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속에 잠재한 무한, 규칙을 벗어난 우연, 혼돈 가운데 보이는 규칙 등 세상은 모순 속에서 균형을 유지한다.
우리는 시간 속에서 반복되는 시작, 그리고 추억과 계획을 통해 삶의 시간속을 달려간다.
[본문발췌]
"신은 무(無)를 가지고 이 세상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 무는 만물 속에서 배어나온다." - 폴 발레리
삶이란 시간 속에서 벌어지는 무한한 시작들의 연속에 불과하다. 그리고, 두번째의, 세번째의, 백번째의 새로운 시작과 억번째의 새로운 시작은 최초의 유일한 시작을, 만물이 무에서 빠져나왔던 바로 그 태초의 시작을 가리킨다.
죽는다는 것은 우선 시간과의 단절이다. 시간은 공간 속에서 그리고 움직임을 통해서만 나타난다.
시간은 균일하지 않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두 부분은 어마어마해서, 이를테면 무한하거나, 혹은 적어도 한정할 수 없다. 과거와 미래가 바로 그것이다. 세번째는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자그마하다. 현재가 그것이다. 게다가 이 세 부분 중 어느 것도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까지 주장할 수도 있다. 과거는, 그것이 더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고,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가하면, 현재는, 그것이 찰나적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의 영구성에도 불구하고, 사라지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그렇다. 시간의 모든 것이 이상하다.
물은 너무도 유연하고, 너무도 유동적이고, 너무도 소멸과 비존재에 가깝기 때문에 관념이나 감정과 흡사하다. 물은 또한 시간과도 흡사해서, 그림자와 모래같이 오랫동아 시간을 측정하는 데 쓰였다. 해시계, 모래시계, 물시계는 시간과, 만져저서는 알 수 없는 물질인 그림자 사이에 다리를 놓아 준다. 그림자보다 견고하고 모래보다 유연한 물은 냄새도, 맛도, 색도, 형체도 없다. 물은 크기도 없다. 물에는 풍미도 없다. 물은 언제나 자신이 현재 처해 있는 곳에서 다른 곳으로 가려는 경향이 있다. 물은 이미 무를 향한 장도에 오른 물질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물을 무와 가장 가까운 물질로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림자가 그렇고, 그뿐만 아니라, 감히 말한다면, 공기도 물보다 더 부재하기 때문이다.
법은 만물 위에 군림한다. 시간은 법의 신비롭고도 적극적인 비밀요원이다. 필연성은 법의 행동 강령이다. 우연은 법의 광대이다. 원인과 결과의 게임은 법의 도구이고 법의 열쇠이다. 결정론은 약간 사팔뜨기에, 늘 정신을 못차리고, 땀을 흘리며, 숨을 헐떡이고, 바둑판 무늬 손수건을 들고 선풍기 아래로 이마를 들이미는 중개인이다. 그가 필요할 때면, 그에게 위급 전화를 걸거나 그에게 휘파람을 분다. 그의 봉사가 필요치 않을 때면, 무능하거나 권력의 남용을 들어 그를 집으로 돌려 보낸다. 시간과 만물 속에 존재한다는 것은 법에 순종하며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림자밖에는 볼 수 없는 숨은 법에게 순종하는 것이다.
살아온 단계마다, 인간은 적어도 그들로서는 열쇠를 지니지 못한 만물의 열쇠를 발견했다고 확신하곤 했다. 아인슈타인도 한 시대를 풍미하고 간 지 3천 년이 지나면, 아인슈타인 시대의 프톨레마이우스만큼이나 황당하고도 한계가 있는 자가 되는 것이 숙명이다. 정의처럼, 그리고 선처럼, 진리는 시간에 속해 있지 않다. 시간에 속한 것은, 결국 아무런 소용도 없는 짓이긴 하나 필연적으로, 진리를 추구하게 되어 있다.
시간은 사유가 나타나기 이전에 이미 만물 속에 흐르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세 위격과 함께, 또 모순되게도 공간과 운동에 얽매여 있다는 사실과 더불어, 그리고 너무나 형이상학적인 외양과 함께, 시간은 인간의 정신과 인간의 사유와 연관된 부분을 지니고 있다. 어떻게 이를 부인한단 말인가? 오로지 인간이 추억이고, 행동이고, 계획이기 때문에, 과거가 있고, 현재가 있고, 미래가 있는 것이다. 인간의 사유는 시간 속에서 펼쳐지고, 시간은 오직 인간의 사유 속에서만 군림한다. 사유와 시간은 일종의 존재의 비밀 요원이라는 이유만으로, 만물 속에서 그들끼리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사유와 시간은 둘다 존재에게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자, 동시에 존재를 가리는 불투명한 베일이다. 사유와 시간은 드러내는 것이자, 감추는 것이다.
모든 지식과 철학의 근저에 있는 놀람과도 같이, 회의는 후퇴이자 불안이다. 무언가 '잘 나가지' 않는 것이 있다. 어딘가에 틈새 같은 것이 있다. 불쑥 치솟는 의문이 있다. 특히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다면, 어떤 문제도 발생하지 않는다면, 놀람이란없을 것이며, 회의란 없을 것이다. 사유도 없을 것이다. 인간은 모든 구멍 속에서, 틈색 사이에서, 결핍 속에서 생각한다. 인간은 늘 가장자리에서 생각한다. 인간은 모든 것을 알고 싶어한다. 그것은 결코 끝이 없는 경계의 싸움이다. 인간은 욕구와 불확실성 속으로 뛰어든다. 인간은 고뇌 속에 죽는다. 인간은 놀라고 그리고 인간은 회의한다.
일어났을 수도 있었을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돌이킬 수 없는 역사의 필연은 오직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우연들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만물은 꿈의 오솔길이 무수히 있으니, 그 중 극소수만이 현실로 화(化)하는 정원이다.
우리는 현재에만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추억을 통해 과거에, 계획을 통해 미래에만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또한 다른 곳에서도 살 수 있다. 우리는 현재 존재하지 않는 것, 결코 과거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 결코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것들을 상상할 수 있다. 상상은 사유나 혹은 자유와도 같이 우리를 신과 비견케 하는 놀라운 능력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 우리는 만물에 속하지 않는 것은 결코 어떤 것도 상상할 수 없다는, 그다지 놀랄 것도 없는 사실 때문이다. 우리는 공간과 시간 속에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을 다른 방식으로 재구성하는 것 외엔 다른 권리가 없다. 우리는 결코 무엇을 창조해내지 않는다. 우리는 우주 만물의 편린들을 다른 방식으로 조작할 따름이다.
믿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는, 안다는 것보다 분명 열등하다. 사업에서, 정치에서, 기계 분야에서, 일상적인 사회 생활에서, 믿는 것보다는 아는 것이 낫다. 당신이 타야 할 기차가 8시 15분 전 기차라고 믿는다면, 당신은 그것을 놓칠까 두려워해야 할 일이다. 시험이나 콩쿠르를 치르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믿는 것에 대한 질문은 주어지지 않는다. 아는 것에 대한 질문이 주어진다. 아드리아노플(터키 지명) 전투의 날짜, 시칠리아의 산물, 직삼각형의 성질이나, 질소의 성질은 믿음이나 견해의 영역이 아니라, 지식의 영역에 속한다. 모든 견해와 모든 믿음에는 모호한 면이 있다. 지식은 긍정적이다. 믿는 것은 불확실하다. 우리가 아는 것만이 진리라는 명칭에 걸맞다. 믿음은 부분적이고, 갈팡질팡하는, 간접적인, 근거 없는 지식이다. 지식은 의견의 불일치를 겪지 않는, 겨우 토론이나 겪는 믿음이다.
위대한 일에는 본성적으로 치욕스런 면들이 뒤섞여 있다. 위대한 일에는 피와, 폭력과, 거짓말과, 죽음이 그득하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이름을 외우도록 강요하는 자들의 대부분은 법정에 세워야 할 자들이다. 두 사람을 죽여 보라. 당신은 곧장 감옥행이다. 그러나 20만명을 죽여 보라. 당신은 권좌에 오르고 책에 기록될 것이다. 도덕이란 터질 듯한 야망을 지닌 자들에게는 한낱 딸꾹질이고, 사상과 군중을 조작하는 데 있어서 충분한 단계에까지 오르지 못한 자들에게는 독점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일종의 바보 마늘기인 것 같다. 좋게든, 나쁘게든, 원하는 대로 인간을 이용하는 것이 있으며, 그것은 체념과 동시에 경탄을 불러일으키고, 너무도 분명한 이 법칙들은 동시에 경악으로 빠져든다. 만물은 인간의 삶 속에서, 역사라는 이름을 지닌 체계의 이상한 면면을 취한다.
인간은 사유와 행동을 통해 놀랄 만큼 만물의 진행을 가속화시켜왔다. 그러나 인간은 이러한 그들의 행동과 사유가 어떤 결과를 낳을지 알지 못한다. 닫힌 우주계에서는 모든 것은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만물에 대한 아주 자그마한 간섭이라 할지라도 누구도 깊이를 측정할 수 없는 결과를 낳게 된다. 우리는 아마존 열대림에서 날개를 퍼덕이면서 차츰차츰 일본에 태풍을 일으키는 나비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 인간의 사유는 나비의 날개와는 또 다르게 강력하고, 그리고 또 다르게 예측불능이다. 인간의 사유는 만물의 질서를 뒤엎고 그것을 정복하나, 인간의 사유는 자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폴 발레리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인간은 대부분의 경우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를 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이 행한 것이 무엇을 행하는지는 결코 알지 못한다."
시간과 악이 존재하는 것은 용서가 있기 위함이다.
나는 하루 온종일 달린다. 움직이지 않고 있더라도 나는 달린다. 나는 추억과 계획을 통해 시간 속을 두루 달린다. 나의 유일한 미래는, 나 자신이다. 인간은 인간의 미래이다. 나의 유일한 한계는 시간이다. 나의 유일한 주인은 시간이다. 나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도, 멈추게 할 수도, 늦출 수도, 피할 수도 없다. 나는 죽음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변화를 길들일 것이다. 나는 죽음을 우회함으로써 죽음에 맞서 싸울 것이다.
모든 것은 나로 말미암아 존재한다. 나는 매순간 시간과 공간과 만물과 인간을 지탱한다. 존재가 있기 때문에 만물이 있다. 존재가 있기 때문에 시간이 있다. 존재가 있기 때문에 인간이 있다. 나는 나의 가련한 아이들, 너희들을 사랑하고, 나는 너희들에 대해 감탄해 마지 않으며, 너희들의 무력한 위대함과 너희들의 절망에 처한 모습 그대로의 너희들을 사랑한다. 그리고 나는 무로부터 끄집어내어져 만물 속에 던져진 너희들이 측은하다. 존재로부터 나왔으나, 너희들은 모르는 것이 만물이다. 그토록 터질 듯한 교만과 그토록 많은 헛된 노력에도 불구하고, 너희들이 결국에는 알 수 없는 것이 만물이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것에 대해, 가련하고 가련한 아이들아, 가련한 멍청이 천재들아, 너희들은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존재에대해서처럼 만물에 대해, 너희들은 결코 아무것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4.읽고쓰기(reading & essay)'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길 끝나는 곳에 길이 있다 - 정찬주 (0) | 2019.12.24 |
---|---|
표현의 기술 - 유시민/정훈이 (0) | 2019.12.23 |
문학을 읽는 다는 것은 - 테리 이글턴 (0) | 2019.12.20 |
비숲 - 김산하 (0) | 2019.12.19 |
반딧불이, 헛간을 태우다. - 무라카미 하루키 (0) | 2019.12.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