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작품은 현재까지의 경험, 관찰, 상상력을 고정시켜 미래에 다른 사람이 그것을 보게 되었을 때 다시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것.
 
 
[본문발췌]
 
움베르토 에코 
 
창조적으로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식인이랍니다. 어떤 농부가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새로운 접목 기술로 새로운 종류의 사과를 생산해낸다면 그 순간 지적인 행위를 생산하는 것이지요. 반면에 하이데거에 대한 똑같은 수업만 평생 되풀이하는 사람은 딱히 지식인이라고 하기 어렵지요. 비판적인 창조성 - 우리가 현재 하고 있는 것을 비판하거나 그 일을 할 수 있는 더 나은 방법을 만들어내는 것 - 만이 지식인의 역할의 유일한 징표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  쓴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글쓰기는 사랑의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주기 위해서 글을 쓰는 것이지요. 무엇인가 소통하기 위해서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감정을 나누기 위해서요. 작품이 얼마나 오래 살아남는가의 문제는 소설가나 시인만이 아니라 모든 작가들에게 근본적인 문제랍니다. 진실을 말하자면, 철학자는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론을 납득시키려고 책을 씁니다. 그리고 앞으로 3000년 동안 사람들이 자신의 글을 계속 읽기를 바라지요. 자식들이 당신보다 오래 살아남기를 바라고, 손자가 있다면 손자가 자식보다 오래 살기를 바라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사람들은 지속성의 느낌을 바란답니다.
 
 

오르한 파묵
 
소설가들은 공동체에 속하지 않고 공동체의 기본적인 본능을 공유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직접 체험하고 있는 문화와는 다른 문화를 가지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사람입니다.
 
우선 전략에서 시작한 뒤, 그것이 갖는 문학적 도덕적 진지함을 믿으면 결국 그것은 진지한 문학적 발명이 됩니다. 일종의 문학적인 언명이 되는 것이지요.
 
 

무라카미 하루키
 
제 일은 사람들과 세계를 관찰하는 것이지 판단 내리는 게 아닙니다. 저는 소위 결론을 내리는 것과는 언제나 거리를 두고 싶어요. 모든 것을 세상의 모든 가능성에 활짝 열어두고 싶거든요.
 
기억은 인간의 가장 중요한 재산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억은 일종의 연료 역할을 하지요. 타오르면서 인간을 따뜻하게 해주거든요. 제 기억은 일종의 궤짝과 같아요. 그 궤짝에는 수없이 많은 서랍이 달려 있답니다. 어떤 서랍을 열면 고베에서 보낸 소년 시절의 광경이 떠올라요. 공기의 냄새도 맡을 수 있고, 땅도 만질 수 있고, 초록색 나무도 볼 수 있답니다. 그게 제가 책을 쓰고 싶어하는 이유지요.
 
 

폴 오스터
 
글을 쓰는 노력은 똑같습니다. 정확한 문장을 쓰기 위해 들이는 노력도 똑같습니다. 그렇지만 상상력으로 쓰는 작품은 논픽션 작품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자유가 있고 훨씬 더 많이 조작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자유는 종종 상당한 두려움을 주기도 합니다. 다음에 무엇이 나올까? 내가 쓰고 있는 문장이 절벽의 가장자리에서 나를 떨어뜨리지 않을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자서전적인 작품에서는 미리 이야기를 알 수 있어서, 작가의 주요한 의무는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글 쓰는 것이 쉬워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고독의 발명>의 첫 부분에 사용된 제사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저는 헤라클리투스가 쓴 문장 하나를 인용하였습니다. 이것은 가이 데븐포트의 비정통적이지만 상당히 우아한 번역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진리를 찾아 나설 때 예상치 못한 일들에 대비하라, 왜냐하면 진리를 찾는 것은 어려우며, 그것을 찾았을 때 당혹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글쓰기는 글쓰기입니다.
 
예술 비평가인 로버트 휴즈가 명명한 것처럼 '오락 산업'이란 괴물이지요. 요즘 미디어는 유명인, 뜬소문, 스캔들 외에는 별로 보여주는 게 없잖아요. 또, 우리가 우리 자신을 텔레비전과 영화에서 묘사하는 방식이 너무도 왜곡되거나 변조되어서 실제로 사는 삶은 잊혀버렸어요.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라곤 충격적인 폭력물과 얼간이 같은 도피주의자의 환상물뿐이며, 뒤에 숨어서 이 모든 것을 몰아가는 힘은 바로 돈이지요. 사람들은 얼간이처럼 다루어지고요. 사람들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 필요하지 않은 물건들을 원하도록 조작된 소비자이며 잘 속아 넘어가는 바보에 불과하지요. 이것을 자본주의의 승리라 부를 수도 있겠지요. 또는 자유시장경제라고 부를 수도 있겠고요.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든지 간에, 그 안에는 실제적인 미국인의 삶을 재현할 공간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요.
 
인생은 너무도 짧고 너무도 연약하고 너무도 알 수 없지요. 결국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정말로 사랑하는 걸까요? 정말로 몇 사람뿐이겠지요. 몇 명 되지 않을 거예요. 이 사람들이 대부분 죽고 나면 당신의 내적 세계의 지도는 변할 겁니다. 제 친구 조지 오펜은 늙는 것에 대해 제게 "어린아이가 늙어간다는 것은 얼마나 기이한 일인가."라고 말한 적이 있지요. 늙음을 설명한 것 중에서 오펜의 설명이 제가 들어보았던 것 중에서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언 매큐언
아마도 우리는 공포심을 상상력이라는 안전한 범위 내에서 끝까지 시험해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일종의 희망을 띤 액막이의 형식으로.
 
 

밀란 쿤테라
 
비본질적인 부분을 완전히 제거하기 (현대사회에서 구조적인 명증성을 잃지 않고도 실존의 복잡함을 잡아내기 위하여)

독특하게 소설적인 에세이(당연한 메시지를 전달한다고 주장하기보다는 가설적이고 장난스럽고 아이러니한 특성을 간직하는)
 
소설 전체에 일관성을 부여해주는 것은 주제와 변주들의 통일성입니다. 소설은 가상의 등장인물을 통해 본 실존에 대한 성찰입니다. 소설의 형식에는 무제한의 자유가 있지요. 소설이 역사를 볼 때 소설은 자신의 무한한 가능성을 어떻게 활용하면 될지 알지 못했답니다. 자신의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지요.
 
 

레이먼드 카버
 
자기 삶의 이야기를 소설로 바꾸려면 아주 솜씨가 좋아야 해요. 엄청나게 대담해야 하고, 뛰어난 기술과 풍부한 상상력, 그리고 기꺼이 자신에 관해 모든 걸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젊었을 때는 잘 아는 것에 대해서 쓰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듣습니다. 자신의 비밀보다 더 잘 아는 게 뭐가 있겠어요? 하지만 특별한 종류의 작가나 아주 띄어난 재능을 지닌 작가가 아니라면, 계속해서 자기 삶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건 위험합니다. 자신의 소설에 지나치게 자서전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많은 작가들에게 큰 위험, 또는 적어도 큰 유혹이 됩니다. 약간의 자서전적 요소에다 많은 상상력을 가미하는 것이 최선이지요.
 
어떤 삶에서는 사람들이 성공을 합니다. 그렇게 성공하는 것은 멋지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다른 삶에서는 사람들이 하려고 애쓰는 일, 가장 하고자 원하는 일, 삶을 지탱하는 크고 작은 일에 성공하지 못하지요. 저의 직간접적인 경험은 대부분 후자에 가깝답니다. 제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행동이 뭔가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이기를 바란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 지점에 도달해 있지요. 어떤 일을 열심히 해봐야 의미가 없어요. 한때 중요하다고 생각했거나 그 일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목숨까지 걸 수 있다고 생각한 일들이 한 푼의 가치도 없다는 걸 알게 되지요. 삶 자체에 불편함을 느끼게 되고 삶이 무너져 내리는 걸 보게 됩니다. 그들은 사태를 바로잡고 싶어하지만 그럴 능력이 없어요. 대개는 그들도 그런 상황을 잘 알고 있어서 그냥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뿐이지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저널리즘에서는 기사가 가짜라는 한 가지 사실만이 기사 전체에 편견을 갖게 만듭니다. 대조적으로 소설에서는 이야기가 진짜라는 한 가지 사실이 작품 전체를 정당화해줍니다. 그것이 저널리즘과 소설의 유일한 차이이며, 그것은 작가가 얼마나 몰두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소설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야기가 진짜라고 믿게 만들 수 있는 한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습니다.
 
영감의 가장 큰 근원은 인생 자체이며 꿈은 인생이란 격류의 아주 작은 부분일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 글에서 진실한 것은 제가 꿈의 여러 가지 개념과 해석에 매우 관심이 많다는 것입니다. 저는 일반적으로 꿈을 삶의 부분으로 보지만, 현실은 훨씬 풍요롭습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창조적인 작가로서 예술의 역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왜 사실 그 자체보다는 사실의 재현을 선택하셨나요?
일어난 일로부터,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그리고 알고 있거나 알 수 없는 모든 것으로부터, 재현이 아니라 창작을 통해 살아 있는 어떤 것보다 더 진실한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지요. 당신은 그것을 살아 있게 할 수있고, 만일 당신이 충분히 잘할 수 있다면 그것에 영원성을 부여할수도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글을 쓰는 이유이고 우리가 아는 한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런 모든 이유가 있다면, 그런 이유는 어떤 것일까요?
 
 

윌리엄 포크너
 
작가의 의무는 최선을 다해 최고의 작품을 쓰는 것입니다.
 
작가는 경험, 관찰, 상상력이라는 세 가지를 필요로 합니다. 이 중의 두가지, 또는 한가지가 다른 것의 결여를 보충해줄 수 있습니다. 제게 이야기는 대개 한 가지 생각이나 기억이나 정신적인 그림에서 시작합니다.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왜 어떤 일이 일어났으며 다음에 무슨 일이 발생하게 되었는가를 설명하게 되는 지점에 이르기까지 발전시키는 것이지요. 작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감동적인 방식으로, 그럴듯한 감동적인 상황에서 그럴듯한 사람들을 만들려고 노력하지요.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환경을 자신의 수단의 하나로 분명히 사용해야 합니다. 음악은 인간의 경험과 역사에서 가장 먼저 등장했기 때문에 표현하기 가장 쉬운 수단은 음악일 것이라고 말하고 싶네요. 그러나 제가 가진 재능은 말을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순수한 음악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것을 말로 서투르게나마 표현하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즉, 음악이 더 훌륭하고 단순하게 표현할 수 있으나, 제가 듣는 것보다 읽는 것을 선호하는 것처럼 말을 사용하는 것을 선호합니다. 저는 소리보다 정적을 더 좋아하는데, 말로 만들어진 이미지는 정적 가운데서 만들어집니다. 즉, 산문의 천둥과 음악은 정적 가운데서 발생합니다.

사람들은 오직 삶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그들의 시간을 단지 살아 있는 데 써야 합니다. 삶은 움직이며, 움직임은 사람들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인 야망, 권력, 쾌락과 같은 것에 관심을 둡니다. 그는 조만간 선과 악 사이에서 선택을 받도록 강요받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일도 계속 살아가기 위해서 그 자신으로부터 도덕적 양심이 선택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도덕적 양심은 신들로부터 꿈꿀 권리를 얻기 위해서 신들로부터 받아들여야할 저주입니다.
 
모든 예술가의 목적은 인위적인 방법으로 삶이라는 움직임을 잡아서 다시 고정시켜, 수백 년 후에 이방인이 그것을 보게 되었을 때 그것이 삶이기 때문에 다시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에게 유일하게 가능한 불멸은 언제나 살아 움직여서 불멸인 어떤 것을 뒤에 남겨놓는 것뿐입니다. 그것은 항상 움직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술가들이 언제가는 통과하게 될 최후이자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죽음이라는 망각의 벽에 "킬로이가 여기 왔었다."라고 적어놓는 방식입니다.
 
 

E.M.포스터
 
어떤 책에서도 제가 좋아하는 사람, 제가 생각하는 저란 사람, 저를 짜증나게 하는 사람 그 이상을 모방하진 않습니다. 이렇게 하기 때문에 저 또한 진짜 소설가라고 볼 수 없는 수많은 작가에 속하게 되겠지요. 이런 작가들은 이 세 가지 범주를 갖고서 어떻게든 해보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이런 작가들에겐 다양한 삶을 관찰하고 그것을 냉정하게 묘사할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던 작가는 몇 명 되지 않습니다. 톨스토이가 그중의 하나이지요.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738744

반응형
Posted by 소요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