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옳다' = '어떤 기준에 비추어 보아 어긋남이 없다.'

우리는 옮음을 추구하지만 세상의 기준은 하나가 아니고 때와 상황에따라 변하기도 하기에, 세상 모든일이 옳고 그름으로 나뉘지는 않는다. 옮음을 추구하기 위해 시간이 필요한 경우도 있고, 반대편이나 다른 시각에서의 관찰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시비(是非) 1.명사 옳음과 그름. 2. 명사 옳고 그름을 따지는 말다툼.

 

[유의어] 공과 시시비비 왈가왈부

 

(네이버 영어사전) 1.right and[or] wrong   2.dispute,quarrel,argument

 

 

[글과 책 속에 쓰인 '시비'에 대한 다양한 표현들]

 

 

코에케 류노스케, <생각 버리기 연습>

옳다는 강한 확신이 있다면 자신의 의견을 굳이 강력하게 주장하지 않아도 되고, 싸울 필요도 없다. 아니, 상대와 싸울 생각조차 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주장에 스스로도 '자신감'이 없고 진심으로 납득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상대를 납득시킴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려 한다. 즉 타인의 납득하는 표정을 보고, 찬성하는 목소리를 듣고, 자신의 뇌에 주변 사람들이 찬성했다는 정보를 입력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논쟁 혹은 말싸움을 좋아하는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부족함'을 숨기기 위해 자극적인 말이나 논리적으로 보일 법한 말을 사용하거나, 큰소리로 말하거나, 손동작을 크게 하는 등 상대를 납득시키려 노력하고, 이런 행동으로 인해 상대를 불쾌하게 만든다.

 

우리는 다른 사람은 '틀렸다'고 단정 짓고 비판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자신은 '옳다'라는 인상을 형성하려 한다. '당신은 틀렸다. 하지만 나는 옳다'는 독불장군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면 당신은 오만과 자만에 빠져 허덕이게 될 것이다. 머릿속으로 '나는 옳다. 그러므로 완벽하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당신은 당신의 뇌 안에서는 왕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왕은커녕 비천한 난민일 뿐이다.

 

 

법륜 스님, <인생수업>

세상 사람은 서로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내 관점을, 상대는 상대의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런 가치관을 갖고 있지만 저 사람은 저런 가치관을 갖고 있고, 나는 이렇게 느끼지만 저 사람은 저렇게 느끼고, 나는 이런 스타일로 일 하지만 저 사람은 저런 스타일로 일합니다. 이건 다만 다를 뿐이에요. 직장에서 다양한 사람이 모여 일할 때는 서로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옳다 그르다가 아니라 그냥 '저 사람은 저렇구나.'하고 다름을 인정하는 겁니다.

 

 

린위탕(임어당), <생활의 발견>

논리적인 인간은 항상 자기를 옳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적인 맛이 없다. 그러므로 잘못이다. 그러나 정리를 깨닫고 있는 인간은 어쩌면 자기가 잘못일지도 모르겠다고 의심하는 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옳은 것이다.

 

 

이희인, <여행자의 독서>

"단단하고 높은 벽이 있어 그곳에 하나의 달걀이 부딪쳐 깨질 때, 아무리 그 벽이 옳다고 해도 아무리 달걀이 잘못했다고 해도 나는 달걀 편에 설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들 개개인은 하나의 달걀과 같으며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깨지기 쉬운 껍질에 쌓여 있는 정신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싸우는 것은 높은 벽이며 그 벽은 곧 제도이다." - 무라카미 하루키, '예루살렘상' 수상 연설 중에서

 

 

임병희, <목수의 인문학>

발끝으로 서는 자는 오래 설 수 없고, 황새처럼 가랑이를 벌리고 걷는 자는 오래 걸을 수 없다. 스스로 나타내는 자는 나타나지 않고, 스스로 옳다고 하는 자는 드러나지 않는다. 스스로 자랑하는 자는 공이 없고 스스로 칭찬하는 자는 오래가지 못한다. - 도덕경 24장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생긴다. 내가 달하고자 하는 것, 내 기준을 옳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자신의 직각자가 진리라고 여기는 데 있다. 마치 내가 내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규정했던 것처럼 말이다. 직각은 어디에서나 통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직각이 자신만의 것인지 물어야 하겠다. 직각이란 인류의 보편적 기준에 맞는 올바름이어야 한다. 타인을 인정하는 것도 직각이다. 나를 반성하는 것도 직각이다. 그래서 직각이란 삶의 자세이지 순간의 담론이 아니다.

 

우린 지금 제각각의 직각자를 가지고 있다. 나에게 들이대는 직각자, 타인에게 들이대는 직각자, 직장과 사회와 제도, 그리고 국가에 들이대는 직각자가 다르다. 내 이익에 부합할 때는 소리를 높이지만 나와 상관없는 일에는 자를 들이댈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부끄러움인 줄 모른다. 아니면 자신의 직각만이 옳다 믿으며 자신의 잣대만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고 재단하려 한다. 나는 직각을 맞추는 일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님을 알고 있다. 아무리 직각으로 맞춘다 하지만 조금씩 각도가 달라지기도 한다. 선을 긋고 그 선을 맞추어 나무를 연결해도 조금씩 달라질 때가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직각을 맞추려는 노력이다.

 

 

아잔 브라흐마, <술취한 코끼리 길들이기>

아내와 남편이 숲으로 산책을 가 "꽥, 꽥!" 우는 소리를 듣고 닭이다, 거위다 싸운다.

그것이 닭이든 거위든 무슨 상관인가?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의 조화이며, 기분 좋은 여름날 저녁 함께 산책을 즐기는 일이다. 얼마나 많은 결혼이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문제들 때문에 금이 가는가? '닭이냐, 거위냐'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이혼이 발생하는가?

이 이야기를 이해한다면 무엇이 최우선인가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결혼 생활은 닭이냐 거위냐를 놓고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게다가 우리는 얼마나 자주 우리 자신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확신하고 장담하는가. 그러고는 나중에 가서야 자신이 완전히 틀렸음을 발견한다. 누가 아는가? 그것이 유전자를 조작해 거위 울음소리를 내도록 변형시킨 닭일지!

 

 

J. K. 갤브레이스, <불확실성의 시대>

인간은 자기들이 이미 갖고 있는 것을 지키거나, 갖고 싶은 것을 정당화시키려는 경향이 강하다. 이로 인해 그러한 목적에 이바지하는 사상을 옳다고 보기도 한다. 물론 사상이 기득권을 초월하지만, 그 반대로 사상이 기득권의 소산인 경우도 대단히 많다.

 

 

류시화,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갈등의 10퍼센트는 의견 차이에서 오며, 나머지 90퍼센트는 적절치 못한 목소리와 억양에서 온다는 심리학의 통계가 있다. 목소리의 크기가 옳음의 척도는 아니다. 소리를 지르는 관계는 가슴이 멀어진 관계이다. 그래서 자기 말이 들리게 하려고 더 크게 소리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두 가슴은 더욱 멀어진다. 소리친 다음의 침묵은 가슴이 죽어버렸음을 알려주는 신호이다.

 

죽는 날까지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선택하는 것이 삶이다. 따라서 자신이 걸어가는 길에 확신을 가져아 한다. 그 길에 기쁨과 설렘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과 자신의 다름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길'의 어원이 '길들이다'임을 기억하고 스스로 길을 들여 자신의 길을 만들어 가야만 한다. 익숙한 것과 결별하고 내가 옳다고 느끼는 길을 정답으로 만들어 가는 것 이 나의 인생이다. 다수가 선택하는 길을 벗어난다고 해서 낙오되는 것은 아니다. '보편적'이라는 기준이 오류를 면제해 주는 것은 아니다.

 

 

이정우, <개념: 뿌리들>

도덕과 윤리의 차이는 칸트와 스피노자 사이에서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서구 문화에서 도덕이란 '옳음'과 '그름'의 문제이며 어떤 초월적 가치에 따라 행해야 할 '의무'와 밀접한 관련을 가집니다. 이 점에서 기독교적 가치들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 있죠. 그리스 문화에서 기독교 문화로 넘어감은 곧 윤리에서 도덕으로 넘어감을 함축합니다. 기독교에서 중요한 것은 좋음과 나쁨이 아니라 옳음과 그름입니다. 현세적 행복보다 신에 대한 의무가 중요시됩니다. 좋아도 그릇된 것이 있고, 나빠도 옳은 것이 있는 것이죠. 좋음과 나쁨만을 기준으로 행위하는 것은 현실적인 생각이고, 옳음과 그름을 기준으로 행위하는 것은 초월적인 가치의 기준을 전제하는 생각입니다. 미셸 푸코가 말년에 몰두했던 문제들 중 하나가 이것이죠. 즉 그리스에서 로마, 기독교, 근대로 넘어가는 역사적 과정을 밟으면서 도덕과 윤리의 문제를 파헤치는 것입니다.

 

철학적 언어 사용에 있어, 옳음의 짝은 그름이고 좋음의 짝은 나쁨이다. 선과 악은 이렇게 양의적으로 이해됩니다만, 두 경우는 매우 다른 내용을 뜻합니다. 옳음/그름은 초월적 가치 기준과 의무 개념을 함축하지만, 좋음/나쁨은 내재적 가치 기준과 행복/기쁨의 개념을 함축합니다.

 

중요한 것은 선과 악은 그리스 문화에서는 좋음과 나쁨의 문제였으나 그것이 기독교를 거치면서 옳음과 그름의 문제로 바뀐다는 사실입니다. 기독교 문화에서 선과 악이 옳음과 그름의 문제라는 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죠. 즉 윤리의 문제에서 도덕의 문제로 바뀐 것입니다. 이런 전통은 서구 근대 철학에 이르기까지 지속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아름다움의 아름다움 됨을 알고 있으나, 그것은 사실 아름답지 못한 것이고, 세상 사람들이 모두 좋음의 좋음 됨을 알고 있으나, 그것은 사실 좋지 못한 것이다. (도덕경 2장)... 그런데 핵심적인 것은 즐거움과 성남이 같은 뿌리에서 나오는 것이고, 옳음과 그름이 한 곳에서 나온다는 생각입니다. 이것은 전혁적인 '불이'不二의 사고입니다. 일반적으로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양자가 심층적으로는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죠. ... 그런데 이런 '불이'의 사유는 몇 가지 의미를 함축합니다. 우선, 둘을 부정하는 이 사유 자체가 대립자들을 놓고서 이루어진 사고라는 점이죠. 그러나 대립자들 사이 또는 그 바깥은 문제가 되고 있지 않습니다(현대 사상의 핵심들 중 하나가 바로 대립자들의 사유에서 대립자들 사이와 바깥의 사유로 이행한 점에 있습니다). 둘째, '불이'의 사유는 현실적으로 대립하는 선과 악을 초탈하는 사유라는 점입니다. 헤겔의 변증법도 마찬가지죠. 다만 '불이'의 사유는 대립자들의 아래로 내려가 그 공통의 뿌리를 보는 사유라면, 헤겔의 사유는 위로 올라가 그것들을 통합하는 사유입니다. 두 경우 모두 현실적인 대립을 넘어서려는 사유죠. 하나Einheit를 지향하는 사유입니다. 셋째, 현실적인 갈등을 해결하는 두 길을 소요의 길과 투쟁의 길이라 할 때, '불이'의 사유는 소요의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요의 길은 현실적인 문제를 정신적 차원에서 초탈할 수는 있지만 객관적 차원에서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도가사상과 불가사상의 한계가 이 점에 있다 하겠습니다. 근원적 하나를 강조함으로써 현실적 다자성의 의미를 극소화할 수 있지만,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현실적 여럿 사이에 존재하는 불평등과 갈등을 승인하는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죠. 한 걸음 더 나아가 헤겔적 뉘앙스를 도입한다면, 현실적 여럿을 하나로 통합하는 국가철학적 또는 제국주의적 논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해석할 경우 노자의 소요는 현실적인 선악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 가는 것이 되고, 관점에 따라서는 제국적 논리를 통해 해소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왕필처럼 '불이'의 논리로서가 아니라 상보적 대립자들의 논리로 해석할 여지도 있습니다. 선과 악이 근본적으로 하나란느 뜻이 아니라 둘, 더구나 서로 대립적인 둘로 보이지만 사실상은 서로가 서로를 가능하게 하는 상보성을 갖춘 대립자들이라는 뜻이죠.

 

니체는 옳음/그름으로서의 선악이라는 개념을 근본적으로 비판했습니다. 니체는 옳음/그름으로서으 선악을 좋음과 나쁨으로서의 선악으로 바꾸고자 했고, 그런 점에서 스피노자를 잇고 있습니다. 문화사적으로 보면 플라톤-기독교적 가치와 근대 부즈주아 문화를 비판하고자 했죠. 니체는 선악의 개념이 왜 발생했는가를 '계보학'을 통해 밝히고자 했습니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들은 역사의 과정에서 특정 시점에 생겨난 것들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역사를 추적해서 그런 가치들이 왜 생겨났는가를 밝혀야 하겠죠. 그런 작업이 계보학입니다. 

 

"영혼(마음, 정신, 의식)을 가진" 존재들이 가지게 되는 것이 'subjectivity', 즉 '주체성'이죠. 인식론적으로 말하면 '주관성'입니다. 일상어에서 개인적이다, 자기 멋대로 생각한다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뉘앙스죠. 그리고 주체성의 고도의 단계가 자기의식의 단계, 즉 '나'라는 것을 의식하는 단계입니다. 이에 비해서 'objectivity'는 주체성과 대립하는 의미에서의 객체성, 또는 인식론적으로는 객관성을 말합니다. 이때 객관성이라는 말은 반드시 옳다, 맞다는 뜻이 아니라 인식 주체가 아닌 "인식 대상의 측면에서"라는 뜻입니다.

 

 

고미숙,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타인의 행동을 시비선악을 떠나 '있는 그대로' 지켜볼 수 있는 것도 아주 좋은 공부가 된다. 물론 그 모든 것은 거울처럼 반사되어 나에게로 온다. 나의 행동, 나의 인생을 보는 시선도 전혀 달라지게 된다.

음양오행론뿐 아니라 동양의 사유는 이렇듯 철저히 관계의 사유다. 정화스님의 말씀에 따르면 불교에서 '안다'는 건 이웃과 더불어 교류한다는 뜻이다. 세포 하나의 의미와 역할은 이웃한 세포들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웃들과 분리되어 있을 땐 자기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 채 동일성을 증식하게 되는데, 그것이 곧 암세포다. 암세포란 쉽게 말하면 이웃과 단절된 세포의 표현형식인 셈이다.

 

 

유시민, <표현의 기술>

<맹자>의 '유자입정(孺子入井)'. 측은지심, 즉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라는 본능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리고 약한 것에 대해 연민의 정을 느끼게 되어 있다는 것이죠. 인간은 측은지심 말고도 여러 직관적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수오지심, 무엇인가 잘못을 저지른 것을 알면 부끄러워합니다. 사양지심, 좋은 일의 공을 남에게 돌리고 몸을 낮추려 합니다. 시비지심, 옳고 그름을 가려 옳은 일을 합니다. 맹자는 이런 마음을 4단이라고 하면서, 인의예지라는 문명의 규범이 모두 여기에서 나온다고 주장했습니다. 문명의 규범이 도덕을 만드는 게 아니라 인간이 원래 지니고 있는 도덕적 본능이 문명의 규범으로 드러난다는 것이죠.

 

무언가를 주장하고 싶다면 반드시 근거와 논리를 제시해야 합니다. 만약 상대방이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주장만 하면 논쟁을 중단하는 게 현명합니다. 논쟁의 주제와 관계없는 것을 끌어들이지도 마십시오. ... 상대방이 토론하다 말고 화를 내면 한발 물러서는 게 좋습니다. 화를 내는 것은 논리적으로 흔들린다는 증거입니다. 그럴 때 굴복을 강요하면 안 돼요. 그 정도에서 멈추고, 나도 더 생각해 볼테니 다음에 다시 대화하자고 하는 게 바람직합니다. ... 논리적으로 완전히 격파했다고 확신하는데도 상대가 인정하지 않고 계속 우길 때도 화를 내지는 말아야 합니다. 내가 확신한다고 해서 그게 옳다는 보장은 없고, 단 한 번의 논쟁으로 옳고 그름 또는 승패가 가려지는 문제도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정찬주, <길 끝나는 곳에 길이 있다>

시비를 초월하기. '시비를 초월하라'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다. 고승들의 법문에 많이 등장하는 법어이다. 나는 이 말을 '시비에 집착하지 말라'라고 이해하고 있다. 시비를 가리겠다고 집착하는 것은 그것이 옳고 그르건 간에 한쪽에 치우쳐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초월은 시와 비를 떠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시와 비를 공시적 관점에서 통찰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통찰은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공평하게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통찰이 단속적이지 않고 계속 지속되는 상황을 깨달음이라고 하지 않나 싶다.

 

 

이덕무, <문장의 온도>

이제 우열과 존귀와 시비의 이분법은 전복되고 해체된다. 사람의 시각이 아닌 하늘의 입장에서 보자면 우주 만물의 가치는 모두 균등하다. 단지 차이와 다양성이 존재할 뿐이다.

 

 

혜민 스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개개인에게는 모두 각자의 생각이 있습니다. / 각각의 사견을 내 생각과 똑같이 맞추기 위해 / 노력할 필요는 없습니다. /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십시오. / 시비는 사실, 남의 생각이 나의 생각과 똑같아야 한다고 했을 때 / 생기는 것입니다.

 

 

가오싱젠, <창작에 대하여>

관찰은 판단에 앞서고 판단보다 위대합니다. 판단에는 기준이 미리 존재하고 그 기준으로 삶을 재단하죠. 타인을 지옥으로 간주하면서도 자기 자신의 나약함은 과소평가합니다. 악은 인간의 나약함과 굴종, 묵인을 통해 제 길을 열어갑니다. 나약과 굴종, 묵인이 걷는 길은 악이 걷는 길과 거의 일치합니다. 우리가 인간 존재의 나약함을 직시할 수만 있다면, 악이 자행하는 횡포는 물론 악의 진행방향과 인간 삶이 곤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도 보다 근본적으로 간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관찰하는 존재는 깊고 넓고 관대한 내면을 가져야 합니다. 인간 세상과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 속에서 길어 올리는 새로운 이해와 슬픔과 번민은 일체의 시비판단과 은원을 넘어섭니다. 희극을 쓰든 비극을 쓰든 작가는 객석에 앉아 관객을 바라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다다르는 정화와 탈피의 효과는 역사의 역할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작가는 철저히 인간 내면의 증언자여야 합니다. 진실을 관조할 때는 무엇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를 따지지 않습니다. 관조를 통한 진실추구야말로 작가 고유의 일이며 지고무상의 윤리입니다. 삶의 진실은 분명 우리를 곤혹스럽게 합니다. 작가가 심혈을 기울여 진실을 바라볼 때 그 붓끝에서 빚어지는 문학은 구원을 받습니다. 비록 작가 자신은 구원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말이지요.

 

작가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야 합니다 냉정한 관찰로 감정이 발설을 제어하고, 시비, 선악, 도덕의 판단도 내려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작가는 다만 냉정한 시선으로 세상을 관찰하면 됩니다. 세상은 본래 이러하다는 것, 그 누구의 의도로도 개조되지 않는다는 것을 똑똑히 보아야만 합니다. 작가는 그렇게 차가운 눈으로 외부세계를 관찰하는 동시에 자기 내면을 관조해야 합니다.

 

 

유시민, <청춘의 독서>

사람은 다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고 하는 까닭은,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고 하는 것을 보면 누구나 깜짝 놀라고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게 되니, 이는 아이의 부모와 교분을 맺기 위한 것도 아니요, 마을 사람과 친구들한테서 널리 명예를 얻기 위함도 아니며, 또한 이 어린아이의 울음소리를 싫어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 이렇게 볼 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겸손히 사양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옮고 그름을 가리려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측은지심이 인仁의 시작이며 수오지심이 의義의 시작이며 사양지심이 예禮의 시작이며 시비지심이 지智의 시작이다. 《공손추 상》

 

신문사와 대기업이 지상파와 종합편성 채널 편성권을 장악하고, 대기업이 광고주의 위력으로 다른 미디어까지 간접적으로 조종하면 종국적으로 인터넷 포털까지 남김없이 그들의 통제 아래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가 중요하다고 판단한 정보를 자기네가 옳다고 여기는 방식으로 가공해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형식으로 국민에게 제공할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이 '어느 정도' 진실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는 우리들은 남의 머리가 생각한 것을 내 머리로 생각한 것으로 착각하며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단지 역사가의 작업이 그가 속한 사회를 얼마나 정확하게 반영하는가를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 흘러가는 것이 사건만은 아니다. 역사가 자신도 그 흐름 속에 있다. 역사책을 볼 때 표지에 있는 저자의 이름을 찾아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언제 집필되었고 언제 출판되었는지도 살펴보아야 한다. 때로는 이런 것이 더 많은 비밀을 드러낸다. 만일 똑같은 강물에 두 번 다시 들어갈 수 없다고 한 철학자의 말이 옳다면, 한 역사가가 같은 책을 두 번 쓸 수 없다는 말 역시, 같은 이유로 진실일 것이다.  - <역사란 무엇인가>

 

 

윤태호, <미생>

들어주는 귀... 바둑을 수담이라고도 한다. 내가 놓는 한 수 한 수는 곧 내뜻이고 말이 된다. 한 판의 바둑엔 수많은 대화가 있고, 갈등이 있다. 시비가 생기고, 화해와 양보가 있다. 이기기 위해 목청을 높이는 수도 있고, 엄살을 부리는 수도 있다. 이기기 위해서.... 승리하기 위해선, 상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내 말만 해서는 바둑을 이길 수 없다.

 

 

로버트 해그스트롬, <현명한 투자자의 인문학>

실용주의는 진술의 진실과 행위의 옳음이 실질적인 결과에 따라 정의되어야 한다고 여긴다. 어떤 관념이나 행동은 그것이 의미있는 차이를 만들어낼 때 참이고, 실제이고, 유용하다. 따라서 무언가를 이해하려고 할 때, 우리는 그것이 어떤 차이를 만들어내는지, 그 결과가 무엇인지를 물어야만 한다. "진리는 믿었을 때 스스로를 유용하다고 입증한 모든 것들에 붙여진 이름이다"라고 윌리엄 제임스는 요약한다. 만약 진리와 가치가 세상에서 그것들의 쓸모에 의해 결정된다면, 환경이 바뀌고 세상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 이루어진다면, 진리도 바뀐다. 진리에 대한 우리의 해석도 진화한다. 다윈의 미소가 보이는 듯하다. 이렇게 보면, 실용주의는 대부분의 앞선 철학사상들과 정확히 반대된다. 다른 철학 사상들은 진리를 이론화하는 방법은 달랐지만 자신들이 다루는 진리가 절대적이고 불변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제임스는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서도 절대적 증거를 얻을 수는 없다고 믿었다. 예를 들어 신이 존재하는지 아닌지 입증하는 것은, 질문 자체가 타당하지 않기 때문에 시간 낭비다. 우리는 신을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이 우리 삶에 어떤 차이를 만들어내는지 물을 수 있을 뿐이다. 이런 태도가 제임스의 실용주의 철학의 중심 사상이 되었다.

 

 

공자. 임자헌 옮김, <군자를 버린 논어>

공자는 시대를 거듭해서 내려온 제도와 질서 자체가 부조리하다고 보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의 위치에 합당하고 진실하게 사는 삶을 살면서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다면 세상은 평화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회는 나와 타인으로 구성된다. 타인과 관계를 맺기 전에 중요한 것은 내가 나에 대해 솔직한가이다. 내 속마음과 나의 행동이 어긋나면 타인과의 관계가 혼란스러워진다. 내가 '아'라고 말한 것이 '아'일 수도 있찌만 실은 '어'의 뜻이라든가 '오' 혹은 '유'일 수도 있으면 심지어 '가'일 수도 있다면, 게다가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라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믿을 수 있겠는가? 신뢰(信)가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내 말(言)과 행동(行)을 일치시키는 것이 타인과 관계를 맺기 전 내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그렇게 하고 나서야 내 마음을 타인에게 확장시킬 수 있다. 내 마음을 미루어 타인을 대할 수 있고(恕), 더 나아가 내 진심을 다해 타인을 위할 수 있는(忠)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관계에는 사적인 감정이나 이해를 뛰어넘어 인간이면 해야할 옳음(義)에 대한 판단(知)과 더 큰 틀에서 세상의 조화를 살피는 사회적 규범에 대한 이해(禮)가 필요하다. 사람으로 태어나 나와 타인, 그리고 사회에 대해 총체적으로 이해하고 필요한 기능을 숙지하고 숙련해서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인재로 공헌할 수 있는 덕목이 인(仁), 즉 온전한 사람다움이다. 

 

공자는 네 가지를 절대 하지 않았다. 근거 없이 미리 억측하지 않았고, 내가 절대 옳다고 하지 않았고, 고집을 부리지 않았고, 자기부터 앞 세우는 일을 하지 않았다. 자절사, 무의, 무필, 무고, 무아.

 

 

마이클 샌델,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정의에 대한 고민은 좋음의 문제가 아니라 옳음(the right)의 문제에서 출발한다. 좋지만 옳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칸트의 도덕철학은 옳음을 통해서만 보편적인 정당성을 얻을 수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시작한다. 칸트에 따르면 옳음의 근거는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앎으로 확인되는 것이 아니며, 이성을 근거로 옳다고 승인될 수 있는 원리를 발견함으로써 확인된다. 그리고 그 원리는 자기모순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는 데 기반을 두고 있다. 흔히 정언명법으로 알려진 "네 의지의 준칙이 항상 보편적 입법에 타당하도록 행동하라"라는 것이 그 기준이 된다. 준칙이라는 말은 어떤 상황에서 하는 특정 행위를 일반화한 원리를 말한다.

 

샌델의 입장은 개인과 공동체의 특수성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좋음을 강조하는 전통을 따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치와 인권의 보편성을 인정하고 공동체적 가치가 개인의 동의와 무관하게 강요될 수 있으며 개인적 자유의 가치를 존중한다는 점에서 옳음을 강조하는 전통에 닿아 있다. 달리 말하면 샌델은 자유주의가 추구하는 가치에 대해 동의하지만 자유주의자들, 특히 롤스가 말하는 가치 추구 방식에는 의문을 갖는다. 그들 방식으로 가치를 추구할 경우 과연 가치를 획득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센델의 입장은 한마디로 '옳음에 대한 좋음의 우선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말은 정의를 지향하는 옳음의 관점을 무시하고 좋음의 관점에서만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옳음의 이념을 완성하려면 좋음의 관점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정의를 추구할 때 행복을 도외시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도 품는 방식이어야 한다는 말로 옮겨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행복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의미한 자기본성, 덕의 실현에 따른 것이며 단순한 만족감 같은 의미에서의 행복은 아니다.

 

 

마시모 피글리우치, <그리고 나는 스토아주의자가 되었다>

만약 우리가 뭔가를 입증해 보여준다면, 어떤 사람이 자신의 오류를 떨쳐내게 된다고 해봅시다. 하지만 그 뭔가를 입증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을 때 과연 그 사람이 자신의 오류를 고집할 것인지는 궁금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옳다는 인상을 갖고 있기에 그리 행동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에픽테토스, <담화록>, II. 26

 

인지 부조화란 어떤 이가 자신이 똑같이 옳다고 여기는 두 판단들 사이에 갈등이 있음을 지각할 때 발생하는 매우 불편한 심리 상태다. 사람들은 인지 부조화를 경험하기 싫어한다. 이것은 에픽테토스가 사람들은 알면서 잘못을 저지르기를 원치 않는다고 말했던 것과 꼭 같은 이치다. 그래서 사람들은 제 딴엔 건전한 판단들로 이어지는 훌륭한 이유들을 제시하는 설명이라 여겨지는 것을 무작정 승인함으로써 부조화를 줄인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그런 이유와 판단들이 명백히 불합리한 합리화로 보임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기원전 6세기로 거슬러 올라가서 이솝은 여우와 포도에 관한 유명한 우화에서 이를 유쾌하게 서술한 바 있다. 다시 한 번 불편한 진실은 인지 부조화를 겪고 있는 사람들이 바보도 아니고 무식한 자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데키나 오사무 편저, <괴테 청춘에 답하다>

다수가 옳다는 근거는 없다. 학문의 진위는 다수결로 결정되지 않는다. "다수라는 것이 거슬린다. 다수를 구성하는 것은 일부 유력한 선도자 외에는 그것에 복종하는 약자, 그리고 무뢰하고 무지한 대중뿐이기 때문이다."

 

 

야마구치 슈,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어떤 의견이 어떠한 반론에도 논박당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옳다고 상정되는 경우와, 애초에 비판을 허용하지 않을 목적으로 미리 옳다고 상정되는 경우는 상당히 큰 차이가 있다. 자신의 의견에 반박하고 자유를 완전히 인정해 주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의견이 자신의 행동 지침으로서 옳다고 내세울 수 있는 절대적인 조건이다. 전지전능하지 못한 인간은 이것 외의 방법으로는 자신이 옳다고 내세울 수 있는 합리적인 보증을 얻을 수 없다. -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어떤 사람의 판단을 정말로 신뢰할 수 있는 경우, 그 사람이 신뢰를 받게 된 것은 자신의 의견과 행동에 대한 비판을 항상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어떤 반대 의견에도 귀를 기울이고 옳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가능한 한 받아들였으며, 잘못한 부분은 어디가 잘못되었는지를 스스로도 되짚어 보고 가능하면 다른 사람에게도 설명하기를 습관으로 실천해 왔기 때문이다. 한 가지 주제라도 그것을 완전히 이해하려면 다양한 의견을 두루 듣고 사물을 모든 관점에서 살펴보는 방법밖에 없다고 느껴 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이외의 방법으로 진리를 얻은 현인은 없으며 지성의 특성을 보더라도 인간은 이 이외의 방법으로 현명해질 수 없다. -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로버트 그린, <권력의 법칙>

논쟁꾼의 말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으며, 윗사람과 논쟁을 벌이는 것은 자신보다 권력이 더 센 사람의 지성을 공격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또한 그는 상대의 특성에 대해 아무런 주의를 하지 않는다. 양 당사자가 모두 자신이 옳다고 믿기 때문에, 상대방의 말에 생각을 바꾸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논쟁꾼일수록 더욱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게 마련이다. 상대방의 입장을 우습게 만들고, 논리적 약점을 틀춰내면 상대바은 결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을 것이다. 그때는 소크라테스라 하더라도 사태를 수습하지 못한다. 이것은 자신보다 위에 있는 사람과 논쟁을 회피하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의견이 맞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내 생각이 옳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David Salsburg, <통계학의 피카소는 누구일까?>

단지 가설이 자료와 배치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 가설이 사실임을 증명했다고 하는 것은 과학적 논리로 보나 통계적 논리로 보나 분명한 논리적 오류다. ... 유의성검증은 가설이 자료와 배치될 때 그 가설을 기각할수는 있지만, 가설이 옳다는 것을 확인할 수는 없다. 이런 사실을 이해한다면 유의성검증을 제대로 보는 것이다.

 

 

혜민 스님, <고요할수록 밝아지는 것들>

자기 기준을 너무 강하게 주장하지 않기. 본래 기준이라는 것은 본인이 살아왔던 익숙한 방식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므로 객관적으로 옳다 그르다 말하기 어렵다. 혼자가 아닌 다른 사람과 함께 뭔가를 할 때는, 자신에게 익숙한 기준을 스스로 먼저 양보하고 조정하는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김형석, <백년을 살아보니>

대화와 토론, 그리고 투쟁. 대화는 나와 너의 주장과 사고에서 차이점을 찾게 된다. 공통점은 서로 인정하면 된다. 차이점이 발견되었을 때는 더 높은 객관적 가치와 해답을 얻을 수 없겠는가 모색한다. 소망스러운 객관적 해답이 주어지면 그 해답을 위한 방법을 찾으면 되는 것이다. 첫째는 마음의 문을 열고 듣는 일이 앞서야 한다. 그리고 내 주장이 옳다고 여길 때는 내 주장을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득해야 한다. 그리고 그 차이점은 무엇이며 더 좋은 결과는 무엇인가를 찾아 공감, 동조, 협력하는 길을 찾는 것이 대화이다. 이런 대화를 위해서는 몇 가지 선행조건이 필요하다. 첫째는 대화에서 감정을 이성보다 앞세워서는 안 된다. 그런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대화의 자격이 없다. 이해관계를 개입시키거나 앞세우면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수학 문제를 풀어갈 때는 방해조건이 없다. 이해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해관계가 개입되면 대화는 장사 거래가 된다. 그런 때는 이해관계의 객관적 방향을 택해야 한다. 나를 위한 이해관계만을 따진다면 대화는 불가능해진다.

 

 

최인철, <굿 라이프>

물질과 권력과 이미지를 향한 욕망이 득실거리는 이 물질주의 시대에,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주장하지 않으면 루저가 되고 말 것이라는 불안이 팽배한 이 자기표현의 시대에, 인생의 부사를 줄이고 삶의 어조를 낮추는 자세로 살았으면 좋겠다.

 

 

새뮤얼 아브스만, <지식의 반감기>

기준선 이동 증후군은 우리가 탄생한 시점에서 진실로 받아들여지는것, 아니면 어떻게 거기에 익숙해지는가를 나타내는 개념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태어나서 죽을때까지의 변화만 볼 수 있기 때문에 여러세대에 걸쳐 변화가 일어날 경우 이를 감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실제로 우리는 느린변화에는 잘 감지하지 못합니다. 꽃이 피는 과정, 해가 뜨고 지는 과정 등 느린변화에는 잘 감지하지 못합니다. 그만큼 인간은 주변환경의 변화의 즉각 적응할만큼 완벽하지 않으니깐요. 또한 인간은 왜 잘못되고 낡은 지식을 계속 믿을까요? 우리 주변을 보면 자기가 믿는 지식이 다 옳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지식의 발전으로 인하여 변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를 바꾸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지식의 관성이라고 하는데요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어떤 지식이 사실이 아니라고 밝혀진 다음에도 이 낡은 지식에 매달리는 경향을 말합니다.

 

 

마크 맨슨, <신경 끄기의 기술>

당신의 믿음을 맹신하지 않는 것. 당신이 100% 옳다는 확신을 내려놓고, 언제든 실수하고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기존에 갖고 있던 믿음에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당신은 독선주의 허세꾼이 되지 않을 수 있다.

 

 

유시민, <나의 한국현대사>

사람은 그 어떤 위대한 이념이나 가치를 실현하는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인 존재다. 누구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스스로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 때 행복을 느낀다. 우리 모두는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는 존엄한 인간이다. 우리는 자신의 존엄성을 확신하는 것과 똑같은 무게로 타인의 존엄성을 존중해야 한다. 나는 이런 생각을 '자유주의적 각성'이라고 부른다.

 

 

유시민,  <어떻게 살 것인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결정권'을 행사하는 일이다. '자기 결정권'이란 스스로 설계한 삶을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아가려는 의지이며 권리이다.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의 표현을 가져다 쓰자.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삶을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방식이 최선이어서가 아니라, 자기 방식대로 사는 길이기 때문에 바람직한 것이다." 사람마다 인생을 다르게 산다. 평생 공부하는 사람, 노래하고 춤추는 사람, 돈을 버는 데 골몰하는 사람, 일만하는 사람, 권력을 쫓는 사람, 신을 섬기는 사람 등 백 사람이 있으면 백 가지 삶이 있다. 어느 것이 더 훌륭한지 가늠하는 객관적 기준은 없다. 스스로 설계하고 선택한 것이라면 어떤 삶이든 훌륭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화려해 보여도 자유의지로 만들어낸 삶이 아니면 훌륭할 수 없다. 

 

내 나름의 '비법'이 있기는 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거리감'이다. 세상에 대해서, 타인에 대해서,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그리고 내 자신에 대해서도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것이다. 나는 좋은 세상을 원하지만 그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세상을 저주하지는 않는다. 좋은 사람들을 사랑하지만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을 믿지는 않는다. 내 생각이 옳다고 확신하는 경우에도 모두가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내가 하는 일들은 의미가 있다고 믿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일 뿐임을 인정한다. 삶이 사랑과 환희와 성취감으로 채워져야 마땅하다고 생각하지만 좌절과 슬픔, 상실과 이별 역시 피할 수 없는 삶의 한 요소임을 받아들인다.

 

행복은 사람에서 기쁨을 느끼고 자기 삶에 만족하여 마음이 흐뭇한 상태를 말한다. 우리는 언제 이런 흐뭇함을 느끼게 되는가? 스스로 설계한 삶을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방식으로 살면서, 그것이 무엇이든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것을 성취했을 때 행복을 느낀다. 

 

 

시라토리 하루히코, <니체의 말>

원인과 결과 사이에 존재하는 것. 이러이러한 원인이 있었기에 이 같은 결과가 되었다. 이처럼 생각되는 일들은 많다. 그러나 그 원인과 결과는 우리가 멋대로 명명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어떠한 사물이나 현상도 원인과 결과로 간단히 분석할 수 있을만큼 단순하지 않다.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요소가 수없이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같은 사실을 무시한 채 어느 하나의 것만 원인과 결과로 단정하여, 거기에 어떤 강한 연관성이 있는 듯 생각하는 것은 너무도 어리석은 일이다. 원인과 결과로써 사물의 본질을 이해한다고 느끼는 것은 오만에 지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똑같은 생각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당연히 옳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김승호, <알면서도 알지 못하는 것들>

완벽함이란 형태가 아니라 과정이다. 모든 것을 채운다고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채움이 들어갈 자리를 위해 비움이 자리 잡을 때 비로소 행복이 가능해진다. 이 세상에 완전한 것은 없다. 태양도 가까이 가면 울퉁불퉁한 불기둥이 수없이 많고 달이나 별도 꽃처럼 죽고 사라진다. 세상에 한 그루의 나무도 사방이 완벽하게 대치인 경우가 없고, 인간 어느 누구도 좌우 얼굴이 같은 이는 없다. ... 때가 지날수록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 가장 좋으며 가장 행복하다는 것을 알기에 오히려 억지로 하지 않음이 가장 바르고 쉬운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가는 것 억지로 잡지 말고 오는 것 억지로 막지 말고 내가 옳다면 화낼 필요가 없고 내가 틀렸으면 사과하면 된다. 무리함으로 이룬 것들 중에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장하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도덕성은 착시 현상이 아니다. 고객을 속이지 않는 상인, 아무도 보지 않는데도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 쥐꼬리 월급에도 불구하고 뇌물을 받지 않는 공무원 등 사람들이 이기적이지 않은 행동을 하는 것은 대부분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보상과 제재 장치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으로 우리가 하는 이기적이지 않은 행동의 많은 부분을 설명할 수가 없다. 그 장치의 존재 자체가 우리가 전적으로 이기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음에야 무슨 다른 설명이 필요하랴. "사회 공동체라는 것은 없다. 오직 남자, 여자라는 개인, 그리고 가족 단위만 존재할 뿐이다."라는 대처 여사의 주장과는 달리 인간은 사회라는 울타리 없이 고립된 이기적 존재로 살아 온 적이 없다. 우리 모두는 도덕적 규범이 형성되어 있는 사회 안에서 태어나 그 규범들을 내 것으로 만드는 사회화 과정을 거치면서 성장한다.

 

 

김용택 엮음, <어쩌면 별들이 너의 슬픔을 가져갈지도 몰라>

 

언덕 꼭대기에 서서 소리치지 말라 / 울라브 하우게

 

거기 언덕 꼭대기에 서서

소리치지 말라.

물론 네 말은

옳다, 너무 옳아서

말하는 것이

도리어 성가시다.

언덕으로 들어가,

거기 대장간을 지어라,

거기 풀무를 만들고,

거기 쇠를 달구고,

망치질하며 노래하라!

우리가 들을 것이다,

듣고

네가 어디 있는지 알 것이다.

 

 

다카무라 토모야, <작은 집을 권하다>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 그냥 살아가기만 하는 건 싫다, 생활을 위한 생활로 끝내고 싶지는 않다,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늘어가고 있다. 나는 바로 이 점이 스몰하우스 운동이 퍼져 나가게 된 가장 큰 원동력이라고 본다. 평온한 생활을 하고 싶은 욕구, 자유롭게 살고 싶은 욕구,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은 바람, 이 모두가 일차적으론 자기 자신의 문제다. 자기 마음을 향해 묻고 옳다고 생각하는 답을 찾아 그대로 사는 것, 이것을 자기중심적이라 부른다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답할 수밖에 없지만 말이다.

 

 

장 보드리야르, <소비의 사회>

살면서 사랑하는 시간을 우리는 가지고 있지 않다. 꽃, 턱수염, 장발, 마약 그러한 것들은 우리의 본질이 아니다. '히피'라는 것, 그것은 무엇보다도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차별의식이 없는 새로운 눈길로 세상을 바라보고자 하는 사람. 생명을 존중하고 사랑할 수 있는 비폭력주의자. 권위보다 자유를, 생산보다 창조를 경쟁보다 협력을 우선시하는, 진정한 가치와 진정한 기준을 가지고 있는 사람, 한마디로 말하면 타인에게 해를 주지 않는, 마음이 넓고 상냥한 사람. 그것이 우리의 진정한 모습이다. 일반적인 원칙으로서 세상 사람이 뭐라고 하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언제 어디서나 하는 것이 히피다. 단지 절대로 타인에게 상처를 입혀서는 안 된다.

 

 

오마에 겐이치, <난문쾌답>

아이디어가 빈약한 사람. 아이디어가 빈약한 사람은 자신의 아이디어가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끝까지 거기에 매달려 결국 실패한다.

 

 

강신주, <철학이 필요한 시간>

자신이 느끼는 것을 있는 그대로 토로하는 솔직함! 대부분의 사람들이 옳다고 해도 거기에 현혹되지 않는 자유인의 당당함!

 

아무리 논리적인 주장이라고 할지라도, 수사학적 노력이 실패하면 그 주장은 채택될 수 없다.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만의 역린(거꾸로 배열된 비늘)이 있기 마련이다.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반성하고 체계화하는 일은 우리가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덕목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단지 타자를 설득하는 데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다. 논리적으로 정당화된 생각만으로 상대방을 실제로 움직이기 어려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무의식적 정서, 즉 상대방이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 상대방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을을 읽을 수 있는 타자에 대한 감수성이다. 오직 그럴 때에만 상대방을 설득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다. 표면적으로 상대방은 나의 이야기를 의식적으로 옳다고 인정할 수는 있다. 그것은 누가 보아도 타당한 주장, 즉 논리적으로 옳은 주장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 상대방을 실제로 움직이도록 할 수 없는 이유는, 나의 이야기가 그의 역린을 건드렸기 때문일 것이다. 비판적이고 논리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은 상대방의 역린을 읽을 수 있는 수사학적 감수성이 없다면 빛을 발할 수 없는 법이다.

 

 

가와구치 요시카즈, <신비한 밭에 서서>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지 않아 스스로 불행에 빠지고 만다. 그리고 영혼은 항상 엉뚱한 것을 좇아 쓸데없이 먼 곳까지 찾아가 방황하고 있다. 신비스럽고 완전한 자신의 생명을 헛되이 연소시키고 있으며, 그래서 자신의 인생을 제대로 완수하고자 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사는 것에 소홀히하며 본연 그대로 지극히 자연스럽게 살기를 피하려고만 하는 안타까운 습성이 아닐 수 없다. 상대 세계에 살며 대립에 떨어지고 소아에 집착하여 하나를 둘로 나누고는 그 중 한쪽에만 사로잡혀 그것만을 옳다고 해서는 안 된다. 그곳은 한편이 밝으면 반드시 다른 한편은 어두운 어둠의 세계이다.

 

 

박웅현, <여덟단어>

내 답이 옳다. 다른 답은 내 답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의 인정, 현재에 집중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결국 이것은 자존과 연결됩니다.

 

 

크리스토퍼 시, <결정적 순간에 써먹는 선택의 기술>

자기과신에 빠지는 이유. 경험부족, 자아긍정. 자기에게 유리한 정보만 받아들이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확신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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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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