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생각과 삶의 틀에서 잠깐 물러나 보면 세상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본문발췌]
데카르트가 말했던 것과는 반대로 세상 사람들이 가장 공평하게 나눠 가진 것은 양식(良識)이 아니라 어리석음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안에 있는 어리석음을 보지 못한다. 그래서 다른 것에는 쉽게 만족하지 않는 아주 까다로운 사람들조차도 자기 안의 어리석음을 없애는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서문>
자연은 거칠고 인간에게 적대적임에 반해서 문명은 인간으로 하여금 노력과 시간을 벌면서 행동하게 해준다. 문명은 노동의 굴레에서 육체를 해방시켜 관조의 길을 열어준다. <신안 상품을 구입하는 방법>
사람들이 알고 싶어하는 대상이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에 국한된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게 좋다. 어떤 문제를 놓고 아무리 곰곰이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현재 그 문제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 이상을 결코 알아내지 못한다. <도둑맞은 운전 면허증을 재발급받는 방법>
국가의 돈을 낭비했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낭비가 법률에 따라 행해지는 한. <재산 목록을 작성하는 방법>
처음에 매스 미디어는 우리로 하여금 가사 세계를 현실로 믿게 했다. 그러더니 이제는 현실을 가상으로 여기게 한다. TV 화면이 현실을 많이 보여 주면 보여 줄수록 우리의 일상은 점점 더 영화처럼 되어 간다. 이런 식으로 가다 보면 우리는 몇몇 철학자의 주장과 비슷한 이런 식의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세계에는 오로지 우리만이 존재하며 우리 이외의 다른 모든 것은 신이나 악마가 우리의 눈앞에 투사한 영화일 뿐이라고. <유명인을 만났을 때 반응하는 방법>
<어떤 소프트웨어의 종교를 알아보는 방법>
- 새로운 종교 전쟁이 우리의 현대 세계를 은밀하게 변화시키고 있다. 나는 오래 전부터 그것을 확신해 왔다. 그리고 내가 그런 생각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때마다 이내 좌중의 사람의 공감을 얻게 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져 있다. 그 점에서는 당신도 예외일 수 없다. 한편에는 매킨토시 지지자들이 있고, 다른 편에는 MS-DOS로 운용되는 PC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매킨토시(이하에서는 맥으로 줄여 부르기로 한다)는 가톨릭이고 도스는 프로테스탄트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고 어리둥절해 할 지도 모를 독자들을 위해 더 풀어서 이야기해 보겠다.
- 맥은 예수회의 <연구방법ratio studiorum>이 깃들여 있는 반개혁적인 가톨릭이다. 맥은 까다롭지 않고 사근사근해서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신자가 따라야 할 절차를 차례차례 일러줌으로써 신자로 하여금 어렵지 않게 하늘의 왕국, 아니 문서 인쇄라는 마지막 순간에 도달할 수 있게 한다. 가톨릭의 교리 문답이 그러하듯이 계시의 핵심이 간결하고 알기 쉬운 표현으로, 그리고 화려한 아이콘으로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다. 그래서 지시하는 대로 따라하기만 하면 누구나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어 있다.
- 그에 반해서 도스는 프로테스탄트, 더 정확히 말해서 칼뱅과 프로테스탄트이다. 즉 성서를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는 길을 열어 고민스러운 판단을 요구하고 세심한 해독을 강제하며, 누구나 다 구원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일깨운다. 이 프로그램에 대한 일련의 개인적인 해석 행위가 없으면 컴퓨터 시스템을 작동시킬 수 없다. 사용자는 쾌남아들의 자유 분방한 공동체에서 홀로 떨어져 나와 자기 내면의 강박 관념에 갇힌다.
- 위와 같은 견해에 대해 혹자는 이런 식으로 반박할 것이다. 윈도우즈가 나옴으로써 도스의 세계를 맥의 반개혁적인 관용에 접근시켰다고. 맞는 말이다. 윈도우즈는 영국 국교식의 분립이며, 대성당 안에서 화려한 의식을 거행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도스로 되돌아갈 가능성. 그럼으로써 기이한 판단에 근거하여 많은 것들을 변화시킬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런 식으로 가면 언젠가는 여자와 동성애자들도 사제직에 오를 수 있게 될 것이다(누가 봐도 앵글로 가톨릭적인 윈도우즈 95가 나옴으로써 오늘날의 신학적인 판도가 한결 더 복잡해 졌음은 물론이다).
- 당연한 얘기지만, 맥의 가톨릭적인 성격과 도스의 프로테스탄트적 성격은 사용자들의 문화적이고 종교적인 입장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내가 알아낸 바로는 세상의 고뇌를 다 짊어지고 사는 듯한 엄격한 시인이며 스펙터클 사회의 공공연한 반대자인 프랑코 포르티니도 맥의 신자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둘 중의 어떤 시스템을 사용하든 결국 사용자의 내면에는 이렇다 할 변화가 야기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그런데 정말 우리는 도스의 신자이면서 동시에 전통주의적인 가톨릭일 수 있는 것일까? 만일 셀린(프랑스의 작가, 1894-1961, 대표작으로 소설 ‘밤의 끝으로 가는 여행’, 1932이 있다)이 오늘날에 글을 썼다면 그는 워드로 썼을까, 아니면 워드퍼펙트나 워드스타를 썼을까? 또 만일 데카르트가 다시 태어났다면, 그는 자기의 경쟁자였던 파스칼의 이름을 딴 프로그래밍 언어 즉 파스칼 언어로 프로그램을 짤 수 있었을까?
- 그리고 컴퓨터 운용 환경이 어떤 것이든 우리 시스템의 운명을 은밀하게 결정하는 기계 언어, 그것은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까? 그것은 결국 구약과 탈무드와 카발라 같은 것이 아닐까? 아 여기에도 유대인의 로비가 작용하고 있는 것인가!
인간은 스스로를 쓸모없는 존재로 느끼지 않으려면 무언가에 소속되어야 한다.
제임스 조이스에 따르면, 현현(顯現)이란 추억으로 간직될 만한 어떤 것이 말이나 몸짓이나 생각 속에 갑작스럽게 발현하는 정신적인 현상이다. 어떤 대화, 저녁 안개를 뚫고 홀연히 나타나는 시계탑, 썩은 양배추 냄새, 갑자기 두드러져 보이는 어떤 하찮은 물건, 조이스는 안개 낀 더블린에서 그런 현현들을 마음에 간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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