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진 것이 많을수록 선택과 움직임의 제한이 생기고 자유도가 낮아진다. 비워야만 채울 수 있다는 가르침! 

 

 

[본문발췌]

 

 

단순하면서도 가난하되, 절제된 아름다움을 지닌 삶, 그것이 내가 스님의 처소에서 받은 첫 느낌이다. 그리고 그것은 많은 물건 더미와 장식물을 자랑하는 '풍요로운 감옥'들에 대한 서늘한 깨우침이 아닐 수 없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밖에서 오는 행복도 있겠지만 안에서 향기처럼, 꽃향기처럼 피어나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다. 그것은 많고 큰 데서 오는 것이 아니고 지극히 사소하고 아주 조그마한 데서 찾아온다. 조그만 것에서 잔잔한 기쁨이나 고마움 같은 것을 누릴 때 그것이 행복이다. 

 

 

아무리 가난해도 마음이 있는 한 다 나눌 것은 있다. 근원적인 마음을 나눌 때 물질적인 것은 자연히 그림자처럼 따라온다. 그렇게 함으로써 내 자신이 더 풍요로워질 수 있다. 세속적인 계산법으로는 나눠 가질수록 내 잔고가 줄어들 것 같지만, 출세간적인 입장에서는 나눌수록 더 풍요로워진다.

 

 

주어진 가난은 우리가 극복해야 할 과제이지만, 스스로 선택한 맑은 가난, 즉 청빈은 절제된 아름다움이며 삶의 미덕이다. 풍요 속에서는 사람이 타락하기 쉽다. 그러나 맑은 가난은 우리에게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 주고 올바른 정신을 지니게 한다.

 

 

우주는 한정되어 있지 않다. 우리가 마음의 문을 닫고 옹졸하게 산다면 그만큼 비좁아지고 옹색해진다. 마음을 활짝 열고 누군가에게 친절하고 사랑한다면 그만큼 자기 자신이 선한 기운으로 활짝 열리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를 기쁘게 해주면 내 자신이 기뻐지고, 누군가를 언짢게 하거나 괴롭히면 내 자신이 괴로워진다. 이것이 바로 마음의 메아리다. 마음의 뿌리는 하나이기 때문에 그렇다.

 

 

행복의 비결은 필요한 것을 얼마나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져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옛말에 '위에 견주면 모자라고 아래에 견주면 남는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행복을 찾는 오묘한 방법이 어디에 있는지를 깨우쳐 주고 있다. 안으로 충만해지는 일은 밖으로 부자가 되는 일에 못지 않게 인생의 중요한 몫이다. 인간은 안으로 충만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아무 잡념 없이 기도를 올릴 때 자연히 마음이 넉넉해지는 것을 느낀다. 그때는 삶의 고민 같은 것이 끼어들지 않는다. 내 마음이 넉넉하고 충만하기 때문이다.

 

 

행복의 조건은 무엇인가. 아름다움과 살뜰함과 사랑스러움과 고마움에 있다. 나는 향기로운 차 한 잔을 통해서 행복을 느낄 때가 있다. 내 삶의 고마움을 느낄 때가 많다. 산길을 지나다가 무심히 피어 있는 한 송이 제비꽃 앞에서도 얼마든지 나는 행복할 수 있다. 그 꽃을 통해서 하루의 일용할 양식을 얻을 수 있다. 또 다정한 친구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 전화 한 통화를 통해서도 나는 행복해진다. 행복은 이처럼 일상적이고 사소한 데 있는 것이지 크고 많은 데 있지 않다. 일상적인 경험을 통해서 늘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필요에 따라 살되 욕망에 따라 살지는 말아야 한다. 욕망과 필요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욕망은 분수 밖의 바람이고, 필요는 생활의 기본 조건이다. 하나가 필요할 때는 하나만 가져야 둘을 갖게 되면 당초의 그 하나마저도 잃게 된다.

 

 

불필요한 것들을 다 덜어내고 꼭 있어야 할 것과 있어야 되는 것으로만 이루어진 어떤 결정체 같은 것, 그것이 단순과 간소이다. 꼭 있어야 되는 것으로만 이루어진 복잡한 것을 다 소화하고 난 다음의 어떤 궁극적인 경지이다. 

 

 

단순과 간소는 다른 말로 하면 침묵의 세계이다. 또한 텅 빈 공의 세계이다. 텅 빈 충만의 경지이다. 여백과 공간의 아름다움이 이 단순과 간소에 있다. 우리는 흔히 무엇이든지 넘치도록 가득 채우려고만 하지 텅 비우려고는 하지 않는다. 텅 비워야 그 안에서 영혼의 메아리가 울린다. 텅 비어야 거기 새로운 것이 들어찬다. 우리는 비울 줄을 모르고 가진 것에 집착한다. 텅 비어야 새것이 들어찬다. 모든 것을 포기할 때, 한 생각을 버리고 모든 것을 포기할 때 진정으로 거기서 영혼의 메아리가 울린다. 다 텅 비었을 때 그 단순한 충만감, 그것이 바로 하늘나라이다. 텅 비어 있을 때,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고 텅 비었을 때 그 단순한 충만감. 그것이 바로 극락이다.

 

 

절제된 미덕인 청빈은 그 뜻이 나눠 갖는다는 뜻이다. 청빈은 그저 맑은 가난이 아니라, 그 원뜻은 나눠 가진다는 뜻이다. 청빈의 상대 개념은 부가 아니라 탐욕이다. 한자로 '탐貪'자는 조개 '패' 위에 이제 '금'자이고, 가난할 '빈貧'자는 조개 패 위에 나눌 '분'자이다. 탐욕은 화폐를 거머쥐고 있는 것이고, 가난함은 그것을 나눈다는 뜻이다. 따라서 청빈이란 뜻은 나눠 갖는다는 뜻이다. 사람들에게 만일 가난이 없었다면 나눠 가질 줄도 몰랐을 것이다. 내가 가난해 봄으로써 우리 이웃의 가난, 어려움에 눈을 돌리게 된다.

 

 

만족할 줄 알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서 모든 게 긍정적으로 일이 풀린다. 그러나 만족할 줄 모르고 거기서 다시 또 뭔가를 하려고 하면 자기 앞에 돌아온 몫까지도 걷어차 버린다.

 

 

어떤 것에도 스스로 소유당하지 말며, 자신의 삶을 살되 삶에 휘둘리지 말라.

 

 

행복의 척도는 필요한 것을 얼마나 많이 갖고 있는가에 있지 않다. 불필요한 것으로부터 얼마나 벗어나 있는가에 있다. 홀가분한 마음, 여기에 행복의 척도가 있다. 남보다 적게 갖고 있으면서도 그 단순과 간소함 속에서 삶의 기쁨과 순수성을 잃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삶을 살 줄 아는 사람이라는 말을 거듭 새겨 두기 바란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궁색한 빈털터리가 되는 것이 아니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무소유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때 우리는 보다 홀가분한 삶을 이룰 수가 있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넘치는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 이것은 소극적인 생활 태도가 아니라 지혜로운 삶의 선택이다.

 

 

내가 아무것도 갖지 않았을 때 온 세상을 차지할 수 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가졌다고 할 때 크건 작건 그것의 노예가 된 것이다. 그것으로부터 소유를 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자유해진다.

 

 

단순한 삶이 마음을 평온하게 하고 근원적인 눈을 뜨게 한다. 단순한 삶을 이루려면 투철한 자기 억제와 자기 질서를 가져야 한다. 보지 않아도 좋을 것은 보지 말고, 듣지 않아도 좋을 것은 듣지 말고, 읽지 않아도 좋을 것은 읽지 말며, 먹지 않아도 좋은 음식은 먹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될 수 있는 한 가려 가면서 적게 보고, 적게 듣고, 적게 입고, 적게 먹어야 한다. 그래야 인간이 성숙해지고 승화될 수 있다.

 

 

보다 적은 것이 보다 귀한 것이고, 결과적으로도 넉넉한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이런 생활 태도를 소극적인 생활 태도라고 잘못 알아선 안 된다. 그것은 지혜로운 삶의 선택이다. 행복의 조건은 결코 크거나 많거나 거창한 데 있지 않다. 작은 일을 갖고도 우리는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다.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보면서도 행복해질 수 있고, 저녁 노을을 보면서도 하루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우리가 너무 거창한 데서, 큰 데서, 야단스러운 데서 행복을 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그런 행복도 놓치고 만다. 행복의 조건은 지극히 일상적이고 작은 일 속에 있다. 우리가 그걸 찾아내면 되는 것이다. 조촐한 삶과 드높은 영혼을 지니고 자기 자신답게 살줄 안다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라도 행복할 수 있다. 

 

 

잡다한 정보와 지식의 소음에서 해방되려면 우선 침묵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침묵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는 그런 복잡한 얽힘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내 자신이 침묵의 세계에 들어가 봐야 한다. 우리는 얼마나 일상적으로 불필요한 말을 많이 하는가. 의미없는 말을 하룻동안 수없이 남발하고 있다. 친구를 만나서 얘기할 때 유익한 말보다는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을 얼마나 많이 하는가. 말은 가능한 한 적게 해야 한다. 한 마디로 충분할 때는 두 마디를 피해야 한다. 인류 역사상 사람답게 살다간 사람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침묵과 고독을 사랑한 사람들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시끄러운 세상을 우리들 자신마저 소음이 되어 시끄럽게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무엇인가 열심히 찾고 있으나, 침묵 속에 머무는 사람들만이 그것을 발견한다. 말이 많은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그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든간에 그 내부는 비어 있다.

 

 

불교 경전은 말하고 있다. 입에 말이 적으면 어리석음이 지혜로 바뀐다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참을 수 있어야 한다. 생각을 전부 말해 버리면 말의 의미가, 말의 무게가 여물지 않는다. 말의 무게가 없는 언어는 상대방에게 메아리가 없다.

 

 

오늘날 인간의 말이 소음으로 전락한 것은 침묵을 배경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말이 소음과 다름없이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말을 안해서 후회되는 일보다도 말을 해버렸기 때문에 후회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들의 목표는 풍부하게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풍성하게 존재하는 데 있다.

 

 

나는 지금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곳에 살고 있다. 물론 내가 사는 환경이 궁핍하고 거의 원시적인 상태이기 때문에 자랑할 것은 못 되지만 우선 순수한 내가 존재할 수 있어서 좋다. 나는 그냥 그곳에 잠시 있을 뿐이다. 나그네처럼 있는 것이다. 수행자에게 영원한 거처가 어디 있는가. 나그네처럼 잠시 머물러 있는 것이다.

 

 

작은 선이라도 좋으니 하루 한 가지씩 행해야 한다. 작고 미미한 것일지라도, 남이 알아 주지 않을지라도, 그것을 행해야 한다. 그것이 내 삶의 질서이다. 하루 한 가지씩 작은 선이라도 행해야 한다. ...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룻동안에 한 가지 착한 일을 듣거나 행할 수 있다면 그날 하루는 헛되이 살지 않고 잘 산 것이다. 참으로 사람의 도리를 다했는가, 하루 한 가지라도 이웃에게 덕이 되는 행동을 했는가 안했는가에 의해서 그날 하루를 잘 살았는가 못 살았는가를 판가름할 수 있다. 여기에서 삶의 의미와 가치가 결정된다.

 

 

친절과 사랑은 우러나는 것이다. 우리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사람은 친절과 사랑 안에서 성장한다. 자비를 베풀라, 사랑해라, 여러 말이 있지만 친절하다는 것, 이것이 인간의 미덕이다.

 

 

'당신의 오늘 일은 단 한 사람이라도 당신에게 고맙습니다라고 마음으로부터 인사를 하고 싶어하는 그런 친구를 만드는 일이다.'

 

 

명상은 조용히 지켜보는 일이다. 사물의 실상을 조용히 지켜보고 내 내명의 흐름을, 내 생각의 실상을 조용히 지켜보는 일이다. 안팎으로 지켜보는 일이다. 보리달마는 '관심일법觀心一法 총섭제행總攝諸行'이라고 말했다. '마음을 살피는 이 한 가지 일이 모든 현상을 거둬 들인다'는 뜻이다. 지식은 기억으로부터 온다. 그러나 지혜는 명상으로부터 온다. 지식은 밖에서 오지만 지혜는 안에서 움튼다.

 

 

소유란 이런 것이다. 우리가 소유한 것만큼 편리한 것도 있지만 소유로부터 소유를 당하는 측면이 있다. 부자유해지는 것이다. 우리가 애지중지 아끼던 것이 파손됐거나 또는 잃어 버렸을 때 정신적인 상처도 동시에 뒤따른다. 가진 것만큼 집착이 커지기 때문에 그렇다.

 

 

나눔이란 무엇인가. 이미 받은 것에 대해 당연히 지불해야 할 보상의 행위이고 감사의 표현이다. 나눔으로써 이 세상을 제대로 건널 수 있다. ... 기쁨을 나누면 그 기쁨은 곱으로 늘어난다. 반대로 괴로운과 슬픔을 나눠 가질 때, 그 괴로움과 슬픔은 몇 곱으로 줄어든다. 나눔에는 이렇듯 미묘한 율동이 따른다. 관계는 일방적이지 않다. 서로 주고받으면서 이루어진다. 또한 그런 관계가 우리들 자신을 만들어간다.

 

 

세상의 유행을 따르는 사람들은 빨리 시든다. 세상의 유행을 좇다보면 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 중심을 지니고 사는 사람들은 항상 새롭다. 그것은 영원한 것이고 중심이 잡혀 있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전 존재를 기울여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면, 이 다음에는 더욱 많은 이웃들을 사랑할 수 있다. 이 다음 순간은 지금 이 순간에서 태어나기 때문이다. 사람은 바로 지금 이 순간에서 피어난다. 지금이 바로 그때이지 시절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거듭 말하지만, 하나가 필요할 때 둘을 가지려 하지 말라. 둘을 갖게 되면 그 하나마저 잃게 된다. 모자랄까봐 미리 걱정하는 그 마음이 바로 모자람이다. 그것이 가난이고 결핍이다.

 

 

크고 많은 것, 그것은 허한 것이다. 소유를 꼭 없어서는 안 될 것으로 제한하고 자제하는 것이 우리 정신을 풍요롭게 하는 길이다. 적게 가져야 더 많이 얻는다.

 

 

깨달음에 이르는 데는 오직 두 길이 있다. 하나는 자기 자신을 속속들이 지켜보면서 삶을 거듭거듭 개선하고 심화시켜 가는 명상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다. 명상이라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 삶을 스스로 늘 지켜보는 일이다. 그 다음은 사랑의 실천이다. 하나는 지혜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자비의 길이다.

 

 

가을은 잎이 가지를 떠나고, 열매가 나무를 떠나는 계절이다. 사람이 길을, 먼 길을 떠나고 싶어지는 계절이다. 다시 말해 반복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은 계절이다. 따라서 여행은 목적지에 도달하는 일이기보다 일상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데 그 일차적인 의미가 있다. 가끔은 자기 살던 곳을 떠나 볼 일이다. 떠나 보면 평소에 내가 어떻게 살았는가를 객관적인 시각에서 볼 수 있다. 새삼스럽게 자기 존재의 무게를 헤아릴 수 있다.

 

 

떠난다는 것은 곧 새롭게 만난다는 뜻이기도 하다. 만남이 없다면 떠남도 무의미하다. 출가는 빈 손으로 돌아가는 길이 아니다. 크게 버림으로써 크게 얻을 수 있다. 크게 버리지 않고는 결코 크게 얻을 수 없다. 적게 버리면 적게 얻을 수밖에 없다. 어중간하게 버리면 어중간하게 얻는다. 이것이 소유의 법칙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온 세상을 다 차지할 수 있다. 무엇인가를 가졌을 때 가진 것만큼 속박을 당한다.

 

 

모든 인간의 보편적인 출가는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탐욕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자기 그릇 밖의 욕망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둘째는 미움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후세 역사가들이 오늘날의 시대를 뭐라고 표현할 것인가. 아마도 증오의 시대라고 기록할 것이다. 서로 믿지 못하고 서로 미워하지 않는가. 어떤 것이 진정한 인간의 조건인가. 그것은 증오가 아니라 사랑이다. 사랑이 충만할 때 그는 비로소 사람이며, 사랑이 메마르고 증오로 가득찰 때는 그는 사람이 아니다. 사랑과 고통은 함께 있따. 막달라 마리아는 사랑과 고통이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예수가 죽은 날 비로소 알았다고 한다. 사랑은 고통이 포개어져 있음을 비로소 체험한 것이다. 어머니의 사랑 역시 포근하고 따뜻한 것인 동시에 그 속에는 아픔이 깃들어 있다. 그것이 자비慈悲이다. 자애로움과 슬픔이 함께 있는 것이다. 셋째는 무지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를 불교적인 용어로 바꾸면 무명이다. 밝음이 없다는 뜻이다.

 

 

어떤 이유와 인연으로 출가한 구도자가 되었든, 가장 중요한 것은 순간 순간을 사는 일이다. 현재의 이 순간 속에 자신을 불태우는 것, 그것이 곧 출가자의 자세이다. 사람이 불행하다는 것은 다른 의미가 아니다. 마지못한 삶, 순간 순간을 무의미하게 흘려 버리는 삶, 그것이 불행한 삶이다. 꽃처럼 거듭거듭 피어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늘 새롭게 피어날 수 있어야 한다. 즐겁게 살되 아무렇게나 살지 말아야 한다. 한 개인의 삶은 그 자신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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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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