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간을 측정하고 공유하며 활용하는 능력은 다양한 편익과 발전을 제공하고 권력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본문 발췌]
시간은 절대적인 진실이 아니라 규약이다. - 푸앵카레
우리는 오랫동안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를 향해 똑같은 빠르기로 똑딱똑딱 흘러간다고 믿어왔다. 온 우주에서 시간이 똑같이 흘러가기 때문에 이곳의 시간과 저곳의 시간이 다르지 않다. 시간에 대한 이러한 관념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거의 보편적으로 널리 퍼져 있다. 이 보편적인 믿음이 옳지 않음을 주장하는 것이 바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다. 이곳의 시간과 저곳의 시간이 같은지 아니면 다른지 알기 위해서는 직접 그 시간들을 비교해봐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직접 시계를 가지고 시간을 관측해야 한다. 또 그렇게 시계를 바라보는 관측자가 움직이고 있을 때의 시간과 멈춰 있을 때의 시간이 같다는 보장도 없다. 그런데 시간을 측정하는 시계의 기준을 빛을 이용하여 정하고 나면, 이곳의 시간과 저곳의 시간이 다를 뿐 아니라 움직이는 관측자이 동시와 멈춰 있는 관측자의 동시가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더 놀랍게도 그렇게 상식과 직관에서 벗어나는 주장이 정교한 실험을 통해 확인되었다.
갤리슨은 중세의 연금술과 점성술 사이의 관계(점성술은 하늘을 올려다본 연금술이며, 연금술은 땅을 내려다본 점성술)를 빗대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자기적으로 조절되는 시계 네트워크 속에서 우리는 제국과 형이상학과 시민사회의 이미지를 올려다본다. 시간과 공간과 동시성에 관한 아인슈타인과 푸앵카레의 절차적 개념의 철학 속에서 우리는 베른 특허국과 파리 경도국을 통해 지나는 전선과 기어와 펄스를 내려다본다. 우리는 기계속에서 형이상학을 찾아내며 형이상학 속에서 기계를 찾아낸다."
갤리슨은 시계와 지도로 은유되는 아인슈타인과 푸앵카레의 전기로 맞춘 시간을 통해 열차와 배와 전신이라는 광범위한 근대 기술의 하부구조와 실용주의와 규약에 의해 정의된 시간이 만나는 모습을 멋지게 그려낸다. 기술적인 시간과 형이상학적인 시간과 철학적인 시간이 아인슈타인과 푸앵카레의 전기적으로 맞추어진 시계에서 만난 것이다. 시간 맞추기는 지식과 힘이 만나는 근대의 교차점에 우뚝 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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