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치환의 <정호승을 노래하다>라는 앨범을 자주 듣는다.
앨범에 수록곡 중 『수선화에게』와 『우리가 어느별에서』를 듣다보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시는 노래가 되고, 마음에 울림이 되고, 눈물이 되어 흐른다.
[본문발췌]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와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꽃 지는 저녁』
꽃이 진다고 아예 다 지나
꽃이 진다고 전화도 없나
꽃이 져도 나는 너를 잊은 적 없다
지는 꽃의 마음을 아는 이가
꽃이 진다고 저만 외롭나
꽃이 져도 나는 너를 잊은 적 없다
꽃 지는 저녁에는 배도 고파라
『윤동주의 서시』
너의 어깨에 기대고 싶을 때
너의 어깨에 기대어 마음놓고 울어보고 싶을 때
너와 약속한 장소에 내가 먼저 도착해 창가에 앉았을 때
그 창가에 문득 햇살이 눈부실 때
윤동주의 서시를 읽는다
뒤늦게 너의 편지에 번져 있는 눈물을 보았을 때
눈물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기어이 서울을 떠났을 때
새들이 톡톡 안개를 걷어내고 바다를 보여줄 때
장항에서 기차를 타고
가난한 윤동주의 서시를 읽는다
갈참나무 한 그루가 기차처럼 흔들린다
산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인가
사랑한다는 것은 산다는 것인가
『정동진』
밤을 다하여 우리가 태백을 넘어온 까닭은 무엇인가
밤을 다하여 우리가 새벽에 닿은 까닭은 무엇인가
수평선 너머로 우리가 타고 온 기차를 떠나보내고
우리는 각자 가슴을 맞대고 새벽 바다를 바라본다
해가 떠오른다
해는 바다 위로 막 떠오르는 순간에는 바라볼 수 있어도
성큼 떠오르고 나면 눈부셔 바라볼 수가 없다
그렇다
우리가 누가 누구의 해가 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다만 서로의 햇살이 될 수 있을 뿐
우리는 다만 서로의 파도가 될 수 있을 뿐
누가 누구의 바다가 될 수 있겠는가
바다에 빠진 기차가 다시 일어나 해안선과 나란히 달린다
우리가 지금 다정하게 철길 옆 해변가로 팔짱을 끼고 걷는다해도
언제까지 함께 팔짱을 끼고 걸을 수 있겠는가
동해를 향해 서 있는 저 소나무를 보라
바다에 한쪽 어깨를 지친듯이 내어준 저 소나무의 마음을 보라
네가 한때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기대었던 내 어깨처럼 편안하지 않은가
또다시 해변을 따라 길게 뻗어나간 저 철길을 보라
기차가 밤을 다하여 평생을 달려올 수 있었던 것은
서로 평행을 이루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우리 굳이 하나가 되기 위하여 노력하기보다
평행을 이루어 우리의 기차를 달리게 해야 한다
기차를 떠나보내고 정동진은 늘 혼자 남는다
우리를 떠나보내고 정동진은 울지 않는다
수평선 너머로 손수건을 흔드는 정동진의 붉은 새벽 바다
어여뻐라 너는 어느새 파도에 젖은 햇살이 되어 있구나
오늘은 착한 갈매기 한 마리가 너를 사랑하기를
『고래를 위하여』
푸른 바다에 고래가 없으면
푸른 바다가 아니지
마음속에 푸른 바다의
고래 한 마리 키우지 않으면
청년이 아니지
푸른 바다가 고래를 위하여
푸르다는 걸 아직 모르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모르지
고래도 가끔 수평선 위로 치솟아올라
별을 바라본다
나도 가끔 내 마음속의 고래를 위하여
밤하늘 별들을 바라본다
『리기다소나무』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당신은 한 그루 리기다 소나무 같았지요
푸른 리기다소나무 가지 사이로
얼핏얼핏 보이던 바다의 눈부신 물결 같았지요
당신을 처음 만나자마자
당신이 가장 아름다운 솔방울이 되길 원했지요
보다 바다 쪽으로 뻗어나간 솔가지가 되어
가장 부드러운 솔잎이 되길 원했지요
당신을 처음 만나고 나서 비로소
혼자서는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알았지요
사랑한다는 것이 아름다운 것인 줄 알았지요
『당신』
당신을 만나러
서울구치소로 가는 밤길에 함박눈이 환희 길을 밝힙니다
눈송이들은 눈길을 달려가는 어린 쥐들의 눈동자인 양 어여쁘고
당신이 기대어 잠들던 벽들은 길이 되어
추운 나무뿌리들의 가슴을 쓰다듬고 있습니다
언젠가 당신을 만나고 돌아오던 날
눈길에 십자고상 하나 던져버렸던 일이 부끄럽습니다
이제 곧 나무를 떠난 나뭇잎들은 돌아옵니다
적게 가질수록 더 많이 갖게 된 나뭇잎들은 썩어 다시 싹을 틔웁니다
당신은 상처입을 때까지 사랑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아직도 바람에 흔들리는 까닭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새벽별들이 가끔 나뭇가지에 걸려 빛나는 것은
당신을 사랑하는 나무뿌리들의 고요한 기쁨 때문입니다
『첫마음』
사랑했던 첫마음 빼앗길까봐
해가 떠도 눈 한번 뜰 수가 없네
사랑했던 첫마음 빼앗길까봐
해가 져도 집으로 돌아갈 수 없네
『풍경 달다』
운주사 와불님을 뵙고
돌아오는 길에
그대 가슴의 처마 끝에
풍경을 달고 돌아왔다
먼데서 바람 불어와
풍경 소리 들리면
보고 싶은 내 마음이
찾아갈 줄 알아라
『자국눈』
지상에 내리는 눈 중에서
가장 어여쁜 눈은 자국눈이다
첫사랑처럼
살짝 발자국이 찍히는 자국눈이다
어머니 첫사랑 남자를 만날 때마다
살짝살짝 자국눈이 내렸다지
그 남자가 가슴에 남긴 발자국이
평생 자국눈처럼 지워지지 않았다지
『첫눈이 가장 먼저 내리는 곳』
첫눈이 가장 먼저 내리는 곳은
너와 처음 만났던 도서관 숲길이다
아니다
네가 처음으로 무거운 내 가방을 들어주었던
버스 종점이다
아니다
버스 종점 부근에 서 있던
플라타너스 가지 위의 까치집이다
아니다
네가 사는 다세대주택 뒷산
민들레가 무더기로 피어나던 강아지 무덤 위다
아니다
지리산 노고단에 피었다 진 원추리의 이피리다
아니다
외로운 선인장의 가시위다
아니다
봉천동 달동네에 사는 소년의 똥무더기 위다
아니다
초파일 날
네가 술을 먹고 토하던 조계사 뒷골목이다
아니다
전경들이 진압봉을 들고 서 있던 명동성당 입구다
아니다
나를 첫사랑이라고 말하던 너의 입술 위다
그렇다
누굴 사랑해본 것은 네가 처음이라고 말하던
나의 입술 위다
그렇다
『입산』
너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너는 산으로 들어가버렸다
너를 향해 급히 달려갔다
너는 더 깊은 산으로 들어가버렸다
나는 한찬 길가에 앉아
배가 고픈 줄도 모르고
시들어가는 미들레 꽃잎을 들여다보다가
천천히 나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길은 끝이 없었다
지상을 떠나는 새들의 눈물이 길을 적셨다
나는 그 눈물을 따라가다가
네가 들어간 산의 골짜기가 되었다
눈 녹은 물로
언젠가 네가 산을 내려올 때
낮은 곳으로 흘러갈
너의 깊은 골짜기가 되었다
『수선화에게』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결혼에 대하여』
만남에 대하여 진정으로 기도해온 사람과 결혼하라
봄날 들녘에 나가 쑥과 냉이를 캐어본 추억이 있는 사람과 결혼하라
된장을 풀어 쑥국을 끓이고 스스로 기뻐할 줄 알는 사람과 결혼하라
일주일 동안 야근을 하느라 미처 채 깍지 못한 손톱을 다정스레 깍아주는 사람과 결혼하라
콧등에 땀을 흘리며 고추장에 보리밥을 맛있게 비벼먹을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어미를 그리워하는 어린 강아지의 똥을 더러워하지 않고 치울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가끔 나무를 껴안고 나무가 되는 사람과 결혼하라
나뭇가지들이 밤마다 별들을 향해 뻗어나간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고단한 별들이 잠시 쉬어가도록 가슴의 단추를 열어주는 사람과 결혼하라
가끔은 전깃불을 끄고 촛불 아래서 한 권의 시집을 읽을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책갈피 속에 노란 은행잎 한 장쯤은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는 사람과 결혼하라
밤이 오면 땅의 벌레 소리에 귀기울일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밤이 깊으면 가끔은 사랑해서 미안하다고 속삭일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결혼이 사랑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사랑도 결혼이 필요하다
사랑하는 것은 이해한다는 것이며
결혼도 때로는 외로운 것이다
『반지의 의미』
만남에 대하여 기도하자는 것이다
만남에 대하여 감사하자는 것이다
처음과 같이 아름답자는 것이다
처음과 같이 순결하자는 것이다
언제나 첫마음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언제나 첫마음을 잃지 말자는 것이다
사랑에도 외로움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결혼에도 외로움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꽃이 진다고 울지 말자는 것이다
스스로 꽃이 되자는 것이다
처음과 같이 가난하자는 것이다
처음과 같이 영원하자는 것이다
『달팽이』
내 마음은 연약하나 껍질은 단단하다
내 껍질은 연약하나 마음은 단단하다
사람들이 외롭지 않으면 길을 떠나지 않듯이
달팽이도 외롭지 않으면 길을 떠나지 않는다
이제 막 기울기 시작한 달은 차돌같이 차다
나의 길은 어느새 풀잎에 젖어 있다
손에 주전자를 들고 아침 이슬을 밟으며
내가 가야 할 길 앞에서 누가 오고 있다
죄없는 소년이다
소년이 무심코 나를 밟고 간다
아마 아침 이슬인 줄 알았나 보다
『나뭇잎을 닦다』
저 소나기 나무잎을 닦아주고 가는 것을 보라
저 가랑비가 나뭇잎을 닦아주고 가는 것을 보라
저 봄비가 나뭇잎을 닦아주고 기뻐하는 것을 보라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가 고이고이 잠드는 것을 보라
우리가 나뭇잎에 안은 먼지를 닦는 일은
우리 스스로 나뭇잎이 되는 일이다
우리 스스로 푸른 하늘이 되는 일이다
나뭇잎에 앉은 먼지 한번 닦아주지 못하고 사람이 죽는다면
사람은 그 얼마나 쓸쓸한 것이냐
『사막』
들녘에 비가 내린다
빗물을 듬뿍 머금고
들녘엔 들꽃이 찬란하다
사막에 비가 내린다
빗물을 흠뻑 빨아들이고
사막은 여전히 사막으로 남아 있다
받아들일 줄은 알고
나눌 줄은 모르는 자가
언제나 더 메말라 있는
초여름
인간의 사막
『마음의 똥』
내 어릴 때 소나무 서 있는 들판에서
아버지 같은 눈사람 하나 외롭게 서 있으면
눈사람 옆에 살그머니 쪼그리고 앉아
한 무더기 똥을 누고 돌아와 곤히 잠들곤 했는데
그날 밤에는 꿈속에서도 유난히 함박눈이 많이 내려
내가 눈 똥이 다 함박눈이 되어 눈부셨는데
이제는 아무 데도 똥 눌 들판이 없어
아버지처럼 외롭고 다정한 눈사람 하나 없어
내 마음의 똥 한 무더기 누지 못하고
외롭고 쓸쓸하다
『새벽의 시』
나는 새벽이 되어서야 알았다
나뭇잎이 나무의 눈물인 것을
새똥이 새들의 눈물인 것을
어머니가 인간의 눈물인 것을
나는 새벽이 되어서야 알았다
나무들의 뿌리가 서로 얽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이라는 것을
새들이 우리의 더러운 지붕 위에 날아와
똥을 눈다는 것이
그 얼마나 고마운 일이라는 것을
나는 새벽이 되어서야 알았다
거리의 노숙자들이 잠에서 깨어나
어머니를 생각하는 새벽의 새벽이 되어서야
눈물의 고마움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들』
아버지는 석 달치 사글세가 밀린 지하셋방이다
너희들은 햇볕이 잘 드는 전세집을 얻어 떠나라
아버지는 아침 출근길 보도 위에 누가 버린 낡은 신발 한 짝이다
너희들은 새구두를 사 신고 언제든지 길을 떠나라
아버지는 페인트칠할 때 쓰던 낡고 때묻은 목장갑이다
몇 번 빨다가 잃어버리면 아예 찾을 생각을 하지 말아라
아버지는 포장마차 우동 그릇 옆에 놓인 빈 소주병이다
너희들은 빈 소주병처럼 술집을 나와 쓰러지는 일은 없도록 하라
아버지는 다시 겨울이 와서 꺼내 입은 외투 속에
언제 넣어두었는지 모르는 동전 몇 닢이다
너희들은 그 동전마저도 가져가 컵라면이라도 사먹어라
아버지는 벽에 걸려 있다가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진 고장난 벽시계다
너희들은 인생의 시계를 더이상 고장내지 말아라
아버지는 동시상영하는 삶류극장의 낡은 의자다
젊은 애인들이 나누어 씹다가 그 의자에 붙여놓은 추잉껌이다
너희들은 설가 서로에게 깨끗한 의자가 되어주어라
아버지는 도시 인근 야산의 고사목이다
봄이 오지 않으면 나를 베어 화톳불을 지펴서 몸을 녹여라
아버지는 길바닥에 버려진
붉은 단팥이 터져나온 붕어빵의 눈물이다
너희들은 눈물의 고마움에 대하여 고마워할 줄 알아라
아버지는 지하철을 떠도는 먼지다
이 열차의 종착역이다
너희들은 너희들의 짐을 챙겨 너희들의 집으로 가라
아버지는 이제 약속할 수 없는 약속이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027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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