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고통을 돈벌이 수단으로 활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공정한 목격자의 한 사람으로 타인의 고통을 알리고 예방하고 치유하는데 역할을 해야 할 사람들이 권력과 자본의 앞잡이가 되어 소설쓰듯 이야기를 지어내 일반 대중을 왜곡과 편향으로 이끄는 일부 기자들과 책임과 윤리라곤 나몰라라 하는 일부 언론!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

 

 

[본문발췌]

 

 

타국에서 발생한 재앙을 구경하는 것은 지난 1세기하고도 반세기 동안 (오늘날의) 언론인과 같다고 알려진 전문적인 직업여행자들이 촘촘히 쌓아올린 본질적으로 현대적인 경험이다. 오늘날 우리는 거실에서도 전쟁을 구경할 수 있게 됐다. 다른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정보, 이른바 '뉴스'는 비참한 모습을 시청자들의 눈에 내던져 동정심이나 격분, 그도 아니면 찬성 같은 반응을 자아낼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분쟁과 폭력을 대서 특필하기 마련이다.(헤드라인뉴스의 케케묵기 그지없는 지침을 보자면 다음과 같다. "피가 흐르면 앞쪽에 실어라") 전쟁이라는 재앙을 둘러싸고 끊임없이 쏟아지는 정보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는 이미 19세기 말부터 쟁점이 되어 왔다.

 

 

포토저널리즘 작가들의 사명. 전쟁의 시기에서든 평화의 시기에서든, 광신적 애국주의의 편견에서 벗어난 채 공정한 목격자의 한 명으로서 자신들이 활동하던 시대를 기록할 것.

 

 

사진 이미지도 누군가가 골라낸 이미지일 뿐이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구도를 잡는다는 것이며, 구도를 잡는다는 것은 뭔가를 배제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사진에 손장난을 치는 일은 디지털사진과 포토샵이 등장하기 훨씬 이전에도 있었다. 사진이 부정확할 가능성도 늘 존재해 왔다. 회화나 데생은 그것을 제작했다고 알려진 예술가가 직접 제작한 것이 아니라고 밝혀질 때 위조품이라고 판명된다. 그러나 사진(아니면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에서 볼 수 있는 영상기록)은 그것이 묘사하려고 했다는 장면을 둘러싸고 뭔가 관람객을 속였다는 사실이 밝혀질 때 위조품이라고 판명된다.

 

 

시간이 지남에따라, 연출됐던 그토록 많은 사진들이 그 순수하지 못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증거가 되어버렸다. 대부분의 역사적 증거들이 그렇듯이 말이다.

 

 

전쟁이 점점 더 적을 추적하는 정밀한 광학 장치들로 수행되는 행위가 되어갈수록, 전선에서 비군사적인 목적으로 카메라를 사용할 수 있는 조건도 점점 더 엄격해졌다. 사진 없는 전쟁, 즉 1930년 에른스트 윙거가 관찰했듯이 저 뛰어난 전쟁의 미학을 갖추지 않은 전쟁은 존재하지 않는다. 카메라와 총, 그러니까 피사체를 '쏘는' 카메라와 인간을 쏘는 총을 동일시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전쟁을 일으키는 행위는 곧 사진을 찍는 행위인 것이다. 윙거는 이렇게 썼다. "위대한 역사적 사건을 매우 꼼꼼히 보존하려는 행위와 자신이 지닌 무기로 적들의 위치를 정확히 몇 초, 몇 미터 단위까지 추적해 그들을 섬멸하는 행위는 모두 똑같은 사고방식에서 수행된다."

 

 

미국이 자신들의 권력에 저항하는 무수한 적들에 맞서 원격으로 전쟁을 지휘하는 이 시대에는, 대중들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보여주지 말아야 할 것인가를 둘러싼 정책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온다. 텔레비전 뉴스 생산자들과 신문, 잡지의 사진 편집자들은 매일같이 주저하면서도 대중들이 알아야 할 범위를 놓고 의견의 일치를 봐야 한다. 때때로 그들의 결정 사항은 '훌륭한 감식력,' 즉 특정 기관이 앞장서 주장할 때에는 흔히 억압적인 것이 되어버리는 일종의 기준에 대한 판단이 되기도 한다.

 

 

대중에게 공개된 사진들 가운데 심하게 손상된 육체가 담긴 사진들은 흔히 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 찍힌 사진들이다. 저널리즘의 이런 관행은 이국적인(다시 말해서 식민지의) 인종을 구경거리로 만들던 1백여 년 묵은 관행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국가론> 제4권의 한 구절, 플라톤은 이 구절에서 부끄럽기 그지없는 욕망이 이성을 압도하게 되는 경위, 그래서 자아가 자신의 본성 가운데 하나인 욕망에 화를 낼 수밖에 없는 경위를 소크라테스가 어떻게 설명했는지 보여준다. 플라톤은 심적 기능(영혼)이 이성, 노여움이나 격정, 욕구나 욕망, 이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움직인다는 이론을 개진했다. 이 이론은 초자아, 에고, 이드로 구성된 프로이트의 도식을 예견케 해준다.(차이점이 있다면, 플라톤은 이성을 맨 윗자리에 올려놨고, 의분으로 대변되는 양심을 한가운데에 놓았다는 점이다).

 

 

에드먼드 버크... "내 확신에 따르면 사람들은 현실의 불행과 타인의 고통을 보면서 얼마간, 그것도 적지 않은 즐거움을 느낀다"

윌리엄 해즐릿... "우리는 왜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화재 사건이나 충격적인 살인 사건을 다룬 신문 기사를 늘 읽곤 하는가? ... '불행에 대한 사랑,' 잔악함에 대한 사랑은 연민만큼이나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타인의 고통의 관점... 고통을 희생에, 희생을 정신적 고양에 결부시킨다. 따라서 고통을 뭔가 잘못된 것이라거나 불의의 사건, 혹은 일종의 범죄로 여기는 감수성, 즉 고통을 고쳐야 할 무엇, 거부해야 할 무엇, 사람을 무력하게 만드는 무엇으로 여기는 현대의 감수성에는 낯설기 그지없는 관점이다.

 

 

사진이 먼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고통을 우리 눈앞에 가져온다는 걸 알았다고 해서 도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흔히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이 자신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 사람들은 타인의 시련, 그것도 쉽사리 자신과의 일체감을 느낄 법한 타인의 시련에 관해서도 생각하지 않으려 하는 듯 하다. ... 자신이 안전한 곳에 있다고 느끼는 한, 사람들은 무관심해지기 마련이다.

 

 

감정을 무디게 만드는 것은 수동성이다. 냉담한 것으로, 혹은 도덕적으로나 감정적으로 무감각한 것으로 묘사된 상황은 따지고 보면 감정으로 가득 차 있기 마련이다. 분노의 감정, 좌절의 감정으로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바람직하다고 여길 수 있는 감정일지라도 연민을 자아내기에는 너무 단순할 수도 있다. 어떤 이미지들을 통해서 타인이 겪고 있는 고통에 상상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텔레비전 화면에서 클로즈업되어 보여지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볼 수 있다는 특권을 부당하게 향유하는 사람들 사이에 일련의 연결고리가 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비록 우리가 권력과 맺고 있는 실제 관계를 또 한번 신비화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 주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이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는 고통스런 이미지들은 최초의 자극만을 제공할 뿐이니.

 

 

사진으로 찍혀 보여진 바가 전혀 없는 사건보다는 사진을 통해서 널리 알려진 사건이 훨씬 더 현실적인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으나, 사진에 찍힌 사건도 반복적으로 노출되다보면 결국 점점 덜 현실적인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 <사진에 관하여>

 

 

사람들이 지나치게 자극을 받게 되면 "정신적 분별력이 무뎌질" 뿐만 아니라 "정신이 미개하다고 할 만큼 무감각해지는 상태에 빠지는" 결과가 빚어진다.

 

 

'매일, 매달, 혹은 매년 신문지상에 인간의 사악함이 빚어낸 가장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소식이 실리지 않을 때가 없다. .... 처음 줄부터 끝줄까지, 모든 신문들은 공포에 질릴 만한 소식투성이이다. 군주들, 국가들, 사적 개인들이 저지른 온갖 전쟁, 범죄, 절도, 호색, 고문, 사악한 행위, 온 세상에 판치는 잔악 행위 등등. 문명화된 인간은 매일 이 메스꺼운 전채로 아침식사의 식욕을 돋운다.' - 보들레르 (1860년대 초 자신의 일기)

 

 

<사진에 관하여>에 제시된 견해, 그러니까 상스럽고 소름이 돋을만한 이미지가 무차별로 확산된다면 윤리를 지켜나가며 생생한 감수성으로 각각의 경험에 반응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이 약화될 것이라는 견해는, 이런 이미지의 확산을 보수적으로 비판한 견해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을 다른 어떤 사람의 고통에 견주는 것을 참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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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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