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우고자 하면 먼저 비워야 한다. 집착, 제대로 알지 못하는 무지, 삶의 짐을 내려놓는 것! 앎을 버림으로써만 깨닫게 되는 것!

 

 

[본문발췌]

 

 

사미를 괴롭혔던 것은 여인이라는 물체가 아니라, 여인에 대한 사미의 의식이었고, 그 의식의 집중을 일으킨 집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려놓아도 될,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을 짐이었습니다. 짐을 내려놓고 가볍게 걸어가면 될 텐데 계속 짐을 지고 가는 것이지요.

 

 

삼(사)법인

    • 제행무상(諸行無常 · Anicca), 움직이는 모든 현상은 향상됨이 없다. 인과에 의해 끊임없이 변한다.

    • 일체개고(一切皆苦 · Dukkha), 모든 것이 고苦다!

    • 제법무아(諸法無我 · Anatta), 모든 다르마는 아我가 없다. 주체가 없다! 자기동일성의 지속이 없다!

    • 열반적정(涅槃寂靜), 번뇌의 불길을 끄자! 그러면 고요하고 편안한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삼학, 가장 기본적인 불교 교리이며, 일체의 법문(法門)은 모두 삼학으로 귀결된다. 삼학은 계학(戒學)·정학(定學)·혜학(慧學)의 세 가지이며, 증상계학(增上戒學)·증상심학(增上心學)·증상혜학(增上慧學)이라고도 한다.

 

 

정견(正見): 바르게 보기, 정사유(正思惟) · 정사(正思): 바르게 생각하기, 정어(正語): 바르게 말하기, 정업(正業): 바르게 행동하기, 정명(正命): 바르게 생활하기, 정정진(正精進) · 정근(正勤): 바르게 정진하기, 정념(正念): 바르게 깨어 있기, 정정(正定): 바르게 삼매(집중)하기....

정견은 나머지 일곱을 달성하기 위한 목적이다. 그리고 팔정도는 여덟 가지 항목이지만, 이것은 하나의 성도를 이루는 각 부분이며, 여덟 가지는 일체로서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별개의 것이 아니다. 또한 팔정도를 계(戒)·정(定)·혜(慧) 삼학과 관계지어 보면 정견과 정사유는 혜이며, 정어·정업·정명은 계이며, 정정진은 삼학에 공통되고, 정념·정정은 정과 관계지을 수 있다.

 

 

인생은 고통스럽고, 그 고통에는 집적된 원인이 있고, 그 집착을 없애면 열반적정에 든다. 그런데 그 멸집에 8가지 방법이 있다. 그 8가지 방법을 요약하면, 계, 정, 혜 삼학이다!

 

 

"바라밀다"("건너간다"라는 뜻이 있다)를 전제로 해서 말한다면 차안(此岸(이쪽 강둑)에서 피안彼岸(저쪽 강둑)으로 가는 배가 큰 것은 대승이고 작은 것은 소승일 텐데, 건너간다는 것만을 목적으로 한다면 큰 수레나 작은 수레나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버스와 자가용을 생각한다면 버스는 아무나 탈 수 있지만 자가용은 그 주인과 아는 사람만이 탈 수 있습니다. 버스는 개방적인 데 반해 자가용 세단은 폐쇄적이죠. 버스는 대중이 "더불어" 갈 수 있는 수단이고 자가용은 "선택된" 소수만이 갈수 있는 수단입니다.

 

 

수행자들의 성격에 따라 그들이 타는 수레와 관련하여 쓰는 삼승(三乘)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3종류의 수레라는 뜻이지요.

    • 그 첫째가 성문승, 그 둘째가 독각승(혹은 연각승), 그 세째가 보살승이라고 하는 것인데 이 3승은 실제로 기나긴 초기불교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문승이라고 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말하자면 싯달타가 말하는 소리(聲)를 실제로 들은(聞) 사라믈이니까 가섭, 수보리, 가전연, 목건련 같은 불제자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싯달타의 자가용에 자연스럽게 올라탈 수 있는 선택된 소수들이겠지요. 그 다음에 독각승이라는 것은 홀로(獨) 깨닫는(覺) 사람, 즉 선생이 없이 홀로 토굴에서 수행하여 깨닫는 사람들, 12인연因緣을 관觀하여 깨닫는 사람들이라는 뜻에서 연각승이라고도 합니다. 분명 이 독각, 연각이야말로 성문 다음 단계에 오는 수행자들이었겠죠.

    • 그 다음이 보살이라는 개념인데 보살이라는 것은 "보리살타"의 줄임말입니다. "보리"는 지혜, 깨달음의 뜻이 있죠. "살타" 즉 "사트바"는 복합적인 의미를 지니는 외연이 넓은 말입니다. "본질", "실체", "마음", "결의", "태아", "용기". 그리고 "유정"(정감이 있는 존재라는 뜻)을 의미하죠. 그러니까 보리살타라는 것은 "깨달음을 지향하는 사람", "그 본질이 깨달음인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 세 가지 부류의 사람 중에서 성문과 독각은 물론 작은 수레의 인간들이겠죠. 그렇다면 셋째 번의 보살이야말로, 보살이 타는 보살승이야말로 큰 수레가 될 것입니다.

 

싯달타의 "4문출유四門出遊"라 하는 것을 살펴보면 그의 고뇌의 테마는 노老(늙음), 병病(병듦), 사死(죽음)의 3자입니다. 노, 병, 사가 고苦로서 자각되었다는 것은 인간 모두가 평소에 젊음에 대한 오만과 건강에 대한 오만과 살아있음에 대한 오만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죠. 젊음에 대한 오만이 깨질 때 인간의 늙어감에 대한 비통이 생겨나고, 건강에 대한 오만이 깨질 때 병들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자각하게 되고, 삶에 대한 오만이 깨질 때 나도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고뇌하고, 부끄러워하고, 혐오하게 되는 것이죠. 이런 노, 병, 사를 고苦로서 자각할 수 있었던 아주 예민한 감성의 젊은이가 싯달타였기에 그의 고뇌는 모든 인간에게 공감이 되는 보편성이 있는 것입니다. 노, 병, 사를 자각할 때, 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결국 나라는 존재의 파며를 의미하는 것이죠. 이 자기파멸의 과정을 어떻게 자기완성의 길로 역전시킬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고뇌 속에서 무명無明(인간의 본질적 무지)을 발견하고, 사성제의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금강경"은 실제로 "벼락경" "벽력경"으로 번역되어야 했습니다. 벽력처럼 내려치는 지혜! 그 지혜는 인간의 모든 집착과 무지를 번개처럼 단칼에 내려 자르는 지혜인 것입니다. 지혜는 멸집의 지혜입니다.

 

 

"앎도 없고 얻음도 없다!" 여기 "지智"는 반야의 지혜가 아닙니다. 그냥 "안다"는 뜻입니다.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병폐 중의 하나도 뭘 모르는 자들이 그렇게 "안다고" 떠들어대는 데 있습니다. 반야는 앎을 버림으로써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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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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