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 명료한 선생님의 가르침!
[본문발췌]
불안을 탈출한다는 것은 그것을 이탈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그것을 지닌 채 산다는 것. 그런고로 더욱 삶의 근본 마당에서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안의 탈출구는 밖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향하고 있다.
가치와 비전을 갖고 일을 하면 아무리 천한 일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활동이 된다. 즉 행복에 대한 해답은 우리 스스로에게 있다.
감사하는 마음, 그것은 자기 아닌 다른 사람에게 보내는 감정이 아니라 실은 자기 자신의 평화를 위해서이다. 감사하는 행위, 그것은 벽에다 던지는 공처럼 자기 자신에게 돌아온다.
사람은 두 개의 몸무게를 갖고 살아간다. 저울로 달 수 있는 무게와 마음으로 다는 시간의 무게이다. 그래서 마음이 풍부하고 인격 있는 사람을 보고 무게가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사랑’은 자비와도 다른 것이다. 자비는 연민에서 시작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랑은 연민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의 고통 속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희열만이 아니라 위험과 비탄과 어려움에 휩싸이게 된다. 그것은 편안함보다 ‘야윈’ 모습으로 상징되는 세계이다.
웃음을 좋아하고 유머의 가치를 알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악인은 없다. 유머라고 하는 것은 절박할 때, 분노를 느낄 때, 신경질이 솟구칠 때, 도리어 그 진가가 발휘되는 방법이다. 정신적인 여유와 아량에서만 유머의 분수가 용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머는 그냥 ‘우스운’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여유’ 혹은 ‘인생을 대하는 너그러운 태도’까지를 포함한 말이다. 긴박할 때, 절망적일 때 그리고 분노 속에서도 웃을 수 있는 기질, 그것이 바로 유머이다.
우리에게 정말 위로와 믿음을 주는 자는 국화처럼 계절을 거슬러 사는 사람이다. 남들이 다 잠들 때 홀로 깨어 있는 사람은, 남들이 다 떠날 때 홀로 남아 있는 사람은, 그리고 남들이 모두 침묵하고 있을 때 홀로 노래하는 사람은 우리에게 더 많은 용기와 사랑을 남기는 자들이다.
가난하다고 해서 비천한 것은 아니다. 가난을 의식할 때 그는 비천해진다. 부자라 해서 비천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자기의 부를 의식할 때 비천해진다.
고苦는 산스크리트어로, 고통이란 뜻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로 할 수 없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생로병사가 거기 있죠. 그래서 인간의 의지로 자기 몸을 멋대로 할 수 없다는 거예요. 자기가 병 걸리고 안 걸리고를 마음대로 할 수 있어요? 늙는 걸 마음대로 할 수 있어요? 죽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어요? 그러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을 그냥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걸로 받아들이면 뭐가 없겠어요? 고苦 가 없죠. 그런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걸 마음대로 하려고 할 때 고苦 가 생기는 거예요.
스님을 찾아온 사람이 입으로는 “한 수 배우고 싶다”고 하고는 한참을 제 얘기만 쏟아냈지. 듣고 있던 스님이 찻주전자를 들어 잔에 들이붓는 거야. 화들짝 놀라 “스님, 차가 넘칩니다” 했더니 스님이 그랬어. “맞네. 자네가 비우지 못하니 찻물이 넘치지. 나보고 인생을 가르쳐달라고? 비워야 가르쳐주지. 네가 차 있어서 말이 들어가질 못해.” 마음을 비워야 영혼이 들어갈 수 있다네.
희생. 진흙에 빠진 사람을 건져내려면 우선 자기 몸에 진 것이 묻을 것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로빈슨 크루소가 무인도에 와서 제일 놀라고 무서워했던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해변 백사장 위에 찍힌 사람의 발자국이었찌요. 무인도에서 제일 그리워했던 것이 사람이었는데 목마르게 찾던 것이 사람이었는데 막상 사람의 발자국을 발견했을 때 그는 호랑이를 만난 것보다, 사자를 만난 것보다 더 두려워했습니다. 야만인은 사람을 잡아먹고 문명인은 사람을 노예로 만들어 팝니다. 그래서 사람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 사람. 그렇지요. 무인도가 따로 있습니까. 천만 명이 사는 도시라 할지라도 사람의 발자국을 두려워하는 것. 그것이 바로 무인도인 것입니다.
주체성. 주어진 대로 사는 것은 인간이 아니야. 그건 짐승들이 그렇지. 짐승은 DNA 결정론이지만, DNA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게 인간이요.
과잉. 의사들이 말하기를,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 우리 몸이 결핍을 보충할 수 있도록 생체 시스템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당분이 없으면 스스로 만들어내죠. 그런데 과잉은 넘치는 것은 버리지를 못하는 것예요. 그러니까 우리 몸이 모자라는 부분을 채우도록 설계되어 있지, 넘치는 것을 버리는 장치는 없어요. 그래서 인간이 과잉이 되었을 때는 속수무책이 됩니다.
4월에 죽은 내 아우야. 너는 죽은 것이 아니라 걷고 있다. 너는 죽은 것이 아니라 쓰러진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다. 너는 죽은 것이 아니라 꽃처럼 다시 핀다.
등대의 외로움이 있을 때 항해하는 배의 외로움은 사라진다.
등대는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곳에 있기 때문에 비로소 그 사회성을 발휘할 수 있다.
백지의 공포, 그것은 자유를 직면했을 때의 공포다. 무한한 가능성 앞에서도 우리는 그것을 다 채우지 못한다. 한정되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어쩌면 ‘나와 나 사이’에 (이렇게) 거리가 없어서 나 자신의 모습을 좀처럼 들여다볼 수 없는 건지도 몰라. 어떤 대상을 관찰하려면 어느 정도 거리가 필요한 법이잖아.
거리를 측량하는 자는 여러 가지다. 인간과 인간의 거리는 정으로, 신과 인간의 거리는 믿음으로, 자연과 인간의, 거리는 문명으로 그리고 나라와 나라와의 거리는 외교로 측량된다. 사물 간의의 거리가 없어지면 인간 활동의 모든 것도 소멸되고 말 것이다.
생명자본주의 사회란 생명 가치가 보편적 문화로 반영되고 물질적인 가치가 아닌 공감과 기쁨이 상품이 되는 그런 사회예요. 산업자본, 금융자본을 지나 생명자본으로 자본주의의 속성이 바뀌면 남을 기쁘게 하는 직업, 남을 도와주는 일, 자기 취미를 살린 즐거운 일을 하면서 돈을 버는 사람들이 많아질 거예요. 수탈과 착취의 경제가 증여의 경제로 바뀌는 것이지.
인간이 만든 여러 가지 제도 중에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이유는 그것이 비록 결함이 많고 비능률적이며 또 완전하지는 않을지라도, 자기모순을 발견하고 끝없이 고쳐갈 수 있는 선택의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공포는 대상이 분명할 때 생기는 것이고 불안은 대상을 모를 때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에 불안을 주는 정치권력과는 투쟁하기도 힘들다. (...) 정치사에서는 총검의 공포정치와 색안경의 불안정치가 늘 교체하고 순환해왔다. 감독관의 시선 없이 수험생들이 각자 자신의 명예를 걸고 자기 감시를 하는 오너 시스템을 만들어줄 때 자유롭고 개방된 진정한 민주주의 꽃은 핀다.
생선이 부패한 것은 그 썩은 냄새로 알 수 있고,
인간이 부패한 것은 호화로운 생활의 향수 냄새로 알 수 있다.
인간을 부패하게 하는 세균은 권력과 돈 그리고 명성이다.
차 맛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구와 함께 마시느냐로 그 맛이 결정된다.
용도의 목적을 잃은 낡은 물건들은 다시 순수한 원소의 고향으로 돌아간다. 인간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길 위에서는 머무를 수가 없다. 길은 누구도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못한다.
‘길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다니기를 원하면 거기 길이 생긴다.’ 산골짜기로 가는 길이 있는가 하면 대해로, 혹은 사막으로 뻗어간 길이 있다.
그러다가 아주 인적이 끊어져버리고 만 길도 있다.
유적의 길, 폐허의 길, 그리하여 무너진 길에는 슬픈 물이 흐르기도 한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지만, 새로운 길은 얼마든지 있다.
이름을 안다는 것은 곧 그 대상을 파악하는 인식의 힘이다. 언어예술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어떠한 감정, 어떠한 행동, 어떠한 현상에 하나의 이름을 부여하는 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렴풋한 베일 속에 감춰진 온갖 사물들에 일단 그 이름이 붙으면 밝은 존재의 햇볕 속으로 나타나게 된다.
기계는 기능을 위해서 있지만 예술은 감동을 위해서 있습니다. 자연은 신비를 낳고, 기계는 기능을 낳고, 인간의 마음은 감동을 낳습니다.
부족한 인간이 마치 전능한 신처럼 지식과 지혜를 갖고 선악을 판단하려고 하는 그것이 바로 원죄예요. 원죄에서 벗어나는 사람은 없어요. 우리는 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고, 지혜를 가졌다고 생각하며, 남을 심판하려 하니까요.
가방과 보자기의 차이는 단일성과 다의성이라는 기능 면에서도 드러난다. 가방에 걸리는 동사는 ‘넣다’ 정도이지만 보자기는 ‘싸다’ ‘쓰다’ ‘두르다’ ‘덮다’ ‘씌우다’ ‘가리다’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도둑이 ‘쓰고’ 들어와서 ‘싸 가지고’ 가는 것이 보자기다. 그러다가 철조망에 긁혀 피가 흐르면 이번에는 그것을 끌러 ‘매’면 되는 것이다. 복면도 되고 가방도 되고 붕대도 된다. (...)
만약 모든 도구, 모든 시설이 가방이 아니라 보자기처럼 디자인되어 유무상통의 철학을 담게 된다면 앞으로의 인류 문명은 좀 더 인간적이고 좀 더 편하지 않겠는가. 보자기에는 탈근대화의 발상이 숨어 있다.
비움. 우리도 아이처럼 매일 자란다. 그러니 조금 전까지 통했던 상식과 지식들이 쓸모없는 것으로 변한다. 그렇게 우리를 괴롭히던 고정관념들, 집념이나 원한도 모두 버려야 한다. 지식도 영양분처럼 넘쳐날 때가 더 위험한 법이다. 샘물은 퍼 써야만 새 물이 고인다. 고여 있는 지식도 퍼내야 새로운 생각이 새살처럼 돋는다.
끝없이 지우고 쓰고 지우고 쓰고 죽을 때까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며 지우개 달린 연필처럼 끝없이 쓰고 지워라. 이렇게 해서 평생 동안 어떠한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쓰고 지우며 삶을 살아가는 과정이 물음과 느낌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해서,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해서 너무 서러워할 것은 없다. 그 옛날 니콜라스 교회의 크리스마스 이브처럼 사고가 때로는 창조의 계기가 되는 수도 있다. 이 우연과 사소한 기적이 있기 때문에 인생은 살아갈 만한 보람이 있는 것이다. 불행이 그리고 실패가 도리어 아름다운 멜로디를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인생인지도 모른다.
창조는 외로운 거야.
이제는 미쳐야狂 미치는及 세상이야.
창조란 투표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민주주의고 그것이 여론이고 그것이 모든 것을 정한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창조란 천 사람이 앉아 있어도 혼자 걸어갈 수 있는 것이고 천 사람이 가도 혼자 앉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누구나 어렸을 때는 질문을 한다. 새로운 것에 대한 지적 호기심을 갖는다. 하지만 점점 자라면서 더 이상 묻지 않는다. 더 이상 신기한 것이 없고, 어제 뜬 태양이 오늘도 뜬다는 것을 당연시하고, 그것을 의심하는 사람을 바보로 생각한다. 하지만 기억하라. 의심 많은 바보가 세상을 바꾼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떠돌이는 기분 나쁜 말이지만,
유목민들에게 떠돌이는 새로운 것을 의미해.
창조와 파괴는 동전의 양면 같은 거야. 창조를 하려면 먼저 파괴를 해야 돼.
개미들은 먹이를 찾을 때 우왕좌왕 동서남북으로 헤매고 다니지요. 일정한 목표도 뚜렷한 규칙도 없이 그냥 방황합니다. 하지만 일단 먹이를 찾으면 곧바로 자기 집으로 돌아옵니다. 일직선으로 먹이를 들고.
방황을 두려워하지 말아요. 방황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찾고 있다는 것. 그 어지러운 곡선들은 먹이를 찾는 상상력의 흔적. 어디엔가 숨어 있을 보물을 발견하려는 탐색의 열정이지요.
사고思考. 관심, 관찰, 그리고 관계. 인문학을 문사철이라고 하지만 모든 지적 프로세스는 인문학이든 자연과학이든 종교든 정치든, 바로 그 세 가지야.
‘어쨌든’ 대신에 ‘왜’라는 말에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항상 의문을 갖는 생활, 의문이 중시되는 행동을 하면서 살아가는 습관이다.
지성은 ‘회의의 씨앗’이라고도 한다. 맹목이야말로 지성의 적이며 지성의 상장喪章이다. ‘왜?’ 행동하기 이전에, 복종하기 이전에, 동의하기 이전에, ‘왜’라는 그 좁은 문을 통과하기를 주저해서는 안 될 것이다.
가능성. 이미 만들어놓은 것과 만들어가는 것은 아주 큰 차이가 있지요. 당장 눈에 보이지 않지만 창조하고 생산할 수 있는 가능성에 투자하는 것이 미래를 위해 훨씬 더 값진 일이 될 수 있다.
가르칠 것이 있다는 것은 부족한 것이 있다는 것이고, 부족함이 있다는 것은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거기에서 개체라는 것이 생기고 창조력이 움틉니다.
시험을 치르는 습관 속에서 너희들은 ‘물음’의 의미를 상실해 가고 있다. 중요한 것은 오직 ‘해답’뿐이라고 생각한다. 알고 싶다는 욕망보다는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승리에의 욕망이 앞서게 된다. 그러나 아들이여, 너희들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해답보다는 물음이 있는 곳에 새로운 삶이, 새로운 지식이 그리고 새로운 운명의 문이 열린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끝없이 의심하고 묻는 사람은 전통을 그냥 답습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전통 속에서 지식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된다. 그러면 여러분은 일 초마다 새로워지며 어제와 또 다른 오늘의 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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