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아무리 두려워하고 부정하며, 피하려고 해도 모두가 맞닥뜨릴 수 밖에 없는 사실이다.

어쩔 수 없이 닥칠 일, 인생의 마지막이라면 잘 준비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본문발췌]

 

 

죽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생의 마지막 단계이자 자연스러운 섭리입니다. 죽음을 배움으로써 삶에 대한 소중함을 느끼고 주변을 돌이켜볼 수 있는 교양인으로서의 품격을 가질 수 있다.

 

 

인생은 죽음이라는 끝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 죽음이 있기에 삶의 목적을 향해 힘겹더라도 걸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죽음을 생각해보지 않고 피하려고만 한다면 우리는 생을 어떻게 마무리할지 고민할 수 없다. 그러면 막상 죽음이 닥쳤을 때 우리는 비참함과 슬픔에 사로잡혀 아름다운 마무리를 할 기회를 상실하게 된다. 또한 다른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도 감정의 둔마를 겪게 되고 더 나아가서 무관심하게 될지 모른다.

 

 

법적 및 의학적인 의미의 죽음은 사망 원인과 사망 종류를 통해 정의된다. 이 두 가지는 분명 다른 것인데 일반인들은 이를 헷갈리기 쉽다. 우선 사망 원인은 의사의 진단명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위암이다, 간암이다 하는 것은 사망 원인이다. 추락사로 사망했으면 그것이 사망 원인이 되는 것이다. 사망 종류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 째는 자연사, 즉 병사다. 두 번째는 외인사, 즉 외적 원인에 의한 사망이고, 여기에는 알 수 없는 원인에 의한 불상이 포함된다. 우선 자연사 또는 병사는 이해하기 쉽다. 의사가 "돌아가셨습니다"하고 말하면 의사에 따른 질병명이 병의 원인인것이고 병사에 의한 사망이 되는 것이다. 

 

 

의학 기술의 급속한 발달로 현대에는 죽음을 판단하고 대처하는 데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바로 연명의료다. 의학과 의료의 발전으로 그동안 생각하지도 않던 문제가 논쟁의 대상으로 떠오른 것이다. 중환자 의료의 발달로 치명적인 상황에 빠진 환자를 상당수 살려낼 수 있게 되었으나, 이면에는 더 이상의 의료가 소용없는 경우 이를 중지하고자 할 때 그 절차와 시기가 명확하지 않다는 문제를 함께 가져왔다. 즉 이제는 자연스럽게 죽음으로 가는 단계라고 보는 졸음의 단계, 혼수상태를 무한정 연장할 수 있다. 의학적으로 그 소멸의 상태를 중단시켜 심장을 계속 뛰게 할 수 있고 호흡을 계속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말기암 환자라든지 식물인간 상태를 겪는 뇌질환 환자 등에게도 생명 연장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렇듯 우리에게는 현재 연명의료로 발생하는 그레이존gray zone, 즉 삶과 죽음 중 어느 영역에 속하는지 불분명한 중간 지대의 존재가 새롭게 부상했다. 이외에도 과학과 기술이 발달로 우리는 죽음에 관해 새로이 고려할 사항이 많아진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내적 요인이나 외적 요인이 생체에 작용하면 여러 반응계가 작동해 생체는 동적 평형 상태를 유지하므로 이른바 반응계가 작동한다. 그러나 내적 또는 외적 요인이 생체의 항상성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벗어나면 동적 평형 상태는 깨지고 생명 활동은 완전한 정지를  향해 불가역적인 변화를 시작한다. 즉 자극에 대한 반응성이나 운동성은 감소하고 약해져서, 결국에는 대사 기능도 영원히 없어지는 것이다. 이 상태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죽음permanant cessation of vital reactions of individual이다.

 

 

법의학자는 이러한 사람의 죽음을 세포사, 장기사, 개체사, 법적 사망의 단계로 분류한다. 개체의 죽음에는 우선 전신의 생명 기능이 극도로 약해져서 객관적으로 살아 있다는 징후를 증명하기 어려운 상태인 가사 상태가 선행하게 된다. 순차적으로 주요 장기인 순환계통, 호흡계통, 중추신경계통의 심장, 페, 뇌 특히 뇌간 가운데 어느 하나가 불가역적으로 기능을 멈추면 개체는 반드시 생명 활동을 영구히 종지終止하게 되는 데 이를 장기사라 한다. 장기사는 심장의 박동이 종지해 결국 개체가 죽는 심장사, 호흡 정지가 먼저 나타나는 페사, 뇌 특히 뇌간의 기능이 종지하는 뇌사로 다시 분류하기도 한다. 이 중 심장사와 폐사는 오래전부터 죽음의 정의로서 사용되어 '심장이 멈추었다' '숨을 거두다' 등으로 표현되어 왔다. 이렇게 장기가 사망하면 그다음에 세포들이 사망하게 된다. 심장이 멈췄다고 해서 세포가 바로 다 죽는 것은 아니라서 사망 직후에는 각막이라든지 뼈를 이식할 수 있다. 이러한 장기가 불가역적으로 정지하면 개체로서 생명 활동은 필연적으로 종지하는데 이를 개체사라 한다. 이러한 개체의 죽은 바로 한 개인의 죽음으로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사망을 일컫는다. 

 

 

만약 환자가 알려달라고 했는데도 알려주지 못한 상태에서 환자가 혼수상태에 빠져 연명의료에 돌입하게 되면, 실제로 환자는 자신의 치료에 대한 결정권을 한번도 행사하지 못한 것이 된다. 그리고 그 결정은 가족들의 몫이 된다. 결국 환자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병원 장례 시스템을 이용하게 되는 것이다. 1970년대 후반까지만 하더라도 집에서 사망하는 사람이 전체 사망자의 30~40퍼센트를 차지했고, 집에서 장례식을 치렀다. 그런데 지금은 당연히 모든 사람들이 마지막 순간에 병원에 간다. 왜 그렇게 바뀌게 된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테지만 우선은 죽음이라는 것에 대한 우리의 본능적인 거부감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죽음과 우리의 삶을 별개로 떨어뜨려놓고자 하는 의식이 발동한 것이다. 죽음은 병원에서 해결하는 것으로 타자화시키고 우리는 죽음과의 거리두기를 통해 조금 더 죽음으로부터 안전한 삶의 공간에 남아 있고자 하는 것이다. 또한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라 병원에서 마지막을 보내는 것이 경제적으로도 합리적인 선택이기 때문에 병원이나 장례식장을 이용하게 되었다. 이처럼 현대의 타자화된 죽음 때문에 죽음이 한 인간의 고유한 영역으로 존중받지 못하고 시스템 안에 매몰됨으로써 매우 복잡한 문제들이 발생하게 된다.

 

 

우리가 자살에 대해 갖고 있는 상식, 즉 죽고 싶어 죽는 것이라거나 즉흥적인 판단의 결과라는 것은 모두 틀린 말이다. 세상에 진정으로 죽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는 법이다. 죽음의 이유는 모두 각자의 삶 속에서 찾아야 한다.

 

 

자살의 원인에 대해서는 크게 세 가지 카테고리로 분류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다른 사람에게 짐이 된다는 부채 의식인데, 실제로 짐이 되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본인이 그렇게 느끼는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노인 자살이 많다. 지금 노인 세대들은 남에게 신세 지기를 싫어하고 독립적으로 살아온 세대이기에, 프랑스 같은 선진국들의 노인들이 국가의 자원을 당연히 여기는 것과 달리 정부에 아무 기대도 하지 않는다. 그러한 상황에서 노후에 자신이 누군가에게 짐이 된다고 생각하면 이를 심리적으로 힘들어하는 경향이 있다. 두 번째 자살 원인으로는 소속감 부재와 그에 따른 커뮤니케이션의 부재를 들 수 있다. 소속감이 없어지면 다른 사람과의 소통이 단절되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때 극심한 소외감으로 우울증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마지막 세 번째 원인은 죽음에 대한 무감각적인 학습이다. 이것은 사회적 역할이 방기되어서 일어나는 현상이기도 할 텐데, 자살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문제의 해결책으로 결정하는 것이다.

 

 

"I see it now. This world is swiftly passing! 이제야 깨달았도다. 생이 이렇게 짧은 줄을!" - <마하바라타> 중 카르나의 대사

 

 

"죽음은 서늘한 여름과 같다. 과거에도 사람들이 나를 오해했고, 현재도 사람들이 나를 잘못 알고 있고, 미래에도 사람들이 아마 나를 잘못 알고 있겠지만, 나는 그것이 두렵지 않다." - <신삼국지>라는 드라마에서 조조의 마지막 유언

 

 

"나의 몸은 이슬에서 와서 이슬로 사라진다. 나니와의 영화도 꿈속의 꿈이런가."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마지막 말. 나니와(지금의 오사카)

 

 

과거와 현재의 죽음 사이에는 한 가지 다른 점이 생겼다. 바로 예감이다. 예전에는 서서히 노화가 시작되어 늙어가다가 어느 순간 생의 기미가 푹 꺼지는 지점이 찾아왔고, 주변 사람들은 이것을 인식할 수 있었다. '아, 이제 돌아가시겠구나' 하고 말이다. 노년층 중에는 부모님이나 할머니, 할아버지의 죽음을 예감하고 어느 정도의 심리적인 준비를 마침 후 돌아가신 것을 확인하고 장례를 치렀던 기억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예감이라는 것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다. 그래서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문제는 과거와는 매우 다른 양상을 보인다. 과거에는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죽음은 서늘한 여름과 같다"는 말도 할 수 있었고, "세자는 몸이 허하니 상중이라도 고기를 꼭 먹어라"라는 말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마음에 품었던 이야기를 남길 틈도 없이 병원에서 아무런 준비나 의식 없이 마지막 생을 보내게 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처럼 급작스러운 죽음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게 된다.

 

 

죽음은 실패가 아닌 자연스러운 질서. 죽음에 관한 태도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해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죽음을 삶의 자연스러운 끝, 자연의 마지막 질서이자 나의 스토리의 마지막 종결로 보는 태도다. 이것을 중립적 수용neutral acceptance 자세라고 한다. 그런데 종교적인 내세관을 가진 사람들은 또 다른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이들은 행복한 내세에 대한 믿음으로 접근적 수용apporach acceptance 자세를 보인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태도는 죽음에 관한 가장 안 좋은 자세라고 여겨지는데, 바로 죽음을 고통스러운 삶의 탈출로 받아들이는 탈출적 수용escape acceptance 자세다. 이는 사망 전 신체적 고통 등에 의해 유발될 수도 있으나, 이렇듯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자세로는 결코 행복한 죽음을 맞기는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생을 하나의 여정 또는 작품이라고 본다면 죽음은 마지막 종착지 또는 스토리라고 할 수 있다. 즉 나만이 완성할 수 있는 내레이션인 것이다. 그런데 현재의 죽음은 의사의 내레이션이 되고 말았다. 내 인생을 내가 끝내야 하는데, 인생의 결정권이 생판 모르는 의사나 가족에 의해 행사되고 있다. 물론 그것을 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럼에도 각자의 삶은 각자의 소유이고 스스로가 결정권자여야 한다는 기본 원칙에서 본다면 연명의료는 현대 의학에서 가장 큰 문제다.

 

그리고 "가족과 함께" 죽음을 맞고 싶다는 소망도 병원 중환자실에 들어가는 순간 사라지게 된다. 사고가 아닌 암이나 뇌혈관 질환, 심혈관 질환을 앓는 환자라면 중환자실에서 가족과는 떨어진 상태로 홀로 죽음을 맞을 가능성이 높다.

 

 

하버드 의과대학 보건대학 교수인 아툴 가완디의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책이 있다. 인간다운 죽음을 강변하며 무의미하고 고통스러운 연명의료에만 급급해하기보다 삶의 마지막 순간을 과연 어떻게 인간답게 살아갈 것인지 돌아보는 것이 이 책이 던지는 메시지다. 인간다운 죽음이란 일방적으로 병원에서 제시하는 해결책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선택을 행사하는 것을 뜻하는데 이러한 선택을 현명하게 할 수 있도록 이것저것 안내자 역할을 하는 것이 병원 본인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삶은 유한하기 때문에 그처럼 찬란한 칭송을 받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토록 찬란한 내 삶의 모험 같은 스토리, 그 마지막이 어떻게 마무리되어야 하는지도 지금 건강할 때 조금은 치밀하게 계획해두는 것이 찬란한 삶을 끝까지 빛나게 하는 방법이지 않나 싶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지금 이 순간을 낭비 없이 꽉 채우는 온전한 현재의 삶을 사는 것! 삶의 마지막 여정이 죽음이라는 사실을 담담히 받아들여야먄 현재 우리의 삶을 온전하게 살 수 있다.

 

카르페 디엠Cape diem! 현재를 즐겨라!,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삶의 마지막 순간에 자신이 어떠한 모습이기를 바라는지 끊임없이 묻고 답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삶은 더욱 풍성해지고 깊은 의미를 품는다.

 

 

죽음을 준비하는 활동이란 특별하지 않다. 삶을 열심히 사는 것이 곧 좋은 죽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삶이 열심히 사는 삶일까? 평소 많은 죽음을 실제로, 또 기록으로 보면서 죽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으며, 이를 통해 삶 속에서 죽음을 준비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 첫째, 사랑하는 사람에게 평소 사랑한다는 말을 직접 그리고 자주 해야 한다. 죽음은 급작스럽게 찾아오기도 하기에 꼭 주변에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평소에 표현해야 한다.
  • 둘째, 죽기 전까지 자신이 진정 하고 싶었던 일, 즉 꿈꾸고 있던 일을 해야 한다. 마지막 순간 삶의 아쉬움이 어찌 없을 수 있겠냐마는 자신이 평소 하고 싶었던 일을 지금 당장 하지 않는다면 더 큰 후회가 남을 것이다.
  • 셋째, 내가 살아온 기록을 꼼꼼히 남겨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남겨줄 자산이 있었야 한다. 자산은 꼭 돈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삶에 대해 주변에 알려주고 싶은 것 모두를 의미한다. 자신에 대한 기억을 사후에도 오랫동안 가졌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있다면 이를 기록해 꼭 전하기를 권장한다.
  • 넷째, 자신의 죽음을 처리하는 장례 등에 필요한 최소한의 돈을 모으기 위해 경제 활동을 지속적으로 하기를 바란다. 어느 정도 금전적인 준비를 해두는 것은 사망 후 남겨진 가족들에게 부담이 되지 않으면서 스스로 죽음의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본다.
  • 다섯째, 지금 건강하다면 건강을 소중히 여기고 더욱 건강해지기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제 건강이란 질병이 없는 최선의 몸 상태가 아니라, 자신의 일상을 유지할 수 있는 상태라고 재정의되고 있다. 즉 죽음을 준비하는 것은 죽기 직전까지 자신의 평상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다. 우리는 언젠가는 죽는다. 만약 삶의 마지막에 엄청난 후회를 하며 세상을 떠난다면 죽음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비참함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품위 있는 죽음이란 죽음이 두렵지 않은 상태의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죽음은 생명체의 필연적 과정이다. 사실 철학, 과학, 종교는 죽음에 대해 각기 다른 해석을 내놓고 있지만 죽음의 본질은 생명체의 소멸이다. 그러므로 모든 생명체는 소멸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본다. 그런 후 대척점에 있는 삶을 치열하게 끌어안은 인생을 산다면, 그러한 사람에게 품위 있는 죽음이 가능하다고 본다. 그러한 사람만이 삶의 마지막 과정에서 자신이 존엄하게 어떤 방식으로 사망할지 고민하고 준비할 수 있으며, 자신만의 내러티브로 인생이라는 마지막 장을 서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죽음의 과점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러나 늘 죽음을 인식하고, 그에 따라 유한한 삶에 감사하며, 자신과 주변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마지막 죽음의 과정에서 선택할 여유를 갖게 된다. 이러한 죽음이 곧 품위 있는 죽음이 아닐까. 우리 모두 죽음이라는 주제에 대해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이에 대해 깊게 생각하며, 지금 사유하고 있는 나의 삶에 감사하며 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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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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