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률은 우연과 불확실성을 법칙의 세계와 연결하고 논리적, 객관적 의사결정의 도구로 활용할 수 있게 한다. 그 부작용은 평균과 빈도를 따라 개별성과 다양성을 빼앗아 간다.

 

 

[본문발췌]

 

 

확률은 4중의 성공, 즉, 형이상학적, 인식론적, 논리학적, 윤리학적 측면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형이상학은 우주의 궁극적 상태에 관한 과학이다. 형이상학에서, 양자역학의 확률은 보편적인 데카르트의 인과율을 대체해 버렸다. 인식론은 지식과 신념에 대한 이론이다. 오늘날 우리가 증거를 활용하고, 데이터를 분석하며, 실험을 설계하고, 신뢰성을 평가하는 일은 확률의 관점에서 이루어진다. 논리학은 추론과 논증의 이론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순수 수학이 제시하는 공리에 대해서는 연역적 해법 또는 종종 반복적인 해법을 활용하기도 하지만, 매우 실용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통계적 추론의 논리를 때로는 엄밀하게, 때로는 약식으로 활용한다. 윤리학은 부분적으로는,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연구이다. 확률은 가치에 대해 이야기해 줄 수는 없지만, 관료들이 내리는 모든 합리적인 선택의 근거에는 확률이 자리하고 있다. 공정 결정, 위험 분석, 환경 영향의 평가, 군사전략은 확률의 관점에서 표현된 의사 결정 이론 없이는 수행될 수 없다. 견해에 객관성을 덧칠함으로써 의사결정은 계산으로 대체된다.

 

 

필자의 중점 과제는 철학적인 면에 있다. 즉, 현재 우리가 다음의 두 영역에서 지니고 있는 개념의 체계를 가능하게 해준 조건을 이해하는 것이다. 하나는 물리적 비결정론의 차원이며, 다른 하나는 사회 통제의 목적을 위해 발달한 통계 정보의 차원이다. 본 연구는 보다 일반적인 철학의 주제들을 설명하는 데 활용될 수 있다. 필자는 위에서 이미 그중 하나를 언급한 바 있는데, 즉 '만들어진 사람들'이라는 아이디어다. 필자는 계량화는 범주화를 필요로 하고, 통계적 목적을 위해 새로운 계급을 정의하는 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상상하는 방식과 우리 자신의 가능성과 잠재력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에 영향을 끼친다고 주장한다.

 

 

(우연을 법칙으로 끌어들이게 됨으로써) 세상은 이전보다 불확실하게 된 것이 아니라 훨씬 덜 불확실하게 되었다.

 

 

'과학의 법칙으로부터 과학적 측정에 이르는 길은 그 반대되는 방향으로는 좀처럼 진행되지 않는다. 계량적 규칙성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어떤 규칙성을 찾고자 하는 것인지가 명확해야 하고 규칙성을 찾기 위한 도구들 역시 그에 맞추어 고안되어야 한다.' - 토마스 쿤

 

 

확률이라는 개념은 빈도 측면과 믿음의 정도 측면 양쪽에서 탄생했다. 초기에는 확률이 지닌 두 측면에 대해 구분하지 않아도 무방했다. 라플라스의 젊은 시절에 확률은 그 영역을 크게 확장했지만, 우연적 사건, 출생, 혼인과 사망, 그리고 측정오차와 관련하여 사용되던 확률은 여전히 이전에 사용되던 빈도들을 제시하고 있었다. 객관적 빈도 또는 경향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에 직면하게 되자 라플라스는 다양한 결과들이 지니는 용이성이라는 개념을 도입해 가면서 가망성에 대한 개념을 확립하는 데 기꺼이 나서기는 했지만, 확률은 우리의 지식과 무지에 관련되는 주관적 개념이라고 정의내렸다.

 

 

빈도와 믿음이라는 용어로 각가 표현되는 '객관적'과 '주관적' 확률 간의 근본적인 차이는 모형화modeling와 추론inference의 차이이다.

 

 

통계학자들은 대체로 자유로운 공리주의적 개혁을 지지하는 쪽이었다. 통계학자들의 철학에 대해, 또는 그들의 철학이 현행의 사회적 문제들의 해결을 지칭하는 것에 대해 믿지 않았던 이들은 통계학자들을 미묘한 두려움이 뒤섞인 무시로 대했다. 푸아송의 선견지명 같은 말을 빌리자면, 숫자는 인간으로부터 개별성을 박탈해 버렸다(The Numbers did strip human beings of their individuality). 표면적으로는 인간의 복지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듯 보이는 공리주의자들은 정작 사람에 대해서는 디킨스 소설의 등장인물 그래드그린드처럼 무관심해져 갔다.

 

 

그러나 한 가지 매우 곤혹스러운 것이 있다. 즉 통계학자와 전문가들, 그리고 인간성의 애호자라는 분들이 인생의 밝은 면들을 나열하면서 어떻게 한 가지 특별한 점은 한결같이 빠트릴 수 있는 것인가? 자유롭고 구속 받지 않는 개인 의지, 즉 개인의 변덕(어느정도로 심하든 간에) 내지는 공상(때때로는 정신이상의 수준으로 격앙되기도 하지만)은 가장 큰 행복이자 가장 위대한 행복이며, 이는 어떠한 분류체계에도 들어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으나 이것이 빠진 일체의 시스템이나 이론은 악마에게나 어울리는 것이다. - 도스토예프스키, <Notes from Underground>

 

 

필자가 본서의 제목을 '우연을 길들이다The Taming of Chance'로 선택한 것은 19세기가 통계적 법칙의 구조 내에서 우연을 포착해 낸 방식 때문이었다. 그와 같은 결실은 1860년까지는 완전하게 달성되지 않았다. 오차 법칙에 대한 케틀레의 비범한 가설, 즉 사람들의 신체적 도덕적 특성에 대한 표준 곡선은 법칙이라는 것을 인간성과 자유선택에 억지로 적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가설은, 기저에 작용하여 정규분포를 생성해 내는 무수히 많은 결정론적 원인들이라는 허구를 통해 개념적으로 보강되었다. 따라서 케틀레의 통계적 법칙들은 자율성을 향한 도상 과정에 있었지만 아직 거기에 도달하지는 못한 상태였다. 그 법칙들이 부수적인 필연성을 유발하는 미세한 요인들에 종속되지 않고 그 자체로 법칙으로 간주된 것은 보다 이후였다. ... 새로운 유형의 법칙이 무대에 오르면서 사람들과 세계는 덜 지배받기보다 더 제어받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필자가 우연이 길들여지고 있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영역을 벗어난 형이상학적 문제를 제기하려 들 것이 아니라, 이 통계 이론이 인간에게서 모든 자유를 박탈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도리어 이 통계 이론을 따를 경우 사회적 현상의 출처를 개인에게서 찾는 경우에서보다 자유의지의 문제는 덜 침해당한다. 실제로, 집단적인 현상이 지니는 규칙성의 원인이 무엇이든지간에 집단적인 현상은 발생지와는 무관하게 그 효과를 강제로 창출해 낸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현상이 가져오는 효과가 무작위로 달라져야 하지만, 실제로는 고르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만약 그러한 원인들이 개인들에 내재되었다면 그러한 원인을 지니는 사람들이 누군지가 결정되어야 한다. 그 결과, 집단적 현상이 발현되는 원인이 개인에 내재되어 있다는 가정은 엄격한 결정론을 피할 수가 없다. 그러나 만약 인구통계 데이터에 나타나는 안정성이 개인 외부의 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엄격한 결정론이 필수는 아니다. 그와 같은 힘은 특정한 개인을 가려 가면서 작용하지는 않는다. 이 힘의 결과로 특정한 유형의 행위가 구체적인 횟수만큼 실행되지만, 그러한 행위를 누가 수행할 것인지는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이 힘에 저항하는 반면 다른 이들은 이 힘에 휘둘리는 것은 당연한 현상일 수 있다. 실제로 우리의 관념은 외부로부터 인간에게 작용하는 힘의 명단에 기존의 물리적 화학적 생물학적 심리적 힘 이외에 사회적 힘 하나를 추가하는 것일 뿐이다. 만약 기존의 힘들이 인간의 자유를 불가능하게 하지 않는다면, 사회적 힘 역시 인간의 자유를 방해한다고 볼 필요가 없다. 기존의 힘들과 사회적 힘에 대해 똑같은 조건을 가정하면 된다. 전염병이 발생하는 경우 병의 강도는 사망률을 미리 결정짓겠지만, 이에 의해 누가 전염될 것인지까지 정해지는 것은 아니다. 자살을 유발하는 풍조와 관련하여 자살의 희생자들이 처하는 상황 역시 마찬가지다. - 에밀 뒤르켐Durkheim, Suicide

 

 

정상인란 평균이다. 우리는 또한 정규분포의 평균값average에 대해 '평균mean'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평균적인 인간이라는 말의 어원은 프랑스어의 l'homme moyen이며, 이를 만들어 낸 이는 케틀레였다. 이 아이디어의 기원은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가지 않는가? 그렇다. 그러나 주의할 것이 있다. '평균'은 거의 '정상'만큼이나 짓궂은 단어이다. (묘사의 관점에서) 평균 또는 중간intermediate이 (평가의 관점에서) 훌륭한 것에 해당한다는 아이디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들 중 가장 낯익은 하나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흄의 주장과 같은 상태/당위성의 구분에 구애받지 않았다. 중용golden mean은 (널리 통용되는 이 어구의 의미에 따르면) 가장 바람직한(좋은) 것이며, (실제로) 양 극단의 사이에 위치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절묘하고 주의 깊었다. 그는 '미덕은 과도함과 부족함이라는 두 악덕 사이의 중용'이라고 썼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은 좀 더 난해하다. '존재에 관해 이야기할 때, 그리고 본질에 대해 기술하는 경우에는 미덕에 해당하는 것은 중용이지만, 좋음과 최선에 관한 문제가 걸려 있을 때 미덕에 해당하는 것은 양 극단들 중 어느 한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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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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