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남에게 보여주고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 내 삶속에서 느끼는 것이다. 단순하고 작고 적은 것에 만족하며 삶을 즐길 수 있을 때 행복은 내 안에 있다.
[본문발췌]
먹고 자고 사랑할 때 인간이 행복을 느끼는 이유. 결국은 생존을 위해서다.
행복, 즉 쾌감을 느껴야만,
혹은 쾌감을 느끼기 위해 인간은 먹고 자고 사랑하는 데 몰두한다.
이 관점으로 보자면 행복은 삶의 최종 이유도 목적도 아니다.
생존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따라서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행복을 느끼는 것이다.’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인간의 모든 특성은 생존을 위해 최적화된 도구다. 제프리 밀러에 의하면, 신체적 특성뿐 아니라 고차원의 정신적인 특성도 이 '생존의 도구'의 역할을 한다. 피카소는 창의력을 발휘하기 위해 산것이 아니다. 보다 진화론적인 해석은 피카소라는 한 생명체가 그의 본질적인 목적(유전자를 남기는 일)을 위해 창의력이라는 도구를 사용했다고 보는 것이다. 마음의 정신적 산물들은 사실 몸의 번성을 위한 도구인 것이다.....행복감 또한 마음의 산물이다. 창의력과 마찬가지로 행복도 생존을 위한 중요한 쓰임새가 있는 것은 아닐까? 행복은 삶의 최종 목적이라는 것이 철학자들의 의견이지만, 사실은 행복 또한 생존에 필요한 도구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마치 피카소의 창의성 같은?
쾌의 느낌에 우리가 붙이는 명칭은 상황에 따라 다르다. 기쁘다, 재미있다, 통쾌하다, 즐겁다, 신난다, 좋다.... 그러나 모두 쾌가 원료인 경험이고, 이들은 행복감의 가장 기초적인 재료가 된다. 이런 쾌의 전구가 켜지며 발생하는 여러 세세한 감정을 묶어 심리학에서는 '긍정적 정서'라고 한다. 반대로 불쾌에 바탕을 둔 여러 감정(분노, 슬픔, 두려움, 외로움 등)을 묶어 '부정적 정서'라고 부른다.
문화, 나이, 성별에 관계없이 모든 인간의 감정은 쾌 혹은 불쾌의 두 바구니 중 하나에 반드시 담긴다. 그래서 희랍시대의 철학자부터 오늘날 행복 연구자들까지 쾌와 불쾌의 상대적인 비율을 행복의 중요한 기준으로 생각한다.
행복은 핵심은 부정적 정서에 비해 긍정적 정서 경험을 일상에서 더 자주 느끼는 것이다. 이 쾌락의 빈도가 행복을 결정적으로 좌우한다. 많은 현대인의 삶이 행복과녁을 제대로 못 맞추는 이유가 쾌락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기 때문이다.
행복감을 발생시키는 우리 뇌는 이처럼 사람에 '중독'되어 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래서 사회적 경험과 행복은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사회적 경험이 행복에 중요한것은 물론이고, 나는 한 발 더 나아가 행복감(쾌감)은 사회적 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존재하게 되었다고까지 생각한다.
스칸디나비아 행복의 원동력은 넘치는 자유, 타인에 대한 신뢰, 그리고 다양한 재능과 관심에 대한 존중이다. 그들 사회는 돈이나 지위 같은 삶의 외형보다 자신에게 중요한 일상의 즐거움과 의미에 더 관심을 두고 사는 곳이다.
시간은 기쁜 일도 슬픈 일도 생각보다 빨리 지운다.
범위 빈도 이론(range-frequency theory) : 극단적인 경험을 한 번 겪으면, 감정이 반응하는 기준선이 변해 그 후 어지간한 일에는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행복한 사람들은 '시시한' 즐거움을 여러 모양으로 자주 느끼는 사람들이다.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다 (Happiness is the frequency. not the intensity, of positive affect)
행복한 이들은 공연이나 여행 같은 '경험'을 사기 위한 지출이 많고, 불행한 이들은 옷이나 물건 같은 '물질' 구매가 많은 것으로 나타난다.
타인중심적인 생각은 행복 성취에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사회의 일원으로 살며 타인의 평가와 의견을 경청하고 존중하는 자세는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내 인생의 유일한 나침판이 되면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내 스스로 느끼고 생각하는 것보다 그에 대한 타인의 반응이 더 중요해진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삶을 경험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살게 된다..... 이렇듯 과도한 타인 의식은 집단주의 문화의 행복감을 낮춘다. 행복의 중요 요건 중 하나는 내 삶의 주인이 타인이 아닌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행복해지려면 다른 사람을 지나치게 신경 쓰지 마라" - 알베르트 카뮈
행복은 나를 세상에 증명하는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잣대를 가지고 옳고 그름을 판단할 필요도 없고, 누구와 우위를 매길 수도 없는 지극히 사적인 경험이 행복이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만나는 사람들보다(필요나 목적 때문에 만나는 자리) 만나고 싶어서 만나는 사람들이 많아야 한다.
가치 있는 삶을 살 것이냐, 행복한 삶을 살 것이냐는 개인의 선택이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점은 첫째, 이 둘은 같지 않다는 것이고, 둘째는 어디에 무게를 두느냐에 따라 삶의 선택과 관심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무엇이 가치 있는지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잣대가 필요하고, 많은 경우 그 잣대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평가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하고 싶은지보다 우선시 되는 것은 내 선택을 남들이 어떻게 평가하느냐다. 내가 지금 좋고 즐거운 것보다 남들 눈에 사려 깊고 힘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이 더 중요해진다. 앞에서 설명했듯 여기서 행복은 역풍을 맞기 시작한다.
행복은 거창한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경험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쾌락에 뿌리를 둔, 기쁨과 즐거움 같은 긍정적 정서들이다. 이런 경험은 본질적으로 뇌에서 발생하는 현상이기 때문에, 철학이 아닌 생물학적 논리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고혈압 환자에게 혈압을 낮추는 데 도움이 되는 생각을 자주 하라는 처방을 내리는 의사는 없다. 그러나 행복에 대한 지침들은 대부분 그렇다. "불행하다면 좀 더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말이다. 불행한 사람에게 생각을 바꾸라는 것은 손에 못이 박힌 사람에게 "아프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조언 하는 것과 비슷하다. 생각을 통해 바뀌는 것은 또 다른 종류의 생각이다. 행복의 핵심인 고통과 쾌락은 본질적으로 생각이 아니다.
행복에 대한 이해는 곧 인간이라는 동물이 왜 쾌감을 느끼는지를 이해하는 것과 직결된다. 쇼팽과 세익스피어도 우리에게 즐거움을 준다. 그러나 가장 본질적인 쾌감은 먹을 때와 섹스할 때, 더 넓게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온다. 진화의 여정에서 쾌감이라는 경험이 탄생한 이유 자체가 두 자원(생존과 번식)을 확보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한국인이 하루 동안 가장 즐거움을 느끼는 행위는 먹을 때와 대화할 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 그것이 바로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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