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주와 커피는 품종, 자라난 토양, 그리고 가공되는 방식에 따라 다양한 맛과 향, 빛깔을 가지고 있다. 건축물도 지어진 자연, 사회, 문화적인 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 밖에 없는데 편리와 효율을 강조하는 획일적인 건축 풍조에서는 삶의 풍요로움과 감성을 느끼기 어렵다.

 

 

[본문발췌]

 

 

이벤트 밀도: 100미터 구간에 있는 입구의 수. 횡단보도 없이 건너갈 수 있는 경우에는 거너편의 입구 수도 포함.

걷고 싶은 거리는 결국에는 얼마나 자주 다양한 가게가 들어서 있느냐의 물리적 조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다. 도시를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서는 대형 콤플렉스 건물(문화 상업 복합 시설)을 만들더라도 거리와 접한 면에는 작은 소규모 가게들이 많이 배치되도록 디자인해야 하는 것이다. 이벤트 밀도가 높은 거리는 우연성이 넘치는 도시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사람들이 걸으면서 더 많은 선택권을 갖는 거리가 더 걷고 싶은 거리가 되는 것이다. 더 많은 선택권을 가진다는 것은 자기 주도적인 삶을 영위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자기주도적인 삶도 우리가 원하는 것이고 우연성이 넘친다는 것은 우리가 도시에 사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거리가 더 많을수록 우리의 삶은 더 풍요로워질 것이다.

 

 

필자는 예술을 '인간의 감정을 일으키는 무엇'이라고 정의한다. 마음속이 잔잔한 호수처럼 조용하다가도 어떤 노래를 듣거나 소설을 읽으면 마음속에 새로운 감정이 솟아난다. 그러면서 우리는 살아 있다는 것과 자신의 인간됨을 깨닫게 되는 것 같다. 배불리 먹고 잘 잤다고 인간다워지는 것은 아니다. 대신 가슴속에 무엇이 됐든 감정이 솟아날 때 비로소 인간됨을 느낀다. ... 20세기 초반에 근대 건축의 거장 르 코르뷔지에는 주택을 "사람이 살 수 있게 하는 기계"라고 정의 내렸다. 건축에서 기능적인 면을 강조한 것이다. 하지만 기능은 건축이라는 자전거의 두 바퀴 중 하나에 불과하다. 자전거가 굴러가려면 두 개의 바퀴가 필요하듯 건축은 기능 이외에도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바퀴가 필요하다. 현대 도시의 건축에서 부족한 부분이 이 부분이다. 기능적으로 작동하는 도시를 만들기 위해서 빠른 자동차를 위한 길과 넓은 집들을 추구했으나 정작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감성을 깨우는 공간을 놓쳐 온 것이다. 계절에 어울리는 한 곡의 노래가 우리의 삶의 의미를 깨우쳐 주는 것같이 감성을 울리는 건축이 필요하다.

 

 

클래식 음악, 그림, 조각만이 예술이 아니다. 건축도 그 나라의 모든 것을 담아 후대에 남겨 주는 예술이고 문화고 정신이다. 옛날에 왕이 성당 공사 현장에서 석공 노동자에게 무슨 일을 하는고 물었다고 한다. 한 명은 돌을 깎고 있다고 하고, 한 명은 성당을 짓고 있다고 하였다. 두 번째 같은 생각을 가진 석공이 있었기에 유럽의, 여러 나라는 훌륭한 건축 문화를 후대에 남길 수 있었다. 우리도 그런 문화가 자리 잡기를 기대해 본다. 우리는 건축 자재로 건축물을 만들지만, 시간이 지나면 건축이 다시 우리의 삶과 정신과 문화를 만든다.

 

 

좋은 건축물은 소주가 아니라 포도주와 같다. 소주는 공장에서 화학 공식에 따라서 대량 생산되는 술이다. 소주는 생산하는 사람이나 지역의 다양성이라는 가치가 반영되지 않고, 인간과 격리된 가치를 가지는 술이다. 건축물에 비유한다면 찍어 내듯이 양산되는 아파트나 지역성이 전혀 반영되지 않은 국제주의 양식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다. 반면, 포도주는 좋은 건축물 같다. 같은 종자의 포도라도 생산되는 땅의 토양에 의해서 다른 포도가 생산되고, 같은 종자의 포도와같은 밭이라고 하더라도 그해의 기후에 의해서 다른 포도가 만들어지며, 똑같은 재료라고 하더라도 포도를 담그는 사람에 의해서 다른 맛이 만들어지는 것이 포도주다. 따라서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로 조화를 이루어서 세상에 단 한 종류밖에 없는 포도주가 완성되는 것이다. 건축도 이같이 지구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땅 위에 특별하게 주어진 프로그램에 특정한 건축가가 개입되어서 단 하나의 디자인이 나와야 한다. 

 

 

좁고 긴 발코니에서는 바깥을 바라보는 일밖에는 못하는 반면, 정방형의 마당에서는 둥그렇게 마주보고 앉을 수 있다. 이런 공간에서는 사람 간의 관계성이 쌍방향을 띠게 되면서 더욱 다채로워진다. ... 정방형의 공간은 다양한 방향성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사람 간의 교류가 다양해진다. 이처럼 정방형의 마당이 담을 수 있고 만들어 낼 수 있는 관계성은 다양하다. 공간은 실질적인 물리량이라기보다는 결국 기억이다. 우리가 몇 년을 살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시간 속에서 어떠한 추억을 만들어 냈느냐가 우리의 인생을 결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다양하게 기억되는 공간은 우리의 머릿속에서 이벤트 별로 각기 다른 공간으로 각기 다른 기억의 서랍들 속에 들어가게 된다. 그렇게 되면서 우리의 머릿속에서 실제 크기보다 더 크게 인식된다.

 

 

처음에 아이는 한계도 모르고, 포기도 모르고, 목표도 없이, 그토록 생각 없이 즐거워한다. 그러다가 돌연 교실이라는 경계와 감금과 공포에 맞닥트리고 유혹과 깊은 상실감에 빠진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상상의 전기>

 

 

연구 결과에 따르면 지난 50년간 미국 중산층 집의 크기는 두 배 가까이 커졌다고 한다. 50년간 사람의 몸이 커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족 구성원의 수는 줄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집은 이렇게 계속 커져 갔을까? 가만히 살펴보면 커져 버린 집의 공간은 물건으로 채워져 있다.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서 눈만 뜨면 이 세상의 TV, 라디오, 신문 같은 모든 매체에서 더 많은 물건을 소유해져야 더 행복해진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물건을 사기 위해서 열심히 일한다. 그리고 또 그 많은 물건을 넣기 위해서 더 큰 집을 구해야 한다. 그리고 더 큰 집을 사기 위해서 더 많이 일해야 한다. 그야말로 인간의 삶과 자연을 수탈하는 악순환이다. 10년 후에는 새로운 발명품이 나와서 그 물건을 넣을 다양한 종류의 방들이 더 필요해질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리 간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신다. 이 같은 현상은 나이가 들수록 기억력이 나빠져서 기억할 일들이 별로 없기 때문에 그 만큼 시간이 길게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반대로 어렸을 때는 기억력이 좋아서 하루만 생각해도 기억할 일이 많고 그만큼 시간이 꽉 찬 느낌으로 느리게 흘러가는 것으로 느껴진다고 한다. 이를 뇌 연구 과학자들은 나이가 들수록 뇌 시냅스 사이의 정보 전달 네트워크 기능이 느려지면서 정보를 프로세스하는 능력이 떨어지게 되고 그만큼 기억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 적어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처럼 더 많은 이벤트는 심리적으로 기억할 것이 많다는 것을 의미하고, 더 많은 기억들은 같은 시간을 더 길게 느끼게 만든다. 그리고 시간이 길게 느껴지면 공간은 더 크게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같은 원리에 의해서 공간을 크게 느끼게 하려면 시간을 길게 느끼게 해야 하고, 시간을 길게 느끼게 하려면 기억할 사건을 많이 만들어 줘야 한다. 기억할 사건이 많게 하려면 많은 감정을 느끼게 해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건들을 느낌과 감정으로 저장하기 때문이다. 철학자 강신주의 말처럼, 기억할 감정이 많다는 것은 인생이 그만큼 풍요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벤트가 많이 일어나는 거리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성공적인 거리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뜨는 거리가 되려면 다양하고 많은 감정을 느끼게 해줄 이벤트들이 필요하다. 그것이 쇼윈도의 다양한 상품이거나 혹은 식당에 앉아서 밥을 먹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이거나, 마주 걸어오는 사람들이 다채로운 모습이거나 어떠한 것이든 좋다. 건축가는 이런 이벤트들이 자연스럽게 일어나게 할 수 있는 무대장치를 디자인하는 연출가이다.

 

 

공간과 SPACE.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공자, 노자, 석가모니의 영향으로 동양 문화의 가치 체계는 '관계'와 '비움'이라는 두 개의 키워드로 특징지을 수 있다. 이 같은 동서양의 다른 가치 체계는 공간을 뜻하는 두 개의 단어만 살펴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서양에서의 공간을 뜻하는 단어는 'space'로, 이 단어는 동시에 우주를 뜻하기도 한다. 우주라는 영어 단어는 universe, cosmos, space 이 세 단어가 혼용되어서 쓰인다. 따라서 'space=cosmos'라는 결론이 나온다. cosmos라는 단어의 의미는 혼돈이라는 뜻의 chaos의 반대어로 수학적 규칙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로 쓰인다. 따라서 'space=수학적 규칙'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단어를 통해서 살펴보면 서양인의 의식 속에는 비어 있는 우주, 공간, 수학적인 규칙을 내재하고 있는 cosmos 등의 의미가 상호 연결되어져 있으며, 공간을 '수학적 규칙을 가진 비어 있는 것'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서양의 공간은 다분히 수학적인 분석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반면, 동양의 공간은 비어 있다는 뜻의 '공'과 사이라는 뜻의 '간'이 합성된 단어이다. 공간이라는 단어는 '비움'과 '관계'의 합성어로 만들어져 있다. 이렇듯 단어만 살펴보더라도 동양에서는 단순히 비어 있는 것 이상의 가능성을 보는 '비움'과 상대적 가치인 '관계'로서 공간을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이 자연을 바라보는 방식은 주로 세 가지로 나누어지는 것 같다. 마찬가지로 인공물인 건축도 자연을 대하는 방식이 세 가지이다. 이를 경사 대지 위에 건축물을 구축하는 방식으로 설명해 보자. 첫째, 자연을 극복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흔히 우리나라 아파트 단지 재개발에 사용되는 방식이다. 대지의 경사를 극복의 대상으로 보고 거대한 축대를 쌓아서 평평한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아파트 건물을 앉힌다. 대형 토목 공사가 필요하고 자연의 모습을 모두 바꾸어 버리는 폭력적인 방식이다. 두 번째는 자연을 이용할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이 방식은 첫번째 방식보다 좀 더 스마트하다. 경사 대지가 있다면 그 경사면을 이용한다. 예를 들어서 경사 대지에 교회를 짓는다면 대지의 경사면을 이용해서 교인의 객석을 배치하고 강대상을 아래쪽에 두어서 편하게 설교를 들을 수 있는 기능적인 교회를 만드는 것이다. 자연을 이용하는 방식으로 재미난 건축을 할 수 있다. 세 번째는 자연을 동등한 대화의 상대로 보는 방식이다. 성 베네딕트 채플이 그러한 경우이다. 이 교회는 경사 대지에 마루를 평평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벽체와 마루 사이에 틈을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땅과 교회 마루 사이의 비어 있는 공간을 통해서 음향의 공명을 만들어 내고 인공의 건축물과 자연이 대화할 수 있는 디자인을 했다. 이렇게 한 이유를 건축가는 "땅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교회'를 디자인하려 했다고 설명한다. 성 베네딕트 채플은 자연을 대화의 상대로 보는 건축이다. 

 

 

아마도 우리나라의 정자가 이러한 종류의 자연과 대화를 가능케 하는 건축물이 아닌가 생각된다. 정자는 물의 가운데 위치해서 주변을 바라볼 수 있게 되어 있다. 자연과 건축물 사이의 물로 확보된 빈 공간에서 인간이 사유할 수 있는 여유를 주는 건축이라 할 수 있겠다. 이 같은 디자인은 자연을 극복할 대상으로 생각하지도 않고, 이용할 대상으로도 생각하지 않고, 다만 자연을 대화의 상대로 보는 동등한 관계 설정이 있고서야 나올 수 있는 디자인이다. 인간관계에서도 그러하듯이 디자인에서도 자연환경을 동등한 대화의 상대로 보는 것이 가장 성숙한 디자인의 방식이다.

 

 

현대 산업화 사회로 더 발전할수록 땅에 선을 긋는 일을 더 많이 하는 것이다. 실제로 자연에는 아무런 경계가 없다. 자연을 나누는 것은 인간일뿐이다. 국경선, 38선, 이스라엘 가자 지구도 그렇다. 건축에서 울타리는 벽이고, 벽은 단절을 의미하는데, 인간은 자연 속에 너무 많은 단절의 벽을 세운 거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8902711

반응형
Posted by 소요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