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역사 가운데 진보와 발전을 통해 더 살기 좋아졌다고 착각하면서 삶의 터전과 생태계를 파괴하며 파멸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레이첼 카슨이 말처럼 자연에 대한 겸손과 자기 자신에 대한 지배력으을 발휘해 지속가능한 삶으로의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인류는 어느 때보다도 자신의 지배력을 발휘해 보여야 할 상황에 처했습니다. 자연에 대한 지배력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지배력을... "

 

 

[본문발췌]

 

 

"과학이 예술처럼 그 사명을 진실하고 온전하게 수행하려면, 대중이 과학의 성취를 그 표면적 내용뿐 아니라 더 깊은 의미까지도 이해해야 합니다." - 아인슈타인, 1939년 뉴욕 박람회 연설 중

 

 

과학은 사랑처럼 그런 초월을 가능케 하는 수단이다. 우리가 하나 되어 온전하게 살아가는 벅찬 경험을 가능케 하는 수단이다. 과학이 자연에 접근하는 방식과 내가 이해하는 사랑의 방식은 같다. 사랑은 우리에게 자신의 바람과 두려움을 상대에게 유치하게 투사하는 대신 상대의 현실을 받아안으라고 말한다. 그런 강인한 사랑은 계속 더 깊이 파고들고 더 높이 오르려고 애쓰기를 멈추지 않는다.

과학이 자연을 사랑하는 방식이 꼭 그렇다. 최종 목적지, 즉 절대적 진리를 가정하지 않는 태도야말로 과학이 성스러운 탐색에 걸맞은 방법론이 되어주는 이유다. 방대한 우주는 - 그리고 그 방대함을 견딜 만하게 만들어 주는 사랑은 - 교만한 자에게는 자신을 열지 않는다. 코스모스는 자신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수시로 상기시키는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자만을 온전히 받아 준다. 우리는 우리가 현실로 믿고 싶은 것보다는 진짜 현실을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나는 우리가 자연을 완전히 경험하지 못하도록 막는 어둠의 커튼을 살짝 들추는 방법을 하나 안다. 그것은 바로 과학의 기본 규칙들이다. 어떤 발상이든 실험과 관찰로 확인해 볼 것. 시험을 통과한 발상만 받아들일 것. 통과하지 못한 발상은 버릴 것. 어디든 증거가 이끄는 대로 따라갈 것. 그리고 모든 것을 의심할 것. 권위에 대해서도. 이 규칙들만 지킨다면, 코스모스는 우리 것이다. 

 

 

인류가 블룸보스 동굴에서 시작해 빛을 타고 별로 항해하게 되기까지 우주력으로 겨우 몇 분밖에 안 걸렸다니. 그렇다. 우리는 인류 역사에서 위험 천만하리만치 결정적인 분기점에 와 있다. 하지만 아직 너무 늦지는 않았다. 우리는 가장 뛰어난 정신들이 품었던 가장 터무니없는 희망들마저 거뜬히 달성할 수 있다는 존재라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해 왔다. 여러분이 이 책에서 곧 만날 과거와 미래의 가능한 세계들, 그리고 곧 듣게 될 영웅적인 탐구자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말해 준다. 우리에게는 기술적 사춘기를 극복하고, 우리의 작은 행성을 보호하고, 시공간의 망망대해를 항해할 안전한 항로를 찾아냄으로써 "땅과 바다와 하늘"에 매인 처지에서 벗어날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의 마음은 무력이 아니라 사랑과 이상으로만 정복할 수 있다. - 바뤼흐 스피노자, <에티카The Ethics>에서

 

 

지금 우리의 처지는 이렇다. 농업이 발명된 지 약 1만 년이 흘렀다. 우리는 코스모스를 알게 되었고, 그곳을 탐험하고자 아장아장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동시에 우리는 근시안적 사고와 욕심으로 우리 문명을 깡그리 무너뜨릴 수도 있는 상황이다. 그런 결과를 피하려면 스스로 변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변할 수 있을까? 우리 종에게는 스스로를 바꿀 능력이 있을까? 아니면 우리 내면에는 어쩔 수 없이 자기 파괴로 내모는 무언가가 있는 것일까?

 

 

철학은 내일의 양심, 미래에의 헌신, 희망의 지식을 가질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아무 지식도 갖지 못할 것이다. -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 <희망의 원리The Principle of Hope>

 

 

뇌는 하늘보다 넓다 / 나란히 놓아 보면 / 뇌 안에 하늘이 쉽게 들어가고 / 더구나 당신까지 드러가니까 // 뇌는 바다보다 깊다 / 푸른 것에서 푸른 것까지 담아 보면 / 뇌가 바다를 흡수하니까 / 스펀지처럼 양동이처럼 // 뇌는 신의 무게와 같다 / 나란히 들어 보면 / 혹시 다르다 해도 그 차이는 / 음절과 음성의 차이 정도일 테니까 - 에밀리 디킨슨

 

 

무언가가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결정적 특징은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이다. 그리고 수준이야 어떻든 조금이라도 의식이 있지 않고서는 그 일을 썩 잘 해낼 수 없을 것이다.

 

 

놔는 아주 좁은 공간에 든 아주 넓은 장소다.

 

 

과학자들이 찾아내려는 코스모스의 자연 법칙이 강력한 것은 그것이 결코 무효화되거나 깨지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 법칙은 우리의 희망과는 무관하게 늘 참이다. 자연 법칙은 특정 장소만이 아니라 우주 전체와 모든 시간에 적용된다. 우리는 다른 세계의 지적 문명과 무엇을 공유할까? 과학과 수학이다. 과학자와 공학자가 쓰는 기호 언어인 수학은 한 문화에서 다른 문화로 메시지가 번역될 때 손실이 없도록 해 준다. 프로그래밍 언어를 비롯한 기호 언어들은 그냥 말보다 정확도가 훨씬 더 높다. 오해의 여지가 더 적다.

 

 

다윈의 연구는 인간이 나머지 생물들과는 다르게 창조되어 그들의 관리자로 선택된 생명계의 왕이 아님을 알려주었다. 인간은 오래된 생명의 대가족에서 뒤늦게 등장해 어쩌다 잘나가게 된 후손일 뿐이다. 다윈은 자신이 발견한 진실을 한 점 의혹 없이 증명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발표했다. 그리고 그는 그 밖의 다른 발견도 해냈다. 그는 만약 모든 생명이 정말로 연관되어 있다면 그 사실에 철학적 의미가 담겨 있으리라는 점을 처음 깨우친 사람이기도 했다.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다르게 창조된 게 아니라면, 당연히 인간과 동물들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공통점이 더 많지 않을까? 의식도, ... 다른 종들과의 관계도, .... 심지어 감정도? 

 

 

다윈은 우주에 인간의 의식이라는 외딴 섬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방식의 생명과 의식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에게 과학은 더 깊은 감정 이입과 겸손을 가져다주는 수단이었다.

 

 

숲 바닥에 숨겨진 세계를 처음 과학적으로 연구한 것도 다윈이었다. 그는 나무의 뿌리 끝이 일종의 뇌처럼 기능해서 감각 정보를 받아들이고 비록 느리기는 해도 나무가 움직이도록 이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는 또 다른 동물들도 우리처럼 즐거움, 고통, 두려움을 느끼는지 알아보고자 그들의 표정을 연구했다. 다윈은 어머니 자연에 깨달음을 간청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해서 얻은 과학 지식은 그가 품은 연민의 바탕이었고, 그 연민을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근거였다.

 

 

저는 우리 세계를 플랫랜드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그렇게 부르기 때문이 아닙니다. 저의 행복한 독자들, 3차원 공간에서 사는 특권을 누리는 당신들에게 우리 세계의 본질을 좀 더 명확하게 알려 드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 에드윈 애벗 애벗(Edwin Abbott Abbott), <플랫랜드(Flatland)>에서

 

 

우리는 광자가 어떻게 입자인 동시에 파동일 수 있는지 아직 모른다. 내가 과학에서 좋아하는 점 중 하나는 과학이 우리에게 모호함을 참아내는 능력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과학은 우리에게 자신의 무지를 겸허하게 받아들이도록 요구하고, 증거가 나타날 때까지 판단을 유보하도록 요구한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변변찮으나마 이미 가진 지식을 활용해 현실의 새로운 언어들을 찾아보고 해독하는 일만은 문제없이 계속할 수 있다. 이 방대한 코스모스에서 우리는 모두 플랫랜더다. 그런 우리가 위를 상상해보려고 노력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찾아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과학이다.

 

 

인류가 의식하는 시간 범위는 농업의 발명과 함께 비약적으로 커졌다. 사람들은 몇 달 뒤의 수확을 바라고 지금 작물을 기르며 장시간 노동을 하기 시작했다. 나중의 이득을 위해서 현재의 만족을 미뤘다. 미래를 계획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애초부터 방랑자였다. 우리는 100킬로미터에 걸쳐 서 있는 나무 하나하나를 다 알고 있었다. 과일이나 열매가 익었을 때 우리는 그곳에 있었다. 해마다 우리는 짐승 무리가 옮겨 다니는 곳을 따라다녔다. ... 우리는 서로에게 의지했다. 혼자 한다는 것은 한곳에 정착하는 일처럼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 칼 세이건, <창백한 푸른 점>에서

 

 

이 거대한 망원경은 과거를 돌아보는 수단이기도 하다. 우리가 우주를 볼 때는 늘 과거의 천체를 보는 셈이다. 빛의 속도는 유한하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아침에 일어나서 해를 볼 때, 그 해는 사실 8분 20초 전의 해다. 다르게 볼 방법은 없다. 태양 빛이 지구까지 1억5000만 킬로미터를 달려오는 데 늘 그 만큼의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우주 이 망원경으로 다른 어떤 세계를 보더라도 역시 과거를 보는 셈일 것이다.

 

 

알쿠비에레 워프 드라이브의 멋진 점이 무엇인가 하면, 우주선이 아니라 우주가 움직인다는 것이다. 알쿠비에레 드라이브 우주선은 중력파를 발생시켜서 자신의 앞쪽에 있는 시공간은 압축시키고 뒤쪽에 있는 시공간은 팽창시켜서 광속보다 빠르게 움직인다. 알쿠비에레 드라이브 자체는 정지한 것처럼 보이지만, 시공간에 잡힌 주름이 그 앞에서는 더 쪼글쪼글해지고 그 뒤에서는 더 넓어진다.

 

 

인류는 어느 때보다도 자신의 지배력을 발휘해 보여야 할 상황에 처했습니다. 자연에 대한 지배력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지배력을. - 레이첼 카슨

 

 

우리 우주는 약 140억 년 전 물질, 에너지, 시간, 공간이 갑자기 등장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때 어둠은 차가웠고, 빛은 뜨거웠으며, 그 양극단이 결합함으로써 물질에 형태와 구조가 생겼다. 우리 태양보다 수백 배 더 무거운 별들이 생겨났다. 그 별들은 폭발하면서 이후 생겨날 세계들에 산소와 탄소를 공급해 주었고, 금과 은으로 장식해 주었다. 죽은 별들은 어둠이 되었고, 그 어둠의 무게는 빛을 비끄러매는 닻이었다. 그리고 그 별들의 수의에서 새 별들이 태어났다. 별들은 함께 어울려 춤추기 시작했고, 그러자 은하들이 생겨났다. 은하는 별을 낳았다. 별은 행성을 낳았다. 그 행성 중 최소한 하나에서, 뜨겁게 녹은 심장의 열기가 솟구쳐 나와서 물을 데웠다. 그러자 먼 별에서 비처럼 쏟아져 내렸던 물질이 생명을 얻어 살아났고, 별의 물질로 만들어진 생명은 결국 의식을 얻어 깨어났다. 그 생명은 땅에 의해 조각되었고, 살아 있는 다른 것들과의 싸움을 통해 조각되었다. 그리하여 커다란 나무가, 많은 가지를 길러낸 나무가 자랐다. 하마터면 여섯 번이나 쓰러질 뻔했지만, 여전히 용케 자라고 있다. 우리는 그 나무의 작은 한 가지일 뿐이고, 나무 없이는 우리도 살 수 없다. 우리는 서서히 자연의 책을 읽는 법을, 자연의 법칙을 배우는 법을, 나무를 보살피는 법을 익혔다. 우리가 코스모스라는 망망대해에서 언제,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는 법을 익혔다. 그리고 코스모스가 스스로를 이해하는 수단이, 별로 돌아가는 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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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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