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 선생의 글중에 "사상이란 그것의 내용이 우리의 생활 속에서 실천됨으로써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라고 했다.
백성의 삶과 동 떨어진 정치, 지식, 사상은 죽은 것이다. 실천의 사상을 펼치는 실학자로서 이덕무 선생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본문발췌]
보고 느낀 그대로 진경을 표현하고 묘사하는 것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나 글을 짓는 문장가나 크게 다르지 않다. 글을 읽을 때 그림이 그려지면, 그 글은 진실로 좋은 글이다. 글이란 '마음으로 그리는 그림'이기 때문이다.
아침노을은 진사(辰砂)처럼 붉고, 저녁노을은 석류꽃처럼 붉다. - <이목구심서2>
사람의 시각이 아닌 하늘의 입장에서 보자면 우주 만물의 가치는 모두 균등하다. 단지 차이와 다양성이 존재할 뿐이다.
일반화의 오류란 부분을 갖고 전체인 양 착각하는 잘못을 말한다. 사물의 일부나 단면을 두고서 모든 것이 그렇다고 지레 짐작하기 때문이다. 획일성이 아닌 다양성의 눈과 마음을 갖추고 세상 만물과 우주 자연의 이치와 조화를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세상을 조롱하거나 세상에 분개하는 데서 멈춰서는 안 된다. 만약 진정 세상을 바꾸려고 고심한다면 마땅히 세상의 반도가 되어야 한다.
많이 듣고, 많이 보고, 많이 경험하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쓰는 것이 바로 <이목구심서>의 철학이다.
서민들이 가난을 편안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책망하는 것은 관대하지 못한 일이다. 무릇 '안(安)'의 참된 뜻은 스스로 편안하게 여기는 것이다. - <이목구심서 3>, 안빈낙도(安貧樂道)란 가난을 편안하게 여기고 도리를 추구하는 삶을 즐거워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하루하루 먹을거리를 마련하는 것도 힘겨운 사람에게 안빈낙도하지 않는다고 책망하는 것은 어질지 못한 짓이다. 자신의 기준에 모든 사람을 끼워 맞추려고 하는 아집이자 독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한가? 바로 관용의 정신이다. 그것은 나와 다른 남의 사정도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태도다. 진정한 '안'이란 스스로 편안하게 여기는 마음이다. 스스로 편안하지 않다면 '안'이 아니다. 어떻게 모든 사람이 그런 삶을 살 수 있겠는가? 남이 그런 삶을 살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것 자체가 이미 '불안'이다. 스스로 편안하면 그뿐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 것, 그것이 '안'의 참된 의미다.
지식만 많은 사람보다는 지혜로운 사람이 낫다. 지혜는 지식을 통해 얻을 수도 있지만, 지식을 통하지 않고서도 얻을 수 있다. 지식의 덕목은 재능, 능력, 학식, 성공, 출세 같은 것들이다. 지혜의 덕목은 인내, 신중, 절제, 자기만족, 신의와 연대 등이다. 참된 지식은 지혜 없이 얻기 힘들지만, 참된 지혜는 지식 없이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지식으로 가득 찬 삶보다 지혜로 가득 찬 삶이 더 풍요롭다고 하겠다.
호기심과 상상력의 힘을 긍정해야 한다. 그 능력에 따라 인간의 미덕과 악덕, 행복과 불행, 환희와 고통, 현재와 미래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인간의 자유 의지에는 반드시 호기심과 상상력이 필요하다. 호기심과 상상력이 없다면 어떻게 새로운 세계, 자유로운 세상을 그려 볼 수 있겠는가? 새로운 발견과 발명, 그리고 창조의 진정한 에너지가 바로 어린아이의 호기심과 상상력 속에 존재한다.
명상은 단순하게 생각하면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는 것이다. 가만히 눈을 감고 마음을 들여다보라. 그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고 변하는지 살펴보라. 그러다 보면 마음을 괴롭히는 번뇌와 근심이 대개 특별한 이유가 없는 불안과 두려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또한 번뇌와 근심의 원인과 그것을 해소하는 방법조차도 모두 자신의 마음속에 있음을 알게 된다. 마음을 관찰하는 지점 곧 관점의 변화와 전환에 따라 번뇌와 근심의 의미와 가치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강자에게는 강하게, 약자에게는 약하게 살기 위해서는 두 가지 구걸하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하나는 돈과 권력을 구걸하는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나를 알아 달라고 구걸하는 마음이다. 돈과 권력을 구걸하면 권세와 이익을 건네주는 자에게 잘 보이려고 하기 때문에 비굴해진다. 나를 알아 달라고 구걸하면 명예와 출세를 건네주는 자에게 인정받으려는 마음이 마치 독버섯처럼 자라난다. 누군가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과시욕이다. 과시욕은 약자에게 강자로 군림하려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남이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거나 즐기지 말라. 그저 스스로 하고 싶고 좋아하는 것을 하면 그뿐 아니겠는가. 그러면 원망하고 비방하는 마음은 애쓰지 않더라도 저절로 사라진다.
옛사람이 남긴 말 중 윤휴의 "천하의 진리란 한 사람이 모두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가장 좋아한다. 진리를 알게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계속 거기에만 머무를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순간부터 그는 진리로부터 멀어진다. 진리란 결코 절대적이지도 고정불변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상대적이고 가변적이다. 어떤 경우에는 옳지만 어떤 경우에는 그르고, 어떤 때에는 맞지만 어떤 때에는 틀리게 되는 것이 진리라는 놈이다. 따라서 어떤 것도 단정짓지 않고,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식견을 가져야 비로소 진리를 이해했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견해만이 천하의 진리라고 말하는 사람은 사실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자에 불과하다. 따라서 공정한 마음을 가져야 하며 편견을 가진 사람과는 다툴 필요도 없다는 이덕무의 말은 공자가 말한 중용의 철학, 붓다가 말한 중도의 길, 박지원이 말한 중간의 이치와 맥락이 같다.
최근 날마다 일과로 책을 읽으면서 네 가지 유익함을 깨달았다. 학문과 식견이 넓고 정밀하고 자세해 옛일에 통달하거나 뜻과 재주에 도움이 되는 점은 상관하지 않는다. 첫째, 굶주릴 때 소리 높여 독서하면 그 소리가 곱절이나 낭랑하고 부드러워 이치와 취지의 맛을 느끼게 되어 배고픔을 깨닫지 못하게 된다. 둘째, 약간 추울 때 독서하면 기운이 소리를 따라서 두루퍼져 나가 몸 안이 훈훈해져 추위를 잊어버리게 된다. 셋째, 근심과 걱정으로 마음이 괴로울 때 눈은 글자에 두고 마음은 이치에 몰입해 독서하면 천 가지 생각과 만 가지 잡념이 일시에 사라지게 된다. 넷째, 기침병을 앓고 있을 때 독서하면 기운이 통하고 부딪치지 않게 되어 기침 소리가 갑자기 그치게 된다. - <이목구심서 3>, 독서의 네 가지 이로움을 알았다. 그러나 어떻게 독서해야 할지는 잘 모를 때 참고할 만한 글이 있다. 류성룡은 박학(博學), 심문(審問), 신사(愼思), 명변(明辯), 독행(篤行)의 다섯 가지 독서 방법을 말하면서, 모두 '생각하는 것'을 중심으로 독서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했다. 정약용은 이 다섯 가지 독서 방법을 구체적으로 밝혀 놓았다. 첫째 박학은 "두루 넓게 배운다"는 말이다. 둘째 심문은 "자세히 묻는다"는 말이다. 셋째 신사는 "신중하게 생각한다"는 말이다. 넷째 명변은 "명백하게 분별한다"는 말이다. 다섯째 독행은 "진실한 마음으로 성실하게 실천한다"는 말이다. 출처는 <다산시문집>의 <오학론>이다.
신선이란 별다른 것이 아니다. 만약 사람들이 붐비는 저잣거리 한복판에 있더라도 잠시라도 그 마음에 걸리거나 얽매이는 것이 없다면, 바로 그 순간 신선이 된다. 산속 깊숙이 몸을 숨기고 세상을 멀리 등진 채 사는 사람이 신선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비록 그윽한 산속에 거처하면서 세상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고 해도 마음에 걸리거나 얽매이는 것이 있다면 범인(凡人)에 불과하다. 세상에 나도는 온갖 종류의 종교 서적 가운데 볼 만한 글을 찾기란 쉽지 않지만, 유독 불교의 원시 경전인 <숫타니파타>에 나오는 이런 말만은 세상 그 어떤 것보다 좋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만약 이러한 순간이 짧든 길든 자신의 마음속에 자리한다면, 그때만큼은 신선이 아니라 부처라고 해도 괜찮을 것이다. 글을 쓰는 것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어떤 때는 하루에 이백 자 원고지 백 장을 가득 채우고도 모자랄 만큼 글을 쓸 수 있다가도, 어떤 때는 하루가 아니라 일 년이 다 지나가도록 단 한 글자도 쓰지 못하기도 한다. 왜 그럴까? 마음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을 때는 애써 쓰려고 하지 않아도 술술 글이 나오지만, 마음속 한 귀퉁이일망정 걸리거나 얽어매는 것이 있으면 단 한 글자도 쓰고 싶지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종 사람들을 만나 어떻게 글을 쓰는지에 대해 말할 때면 다음과 같이 토로하고는 한다. "숙제하듯이 쓰는 글이 가장 나쁘다. 숙제는 내가 하고 싶은 공부가 아니다. 그저 다른 사람에게 꾸중을 듣지 않을까 무서워 마지못해 하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대개 참고서 모범답안 따위를 그대로 옮겨 적는 경우가 다반사다. 내가 한 것이지만 사실상 내가 한 것이라 말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숙제다. 또한 목적이 따로 있거나 남을 위해 쓰는 글이 가장 좋지 않다. 십중팔구 자신이 정말 쓰고 싶은 글이 아니라 남이 원하는 형태의 글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글은 진실로 '내가 쓴 글'이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자신이 쓰고 싶다는 마음 외에 아무런 다른 목적도 이유도 없이 써야 비로소 좋은 글을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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