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하는 사회에서 돈이 숭배받는 자본주의 가운데 발생하는 양극화, 승자독식! 빈곤이 무엇에서 발생하고 사회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해결방법을 찾기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한다. '평등속의 어울림'

 

 

[본문발췌]

 

 

현대의 진보가 이룩하는 모든 부가 소수에게 집중되고 사치를 조장하여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와의 차이를 더욱 뚜렷하게 한다면 이것은 진정한 진보라 할 수 없고 또 이러한 진보는 오래 가지도 못한다.

 

 

철학을 추구하는 자는 마음이 자유로워야 한다. - 프톨레마이오스

 

 

빈곤의 진정한 원인은 과거나 현재나 인간의 탐욕이지 자연의 인색함이 아니다.

 

 

문명 수준이 일정할 때 많은 인구는 적은 인구보다 물자를 더 많이 마련할 수 있다. 빈곤과 비참함의 원인은 - 현재의 이론은 인구증가 때문이라고 한다 - 자연의 인색이 아니라 사회의 부정의에 있다. 인구 증가로 생겨나는 새로운 입은 과거의 입보다 더 많은 식품을 소비하지 않지만 새로운 손은, 자연스러운 질서 속에서, 더 많은 물자를 생산해 낸다. 다른 조건이 동일할 경우 부의 공정한 분배가 이루어진다면 인구가 많을수록 개인에게 돌아가는 몫은 더 많아진다. 평등이 보장되는 상태에서 인구의 자연증가는 개인을 가난하게 하기는커녕 언제나 부유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기성 지역의 부가 우위에 있는 것은 생산력의 우위 때문이 아니라 부의 축적 때문이며, 신생 지역에서는 시간이 없어 부를 축적하지 못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축적된 부라는 개념에 대해 잠시 검토해 보는 것이 좋겠다. 사실 부가 축적될 수 있는 양은 아주 조금밖에 안 되며, 사회도 대부분의 개인이나 마찬가지로 그날 벌어 그날 먹고 산다. 몇 가지 사소한 형태를 제외하면 부의 축적이 많이 이루질 수가 없다. 우주의 물질은 노동에 의해 원하는 형태로 변했다가 끊임없이 원상태로 되돌아가는 경향이 있다. 어떤 형태의 부는 몇 시간, 어떤 것은 며칠, 어떤 것은 몇 달, 어떤 것은 몇 년 지속되기도 한다. 그러나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형태의 부는 드물다. 매우 유용하고 수명이 긴 형태, 예를 들어 선박, 가옥, 철도, 기계류 등의 부를 보더라도, 노동을 통해 계속 보수하지 않으면 얼마 안 가서 못 쓰게 된다. 어느 사회에 노동이 중단되면 마치 분수로 흘러가는 물을 잠그는 것처럼 부가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노동이 다시 시작되면 부는 금방 되살아난다.

 

 

노동자는 미개인보다 더 장시간 더 힘들게 일을 하지만 미개인이 얻는 단순한 생활필수품 이상을 얻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미개인이 누리는 독립성을 잃고 산다. 자신의 힘으로 욕구를 직접 충족시키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이 동시에 일해 주지 않으면 간접적으로 충족시키지도 못한다. 이 노동자는 생산자와 소비자로 구성된 거대한 체인의 한 연결 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에 자신을 분리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이 움직이지 않으면 혼자서 움직일 수도 없다. 사회속의 지위가  낮을수록 사회에 더 의존적이 되고, 무엇이든 혼자 힘으로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극히 줄어든다.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해 노동을 행하는 힘조차 자신의 통제 밖에 놓인다. 다른 사람의 행동에 의해서 또는 자신이 영향력을 미칠 수 없는 - 마치 태양계에 영향력을 미칠 수 없듯이 - 어떤 일반적인 원인에 의해서 이 힘이 박탈되기도 하고 회복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원초적 저주를 은혜처럼 생각하는 시대가 되었다. 사람들은 단순한 육체노동이 그 자체로 악이 아니라 선인 듯이, 그리고 수단이 아니라 목적인 듯이 생각하고, 말하고, 주장하고, 법제화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자는 인간성의 본질적인 요소, 즉 신처럼 환경을 변화시키고 통제하는 능력을 잃고 만다. 노동자는 노예나 기계나 상품이 되어 버리고, 어떤 점에서는 동물보다도 못한 존재가 되고 만다.

 

 

인류 문명 발달의 불평등을 설명해 주는 원리는 자본과 노동의 관계에 관한 원리가 아니며, 인구가 생존물자에 압력을 가한다는 원리도 아니다. 부의 분배가 불평등한 큰 원인은 토지소유의 불평등에 있다. 토지소유는 인간의 사회적 정치적 상황,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지적 도덕적 상황을 궁극적으로 결정하는 커다른 기본 요인이다. 이점은 틀림이 없다. 토지는 인간의 삶터이고, 인간이 필요한 물자를 꺼내 쓰는 창고이며, 욕구를 충족시킬 물자를 공급하기 위해 노동을 투입하는 대상이 되는 원료이다. 토지 또는 토지 생산물이 없다면 해산물도 취할 수 없고, 태양열도 이용할 수 없고, 그 밖의 어떠한 자연력도 이용할 수 없다. 우리는 토지에서 태어나 토지로부터 물자를 얻어 살다가 토지로 돌아간다. 인간은 들의 풀이나 꽃과 마찬가지로 흙의 자녀이다. 사람에게서 토지에 속하는 모든 것을 빼앗아 버리면 사람은 육체 없는 영혼에 불과할 것이다. 물질적 진보는 토지에서 부를 생산하는 힘을 보태줄 뿐이다. 따라서 토지가 독점되면 물질적 진보가 고도로 이루어지더라도 임금이 오르지 않으며, 노동밖에 가진 것이 없는 계층의 생활은 나아지지 않는다. 물질적 진보는 토지가치를 올리고 토지 소유의 힘을 강하게 해 줄 뿐이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토지소유는 귀족층의 근거이자 거대한 재산의 기초이고 권력의 원천이다. 인도의 최상 계층은 브라만이 오래 전에 이렇게 말했다. "어느 시대건 토지를 소유하는 자에게 토지의 열매가 귀속된다. 하얀 일산과 거드름 피우는 코끼리는 토지 소유의 꽃이다."

 

 

임금의 상승 및 지대를 걷어 공공목적에 씀으로써 생기는 새로운 고용 기회의 창출은, 낭비를 막고 엄청난 사회적 손실을 없애주는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새로운 힘이 노동에 더해질 것이다. 임금이 가장 높은 곳의 노동이 가장 생산적이라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세계 어느 곳에서든 대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노동은 비능률적인 노동이다. ... 노동의 능률은 언제나 일반적인 임금과 같이 상승한다. 임금이 오르면 자존심, 지적 능력, 희망, 활력도 증가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기계도 아니고 동물도 아니다. 기계나 동물은 정해진 능력이 있으면 그 이상은 할 수 없다. 생산의 큰 원동력은 근육이 아니라 마음이다. 인간의 신체가 낼 수 있는 힘은 보잘 것 없다. 그러나 인간의 지적 능력에는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물결이 흐르고 인간의 의지 앞에 물질은 찰흙처럼 유연하게 된다. 대중의 안락과 여가와 독립을 증대시키면 지적 능력도 증대된다. 그리하여 두뇌가 손을 도우며, 극미한 생물을 측정하고, 별의 궤도를 추적할 수 있는 자질이 평범한 일상에서도 발휘된다. 부의 생산자에게 정당한 대가가 돌아가도록 하는 사회제도는 부를 생산하는 노동의 능력을 무한정 끌어오릴 수 있을지 모른다. 현재와 같은 생산 과정에서도 그 이익은 계산할 수 없을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임금이 높아지면 그만큼 생산 과정의 개선이나 기계류의 발명과 활용도 빠르고 쉽게 진행된다.

 

 

문명에 고통을 주는 원인이자 문명이 사망하는 원인은 불평등한 분배이다!

 

 

토지가치에 모든 조세를 부과한다면 거대한 재산이 줄어들기는 하지만 부자를 무일푼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 이 조치는 재산이 줄어도 별 타격을 입지 않을 계층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지금보다 더 빈곤하게 만들지 않는다. 거대한 재산을 줄일 뿐 누구도 빈곤에 빠뜨리지 않는다. 부의 총량이 엄청나게 증가할 뿐만 아니라 평등하게 분배된다. 물론 모든 사람이 동일한 양의 부를 가진다는 뜻은 아니다. 이는 각자의 힘과 욕구가 서로 다른 경우에 평등한 분배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부가 각자 근면, 기술, 지식, 절제를 통해 공동의 부에 기여한 정도에 따라 분배된다는 뜻이다. 생산하는 사람에게서 생산하지 않는 소수의 수중으로 부를 집중시키는 큰 원인이 사라질 것이다. 불평등이 계속 존재한다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불평등일 뿐, 자연법을 부정함으로써 생기는 불평등은 아니다. 비생산자가 사치 속에서 빈둥거리고 생산자가 동물적인 생존에 필요한 물자만을 겨우 얻는 일이 없어질 것이다. 토지 독점이 사라지면 엄청난 부자가 생길 염려도 없다. 부자의 재산은 문자 그대로 노동 생산물인 부로 구성될 것이고, 부는 계속해서 소모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또 토지사유제를 철폐하면 국가 부채의 원인이 사라지므로 국가 부채도 오래지 않아 소멸할 것이다. 각자 자기 노력으로 정당하게 번 것을 가지는 동시에 그 이상은 가질 수 없다면 거대한 재산이 형성될까 염려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도대체 백만 달러를 자기 노력으로 정당하게 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사람이 싫어하는 것은 노동 그 자체가 아니며 인간에게 저주스러운 것은 노력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아니다. 대가가 생기지 않는 노동과 결과가 나오지 않는 노력을 혐오할 뿐이다. 매일 매일 힘들여 일해서 겨우 연명한다면 이는 정말로 고된 노동이다. 이것은 빠져 죽지 않기 위해 펌프질을 계속하거나, 깔려 죽지 않기 위해 바퀴를 계속 밟는 지옥 같은 형벌이다. 그러나 이러한 무의미한 일에서 해방된다면 인간은 본성적으로 더 열심히, 더 훌륭히 일하게 되며, 그럴  때 자신을 위해 또는 타인을 위해 무언가 일다운 일을 하게 된다. ... 인류의 생활을 개선하는 일, 예를 들면 지식을 확대하고 힘을 증가시키고 문예를 풍부하게 하고 사상을 고양시키는 일은 생계를 위해 하는 일이 아니다. 이런 일은 채찍질이나 동물적 욕구에 의해 강제되는 노예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할 뿐, 더 많이 먹고 마시고 입고 과시하기 위해 하는 일이 아니다. 사회에서 궁핍이 사라지면 이러한 종류의 일이 대폭 증가할 것이다.

 

 

사람이 따로 떨어져 살면 개인의 모든 힘이 생존 유지에 다 소요된다. 정신력은 사람들이 사회 속에서 서로 어울릴 때에만 자유롭게 되어 고차적인 목적에 사용될 수 있다. 어울림으로 인해 분업이 가능해지고 다수인의 협력에 의해 생기는 경제성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어울림은(association) 진보의 첫째 요소이다. 개선은 사람들이 평화롭게 어울릴 때 이루어지며, 어울림이 넓고 긴밀할수록 개선의 가능성이 더 커진다. 그리고 인간에게 평등한 권리를 부여하는 도덕법칙이 무시되느냐 존중되느냐에 따라 정신력이 대립 속에 낭비되느냐 아니냐가 결정되므로, 평등 또는 정의(equality of justice)는 진보의 둘째 요소이다. 이렇듯 평등 속의 어울림(association of equality)이 진보의 법칙이다. 어울림은 정신력을 자유롭게 하여 개선에 바칠 수 있도록 해주며 평등, 정의, 자유는 - 이 세 용어는 도덕법칙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동일하다 - 정신력이 쓸데없는 싸움에 소모되는 것을 막아 준다. 이제 모든 다양성, 모든 전진, 모든 정체, 모든 퇴보를 설명할 수 있는 진보의 법칙이 나왔다. 인간은 같이 모임으로써 진보하며, 서로 협조함으로써 개선에 바칠 수 있는 정신력을 증대시키는 성향이 있다. 그러나 갈등이 발생하거나 어울림이 조건과 힘의 불평등을 조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면 진보 경향은 약화되고 결국에는 반전된다.

 

 

진화에 대한 허버트 스펜서의 정의를 사용한다면, 사회의 발전은 그 구성원과 관련하여 볼 때 불확실하고 비체계적인 동질성에서부터 확실하고 체계적인 다양성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발전 단계가 낮은 사회는 장기도 팔다리도 없는 하등동물과 비슷하여 신체의 일부를 잘라도 살 수 있다. 발전 단계가 높은 사회는 기능과 힘이 전문화된 고등생물과 같아서 각 부분은 다른 부분에 극히 의존적이다.

 

 

과거의 모든 문명을 파괴한 원인은 부와 권력의 불평등한 분배 경향이었다. 이런 경향이 현재의 우리 문명에 강도를 더하여 나타나고 있다. 임금과 이자는 계속 하락하고 지대가 상승한다. 부자는 더욱 부유하게 되고, 빈자는 힘도 희망도 잃고 있으며, 중산층은 사라지고 있다.

 

 

부의 평등한 분배가 이루어진 사회에서는 - 그리하여 전반적으로 애국심, 덕, 지성이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 정부가 민주화될수록 사회도 개선된다. 그러나 부의 분배가 매우 불평등한 사회에서는 정부가 민주화될수록 사회는 오히려 악화된다. 부패한 민주정치는 부패한 독재정치보다 그 자체로 더 나쁘지는 않지만 국민성에는 더 나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부랑자, 극빈자 등 노동의 기회가 극히 제한된 계층이나 구걸하지 않으면 훔치거나 굶어야 하는 계층이 선거권을 갖게되면 파괴적인 결과가 발생한다. 가난으로 고통받고 타락한 계층의 손에 정치 권력을 부여하는 것은 마치 여우 꼬리에 불을 붙여 옥수수 밭에 풀어 놓는 것과 같으며, 삼손의 눈을 빼고 국민 생활이라는 기둥에 팔을 비끄러매는 것과 같다. 권력의 승계가 세습이나 추첨 - 고대 공화국에는 이런 제도가 있어다 - 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우에도 현명하고 정의로운 권력자가 더러 등장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부패한 민주정에서는 언제나 최악의 인물에게 권력이 돌아간다. 정직성이나 애국심은 압박받고 비양심이 성공을 거둔다. 최선의 인물은 바닥에 가라앉고 최악의 인물이 정상에 떠오른다. 악한 자는 더 악한 자에 의해서만 쫓겨날 수 있다. 국민성은 권력을 장악하는 자, 그리하여 결국 존경도 받게 되는 자의 특성을 점차 닮게 마련이어서 국민의 도덕성이 타락한다. 이러한 과정은 기나긴 역사의 파노라마 속에서 수없이 되풀이 되면서 자유롭던 민족이 노예 상태로 전락한다.

 

 

사실상 돈을 많이 가진 어떤 자가 다른 사람을 살해하는 경우, 인구와 사업이 번창한 큰 중심지에 가서 자기의 욕망을 달성하고 자수하면 백중 구십구는 일시적인 구금을 당하는 정도 이상의 큰 처벌을 받지 않을 것이고, 다만 일부는 자기 재산에 비례하여 또 일부는 피살자의 재산과 지위에 비례하여 얼마간의 손실을 입을 뿐이다. 게다가 살인자의 돈은 보호자를 잃은 피살자의 가족이나, 시민을 잃은 국가에 돌아가지 않는다. 소송을 지연하고 증인을 세워 배심원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방법을 아는 변호사에게 돌아간다. 그리하여 도둑질을 크게 하는 자는, 훔친 것의 일부를 잃는 정도의 처벌밖에 받지 않게 된다고 확신할 것이다. 또 도둑질을 크게 하여 처벌을 받더라도 한 밑천 남길 수 있는 자는, 마치 바이킹이 항해를 성공리에 마쳤을 때처럼 동료들의 환영을 받게 된다. 자기를 믿어준 사람의 재산을 털거나 과부와 고아의 재산을 털더라도 많이만 털면,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자기의 부를 안전하게 자랑할 수 있다. 이런 경향은 점점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런 경향은 부의 분배가 가장 불평등한 곳에서 가장 강하게 나타나며, 불평등이 심할수록 더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것이 야만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고 무엇인가? 이와 같이 정의가 파괴되는 예는 모든 분야에서 사법제도가 무력해지고 있는 현상의 하나에 불과하다. 차라리 법을 폐기하고 제일원리로 돌아가는 것이 낫겠다고 하는 사람도 많이 있다. 그렇게 된다면 사람들은 자기 방어를 위해 치안위원회 같은 기구를 조직하여 스스로 사법제도를 운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난다. 인간은 남에게 줄 수 없는 몇 가지 권리를 창조주로부터 받는다. 이 권리에는 생명, 자유, 행복 추구가 포함된다." 토지에 대한 평등권이 부정되면 이들 권리도 부정된다. 토지는 사람이 생활하는 터전이자 유일한 터전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하사물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부정하면서 정치적 권리의 평등을 보장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토지에 대한 평등권이 부정되는 사회에서 정치적 자유는, 인구가 증가하고 발명이 계속되면 굶주림을 겨우 면할 정도의 임금을 받는 일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자유로 전락하고 만다. 우리는 이 진리를 무시해 왔다. 그리하여 거지가 생겨 거리를 배회한다. 빈곤은 우리가 정치적 주권자라고 더 받드는 인간을 노예로 만든다. 결핍에서 생기는 무지는 학교에서 고칠 수 없다. 국민은 상전이 시키는대로 투표를 한다. 정치가의 역할을 선동꾼이 차지한다. 정의의 저울에 달린 추의 무게는 돈으로 결정된다. 시민적 덕목을 중시하지 않는 자가, 심지어 위선으로라도 그 덕목을 칭송하지 않는 자가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 튼튼하다고 생각했던 공화국의 기둥은 무거운 하중을 견디지 못해 이미 굽어 있다. ... 자유! 이는 신비한 힘을 가진 단어이다. 공허하게 귀를 어지럽히는 단어가 아니다. 자유는 정의이고, 정의는 자연법이며, 건강과 조화와 힘과 동지애와 협동의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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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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