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와 베짱이' 우화처럼 집, 학교, 사회에서 게으름은 나쁜 것, 해서는 안되는 것이라 배우고 생각한다.
게으름이, 느림이, 멈춤이 우리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하는지 깨닫는다면 물질과 권력 중심의 목적지향적인 삶이 얼마나 공허하며 거꾸로 삶을 피폐하고 힘들게 할 수 있는지 알게 된다.
선우정아의 '뒹굴뒹굴'을 BGM 깔고 읽어보시길...
[본문발췌]
<천천히, 느리게, 있는 그대로> - 피에르 쌍소
나는 시간을 멎게 하는 게으른 사람들을 보면 저절로 감탄이 나온다. 병리학의, 잣대로 들이댄다면 모를까, 그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어떻게 자기 자신을 되찾고, 느긋이 몸을 돌보고, 서로 아끼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 수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거의 현자나 다름없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다만 시간을 늦출 수 있을 뿐이다. 아니면 차라리, 강요받고 별 뜻 없으며 앞다투어 능률을 올리는 시간을,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시간으로 갈음할 뿐이다. 게으름이라 함은 이따금 제 기분이나 기질에 따라서 행동하는 만큼, 그리하여 드디어 자기 자신을 되찾는 데 성공한다는 것이다.
게으름은 한 발짝 뒤로 물러남이다. 그러나 정신까지 물러나는 것은 아니다. 맞서는 것을 잠깐 멈추는 식의 물러남이다. 이 세상이 뭐가 되든지, 되어 가는 대로 흘러가는 것이라고나 할까.
아이는 시간이 흐르면 어른이 되고, 늙은 사람은 죽게 되는 것. 그렇다고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신경 쇠약으로 죽음을 재우쳐서도 안 된다. 겨울이 우리를 삼키고 꽁꽁 얼어붙게 하도록 그냥 내버려 두자. 참을성을 갖고 기다리자. 겨울이 가면 봄이 올 것이고, 봄이 지나면 여름이 될 테니.
말하자면, 게으르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둔다는 것이다. 그것은 슬기로움이나 너그러움의 한 형태다. 물러났다가 세상으로 다시 돌아와야 한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한가로이 거닐기, 남의 말 들어주기, 꿈꾸기, 글쓰기 따위처럼 사람들이 별로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버려진 순간에 깃들여 있다.
존재의 아름다운 순간을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 그 순간은 놀라움의 순간이고, 당신의 말에 진지하게 귀 기울이는 한 사람과 마주하고 있는 순간이다. 웃음을 띤 채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러한 순간이다.
게으름은 어디 아픈 것처럼 꼼짝도 하기 싫어하는 증세가 아니다. 천천히, 느리게, 있는 그대로 삶을 누리려는 몸가짐이자 마음가짐이다. 아주 천천히 가고 있어서 삶의, 저물녘에, 막바지 노을 속에서, 영원의 저녁 빛을 숨쉬는 그러한 능력이 게으름이다.
이와 같은 인식 행위에는 시간을 멎게 하는 힘이 있다.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가 볼 가치가 있다.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느리게, 처음부터 끝까지 살아 볼 가치가 있다. 마치 포도주잔에 빠져들어 한 방울 한 방울 그 맛을 느끼며 즐기듯이 말이다. 사람들이 아껴 마시는 포도주, 그 포도주 또한 입 안의 포도주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겠나.
움직이 않음, 마침내 그것은 움직임보다 더 아름다운 것일 터.
<정원에서> - 질 클레망
자연은 아무도 정확하게 내달볼 수가 없다. 그것이 바로 자연의 커다란 자원이기도 하다. 자연은 언제나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 낸다.
만일 사람들이, 자연이 스스로 알아서 저희를 표현하고 무슨 일이든 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아마 한결 풍요로운 광경을 보게 될 것이다. 전혀 생각조차 하지 못한 꽃이며 짐승들이 곳곳에서 나타날 테니까.
이러한 삶이, 이러한 다양성이 실재한다. 자기 의사와는 아무 상관 없이 이러한 일이 벌어진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 차라리 거꾸로 움직이는 것은 때에 따라서는 더 잘하는 것이다.
<무를 위한 시간> - 티에리 파코
'휴식recreation'이라는 말 속에는 '창조creation'라는 말이 들어 있다. 창조의 그 순간에 아무 감정이 없어지는 사람들이 많다. 마치 그에 따르는 침묵에 방해는 받았다는 듯이.
더구나, 그러한 침묵은 우리 스스로의 소리를 듣게 하고, 우리를 가깝게 하고, 우리를 꽉 채워 주고, 우리가 삶의 길을 다시 갈 수 있게 한다. 휴식과 창조의 시간, 무를 위한 그 시간은 새로운 무엇을 예비하는 시간이다.
<시간, 멈추어 버린>
나날의 삶에는 나날의 삶이 필요로 하는 박자와 어긋나는 방향이 있다. 그러한 템포의 틈서리에서, 우리의 삶은 멋대로 휴식을 얻는다. 낮잠과 밤새우기와 일요일과 기다림과 권태가 우리로 하여금시간을, 우리의 시간을 되찾게 해 준다.
<밤과 잠> - 마르틴 쿠티에
누구나 알고 있다. 회한에 사무쳐 괴로워하는 사람은 제대로 쉬거나 잠을 잘 수도 없다는 것을... 유령 이야기, 서서 자는 사람의, 이야기가 그냥 나온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안다. 거꾸로, 뉘우칠 거라곤 없는 순수하고 천진하고 결백한 영혼은 평화롭고 깊은 잠을 자도록 보장받는다. 흔히 그렇다는 말이다.
<일요일, 그 등대에서> - 장 프랑소와 뒤발
늦잠을 자고 나면 그 나머지 시간이 있는 법. 일요일은 사회 생활의 규칙으로 말미암은 것만큼이나 계절의 리듬, 밤과 낮이 바뀜에 따라 결정되는 '시간의 추종자들'이 한 순간 폭발하는 날이기도 하다. 그 추종자들은 바깥쪽 요인의 강요를 받아서 우리 속에 들어 있는 시계의 연대기 생물학의 시간과 다른 결을 타기 일쑤다.
아침잠을 깨우는 자명종, 수첩에 적힌 갖가지 일, 노동 시간, 제때 식사, 여름 시간표, 겨울 시간표 따위가 한 주 동안에 우리와 일상을 이리저리 몰고 다닌다.
그러나 일요일에는 낮 열두 시에 아침을 먹기도 하고, 점심을 거르기도 하고, 간식 시간과 점심 또는 저녁 시간이 뒤섞이기도 한다. 낮잠을 자기도 하고, 게으름을 피우기도 하고, 꾸벅꾸벅 졸기도 하고, 몽롱하게 취하기도 하고, 사냥감을 찾아 헤매기도 하고, 몇 킬로미터를 내달려 보기도 한다. 굳이 시간을 셈하거나 하지 않고.
일요일이 지닌 두드러진 점 가운데 한 가지는 바로 느림과 감속이라는 특성이다(이따금 멈춤에 따른 불안한 감정까지 건네면서). 평일은 재즈처럼 늘 비슷비슷한 템포로 움직인다. 일요일은 훨씬 조화로운 날이며, 화려한 피날레가 따르곤 한다. 영화에서 화면이 바뀌며 나타나는 영상 하나하나가 우리 나날의 큰 줄기를 이루는 것으로 갈음되듯이, 우리는 갑작스럽게, 아주 쉽게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그런 사물, 곧 위대한 시간을 맞이한다.
평일은 경제의 역학 구조와 온갖 구속에 의하여 완벽하게 조정되기 일쑤다. 그러나 일요일은 이 역학 구조를 차단시키며, 마침내 시간과 맞물리지 않는 흐름을 타곤 한다. 어느 시간대에는 무슨 일을 해야 한다는 식의 기제가 작동을 멈추는 것이다. 일요일에는 저마다 자신이 시간을 가진다. 삶은 셀 수 없이 숱한 순간으로 이루어져 있고 갖가지 시간으로 짜여 있다. 일요일은 우리에게 시간의 다양성과 그 최초의 밀도를 조금이라도 되찾아 주는 날이 아닐 수 없다.
오늘, 함부로 흘리거나, 붙들고 있거나, 갈무리하거나, 써 버리거나, 아예 없애거나, 잃어버리거나, 보람차게 만들거나,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시간이다. 내가 힘없이 가라앉아 있거나, 힘이 넘쳐서 설레거나, 다시 말하자면, 그것은 어느 쪽이나 마찬가지다. 시간에 대한 나의 지배는 변함이 없다.
일요일은 우리에게서 우리의 지위를 빼앗고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해준다. 그 불연속성 앞에서, 평일에는 우리가 다른 배역을 맡지 않을 수가 없다. 평일은 우리를 나누고, 우리 자신을 갈라놓는다.
지속성과 연속성에 자신을 맡기게 되는 일요일에는 그런 배역이 없어질 수 있다. 그리하여 일요일은 이따금 그 단일성 속에서 자신을 되찾을 수 있게 해주며, 존재의 흐릿한 윤곽을 분명하게 하도록 촉구한다. 왜냐하면, 존재 방식을 통해서, 정체성이 찾고자 하는 내적이고 심리적인 태도를 통해서, 그 특별한 날은 온갖 퇴행 현상을 정당한 것으로 만들어 주곤 하는 까닭이다. 괄호 속에 놓인 사회적 자아, 나르시시즘을 곁들인 욕구는 틈만 나면 차츰 기력을 되찾는 경향이 있다. 그 때 우리는 저마다 자기 자신을, 자기 가족을, 자기 주변 사람들을 되돌아보게 된다.
만일 자기 자신을 되찾는다면, 그것은 식전의 맛보기 술이 주는 가벼운 행복감, 즐거운 식사 모임, 알코올로 말미암은 취기, 묵직한 소화 기관, 이런 상태에서 이미 쾌락주의자들이 겪은 바 있는, 무기력하고 조금은 게으르게 자기 자신을 찾으려고 하는 과정을 통해서다. 그 때 뚜렷이 드러나는 것은 억눌려 있는 자아다. 만족시켜야 할 욕구가 있는, 쾌락을 좇는 자아다.
만일 일요일이 우리의 나날 가운데 가장 걱정 없이 보내는 날이라고 여긴다면, 그것은 일요일이 온갖 일탈을 가능하게 하며 다른 어떤 시간보다도 광기와 우연과 창조의 시간이라는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임을, 우리는 그 날의 시공간 속에서 본다. 그날은 또한 과거 속에 가장 뿌리내린 시간이다.
평일에는 탈을 써서 오히려 그 만남을 훼손시키지만, 일요일에는 아예 탈을 쓰지 않음으로써 남과의 만남 또한 자기와의 만남과 마찬가지로 이루어진다. 일요일에는 왕조차 가식을 벗어던진다. 일요일은 누구나 다 자기와 똑같은 사람임을 깨닫는 날이다. 그리하여 일요일은, 휴식의 시간인 일요일은, 사람과 사람이 새롭게 맺어지는, 관계가 다시 창조되는 시간인 것이다.
<시시한 이야기> - 크리스티앙 보뱅
영원이라 함은 시간으로 나아가는 것일 뿐, 다른 무엇이 아닙니다. 그렇게 나아가다 보면 남는 자취 같은 것이지요. 마치 이삭들을 헤치며 걷다 보면, 어느덧 밀밭에 생기는 어린 시절의 오솔길처럼... 영원이라는 것 또한 그 시간 하나하나에 깃들여 있는 소박한 삶일 뿐, 다른 무엇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째서 그 영원을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요?
[옮기고 나서]
<게으름의 즐거움>은 게으르게 사는 것이 바쁘게 사는 것보다 낫다고 말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 책은 찬양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언사로 게으름이, 느림이, 멈춤이 우리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하는지 이리저리 풀어헤쳐 보인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34308
'4.읽고쓰기(reading & essay)'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 노암 촘스키 (0) | 2021.06.30 |
---|---|
살아 있는 한, 누구에게나 인생은 열린 결말입니다 - 강의모 (0) | 2021.06.25 |
군주론 - 마키아벨리 (0) | 2021.06.15 |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 법정, 류시화 (0) | 2021.06.05 |
책은 도끼다 - 박웅현 (0) | 2021.05.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