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과 로봇을 통해 인간은 좀더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다. 그러나 그 자유와 여가의 시간을 비주체적 미디어소비와 게임에 뺏길지 모른다.

 

 

[본문발췌]

 

 

사람의 판단은 고유한 상황에서 활용되고 그 패턴을 정형화시킬 필요가 없는 유연성을 갖지만 컴퓨터에겐 이러한 유연함이 없다. ... 기계가 사람처럼 유연한 판단을 하게 하려면 고유한 상황도 정밀하게 패턴화해서 그에 맞는 대응 절차를 입력해야 한다. 컴퓨터가 상황에 따라 적절하고 유연한 판단을 내린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알고리즘의 정교한 설정에 따른 결과다.

 

 

자율주행 상황의 딜레마는 우리의 삶이 알고리즘의 세계로 변환되고 있음을 알려준다. 사람의 판단과 행동이 언제나 합리적이지도 않고 최선의 결과를 만들지도 못하지만 그에 대한 책임은 우연과 무작위, 그리고 무지의 장막으로 보호되어왔다. '실수'라는 것은 사람에게 허용된 자유의 영역이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가 로봇과 인공지능에 의존하고 위임한다는 것은 이러한 우연과 무작위의 세계를 벗어난다는 의미다. 우리는 사람과는 달리 기계에 대해서는 너그러울 수도, 자유를 부여할 수도 없다.

 

 

기계 처리와 인공지능이 발달할수록 인간 고유의 사고력과 통찰력이 중요해진다. 두 개 이상의 두뇌를 굴리려면 제1 두뇌가 더 기민하고 정확하게 작동해야 한다. 슈퍼컴퓨터 수준의 외뇌를 손에 쥐게 됐다는 것은 우리가 엄청난 능력을 부여받은 존재라는 의미다. 외뇌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개인의 능력과 삶의 질이 달라지는 세상이 도래했다. 이런 환경에서 진짜 중요한 것은 외뇌와 도구는 항상 제1 두뇌의 명령과 조작에 따라 움직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백과사전의 쇠락은 정보의 디지털화에서 비롯한다. 아날로그 시대에 개별성과 유한성을 지녔던 선형적 정보가 디지털 환경에서 비선형적으로 달라지면서 연결성과 무한성을 지니게 됐다. 뛰어난 연결성은 정보에 시간 축이라는 새로운 차원을 부여했고 정보의 실시간성이 부각되었다. 지식의 규모와 구조, 속성이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이다.

 

 

모든 정보는 '절대 지식'이 될 수 없고 유효기간과 반감기를 가진 '가변적 지식'이라는 통찰의 힘은 디지털 시대에 더욱 두드러진다. 위키피디아는 '지식의 반감기'가 점점 단축되는 환경에 적합한 지식체계다. 온라인 백과 위키피디아의 가장 큰 특징은 다중이 참여하는 열린 편집체계라는 점 못지않게 '빨리빨리'라는 뜻의 '위키'처럼 빠른 속도로 지속 변화하는 지식의 진화 구조에 최적화된 체계라는 점이다. 위키피디아의 장점은 정보의 '정확성'과 '불변성'이 아니라 '가변성'과 '신속성'이다. 권력과 전문성을 지닌 소수가 지식과 정보의 생산과 유통을 도맡던 시절에 비해 누구나 정보에 접근하고 생산에 참여하는 디지털 환경에서 지식의 변화속도는 말할 수 없이 빨라졌기 때문이다. 위키피디아는 '지식의 반감기'가 단축되는 환경에 최적화한 열린 지식체계이지만, 지식의 가변성은 장점은 동시에 단점이다. 즉 위키피디아의 정보는 기본적으로 '최종적 지식'이 되기 어렵다. 위키피디아를 만든 지미 웨일스는 "위키피디아를 잘 쓰는 방법은 지식의 최종 지점이 아닌 출발 지점으로 사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지식과 교육 시스템은 언제나 학습자에게 호기심과 동기를 제공하고 지식의 출발 지점을 알려줄 따름이다. 이후는 학습자 스스로 찾아가야 하는 여정이다.

 

 

내가 무엇을 알고 있고 또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로봇과 다른 지적 존재로서 성장할 첫걸음이다.

 

 

왜 사람에게 일자리가 필요한지는 프랑스의 계몽사상가 볼테르가 1759년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에서 명확하게 알려주었다. "노동을 하면 우리는 세 가지 악에서 멀어질 수 있으니, 그 세 가지 악이란 바로 권태, 방탕, 궁핍이라오."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도 <행복의 정복>에서 인간은 권태, 죄의식, 피해망상증 때문에 불행해진다며 열정, 사랑, 노력과 체념 그리고 일이 행복을 정복하는 중요 도구라고 주장했다. 행복하고 보람 있는 삶에 일이 필수적이라는 것은 굳이 부연할 필요가 없는 상식이다.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었던 여가가 대중사회에서 대중화, 민주화되었다는 것은 여가 활동이 누구나 손쉽게 구매하고 소비할 수 있는 상품이 되었다는 의미다. 대표적인 것이 여행이다. 미국의 역사학자 대니얼 부어스틴은 1962년 <이미지의 환상>에서 지난날 일종의 모험이자 '수고로운 일travail'로서의 고유한 경험이던 여행travel이 대중사회화와 상품화로 인해 누구나 구매할 수 있는 관광tour으로 변한 현실을 지적했다. 미지의 모험이자 예측 불가능한 경험의 연속이라는 여행의 본질은 사라지고 모든 과정이 예측되고 통제되는 준비된 '상품'으로서의 이미지만 남아 대중적으로 소비되는 현실을 꼬집은 것이다. 수고로움과 위험을 동반한 '트래블'이 '투어'가 되면서 여행의 진짜 경험은 사라져버리고 사진 찍기용 상품이 되어버린 가짜 사건pseudo-event의 연속이 되어버린 것이다.

 

 

측정되는 과학의 시간은 균일하지만 우리가 지각하는 생활 속의 시간은 주관적이다. <슈피겔> 편집장 출신의 독일 과학저술가 슈테판 클라인은 <시간의 놀라운 발견>에서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은 시간과는 별 관계가 없으며, 어떤 태도와 관점을 갖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현대인들의 시간 기근 현상은 자신에게만 하루 24시간이 주어진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아니라 스스로 지각하는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주관적 감정 상태이다. 자신의 욕망과 목표, 사회적 기대 수준에 비춰보아 자신의 시간이 부족하다는 자각에서 비롯하는 감정인 것이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여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자유시간을 즐기는 것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며 별다른 기술도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다. 자유시간은 일보다 즐기기가 어렵다. 여가를 효과적으로 쓰는 방법을 알지 못하면 여가가 아무리 생겨도 삶의 질은 높아지지 않는다. 여가를 효과적으로 쓰는 것은 자동적으로 획득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니다."

 

 

비주체적인 미디어 소비에 지나치게 많은 여가시간을 쏟아붓느라 적극적으로 사고하고 활동할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는 "늘 바빠서 하고 싶은 일을 할 틈이 거의 없다"라고 엉뚱한 핑계를 대는 것이 문제일 따름이다.

 

 

뇌에는 사고, 기억, 판단 등 인지활동을 할 때가 아니라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고 멍하게 있을 때 비로소 활성화되는 일련의 부위가 있다는 연구다. 편안하게 아무 생각 없이 쉬는 동안 활성화되는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는 자아 성찰, 사회성과 감정, 창의성을 지원하는 두뇌의 부위라는 것이 잇단 연구로 밝혀지고 있다. 멍하게 쉬어야 비로소 가장 사람다운 기능이 두뇌에서 작동한다는 발견은 우리의 삶에서 휴식과 여가가 갖는 의미가 지대함을 알려준다.

 

 

애착 감정은 상대의 반응이 얼마나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냐 못지않게 내가 얼마나 그 대상에 주의와 감정을 기울였느냐에 달려 있다. <어린 왕자>에서 사막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네 장미꽃을 그렇게 소중하게 만든 것은 그 꽃을 위해 네가 들인 시간이란다"라고 일러주었듯이 말이다. 우리에게 편리함과 안전함을 제공해주고 감성적 피드백을 보내는 로봇에 대해 우리의 애착감은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

 

 

로봇과의 교감이 가능해지는 것은 로봇이 사람을 만족시키기 위해 사람을 모방해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표현 전략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로봇이 감정을 지니고 정서적 표현 능력을 갖춘 것이 아니라 사람이 로봇에게 그런 감정이 있다고 믿고 로봇의 감정적 표현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이다. 로봇이 섬세하게 나의 기분을 맞추고 반응하는 덕분에 내가 로봇을 나에 대해 잘 아는 생명체처럼 여기더라도 이는 로봇의 내부가 아니라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공감하는 감정적 동물이다.

  • 공감과 돌봄은 힘들고 수고로워 보이지만 생명체로서 우리가 진정 사람다워지는 본질적 속성이다. 

  • 다른 사람의 고통과 기쁨에 공감할 줄 아는 능력 덕분에 사회적 존재로서 인류는 생존하고 번영할 수 있다.

  • 인간관계에서 만족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동시에 피로감을 느끼는 배경에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감정 상태를 경험하게 된다는 점과 상대의 요구와 기대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점이 있다. 일라이자의 사례처럼 로봇과의 관계는 교감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상대가 나에게 요구하는 것이 없는, 의무 없는 편안한 관계다.

  • 사람에게 감정은 신체의 통증이나 고통과 유사하다. 통증은 피하고 싶은 괴로운 현상이지만 사실은 생존을 돕는 생명유지 장치이다. 통증 덕분에 우리는 위험과 신체의 상태를 지각할 수 있고 더 큰 고통을 피하면서 생명을 보존할 수 있다. 감정도 유사하다. 감정에 의해 좌우되는 존재인 우리는 원하지 않더라도 다양한 감정들을 느끼도록 되어 있다.

 

멀티태스킹의 부정적 효과를 세계적 논쟁거리로 만든 카의 2011년 저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정보기술과 호기심의 미묘한 관계를 잘 보여준다. 인터넷이 하이퍼링크와 멀티태스킹 기능은 지적 추구에 최고의 환경을 제공한다. 모든 질문과 호기심에 대해 즉시 답을 줄 수 있다. 원하는 정보를 찾기 위해 도서관의 도서목록 카드와 서가를 뒤지거나 책장을 넘길 필요 없이 바로 원하는 정보를 눈앞에 가져다준다. 컴퓨터 한쪽에 위키피디아나 검색 창을 열어놓고 과업을 수행하다가 모르는 것이나 궁금한 것이 생기면 검색해보고 그 정보를 활용해 과업을 진전시키고 심화시킬 수 있는 구조다. 하지만 현실은 이와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하이퍼링크와 멀티태스킹은 호기심을 숙성시킬 수 있는 틈(스콜레)을 없애버렸다. 하나에 집중하지 못하고 쉴 새 없이 새로운 정보에 탐닉함에 따라 집중력과 깊은 사고력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이 카의 지적이다.

 

 

누구나 갖고 있는 이 능력이 장인 노동의 기본을 이룬다. 초점을 맞추고localize, 질문하고question, 문제를 설정하는open up 능력이다. 초점 맞추기는 작업 대상을 구체화하는 일이고, 질문은 그 대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특징을 파악하는 일이고, 문제 설정은 무의미해 보이는 요소들 간의 연관성을 찾아내는 직관적 도약과 개방적 사고를 통해서 대상의 의미를 확장하는 일이다. 이는 사실상 호기심과 질문이 작동하는 과정을 단계별로 구분한 것이다. 호기심을 숙성시켜서 제대로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추구해가는 것이 탁월함을 만든다는 통찰이다. 더욱이 지적이고 정신적인 작업 위주인 학자나 사상가가 아닌, 자신의 몸을 도구로 사용해 예술적 경지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육체적 노동을 필수로 하는 장인들의 경우에도 질문은 핵심적 가치를 갖는다.

 

 

예측 불가능의 복잡한 상황에서 가장 유용한 도구는 유연함이고 이는 호기심으로 나타난다.

 

 

우리에게 기억은 의도적 망각과 삭제의 과정을 거친 결과이고 추상화 작용의 핵심이다. 

 

 

망각은 인간 기억 기능의 결함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추상화와 일반화를 가능하게 해서 창의력과 통찰력을 발휘하도록 하는 전략적 선택이다. 

 

 

기억을 외부에 의존하는 행위가 스스로 무지함을 깨닫지 못한 채 자신에게 지식이 있는 것으로 잘못 판단하게 만든다는 말은 인터넷 환경에서 더욱 돋보이는 통찰이다.

 

 

기억은 우리가 주의력을 집중하는 정도에 따라 자세하게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외부 기억장치에 기록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면 뇌는 그 대상에 주의력을 덜 할당하게 된다.

 

 

우리가 경험과 학습을 통해 형성하는 기억의 총체가 곧 의식이자 삶이다. 풍부한 기억이 곧 풍요로운 삶이다. 친구와 가족, 배우자가 각별한 것도 서로 공통된 기억을 통해 삶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 기억은 비록 부실하지만 우리가 부여받은 값진 선물이다.

 

 

메리 올리버는 이렇게 말한다. "이 우주에서 우리에겐 두 가지 선물이 주어진다. 사랑하는 능력과 질문하는 능력. 그 두 가지 선물은 우리를 따뜻하게 해주는 불인 동시에 우리를 태우는 불이기도 하다." 시인이 말하는 사랑하는 힘과 질문하는 힘은 감정과 호기심을 말한다. 기계가 따라 할 수 없는 사람만의 특성인 사랑과 호기심은 감정적 결핍과 지적 결핍에서 나온다. 감정과 호기심은 우리를 따뜻하게 해주는 마법의 불인 동시에 우리 자신을 불쏘시개와 연료로 만들어버리는 치명적인 에너지라는 시인의 통찰은 인공지능 시대에 사람은 어떻게 사람다울 수 있는지를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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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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