종교 행위의 시공간적 측면에서 기독교는 집단적인 종교, 불교는 개인적인 종교로 볼 수 있다. 위치적인 측면에서도 두 종교는 차이가 크다. 불교의 절은 대부분 산속에 있고 기독교의, 교회는 상가에 있다. 가까운 도심 속에 공간이 있는 기독교는 접근성 면에서 커다란 우위를 가졌다.
일반적으로 권력은 예식과 규율을 강조한다. 예식과 규율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는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주는 것이다. 종교의 권력, 학교 선생님의 교권, 직장 상사의 권력은 예배 참석, 등교, 출근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각종 예식, 등교, 출근, 예배 참석 같은 복잡한 행위들의 중심 원리는 '자유의 억제'다. 권력은 누군가의 행동의 자유를 억제하는 시스템이 만들어질 때 강화된다. 그리고 그러한 시스템은 권력의 구조에 새롭게 진입한 사람들을 의심의 여지없이 순응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시공간을 통한 권력 형성의 시작은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만드는 것이다.
앞으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중요한 주제는 학교에서 온라인 수업의 비중이 늘어날 때 학생들에게 어떻게 대면 대인 관계와 공동체 훈련의 경험을 줄 수 있을 것인가이다. 이를 성공하지 못한다면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사회인을 양산할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이 사는 세상은 누군가에게 조종되기 쉬운 대중으로 구성된 사회이거나,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사회 구성원들의 세상이 되기 쉽다. 둘 다 위험한 일이다. 따라서 온라인 수업의 비중이 커질수록 오프라인의 대화가 있는 수업 양이 늘어나야 한다. 학생 두세 명과 선생님의 토론 수업일 수도 있고, 동네 체육센터의 스포츠 동아리를 통해서일 수도 있고, 주변 이웃을 돕는 프로그램이나 다양한 독서 토론회의 모습일 수도 있다.
천장고가 낮은 지하 도로망으로 자율 주행 운송 로봇이 다니면 에너지 효율을 크게 높일 수 있다. 우선 로봇만 다니는 낮은 천장고의 터널은 트럭이 다니는 터널보다 단면이 10분의 1 이상 작기 때문에 건설비를 크게 줄일 수 있다. 요즘은 지하 터널을 기계가 뜷기 때문에 공사 기간과 비용이 과거만큼 많이 들지 않는다. 둘째, 작은 크기의 운송 로봇은 에너지 효율을 높일 수 있다. 지금 우리는 1킬로그램짜리 피자를 배달할 때에도 60킬로그램 이상의 사람이 100킬로그램이 넘는 오토바이를 타고 이동한다. 결국 161킬로그램을 이동시키는 에너지가 소비된다. 택배 트럭은 배달 내내 다른 물건들도 싣고 다녀야 한다. 운송 로봇은 그런 낭비를 혁신적으로 줄일 수 있다. 10킬로그램밖에 되지 않는 자율 주행 로봇으로 피자를 배달한다면 사람까지 운반을 안해도 되기 때문에 가볍게 11킬로그램만 이동하면 된다. 에너지 효율이 16배 좋아지는 효과가 생긴다. 게다가 5G 기술을 이용한 자율 주행 로봇은 헤드라이트도 켤 필요가 ㅇ벗고, 사거리 신호등도 없이 교차로를 지나다닐 수 있다. 이동 속도와 흐름이 인간이 운전하는 교통수단과 비교가 안 되게 효율적이다. 지하 자율 주행 로봇 전용 도로망은 지하 하수도, 지하철, 지하 광케이블망처럼 경쟁력 있는 미래 도시의 필수 인프라 구조가 될 것이다.
사람은 지상으로 다니고 물건이 지하로 다니는 세상이 물건이 지상으로 다니고 사람이 지하로 다니는 세상보다 나은 세상이다. 물론 배달 시스템이 지상에서 이루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우리의 도로는 온갖 물류 트럭들로 정신없는 세상이 될 것이다. 인간은 천천히 걸을수록 좋고, 물류는 빠르게 이동할수록 좋다. 이 둘은 근본적으로 상충된다. 빠르게 움직여야 하는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공간으로 보내는 것이 지상을 '인간을 위한 느린 공간'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이다.
월세로 사는 것은 내 부동산 자산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내 노동의 대가가 사라지는 것을 말한다. 대신 그 돈은 부동산을 소유한 누군가의 자산으로 축적된다. 월세는 21세기에 존재하는 새로운 형태의 소작농이다. 사람들은 임대 주택에서 월세로 살면서 돈을 모아 나중에 집을 사면 되지 않느냐고 말하는데, 문제는 집값이 계속 올라간다는 것이다. 정부는 매년 최소 2퍼센트 이상의 경제 성장을 목표로 노력한다. 통화량이 많이지니 인플레이션은 계속되고, 돈의 가치는 점점 떨어진다. 같은 돈을 은행에 저금해 놓으면 돈의 가치는 점점 떨어진다. 반면 부동산은 유한한 자산이기 때문에 돈의 가치가 떨어지면 집값은 오른다. 부동산 버블이 없다고 하더라도 가만히 있어도 매년 집값이 올라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내가 만약에 2퍼센트의 경제 성장률보다 빠르게 월급을 모을 수 있다면 나중에 집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돈을 모으는 속도보다 집값이 더 빠르게 오른다면 영원히 내 집 마련은 힘들다. 실제로 지난 수십 년간의 부동산 자산 가격을 보면 경제 성장률보다 더 빠르게 상승하고 있다. 연봉과 집값 상승은 눈사람과 같다. 눈을 뭉쳐서 눈이 쌓인 골목길에서 굴리는 것과 연탄을 하나 가져와서 굴리는 눈사람 크기 차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크다.
사실을 냉정하게 보기 이전에 성급하게 윤리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선입견을 만들고 감정에 휘둘리기 쉽다. 무엇보다 위험한 것은 옳고 그름의 판단을 대신해 주는 누군가에게 조종될 가능성이 많다는 점이다. 마녀사냥이나 인민재판이 대표적인 사례다. 결국 그런 윤리적 판단을 내렸던 종교계와 공산당만 권력을 갖게 되는 세상이 됐고 다수의 일반인들은 자신이 조종되고 있다는 사실 조차 모르고 권력에 착취당하는 세상이 되었다.
어느 한 집단이 너무 많은 부를 소유하게 되면 부패하게 된다. 중세 시대 유럽의 전체 부, 즉 부동산과 동산 포함 모든 경제적 자본의 3분의 1이 교회 소유였고, 교회 권력이 부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흥미로운 점은 현 시대에 중국 정부가 소유하고 있는 부가 중국 전체 부의 3분의 1이라는 점이다.
집값이 폭등하고 은행 대출 없이 집을 사야 하는 세상이 되면 두 집단은 좋아한다. 바로 대자본가와 정치가들이다. 빈부 격차가 커질수록 자본가는 자본의 집중을 얻게 되고, 정치가는 집을 소유할 수 없어서 임대 주택을 구걸하는 표밭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악당을 잡으면 세상이 좋아진다고 믿지만 실제로 세상에는 악당과 그 악당을 손가락질하면서 그 상황을 통해서 자신의 권력과 이익을 챙기는 위선자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악당과 위선자 사이에서 국민은 정신을 차려야 한다. 이기적인 인간이 만드는 사회에서 권력은 쪼개서 나눠 가질수록 정의에 가까워진다. 돈은 권력이다. 따라서 부동산 자산은 권력이다. 부동산이 정부나 대자본가에 집중되기보다는 더 많은 사람이 나누어서 소유할 수 있는 사회가 더 정의로운 사회다. 내 아이를 위해서 거대 권력을 가진 정치가나 기업가가 착하기를 기대하기보다는 부동산 자산이 나누어진 사회를 만들어 물려주고 싶다.
2016년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은 상을 수상하기에는 젊은 나이인 40대 후반의 칠레 건축가 안레한드로 아라베나에게 돌아갔다. 그가 디자인한 저소득층을 위한 주거 '엘레멘털'의 아이디어는 독특하다. 저소득층은 돈이 없기 때문에 비싼 집을 살 수 없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그는 집을 절반만 지어서 분양했다. 이렇게 해서 집을 마련한 사람은 입주 후 돈을 벌면서 점점 자신의 집을 완성해 나갔다. 몇 년의 시간이 흐르자 각각의 집들은 각기 다른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동네는 더욱 살기 좋은 동네가 되었고 집값이 오른 만큼 입주자의 자산으로 남게 되었다. 동네에 대한 애착이 있고 이웃에 대한 존중이 있었기에 이곳의 공동체는 살만한 곳으로 성장했다. 건강한 사회는 집을 소유하려는 의지가 강한 사람들에게 집을 소유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는 사회다. 그런데 보통 이런 사람들은 시작할 수 있는 자본이 없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새로운 대출 제도가 필요한 것이다.
획일화가 되면 가치 판단의 기준은 정량화된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집값, 성적, 연봉, 키, 체중 같은 정량화된 지표로 사람들을 평가한다. 우리나라 중산층의 기준은 5천만원 이상의 연봉에 30평형대 이상의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고, 2천cc 이상의 중형차를 끄는 것이다. 모든 기준이 정량화된 지표다. 반면에 프랑스 같은 경우에는 중산층의 기준이 나만의 독특한 맛을 낼 줄 아는 요리를 할 수 있다, 즐기는 스포츠가 있다,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있다, 외국어를 할 수 있다 같은 정성적 기준들이다. 이렇게 가치관의 차이가 나는 이유는 우리나라의 라이프 스타일이 전체주의적이라 부를 만큼 획일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량적 가치관으로 행복을 측정하는 나라에서는 극소수의 사람만이 행복할 수 있다.
대중들은 다양한 요소들이 조화를 이루는 것을 보고 싶어 한다. 다양성 추구는 인간의 본능일 것이다. 우리는 보통 나와 반대되는 성향의 이성에게 매력을 느낀다. 다양한 유전자의 융합으로 만들어진 후손이 더 강한 생존력과 면역 체계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경험은 세상을 바라보는 기준을 만든다. 그리고 그 기준은 미래를 만든다.
인류 문명의 역사는 시공간 확장의 역사다. 기차를 발명해서 내가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을 확장했고, 전화기 발명으로 내가 의사소통할 수 있는 공간의 영역을 확장했다. 도로와 인터넷 통신망은 멀리 떨어진 사람들 사이를 연결해 주는 '공간 압축' 도구다. 이들은 더 많은 사람이 만나서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해 주고, 상거래를 가능하게 만든다.
역사를 모르는 사람에게 미래는 없다. 하지만 역사만 이야기하는 사람에게도 미래는 없다. 미래는 미래에 대해서 구체적인 꿈을 꾸는 사람들이 만드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시선의 초점을 과거에서 방향을 돌려, 미래를 향하길 바란다. 미래는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다. 미래는 우리가 만드는 오늘의 선택이 모여서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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