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 채움, 가속화되는 정보화 시대에 건강한 삶을 위해서는 부족, 비움, 느림의 균형이 필요하다.
[본문발췌]
삶의 본질적인 의미 중 하나는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자기목적적 행동에 있다.
삶의 의미는 지속 가능하고 중립적이며 자유롭다. 삶의 의미는 관계로 이루어진다.
반드시 자신의 생물학적 자손을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녀와의 관계를 통해 경험하는 무조건적인 사랑과 배려, 겸손, 자기 확신은 더 없이 소중한 삶의 덕목이다. 아이들과의 관계를 통해 어른은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삐걱거리는 경첩으로 현재를 인식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자녀는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삶은 어떤지에 대해 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대상이다.
온전한 인간으로 성장하려면 권리와 의무가 가득 찬 친밀한 관계가 필요하다. 배우자, 자녀, 부모 등 다른 사람과 함께 살 때는 항상 자기 뜻대로 할 수 없다. 양보하고 타협해야 한다.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를 버릴 필요가 없는 사람은 용서와 겸손, 감사의 능력이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없다.
“내 안에는 서로 우위를 차지하려고 싸우는 두 마리 늑대가 있지. 하나는 악이란다. 악한 늑대는 분노이자 시기이며 슬픔, 후회, 탐욕, 오만, 자기 연민, 죄책감, 원한, 열등감, 거짓말, 거짓 자부심, 이기심이지. 두 번째는 긍정적인 감정이란다. 이 늑대는 기쁨, 평화, 사랑, 희망, 조화, 겸손, 선함, 친절, 공감, 관대함, 진실, 연민, 신뢰지. 이 둘은 죽을 때까지 싸움을 하는데 그런 싸움이 네 안에서도 벌어지고 있단다.” 아이가 묻는다. “그래서 누가 이겨요?” 노인은 답한다. “그건 내가 누구에게 먹이를 주느냐에 달려 있지.”
내가 탐색한 모든 관계는 동경과 갈망, 결핍 없이는 불가능하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각기 차이가 있지만,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 그 차이는 시야에서 사라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무언가가 빠진 것이 생기면 감정이 고조되면서 관계가 불완전해진다.
항상 구할 수 있는 것에는 가치가 없다. 오늘날 전 세계 중산층과 상류층이 직면한 큰 문제는 부족이 아니라 풍요다. 자세히 살피기 전까지는 드러나지 않겠지만 결국 누군가 발견하게 된다. 우린 모든 것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우리가 가진 전부라는 것을. 결핍은 존재의 기본 조건이다. 얼어 죽기 직전인 사람에게는 몸 안에 단 하나의 소원을 품을 공간만이 남아 있다.
갈증을 모르는 사람은 물의 가치를 모른다. 결핍만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무엇이든 감사할 수 있으려면 갈망할 수 있는 기회가 필요하다.
현재 우리에게는 지루함보다 권태가 더 널리 퍼져 있다. 공백을 언제나 어떤 종류의 소비로든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결핍과 갈망을 즐길 수 있다면, 그것은 현대에 무감각한 좀비가 되지 않기 위한 첫 번째 단계가 될 것이다.
물질적으로 다 가진 듯 보이지만 그것 빼고는 가진 게 없는 이 사회에서, 삶에 힘을 부여하는 것은 전기차보다 더 심오하고 OTT 서비스보다 더 본질적이고 쇼핑보다 더 도전적인 그 무엇이다. 나는 이것을 꿈 혹은 희망이라고 부르고 싶다. 다만 이렇게 삶에서 무언가를 추구하는 것이 반드시 목표 지향적일 필요는 없다. 그것은 도리어 자기목적적인 활동일 때가 많다. 가족과 친구, 반려동물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거나, 강렬한 음악을 듣거나, 따뜻한 여름날 오후에 산책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런 활동으로 사람들과 혹은 자기 자신과 더 가까워질 수 있다.
내 존재가 유한하다는 인식에서 삶은 무한하지 않으며 따라서 방향성이 필요하다는 사유의 틀이 생긴다. 보르헤스의 단편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 정원> 속 두 갈래 길에 서 있는 것처럼 느껴져도 말이다. 어느 길을 선택하든 모든 선택에는 각각의 대안이 존재하므로 특정한 길이 옳다고 말할 수 없다. 선택이라는 행위에 대한 압박과 스트레스는 어느 정도 삶에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게 부여되는 고통이다. 치명적인 병에 걸린 사람의 삶에서 선택이랄 게 없다. 삶의 유일한 바람은 건강이 좋아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빈민에게 지금의 삶이 적극적인 선택의 결과라고 한다면 그들은 매우 기분이 상할 것이다. 잘못된 결정에 대해 좌절감을 느끼려면, 그 결정의 대안이 현실적인 동시에 매혹적이어야 한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소원이 있지만 병든 사람에게는 오로지 하나의 소원이 있고, 자유인에게는 여러 가지 소원이 있지만 죄수는 하나의 소원에 만족한다. 바라던 모든 것을 가진 자는 순간 가난한 자가 되어버린다.
결핍은 삶의 방향성과 집중도에 필요한 요소이지만, 결핍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삶에 윤활유가 되는 마찰과 저항을 야기한다는 점일 것이다. 마찰과 저항으로 인해 당신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삶에 전력을 다하게 되고, 극도로 어렵지만 반드시 달성해야 할 과제가 있다고 깨닫는다. 이러한 저항은 결국 성취로 이어진다. 희망이 없으면 저항도 있을 수 있다. 희망은 꿈에서 자란다.
꿈은 기대와 추억, 두려움과 희망이 뒤얽힌 증류수다.
미하일 엔데, <끝없는 이야기>.
미하일 엔데는 인간 세상이 아무것도 아닌,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사라지지 않으려면 꿈과 희망 그리고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꿈속 세상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 아무도 우리의 꿈을 빼앗을 수 없다. 꿈의 가능성은 삶을 견디게 해준다. 많은 꿈이 실현될 수 없고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시간은 내 내부와 외부에서 만들어지며, 그렇기 때문에 맹렬한 속도를 피하고 꿈과 희망을 품을 수 있는 틈새를 만들 수 있다. 가속화되는 정보화 시대에는 자기 이해가 결핍된다. 다양한 소비로 시간의 틈새를 메워버리기 때문이다. 몽테뉴는 38세가 되던 해 은퇴하고 왼딴 탑에 칩거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 삶의 속도를 늦춰야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에세이를 계속 쓸 수 없었을 것이다.
꿈과 희망은 비현실적일지라도 결국엔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낙관주의에 불을 붙인다. 상상력을 위한 트램펄린인 꿈과 희망은 시야를 확장시켜서 우주 합창단에서 노래하는 우리의 능력, 지금 이 순간의 의미 그리고 먼 미래와의 관계 속에서 삶을 이끄는 잠재력을 깨닫게 해준다.
극복될 수 있는 결핍은 삶에 의미를 불어넣는다. 숨 가쁜 우리 시대에 가장 결핍된 것이 있다면 바로 느림일 것이다. 나 자신을 알아가거나 타인을 사랑하고 배려하기 위해서만 느림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느림 없이는 상상력도 상공으로 이륙할 수 없다.
순환적 시간과 선형적 시간의 차이는 쉽게 눈에 뛴다. 순환적 시간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사건들이 경건하게 반복될 수 있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심지어 아기가 다시 태어난 조상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레비스트로스가 말한 ‘차가운 사회’(역사의 영향을 최대한 제거하고 항상성을 유지하려는 사회. 그 반대는 역사적 시간 개념을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아 변화에 가치를 두는 뜨거운 사회다)가 변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계획적이지 않고 종종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점진적일 뿐이다. 자본주의 국가의 불안정한 힘은 눈에 띄는 변화를 가져왔고, 차가운 사회는 이상향으로만 존재할 뿐 현실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반면 선형적 시간은 발전의 시간, 시계, 달력, 증기 기관의 시간이다. 이 시간은 현대의 개념에 속한다. 미래 지향적인 선형적 시간은 성장과 진보라는 이데올로기와 샴쌍둥이처럼 붙어 있다. 진보의 내러티브는 점진적인 개선을 약속한다. 최근 수십 년 동안 이 논리가 야기한 문제점이 본격적으로 드러났다. 지속적인 성장은 생태학적 재앙으로 가는 길이다. 난개발의 결과를 누린 주체는 부모와 조부모, 증조부모였고 그 대가를 치르고 설거지를 해야 하는 것은 미래 세대다.
과거를 지운 채 미래에 그림자를 드리우면서 시간을 오염시키는 것은 현재주의(과거는 지났고 미래는 오지 않았으니 현재만이 중요하다는 시간 개념)의 특징이다. 그러나 현재의 시간에 치중한 나머지 지금 여기가 가득 차버리면, 미래뿐 아니라 과거를 위한 틈이 사라진다. 순간의 폭압은 이럴 때 발생한다.
왜 많은 사람들이 즉각적인 만족의 강박에 사로잡힐까? 매사 저항이 가장 적은 길을 선택한다는 인간의 약점 때문일 것이다. 이에 더하여 인간이 자본주의로 인해 라곰(스웨덴어로 현재에 만족하는 삶의 태도를 이르는 말)이나 삶의 질이 아닌 ‘지금 여기’ ‘더 빨리, 더 높이, 더 강하게’라는 버튼을 누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길고 느린 시간의 개념을 체화하려면 운동선수가 새벽 여섯 시에 일어나 아침 식사 전 훈련을 하는 것처럼, 자신을 몰아붙이고 단련할 필요가 있다. 느림이 없으면 삶은 숨이 막히고, 만족감을 주지 못하고, 머리와 꼬리도 구분할 수 없이 급해 꿰매진 조각이 되고만다. 나무는 뿌리에서 위로만 자라는 것이 아니다. 추운 겨울을 나는 나무는 천천히 그리고 오랫동안 생존에 필요한 휴식을 취하며 위쪽만큼이나 아래쪽으로도 자란다.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의 일부가 되는 건 가치 있는 일이다. 긴 삶의 여정에서 작은 톱니바퀴나 먼지 한 줌이 되는 것만으로 의미 있는 삶을 살기에 충분하다. 창조하는 일보다 파괴하는 일이 더 많이 일어나고 있는 현재 시대에, 우리의 목표는 당장의 충동과 오만 그리고 눈부시지만 뒤틀리고 역설적인 성공을 물리치는 것이어야 한다.
느림은 규칙적으로 사용하지 않으면 시들어버리는 삶의 근육이다. 삶의 두께와 풍요로움은 당신이 묶을 수 있는 실의 질과 양에 달려 있다. 시선을 더 높은 위치로 올린다고해서 가깝고 친밀한 것들이 상실되지 않으니 걱정 마시길.
암 전문의가 말기 환자에게 하는 전형적인 조언은 “여기, 이 순간을 살라”는 것이다. 언제가 너무 늦어버린 순간이 될지 알 수 없으므로 완벽한 때를 기다리며 일을 미루어서는 안 된다. 지금의 긴 시간도 순간으로 쪼개질 수 있다. 때문에 당신은 모두와 함께 지금 여기에서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모든 시간은 지금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아무리 짧은 순간일지라도 충분히 의미 있을 수 있으며, 순간을 통해 삶에 만족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식으로 접하게 되는 우연한 놀라움 덕분에 내 삶은 더 풍요로워졌다. 이런 지적인 놀라움을 겪다 보면 답을 찾는 것보다 올바른 질문을 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세상은 아무도 묻지 않았던 질문에 대한 답으로 가득하다.
놀라움과 호기심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완전하게 통제되고 엄격하게 계획된 삶을 고집하는 사람은 ‘놀랄 권리’를 포기하는 셈이다. 새롭고 예기치 못한 것을 경험하는 놀라움을 버리는 것이다.
인공지능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자기 멋대로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아니라 호기심이 없다는 것이다. 인공지능은 어떤 것도 경이롭게 여기지 않는다. 인공지능은 담배도 피우지 않고 술도 마시지 않으며, 밤하늘의 무한한 별을 바라보면서 위엄에 눌려 스스로 작은 먼지가 된 듯한 느낌을 받지도 않는다. 그들은 농담에도 웃지 않으며 실제 삶을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죽고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대한 철학적 질문처럼 쉽사리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을 할 수 없다.
새로운 문을 열 때 마주하는 놀라움은 느닷없이 찾아오며 우리는 이때 감정적이고 본능적으로 반응한다. 지혜의 총량을 증가시키는 것은 이런 작은 깨달음에서 비롯된다. 조숙한 스무 살 젊은이보다 사려 깊은 칠순 노인의 말을 듣는 것이 더 보람 있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경험으로부터 의미 있는 것들을 배울 수 있는 법이다.
순간, 장기적인 시간, 영원의 시간은 우리의 실이 짜여 있는 세 가지 좌표계다. 비슷한 통찰이 공간에도 적용된다. 친밀한 공간과 고결한 공간, 작은 여기의, 공간과 큰 저곳의 공간 사이의 변화가 삶의 삶의 관점과 방향을 제시한다. 삶은 작은 개인부터 내가 아끼는 사람들 그리고 앞으로 만나게 될 혹은 만나지 못할 모든 사람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궁극적으로 선하고 의미 있는 삶은 올바른 균형을 찾는 데 달려 있다.
인생의 의미는 행복과 다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에우다이모니아(그리스어로 행복, 잘 사는 것을 뜻한다)는 단순히 삶을 즐기는 것보다 더 충만하고, 더 깊고, 더 풍요롭고, 궁극적으로 더 진지한 개념이다. 행복보다는 미덕에 가까운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의미 있는 삶이 반드시 행복한 삶일 필요는 없다. 행복한 삶이 때로는 방향성 없고 관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하며 공허한 삶일 수도 있으니까.
판단과 결정의 근거가 될 경험과 생각이 많을수록 균형을 이루기가 쉬워진다. 극단주의는 미성숙한 사람들의 생각이고 독단주의는 불안의 한 증상이다.
언제나 두 가지 설명이 한 가지 설명보다 나은 법이다.
사람들을 연결하는 네트워크가 눈에 보이고 실체가 생길 때, 갈등을 완화하고 세상을 채우며 의미를 더한다.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지면 지루할 틈이 없다. 내 뇌 안의 더 많은 시냅스를 활성화할수록 더 많은 연결을 촉진할 수 있다.
나는 균형의 기술을 통해 세상이라는 바다에서 내 페이스대로 헤엄칠 수 있다.
불필요하고 중요하지 않은 것을 무시할 수 있는 능력은 균형을 찾는 데 매우 중요하다.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는 특히 그렇다.
놓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즉 FOMO(fear of missing out)는 유행성 문명병이 되었다. 이 병은 집중력을 약화시키고 판단 능력을 둔화시키며 진보나 안정이 아니라 퇴행을 불러온다. 윤리가 중요한 의제였던 후기 고대 사회에서 삶에 중요치 않은 것들을 뜻하는 아디아포라라는 용어가 있었다. 기독교인과 스토아학파에게 이 단어는 삶에 진지한 사람이라면 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나타냈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사사로운 것들에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오래도록 몰두하는 걸까?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4180832
'4.읽고쓰기(reading & essay)'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이어령의 말 (1) | 2026.05.15 |
|---|---|
| Man's search for meaning -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0) | 2026.01.23 |
| 오늘도 여행처럼 살기로 했다 - 박재신(시니플) (1) | 2026.01.15 |
| 인도방랑 - 후지와라 신야 (1) | 2025.11.22 |
| 그늘에 대하여 - 다니자키 준이치로 (1) | 2025.11.15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