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의 렘봉안-누사페디나, 아메드-뚤람벤, 멘장안 등 여러 포인트를 가보니, 인도네시아의 다른 다이빙 포인트도 가보고 싶고, 작년 렘봉안에서 3일 함께 다이빙했던 멤버들에게 들었던 코모도 이야기도 생각나 코모도-발리로 이어지는 여행을 시작했다.

주로 다니는 필리핀, 태국, 발리에서 로컬샵 위주로 다이빙을 하는데, 코모도에 생겼다는 한인샵에 대한 평이 괜찮아 이번 코모도 다이빙은 komo dive를 이용했는데, komo dive는 한인샵과 로컬샵의 장점을 모아 놓은 것 같아 좋았다.


이번 여행의 시작은 최근 태국 여행시 자주 이용했던, 베트남항공에 인천~호치민~발리~호치민~인천 구간으로 30만원 정도 비행기표를 구해 호치민 반나절 여행을 포함해 다녀왔다.

발리~코모도(라부안 바조) 구간은 별도로 바틱 에어를 이용했는데, 보통 15~20만원 정도 왕복에 수화물, 간단한 간식(빵)이 포함되어 있다.


발리~코모도 가는 길, 날씨가 좋고 가는 방향으로 왼쪽 창가(A열)에 앉는다면 하늘위에서 인도네시아 여러 화산군들을 구경할 수 있다.


라부안 바조(코모도) 공항은 시설은 현대식으로 깔끔하지만 규모는 작고, 중심가까지 거리는 차로 5~10분정도로 가깝다. 공항에 도착하고 다이빙샵에 톡을 보냈더니 픽업을 해주신다고 해서, 가는길 도착 첫날부터 라부안 바조의 아름다운 일몰을 구경했다.


코모도 다이빙 Day Trip은 전날 또는 다이빙날 아침에 코모도 국립공원 입장 QR을 개인별로 받아, 항구에서 보트를 타기위해 개별 입장해야 한다. 

Komo dive의 배는 태국 Day Trip의 다이빙 보트처럼 큼지막하고 2층 갑판 앞, 뒤로 빈백과 그늘 공간도 있어서 편도 2시간여 코모도 섬 다이빙 포인트로 오가는길, 수면휴식 시간에 편히 쉴 수 있다.

더불어 리버보드 셰프 출신이라는 주방장이 제공하는 간단한 조식과 점심은 입맛에 잘 맞고 맛도 있다.


Day Trip은 3회를 기본으로 하고, 주로 코모도 중부 포인트를 중심으로 가는데, 인원과 상황에 따라 북부 코스로 가기도 한다.


나는 3일 동안 첫날 북부, 2~3일차는 중부에서 각각 다른 포인트를 갔는데, 코모도 대부분의 포인트는 여러 형태의 조류가 있지만 가이드가 상황에 맞게 도움을 주기에 큰 어려움은 없다.

코모도 국립공원의 잘 보존된 산호, 그리고 같은 어종이라도 크기가 다른 곳보다 훨씬 큰 녀석들이 많고, 화이트팁, 블랙팁 상어에서 만타까지 아쿠아리움 못지 않는 다양한 바다생물과 환경을 즐길 수 있다.


첫날 북쪽 크리스탈 베이와 캐슬 베이는 조류가 심해 조류 걸이를 걸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캐슬 베이에서는 조류걸이를 걸 자리를 찾다가 우왕좌왕하는 사이 7년여 140로그 가까이 함께했던 다이빙컴퓨터를 잃어버린 아픔이 있지만 즐거운 코모도 다이빙이었다.




다이빙 후, 같이 다이빙을 했던 사람들과 처음 만났지만 함께 저녁식사를 하기도 하고, 둘째날 나처럼 혼자 온 SB님과는 이틀 동안 함께 저녁 먹으며 다이빙에서 여행, 이런저런 삶에 관한 이야기까지 나누었다. 


라부안 바조 중심은 대부분 걸어다닐만한 거리고, 언덕길 등 힘든 구간에서는 그랩 바이크를 불러 저렴하게 이동할 수 있다. 단, 그랩 카는 부를 수 없다.

다양한 국가에서 찾아오는 여행자들처럼 여러 종류의 인도네시아 음식을 파는 로컬식당부터, 멕시코, 이태리 식당과 맛있는 아이스크림 가게 등 먹을 것도 많은 라부안 바조의 매력은 코모도 다이빙 중간 중간 즐거움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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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인생의 절반을 지나가는 시점. 주변 눈치보지 말고, 좋아하는 것, 잘하는 것, 하고 싶은 것들을 찾아 인생을 즐길 시간이다. 
 
 
[본문발췌]
 
고통은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가짜 행복’을 좇는 고통이다. 많은 사람이 출세, 부, 명예를 손에 잡히는 행복으로 여긴다. 그런데 이런 행복은 무게 중심이 자기 안이 아니라 자기 밖에 있다. 그래서 좇을수록 의심이 들고 점점 공허해지며 더 괴로워질 것이다. 다른 하나는 ‘진짜 행복’을 좇는 고통이다. 진짜 행복은 허상과 같아서 찾기가 어렵다. 자기 자신에 대한 깊은 통찰이 필요하며, 계속해서 스스로를 무너뜨리고 새롭게 거듭나야 한다. 무게 중심을 자기 밖에서 자기 안으로 옮겨야 하며 자신이 무너지고 깨지고 부서지기 때문에 괴로울 것이다. 그런데 진짜 행복을 좇으면 우리는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자기 자신을 긍정하는 마음, 타인에게 비굴하지 않고 기죽지 않는 당당함, 스스로의 힘으로 살 수 있는 품격이다.


불행한 이유는 대부분 타인에게 의지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결핍되고 공허해서 타인에게 대신 희망을 거는 것이다. 많은 이가 자기 자신조차도 자신의 눈이 아니라 타인의 눈으로 바라본다. 좁고, 편견에 사로잡혀 있고, 이기적이고, 왜곡된 거울에 자신이 잘 비치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행복의 핵심은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인생을 즐긴다는 말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면 안된다. 행복은 고통을 줄이고, 피하고, 견디는 것에 있다. ‘성공, 부, 명예 등을 얼마나 얻었는가’보다 ‘세상의 고뇌를 어떻게 바라보는’의 관점이다.


“이 세상의 모든 생물은 살려는 의지를 충분히 갖고 있으나 이 의지가 충분히 만족되지 않기 때문에 산다는 것은 괴로운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인생사가 고통의 연속인 이유를 살아남고자 하는 인간 본성의 욕망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인간의 본성을 “삶에 대한 맹목적인 의지”로 보고, 영원히 살려는 맹목적인 욕망이 충족되지 않아서 인간이 고통을 피할 수 없다는 점을 밝혔다. 인간 본성의 욕망이 고통만 주는 것은 아니다. 고통과 함께 그 힘든 시간을 견디게 하는 힘 또한 삶에 대한 애착과 맹목적인 열망에서 나온다. 그래서 이런 욕망을 잘 다스릴 때 주체적으로 행복한 삶이 가능하다고 봤다.


행복에 대해 쇼펜하우어는 본능의 관점에서 환상이자 이룰 수 없는 망상이라고 봤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은 마치 인생이라는 기차가 기관사(이성) 없이 삶에 대한 욕망(동력)에 이끌려 달려가고 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정신이 이끄는 것이 아니라 충동에 떠밀려 간다. 


“삶은 진자처럼 고통과 무료함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데, 사실 이 두 가지가 삶의 궁극적인 요소다.”


“인간의 행복을 가로막는 두 가지 적수가 고통과 무료함인데, 우리의 인생이라 이 두 가지 사이를 오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외적으로는 궁핍과 결핍이 고통을 낳는 반면 안전과 과잉은 무료함을 낳는다. 따라서 하층 계급 사람들은 궁핍의 고통과 끊임없이 싸우는 반면 부유하고 고상한 세계의 사람들은 무료함을 상대로 싸움을 벌인다.”


행복과 불행은 객관적인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변덕스러운 감정에 달려 있다. 없으면 없다고 불평불만하고 많은면 많다고 지겨워하는 것이 인간의 심리다. 결핍은 고통이고 과잉은 무료함이다. 인간에게는 배고픔과 고통이지만 포만감 또한 불쾌다.


욕망의 최대 만족은 권태이고 욕망의 최대 결핍은 고통이다. 그런데 인간의 감정은 왕복 운동을 하는 시계추처럼 지속적이지 않고 유동적이다. 따라서 영원한 충족과 행복감은 없다.


“고통과 무료함은 한쪽이 멀어질수록 다른 쪽이 다가온다”라는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이런 길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야 하는 것이 내면의 풍요와 정신의 풍요다. 풍부한 상상력, 두뇌 활동력이 뛰어난 사람은 전혀 무료함과 따분함을 느끼지 않는다. 정신이 풍요로워 질수록 내면의 공허가 들어갈 공간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욕구의 결핍과 욕구의 과잉을 피해야 한다. 양극단은 불행이다. 결핍과 과잉의 중간을 택해야 한다. 현명한 사람은 행복과 불행의 원인을 바깥에서만 찾지 않고 자신의 안에서 찾는다. 자신의 고뇌를 객관적인 조건 탓으로 돌리지 않고 고뇌를 바라보는 자신의 관점을 바꾸려고 노력하면서 해결 방법을 찾는다. 그리고 무료함의 근원인 내면의 공허를 극복하기 위해 외적인 자극 대신 내적인 풍부함을 추구한다.


“성취된 소망은 인식된 오류고, 새로운 소망은 아직 인식되지 않은 오류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은 외적인 것에 행복의 가치를 두기 때문에 일어난다. 끊임없이 새로운 사건, 새로운 물건, 새로운 사람 등에 흥미를 느끼는 것은 자신의 내적인 행복감이 부족하다는 뜻이 된다. 변화하는 대상에서 찾는 행복이란 오래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인간의 욕망은 늘 새로운 것을 향해 있다.

계속 새로운 것을 찾는 것,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 새로운 사랑을 원하는 것은 행복의 길이 아니다. 밖에서 새로운 것을 찾지 말고 원래 갖고 있던 것의 가치를 되새겨 봐야 된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있다. 즉 세상을 바라보는 일관된 시야, 마음가짐, 태도다. 오히려 자신 안에 행복의 가치를 둔다면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 인간의 본성은 쉽게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을 늘 새롭게 유지하려는 것이 문제가 되는 호기심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다.


성공하고 싶다면 원하는 바를 가져라. 행복하고 싶다면 가진 것을 즐겨라.


가지면 더 갖고 싶은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하지만 죽을 때까지 다 쓰지 못하거나 죽을 때까지 다 갖지 못한다. 인간의 욕망이 끝없는 목마름과 같이 영원히 충족될 수 없다면 불행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을 충족시키기 어렵다면 욕망의 크기를 줄일 필요가 있다.


풍족하지 않으면 궁핍해서, 풍족하면 권태로워서, 끝없는 욕망을 채우지 못해서 시달리는 것이 인간이다.

 

행복한 인생을 결정짓는 진정한 가치는 고통을 잘 견뎌 내는 인내력에 있다. 세상에서 가장 큰 행복을 누리는 사람은 역설적으로 덜 불행하게 살 수 있는 용기가 있고, 고통을 그럭저럭 견뎌 내면서 하루하루를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이다. 어떤 사람이 행복한지 평가하는 기준은 성공, 부, 성취, 출세가 아니라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겪는 고통의 정도다. 따라서 지금 고통이 없다면 지상에서 가장 큰 행복을 누리는 셈이다. 세상에 대해 큰 기대를 하지 않으면, 무엇인가 가지려고 질주하지 않으면 괴로운 일은 막을 수 있다.
 
열 가지의 행복을 추구하지 말고 한 가지의 고통을 피하도록 해야 한다. 소극적인 행복론의 핵심은 고통의 원인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즉 쾌락을 적극적으로 추구할 것이 아니라 고통을 줄여 나가는 것이 행복을 위한 일이다. 특히 건강에 대해서 병을 예방하는 일이 쾌락을 추구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선량하고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격을 지닌 사람은 몹시 궁핍한 상황에서도 만족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인색하고 시기심 많고 못된 성격을 지닌 사람은 아무리 거대한 부를 쌓아 올려도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


낙관적인 사람은 고난에서 기회를 보고, 비관적인 사람은 기회에서 고난을 본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욕망)과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능력)을 분별하는 자기 인식이 행복의 전제 조건이다.


행복이란 자신의 개성과 소질에 맞도록 노력함으로써 다다를 수 있는 만족감이다. 이를 위해 자신이 성취하고자 하는 것 가운데 자신에게만 적합하고, 자기만이 할 수 있고, 자기에게만 즐거운 것을 알아야 된다. 자신의 성격에 맞는 일을 찾아 올바른 선택을 하는 것이 행복을 위한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다.


인간이 방대한 지식을 늘린다고 해도 고통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마련되지 않고, 오히려 과거에 대한 기억과 미래에 대한 예견으로 불행감을 더할 뿐이다. 쾌락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모든 행복이 환상처럼 현재가 아니라 미래에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죽음 자체보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고뇌의 더 큰 원인이 되듯이 인간이 겪는 고통의 대부분은 상상력, 회상과 예상이라는 지성 활동에서 비롯된다. 많이 알수록 불행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지식은 쓸모가 없다. 행복은 지식에 비례하지 않는다.


우리의 행복이나 불행과 관련한 모든 일에 대한 상상력을 억제해야 한다. 지나친 상상력과 추측, 기억은 불행의 씨앗이다. 고통스러운 현실을 피해 행복을 미래에 두지 말고, 과거의 고통에 너무 집착하면 안된다. 


무엇보다도 인간은 지나간 일과 다가올 일을 생각한다. 그래서 모든 일이 크게 증폭되어 나타나는 바람에 걱정이나 두려움, 희망이 실제의 쾌락이나 고통보다 훨씬 커진다. 


과거의 행복에 매달리지 말고, 미래에 행복을 미루지 마라.


“우리 인생의 장면들은 거친 모자이크와 같다. 가까이서 보면 제대로 알아볼 수 없고 멀리서 봐야 그 아름다움을 알 수 있다.”


“건강한 거지가 병든 왕보다 더 행복하다.” 
요즘 많은 사람이 돈과 건강을 맞바꾼다. 건강을 희생하면서까지 다른 것을 추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인간의 행복은 대부분 건강에 의존한다. 건강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다른 어떤 것도 즐거움이 될 수 없다. 몸이 일단 건강해야 기분도 좋고 웬만한 어려움을 잘 견딜 수 있다.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어서 행복한 것이다.

 

마음의 평정을 찾는 네 가지 방법. 
첫째, 불필요한 인간관계를 정리하라. 
둘째, 질투를 경계하라. 
셋째, 큰 희망을 걸지 마라. 
넷째, 세상에는 거짓이 많다는 점을 알아라.

나를 얽매는 것에서 자유로워질 때 평화로운 고요함을 느낄 수 있다.

마음의 평온이 행복이라면 마음을 ‘잔잔한 호수’처럼 유지할 필요가 있다. 외부의 자극도 줄여야 되지만 비교하는 감정, 시기심, 질투, 지나친 기대와 희망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마음을 요동치게 하는 것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의 평온은 고통이 없는 상태다. 현명한 인간은 무엇보다 고통이 없는 상태, 괴롭힘을 당하지 않는 상태, 안정과 여유를 얻으려고 애쓴다. 우리도 욕망의 흐름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때론 관심도 없이 세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주변을 비우고, 마음을 비울 때 더 좋은 것이 찾아온다.
 
 


자연과 예술은 우리를 해방시킨다.


정신력이 압도적으로 발달한 사람은 따분함을 모르며 늘 새로운 관심과 풍부한 생각에 활기차고 의미 있는 생활을 즐긴다. 더 배우고 연구하고 생각하려는 욕구가 강할수록 여가 시간에 혼자서도 맘껏 자유를 즐길 수 있다.


사람들과의 만남을 줄이고 늘 책을 가까이 하고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키우기를 권한다. 기회가 되면 미술 전시회나 연주회를 찾아서 최고의 예술가가 만들어 낸 작품을 감상하며 인생의 고뇌에서 벗어나는 시간도 가지면 좋다. 혼자서 산행을 하며 자신을 만나는 훈련도 해야 된다. 고독은 나의 진정한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는 벗이다. 


“먹은 것이 육체가 되고 읽은 것이 정신이 되어 현재의 자신이 된다.”


지상에서 가장 큰 행복은 자신의 정신에서 열매를 맺는 것이다. 진정한 사상가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위해 생각한 것만 진정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독자적 사고를 하는 사람은 철학자로서 그들의 삶의 즐거움과 행복은 사유에 있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생각을 영글게 하는 건 다독이 아니라 숙독이며, 독서를 통해 받아들인 타인의 사상을 자신의 사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오랜 사색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너무 많이 먹으면 영양 과잉이 되듯이 책을 많이 읽을수록 독자적인 사고가 줄어들 수 있다. 되새김이 전혀 없다면 남이 간 길을 그대로 따라 걷는 거소가 같다. 더구나 좋은 책을 읽는다고 해서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을 쉽게 획득하는 것은 아니다. 절제하는 독서법이 필요하다.


책으로 그 사람이 걸어간 길은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가 길을 걸으며 무엇을 봤는지 알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눈으로 봐야 한다.
 


좋은 글쓰기의 원칙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쓰는 것이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게 글을 쓰는 것처럼 쉬운 것은 없다. 반대로 중요한 사상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표현하는 것만큼 어려운 것도 없다.” 

자신의 사상을 순수하고 분명히, 확실하고도 간결하게 표현해야 된다. 단순함이 진리의 특징이자 천재의 특징이다.

글이 명료해야 쉽게 읽고, 진솔해야 공감된다.
 


인간은 혼자 있을 때만 온전히 그 자신일 수 있다. 그러므로 고독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자유도 사랑하지 않는 자라고 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는 행복이란 많은 경우 결핍에서 충족으로 넘어가는 ‘짧은 순간’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늘 결핍은 인간에게 고통이지만 충족에서 과잉으로 넘어가면 권태, 지루함의 감정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행복은 그 사이의 짧은 만족의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행복을 즐기는 순간은 찰나와 같이 금방 지나간다. 영원하고 지속적인 행복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그런 작은 행복감에 만족할 수 있어야 된다. 행복은 멀고 크고 높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 가까운 곳에 있다.


행복은 결핍이 채워질 때 느끼는 주관적인 만족감이다.


“네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그리던 내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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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 소유에서 벗어날수록 삶은 더 자유로워진다.
 
 
[본문발췌]
 
부자들을 위해
새 눈에 대해 너절한 글을 쓰는 것은
예술이 아니다. - 잇사


우리의 기본 목표는 다름 아닌 질문을 새롭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또는 우리가 믿고 있는 것에 영향을 받는다. 
우리는 단지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만 본다. 이렇게 보는 것은 일종의 선택 행위다. 선택의 결과, 우리는 우리가 보는 것을 시야의 범위 안으로 끌어들인다. 우리는 결코 한 가지 물건만 보지 않는다. 언제나 물건들과 우리들 사이의 관계를 살펴본다. 우리의 시각은 끊임없이 능동적으로 움직이고, 우리를 중심으로 하는 둥그런 시야 안에 들어온 물건들을 훑어보며, 세계 속에 우리가 어떻게 위치하고 있는지 가늠해 보려 한다.


우리가 어떤 것을 볼 수 있게 되자마자, 타인도 우리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된다. 이렇게 타인의 시선이 우리의 시선과 결합함으로써 우리 자신 역시 가시적 세계의 일부라는 사실을 납득할 수 있게 된다.


이미지는 재창조되었거나 재생산된 시각이다. 그것은 특정한 장소, 특정한 순간의 사물적 어떤 모습 또는 모습들을 본래의 장소 및 시간에서 따로 분리해내 일정 기간 또는 몇 세기 후까지 보존하기 위한 것이다. 모든 이미지는 하나의 보는 방식을 구현하고 있다. 사진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흔히 사진을 기계적 기록이라고 생각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한 장의 사진을 볼 때 우리는 막연하게나마 그 사진이 사진을 찍은 사람의 무한히 많은 시각들 가운데서 특별히 선택된 것이라는 사실을 의식하게 된다. 이것은 심지어 매우 일상적인 가족 스냅 사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사진가의 보는 방식은 주제 선택에 반영되어 있다. 화가의 보는 방식은 캔버스 또는 종이 위에 그가 그려 놓은 것에 의해 재구성된다. 그러나, 비록 모든 이미지가 하나의 보는 방식을 구현하고 있긴 해도, 어떤 이미지를 보고 어떻게 평가하느냐 하는 것은 각자의 보는 방식에 달려 있다.


한 이미지는 X라는 사람이 Y라는 대상을 어떻게 보았는지에 대한 기록이 된다. 


이미지는 문학보다 더 정확하고 풍부하다.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해서 미술의 표현적이고 상상적인 성격을 부정하고 단지 자료적으로만 보려는 것은 아니다. 작품의 상상적 차원이 풍부하면 할수록, 그것을 만든 예술가의 가시적 세계에 대한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가능성은 더 커진다.


우리가 현재를 아주 분명하게 볼 수 있다면, 우리는 과거에 대해 올바른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한 이미지의 의미는 바로 그 옆에, 또는 바로 그 다음에 무엇이 오느냐에 따라서 변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미지가 간직한 권위는 그것이 등장하는 전체에 배분된다.



이미지의 새로운 언어를 다르게 사용할 수 있다면, 이를 통해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다. 그 새로운 언어를 통해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의 경험들을 더 정확하게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말 이전에 보는 행위가 있다.) 이때 경험이란 개인적 경험뿐 아니라, 과거에 대한 우리의 관계라는 본질적인 역사적 경험을 말한다. 즉, 우리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경험, 우리 자신이 능동적인 주체가 될 수 있는 그런 역사를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는 경험 말이다.


스스로의 과거와 단절된 개인이나 계급은 역사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을 수 있는 개인이나 계급에 비해, 선택이나 행동을 함에 있어 훨씬 더 자유롭다. 바로 그 점이 과거의 예술 전체가 이제 정치적 문제가 된 이유 - 단 하나의 이유 - 이다.



광고란 어떤 대상이나 사물에 대한 것이 아니고, 인간의, 사회적인 관계에 대한 것이다. 광고가 약속하는 것은 쾌락이 아니라 행복이다. 즉 다른 사람들에 의해 외부적으로 판단되는 행복이다. 행복이 곧 매력(glamour)인 것이다.


왜 광고는 이렇게 유화의 시각적인 언어에 깊게 의존하게 되었을까. 광고는 소비사회의 문화다. 광고는 이미지를 통해 바로 이 소비사회가 스스로에 대해 갖는 신념을 선전한다. 이 이미지들이 유화라는 언어를 사용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유화란 무엇보다도 사유 재산에 대한 찬양이었다. 그것은 당신이 소유한 것들이 곧 당신이라는 원리에서 나온 미술형식이다.

그러나 이같은 언어로서의 연관성에도 불구하고 광고의 기능은 유화의 기능과는 꽤 다르다. 광고를 보는 구매자와 세계와의 관계는, 유화를 소유한 사람과 세계와의 관계와는 아주 다르다.

유화는 소유주가 자신의 소유물들과 생활방식을 통해 이미 향유하고 있던 무언가를 보여 준다. 그리고 그 자신이 가치있는 인물이라는 느낌을 더욱 확고하게 갖도록 한다. 유화는 기존의 자기 자신이 좀 더 잘난 존재라고 느끼도록 해 준다. 그것은 사실들, 즉 그의 생활의 실제에서 시작되었다. 그림은 그가 실제로 살고 있던 저택의 내부를 꾸며주는 것이었다.


광고의 목적은 광고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딘가 자기의 현재 생활방식이 만족스럽지 못한 느낌을 갖도록 만드는 데 있다. 사회의 일반적 생활방식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사회 안에서의 자신의 개인적 생활방식에 대해 불만을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다. 광고에서는, 만일 그가 광고하는 물품을 구입한다면 그의 생활이 보다 나아질 것이라고 얘기한다. 광고는 그의 현재 상태가 아닌, 그보다 더 나은 다른 상태를 제시한다.


모든 광고는 불안감이 있기 때문에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돈이 전부이고, 돈을 벌어야 불안감이 사라진다. 

광고는 “만일 당신이 아무것도 갖지 못한다면 당신은 아무것도 될 수 없다”라는 두려움을 유발시키고 이를 이용한다.

돈은 곧 삶이다. 돈이 없으면 굶어 죽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또한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의 생활 전체를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은 바로 자본에서 생겨난다는 의미도 아니다. 단지 돈이 모든 인간 능력의 상징, 열쇠가 되고 있다는 의미다. 돈을 쓰는 능력이란 곧 사는 능력이다. 광고의 선전에 따르면, 돈을 쓰는 능력을 잃으면 문자 그대로 체면이 서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 능력이 있어야 사랑받을 수 있게 된다.


광고에 의하면 현재란 불충분하다고 단정적으로 얘기된다. 유화는 영원히 남는 기록이라고 생각되어 왔다. 그림이 그 소유자에게 주는 기쁨 중 하나는 그것이 자신의 현재 이미지를 미래의 후손에게 전해 줄 수 있다는 생각이다. 따라서 유화는 자연히 현재 시제로 그려져 있다. 화가는 실제에서건 혹은 상상에서건 그가 현재 눈으로 보는 것을 그렸다. 반면에 순간적인 쓰임새 때문에 만들어진 광고의 이미지는 미래 시제만을 사용할 뿐이다. 이것으로 당신은 장차 이성의 인기를 한 몸에 모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당신의 관계는 이제 한결 행복하고 빛나는 것이 될 것이다 등등.

광고는 원칙적으로, 그 광고가 팔려고 하는 특별한 상품의 기능을 통해 딴 사람으로 변신하려는 기대를 갖고 있는 노동자 계층에게 호소한다. (신데렐라) 중류층에게 광고는, 그러한 상품들을 구입하면 전체적으로 조화가 잘 된 분위기를 통한 상호관계의 개선을 약속한다. (요술 궁전)


광고는 미래 시제로 얘기하지만, 그 미래의 달성은 끊임없이 연기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광고가 그 영향력을 미칠 수 있으리라고 여겨질 만큼 믿음직하게 보이게 되는 것일까. 광고의 진실성이란 광고가 내건 약속을 충실히 이행했는가로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광고가 주는 환상이 그 광고를 보는 물건을 사는 사람들이 품는 환상에 얼마나 적절하게 들어맞느냐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광고는 본질적으로 현실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백일몽에 적용된다. 

광고가 실제로 제공하는 것과 광고가 약속하는 미래 사이의 간극은, 광고를 보는 물건을 사는 사람 자신이 느끼는 현재의 처지와 그가 되고 싶어 하는 처지 사이에 벌어진 간극과 일치한다. 그 두 간극은 하나가 된다. 그러나 실제 행동과 생생한 경험에 의해서 다리고 놓여져 하나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간극은 매혹적인 백일몽으로 채워지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흔히 노동조건에 의해 또다시 강화된다. 의미 없는 노동시간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끝없는 현재는 꿈속의 미래에 의해서 ‘상쇄돼 버린다.’ 이 미래의 꿈 속에서 노동하는 순간의 피동성은 상상적인 행동에 의해 대치된다. 백일몽 속에서 피동적인 남녀 노동자는 능동적인 소비자로 바뀐다. 노동하는 자아는 소비하는 자아를 선망하는 것이다.

세상에 똑같은 꿈이란 없다. 어떤 것들은 순간적이고 어떤 것들은 지속적이다. 꿈이란 언제나 꿈꾸는 사람의 개인적인 것이다. 광고는 꿈을 제조해내지 않는다. 광고가 하는 일은 단지 우리 각자에게, 우리는 아직 남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지 않고 있지만 장차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해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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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물질 세계의 궁극이지만, 돈의 흐름은 결국 심리 싸움이다.
 
 
[본문발췌]
 
돈에 대한 욕구는 경제적 진보의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위해 사람들은 자신의 창의성, 성실 그리고 위험을 감수하는 것까지 마다하지 않는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차이는 아주 간단히 설명할 수 있다. 커다랗지만 공평하게 나누어지지 않은 케이크와 작지만 공평하게 나눈 케이크, 이때 공평하게 나눈 케이크 조각이 공평하게 나누어지지 않은 케이크의 작은 조각보다도 작다는 것은 자명하다. 어떤 체제가 나은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렸다. 그런데 이 세계가 선택한 것은 커다란 케이크였다. 아마도 자본주의 경제 체제가 인간의 본성에 좀 더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정의에 따르면 백만장자란 자신이 바라는 바를 성취하는 데 있어 어느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 자신의 자본을 가진 사람들이다. 백만장자는 일할 필요도 없고, 고용주 또는 고객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사는 사람이야 말로 진정한 백만장자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살아가는 데 어느 누군가는 50만 달러가, 또 다른 누구는 500만 달러가 필요하다. 이것은 개개인의 성향과 책임져야 할 의무에 달렸다. 음악에 열정을 불태우는 사람들은 골동품 시계를 수집하는 사람에 비해 돈이 적게 들 것이다. 또 혼자 사는지 아니면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돈은 그것을 열정적으로 갈망하는 사람에게 향한다. 그런 사람은 마술사의 조종을 받는 항아리 속의 뱀처럼 돈의 최면에 걸려 있다. 하지만 그럴수록 돈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돈을 뜨겁게 사랑하되 차갑게 다뤄야 한다. 마냥 돈을 쫓으려하지 말고, 오나시스(그리스 선박왕)가 말한 것처럼 돈과 정면으로 부딪쳐야 한다. 상승하는 주가를 뒤쫓기보다 하락하는 주가와 정면 승부를 봐야 하는 주식시장에서는 더 그렇다.


80년에 이르는 내 증권시장 경험에서 내가 단 하나 제대로 배운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즉, 투자는 과학이 아니라 예술이라는 점이다. 


투자란 부와 파산 사이를 오가는 위험한 항해다. 이때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훌륭한 배와 똑똑한 항해사다. 그렇다면 훌륭한 배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돈, 인내 그리고 강심장으로 무장한 배다. 그렇다면 똑똑한 항해사는 어떤 사람일까? 경험이 많고 주체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을 말한다. 발자크는 <우아한 인생>이라는 논문에서 인간을 일하는 인간, 생각하는 인간, 아무것도 안 하는 인간이라는 세 부류로 나누었다. 여기서 순종투자자는 생각하는 인간에 포함된다.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이 투자자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주가의 흐름은 주식을 팔려는 매도자가 주식을 사들이려는 매수자보다 더 급박한지 아닌지에 달려 있다. 주식을 보유한 사람이 심리적 또는 물질적 압박감에 주식을 내놓았는데 돈을 가진 사람은 반대로 사려는 마음은 있지만 꼭 사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주가는 하락한다. 하지만 돈을 가진 사람이 다급하게 주식을 찾는데 주식을 보유한 사람이 주식을 팔려는 심리적, 물질적 압박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주가는 상승한다. 모든 것은 공급과 수요에 달려 있다. 내 모든 주식투자 이론은 여기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상황이 불확실할수록 투자자는 주식투자를 하지 않고, 상황이 확실할수록 주식투자가 늘어난다. 



주식시장이 상승장의 초기에 호황을 누린 뒤 다시 강세장 초기 수준으로 돌아가는 경우는 매우 들물다고 해도 이 시기에는 위와 아래를 오가며 극단적으로 요동친다. 이러한 동요는 중기적 영향 요소들에 의한 것들로 다음의 두 가지 요소가 결합되어 있다. 
첫 번째 요소는 이다. 주식시장에서 돈이란 산소 또는 차를 움직이는 휘발유 같은 것이다. 돈이 없으면 제아무리 미래 전망이 좋고 평화가 지속되어 경기가 좋다고 하더라도 주식 거래가 활발해질 수 없다. 수중에 쓸 수 있는 돈이 없으니 당연히 주식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돈은 주식시장의 엑기스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시장은 돈만 있다고 해서 움직이지 않는다. 두 번째 요소는 심리다. 여론의 투자 심리가 부정적이어서 어느 누구도 주식을 사려고 하지 않는다면 주가가 상승할 수 없다. 돈과 심리, 이 두 가지 요소가 긍정적이어야만 시세가 오른다. 반대로 두 요소가 부정적이면 떨어진다. 한 요소는 긍정적이지만 다른 요소가 부정적이면 트렌드가 중화되어 커다란 동요가 없고 재미도 없는 주식시장이 이어진다. 바로 여기에서 나의 신념이 된 공식이 탄생했는데, 그 공식은 다음과 같다.
돈+심리=트렌드
한 요소가 미약하게나마 다른 한 요소보다 더 강하면 둘 중 어떤 요소가 더 강한지에 따라 주가가 다소 상승하거나 다소 하락한다. 그러다가 둘 중 한 요소가 태세를 전환하여 두 요소가 전부 긍정적이거나 전부 부정적이 되면 급격한 강세장 또는 하락장이 온다.




증시가 호재성 또는 악재성 뉴스에 반응하는 강도를 이해하는 것을 나는 ‘시장의 기술적 이해’라고 부른다. 대다수의 사람들과 달리 시장 기술을 증권수학자들이 고안해낸 차트나 오실레이터, 모형 등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나에게 있어 기술적 이해란 오롯이 다음의 한 가지 질문에 달려 있다. 현재 증권의 대다수가 누구의 손에 있는가?
그런 이유에서 나는 증권투자자를 부화뇌동파와 소신파 두 부류로 분류한다. 소신파는 말 그대로 장기투자자와 단기투자자, 즉 투자자를 지칭한다. 장기적인 측면에서 보면 그들은 증권시장의 승자에 속한다. 그들이 수익을 내는 경우는 부화뇌동파의 덕일 때가 많다. 앞서 소개한 증권을 가지고 노는 게임꾼들이 부화뇌동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부화뇌동파와 소신파의 차이는 무엇일까? 소신파는 프로에센의 몰트케 원수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꼭 필요하고 강조했던 네 가지 요소, 즉 ‘4G’를 가지고 있다. 4G란 돈Geld, 생각Gedanken, 인내Geduld, 그리고 행운Gluck을 의미한다.

돈. 어떤 사람이 돈을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의 여부는 그가 보유한 재산의 규모로 결정되지 않는다. 내 정의를 말하자면, 돈이 있다는 것은 온전한 자기 자본을 보유하고 있으며 부채가 없음을 가리킨다. 이를테면 1만 마르크의 재산이 있는데 그중 증권이 5천 마르크이고 부채가 없다면, 그 사람은 돈이 있는 것이다. 반면 1억 마르크를 보유한 재력가라도 2억 마르크의 주식을 구매했다면 그는 돈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그에게는 그저 마이너스 잔고만이 있을 뿐이고 그 결과는 대부분 부정적으로 끝난다. 어떤 상황이라도 빚을 내서 주식을 사는 것은 금물이라는 것!

생각. 지적으로 거래하는 주식투자자는 자신만의 생각이 있다. 그것이 옳든 그르든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가 거래를 하는 데 있어 심사숙고하는 동시에 상상력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신뢰해야 한다. 전략을 세웠다면 친구나 여론, 일상생활 등에 흔들려서는 안 된다. 그러면 제 아무리 천재적인 사고를 지녔더라도 아무 쓸모가 없어진다. 그러므로 나는 몰트케가 언급한 네 가지 요소에 ‘신념Glaube’이라는 요소를 추가하고 싶다. 
때로는 이 ‘생각’을 ‘상상력’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예컨대 나는 차르 시대의 러시아 채권과 독일의 채권을 이야기하며 투자자에게 있어 상상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설명한 바 있다. 이와 관련해 나는 아인슈타인이 남긴 명언에 절대적으로 찬성한다. “상상력은 지식보다 중요하다!”

인내. “증권거래소에서는 머리가 아니라 엉덩이로 돈을 버는 것이다”라고 나이가 지긋한 프랑크푸르트의 어느 증권거래인이 말한 바 있다. 그 말은 옳다. 아마도 인내는 증권거래소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인내는 가장 흔하게 일어나는 실수를 줄여준다. 인내심이 없는 사람은 애초에 증권거래소 근처에도 가지 말아야 한다. 
투자에 있어서 인내 대한 나의 생각은 ‘투자를 통해서 번 돈은 고통의 결과물이다. 처음에는 힘든 시간을 보내야 나중에 돈이 생긴다’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항상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전개되다가 마지막이 되어서야 생각했던 대로 이뤄진다. 투자의 근거가 되는 분석이 맞다면, 그러니까 올바른 전제에서 시작되었다면 그 투자는 성과를 볼 것이다. 언제? 그것은 사건들, 뉴스, 트렌드 등 한 마디로 계산할 수 없는 요소들이 그때의 근본적인 사실을 어떻게 덮어버리는지에 달렸다. 투자라는 건물의 기초가 튼튼하면 모든 것은 시간문제다. 하지만 대다수의 주식투자자들에게는 그사이에 벌어지는 푹풍과 악천후를 버텨낼 인내와 정신력이 부족하다. 시세가 하락하면 심리적 혼란에 빠져 보유한 모든 주식을 팔아버린다.

돈이 없거나, 심지어 빚이 있는 투자자는 인내할 여력이 없다. 항상 그렇듯 처음에는 모든 것이 기대와 다르게 흘러가고 시세가 예측과 다르게 변하면 그 즉시 포지션을 바꿀 수밖에 없다. 나중에 시장이 그에게 유리하게 바뀌는 순간이 오더라도 말이다. 
자신만의 생각이 없으면 전략도 세울 수 없다. 그런 경우 감정적으로 대세를 따르는 경향을 보이므로 인내를 갖출 수 없다. 이런 투자자는 남들이 파는 대로 따라 팔고, 사는 대로 따라 산다.
인내가 없는 투자자에게는 돈과 생각 역시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빼기 1’의 순간이 올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는 그는 미처 생각을 실현시키기 전에 아주 작은 문제만 등장해도 거기에 휩쓸려 손실을 피하지 못한다. 투자자에게 계속 행운이 따르지 않으면 언젠가는 자신에 대한 신뢰와 생각을 잃어버리게 되고, 결국 인내마저 없어진다.
기술적 이해, 즉 주식시장이 호재성 혹은 악재성 정보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는 오롯이 ‘증권이 소신파 투자자의 수중에 있는가? 아니면 부화뇌동파 투자자의 수중에 있는가?’라는 질문에 달려 있다. 증권이 부화뇌동파의 수중에 있으면 시장에 특별한 호재가 있어도 증시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반면 나쁜 소식에는 붕괴가 올 만큼 즉각적으로 동요된다. 또한 반대로 소신파 투자자들이 증권의 다수를 보유하고 있으면 호재성 소식은 매우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반면 나쁜 소식에는 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이에 나는 전자를 ‘과매수 시장’, 후자를 ‘과매도 시장’이라고 부른다.
 



주식이든 채권이든 원자재이든 혹은 부동산이든 증권시장의 모든 사이클은 동일한 패턴으로 움직인다. 과장국면에 나타나는 상승운동 및 하강운동은 두려움과 무모함 사이에서 춤을 추는 인간의 심리를 비춰준다. 붐과 주가 폭락은 서로 분리할 수 없는 한 쌍이고, 하나가 없는 다른 하나는 절대 떠올릴 수 없다. 경기가 호황에 접어들면 붐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결국에는 어디선가 등장한 바늘에 찔려 터저버린다. 이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며 영원불변의 법칙이다. 붐 없이는 폭락도 없고, 또 폭락 없이는 붐도 없다.

 


거래량이 적은 시장이 상승하거나 하락하면 현 주식 트렌드의 흐름이 지속될 것을 의미한다. 거래량이 늘어나는데도 상승하거나 하락한다면 트렌드가 반전될 전환점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미다.

가장 중요한 암시는 바로 일반적인 의견이다. 언론 보도의 분위기가 몹시 낙관적이면 얼마 전까지 주식에 대해 전혀 모르던 사람들까지 주식시장에 관심을 보인다. 그래서 마지막 비관론자까지 낙관론자로 태세를 전환하면 시장은 강세장, 즉 제3국면의 끝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때 모든 긍정적인 현상이 한 점으로 몰리며 시세는 현실과의 연관성을 상실하며, 주가는 의미 없는 숫자로 전락한다. 그렇게 주가는 아무 생각 없이 누르는 전화번호처럼 되어버린다. 애널리스트들은 주가수익률이나 이익배당금 등의 의미가 과거와 달라졌다고 설명한다. 이제는 미래를 위해 투자를 해야 한다고 말이다. 이들은 산업과 함께 위로 올라가는 속도만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를테면 1980년대 초 <비즈니스위크>가 그랬듯이 극히 부정적인 언론 보도에 마지막 낙관론자마저 비관적으로 바뀌면 시장은 약세장의 제3국면, 즉 하강운동의 끝에 도달한 것이다. 긍정적인 소식마저 주목받지 못하고 비관론자들이 염세론이 광범위하게 확산되는 이 국면에 접어들면 투자자들은 재빨리 매수세에 올라타야 한다. 하지만 이는 말이 쉽지 실제로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마침내 시장이 다시 상승운동을 시작하며 강세장이 진행되어도 그 사이사이에는 항상 주가가 하락하는 구간이 존재한다. 이러한 전개가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다면 상황을 새롭게 검토해야 한다. 진단 결과 그것이 지나가는 흐름이라는 결론이 나온다면 투자자는 상황에 굴복하지 말고 그 자리를 꿋꿋이 지켜야 한다. 하지만 전쟁이나 주요 정치적, 경제적 결정, 금융 정책, 정권 교체 등 미처 가늠할 수 없었던 중대한 변수가 생기면, 제아무리 어제까지 사랑스럽고 값진 것이었더라도 신속하게 결정해서 당장 던져버려야 한다. 다시 말해, 투자자는 언제라도 결정적인 순간이 닥치면 자신의 생각과 계획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신념이 확고하다면 끝까지 버텨야 한다. 단, 상황이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고 갑자기 내가 잘못된 배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최대한 빨리 뛰어내려야 한다는 소리다. 따라서 투자자는 단단한 동시에 유연해야 한다.



투자란 항상 미래에 일어날 불확실한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 특정 사건이 실제로 일어나 ‘기정사실’이 되어버리면 그 사건에 더는 투자할 필요가 없다. 다시 말해, 증권시장에는 미래에 일어날 사건이 미리 반영된다. 



10가지 권고사항

1. 매입시기라고 되었다고 판단되면 어느 나라의 무슨 업종 주식을 매입할지 결정하라.
2. 압박감에 시달리지 않도록 돈을 충분히 확보하고 움직여라.
3. 인내심을 가져라. 모든 것이 당신의 생각과 다르게 진행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4. 확신이 있다면 강경하고 고집스럽게 밀어붙여라.
5. 유연하게 행동하고 자신의 생각에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라.
6.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드는 것이 보이면 그 즉시 팔아라.
7. 때때로 보유한 종목의 가치를 점검하면서 지금이라도 샀을 것인지 검토하라.
8. 대단한 상상이 가능할 때만 매수한다.
9. 예측하기 힘든 리스크까지 전부 계산하라.
10. 자신의 주장이 옳더라도 겸손하라.

 

10가지 금기사항 

1. 무작정 추천을 따르며, 은밀하게 오가는 정보에 귀 기울이지 마라.
2. 파는 사람이 왜 파는지, 또는 사는 사람이 왜 사는지 그들이 알고 있을 것이라 확신하지 마라. 다른 사람들이 더 많이 알고 있는 것 같다고 그들의 말에 신경 쓰지 마라.
3. 손실을 다시 복구하려고 하지 마라.
4. 옛 시세에 연연하지 마라.
5. 주식을 사놓고 언젠가는 주가가 오를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에 그 주식을 잊고 지내지 마라.
6. 지속적으로 미세한 시세 변화를 주시하거나 단조로운 창법의 변화에 기민하게 반응하지 마라.
7. 당장 어디서 수익 또는 손실이 일어났는지 시시때때로 계산하지 마라.
8. 단기 수익을 얻으려고 팔지 마라.
9. 정치적 성향, 다시 말해 지지나 반대에 의해 심리적 영향을 받지 마라.
10. 이익이 생겼다고 교만해지는 것은 금물이다.




코스톨라니의 달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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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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