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에 충실해야 현재에서 충만한 삶을 누릴 수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나 주변의 평가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만의 기준을 따라 자유롭고 당당해져야만 한다.
 
 
[본문발췌]

"우리들은 정신이 큰 변화를 받아서 때로는 한층 큰 완전성으로, 때로는 한층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이 정념(passiones)은 우리에게 기쁨(laetitia)과 슬픔(tristitia)의 감정을 설명해 준다." - 스피노자, <에티카>


비루함(ABJECTIO) :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 극복해야 할 노예의식,
<무무> 이반 투르게네프, "비루함이란 슬픔 때문에 자기에 대해 정당한 것 이하로 느끼는 것이다"


자긍심(ACQUIESCENTIA IN SE IPSO) : 사랑이 만드는 아름다운 기적, 
<정체성> 밀란 쿤테라, "자긍심이란 인간이 자기 자신과 자기의 활동 능력을 고찰하는 데서 생기는 기쁨이다"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는 단순한 사실 하나만으로 우리는 금방 자긍심을 회복할 수 있다. 내 자신이 충분히 소중하고 매력적인 존재가 아니고서는, 어떻게 타인이 나를 사랑하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겠는가.


사랑(AMOR) : 자신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변화시킬 수 있는 힘, 
<동풍서풍> 펄 벅, "사랑이란 외부의 원인에 대한 생각을 수반하는 기쁨이다."
사랑이란 무엇보다도 먼저 기쁨의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스피노자는 기쁨의 감정은 "인간이 더욱 작은 완전성에서 더욱 큰 완전성으로 이행할 때" 발생하는 감정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결여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더욱 충만해진다는 감정이 바로 기쁨이다. 기쁨이라는 감정과 사랑이라는 감정을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척도는, 사랑에는 외부 원인이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대담함(AUDACIA) : 나약한 사람을 용사로 만드는 비밀, 
<1984> 조지 오웰, "대담함이란 동료가 맞서기 두려워하는 위험을 무릎쓰고 어떤 일을 하도록 자극되는 욕망이다."
대담함을 욕망이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스피노자의 비범함을 발견하게 된다. 욕망이란 기본적으로 기쁨의 증진을 도모하는 작용이기 때문이다. 사랑만큼 살아갈 힘과 기쁨을 증폭시키는 경험이 또 있을까? 
조지 오웰이 <1984>에서 모색했던 것도 바로 사랑의 파괴력, 그러니까 압도적인 힘 앞에서 주눅 들지 않는 대담함이라는 감정이었다. 오직 위기를 감내하려고 할 때에만 용기와 대담함은 빛을 발한다.
 
 
탐욕(AVARITIA) : 사랑마저 집어삼키는 괴물,
<위대한 개츠비> F. 스콧 피츠제럴드, "탐욕이란 부에 대한 무절제한 욕망이자 사랑이다."
돈에 대한 갈망은 집요한 것이다. 더군다나 자본주의 사회는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회체제 아닌가. 이제 돈은 원하는 것을 구하기 위한 단순한 결제 수단이 아니라 절대적인 수단이 된 것이다. 절대적인 수단은 동시에 절대적인 목적이기도 하다. 돈에 대한 갈망에서 빠져나올 방법은 있을까? 그것은 나름대로 최적생계비를 생각하며 돈을 버는 것이다. 돈을 목적의 자리가 아니라 원래 자리, 그러니까 수단의자리로 만들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 돈은 여행을 가려고, 맛난 음식을 먹으려고, 혹은 멋진 옷을 사기 위한 수단이다. 그리고 돈은 또한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부드럽게 해주는 윤활유다. 바로 이것이다. 돈에 대한 갈망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있다. 최적생계비를 계산하고, 그것을 삶에 관철하는 것이다. "됐어. 이 정도면 됐어. 이제 삶과 사랑을 향유해야지." 갈망에서 자유로워지는 첫걸음은 이렇게 내딛는 것이다.
 
 
박애(BENEVOLENTIA) : 공동체 의식을 가능하게 만드는 원동력,
<레 미제라블> 빅토르 위고, "박애란 우리가 불쌍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친절하려고 하는 욕망이다."
사랑의 원리는 무소유의 원리를 토대로 한다. 겨울 찬바람에 사랑하는 사람이 떨고 있다면 기꺼이 추위를 무릅쓰고 자신의 옷을 벗어 줄 것이다. 이럴 때 두 사람은 최소한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게 된다. 이렇게 공동체의 범위는 자신이 가진 것을 어디까지 나누어주느냐에 의해 측정될 수 있다.
'자발적인 가난', 이것이 바로 박애가 드러나는 행동 양식이다.
 
 
연민(COMMISERATIO) : 타인에게 사랑이라는 착각을 만들 수도 있는 치명적인 함정,
<초조한 마음> 슈테판 츠바이크, "연민이란 자신과 비슷하다고 우리가 상상하는 타인에게 일어난 해악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다.", 타인의 불행에서 생기는 슬픔.
 

물은 꿈처럼 헛된, 사라지게 될 운명만을 암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끊임없이 존재의 실체를 변화시키는, 
근원적인 운명의 전형이다. - 가스통 바슐라르, <물과 꿈> 에서
 

욕망(CUPIDITAS) : 모든 감정에 숨겨져 있는 동반자,
<프랑스 중위의 여자> 존 파울즈, "욕망이란 인간의 본질이 주어진 감정(affectione)에 따라 어떤 것을 행할 수 있도록 결정되는 한에서 인간의 본질(essentia) 자체이다. 욕망은 자신의 의식(conscientia)을 동반하는 추동(appetitus)이고, 충동은 인간의 본질이 자신의 유지에 이익이 되는 것을 행할 수 있도록 결정되는 한에서 인간의 본질 자체이다."
 
 
동경(DESIDERIUM) : 한때의 기쁨을 영속시키려는 서글픈 시도,
<아우라> 카를로스 푸엔테스, "동경이란 어떤 사물을 소유하려는 욕망 또는 충동이다. 우리가 자신을 어떤 종류의 기쁨으로 자극하는 사물을 회상할 때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같은 기쁨을 가지고 그것이 지금 눈앞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도록 노력한다. 그러나 이 노력은 그 사물이 있다는 것을 배제하는 사물의 이미지에 의하여 곧 방해받는다."
 
 
절망(DESPERATIO) : 죽음으로 이끌 수도 있는 치명적인 장벽,
<책 읽어주는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절망이란 의심의 원인이 제거된 미래 또는 과거 사물의 관념에서 생기는 슬픔이다. 공포에서 절망이 생긴다."
희미하게 흔들리던 촛불처럼 존재하던 희망이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 절망이 찾아온다. 미래에 대한 어설픈 기대, 혹은 불안한 희망이 없었다면, 우리는 그렇게 절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절망은 냉철한 이성을 가진 사람보다는 우유부단한 성격의 소유자에게 더 자주 찾아오는 감정이다.
 

호의(FAVOR) : 결코 사랑일 수 없는 사랑,
<노르웨이의 숲> 무라카미 하루키, "호의란 타인에게 친절을 베푼 어떤 사람에 대한 사랑이다."
 
 
영광(GLORIA) : 모든 이의 선망으로 타오르는 위엄,
<노인과 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영광은 우리가 타인이 칭찬할 거라고 상상하는 우리 자신의 어떤 행동의 관념을 동반하는 기쁨이다."
그렇지만 영광을 추구하는 이면에는 다른 사람에게 당할 멸시나 경멸에 대한 원초적인 두려움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권력이나 자본이 항상 상벌의 논리로 우리를 유혹할 수 있는 것도 우리에게 영광을 추구하고 치욕을 멀리하려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진정 커다란 고독이 닥쳐오고 완벽한 정적에 휩싸이면,
몽상가의 마음에도 불꽃의 핵심에도 같은 평화가 존재한다.
그때 불꽃은 자신의 형태를 지키며 확고한 사상처럼
수직성의 운명을 향해 똑바로 내닫는다. - 가스통 바슐라르 <촛불의 미학>에서
 
 
감사(GRATIA) :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품고 친절을 베풀 수밖에 없는 서러움,
<거미여인의 키스> 마누엘 푸익, "감사 또는 사은(gratitudo)은 사랑의 감정을 가지고 우리에게 친절을 베푼 사람에게 친절하고자 하는 욕망 또는 사랑의 노력이다."
 
 
겸손(HUMILITAS) : 진정한 사랑을 위한 자기희생,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 에밀 졸라, "겸손이란 인간이 자기의 무능과 약함을 고찰하는 데서 생기는 슬픔이다."
 
 
분노(INDIGNATIO) : 수치심이 잔인한 행동일 될 때까지,
<죄와 벌> 도스토예프스키, "분노는 타인에게 해악을 끼친 어떤 사람에 대한 미움이다."
 
 
질투(INVIDIA) : 사랑이 드리우는 짙은 그림자,
<질투> 알랭 로브그리예, "질투란 타인의 행복을 슬퍼하고 반대로 타인의 불행을 기뻐하도록 인간을 자극하는 한에서의 미움이다."
 
 
두려움(METUS) : 과거가 불행한 자의 숙명,
<유령> 헨리크 입센, "두려움이란 우리가 그 결과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의심하는 미래 또는 과거 사물의 관념에서 생기는 비연속적인 슬픔이다."
불행한 과거는 과거지사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현재와 미래의 삶에도 질식할 것 같은 무게를 가하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은 과거를 통해 미래를 꿈꾸는 동물이다. 그러니 과거가 행복한 사람은 미래를 장밋빛으로, 과거가 불행한 사람은 미래를 잿빛으로 꿈꾸게 된다.
과거의 아픈 기억과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염려! 두려움을 극복하고 현재의 삶을 향유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벼움을 확보하는 것이다. 지금 가진 것에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동정(MISERICORDIA) : 비참함이 비참함에 바치는 애잔한 헌사,
<티파니에서 아침을> 트루먼 커포티, "동정이란 타인의 행복을 기뻐하고 또 반대로 타인의 불행을 슬퍼하도록 인간을 자극하는 한에서의 사랑이다."
삶이 너무나 궁핍하고 남루하면 우리는 그 현실을 도피하기 우해 근사한 꿈을 꾼다. 니체의 말대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우리의 자화상이다. 누군가가 꾸고 있는 현실 도피의 꿈을 응시해 보면, 역설적으로 그가 도피하려고 하는 현실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지 직감할 수 있다.
 
 
공손(AVERSIO) : 무서운 타자에게 보내는 친절,
<인간 실격> 다자이 오사무, "공손함(humanitas)이나 온건함(modestia)은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일은 하고 그렇지 않은 일은 하지 않으려는 욕망이다."
온건한 사람은 표면적으로는 타인을 배려하는 공동체 의식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타인에 대한 공포가 드리우고 있는 짙은 그늘이 있다. 말 잘 듣는 아이는 그 공포감으로 인해 자신의 욕망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는 세 종류의 인간이 있다. 
첫째 부류는 모든 사람에게서 온화하다고 칭찬이 자자한 사람이다. 
두 번째 부류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악당이라고 지탄받는 사람이다. 
세 번째 부류는 칭찬도 받고 욕도 먹는 사람이다. 모든 사람에게 욕을 먹는 두 번째 부류의 인간은 그냥 쓰레기니까 조심하면 된다. 반면 진짜로 위험한 것은 첫 번째 부류의 인간들이다. 억압된 욕망을 자신보다 약한 존재에게 폭발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공손하고 온화한 사람을 조심하라!
 
 
미움(ODIUM) : 내가 파괴되거나 네가 파괴도거나,
<피아노 치는 여자> 엘프리데 옐리네크, "미움이란 외적 원인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다."



역동적 상상력 속에서는 모든 것이 활기를 띠고
그 무엇도 멈추지 않는다. 운동이 존재를 창조하며
소용돌이치는 대기는 별들을 창조하고,
외침은 이미지를 낳고, 외침은 말을, 생각을 준다. - 가스통 바슐라르, <공기와 꿈> 에서
 
 
후회(POENITENTIA) : 모든 불운을 자기 탓으로 돌리는 나약함,
<캐스터브리지의 읍장> 토머스 하디, "후회란 우리가 정신의 자유로운 결단으로 했다고 믿는 어떤 행위에 대한 관념을 수반하는 슬픔이다."
 
 
겁(PUSILLANIMITAS) : 실패를 예감하는 위축된 자의식,
<여명>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 "겁남은 동료가 감히 맞서는 위험을 두려워하여 자기의 욕망을 방해당하는 그런 사람에 대해 언급된다."
미래에 벌어질 수 있는 가장 불행한 일에 대한 공포, 이것이 바로 겁이라는 감정의 정체다. 그러니까 겁이 많은 사람은 미래의 불행에 미리 젖어 현재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돌보지 않게 된다. 한마디로 겁이 많은 사람은 실패를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결국 겁이라는 감정에서 빠져나오는 유일한 방법은 현재 자신의 욕망에 몰입하고 그것을 관철시키려는 자세 이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희망(SPES) : 불확실해서 더 절절한 기다림,
<위대한 유산> 찰스 디킨스, "희망은 우리들이 그 결과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의심하는 미래나 과거의 사물의 관념에서 생기는 불확실한 기쁨(inconstans laetitia)이다."
인간의 희망은 여전히 사람 그 자체를 향해야만 한다. 속물은 속물을 만나고, 진지한 사람은 진지한 사람을 만나는 법이다. 이것은 불확실성을 내포하는 단순한 희망이 아니라, 경험이 쌓이면 누구나 확실히 알게 되는 삶의 진리가 아닌지.
 
 
오만(SUPERBIA) : 사랑을 좀먹는 파괴적인 암세포,
<위험한 관계> 피에르 쇼데를로 드 라클로, "오만이란 자신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신을 정당한 것 이상으로 느끼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말의 동의어는 '알려고 한다'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제 모든 것을 알았다는 오만에 빠지는 순간, 그래서 더 이상 알 것이 없다는 오만이 생기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소심함(TIMOR) : 작은 불행을 선택하는 비극,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프랑수아 사강, "소심함은 우리들이 두려워하는 큰 악을 더 작은 악으로 피하려는 욕망이다."
 
 
쾌감(TITILLATIO) : 포기할 수 없는 허무한 찬란함,
<도나 플로르와 그녀의 두 남편> 조르지 아마두, "정신과 신체에 동시에 관계되는 기쁨의 정서를 쾌감이나 유쾌함(hilaritas)이라고 한다."
인간에게는 두 가지 시간이 존재한다. 하나는 지속이란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순간이란 시간이다. 지속은 우리에게 예측 가능한 시간을 주면서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안겨 준다. 반면 순간은 첫 만남처럼 과거 자신의 안정적인 모습을 파국으로 몰고 가는 위험한 시간이다.  예를 들어 어떤 남자를 보자마자 인생이 앞으로 완전히 달라질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그래서 결코 과거로는 되돌아갈 수 없다고 느낄 때, 바로 그때가 '순간'인 셈이다.
완전한 기쁨은, 몸이나 마음 중 어느 하나를 희생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몸과 마음이 모두 기쁨으로 충만할 때, 다시 말해 우리의 삶이 쾌감으로 전율할 때, 바로 그 시간이 우리가 꽃으로 피어나는 순간이다.
 
 
슬픔(TRISTITIA) : 비극을 예감하는 둔탁한 무거움,
<미국의 비극> 시어도어 드라이저, "슬픔은 인간이 더 큰 완전성에서 더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부와 사랑, 둘 중에 어느 것이 기쁨을 주고 어느 것이 슬픔을 주는지가 문제의 핵심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두가지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하는 자본주의 자체가 바로 슬픔의 기원이라는 통찰일 테니까 말이다.
타자와의 마주침이 없다면 감정도 존재할 수 없다. 타자를 만나서 삶이 충만해진다고 느낄 때의 감정이 기쁨이라면, 슬픔은 그와 반대로 타자를 만나서 삶의 충만함이 훼손된다고 느낄 때의 감정이다.
 
 
수치심(VERECUNDIA) : 마비된 삶을 깨우는 마지막 보루,
<더블린 사람들> 제임스 조이스, "치욕(pudor)이란 우리가 부끄러워하는 행위에 수반되는 슬픔이다. 반면 수치심이란 치욕에 대한 공포나 소심함이고 추한 행위를 범하지 않도록 인간을 억제하는 것이다."
수치심은 앞으로 치욕을 당하면 어쩌나 하는 공포감이나 소심함으로 드러난다. 따라서 수치심을 느낄 때에 비로소 우린느 타인의 시선을 의식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신의 언행을 반성하게 된다. 그러니 마비된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에게서는 수치심을 찾아보기 힘들다.
 
 
 
 
<에필로그>
'선과 악(Good and Evil)'을 넘어.
이것은 적어도 '좋음과 나쁨(good and bad)'을
넘어선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 프리드리히 니체

사랑의 감정은 바로 우리를 현재에 살도록 하고, 안전한 삶에 대한 생각은 우리를 미래에 살도록 만든다. 안전한 삶을 위해 현재의 열정적인 감정을 교살하는 삶,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삶이 과연 행복할까? 절대 그럴 수 없다. 왜냐고? 지금은 미래로 보이는 때도 언젠가 우리에게 현재로 다가올 테니까. 그렇게 우리는 이미 현재가 된 미래에서도 또 다른 미래를 위해 '지금 이 순간'을 포기하게 될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미래에 더 큰 가치를 두느라 현재를 부정하는 삶이 이르게 되는 종착역은 바로 죽음이다. 이것은 유한한 삶의 진실이다. 그러니 현재 누려야 할 행복과 기쁨을 미래로 미루지 말라!

감정은 우리 삶의 속도만큼 충분히 지속적이다. 그러니 감정의 색채를 믿고 따르라! 자신의 심장 소리와 함께 지속되는 그 감정의 목소리르 존중하라! 그것만이 당신이 현재에서 충만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물론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은 주변의 평가에서 자유롭고 당당해져야만 한다. 

감정을 순간적으로 저주하면서 현재를 부정하는 사람들, 그래서 현재에 살지만 과거나 미래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행동 준칙은 '선(Good)과 악(Evil)'이다. 반면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의 목소리에 충실한 사람들이 따르는 행동 준칙은 '좋은(good)과 나쁨(bad)'이다. 돌이켜 보면 경제적인 이유로 사랑하는 남자를 포기한 여성은 '좋음과 나쁨'의 기준이 아니라 '선과 악'의 기준을 따른 것이다. 여러 가지로 무능력해 보이는 남자와 결혼하는 것, 그것은 자본주의 공동체의 가치를 수용하고 있는 부모나 친구들에게는 악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들은 지금 그 여자의 감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간단히 말해 '선과 악'이 대다수 공동체 성원들이 내리는 평가 기준을 의미한다면, '좋음과 나쁨'은 다른 누구의 판단이나 평가가 아니라 스스로 내리는 평가 기준을 의미한다. 니체가 선과 악에 'Good'과 'Evil'이란 대문자를 사용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선과 악은 사회의 안전이나 통념을 위해 어떤 개인이라도 반드시 따라야만 하는 절대적이고 유일한 규범을 상징하니까. 반면 니체는 좋음과 나쁨에 'good'과 'bad'라는 소문자를 붙인다. 사람마다 좋음과 나쁨의 기준이 다르고 동시에 좋음과 나쁨의 내용도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감정을 지키려는 사람들은 우선 선과 악이라는 규범을 버리고 좋음과 나쁨이라는 자기만의 기준에 따라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다. 단지 지금 내가 마주하고 있는 대상이 삶을 향한 의지를 강화시켜 준다면, 다시 말해 내 삶에 경쾌함을 준다면, 그것은 '좋은' 것이다. 반대로 삶을 향한 의지를 약화시켜 내 삶을 우울하고 무겁게 만든다면, 그것은 '나쁜'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의 감정을 따르지 않는다면 자기 삶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없다는 진실을. 비극이 발생하는 두 번째 이유는 우리가 자신의 마음을 뒤흔드는 다양한 감정들에 너무나 서툴렀다는 데 있다. 두 번째 이유로 발생하는 비극을 막기 위해서, 지금 자신을 휘감고 있는 감정이 슬픈 것인지 아니면 기쁜 것인지 정확히 식별할 수 있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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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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